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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禪)과 언어

narrae 2016. 10. 4.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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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과 언어*

 

김 태 완

 

 

[한글 요약]

 

언어로부터의 해탈은 달리 말하면 분별의식 혹은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이며, 이것은 불교의 본질이다. 선에서의 견성 역시 언어의 자성(自性)을 바로 봄으로써 언어(곧 분별의식)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체험이다. 선사들이 언어관념의 구속을 풀어주는 구체적 방법을 살펴보면 대체로, ①논리적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하거나, ②현재의 경험사실을 그대로 가리키거나 하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의 경우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종류의 생각과 언어를 배제시킴으로써 언어관념의 길을 차단시켜서 언어관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둘째의 경우는 불교의 진리를 묻는데 답하여, 사물을 지시하거나 행위를 요구하거나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 역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심성(心性)의 직지(直指)에 초점이 있다.

이처럼 선(조사선)의 공부란 언어를 발판으로 하여 언어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서 언어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극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즉 선의 방편은 언어방편이다. 그런데 조사선에서의 언어방편은 이론적 설명이라는 추상적 방편에 머물지 않고, 화두라는 구체적 실천의 방편도 된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선에 관한 경전의 언어는 주로 육체적 심리적 실천을 안내하는 설명서의 역할만에 그쳤으나, 선에서의 언어는 설명서이자 동시에 실천의 직접적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주제분야 : 동양철학, 불교, 선, 선불교, 중국철학,

주 제 어 : 선, 언어, 견성, 깨달음, 파사현정,

 

* 본 논문은 한국선학회 2001년 3월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한 것임.

 

 

1. 문제 제기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dhyāna의 음역인데, 선나(禪那)로도 음역되고 사유수(思惟修) 혹은 정려(靜慮)로 의역되며, 정(定)과 혜(慧)를 통칭하는 말이다. 정은 수행(修行)을 일컫는 말이고 혜는 깨달음[悟]을 일컫는 말이므로1], 결국 선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실천이고 체험이다. 흔히 경․율․론 삼장(三藏)으로 이루어진 교(敎)가 부처의 말[佛語]이라면 선은 부처의 마음[佛心]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선이 언어적 구성물이 아닌 직접적 체험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언어는 분별심의 소산이므로2] 선이 언어적 구성물이 아니라는 말은 곧 선이 분별심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선은 불이(不二)의 중도(中道) 혹은 무분별(無分別)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체험을 나타내는 말이다.

 

1] ?禪源諸詮集都序? 大正藏48 399a

2]서양의 논리학을 빌어 말하면, 언어는 동일율(同一律)과 모순율(矛盾律)이라는 분별의 법칙을 기본 바탕으로 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언어는 상(相)에 속하는 것이다.

 

선이 무분별하고 불가사의한 비언어적 체험이기 때문에, 분별적이고 언어적인 의식(意識) 속에서 선을 생각하고 말하기에는 분명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선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주체는 분별적이고 언어적인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이 어려움은 어떤 방법으로든 극복되어야만 한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개발된 극복의 방법은 방편(方便)이었다. 방편을 시설하여 진실을 드러낸다[開權顯實]고 하듯이, 방편이란 진실은 아니지만 진실로 이끄는 수단으로서 임시로 만들어졌다가 진실을 드러내는 기능을 수행하고 나면 그 존재 의의가 끝나는 그런 것이다. 그 구체적인 응용은 다양한 내용으로 나타나겠지만 방편의 기본 성격은, 분별의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진실의 세계로, 분별의식으로 이해 가능한 방법을 통하여 이끌어가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비언어적 체험의 세계로 언어적 방법을 통하여 이끌어가는 것이 방편이다. 이 까닭에 교문(敎門)을 방편가문(方便假門)이라고도 한다.

 

불교 발전의 역사는 이 방편문의 다양화와 정교화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방편문의 존재 의의가 방편문을 통하여 방편문을 초월하여 진실문으로 들어가는 데 있으므로, 방편문의 다양화와 정교화는 초월하여 진실문으로 향하게 하는 효력의 증대에 초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방편문의 다양화와 정교화는 오히려 공부인을 방편문의 체계 속에 안주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철학의 다양한 발전은 한편으로 이런 위험을 가중시켜왔고, 마침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선의 출현을 야기했다. 선이 교외별전을 표방하는 의의는 물론 교학(敎學)의 체계인 방편문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이 뜻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이심전심의 내용은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그렇다면 방편에 의지하지 않고 직지인심을 표방하는 선에는 방편문이 안고 있는 그런 위험은 없는가? 선이 애초에 이론을 버렸기 때문에 이론에 구속되는 위험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와 탈언어(즉 분별과 무분별)―언어는 분별된 의식의 다른 표현이므로 언어와 분별, 탈언어와 무분별은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동시에 분별의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라는 관계가 안고 있는 위험은 교문(敎門)과 마찬가지로 선문(禪門)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위험이란 무분별인 탈언어를 목표로 하면서도, 그 목표를 분별인 언어 속에서 해결하려는 위험이다.

 

이 글은 선 공부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언어의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언어의 문제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분별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언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결국 선 공부의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논의의 전개는 우선 언어 문제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 다음 선 공부에서는 어떻게 언어의 문제를 극복하는가를 다루며, 특히 조사선의 가장 큰 특징인 화두가 결국 언어의 문제를 다루는 조사선의 독특한 방법임을 밝히고,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선학의 조건이 무엇인가도 시험적으로 모색해볼 것이다. 여기서 ‘선’이라는 용어는 혜능 문하에서 꽃을 피운 조사선(祖師禪)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시키겠다. 선은 역사적으로 종파(宗派)에 따라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모두를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현재 한국의 선불교가 그 맥을 잇고 있는 조사선으로 선의 의미를 한정시킨다.

 

 

2. 언어 문제의 본질

 

선의 실천에서 언어가 문제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언어가 분별심의 소산으로서 극복의 대상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의 실천이 가르치고 배우는 공부의 과정이므로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고, 설사 언어를 전혀 사용치 않고 홀로 토굴 속에서 침묵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있는 한 여전히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가 문제되는 것은 공부 과정에서의 일이고, 선을 이미 체득한 입장에서는 언어가 문제되지 않아야 한다. 선의 체득은 자성을 깨달아 온갖 사념의 장애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언어의 장애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언어가 방편으로서 문제되는 것은 이미 석가모니에게서 범천권청의 설화로 나타나고 있다.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법을 깨달은 석가모니는 그 법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어도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이 미묘법을 설명할 방법을 두고 고심했던 것이다.3] 혜능의 문하에서 성립된 조사선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조사선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어가 교외별전․이심전심․불립문자․직지인심․견성성불인데, 이러한 말들도 모두 직간접으로 언어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 모두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법을 전하고 받는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언급이다.

