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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벌 이야기 (가야와 빛벌)

narrae 2015. 11. 16. 03:37

빛벌 이야기 (가야와 빛벌)|[빗 벌] 比斯伐 가야

묵제(默齊)남도순 |                       

 

빛벌 이야기 (가야와 빛벌)

 

빛벌은 옛 삼한시대 이래 우리의 고향 창녕의 이름이다, 그련데 근간애 빛벌사람들간에 옛 국명에 관하여 군민들의 의견이 양분되어 창녕은 비화가야(非火加倻)라 하고 다른 한편애서는 비사벌(比斯伐) 이라고 주장 하면서 논쟁를 하는가 하면 창녕은 변한(弁韓) 12국이라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서는 이니다 창년은 진한(辰韓) 12국에 속해 있다 하고들 논쟁이 극에 달하여 이제는 감정이 개재한 편 가르기가 되어 완전히 양분된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는 형편이라 보기가 민망하고 안타깝다.

 

나 자신도 창녕 사람이고 또 고향에 에착심이 많아 내가 운영하는 카폐의 이름 마저도 [빛벌사람들]이라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침묵만 지키고 있는것이 너무 무책임 한것 같아 평소에 관심있게 연구하던 <빛벌>에 관한 글을 쓰서 나누어 드리고저 합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야와 빛벌 

 

  위선 본론으로 드러가기 전에 가야라는 이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게 되었는지가 규명 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가야라는 우리말을 한자(사실은 동이긑)가 도입되어 사용 되면서 가야(加耶) 가라(加羅) 또는 가락(加洛) 이라고 표기 하였는데 우리말의 음운볍에 따라 가라 또는 가락이 가락의 라 또는 락이 변하여 야로 된것으로 보인다.

 

한자의 표기로는 가야(加耶) ,가야(伽倻), 구야(拘耶)등이 있고 라 음으론는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라(伽羅)등이 있는데 이 모두가 우리말의 음을 한자로 음차(音借=음을 빌려옴)하여  표기한 것이지 한자의 본래의 의미인 뜻글로서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글자가 달리 사용 되었던 것이다, 

예컨데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史)에서 사용된 용어를 찾아보면 삼국사기에서는 加耶, 加羅, 加良등으로 사용 되었고 삼국유사에서는 伽倻 또는 駕洛으로 표기 되었다. 

 

▶가야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

 

여러분이 잘 아시다 싶이 삼한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한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傳)이다, 이 기록들은  3세기의 삼한에 대한 기록으로 마한 진한 변한의 기록으로 우리에게는 유일하고 대단이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이 위지동이전 한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상술 하기로 하고 이 삼국지에 앞서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司馬遷)이 기원전 1세기경에 찬한 사기(史記)와 기원후 1세기에 반고(班固)에 의해 찬술된 한서에도 조선전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때는 춘추전국시대 말 이후의 위만조선의 수립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등이 보이고 연(燕)나라의 동방의 진출등이 보일뿐 한반도의 남부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수엾다, 아마 이때까지도 중극인의 한반도 남부에 관한 지식의 한계였던것 같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위(魏) 촉(蜀) 오(吳)중에 위는 동방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로 3세기 초에는 요동의 세력자인 연 나라의 공손연(公孫淵)을 정벌하고 낙랑과 대방을 수복 하였으며 이어 모구험(母丘險)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정벌하여 도성을 함락하고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을 쫓아 남옥저 땅에까지 추격 하였다, 이와같이 위는 군사작전상 동방과의 접촉뿐만 아니라 수복한 낙랑 대방 지방의 조선인 및 특히 가야 지역의 특산물인 철(鐵)을 중심으로한 교역등을 바탕으로 한반도 남부 지방의 지식을 축적하게 되고 낙랑 대방 지방의 관리나 상인등이 교역을 하기 위하여 납부 지방을 왕래 하면서 지식을 녏히고 또한 조선인을 통역으로 이용하여 남부 지방의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여 어환(魚  )의 동이에 관한 기록인 위략(魏略)등의 기록이 이루어 젔고 또 서기 240넌에 제준(梯儁)등이 사신으로 왜(倭)릉 다녀왔고 서기 245년에는 장전(張政)등을 사신으로 왜에 보낸 기록이 있어 이들의 왜에대한 견문 및 왜와 교섭한 자료들을 지식으로 하여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이 작성 되었음으로 위지왜인전 등은 그 사료가치가 절대적이라 할것이다.

 

위는 삼한에 사신을 보낸적은 없으나 앞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낙랑 대방을 통하여 무역도하고 관리들의 여행 답사와 낙랑 대방 지역에 살던 조선인의 통역을 통하여 삼한 지역의 정보를 많이 얻었던 것이다. 실제로 후한서에는 통역에 의한 교섭이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지의 동이전의 기사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삼국지의 찬자 진수(陳壽)는 서기223년에 출생하여 서기297년 까지 생존 하였는데 그의 생애 70여넌의 전반은 위 나라에서 살았고 후반은 진나라에서 살았는데 위지동이전이 저작된 시기는 진수가 진나라의 저작랑으로 있던 태강(太康)년간인 280 ~ 289년 사이에 저작된 것인데 진나라는 위나라를 이어 받았음으로 위조의 기록 문서도 모두 물려 받았을 것이고 특히 어환의 동이에 대한 위략을 많이 인용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삼국지중 동이전이 기록된 것은 위지 뿐인데 그 이유인즉 위는 동이와 이웃하고 지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섭이 많았던데 있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위는 237년 ~ 239년에 낙랑과 대방을 수복하고 위지 마한조에 보면 같은 시대에 명제(明帝)가 대방태수 유흔 (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그 군을 정하고 여러 조선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 인수(印綬)를 가사(加賜) 하였다고 하며 하호(下戶)들에게도 조알(朝謁)하는 자에게는 의책(衣  )을 주었으며 스스로 의책과 인수를 착용한 사람이 천여인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낙랑 대방을 통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의 관작을 받고 왕래가 잦았으니 한반도 남부의 여러 정황을 상세히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위나라 시대의 진수의 기록은 그 시대의 사실과 사정을 그 시대에 살던 사람이 기록 하였으니 사료로서 그 가치가 크며 일급 사료라고 할것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들은 가야의 모체인 삼한시대를 말 하는것이지 엄밀한 의미로는 가야시대사기는 아니다 가야는 4세기에 와서 비로소 가야가 되는데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삼한시대 까지 소급하여 가야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는 역사를 기록한는 사관으로서는 잘 못된 것이라 하곘다.

 

▶1 ~ 3세기의 전기가야(前期加耶=진한시대)

 

앞의 장에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대해서 자세히 론하였는데 가야의 국가형태로서는 이것이 최초이다.

위지동이전의 한전에는 변진(弁辰)이란 용어를 쓸때는 변한과 진한을 함께 쓰고 때로는 변한이라는 용어만 쓰기도 하였다, 위지의 변진조의 기록에는 혼란을 일어킬수도 있다 하였튼 변한과 진한의 26국의 이름이 열거 되었는대 군미국(軍彌國)과 마연국(馬延國)이 중복되어 26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군미국과 마연국을 하나로 보면 24국이 된다, 위지동이전의 사료에 대한 가치는 앞장에서 론한바와 같이 3세기경의 동이에 대해서는 그이 절대에 가까울만치 그 내용이 사실적이다, 앞장에서 진수가 어환의 많은 기록을 참고 하였다 하였는데 어환 자신도 위조의 랑중 벼슬에 있었지만 삼한이나 왜에 직접 사신으로 간 기록은 없고 또한 동이의 여러 나라인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삼한 등에 간적은 없는듯 하나 위략은 오늘날에는 일서(逸書)로서 참고 할수는 없지만 위지를 비롯하여 그 내용을 참고 한것이 많아 그 내용의 성격은 대략 알수가 있다, 특히 당나라의 장초금(張楚金)이 지은 한원(翰苑)에 옹공예(雍公叡)가 주(注)한것에 위략을 인용된곳이 많아 오늘날 위지 또는 위략을 연구 하는대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어환(魚  )의 생존 연대는 진수(陳壽)와 그이 같은 연대인것 같으나 진수 보다는 나이가 많은것 같고 위략의 일문(逸文 )과 위지동이전의 기사를 살펴보면 그 문장 내용이 그이 흡사하다 어떤곳은 위략의 내용이 더 원 자료에 가까운 곳도 있으니 진수의 동이전 내용이 그이 어환의 위략에서 나온것 같다,

 

어환도 동이의 어러나라 즉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삼한 등에 직접 사신으로 가지는 안한것 같지만 동이 여러 나라의 정치적 교섭에 따은 견문 기록과 특히 한사군 설치 이래로 낙랑 대방의 관리들과 상인들의 내왕 특히 위지동이전의 왜인 기록은 앞에서 기술한 장준 제준등이 실지로 왜지에 가서 견문한 사회 산물 리정 풍속 신앙등을 기록한 것이라 정확한 것이라 하겠고 삼한에 관한 기록도 낙랑 대방등의 상인의 왕래등에 따른 견문은 아닌것 같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인 관리 또눈 지식인에 의한 전문적인 기록인것 같다.

