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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주와 나

narrae 2014. 4. 26. 03:56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60억에 이르러도 주관으로 나뿐이다.  이 나란 누구인가.

나만은 나를 알아야 할 터인데 아는 것 같아도 사실은 모른다.  기껏 안다는 것이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사는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나를 알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으로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어리석다고 아니할 수 없다.  나란 우주적 소산(所産)이다.  이 우주가 없었으면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낳은 우주를 모르고는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우주의 주체인 실재(實在)와 나와의 관계가 밝혀져야 나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을 학문화시킨 것을 우리는 종교라 한다.  종교의 경전 맨 첫머리에 반드시 우주론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종교란 우리들 각자의 의식에 눈뜨는 장(場)인 우주현상의 배후 내지 그것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뜻한다"(아놀드 토인비).

"이성(理性)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와 사람과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제 모든 사람의 우주에 대한 관계는 동일하기에 이 관계를 설정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하나되게 한다.  사람들이 하나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다다를 수 있는, 육체. 정신적으로 최고의 행복을 준다.  종교란 인간과 무한(無限)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톨스토이)

그 우주론이 얕고 깊고는 둘째 문제이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우주인으로서의 자각이 중요한 것이다.
예레미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그가 목소리로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우둔하고 무식하도다"
(예레미아 10 : 12~13)

우리가 우주인의 관념을 가진다면 주소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우주에 산다고 하면 그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우주공간에 태어난 것으로 알면 어디에서도 잘 수 있고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적어도 태극천하(太極天下) 그 어디에 갖다놓아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우주를 삼킬 듯이 돌아다녀야지 집 없다 걱정, 방 없다 걱정, 병 난다 걱정, 자리 없다 걱정, 그저 걱정하다가 판을 끝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우주여행가가 되어 훨훨 돌아다닌다고 꼭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의 불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갸 문제다.  어떤 이(칸트)는 일생동안 고향에서 사십리 밖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생각의 불꽃이 우주의 주인이 되면 그것으로써 우주인으로 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오늘의 종교는 어떤가.
기독교, 불교, 유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가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도 않는다.  천문학자와 아이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같은 우주물리학자들에게만 우주를 맡기려 한다.  그들은 우주의 일부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주 전체와 나와의 관계를 정립할 생각조차 못한다.  우주 전체와 나와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밝힌 이가 예수. 석가. 공자. 노자 같은 성현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종교 본연의 의미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엉뚱한 복(福) 타령만 한다.  화복(禍福)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복을 사고 팔기에 여념이 없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화에는 복이 붙어 있고 복에 화가 엎드려 있다"고 하였다.

"지금 세상사람들은 아무런 신앙도 없이 살고 있다.  일부 교양 있고  부유한 소수인은 교회의 암시(暗示)에서 풀려나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모든 신앙을 어리석은 짓으로 보거나 또는 대중 위에서 권세를 휘두르는 데 유리한 무기로 본다.  이와는 달리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신앙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가 교회의 최면에 걸려 신앙의 형태로 암시되는 것을 맹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우주에 있어서 사람의 좌표를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아리송하게 한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무엇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소수와 교회의 최면술에 걸려 있는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두 부류의 상호관계로 오늘의 소위 종교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톨스토이).

우주의 실재(實在)와 나와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어서는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밖으로 멀리멀리 나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밖길은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우주를 벗어나 무한우주로 광속(光速)보다 몇만배 더 빠른 심속(心速)으로 우주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속한 은하우주에만도 1천억개 이상의 별들이 구름덩어리를 이루고 있어 성운(星雲)이라고 한다.  은하우주와 같은 우주가 1천억개 이상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별의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대 우주의 태극계는 약 1백50억년 전에 우주란(宇宙卵)이란 덩어리(樸)가 터져서 우주 개벽이 이루어졌다고 짐작하고 있다.  이를 대폭발(Big Bang)이라 이른다.  노자의 <도덕경>에 등걸이 흩어져서 그릇이 되었다(樸散則爲器)고 하였는데 박산위성(樸散爲星)이 된 것이다.  우주란이란 박(樸)이 터져서 별이 되는 그 광경을 상상해보라.  불꽃놀이처럼 별구름꽃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졌을 것이다.  이 별불꽃놀이에 비하면 사람들이 쏘아올리는 불꽃놀이란 소꿉장난도 못된다.  대우주의 별구름 불꽃놀이는 1백50억년을 이어져오고 있다.  블랙 홀(black hole)이니 화이트 홀(white hole)이니 하는 것이 바로 이 불꽃놀이의 연속이요 준비다.  이것이 불경에서 말하는 수많은 꽃으로 장엄하다는 화엄(華嚴)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

