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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몇 가지 새로운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narrae 2014. 5. 8. 02:37
지금 제가 이해하는 한도에서 질문에 답을 드립니다.


해공님>>
바쁘실텐데.. 상세하고 포괄적인 답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 중 몇 가지에 다시 질문 올립니다.-.-;;

일단 4과 가운데 첫 번째 깨달음인 수타원이 되면 붓다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부처는 수타원도의 경지에도 못간 사람 중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걸로 이
해가 되는군요. 즉 사쌍팔배의 성인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거군요. 번거로우실텐데
이 부분은 따로 대답하지 않으시면 5부 니까야와 율장에 따르면 부처는 수타원도의
경지에도 못간 사람 중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씀인 걸로 알겠습니다.

Garden>>

붓다가 되는 길과 아라한이 되는 길은 다른 과정을 밟는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수타원이 안된 사람이 붓다가 된다는 표현은 맞지만, 보살의 단계는 결코 낮은 단계의 정신적인 경지가 아닙니다.

자타카(J. I, 17)에서 수메다 행자가 연등불의 수기(붓다가 된다는 예언)을 받았을 때, 회중에 있던 수 많은 아라한들이 수메다 행자를 찬탄합니다. 이는 고귀한 보살정신에 대한 찬탄이며, 미래의 붓다에 대한 찬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살이 될 수는 있지만 부처님께 수기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수기를 주실 부처님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도 보살도는 결코 수타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길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험난하고 고귀하고 길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해공님>>

전 우주에는 한 시기에 오진 한 분의 부처님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출
현은 아주 희귀한 일입니다.

there can be only one Buddha at a time in the whole world, so that
the appearance of a Buddha is very, very rare.

===> 여기서 한 시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이 책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있는 시기를 뜻하는 가요? 아니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을 말하는 가요? 간단하게 말해서 5부 니까야와 율장에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부처가 있을 수 있나요? 없나요? 이 부분은 꼭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김정빈 법사님의 말씀은 다음 부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이 어떤 형태로든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5부 니까
야와 율장에 따르면 사실인가요?


Garden>>
한 시기란 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속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현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다음 시기는 미륵부처님의 시기가 되는 것이지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남아 있으면 다른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초기 및 상좌불교의 가르침입니다.


해공님>>

그리고 몇 가지 번역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괜히 번거롭게 하는 거 같아서 바쁘
시면 아래부분들은 답변 안하셔도 이해하겠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아라한의 깨달음만을 위한 것인가?
IS THERAVADA BUDDHISM FOR ARAHANTSHIP ONLY?
==> 깨달음이란 말을 너무 자주 붙이는 것은 대승불교적 오용은 아닌지요?
테라와다 불교는 아라한의 경지만을 위한 것인가? 가 낫지 않을까요?


Garden>>
ARAHANTSHIP을 저는 아라한의 깨달음이라고 번역했는데, 아라한의 경지도 좋습니다. 아라한이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의 용어가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도 쓰이는 말입니다.
bodhi(菩提)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깨달음으로 번역되는 말인데, 아라한의 보리, 독각의 보리, 붓다의 보리 등이 있습니다. 용어는 같지만 각 경지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해공님>>

테라와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라한이란 네 번째의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According to Theravada Buddhist teachings, an arahant is a
person who has reached the fourth and highest stage of enlightenment.

==> 원문에서도 enlightenment라는 말을 쓰는 군요... 네 번째의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이란 말은 그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도 깨달음이란 말인가요?
여기에서 깨달음에 해당하는 빠알리어를 가능하면 알고 싶습니다. 저는 5부 니까야와
율장에서는 깨달음이란 말은 아라한과에서만 쓰는 줄 알았는데... 위의 영어 원문이
맞다면 그게 아니라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도 깨달음이라는 용어로 쓰는 거
같군요.
초기 불교 경전에 근거하면 깨달음이란 말이 4과에 다 적용되는 건가요, 아니면 아라한과에
만 적용되는 건가요?


Garden>>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깨달음이라고 할 때의 팔리어는 phala(果)입니다. phala를 저는 깨달음이라고 번역합니다. 영어로는 enlightenment라고 하지요.
수다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성문 4果 각 경지마다의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단지 깊이가 다른 것입니다.따라서 끊어지는 번뇌의 종류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해공님>>

테라와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네 번째 단계의 깨달음에 이른 존재에는 3 부류가 있습
니다. 부처님, 독각 그리고 아라한입니다.
According to Theravada teachings, there are three kinds of beings
who have reached the fourth stage of enlightenment: Buddhas,
Pacceka-Buddhas, and Arahants.

===> 여기서 Pacceka-Buddhas를 독각으로 번역하셨는데, 벽지불로
번역하지 않나요? 아니면 벽지불이나 독각이나 같은 뜻인가요? 음.. 연각은 어떤 것인가요? 독각과 연각은 차이가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나요? 요 부분은 용어 정립 문제와 관련되므로
가능하면 답변해주셨으면 합니다.