 

설사 어환이나 진수가 실제로 삼한땅에 오지 않했드래도 낙랑 대방땅은 옛 조선땅이고 또 그당시에도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었고 삼한의 철을 매개로한 무역으로 위를 비롯한 북방족의 수요는 그이 절대적이 였으니 낙랑 대방 지방의 관라들도  조선족이 많었을뽄만 아니라 삼한 지방의 유력자들이 위 조정에 알현 하면은 의책과 인수를 내려주어 이를 패용한 사람이 100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삼한의 모든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것 같다, 아마 낙랑 대방의 관리들이 삼한을 왕래 하면서 또눈 삼한 사람들의 의책과 인수를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실제의 삼한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 하였던것 같다. 실제로 삼한 사람들이 삼한의 상황을 기록 한다고 하드라도 위지동이전 한전의 기록 이상으로 작성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또 이 기록들은 서기 250년을 전후한 기록을 직접 견문하여 기록한 것이라 앞에서도 말한것과 같이 일급 사료인 것이다.

 

▶위지동이전한전(魏志東夷傳韓傳)

 

위지동이전에는 한(韓)에 1, 마한 2, 진한 3, 변한 이라고 하였다, 한원에 인용된 위략에도 변진(弁辰)이라 돠어 있고 위지한전도 역시 아래절에서 역시 변한을 변진라고 쓰고 있다 다만 아래절에서 변진한합24국이라고 한것은 변한과 진한을 합해서 24국이라는 뜻이다.

 

▶변진 24국명 

 

 우선 위의 사서(史書)에서 소개된 변진 24개국은 ① 기저국(己抵國) 

 ② 불사국(不斯國).③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④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⑤

근기국(勤耆國).⑥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⑦ 변진고자동국(弁辰古資彌凍國).⑧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⑨ 염해국(  奚國).⑩ 변진반로국(弁辰伴路國).⑪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⑫ 군미국(軍彌國).⑬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⑭ 여담국(如湛國).⑮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16)호로국(戶路國).. (17)주선국(州鮮國).. (18)마연국(馬延國)..(19)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20)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21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22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23 사로국(斯盧國).24 우중국(優中國) 등이다. 이 가운데 ‘변진(弁辰)’자를 앞에 붙인 12개 국은 변한(弁韓)에 속하고, 붙이지 않은 12개 국은 진한(辰韓)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通說)인 것이다.

그리고 군미국(軍彌國)은 변진군미국(弁辰軍彌國)이 또 보이고 마연국(馬延國)도 두 번 보이나 이것은 기사(記寫 : 베껴 적음)의 잘못에서 온 것으로 보아 제외하였다. 이「삼국지」의 기록은 A.D 250년대에서 270년대의 한반도의 남반부(南韓)에 관한 기록으로, 이 24국의 이름은 당시 남한 각지에 분거(分居)한 부족집단의 명칭이다.

 

변한과 진한을 함께 기록 하였음으로 변한에 속한 나라만 추려 보면은 다음과 같다.

 

우선 위의 사서(史書)에서 소개된 변진 24개국은 ① 기저국(己抵國) 

 ② 불사국(不斯國).③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④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⑤

근기국(勤耆國).⑥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⑦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⑧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⑨ 염해국(   奚國).⑩(弁辰古淳是國).⑨  변진반로국(弁辰伴路國).⑪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⑫ 군미국(軍彌國).⑬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⑭ 여담국(如湛國).⑮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21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22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23 사로국(斯盧國).24 우중국(優中國) 등이다. 이 가운데 ‘변진(弁辰)’자를 앞에 붙인 12개 국은 변한(弁韓)에 속하고, 붙이지 않은 12개 국은 진한(辰韓)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通說)인 것이다.

그리고 군미국(軍彌國)은 변진미국(弁辰彌國)이 또 보이고 마연국(馬延國)도 두 번 보이나 이것은 기사(記寫 : 베껴 적음)의 잘못에서 온 것으로 보아 제외하였다. 이「삼국지」의 기록은 A.D 250년대에서 270년대의 한반도의 남반부(南韓)에 관한 기록으로, 이 24국의 이름은 당시 남한 각지에 분거(分居)한 부족집단의 명칭이다.

 

▶아래에 변한에 속한 나라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변진미리동국(弁辰彌離彌凍國) 2)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3)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4)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5)  변진반로국(弁辰伴路國) 6)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7)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8)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9)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10)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11)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12)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등이다,

 

그러나 이 12개국중 현재의 지명에 비정할수 있는곳은 5개국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변진 24국을 열거 하면서 그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24국의 위치를 비정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5개국은 삼국사기를 참고하면 비정이 가능하고 특히 구야국 독로국은 위 나라의 사신이 왜로 가는 리정을 기록해 놓아 한반도 남부를 거처서 가기 때문에 구야국 독로국을 거쳐서 가기 때문이다.

 

위지에서 독로국의 위치에 대하여 독로는 왜와 더불어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왜의 영토와 독로국이 육접(陸接)해 있었다는 뜻이 아닌데 이를 육접한 것으로 해석하여 한때 3세기경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여 임나 일본부설이 사실이라고 주장 하기도 하였다, 위지 왜인전에 보면 [왜는 대방의 동남 대해의 가운데 있다]라고 하여 왜인이 섬나라에 살고 있음을 분명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의 사신이 대방으로 부터 왜에 이르는 항로를 기술 하기를 해안을 따라 수행(水行)하니 한국(마한)을 지나 혹은 남으로 가고 혹은 동으로 가서 그 북안 구야한국에 이르니 7000여리이다. 여기서 한바다를 건너 1000여리를 가니 대마국(對馬國)에 이르렀다, 또 한바다를 건너기를 천여리를 가니 말로국(末盧國)에 이르렀다 라고 하였는데 말로국은 일본의 구주 북단의 사가현(佐賀縣) 송포군(松浦郡)이다, 이와 같이 위지는 한이나 독로국이 남쪽에 접하여 있다는 말은 육지로 접하여 있다는것이 아닌 것이다, 또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왜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서 침공해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하여 임나일본부를 두었다고 주장할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변진 12국중 오늘날의 지명에 정확히 비정할수 있는것은 5개국 뿐이지만 12국의 위치가 모두 가야의 영역내에 있는것은 알수가 있음으로 변한 연맹이 후일 가야연멩이 되고 진한 연멩이 뒷날 신라 연대로 통합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변진 12국중  확실이 현대의 지명에 비정 할수있는 5국

 

① 미리미 동국

    밀양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밀성군으로 본래 밀불(推火)이다 [불]이란 우리 고어 나라 

    또는 성이라는 뜻으로 ㅂ+ 아래아 로서 성(城)이라는 한자 표기로 사용 되었다 미동(彌 

    凍)은 변진 24국중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에서 보는바와 같이 ㅂ+아래아(, )또  는 불과 같이 나라라는 고어로 생각된다.

 

 구야국

    야(耶)는 우리말 "야"로 예컨데 안야국의 "야"와 같다 구야국은 위지 왜인전에서 위나라

    의 사신이 대방을 떠나 왜의 구주로 가는 항로를 기록 하였는데 한반도 남부의 구야에

    이른다는 기록을 보드라도 구야국은 김해임에 틀림이 없다.

 

③ 안야국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함안군은 "阿尸良國"이며 阿那加耶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즉 아시

    랑의 "시"자는 사이 ㅅ 으로 "앗라"이다, 이 "앗나"가 아야(阿耶)로 되고 또 앗나가 아야

    아야로 발음된 것이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 아라(阿羅 - 一作 耶)가야 (지금의 함안)이

   라고 하였다 즉 아야는 아라로 발음된 것이다.

 

④ 고자미동국

    고자는 고자(古資)로서 고성군의 고명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성군은 본래 고자군이

    었다, 고자(古資) 고자(古自)는 같은 음의 표기로서 資, 自,는 城의 고어이다.

 

⑤ 독로국

    瀆은 우리말 발음으로 "독" 盧는 고명에 "내"로 표기 하였다 진한의 사로국의 "盧"는 "내"

    음의 표기이다, 사로국은 徐那伐(서내벌)의 표기이며 斯는 "새"  盧는 "내"음의 표기이다

    그르므로 瀆盧는 "독내"인바 우리의 어문법상 동내가 된것인데 중국의 유명한 산동성의

    東萊를 차용하여 東萊가 된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동래군은 본  거칠산군

    (居柒山郡=거칠다는 吏讀文) 경덕왕시 개명 금인지(今因之)라 하였다.

     居柒山은 지금의 동래군 황산(荒山)이다.

 

 

 

 ▶변진24개국의 위치비정

울산과 언양지역은 삼한 중 진한(辰韓)부족연맹에 속한다. 이 부족연맹은 여러 부족국가가 자연적으로 연맹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부족국가의 규 모는 대개 지금의 시(市).군(郡)이나 면(面) 단위의 지역으로 생각하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언양지역은 대곡리 반구대암각화나 울주천전리각석 등의 유적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석기 말기나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삼한시대에 있어 본읍(언양읍)에 관하여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긴 어려우나 본읍이 속한 당시의 역사적 위치, 즉「삼국지」<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변진전(弁辰傳)에서 대강의 윤곽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선 위의 사서(史書)에서 소개된 변진 24개국은 ① 기저국(己抵國) 

 ② 불사국(不斯國).③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④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⑤

근기국(勤耆國).⑥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⑦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⑧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⑨ 염해국(  奚國).⑩ 변진반로국(弁辰伴路國).⑪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⑫ 군미국(軍彌國).⑬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⑭ 여담국(如湛國).⑮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21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22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23 사로국(斯盧國).24 우중국(優中國) 등이다. 이 가운데 ‘변진(弁辰)’자를 앞에 붙인 12개 국은 변한(弁韓)에 속하고, 붙이지 않은 12개 국은 진한(辰韓)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通說)인 것이다.