성운단(星雲團)의 대우주가 장엄하지만 그 성운단들을 포용하는 허공(虛空)이야말로 무한광대(無限廣大)의 신비가 아니겠는가 !   밖길로 가서 이르는 곳은 무한의 허공이 마지막이다. 
불경에서 허공을, 노장(老莊)에서 에서 무(無)를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의 근원은 허공이요 무(無)이기 때문이다.  공(空)과 무(無)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다.

아주 빈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야말로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 허공이 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빈탕, 한데, 허공이다.  백간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허공인 하나님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타고르는 <인간의 종교>에서 "진리는 형이상학에 의해 탐구된 무한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나란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다.  무한허공에서는 먼지 한알만한 은하우주이고 은하우주에서는 먼지 한알만한 지구이고 지구에서는 먼지 한알만한 나이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나란 있다고 하기가 쑥스럽고 부끄럽다.  차라리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란 '위이무(位而無)'이다.  이게 나다.

땅 위의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벌레가 이 우주에 없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지구도 달과 같이 생물이 없이 빤빤하게 있다고 해서 무슨 서운한 것이 있는가.  우주조차도 마침내 다 타버린다는 사상이 있다.  우리가 옷에 묻어 있는 먼지 하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인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는가.  똥벌레 같은 인류지만 생각함으로써 사상을 내어놓아 여느 동물과 다르다고 하는데 이 사상(思想)이 문제다.

석가. 노자. 장자는 무극(無極)인 허공에서 우주의 실상(實相)을 보았다.  모든 유(有)는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불생불멸의 허공이 사람의 본성이라면 생멸(生滅)의 유물(有物)은 사람의 가성(假性)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有)를 낳는 무(無)를 그리며 무와 하나되려고 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안길이 있다.  태극우주의 궁극적인 실재(實在)를 찾기 위해서는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 : 21)고 말하였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지성(知誠)을 다하고 정성(精誠)을 다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서 자기의 속알(德)이 밝아지고 자기의 정신이 깨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 같은 세상을 걸어갈지라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나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로는 우선 몸이 있다.  이 몸이 참나인가.  몸사람으로는 호기심과 살맛(肉味)을 찾아다니는 짐승이다.  그래서 몸의 근본은 악과 친하려고 한다.  우리의 몸은 어찌 보면 원수요 감옥이다.  그런데 몸이 성하지 않으면 이중(二重)으로 갇힌다.  우리의 혈육(血肉)이란 이런 것이다.  이건 짐승이다.  몸을 쓰고 있는 한은 별수없이 이런 것이다.  이 몸은 며칠 전에 어쩌다가 부모님의 정혈(精血)로 내가 시작되었으며 실없이 시작했으나 조만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사람이란 우스운 것이다.  잘 먹고 빨래를 잘 내놓는다.  그러면 제가 잘 살거니 한다.  이게 다 꿈지럭거리며 벌레노릇 하는 거다.  몸의 일은 부정이다.  모든 것을 몸을 위해 일하다가 죽어 그만두게 된다면 정말 서운한 일일 거다.  그저 남 먹는 것 남 입는 것에 빠지지 않겠다는 게 살살이(肉體生活)이다.  요새 사람들은 모두 육체의 건강, 수명의 연장에만 신경을 쓴다.