 

가르침과 배움에서 언어가 문제되는 이유는,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지면서도 가르치고 배우는 목적은 언어를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넘어선다는 것은 견성하여 해탈하는 것을 말한다. 견성이란 우리가 상(相)으로 경험하는 세계의 성(性)을 바로 아는 것이고, 세계의 성을 바로 알게 되면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4] 즉 범부는 세계에 구속되어 있지만 부처는 세계로부터 해탈한다. 세계로부터의 해탈이란 곧 언어로부터의 해탈이기도 하다.

 

3]世尊得道未久 便生是念 我今甚深之法 難曉難了難可覺知 不可思惟 休息微妙 智者所覺知 能分別義理 習之不厭 卽得歡喜 設吾與人說妙法者 人不信受 亦不奉行者 唐有其勞 則有所損 我今宜可黙然 何須說法(?增壹阿含經?10 勸請品 大正藏2-593ab)

4]달마(達摩)의 저작(著作)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중기(唐中期) 조사선의 선법(禪法)을 논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제오문오성론(第五門悟性論)?에서는 성(性)을 보는 것과 상(相)을 보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눈이 색(色)을 볼 때에 색에 오염되지 않고, 귀가 소리를 들을 때에 소리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모두 해탈(解脫)이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않으면 눈이 선문(禪門)이 되고,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귀가 선문이 된다.

묶어서 말하면, 색(色)의 성(性)을 보는 자는 항상 해탈하고, 색(色)의 상(相)을 보는 자는 항상 구속된다.”

(眼見色時 不染於色 耳聞聲時 不染於聲 皆解脫也

眼不著色 眼爲禪門 耳不著聲 耳爲禪門

總而言之 見色性者常解脫 見色相者常繫縛)

(?第五門悟性論? 大正藏48-371c)

 

 

조사선에서 가르침과 배움이란 마음을 바로 지적해주는 스승의 행위와 그것이 계기가 된 제자의 견성 체험이다. 마음을 바로 지적해주는 스승의 행위가 반드시 언어를 이용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의 만남과 의사소통에서 주요한 수단은 역시 언어이므로 스승과 제자의 만남에 언어는 거의 반드시 개입된다. 더구나 제자는 아직 언어의 성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스승이 비록 언어[相]를 넘어 마음[性]을 바로 지적해주어도 제자는 여전히 언어의 테두리 속에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언어가 문제되는 것이다. 스승은 언어의 자성을 바로 보아 언어에서 해탈하기를 가르치지만, 상(相)으로서의 언어만을 익혀온 제자가 상의 벽을 넘어서 성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5]

 

5]임제의 다음 말은 이런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찾아와서 구하는 자라도 있으면 나는 곳 나아가서 그를 알아차리는데, 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

내가 곧 몇 가지 옷을 입어 보이면, 학인은 여기에 알음알이를 내어서 한결같이 나의 말 속으로 말려들어오고 만다.

슬퍼다! 눈 먼 중들이여. 안목 없는 사람들은 내가 입은 옷을 붙잡고서, 푸르니․누르니․ 붉으니․ 희니 하고 알아차린다.

그러다가 내가 옷을 벗고서 청정한 경계 속으로 들어가면, 학인들은 한 번 보고서는 곧 즐거워하며 바라다가, 내가 또 벗어버리면 학인들은 마음을 잃고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나에게는 옷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곧 그들에게, 「그대들은 나의 옷 입는 사람을 아는가?」라고 말한다. 바로 그때 그대들은 문득 머리를 돌려 나를 알아버리는 것이다.

대덕들이여! 그대들은 옷을 알려고 하지 말라. 옷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청정이라는 옷도 있고, 무생(無生)이라는 옷도 있고, 보리라는 옷도 있고, 열반이라는 옷도 있고, 조사라는 옷도 있고, 부처라는 옷도 있다.

대덕들이여! 다만 소리와 이름과 글자가 있을 뿐이니, 모두가 변화하는 옷들이다.

배꼽 아래의 기해(氣海)로부터 울려나와서 어금니에서 부딧혀 말과 뜻을 이루는 것은 허깨비의 조화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대덕들이여!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는 것과 안으로 마음에 나타나는 것과 생각하고 마음먹는 것은 모두가 옷들이다.”

(但有來求者 我卽便出看渠 渠不識我

我便著數般衣 學人生解 一向入我言句

苦哉 瞎禿子無眼人 把我著底衣 認靑黃赤白

我脫却 入淸淨境中 學人 一見 便生忻欲 我又脫却 學人 失心 忙然狂走 言我無衣

我卽向渠道 你識我著衣底人否 忽你回頭 認我了也

大德 你莫認衣 衣不能動 人能著衣 有箇淸淨衣 有箇無生衣 菩提衣 涅槃衣 有祖衣 有佛衣

大德 但有聲名文句 皆悉是衣變

從臍輪氣海中鼓激 牙齒敲磕 成其句義 明知 是幻化

大德 外發聲語業 內表心所法 以思有念 皆悉是衣)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大正藏47-501bc)

 

 

요컨대 선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목적은 스승에 의한 성의 직지(直指)와 제자의 견성체험으로 달성되는 것이지만, 성은 상을 통하여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만을 익혀온 제자가 언어의 상을 통하여 언어의 성을 알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언어를 통한 선의 실천에서 언어가 문제되는 까닭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언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범부는 세계를 상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직지의 방편으로 무엇을 이용하든(‘할’이든 ‘방’이든 어떤 무언(無言)의 행위이든) 범부로서는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에서 언어의 문제란 결국 견성체험에서 부닥치는 보편적 문제의 한 단면일 뿐이고 언어만이 가진 특수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다만 가르침과 배움에서 언어를 가장 주요한 수단으로 하므로 언어를 더욱 문제시 하는 것이며, 더구나 문자로써 선을 설명하려는 경우 문자라는 상을 가지고 어떻게 성을 드러낼 것인가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언어가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이다.