그리고 군미국(軍彌國)은 변진군미국(弁辰軍彌國)이 또 보이고 마연국(馬延國)도 두 번 보이나 이것은 기사(記寫 : 베껴 적음)의 잘못에서 온 것으로 보아 제외하였다. 이「삼국지」의 기록은 A.D 250년대에서 270년대의 한반도의 남반부(南韓)에 관한 기록으로, 이 24국의 이름은 당시 남한 각지에 분거(分居)한 부족집단의 명칭이다.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이 24국을 비정(比定) 한 바가 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 진단학보(震檀學報)에 발표된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1896~1989) 박사의 논문 <三韓問題의 新考察>과 일인(日人)학자 쓰다사우(津田左右吉) 박사의 저서「滿鮮歷史地理(下)」와 광복 후(1954년)에 발간된 일인 학자 수에마쯔(末松保和) 박사의 저서「新羅史의 諸問題」중의 진한 12국 현지 비정설(比定說)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한 12국의 위치비정도

  

학자.
나라 이름
李丙燾津田左右吉末松保和
ⓛ 기저국(己抵國)安東未定※彦陽(居知火)
② 불사국(不斯國)昌寧(比自火)未定昌寧(比自火, 比斯伐)
③ 근기국(勤耆國)迎日未定迎日(斤烏支)
④ 난미리미동국     (難彌離彌凍國)義城郡  丹密面達城郡 解顔.義城郡 丹密面
⑤ 염해국(  奚國)蔚山未定安東 부근 (今 義城郡 玉山面 부근)
⑥ 군미국(軍彌國)未定(弁軍彌國을 泗川市 昆陽面에 比定함)金泉市 開寧面金泉市 開寧面
⑦ 여담국(如湛國)軍威郡未定善山 부근
⑧ 호로국(戶路國)尙州郡 咸昌面 未定沃川 黃澗
⑨ 주선국(州鮮國)未詳子春. 忠北 堤川市解顔(大丘 屬縣)
⑩ 마연국(馬延國)未詳未定迎日郡 杞溪面 (今 浦項市 北區)
⑪ 사로국(斯盧國)慶州慶州慶州
⑫ 우중국(優中國)淸道郡의 대부분 지역未定寧海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3인 학자가 모두 일치하는 것은 오직 경주의 사로국뿐이다. 또「한원(翰苑)」에는 기저국(己抵國)을 기사국(己私國), 염해국(  奚國)을 염원국(  爰國), 호로국(戶路國)을 호시국(戶尸國), 우중국(優中國)을 우유국(優由國)으로 각각 쓰고 있으나 모두 비슷한 글자로 된 기사(記寫)의 잘못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의「한원(翰苑)」은 당(唐)나라 측천무후 때 남양후(南陽侯) 장초금(張楚金)이 서기 660년경에 찬(撰)하고, 옹공예(雍公叡)가 주(註)를 붙인 일종의 사류부(事類賦)로 본래는 30권이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그 중 번이부(蕃夷部) 1권만이 일본(大宰府神社西高.家)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번이부의 내용은 흉노(匈奴), 오환(烏桓(丸)), 선비(鮮卑), 부여(夫餘), 삼한(三韓),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 숙신(肅愼), 왜(倭), 남만(南蠻), 서남이(西南伊), 양월(兩越), 서강(西羌), 서역(西域) 등으로 자세히 분류되어 있다. 즉 중국 본토(中原)를 중심으로 그 주변 소국들의 기록이다.
예컨대「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는「위략(魏略)」등이 인용되고 있어, 우리 나라 고대사의 연구에 특히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이 번이부는 일제시대인 1922년 쿄오토대학(京都大學) 문학부(文學部)에서 영인(影印) 발간되었다.

「경상남도지」상권(上卷)(1960) 제2편 제1장(원시 및 삼한시대의 경남)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는 정중환(丁仲煥) 박사의 소론(所論)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불사국(不斯國)은 창녕(昌寧)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定說)이고, 기저국(己抵國)은 말송(末松) 박사의 언양설(彦陽說 : 居知火縣)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기저(己抵 )는 한원(翰苑)에 ‘기사(己私)’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사(記寫)의 잘못에 유래된 것이라 하겠으나, 또한 만약 ‘己私’가 옳은것이라고 하면 己私는 ‘己’를 <이>라고도 발음하니 <이사>가 되는 것으로, <이사>는 <이서> <이세>와 상근(相近)하여 이서(伊西)의 와전(訛傳)이라고 볼 수 있으니, 이서국(伊西國)은 지금의 청도군(淸道郡)으로 언양과도 연접(連接)되어 기저국(己抵國)은 이서국(伊西國) 즉 청도군 內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 이서국(伊西國)은 이서고국(伊西古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북 청도군에 있었던 신라 때의 나라 이름으로「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14대 유례왕(儒禮王) 14년(297) 정월 이 나라의 침입으로 금성(金城 : 경주)이 한때 위험했다고 한다. 이 나라가 있던 곳인 청도군 이서면(伊西面)의 옛 이름이 이서군(伊西郡)이고「韓國地名沿革考」(1961, 權相老 편)), 현재 이서면(伊西面)은 청도군의 서쪽에 위치하여 언양지역과는 약 100리 안에 위치하고 있다.

 

▶변진 12국의 위치비정

 

1) 변진미리동국(弁辰彌離彌凍國) 한원(翰苑)에는 凍을 陳으로 씀

   이 병 도        밀양   (推火郡)

   津田左右吉    미정

   鮎貝房之進    밀양

 

  2)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한원에는 塗를 樓로 씀

     이 병 도      칠원  (柒原)

     津田左右吉   칠원 (紫 吐)

     鮎貝房之進   미상

  

 3)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

    이 병 도       고성

    津田左右吉    미상

    鮎貝房之進    고성

 

 4)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이 병 도        진주 ? (固陀)

    津田左右吉     진주   (古陀 伽耶)

    鮎貝房之進     진주   (居陀)

 

5)  변진반로국(弁辰伴路國)

     이 병 도       성주

     津田左右吉    성산가야(本彼 - 半路國)

     鮎貝房之進    초계 (古名 八溪)

 

6)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한원에는 辰자가 있음

    이 병 도        하동군 악양면

    津田左右吉    미정 

    鮎貝房之進    미상

 

7)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이 병 도       고령

    津田左右吉    미정

    鮎貝房之進    미상

 

8)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이 병 도       金泉郡 開寧面

    津田左右吉   가야 고령

    鮎貝房之進   開寧 (古名 甘文)

 

9)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이 병 도       김해

    津田左右吉   김해

    鮎貝房之進  고령 (고명 가야)

 

10)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한원에는 走를 定으로 씀

     이 병 도     금천군 조마면 부근

     津田左右吉  합천군 초계면

     鮎貝房之進  추정 卒馬로(卒馬는 쇠말로 김해에 비정)

 

11)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이 병 도      함안

     津田左右吉  함안

      鮎貝房之進  함안

 

12)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이 병 도      동래

     津田左右吉  거제

     鮎貝房之進  거제 (古名 裳郡)

 

 

▶진한12국의 위치비정에 대한 정중환 박사의 소견 

 

 1) 기저국(己抵國)

  末松保和바사의 설이 합당 하다고 보나 그러나 한원에서는 己私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

  못 기록한 것으로 보드라도 만약 기사가 맞다고 생각 한다면 己私는 己를 [이]라고도

  발음하니 [이사]가 됨으로 이사는 [이사] [이세]와도 상응하여 이서(伊西)의 와전이

  라고도 볼수 있으니 이서국은 지금의 청도군으로 彦陽과도 연결되어 기저국은  이서

 국 즉 청도군내 라고도 생각 할수있다.

 

 2) 불사국(不斯國)   

  불사국은 창녕이라는 것이 그이 정설이라 여러 학자들간에 이의가 없다.

 

 3) 근기국 (勤耆國)

  근기국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臨汀縣本斥烏支縣 景德王改名 今迎日縣]이라 하였는데 근

  기는 근오지와 음이 비슷 함으로 영일로 비정 하는데 영일 지방에 과연 이런 부족 집단이

  있은는지의 여부는 현재의 유적과 사로국과의 거리를 보아서 과연 이런 집단이 있었던가

  라는 의심이 되나 단언하기는 곤란하다.