이제 내 살(肉)을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다음에 만나는 것이 맘이다.  맘이 맘을 심판한다.  이것이 반성이다. 
맘은 덧없는 것이다.  심무상(心無常)이다.  나는 예수 믿소 하고는 그 다음에 하는 말은 흔히 '맘 하나만 잘 쓰면 되지'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맘이 덧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하지만 맘이 모든 죄악의 괴수라고도 했다.  "네가 맘의 스승이 되어야지 맘을 너의 스승으로 하지말라" <열반경>고 하였다.  맘에 따라가서는 안된다.  우리 맘속에는 더러운 게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 속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이것은 모순 중의 모순이다.  이게 우리의 착각인 것 같다.  하나님의 성전은 저 위의 나라인데 이 속에 반영되어서 그렇지 우리 속에 정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반영을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다.  맘은 생사(生死)의 제한을 받는다. 

몸의 나도 참나가 아니고 맘의 나도 참나가 아니다.  몸과 맘의 나가 참나가 아니라고 하는 나만 남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 곧 얼나다.

사람은 몸으로는 분명히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얼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태어나서 다른 것을 직. 간접으로 잡아먹고 살지만 얼이 있어 맘속을 밝혀 위로 한없이 솟아나려 함이 인생길이다.
이것이 맘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예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태 7 : 13 ~14)고 하였다.  제나(自我.ego)의 종족보존으로 사는 것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고 얼나의 진리보존으로 사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맘속으로 들어가서 궁극으로 만난 것은 위로부터 온 성령의 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보았다.  보내신 그리스도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에게 산소가 공급되듯이 성령이 공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줄곳 오는 영원한 생명이다.  성령의 나로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이는 아버지시고 성령의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우주의 실재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반드시 몸과 맘으로 된 제나가 참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제나가 참나거니 하고 있으면 참나인 성령은 만나지 못한다.  제나가 거짓나임을 알 때 성령이 온다.  이를 회개(悔改)라 회심(悔心)이라 견성(見性)이라 자각(自覺)이라 한다.
그러면 이제까지 제나가 지닌 탐진치(貪瞋痴)에 좇아 살던 제나가 나라는 주권을 성령인 얼나에게 바친다.  그러면 얼나가 제나를 다스리며 부리게 된다.

"종교는 우리가 깨달은 진리에 동물적인 수성(獸性)을 종속시킴으로써 갈등을 조화시키는 데 그 생명이 있다"(타고르)

"동물적 개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는 모든 조건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며 또 불필요하기도 하다.  동물적 개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개체의 행복을 부정하고 동물적 개체를 인생으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적 개체를 이성적 의식에 종속시켜야 한다"(톨스토이)

밖으로는 허공이라는 절대, 안으로는 성령이라는 절대가 이 우주의 실재다. 허공과 성령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다.  허공처럼 없이 계시는 성령의 님이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이는 사람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삶의 절대목적이다.  이것을 못하면 실패의 삶이다.  예수. 석가. 공자. 노자의 일치된 생각이다.  불생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예수는 영의 나, 석가는 법의 나, 공자는 덕의 나, 노자는 도(道)의 나라고 하였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 3 : 5~8)

구경(究竟)에서는 예수. 석가. 공자. 노자의 생각이 일치하기 때문에 종교간에 갈등이나 대립할 까닭이 없다.  종교 사이에 갈등하고 대립한다면 아직 그들이 그들이 받드는 스승이 가르친 구경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어떠한 종교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자기의 종교와 신앙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  인간성이 다양한 것을 찬양하고 신앙의 형태가 다양한 것을 찬미하고 싶다.  나는 자기들만의 종교와 신앙이 옳다고 하는 특정 종교의 교도가 아닌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고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의 고귀성과 자유가 결여된 교회가 자만에 빠져서 다른 종교와 교회를 무시하려는 것에 실망한다"(헤르만 헤세 - 종교에 대하여).

출처 : lucian
글쓴이 : 이른가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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