 

 

3. 언어 문제의 해결 방법 - 파사와 현정

 

불교 실천수행의 내적 의미를 분석하면, 삿된 집착을 타파한다는 파사(破邪)와 바른 진리를 드러낸다는 현정(顯正)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초기에는 파사에 의하여 현정에 이른다는 이시(異時)의 인과(因果)를 주장하였으나, 인과의 상의상대적(相依相對的) 연기(緣起)를 밝힌 나가르주나에 의하여 파사가 곧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드러내는 현정임이 주장되었다. 나가르쥬나의 중관론(中觀論)은 ‘삿됨을 깨뜨리는 것이 곧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破邪卽顯正]’이라 하여 삿됨을 깨뜨리는 희론적멸(戱論寂滅)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비하여 ‘바로 마음을 가리킴[直指人心]’과 ‘성을 보아 깨달음을 성취함[見性成佛]’이라는 특성을 가진 선은, ‘삿됨을 깨뜨리는 것[破邪]’ 보다는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顯正]’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점은 규봉종밀이 ?도서?에서 삼론종(三論宗)의 가르침을 파상현성교(破相顯性敎)라고 하는 반면, 마조(馬祖)의 선을 가리켜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이라 부르고 있는 것에도 나타나 있다.

 

이처럼 중관사상이 희론적멸이라는 파사를 통하여 현정을 성취하는 구조라면, 선은 현정을 바로 성취함으로써 파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중관사상에서 파사를 희론적멸이라고 하는 것은 곧 언어의 구속으로부터 해탈함을 말한다. 언어로부터의 해탈은 달리 말하면 분별의식 혹은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이며, 이것은 불교의 본질이다. 선에서의 견성 역시 언어의 자성(自性)을 바로 봄으로써 언어(곧 분별의식)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체험이다.

 

선사들이 언어관념의 구속을 풀어주는 구체적 방법을 살펴보면 대체로, ①논리적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하거나, ②현재의 경험사실을 그대로 가리키거나 하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의 경우는 ‘이렇다고 말해도 안되고 이렇지 않다고 말해도 안 된다’거나, ‘들어가도 안되고 나가도 안 된다’거나, ‘앎에도 속하지 않고 알지 못함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는 등 이른바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종류의 생각과 언어를 배제시킴으로써 언어관념의 길을 차단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쥐가 소의 뿔 속으로 기어들어가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경우에 봉착하여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6] 언어관념을 통한 사려분별로써는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연출하여 언어관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경우는 희론의 적멸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희론의 적멸은 곧 자성의 직시(直視)가 된다.

둘째의 경우는 불교의 진리를 묻는데 답하여, 묻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거나, ‘뜰 앞의 잣나무’처럼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지시하거나, ‘절 한번 하라’고 어떤 행위를 요구하거나, 찻잔을 들거나 ‘할’과 ‘방’처럼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 역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심성(心性)의 직지(直指)에 초점이 있다. 즉 이와 같은 직지인심의 경우는 심성의 직지와 희론의 적멸을 동시에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선에서 언어관념의 구속을 해체시키는 이 두 가지 방법을 논의의 편의상 정형화시켜보도록 하자. 파사를 우선하여 현정을 성취하는 것을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으로 부르고, 현정을 우선하여 파사를 겸하는 것을 현정즉파사(顯正卽破邪)로 부르기로 한다. 이렇게 하고 보면,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무심(無心)․방하착(放下著) 등의 말들은 파사즉현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직지인심(直指人心)․삼계유심(三界唯心)․즉심시불(卽心是佛)․입처개진(立處皆眞)․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의 말들은 현정즉파사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구분 속에 선의 거의 모든 실천이 포섭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6]又如鼠入牛角 看看走至尖尖盡底 又如捉賊討贓 栲至情理俱盡 不動不退 無去無來 一念不生 前後際斷(?高峰和尙禪要? 示衆其七)

7]혜능이 듣고 깨달았다는 ?금강경?의 유명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말도 이러한 두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란 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파사즉현정의 경우

 

예컨대, 혜능의 경우 삿된 집착을 부순다는 뜻은 무념․무상․무주․불이(不二)․무이(無二)․대법(對法) 등의 말로 나타난다. 혜능은 무념을 깨달은 자가 바로 부처라고 하면서8], 무념은 어떤 대상을 대하더라도 그 대상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9] 무상은 밖으로 어떤 상(相)에도 구속되지 않는 것을 말하며,10] 무주는 어떤 대상 위에도 생각이 머물지 않아서 그 대상에 속박됨이 없는 것을 말한다.11] 이렇게 보면 비록 무념을 종(宗)으로 하고 무상을 체(體)로 하고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한다고 말하지만,12] 실제로는 무념․무상․무주가 동일한 뜻으로서, 모두가 대상에 머물지 않고 대상에 속박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곧 중도(中道)를 나타내는 말이다.

 

8]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51b)

9]何名無念 若見一切法心不染著 是爲無念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51a)

於諸境上心不染 曰無念(?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53a)

10]外離一切相 名爲無相(?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53a)

11]於諸法上念念不住 卽無縛也 此是以無住爲本(?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53a)

12] 我此法門從上以來 先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 48-353a)

 

 

혜능은 또 불법(佛法)은 불이(不二)의 법이며 불성(佛性)은 무이(無二)의 성이라는 말로13] 이러한 중도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며, 다시 설법(說法)의 방식도 중도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혜능은 말하기를, “일체법(一切法)을 설함에 자성(自性)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가 너희에게 법(法)을 묻거든, 말을 함에 모두 쌍(雙)으로 하고 대법(對法)을 취하여 오고 감이 서로 인(因)이 되게 하다가, 마지막에는 두 법(法)을 모두 없앰으로써 달리 갈 곳이 없게 하여야 한다.”14]라 하고, 또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일컬어 어둠이라 합니까?’라 묻는다면, ‘밝음은 인(因)이고 어둠은 연(緣)이니 밝음이 사라지면 곧 어둠이다. 밝음을 가지고 어둠을 드러내고 어둠을 가지고 밝음을 드러내니, 오고감이 서로 인(因)이 되어 중도(中道)의 뜻을 이룬다.’라고 답하여라.”15]라 말하고 이렇게 하여야 종지(宗旨)를 잃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개념(相對槪念)을 쌍으로 대응시키고 양변(兩邊)을 떠나 중도를 이룬다는 형식은 본래 중관불교에서 사용하는 방법이지만,16] 혜능은 중도의 의의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무엇도 세우지 않는다는 무주(無住)․무상(無相)이라는 파사는 동시에 자성(自性)을 벗어나지 않는다(즉 자성을 드러낸다)는 현정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13]佛法是不二之法……一者善 二者不善 佛性非善非不善 是名不二 蘊之與界 凡夫見二 智者了達其性無二 無二之性卽是佛性(?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49c)