 

4)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난미리미동국은 의성 단밀로 보나 미리미동국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간조군(間詔郡)의 영

  현으로 단양군 목무동미지[丹陽顯 木武冬彌知]로 설명되나 난(難)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

  지 형용사에는 틀림이 없으나 우리말의 [난다]를 퇴수(退水]로 해석하여 [난물들]로

  는데 일본어 나니와= 난파(難波=大阪)와 같이 낙동강 연변의 충적지에 해당

  될 것이니 대구나 현풍을 생각 하는데 대구는 그 조건에 맞지않고 현풍으로

  비정한다, 현풍은 그 위치로 보나 부족 집단이 성장할수 있는 곳으로 [玄風縣 本推良火縣

  (一云三良火縣) 景德王改名 今玄風縣]이라 하였다, 추량화는 밀불 삼량화 역시 밀불이다,

  三은 일본어의 수사(數詞) [미 = 三]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곳도 창녕과 같이 가야연맹에

  빠진 곳이다.

 

5) 염해국(  奚國)

  염해국은 未松 박사설이 타당하다고 보며

 

6)군미국(軍彌國)

 

  군미국은 김천 개령으로 일치하고

 

7) 여잠국(如湛國)

 

  군위군

 

8) 호로국(戶路國)

 

  古尸 = 忽 = 戶路로서 未松 박사설이 타당하나 당시 진한이 추풍령을 넘어서 까지 있었다

  고 생각되지 않는바로 나는 호로가 홀골(忽骨)과 같은 말이라는데 동의하고 이 호로국은  영 천에 비정한다, 영천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림고(皐臨皐)군의 속현에 [臨川縣 助賁王時 伐骨火小國 置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永川]이라고 하고 동서 제사조에는 [大祀

  三山 一奈歷習比部 = 骨火切也火部 三穴禮大城郡]이라 하여 골야절야화부(骨也

  切也火)라고 하였는데 홀골(忽骨) 호로(戶路)와 통한다.

 

9) 주선국(州鮮國)

  주선국은 현재로서는 알수엾고 未松 박사설에 의하여 대구 해안(解顔)으로 보는데 따른

    다. 

 

10) 마연국(馬延國)

  마연국은 未松 박사가 영일군의 (기奚)로 비정한 바이나 필자는 선왕유사기(先

  王遺事記)의 마연부장(馬延部長)을 참고로 변한을 성주라고 보는 견지에서 마연곡얼 셩

  주라고 보는 바이다.

  역사집략(歷史輯略) 권2에 마한국왕20년조에 [先是蓋守驗爲弁韓官守 驗貪暴 忘殺弁韓

  馬延部長 春正月 弁韓各部民 群起逐守驗降于新羅]라고 한것을 이미 변한조에서 발힌바

  있다, 삼국지의 마연국은 이 마연부가 아닌가 싶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성주룰 일리(一利)군 또는 성산군이라 하고 경덕왕이 가리현(加利縣

  )으로 개명한 곳인데 일리(一利)라는 말은 지금도 부락이라 사용되는 말로 사용되는 바

  이니 사개부락이 사일리(四一利)라고 하고 동리 산을 [일리갓]이라고 한다. 일리(一利)

  를 한역(漢譯)한 것이 리산(里山)으로 되었다, 일리는 하늘이니 마을을 마연의 원 이름

  이라고 생각한다,

  성주는 본피와 일리 양현이 모두 성주군내인데 본피현은 本 변한 본부이고 일리현은 본

  래 변한의 속부였던 것이다.

 

11)사로국(斯盧國)

  사로국은 경주이다.

 

12) 우중국 (優中國)

   우중국은 이병도 박사는 청도라 하고 今西龍은 영해라고 하였는데 나는 기저국은 청도

   라 보며 영해는 于尸一于柚에서 생각한 것이나 3세기 후반경에 영해 방면에 독립된 부

   족 국가가 있을수 없다고 생각하여 현제의 생각으로는 상주로 생각한다. 상주는 경주와

   같이 영남에서 가장 중요한 도회지 였으며 경상도의 도명도 상주에서 유래할만큼 옛부

  터 지방 중심지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尙州沾解王時取沙伐國爲州 法興王十一年 梁

  普通六年初 置軍主爲尙州...]라 하였는데 첨해본기에는 사벌국을 취힌 기록이 없다,  취

  하여 주로 삼았다고 하나 주의 설치는 법흥왕시 상주를 설치 하였는데 소급하여 한 말인

  것 같다.

  사로부족(斯盧部族)과도 초기부텨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으로 신라 건국 설화에 보이

  는 돌신고허촌(突山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도 이 상주와 관계된것 같으며 경주와

  그이 대등한 유력한 부족 집단이 있어서 법흥왕띠 최초로 군주(軍主)를 두어 상주(上州)

  라 함도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경주를 서벌(徐伐) 서라벌(徐羅伐)라고 한

  데 대하여 상주는 이도(伊道 = 督啄)이라 한것이라 하고 경산(慶山)을 압독(押督)(道,啄)

  이라 하였으며 청도를 이서(伊西) 양산을 삽량(揷良)이라고 한것이라고 생각 하는데 이

  (伊)는 上. 高의 뜻이며 압(押)은 下, 前, 南, 의 뜻이며 서(西)는 서(徐)와 같이 신(新),동

  (東)의 뜻이라고 본다, 따라서 상주는 윗들 또는 웃들이 되고 대구(大邱)는 들이 되며 경

  산은 앞들 또는 아랫들이 될것이며 청도는 上新道(良)로 윗들의 뜻이고 양산은 下新道로

  새앞들, 새 아랫들의 뜻이된다. 상주를 윗들이라고 보면 上州란 마은 한문으로 바꾼 말이

  겠고 우중국(優中國)이란 말은 優는 上, 중은 道, 良과 같이 사용한 것으로 보아 윗등의

  음역이라고 보며 따라서 우중국은 尙州라고 보는 것이다. 지리적으로나 유물 유적으로 보아

  상주가 부족 국가시대에 중요한 중심지 였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다. 優를 上으로 보는 예

  는 나의 견해로는 우위거(優位居) 위거(位居) 고거(古渠) 위만의 위(衛) 까지도 같은 것이

  라고 생각한다.

 

▶변진 12국의 비정에 관한 소견

 

 (1) 은 밀양 (2) 칠원(柒原 (3) 고성 (4) 진주 (5) 성주 (7)고령 (8)김천 (9)김해 (11)함안

   (12)거제는 의의가 없고 (6) (10)은 다소 이견이 있다.

 

 (6) 낙노(樂奴) 는 악노 악나로 읽어서 악양(岳陽)에 비정한듯 하나 무리가 아닐까? 그

  렇다고 나로서도 대안이 없다.

 

  (10) 주조마국(走漕馬)은 김천의 조마면(助馬面) 혹은 초계(草溪)등에 비정하나 점패

   (鮎貝)씨의 추천함과 같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졸마국(卒馬國)이라 생각한다, 졸마는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 [鉉風縣本召三縣 景德王改名 今召三部曲]이 보이는데 (三은터럭 삼자임)三은 삼(麻)으로 졸마(卒麻)로 즉 소삼과 상통하는 것으로 지금의 함안군 내

  의 지명이다.

 

  이상을 대충 살펴 보았는데 부족한 점과 의문점이 많다,

  첬째 지명의 정 오는 차치 하드라도  당연이 24국에 포함 되어야할 곳 예컨데 경산(慶山

  ) 합첱(陜川) 등지가 비정에 빠저 있고

 

  둘째로 한 지방에 2국 이상을 비정함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데(하기야 수백호

  의 부족 집단이 있으니) 가능 하다고 생각하나 우선 이 정도로 정리를 해두고 후일의 연

  구를 기다리기로 하자.

 

▶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연맹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 자료로 기록 되었다

 

 A.  1) 아라(阿羅) 一作耶 今咸安  2) 古寧 今咸寧  3) 大伽耶 今高靈  4) 星山伽耶 今京山

          一云碧珍  5) 小伽耶 今古城 아라 하였고 또 다른 자료에는 본조사략(本朝史略)을

          인용하여 비화가야를 넣었는데 본조사략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B.  1) 금관(金官) 爲金海府   2) 高靈 爲加利縣  3) 非火 지금의 창녕 고령을 잘못 기록 한

        것 같다. 나머지 둘은(餘二)은 阿羅 , 星山인데 앞에서는 星山 혹 碧珍伽耶라 함.

 

 이 두가지 자료를 보면 A에서는 금관가야의 이름이 빠지고 B에선는 고령가야의 이름이 빠

 젔다, 또 A에서는 소가야(고성)가 들어 있고 대신 비화가야(창녕) 가 빠지고  B에서는

 소가야가 빠지고 대신 비화가여가 들어 있어 양 자료 사이에 5가야의 이름에 차이가 생겼다, 또 A에서는 금관가야의 이름이 빠지고 B에서는 고령가야의 이름이 빠젔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즉 가야 전기에는 김해가야를 대가야라 불러 가야의 맹주국이 었는데 후기에는 고령가야가 맹주국이라 대가야라고불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一然)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5가야만 열거 하였던것 같다.