Garden>>

Pacceka-Buddha는 스승없이 홀로 깨달아서 독각이라고도 하고, 음사해서 벽지불이라고도 하며,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서 연각이라고도 합니다. 모두 Pacceka-Buddha에 대한 다른 번역입니다

해공님>>

All of these beings are enlightened persons, but their quality of
enlightenment differs from one another. The enlightenment of the Buddhas is the
best, that of Pacceka-Buddhas is inferior to the enlightenment of the Buddhas,
but is superior to the enlightenment of the Arahants, and the enlightenment of the
Arahants is the lowest of them all. Buddhas can ‘save’ many beings, or
rather they can help many beings ‘save’ themselves by giving them instructions,
but Pacceka-Buddhas do not ‘save’ beings because they are solitary Buddhas and
do not teach as a rule. The Arahants can and do ‘save’'beings, but not as
many beings as Buddhas do.

==>이건 영어 원문 구성 자체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세 존재의 깨달음의
질이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
엔 이 세 존재의 깨달음은 똑같습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스승으로서의 자질 내지 기
능, 즉 가르치는 자로서의 자질 내지 기능이죠. 부처는 많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습니
다. 벽지불은 대개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가르칠 수 있지만 부처님만큼 많이
가르치진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엔 세 존재의 깨달음은 똑 같지만 스승으로서의
자질과 특성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오해를 줄일 수 있는 더 엄밀한 표현이라고 봅니
다. 아니면 세 존재의 탐진치의 소멸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보시는 지요?
다른 말로 하면 세 존재에게 가르침을 펴는 반야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는 있겠지요. 반야(지혜)는 자신의 탐진치의 소멸 능력을 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게 도와주는 능력을 뜻하기도 할테니까요. 또는 해탈에는 차이가 없는데 해탈지견에는 차이가 있다는 표현도 가능할 거 같구요.


Garden>>

붓다와 독각 그리고 아라한이 탐진치의 소멸을 이루는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깨달음의 깊이가 다릅니다. 이를테면 붓다만이 가지고 있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애해도에서 말하는, 성문(聲聞) 제자들은 갖추지 못한, 붓다만이 지닌 여섯 가지 지혜(六不共智; cha asaadhaarana ~naa.na)가 있습니다.
그 여섯 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중생들의 다섯 가지 기능(五根; 信∙精進∙念∙定∙慧)에 대한 앎 indriyaparopariyatte ~naa.na
② 중생들의 개별적인 성향과 잠재된 번뇌에 대한 앎 sattaana.m aasaanusaye ~naa.na
③ 몸을 둘로 변화시키는 앎(雙身變智; yamakapaa.tihiire ~naa.na
④ 대비정(大悲定)의 앎 mahaakaru.naa samaapattiyaa ~naa.na
⑤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naa.na
⑥ 무장애지(無障碍智) anaavara.na~naa.na
『無碍解道』Pa.tisambhidamagga,「大品」의「智論」Mahaavagga ~naa.na-kathaa, Pa.tis I, 3, 158 ff.참조.

이처럼 세 성인의 깨달음의 깊이와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신통력이 있다하더라도 부처님과 신통제일인 목련 존자의 신통력에는 차이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해가 되셨는지요. 별 자료도 제시하지 않고 제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만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의문 나는 점이 있으시면 다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metta
Garden

출처 : 위빠사나 수행 가이드
글쓴이 : Garden 원글보기
메모 : 문제의 접근 방향
불교를 철학적으로 그 사상의 깊이를 심화해 온 것이 무아설이라고 한다면, 종교적으로 그 실천적 수용의 폭을 넓혀 온 것은 윤회설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하면서 질과 양의 양면에서 불교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윤회설이 불교의 본질적인 교의인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윤회설이 불교 이전의 정통 바라문교에서 발아하여,특히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세련되었다는 역사적인 이유이다. 즉 "우파니샤드의 윤회 개 념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단순히 유전과 환경이라는 기계적인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생에서 행한 행동의 집약된 본질과 잠재력의 영향에 의해 개성과 인격이 결정됨올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우파니샤드 사상의 이 요소 역시 불교에 의해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의 자타카 문헌은 그 수용의 實例로서 지적된다.
다른 하나는 윤회설에서 핵심이 되는 전제가 불교의 중심 교리인 무아설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이유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흔히 영혼이라고 표현되는 불멸의 본체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윤회를 가능케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 인도 일반의 윤회설인데,불교의 무아설은 그와 같은 불멸의 본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윤회설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윤회설이 불교의 비본질적 교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당하지는 않다.‘
그러나 본질과 비본질을 차별하는 것만으로는 불교를 지탱해 온 두 기둥일 수 있는 무아설과 윤회설의 의의를 바람직하게 인식할 수 없다. 석가모니는 엄연히 윤회를 전제로 하는 설법을 했고, 윤회설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신자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기능해 왔다. 솔직히 말해서 무신론자나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초원자적이고 정신적인 단일한 본체가 끝없이 生死를 거치면서 실제로 영속한 다는 점을 믿기 어려움을 발견하지만, 세계가 기계적으로 운행되지 않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윤회의 교의는 현세의 시련을 헤쳐 나가는 데 힘을 북돋워 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상의 합리성을 따지는 이론적인 시각은 기존의 교설들을 분석하는 반면에 무아설이 불교의 본질임은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자존적 본체를 부정하는 무아설은 불교 철학의 가장 독특한 일면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불교의 모든 교의는 다른 철학 체계와 종교에서도 다소 발견할 수 있으나, 무아설만큼은 명백히 이의 없이 오직 붓다에 의해서 교시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점에 기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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