14] 說一切法莫離自性 忽有人問汝法 出語盡雙 皆取對法 來去相因 究竟二法盡除 更無去處(?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60ab)

15]設有人問 何名爲暗 答云 明是因暗是緣 明沒卽暗 以明顯暗 以暗顯明 來去相因 成中道義 餘問 悉皆如此 汝等 於後傳法 依此迭相敎授 勿失宗旨(?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360c)

16]용수(龍樹)가 ?중론(中論)?에서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설명하는 논리는, 각각 단독으로는 의미가 없는 두 상대개념(生-滅․去-來․一-異․斷-常 등 이른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상대개념들)이 성립하는 조건은 서로간의 상의성(相依性)에 있음을 밝혀서 각 개념의 자존성(自存性) 즉 자성(自性)을 파괴해 가는 것이다. 이 경우 상의성(相依性)은 곧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고, 연기법을 통하여 자존성(自存性)을 파괴하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安井廣濟 ?中觀思想硏究? 김성환 역, 서울:홍법원 1989, pp.105-175.)

 

 

한편 백장회해(百丈懷海)는 불설(佛說)인 방편설은 삼구(三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7] 삼구는 초선(初善)․중선(中善)․후선(後善)이라고 부른다.

먼저 초선에서는 명칭과 견해를 세워서 삿된 길로 빠진 중생들을 올바른 길로 끌어들인다. 다음 중선에서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른 공부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에게는 이제 모든 명칭과 견해가 임시로 거짓 가설된 방편임을 납득시켜서 명칭과 견해를 모두 버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후선에서는 방편을 세웠다가 무너뜨린다는 생각조차도 버려서 방편이라는 격식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한다. 방편을 쓸 때에는 이 삼구를 모두 통과하여야, 방편을 통하여 노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17]夫敎語皆三句相連 初中後善 初直須敎渠發善心 中破善心後 始名好善 菩薩卽非菩薩 是名菩薩 法非法非非法 總與麽也 若祇說一句 令生入地獄 若三句一時說 渠自入地獄 不干敎主事 說到如今鑑覺是自已佛是初善 不守住如今鑑覺是中善 亦不作不守住知解是後善(?天聖廣燈錄?9 「洪州大雄山百丈懷海禪師」 續藏經135-671a)

 

언어에 오염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에게 처음부터 바로 언어가 극복된 해탈의 세계를 말해주어야 아무 소용이 없다. 어차피 중생은 언어의 테두리 내에서만 그 말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언어를 관념적으로 받아들여 기억할 뿐, 언어를 넘어서 그 언어로써 가리키고자 하는 뜻을 바로 파악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임시로 방편상의 견해를 말하여 불설을 긍정하고 따르는 신심(信心)을 갖추게 만들고, 일단 믿음을 갖추게 되면 불설로써 기존의 여러 가지 사견(邪見)을 하나 하나 파괴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견을 버리고 불설만을 굳건하게 믿게 되었을 때, 이제는 불설이 사견을 파괴하기 위하여 임시로 가설된 방편임을 알려주어서 불설마저 버려서 언어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편설로 사견을 파괴하고 방편설도 버린다 라고 하는 생각마저 놓아버려서 일체의 언어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나야 한다. 여기서 비로소 불설이 의도하는 바, 또 선이 목적하는 바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은 달성된다. 이러한 백장의 설명 역시 파사즉현정을 말하는 것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다음과 같은 말도 역시 파사즉현정이라는 중도의 실천을 나타내는 것이다.

 

 

"암두 스님은, “사물을 물리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사물을 따라가는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선의 근본은 모름지기 말[言句]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엇이 말인가?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를 일러 올바른 말이라 하며, 꼭대기에 머무른다고도 하며, 머물 수 있다고도 하며, 역력하다고도 하며, 성성하다고도 하며, 이러한 때라고도 한다.

이러한 때를 가지고 모든 시비분별을 부수어버리니, 이러하자마자 바로 이렇지 않게 된다.

옳다는 말도 제거하고 그르다는 말도 제거하여 마치 하나의 불덩이 같아서 닿기만 하면 바로 타버리니 곁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사대부들은 흔히 사량하고 헤아리고 비교하는 것을 의지처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곧 말하기를, “공(空)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라 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배가 아직 뒤집어지지도 않았는데 먼저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 매우 불쌍한 일입니다." 18]

 

18]巖頭曰 却物爲上 逐物爲下 又曰 大統綱宗 要須識句

甚麽是句 百不思時 喚作正句 亦云居頂 亦云得住 亦云歷歷 亦云惺惺 亦云恁麽時

將恁麽時等破一切是非 纔恁麽便不恁麽

是句亦剗 非句亦剗 如一團火相似 觸著便燒 有甚麽向傍處

今時士大夫 多以思量計較爲窟宅 聞恁麽說話 便道莫落空否

喩似舟未翻 先自跳下水去 此深可憐愍

(?大慧普覺禪師書?25 大正藏47-917bc)

 

 

대혜가 인용하고 있는 암두(巖頭)의 말도 혜능이나 백장과 마찬가지로 분별의식의 언어를 극복하고 중도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공부의 길임을 말하는 것이다. 조사선의 선사(禪師)들이 선 공부의 방법으로서 이와 같은 파사즉현정의 길을 제시하는 예들은 선어록(禪語錄)이나 전등록(傳燈錄)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2) 현정즉파사의 경우

 

현정즉파사가 마음을 바로 드러내 보이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행위를 보고 마음을 파악하는 경우 동시에 망상도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곧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음을 직접 지적해내는 직지인심의 행위는 혜능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고 마조도일(馬祖道一)에게서 비로소 등장한다.

 

직지인심을 사상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곧 삼계유심(三界唯心) 사상이다. 파사즉현정이 무심(無心) 사상이라면 현정즉파사는 유심(唯心) 사상인 것이다. 선을 사상적으로 말한다면 분명 이 두 사상이 그 핵심이다.