 

▶ 창녕의 옛 이름애 대한 고찰

 

 

창녕의 옛 이름으로는 삼한시대인 삼국지위지동이전의 한전에 수록된 불사국(不斯國)이 최초이다, 그러나 이 불사국이 과연 창녕에 대한 옛 이름인지 또는 창녕 이외의 다른 지역의 이름인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다민 여러 학자들의 불사국을 창녕에 대한 비정에 대해서는 별 이의는 없는것 같으나 왜 불사국을 창녕에다 비정 하는지에 대해서 역사적이나 지리적 위치에 대한 납득 가능한 설명은 하나도 없다. 일제 강점기인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비정 가록을 별이의 없이 받아 드리는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렇다고 필자 자신도 가부를 판단할 자료가 있는것도 아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왜 창녕을 불사국에 비정 하였는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위지동이전한전에서 불사국을 진한 12국으로 분류 하였다, 그르면 창녕이 위치한 지리적인 위치가 진한 지역인가 하면 분명이 지리적인 위치는 변한 지역이다, 대체로 변한과 진한을 지리적으로 구분해 보면 경상남북도를 가운대를 종으로 남북으로 선을 끄어놓고

동쪽은 진한 지역이고 서쪽은 변한 지역인데 분명이 창녕은 서쪽의 변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창녕을 진한으로 분류 하였는가. 위선 창녕을 이웃한 달구벌인 데구 압독국인 경산 청도군인 이서 더 남으로 내려와 밀양인 미리미동국 등이 모두가 창녕의 북쪽과 동쪽으로 위치 하였는대도 모두가 변한으로 분류 되었는데 유독 창녕만 진한 12국으로 분류 되었다는데는 반듯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변한 12국도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정확히 오늘날의 지명에 비정할수 있는 곳도 5개국에 불과한데 그 근거가 삼국사기 지리지와 위나라의 사신이 왜에 사신으로 가는 경유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왜 창녕을 진한으로 분류 하였을까?

 

1)   나는 삼국사기 신라 파사왕 29년 서기 108년의 기록에 보면 "군사를 보내어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처서 아울렀다"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을 주목한다,

이 기록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리는데, 반대하는 쪽은 벌써 이 시기에 사로국(斯盧國)이 여기까지 침공할수 있는 힘이 있었을까? 하는 쪽아고 이 기록을 연기(年記)의 정확성은 의심은 가지만 기사 내용은 인증 하고자 하는쪽의 학자는 고 정중환(丁仲煥) 박사 인데 나도 정중환 박사의 의견에 동조한다, 왜냐하면 이때는 사로국은 소문국(의성) 달구벌(탁국) 압독국(경산) 이서국(청도) 미리미동국(밀양)을 이미 복속 하였으니 다시 서북으로 진출 하는것이 자연 스럽고 무리가 아닌것 같다, 또 108년이라는 연기는 인증을 못하드라도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전이 찬술될 280년~ 289년 이전 까지는100년이라는 시간적인 공간이 있었음으로 그 사이에 사로국에 복속 또는 불사국이라는 정치적인 체제는 유지 하면서 사로국의 울타리 속으로 드러 갔다면 위지동이전이 찬술될때는 진한으로 분류 될수도 있었을 것이다,

 

2) 북사국(不斯國)이란 이름도 중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서 붙힌것은 아닐 것이고 틀림없이 우리말인 빛벌이란 이름울 한문이라는 글자의 음을 빌려서 기록 하였을 것인데 빛벌이라는 "비"를 음차(音借)해야 할곳에 왜 불(不)자를 차용 하였는지에 대해 50년 가까이 고민해 왔으나 아직까지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불(不)자 밑에 사(斯)자를 음차 한것을 보면 우리말의 사이 ㅅ 으로 빌려온것이 틀림이 없는데 왜 윗자를 不자를 음차한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중국의 상고음(上古音)과 중고음(中古音)이 어떠 하였는지를 조사를 해 보았으나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고 다만 불(不)자와 뜻이 같은 비(不+ㅁ )자가 있는데

기사(記寫)의 잘못이라고 생각해 보았으나 이것도 아닌것 같고 또다른 비자로는 (丕 = 클 비)가 있으나 이것도 만족 스렵지 못하고 고민만 더해갈 뿐이다, 만역 不자를 비로 발음

하는 근거만 찾을수 있다면 不=비 가 되고 斯=ㅅ 이되고 國=나라 또는 별(伐)이 되어 비+ㅅ+벌 =빗벌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해결 하여야 할것이지 나로소도 난감하다 한편으로 비(比), 비(非), 불(不) ,삼(三), 완(完), 전(全) 등의 글자도 빛(光)의 뜻으로 사용된것을 보면불사국은 창녕으로 비정 하는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하튼 이런 의문이 있는것은 무조건 내 생각대로 단정 할것이 아니라 의문은 의문으로 전하고 믿음은 믿음으로 전하는것이 학자적인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학계의 소수 의견이기는 하나 불사국이 진한으로 분류되어 있으니 경복 안동 그리고 경남 언양으로 비정하는 의견도 있으며 경남 양산에서는 시지 편찬을 하면서 불사국을 [천관우의 가야사연구 (1991년간행 )]과 백승욱의 [가야각국사연구]를 참고하여 양산으로 비정

하면서도 그러나 불사국은 종래부터 지금의 창녕지역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창녕의 옛 지명인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가 불사(不斯)와 음(音)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비(比)’·‘불(不)’·‘비(非)’ 등은 모두 빛[光]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 한 것이고, ‘사(斯)’·‘자(自)’ 등은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촉음 역할을 하는 글자라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즉 ‘비(比)’·‘불(不)’·‘비(非)’ 등은 모두 빛[光]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 한 것이고, ‘사(斯)’·‘자(自)’ 등은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촉음 역할을 하는 글자라고 생각된다.  라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 상고사에 대한 인식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4국시대는 물론 고려 조선에 이르도록 가야에 대한 역사 인식은 아예 잃어버린 망각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고대사서로서는 유일 하다고 할수있는

1145넌에 김부식이 찬한 삼국사기와 1308년 일연(一然)이 찬한 삼국유사에는 가야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도 한심하고 그 역사의 기록에 대한 가치 마저도 부정확 할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기술 하였지만 삼국사기는 김부식은 자기의 모화 사상과 잘못된 역사관으로 우리 나라의 고기(古記)를 의도적으로 빠트리고 기록하지 않안것이 감지 되지만 삼국사기가 편찬된것이 1145년이니 가야가 멸망힌지 573년 이라는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기록을 당시에 생존했던 사람이 기록 한것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일급 사료이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신뢰 지수는 떨어지는 법이다. 그럼으로 묘지명 비문 기타의 금석문을 일급사료라고 하는것이다.

 

삼국사기는 아예 우리 고조선의 기록은 빼어 버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만 본기를 세워서 기필 하였고 가야는 아예 본기 마저도 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신라와 가야 사이에 있었던 사건만을 단편적으로 기록 하면서도 무려 284년간의 가야사의 기록을 하지않아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이 시기의 가야사는 가야사의 진수로서 가야사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무런 기록이 없어니 정말로 답답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다행이도 일본의 역사인 일본

사기에 왜와 가야 백제 신라와의 관개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참고할수 있다,

삼국사기는 그 기초자료로서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등이 언급되어 있으나 그 쓰여진 내용에 위지동이전의 중요한 내용들이 삼국사기에 수록되지 않은것을 보면 삼국사기의 기초 자료로서 참고한 고기류(古記類)등도 4세기 이후에 쓰여진것 같다.

 

▶일본서기

 

일본서기는 720년에 펀찬된 고대 일본 사서의 하나인데 가야에 관한 기사가 상당이 많은것이 주목 된는데 수인기(垂仁記 - 기원전 29~기원후 71년), 신공기(神功記  201 - 270)의 기사와 같이 그이 전설적인 자료에 의한것도 있으나 웅략기( 雄略記 458년 - 480년) 이후 계체기(繼體記 507년 - 533년), 흠명기(欽明記 - 540년~571년) 등에는 주로 백제측 기록인 백제신찬(百濟新撰), 배제본기(百濟本記)등의 자료에 의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가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많이 있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알려진 백제측 사서는 백제기(백제기(百濟記), 배제신찬(百濟新撰) 및 배제본기(百濟本記)의 3서인데 이 사서는 대체로 각각 백제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쓴 것이다. 백제신찬은 한성시대 말에서 웅진새대에 걸친 기록이고 벡제본가는 웅진시대에서 부여시대의 기록이다,

이들 3서는 본래 백제의 사서로서 아마 백제가 멸망하고 그 왕족 및 지배계급이 일본으로 망명 하였을때 갖이고 간 것이며 8세기 초에 일본서기가 편찬될때 제출되어 주로 일본과 백재, 가야 및 신라와의 관계 기사에 이용되었다.

 

이 시대의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사실은 일본 자체의 기록은 그이 없었던것 같고 대부분이 백제의 자료에 의거하여 쓰여진 것인데 일본서기가 편찬된 8세기는 일본의 국기가 안정되고 융성하여 당문화(唐文化) 에 심취하여 받아 드리던 시기로서 당시의 지식층은 중화 사상에 심취하여 일본적인 황국주의사상(皇國主義思想)을 만들었다, 일본서기는 이러한 황국주의사상에 의거하여 쓰여진 것이라 백제측 기록에 의한 한국측 관계를 종주국과 속국과의 관계처름 탈바꿈하여 놓았다, 그중에 가장 많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것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部說)이란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버와 같다,

 

임나 즉 가야 지역에 일본부라고 하는 일본의 통치기관과 같은것을 두었다고하면서 마치 가야, 벡제, 신라가  일본의 속국인것 처름 쓰놓았다, 물론 이와같은 사실은 있지도 않았던 것인대 일본서기 찬자들의 황국주의사상에 의하여 조작 되었된 것이다.