유심(唯心)과 무심(無心)은 얼핏 보아 양립할 수 없는 견해처럼 보이지만, 이 둘의 양립 속에 돈오선(頓悟禪)의 이치가 들어 있다. 일체는 유심조(唯心造)이므로 망심(妄心)과 진심(眞心)이 따로 없는데도, 분별하여 이 둘을 나누어 보는 것이 범부의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취사간택(取捨揀擇)하는 마음만 없으면[無心] 그대로가 모두 도(道)이다.19] 마조가 “이 마음이 바로 부처”20]라 하거나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오염되지만 말라” 21]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至道無難 唯嫌揀擇(?景德傳燈錄?30 三祖僧璨大師信心銘 大正藏51-457a)

20]祖示衆云 汝等諸人 各信自心是佛 此心卽佛(?四家語錄?「馬祖錄」 示衆 續藏經119-810b)

21] 示衆云 道不用脩 但莫汙染(?四家語錄?「馬祖錄」 示衆 續藏經119-812a)

 

마조는 “삼계(三界)는 마음일 뿐이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심(心) 일법(一法)이 나타내는 것”22]이라고 삼계유심(三界唯心)23]을 말하고, “무릇 색(色)을 보는 것은 모두가 마음을 보는 것이니, 마음은 스스로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색(色)에 인하여 드러나기 때문”24]이라 한다.

또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을 이름하여 색(色)이라 한다”25]고 하며, “일체의 법(法)은 모두 심법(心法)이며 일체의 이름은 모두 심명(心名)”26]이라 한다. 한마디로 만법(萬法)은 모두 마음에서 생겨나니 마음이 만법의 근본27]이라는 것이 삼계유심(三界唯心)이다.

 

22]三界唯心 森羅及萬象 一法之所印(?四家語錄?「馬祖錄」 示衆 續藏經119-811a)

23]삼계유심(三界唯心) 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능가경? 제5권 무상품(無常品), ?화엄경? 55권, ?대승기신론? 등 대승(大乘)의 여러 경론(經論)에 등장한다.

24]凡所見色 皆是見心 心不自心 因色故有(?四家語錄?「馬祖錄? 示衆 續藏經119-811a)

25]於心所生 卽名爲色(?四家語錄?「馬祖錄」 示衆 續藏經119-811a)

26]一切法 皆是心法 一切名 皆是心名(?四家語錄?「馬祖錄」 示衆 續藏經119-812a)

27]萬法皆從心生 心爲萬法之根本(?四家語錄?「馬祖錄」 示衆 續藏經119-812a)

 

그리하여 마조는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라고 말한다. 이 까닭에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黙)․동(動)․정(靜)의 모든 행위와 듣고 보는 모든 경험이 모조리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棒:몽둥이질)․할(喝:고함)․불(拂:흔듦)․권(拳:주먹을 쥠)․답(蹋:발로 밟음)․호명(呼名:이름을 부름)․타착(打着:치는 것)․파비(把鼻:코를 잡음)․취이(吹耳:귀에다 입김을 불어넣음)․박수(拍手:손뼉치기)․수지(豎指:손가락을 세움)․고주(鼓柱:기둥을 두드림)․의세(擬勢:어떤 자세를 취함) 등이 모두 직지인심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지인심의 행위[顯正]가 어떻게 분별의식을 부수고[破邪] 견성(見性)에 이르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이런 행위가 아무리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고 하여도 분별의식 위에서 대하고 있는 한 견성이라는 목적은 달성될 수가 없다. 즉 일체는 유심(唯心)이지만 무심(無心)하지 않으면 그 유심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28] 다시 말하여 직지인심이라는 가르침의 성공과 실패는 배우는 자의 무심(無心:분별의식에 떨어지지 않음)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직지인심의 행위에서는 늘 행위의 찰나에 즉각 마음을 포착할 것을 요구할 뿐이고, 한 순간의 헤아림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28]무심(無心)을 많이 강조하는 것은 황벽(黃檗)이다. 황벽은 다음과 같이 삼계유심(三界唯心)과 동시에 무심시도(無心是道)를 말하고 있다.

山河大地日月星辰 總不出汝心 三千世界 都來是汝箇自已 何處有許多般 心外無法

(?四家語錄? 「宛陵錄」 續藏經119-835b)

問 如何是佛 師云 卽心是佛 無心是道 但無生心動念 有無長短 彼我能所等心 心本是佛 佛本是心

(?四家語錄? 「宛陵錄」 續藏經119-832b)

如今但學無心 頓息諸緣 莫生妄想分別 無人無我 無貪瞋 無憎愛 無勝負 但除卻如許多種妄想 性自本來淸淨 卽是修行菩提法佛等(?四家語錄? 「宛陵錄」 續藏經119-837a)

 

이처럼 분별의식으로 헤아리는 함정을 피하기 위하여 요구하는 조건은 즉각적인 파악이다. 이러한 즉각성(卽刻性)을 임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덕들이여! 이러한 경지(境地)에 이른 학인이 힘쓰는 곳에는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전광석화(電光石火)라도 바로 지나쳐 버린다.

그러므로 만약 학인이 눈을 두리번거리기라도 하면 곧 무관하게 되어 버리며, 헤아리는 마음이 되면 바로 어긋나고, 생각을 움직이자마자 곧 틀려 버린다.

따라서 아는 사람은 눈 앞을 벗어나지 않는다."29]

29]大德 到這裏 學人著力處不通風 石火電光 卽過了也

學人 若眼定動 卽沒交涉 擬心卽差 動念卽乖

有人解者 不離目前

(?臨濟錄? 大正藏47-501b)

 

임제(臨濟)가 본래인(本來人)을 표현하는 말로서 ‘지금 눈앞에 작용을 드러낸다(卽今目前現用)’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래인이란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작용일 뿐, 관념적으로 정형화된 이미지[相]가 아닌 것이다. 분별의식으로 헤아리는 경우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대개 스승은 제자가 즉각 대답치 못하고 머뭇거릴 경우에는 지체 없이 바로 제자를 부정해버림으로써, 헤아리면 곧 어긋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천황도오(天皇道悟)가 용담숭신(龍潭崇信)에게 “볼려면 곧바로 보아야지 헤아리고 생각하면 어긋난다.”30]라고 하는 말이나, 임제(臨濟)가 머뭇거리는 제자에게 지체 없이 할(喝)과 방(棒)을 휘둘렀던 것31]이 모두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30] 見則直下便見 擬思卽差(?景德傳燈錄?卷第十四 灃州龍潭崇信禪師 大正藏51-313b)

31]?임제록?에서는 머뭇거리며 헤아린다는 의미를 ‘擬議’라는 말로써 나타낸다. ?임제록?에는 ‘擬議’하다가 임제에게 부정(否定)되는 장면이 10군데나 나온다.