 

 일본서기는 날조되고 과장된 황국사관에 의해 기록 되었으나 오늘날 일서(逸書)가된 백제의 귀중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백제사 연구에 도움이 되며 또 잃어버린 가야사를 복원 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니 근대의 역사학은 사료비판등의 훌륭한 방법론을 이용한 연구로 잘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젊은 대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일본서기의 기사를 맹목적으로 인용하여 흡사 지기가 새로운 시실을 찾은것 처름 어디로 가나 자랑삼이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최근에 홍익대학교 김태식이란 교수는 일본

서기의 계체기 흠명기의 기사를 배껴와서 창녕에는 영산에 탁기탄이라는 가야의 대 왕국이 있었다 하고 한때는 대구(탁국)을 탁기탄이라 하고 다시 창원을 탁기탄이라 하다가 이제는 영산이 탁기탄이라  이제는 한술 더 뜨서 영산 밀양이 탁기탄이라 하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가야 전 지역이 탁기탄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야에 관한 기록들

 

◆ 탈해왕 21년 서기 77년

    아찬길문이(阿찬吉問)이 가야병과 황산진구에서 싸워 1000여급을 얻었다, 吉問으로 波

    津찬)을 삼았다  (황신진구 김해와 양산 사이의 낙동강)

◆ 파사왕 4년 서기 87년

    남으로 가야와 접 하였다.

◆ 파사왕 15년 서기 96년

    가야인이 남비(南鄙)를 침습 함으로 가소성주(加召城主) 장세(長世)로 기병 1000을

    보내 막게 하였으나 적에게 죽은바 되었다.

◆ 팟사왕 17년  서기 97년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치게할세 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죄 주기를 청함으로 그망 두

    었다.

◆ 파사왕 22년 서기 102년   

    음집벌국이 실직국과 지경을 다투어 신라 왕에게 와서 재결을 청함으로 왕이 금관국 수

    로왕에게 와서 지식이 많다고 해서 그를 불러 물었드니 수로(首露)가 이의하여 소쟁의

    땅을 음집벌국에 전하개 하였다. 註 이때의 신라의 국명은 사로국이고 금관국의 국명은

    구야국 이다.

◆ 파사왕 27년 서기 106년

     정월에 왕이 압독(押督)에 행행(幸行) 하였다. 8월에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첬다

◆ 파사왕 29년 서기 108년

    군사를 보내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처서 아울렀다.

 ◆ 지마왕 4년  서기 115년

    2월 가야가 신라의 님변을 침입 하였다, 7월에 친히 가야를 칠세 보기병을 거느리도 황

    황산하를 건너니 복병이 일어나 두어겹으로 애워쌓다.

◆ 지마왕 5년 서기 116년

    장을 보내어 가야를 칠세 왕은 기병 1만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니 마침 비가 오래 옴

    으로 돌아왔다.

◆ 일성왕 13년 서기146년

    압독이 반 함으로 군사를 발하여 쳐서 평정하고 그 여중을 남비로 옮겼다.

◆ 나해왕(奈解王)  6년 서기 201년

    가야국이 화(和)를 청 하였다.

◆ 나해왕 17년 서기212년

    가야 왕자를 신라로 보내어 볼보로 삼았다.

◆ 초지왕(초知王) 18년 서기 496년 가야국이 백치를 보내니 미장이 5척이였다.

◆ 지증왕 5년  504년 

    골화성등 12서을 쌓다.

◆ 지증왕 16년 서기 514년 

    아시촌에 소경을 두고 6부 및 남지의 인호를 이주하개 하다.

◆ 법흥왕 9년 서기 522년

    가야국이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메 이찬 비조부의 매를 보냈다.

◆ 법흥왈 11년 서기 524년 

    왕이 남경을 순행하여 지경을 개척할세 가야국 왕이 래회 하였다.

◆ 법흥왕 19년 서기 532년

    금관국왕 김구해가 비 및 삼자로 더불어 래항 하였다.

◆ 진흥왕 15년 서기 554년

    백제왕 명농이 가량(加良 고령가야)과 더불어 관산성을 래공하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  찬 탐지 

    (耽知)등이 마주 나가 싸우다가 이를 보지 못하니 신주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

    서 교전함에 이르러 비장 고우도도가 백제왕을 처서 죽였다.

◆ 진흥왕 16년 서기 555년

    비사벌에 완산주를 두었다.

◆ 진흥왕 23년 서기 562년 

     가야(고령가야)가 반함에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칠세 사다함이 그를 돕게 하었다

 

이상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야 역사의 전부이다 이로서 장장 573년의 역사가 끝이 나게  되는데 563년에 이르는 전체 가야국의 역사가 종이 한장에 기록해도 모자랄 정도이니 후세의 우리들이 어떻게 알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가야사를 잃어버린 왕국의 슬픈 역사라고 말하며 우리 조상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이렇게도 무성의 하고 독선과 아집에 얽매여 천년 만년 아니 영원토록 이어저 나갈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지 옷했을까?  전신에 전율을 느낀다.

 

▶ 빛벌의 나라 이름에 대한 고찰

 

가야의 지명에는 빛을 상징하는 단어가 많다, 빛, 불 등은 태양을 가르키는 말로서 복방 알타이 민족의 태양숭배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쉽게 말하년 천손(天孫) 이라는 뜻으로 자기 종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밝고 빛나는 뜨거운 태양숭배 사상을 우리 동양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각 나라들에 퍼저 있고 또 란(卵)은 생면체를 탄생 시키는 것으로 일종의 창조의 신으로 생각하여 각 민족 및 부족의 시조 탄생 신화에는 태양 숭배사상과 란생신화가 결부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은 태양숭배 사상은 유독 가야의 여러 나라에 "빛"  "밝다" "광명" "천손"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심지어 가야 민족이 개척한 일본열도 에서는 그 나라의 국기의 한가운데에 둥거렿게 태양만 하나 그려넣어 태양 숭배 사상을 나타내고 이를 다시 천손에 빗대어 천황을 절대 권력자로 상징하여 세상 모든것이 천황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 신이 된것이다, 가야의 지명에 대한 고찰은 다음 장에서 설명 하기로 하고 위선 여기서는 "빛벌" 이라는 우리 고장의 이름에 대하여 설명 하기로 하자.

 

1, 빛벌

  

 빛벌이란 여러분이 잘 아시는바와 같이 우리 창녕 지방의 최초의 고유 명사이다 우리 민족에 한문이 도입되기 이전의 순수한 우리말로 된 고유명사로 다른 이름은 없었다, 우리 나라에 한자가 도입된 시기를 살펴보면 삼국사기를 참고하면 고구려는 일직 3대왕 대무신왕(大武神王 서기 18년 ~ 43년)으로 부터 민중왕(閔中王) 모본왕(慕本王) 태조대왕(太祖大王) 차대왕(次大王)등이 한자식 시호(諡號)를 사용 한것으로 보아 국초부터 한문을 사용한것 같고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346 ~ 374)때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 하였다고 하였는데 서기란 백제의 역사서다 국가에서 역사를 편찬 하였다는 것은 이미 모든 문물 제도가 이루어진 연후의 일이라 하겠고 또한 백제는 고구려의 형제국이 였으니 고구려와 같은 시대에 한문을 사용 하였다고 보는것이 타당 하다고 생각되며

 

신라는 한문을 사용한것이 상당이 늦다, 신라가 왕의 시호를 사용한것을 보면 지증왕(智證王 500 ~ 513) 부터이다, 이후 법흥왕(法興王) 진흥왕(眞興王) 진지왕(眞智王)등 이후는 모두 한자시호를 사용 하였으며 신라가 국사를 편찬 한것도 진흥왕대 초 였으니 신라에서 한자 기록이 있은것이 6세기 초기라 할것이다, 왕호를 보더라도 지증왕대 까지는 미립간(麻立干)이고 볍흥왕 부터 왕(왕)의 칭호를 사용 하였으며 지증왕 이전의 왕의 이름도 전부 우리말로 된것을 한문의 음을 빌려서 기록한 향찰(鄕札) 또는 이두(吏讀)로 적은 것이다, 좀 더 내려와서 한자 시호를 사용한 지증왕의 부왕(父王)이 소지(炤知)왕인데 우리말로는 비치왕이 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빗치는 비치다는 조(照)자의 뜻을 빌려오고 "지" 는 한문의 지(知)자를 음으로 빌려 온것이다, 소지(炤知)왕을 비처(毗處) 왕 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느데 비처는 한문을 음차하여 빛이다를 적은것이다, 

 

물론 이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본것이며 실제로는 한문을 사용 한것이 좀더 앞 당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에 문자가 보편적으로 사용이 되어 있어야민 역사를 펴찬 하였을태니 실제로 한문이 사용된 시기는 좀 더 빨랐을 것이다.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 (朴赫居世)거서간(居西干)을 여기서 한번 분석해 보도록 하자 신라의 시조는 태양 즉 탄생신화가 태양신화+란생 신화이다, 태양은 밝은 것이다 그레서 빛 즉 (광명=태양 )의 뜻으로 밝다를 박(朴)을써서 성(姓)으로 하였는데 朴은 "밝"을 음차(音借)한 것이다, 고 양주동(梁柱東)박사는 居西干을 시조왕으로 풀이 하였는데 居는 "가"로 보고 西는 사이 ㅅ 으로 보고 간(干)은 왕으로 보아 갓(순수한 우리말로 "갓" 태어나다) 즉 처음 왕 시조 왕으로 보았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居西王" 또는 "居世王"이라는 한자로 표기되어 거세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어  밝=朴은 성(姓)으로 하고 거세(居世)는 혁(赫)에 붙혀 혁거세 라고 이름으로 하여 박혁거세 거서간(朴赫居世 居西干)이 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 선사는 인하여 혁거세 왕이라고 이름 하였다 (因名赫居世王)라는 구절에 주석을 달기를 "아마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거내왕(弗炬內王)이라고도 쓴다, 그것은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蓋鄕言也 或作弗拒內王 言光明理世也)라고 하였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혁거세왕(赫居世王)이란  순수한 우리말 인데 불거내왕(弗炬內王)이 라고도 쓴다는 것이다 불거내(弗炬內)도 순수한 우리말을 이두(향찰)로 표기한 것인데 불(弗)은 우리 말의 불을 음차한 것으로 앞에서도 설명 한바와 같이 "밝"과 어원이 같은 것으로 즉 불(火)도 밝다는 뜻으로 쓰였다 "거내"(炬內)는 반절법으로 즉 거(炬)는 초성(初聲)인 ㄱ 을, 내(內)는 종성(終聲)인 ㄴ으로 쓴 것인것 같다, 그르므로 거내(炬內)는 반절법으로 "근"의 음으로 표기 한것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그르면 불거내(弗炬內)는 "불근" 으로 혁(赫)자의 "밝" "밝은"과 같은 말의 표기가 된다, 더욱이 이 말은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言光明理世也)라는 뜻이라고 주(注) 하였으니 일연(一然)의 이 주석은 "혁거세왕 "이라는불명한 말의뜻을 깨닫게 하고 또 그것이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태양신(太陽神)의 뜻임을 증명하고 있다.

 

 

가야는 이상하게도 서적(書跡)을 찾아 볼수가 없다, 금석문으로 남아 있는 비석 또는 지석등도 발견된것이 하나도 없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문자도 하나도 발견 할수가 없다, 아마 신라가 한문을 받아드린 시기가 가야가 소멸된 시기 이후이니까 문자를 베울 기회가 그만큼 늦었지도 모르겠다, 한편 신라나 백제에는 사찰의 유허지 및 탑등이 남아 있으나 가야의 고지에서는 이것 마저도 전혀 발견되디 않는다, 가야는 백제와도 교류가 있었으니까 나라에서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는 안했어도 개인적으로는 사용 하엿는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조사하여 보니 목간 한점과 도자기 몇점에 조잡한 글자를 새긴것이 있는데 모두가 6세기말에서 7세기와 8세기의 것으로 판명 되었고 그 이전것은 찾을수가 없어니 나는 가야는 문자를 사용하기 전에 멸망 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아래에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서적이 있는 유물을 열거 해보면 다음과 같다.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목간(木簡)이 발굴 되었으나 6세기 말 ~ 8세기의 것이 였고

★합천 지포리 E지구 4 - 1호분에서 대가야 앙식의 도자기에 하부(下部)글자를 눌러 세긴

 글자가 있었으나 이것도 6세기 말 이후의 것으로 알려젔고

★창녕 계성고분군에서 신(辛)자가 세겨진 배(盃)와 소형 병에 미(未)가 세셔저 있었으나 모 두가 6세기말 이후의 것이고 계성 C지구 3호분에서 고배(高盃)에 역시 대간(大干)이라 세긴 글이 있어고 8호분, 11호  분에서도 대간(大干) 글자가 있었으나 모두가 6세기 말에서 7세기의 것이였다, 계성 고분군에서 발굴된것이 몇점 더 있으나 생략한다.

 

 이상에서 본바와같이 벌굴된 유물이 모두가 가야가 멸망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것으로는 가야가 문자를 사용 하였다는 증거로 삼을수가 없다,  다만 대가야 말기에 불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아 가야시대 말경에는 공식적으로는 문자를 사용하지 안했으나 일부에서 한자가 사용된 흔적으로 보아 가야시대 말 경에는 한문이라는 문자가 사용 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 비사벌(比斯伐), 비지국(比只국), 비자화(比自火)

 

 삼국사기 에서는 빛벌을 비사벌, 비지국, 비자화 등으로 글자를 달리 사용 하였는데 어느것이나 한자 본래의 뜻글로 쓴것이 아니라 한자의 음을 차용하여 우리말을 적은 것이다. 비는 한자의 比를 음(音)으로 차용하고 斯는 반절법(反切法)으로 초성 "ㅅ"을 차용 하였으며 伐은뜻(訓)을 차용하여 비사벌이 돤 것으로 이것은 이두(吏讀)문자이다.

 

비지국은 비는 역시 음차이고 지는 역시 반절볍으로 ㅈ 을 빌려 왔는데 ㅅ, ㅈ. ㅊ,은 모두가 "ㅅ" 발음으로 사용한 것이지 특별한 뜻은 없는 것이다.

 

비자화도 역시 비는 음차요 자는 반절법으로 ㅅ 으로 음차한 것이고 화(火)는 벌(伐)과 같이 우리 고어에 나라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으니 훈차하여 빗벌을 기록한 것이다.

 

3. 비화가야(非火伽倻)

 

일연이 찬한 삼국유사에서 빛벌을 "본조사략"(本朝史略 = 고려사 로서 일서이다)을 인용하여 비화가야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비"자를 견줄比 대신 아닐 非자를 사용하여 비화가야라고 하였다, 음차한 글이니 어느 "비"자를 사용 하여도 무방하나 유독 본조사략에서민 아닐 "비"자를 사용 한것이 이색적이다, 非는 우리말 비를 음차한 것이며 火는 불을 훈차한 것인데 ㅅ 발음 표기하지 않고 불(火)를 벌로 대신 하였다.

 

4. 비자벌(比子伐)

 

진흥왕척경비(眞興王 拓境碑)에는 빛벌을 비자벌로 기록 하였다, 이 역시  우리말 비는 "比" 로 음차하고 ㅅ 은 자(子)자를 사용하여 사이 ㅅ 으로 반절법을 사용 하였으며 벌(伐)은 나라로 훈차하여 "빗벌"이라 한것이다.

 

5, 비자발 (比自발(火+本)

 

일몬서기 에서는 비는 比로 음차하고 ㅅ 받힘은 子를 사용하여 반절법으로 ㅅ으로 대신하고 벌은 한문의 伐 대신 일본에서 만던 발(火+本)자를 사용 하였다, 이 발(火+本)자는 일본 에서만 사용되는 향자(鄕字)이다,

우리나라 에서도 진흥왕척경비에 답(沓)자가 보이는데 이 답자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향자 라서 중국과 일본에서는 없는 글자이다, 진흥왕척경비에 보이느 것으로 보아 신라 진흥왕 이전에 만들어 젔을 태니 상당히 오래된 글자라 하곘다.

 

이상에서 빛벌이라는 창녕의 고호를 한문을 빌려 향찰 및 이두로 기록한 여러가지 다른 이름들을 살펴 보았는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개 된다 , 즉 창녕의 고호는

"빛벌"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이 빛벌을 한문의 발음을 빌려 기록 하다보니 기록하는 사람마다 글자를 달리한 것을 알수가 있고 삼국사기 에서는 김부식 이라는 한 사람이 집필 하면 서도 비사벌(比斯伐), 비지국(比只國) 비자화(比自火) 등으로 쓸때마다 글자가 달라젔으니

비사벌 이던 비지국 이던 비화가야 이던 심자어 알본에서 기록한 비자발 이던 모두가 "빛벌"이니 창녕의 고호가 비사벌 이다, 다른 한평에서는 아니다 창녕의 고호는 비화가야 라고

하는것은 논쟁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 하지만 창녕의 고호는 오직 "빛벌 또는 빗벌" 뿐아고 한문을 빌려서 우리말로 기록한 것은 기록 할때마다 달라지고 사람에 따라 차용하는 글자가 달라질 뿐 모두가 "빛벌"로 귀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아 할것이다.

 

▶ 가야의 지명에 대한 고찰

 

 

우리사서에 비사벌(比斯伐)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한반도의 창녕으로 삼국사기지리지>

 

에서이 화왕군이라 했고삼국사기>에는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자발(比自伐) 비지국

 

(比只國)이라 했고 그에 속한 현효현 (玄驍)은 옛 지명이 추량화현(推良火縣)이라고 했

 

다.비자화, 비자발, 비사벌 비지국은 '빛벌'이라는 뜻이고 '빛벌'과 음이 같은 '빚벌', '빗

 

벌'에서 나온 말이고 '빚벌'의 '빚'에 명사형어미 '아'나 '이'를 붙여 읽으면 '비자', '비

 

지'가 되고 '빗벌'도 마찬가지로 '비사', '비시'가 된다.