 

다음과 같은 임제의 일화는 머뭇거림을 용납치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상당하여 말했다.

“붉은 고기 덩이 위에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어서, 늘 그대들의 면문(面門)으로 출입하니, 아직 알지 못하는 자는 자세히 살펴라!”

그때 어떤 중이 나와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가 선상(禪床)을 내려와 그를 움켜잡고 말하였다.

“말해라, 말해!”

그 중이 머뭇거리자 임제가 그를 밀쳐버리고 말했다.

“무위진인이라니 무슨 마른 똥덩어리 같은 소리냐?”

그리고 곧바로 방장실로 돌아갔다." 32]

32]上堂云

赤肉團上 有一無位眞人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 未證據者 看看

時有僧出問

如何是無位眞人

師下禪牀把住云

道道

其僧擬議 師托開云

無位眞人是什麽乾屎橛

便歸方丈

(?臨濟錄? 大正藏47-496c)

 

 

육체(붉은 고기 덩이) 위에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眞人)-곧 불성(佛性)-이 있어서, 늘 면문(面門)-이목구비(耳目口鼻)-으로 출입한다. 무엇이 무위진인인가?

학인의 이 질문에 대한 임제의 답은 그를 움켜잡고 말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답은 이것이다.

학인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바로 무위진인의 출입이다. 입을 열고 말을 하는 것이 바로 무위진인이 작용을 나타내며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고기 덩이인 입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붉은 고기 덩이인 입 위에서 출입하는 무위진인(無位眞人) 곧 불성(佛性)이 말하는 것이다. 무위진인이 고기 덩이인 입을 움직여 말하는 것이다. 물론 무위진인과 고깃덩이인 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고깃덩이라는 상(相)만을 본다면 무위진인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 고깃덩이의 움직임 속에서 그 고깃덩이가 바로 무위진인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는 무위진인을 묻는 학인에 대한 대답으로 그에게 스스로 말하라고 시키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하라 하는 것인가? 무위진인에게 말을 하라는 것이다. 무위진인이 스스로 대답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임제는 무위진인을 확인하는 가장 정확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위진인 스스로가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무위진인을 알려주는 가장 정확한 길이 아닌가?

임제의 이러한 친절한 대답을 듣고도 학인은 스스로가 바로 무위진인임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생각으로 헤아리며 머뭇거리고 있다. 이에 임제는 그를 밀쳐 버리고, 무위진인이라니 무슨 더러운 거짓말인가 하고 그를 나무란다. 밖으로 상(相)을 찾아 헤아린다면, 무위진인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4. 화두(話頭)를 통한 파사현정의 실현

 

1) 화두란 무엇인가

 

선의 본질은 이해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맛을 보아서 알게 된다. 맛을 본다는 것은 언어적 논리적 이해가 아닌 체험을 말한다. 이 체험은 흔히 ‘물을 직접 마셔보고 스스로 그 차가움과 따뜻함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선에 대한 언어적 이해를 넘어서 직접적 선 맛보기로 나아가는 길로서 조사선에서 개발한 독특한 방편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화두’란 ‘말[言語]’인데 겉으로는 ‘말’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말’을 넘어서 ‘마음’을 직접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화두를 해설할 수는 있으나 화두의 해설을 ‘말’의 의미로서 이해하였다고 하여 화두를 깨친 것은 아니다. 화두를 계기로 하여 ‘마음’을 직접 깨달아 맛볼 때에 비로소 화두를 깨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두를 해설할 경우 중요한 것은, 지식적 이해를 저지시키고 직접 체험으로 요령껏 이끌어 주어야 하는 점이다.33]

 

33]선지식의 지도력은 얼마나 체험으로 잘 이끌어 주느냐에 있는 것이지, 흔히 보듯이 무조건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언어의 금기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선에는 어떠한 규칙이나 격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화두 가운데, ‘삼라만상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一歸何處]’라는 것이 있다. ‘삼라만상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는 말이다.

예컨대 기독교에서라면 하나가 하나님이 될 것이고, 불교라면 마음-일체유심조를 상기하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든가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하여, 하나님을 알았다거나 마음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하나님은 무엇인가?’, ‘마음은 무엇인가?’라는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삼라만상은 하나로 돌아간다’처럼 의미를 통하여 진리를 표현한 말을 교(敎)라고 한다.

이에 비하여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는 ‘삼라만상은 하나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를 의미로서 이해하지 말고 직접 맛보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이것이 선(禪)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다시 의미로써 풀이한다면 그 풀이가 어떤 것이건 그것은 요구하는 바의 해답인 선은 아니다.

 

 

<전등록>에서 보면 ‘만법귀일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어느 것도 의미로서 해답이 된다고는 할 수가 없다.

 

 

㉠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삼베옷을 한 벌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근이었다.” 34]

㉡ “스승님 혼자만 바쁘신 것이 아닙니다.” 35]

㉢ “묻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군.” 36]

 

34] 僧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云 老僧在靑州作得一領布衫重七斤

(?景德傳燈錄?10 趙州觀音院從諗禪師 大正藏51-278a)

35]僧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曰 非但闍梨一人忙(?景德傳燈錄?18 信州鵝湖智孚禪師 大正藏51-350b)

36]問 萬法歸一一歸何處 師曰 未有一箇不問(?景德傳燈錄?20 洪州百丈安和尙 大正藏51-367c)

 

이 답들은 사실 묻는 말에 대해서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그러나 이 말들이 해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말들은 일종의 모범답안으로 ?전등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들을 지금 여기서 누가 해답으로 제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정답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흉내내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기만의 정답이 있는 것이고, 그 정답은 스스로 맛을 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은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바로 맛보는 것이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맛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우선 언어로써 형상화된 체험의 그림자가 아니라, 현재 경험중인 사건으로서의 체험 그 자체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언어화되어 나온 의미-형상화된 관념-가 아니라, ‘지금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음’이라는 현재진행의 일을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선의 맛봄’에는, 늘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체험이고 형상화되지 않은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조사선을 일컬어 격외선(格外禪)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2) 화두에서의 파사와 현정

 

위에서 언어관념의 구속을 해체시키는 두 가지 방법을 편의상 파사즉현정과 현정즉파사로 정형화시켜서 살펴보았다. 화두의 역할 역시 이와 같은 분석틀을 통하여 고찰할 수 있다. 먼저 화두가 파사의 기능을 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향엄지한(香嚴志閑)과 관련된 다음의 이야기에 화두가 파사의 기능을 어떻게 하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향엄(香嚴)은 백장(百丈)의 문하에 있었는데,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뛰어나 대중들 가운데 말로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을 정도였지만, 선문(禪門)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백장이 죽고나서는 위산(潙山)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위산(潙山)은 향엄의 말재주가 단지 지식(知識)에서 나오는 것일 뿐 근원을 통달한 것이 아님을 알고서, 어느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그대는 백장 선사(先師)의 처소에 있을 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했고, 열을 물으면 백을 답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것은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뜻으로 알아차리고 식(識)으로 헤아리는 것이니 바로 생사(生死)의 근본이 된다. 이제 부모가 그대를 낳기 이전의 일을 한 마디 말해보라.”37]

37]我聞汝在百丈先師處 問一答十 問十答百 此是汝聰明靈利 意解識想 生死根本 父母未生時 試道一句看

(?五燈會元? 卷第九 ‘香嚴智閑禪師’)

 

향엄(香嚴)은 한참을 궁리한 후 몇 마디 대답을 했으나 위산은 하나도 용납하지를 않았다. 마침내 향엄이 위산에게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위산은, “ 내가 만약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것일 뿐 결코 그대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38]라고 말할 뿐이었다.

처소로 돌아온 향엄은 평소 보아왔던 서적을 뒤져서 대답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를 못하자 이제껏 보아왔던 서적을 몽땅 불태워버리고는, 불법(佛法) 배우기는 포기하고 떠돌이 중이나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위산(潙山)을 하직하고 남양(南陽)으로 건너가 혜충국사(慧忠國師)의 유적(遺跡)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향엄은 풀을 베다가 우연히 기와 조각을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부딪혀 소리를 내자 홀연히 깨달았다.

38]我若說似汝 汝已後罵我去 我說底是我底 終不干汝事(?五燈會元? 卷第九 ‘香嚴智閑禪師’)

 

향엄이 견성(見性)하는 직접적 계기는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딧혀 내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위산이 제시한 ‘부모가 그대를 낳기 이전의 일을 말하라’는 화두는 견성의 직접 계기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이 화두는 일차적으로 향엄의 사량분별을 부수는 파사의 기능을 하고 있다. 물론 견성한 뒤의 향엄에게는 이제 이 화두와 기와 조각 부딪히는 소리가 동일한 바탕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전의 향엄에게 이 화두는 일차적으로 파사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화두가 현정의 기능을 하는 경우를 원오극근이 개오(開悟)한 일화를 가지고 살펴보자. ?종문무고(宗門武庫)?에 보면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종고의 스승인 원오극근(圜悟克勤)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를 묘사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화두를 이용하여 선의 맛보기가 실현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화두가 어떻게 현정으로 기능하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오조법연(五祖法演)은 어느날 진제형이라는 거사에게 말했다.

“제형은 어린 시절에 「소염시(小艶詩)」를 읽어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다음 두 구절은 제법 우리 불법(佛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따름이다.>”

진제형은 연신 “네!” “네!” 하였고 법연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때마침 원오가 밖에서 돌아와 곁에 모시고 섰다가 물었다.

“듣자하니 스님께서 「소염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 진제형 거사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그는 소리만 알아들었을 뿐이다.”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뿐이라면, 그가 이미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데 어찌하여 옳지 않습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악!”

원오는 이 말에 문득 느낀 바가 있었다. 방문을 나서니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날개를 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다시 혼자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소리가 아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법연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39]

 

39] 祖曰

提刑少年曾讀小艶詩否 有兩句頗相近 頻呼小玉元無事 秪要檀郞認得聲

提刑應喏喏 祖曰 且子細 圓悟適自外歸侍立次 問曰

聞和尙擧小艶詩 提刑會麽

祖曰 他秪認得聲

圓悟曰 秪要檀郞認得聲 他旣認得聲 爲什麽 却不是

祖曰 如何是祖師西來意 庭前栢樹子 聻

圓悟忽有省 遽出去見雞飛上欄干鼓翅而鳴

復自謂曰 此豈不是聲 遂袖香入室 通所悟

祖曰 佛祖大事非小根劣器所能造詣 吾助汝喜 祖復徧謂山中耆舊曰 我侍者參得禪也

(?宗門武庫? 大正藏47-946ab).

 

「소염시」는 당나라 현종이 총애했던 양귀비를 소재로 한 시이다. 낭군의 정이 그립지만 낭군을 바로 불러올 형편은 아니기 때문에 일 없는 몸종 소옥이를 부름으로써 낭군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들려주어 자신의 심정을 알아채도록 한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여기서 법연이 잘 살펴보라고 하는 부분은,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를 때 낭군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의미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즉 말을 듣고서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라가지 않고, 현상으로서의 그 말이 생겨나는 근원을 파악함이 곧 불법(佛法)이라는 것이 법연의 가르침이다.

법연의 이 말을 듣고 원오는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알아들었으면 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고, 법연은 원오가 견성하는 길을 찾았다고 보고서 즉각 ‘뜰앞의 잣나무’라는 공안을 제시하여 이것도 같은 것임을 알려 준 것이다.

여기서 원오는 공안을 타파하고 견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줄탁동시(啐啄同時)의 한 장면이다. 원오는, ‘소옥아! 소옥아!’하는 말이나 ‘뜰 앞의 잣나무’하는 말이나 ‘악!’하는 외침이나 ‘꼬끼요!’하는 닭의 울음 등에서 동일(同一)한 그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즉 만법(萬法)에 공통되는 그 무엇, 만법이 귀일(歸一)하는 그 하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를 선불교에서는 마음[心] 혹은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체험을 두고 ‘자성을 본다[見性]’ 혹은 ‘마음을 안다[識心]’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성을 본다’는 입장에서 보면, ‘소옥아! 소옥아!’, ‘뜰 앞의 잣나무’, ‘악!’, ‘꼬끼요!’ 등은 모두 자성을 나타내고 있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은 제각기 다르다. ‘소옥아! 소옥아!’는 부르는 말이고, ‘뜰 앞의 잣나무’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말로서, 이 둘은 소리이면서 동시에 의미를 가진 언어이다.