 

 

그리고 추량화가 삼량화(三良火)로 바뀌었는데 추량화는 <삼국사기>에 보면 '미라(推

 

良)'라고 나와 있는데 정확한 발음으로 '밀추(推)'의 훈 '밀'에서 리을(ㄹ)이 탈락한 형태이

 

다.또 발(跋), 벌(伐), 불(火)은[ㅂ+아래아+ㄹ]로 표기되는데 이때는 '볼'이 가장 가까운

 

'벌'로 바뀌고 다시 벌 > 블이 되고 원순모음화현상에 의해 '불'로 변하여 불(火)을 쓰게 된

 

것이다.<삼국사기>'신라 밀성군(密城郡)조'에도 추화(推火)라고 나와 있어 같은 계열 지명

 

임을 알 수 있다.[ㅁ+아래아+ㄹ(推火)]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밀추(推)'에서 훈을 이두표

 

기하여 '밀(密)'로 바뀌고 땅을 뜻하는[ㅁ+아래아+ㄹ]이 역시 같은 뜻의 한자 성(城)으로

 

바뀐 것이다.

 

 

일본열도어에서 '출광(出光)'을 '이데미쯔'라고 읽고 '빛(光)'을 '미쯔'로 발음하는데 빛벌

 

> 빛땅의 뜻을 가지는 '삼량(三良)'의 '삼(三)'을 숫자로 간주하고 읽으면 '미쯔라(三良)'

 

또는 '미라(三良)'로 발음할 수 있고 '비사벌'에서 比斯伐, 比自火, 推良, 三良과 같은 이름

 

이 된다.여기서 '삼(三)'은 '빛(光)'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숫자가 아닌

 

'빛'의 이두표기며 '빛'과 '및'이 대응되는데 일본열도어는 가야어를 근간으로 백제어와 일

 

본열도 토착어가 섞인 말이다.<삼국사기>지리지에 보면[비사벌, 비자화, 비자발]이라고

 

불린 창녕은 후기신라시대에 완산주(完山州)로 부른 적도 있고 <삼국사기>'백제 완산(完

 

山)조'에 보면 한때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 불린 적이 있는데 뜻은 그대

 

로 유지하면서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다.

 

 

완산주, 전주(全州), 완주(完州)는 결국 '빛벌'이란 뜻을 갖고 있는 지명으로 대륙의 하얼빈

 

남쪽에 완달산(完達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빛땅'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이것은 태

 

양신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태양빛'을 '완전'으로 인식하게 된 것으로 가야유물서 파형문

 

양(巴形紋樣)의 동기(銅器)를 보면 알 수 있고 숫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고대로터 삼(三)

 

은 성수(聖數)로서 '완전', '궁극',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다.태양신숭배사상에서 '빛'은 바

 

로 완(完), 전(全)을 상징하고 삼(三)과도 의미가 일치하여 결국 미쯔(三)는 미쯔(光)와 같

 

은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가야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일본열도어에서 미쯔

 

(光)라는 음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光)의 일본열도어 '미쯔'는 완전(完全), 완(完), 전(全), 궁극(窮極), 영원(永遠)을 뜻하

 

는 고대인의 성수 '삼(三)'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고 밀(密), 추(推), 삼(三), 전(全), 완

 

(完)이 들어간 지명은 '빛'이라는 뜻을 가지며 이두로 표기되거나 한자로 바꾸어 굳어진 것

 

이다.또한 이 지명들은 '아침땅'이나 '새땅'이라는 뜻과도 통하는데 조선(朝鮮), 아사달(阿

 

斯達), 신라((新羅)라는 단어의 아침은 빛이 밝아온 어느 시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미추홀), 전주, 광주, 창녕(비사벌)은 전부 같은 뜻을 가진

 

지명이고 가야지역과 백제가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볼 때도 백제와 번진의 후신인 가야는 밀

 

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 건국세력이 최초에 상륙했던 미추홀(彌鄒忽)이 있는데 인천으로 비정하지만 지금의

 

인천이 '인주(仁州)'로 불린 적이 있고 충남 아산의 인주면(仁州面)과 이름이 같으므로 한

 

반도의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密頭里)가 바로 미추홀로 보인다.미추홀도 이두표기인데 미

 

추홀(彌鄒忽) > 밀두홀(密頭忽)에서 홀(忽)이 '고을'을 뜻하므로 후대에 리(里)로 바뀌어

 

밀두리(密頭里)가 된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삼랑진(三浪津)과 밀양(密陽)은 같은 뜻을 가진 지명으로 둘 다 빛땅 > 빛

 

골 > 미라(三良)에서 파생된 지명으로 밀양의 고대지명 밀성(密城)의 성(城)은 라(良)와 같

 

고 빛(光)이 [및(三) > 미쯔(三) > 미(三) >미(推) >밀(推) >밀(密)]로 된 것이다.그리고

 

일본열도를 가야가 개척하면서 가야에 대한 별칭이 많은데 가야(加耶), 가라(加羅), 각라

 

(各羅)등과 한(韓), 당(唐), 한(漢)의 단어도 쓰고 심지어는 가야(科野), 가야(蚊屋), 가

 

(鹿野), 가야(香屋)등의 지명도 있다.고대의 한반도에서는 한국(韓國)을 사용하지 않았지

 

만 <기·기>에는 한국이라고 나오는데 <기·기>나 <성씨록>에 나오는 '한'은 대륙의 한

 

(漢)이 아니고 가라(韓)로 쓰인 말입니다.한- 일본어로 '아야'라고 읽고 '아야'는 '아라가

 

야'의 준말이다

 

▶ 가야가 '임나(任那)'라는 지명에 대해서

 

 

가야의 별칭으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대가라, 금가야, 아라가야, 신라도 별개의 나라

 

가 아니고 전부 가야입니다.*가라히또(韓人) >가라히또(加羅人) >가나히또(任那人)등이다.

 

 

<일본서기>'숭신기'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을 해왔다. 임나는 축자국으로부터 2천여 리 떨어져 있

 

고 북은 바다로 막히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임나국이 사신 소나갈질지를 보내 일본에 조공

 

을 했다는 것은 거짓기록으로 소나갈질지라는 인물은 가야왕 아라사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수인기'

 

[이해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했다. 아마도 선황세에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은 것인가 한다. 고로 소나갈질지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더하여 붉은 비단 백

 

필을 임나왕에게 주었다. 그런데 신라인이 길을 막고 빼앗았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일본서기>'수인기'

 

[어간성천황대에 액유각인이 있어 배를 타고 월국의 사반포에 머물렀다. 그래서 그곳을 각

 

록이라 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니 "의부가라국의 왕자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

 

또는 우사기아리질지간기라 한다.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귀화했다.]

 

 

동일인물의 이름이 여러번 등장하는데 임나인, 소나갈질지, 의부가라국의 왕자 도노아아라

 

사등 또는 우사기아리질지간기로 '갈(曷)'은 두 음절로 된 가라(加羅)를 받침을 붙여 한반

 

도식으로 한 음절로 읽고 표기한 것이다.

 

 

또 아라(阿羅)와 아리(阿利)는 아라가야의 준말인데 시또(斯等)는 현대어 히또(人)와 같은

 

말이고 시지(叱智)도 같은 뜻으로 아라사와 아리질지란 말은 '아라가야인'이란 뜻이고 이

 

은 '임나인'과도 같은 뜻이다.

 

 

<일본서기>'숭신기'

 

[그대의 본국명을 고치되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서 그대의 나라이름으로 하라라고 했다.

 

그리고는 붉은 비단[赤絹]을 아라사에게 주어 본토로 돌아가도록 했다. 고로 그 나라 이름

 

을 미마나국이라 함은 이런 연유에서다]

 

 

임나국을 미마나국으로 고쳐 불러라 하는 것은 임나라는 한자로 된 국명의 음을 '미마나'로

 

고쳐 부르라는 것이며 원래의 음은 '미마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본열도어로 임나를 분해하면[마까(任)스+나(那)]가 되고 나(那)는 국(國) 또는 라(羅)와

 

같은 뜻으로 쓸 수 있는데 여기서 '임(任)'의 음은 어간 '마까'에서 '마'가 탈락하여 '가

 

(任)'가 되[가(任)+나(那)=가나(任那)]가 된다.

 

 

또 임나가 대가야라고 했고 이것은 금관가야이므로 열도어 '가나(金)'와 연결되고 '쇠

 

(金)'의 음은 삼국시대에는[(ㄱ+아래아+ㄴ) - 金]로 추정되는데 그 근거는 열도어에서 '금

 

(金)'이 '가나', '가네', '곤' 등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임나라는 이름은 삼국시대나 후기신라, 고려기록에도 나오고 삼국시대에는 가나(任那)로

 

쓴 것으로 판단되는데 원래는 가나(金)였던 것을 이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서

 

 기>에서 임나를 미마나로 고쳐 부르라고 하는 것은 가야사, 백제사를 개작하여 일본열도

 

로 꾸미면서 원래음을 숨기기 위해 '미마나(任那)'라는 음을 지어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

 

로 판단된다.

 

 

일본열도의 <일본서기>를 작성하면서 사실대로 기록하면 가야의 실체가 드러나므로 위작

 

을 한 것으로 임나(任那)라는 국명은 '미마나'가 아니고 '가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