또 고함소리인 ‘악!’과 닭의 울음소리인 ‘꼬끼요!’는 의미를 가진 언어라기 보다는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의미가 아니라, 바로 ‘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는 의미를 담을 수도 있고 담지 않을 수도 있는, 의미 이전의 것이다. 즉 소리는 의미로 형상화되기 이전의 자성(마음)의 움직임인 것이다. 이 까닭에 원오가 말을 듣고 말이 아니라 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뜻을 이해했을 때, 법연은 화두와 할(喝)을 사용하여 원오의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두는 의미있는 말을 통하여 의미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성(마음)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직지(直指)의 방편이다.

 

이 일화에서의 ‘뜰 앞의 잣나무’처럼 화두가 직지(直指)의 용도로 사용될 경우에는 현정(顯正)을 통하여 파사(破邪)도 동시에 완성되는 경우로서, 직지인심․견성성불이라는 조사선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화두는 파사와 현정의 기능을 수행하여 언어의 테두리를 넘어서 언어가 나오는 바탕인 자성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조사선에서 개발된 독특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화두는 언어이므로 선문답에서 화두를 이용한 조사선의 선공부는 결국 언어를 잘 활용하여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5. 결론

 

지금까지 선의 체험과 관련하여 언어의 역할을 파사와 현정이라는 틀을 만들어 분석해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선(조사선)의 공부란 언어를 발판으로 하여 언어를 극복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선에서 언어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극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즉 선의 방편은 언어방편이다. 그런데 조사선에서의 언어방편은 이론적 설명이라는 추상적 방편에 머물지 않고, 화두라는 구체적 실천의 방편도 된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선에 관한 경전의 언어는 주로 육체적 심리적 실천을 안내하는 설명서의 역할만에 그쳤으나, 선에서의 언어는 설명서이자 동시에 실천의 직접적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즉 조사선에서의 깨달음은 말 아래[言下]의 깨달음이다.

 

선원(禪院)에서 스승이 학인을 지도하는 경우는 주로 두 경우가 있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행하는 시중(示衆)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상당설법(上堂說法)이 하나이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개별적 문답을 통한 가르침이 하나이다. 시중은 주로 올바른 지견(知見)을 갖추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치에 맞게 설득하거나 잘못된 공부에 대한 비판이 그 내용을 이루며[설명서],40] 개별적 문답은 학인의 물음에 응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인심을 직지하거나 학인의 사념(邪念)을 부수어주는 예리한 지적이 그 내용을 이룬다[구체적 도구].

 

40]시중이 때로 경전(經典)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바른 지견을 설명하고 잘못된 공부를 비판하는 비교적 긴 설법(說法)이긴 하지만, 그 내용이 교학적 체계적 이론인 것은 아니다. 시중이건 개별문답이건 목적은 오로지 견성(見性)의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설법(對衆說法)이라하더라도 설명의 이론적 완결성에 초점을 두지 않고 직설(直說)과 은유(隱喩)를 섞고 경전(經典)과 예화(例話)를 인용하며 오직 사견(邪見)을 부수고 정견(正見)으로 이끄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설명이 경전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이론적 관점이 아닌 체험자 자신의 견처(見處)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 공부에서 언어의 쓰임을 정리하면, ① 선체험을 묘사하고 설명하여 듣는 사람에게 선체험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하고 동일한 체험으로 이끌어 감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와 ② 화두처럼 언어를 선체험을 가져오는 직접적 방편으로 활용하는 경우의 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에 관한 학문적 논의 즉 선학(禪學)을 함에도 이러한 점들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선의 본질이 체험이고 선의 언어가 체험으로 이끄는 설명이나 도구라면, 선학도 체험으로 이끄는 효용성에 가장 큰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필자는 선학의 일차적 요건으로 무엇보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선학은 선의 체험에 도움이 될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적어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선학은 이론적 체계화 보다는 체험적 사실의 구명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우선 체험적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해내야 한다. 그 다음 기술된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때는 추측이나 가설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명에 이용하는 이론적 틀은 반드시 교학의 이론을 이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학과 배치되는 내용이어서도 안될 것이다. 만약 파악된 사실이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설명되지 않는 이유를 밝혀내는 것으로 그쳐야지 설명을 위한 설명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선의 언어가 그렇듯이 선학도 방편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학은 늘 실험적 입장-방편의 입장-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체험에 관한 기술과 설명은 다양할 수가 있지만, 어떤 설명도 체험 그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체험과 언어를 설명한 필자의 이 글도 선학으로서 하나의 실험이요 모색이다.

 

 

 

참고문헌

 

?增壹阿含經?10 勸請品 大正藏2
?楞伽經? 卷5 無常品
?華嚴經? 卷55
?大乘起信論?
?禪源諸詮集都序? 大正藏48
?第五門悟性論? 大正藏48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大正藏47
?高峰和尙禪要?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
?天聖廣燈錄? 續藏經135
?大慧普覺禪師書?25 大正藏47
?景德傳燈錄? 大正藏51
?四家語錄? 「馬祖錄」 續藏經119
?四家語錄? 「宛陵錄」 續藏經119
?五燈會元? 卷第九
?宗門武庫? 大正藏47
安井廣濟 ?中觀思想硏究? 김성환 역,서울:홍법원 1989.

 

 

 

[Abstract]

 

Ch’an and Language

 

Kim, Tae-Wan(Silla Univ.)

 

Liberating the mind from language, that is to say, liberating the mind from idea is the essence of Buddhism. An enlightenment in Ch'an is also an experience of liberating the mind from language or idea by catching the nature of language or idea. The Ch'an masters' methods of liberation are ① setting a contradictory question that is never answered reasonablely, or ② showing the presently existing fact. In case of ① a Ch'an master makes his disciple give up any language or idea by cutting off any way of thinking. In case of ② a Ch'an master reveals the nature of language or idea by pointing out the mind directly.

 

Key Words : Ch'an, Zen, language, Buddhism, realization, enlightenment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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