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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쿤달리니

narrae 2011. 8. 26. 15:36


 

 

 


쿤달리니의 개념


의사가 되려면 의학을 전공해야 하고 법률가가 되려면 법률학을 공부하여야 한다. 의학이나 법률학을 전공한다고 해서 모두 의사가 되고 법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시험과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그 자격이 갖추어 진다. 마찬가지로 초월자나 성자가 되어 인간 고해를 훌쩍 뛰어넘자고 한다면 우선 쿤달리니를 각성하는 것이 절대적인 자격 요건인 것이다. 현재, 인류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종교의 발원이라고나 할 힌두교의 요가철학은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중국의 도교는 쿤달리니와 체계가 거의 일치하는 현상을 소주천(小周天)이라고 하며, 이에 각성하면 영생불사하면 진인 또는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나 천주교에서는 쿤달리니의 각성이라는 체계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참선이나 묵상 또는 관상이라는 이름들로 명상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고있는 것은 힌두교나 도가(道家)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현존하고 있는 위대한 종교들은 내면에서는 한결같이 쿤달리니의 각성 효과를 희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쿤달리니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설명한다면 사람은 물속이나 우주공간에서는 단 한 순간도 버티기 어렵다. 그렇지만 스쿠버 훈련이나 우주비행 훈련과정을 마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춘다면 육체가 생존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는 환경이지만 적응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물질의 모든 현상을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으로 접촉하고 그 접촉한 내용을 생각으로 거르면서 대응하여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물질세계를 태어나면서 기능을 발휘하는 감각과 의식으로 적응해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육체적 삶과 달리 영적 삶의 적응력은 저절로 형성되지 아니한다. 물질세계에 알맞도록 짜여진 감각과 의식의 현상적인 구조로는 영적 또는 정신세계에서 한 순간도 견디기에 어렵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물속이나 우주공간에 적응하기 위해 훈련과 장비가 필요하듯이 영적 세계에 순응하도록 육체와 정신을 변혁시켜 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명상이나 기도 또는 헌신 등의 경건한 행으로 영적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지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마치 비행기를 타 보았다고 하여 우주유영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사람의 육체에는 이 영적 세계에 돌입하여 적응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이 장치가 가동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영적 세계에 진입하고 이에 적응하게 된다.

육체의 공간 속에 내장된 장치가 바로 쿤달리니 또는 소주천이라고 불리는 영적 진화의 체계이다.쿤달리니의 각성은 바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이며 동시에 영적 삶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종교는 명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명상은 쿤달리니의 각성 위에서만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철학과 도교에서 밝히고 있는 쿤달리니 또는 소주천의 각성 방법은 인류문명 발상지인 인도와 중국에서 문명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방법들은 수 천년에 걸쳐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자신의 간절한 소망과고통, 그리고 인내를 담은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스승들과 종교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만들어 놓은 이 각성의 비법에 따라, 수행자들이 수행하여 각성하게 되었다면 쿤달리니는 일반화되고 상식화되어 의문이나 이론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어떠한 각성 비법을 채택하여 수련한다고 해도 성공하는 비율이 거의 제로(0)수준에 가깝다는 점이다.
성자들은 자신이나 그 제자들을 통해서 남겨진 경전들을 보면 이런 저런 세상 사는 일들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 열반이나 절대자와의 합일과 같은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성자가 걸어갔던 수행의 길은 많은 수행자들과 함께 가는 길이었지만 결국 그 성취는 자신만의 선택적인 특혜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사티아난다 사라스와티는 쿤달리니의 각성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각성만 하면 성자의 길로 접어든다고 주장하였다.

쿤달리니를 각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으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행과 수련을 해야 하고, 행동도 계율로 완전히 제약을 받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발견하여 발표한 쿤달리니의 새로운 각성법은 고된 수련과 제약을 필요로 하는 고전적인 방법과는 차별성이 현저하다. 수련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하루 불과 1시간 정도의 수련과 사회생활에 부담을 느낄만한 금계(禁戒)도 없다.
이제는 쿤달리니 각성이 더 이상 요가나 신비가, 또는 출가한 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큰 지혜의 눈을 뜨게되고 창조력이 샘솟으며, 인간진화의 근원이라는 쿤달리니의 수련법이 보급되어 각성자가 늘어간다면, 과학보다 현저하게 뒤쳐진 정신적, 종교적 영역의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쿤달리니 각성과 효과

 

 

속세를 벗어나 은거하는 성자들이나, 육체를 초월한 초인들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하는 무한한 지복(至福)을 살면서 맛보게 하여준다는 쿤달리니-. 인도는 물론이고 중국, 아라비아, 그리스와 이집트 등 인류의 고대 문명 발상지에서는 모두 다 기원전 언제부터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활성화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실천되었으며, 고대 인도에서는 이 유기적인 장치가 평범한 사람을 천재로 만든다고 해서 연구한 뒤 실험까지 마쳤다는 쿤달리니-.수행법이 엄격하고 까다로운 섭생이 강요되며, 커다란 위험까지 수반되므로 성취되는 사례는 지극히 드물었다고 하는 쿤달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흘러 시대가 수 없이 바뀌어도 쿤달리니의 수행자들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수행자들은 오늘 이 순간에도 쿤달리니의 각성을 위해 세상과 담을 쌓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치르면서도 묵묵히 매진하고 있다. 물론 모든 종교가 쿤달리니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며 수행법도 나름대로 모두 다르다. 그러나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쿤달리니 각성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행자들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걸고 집착하는 쿤달리니 각성이라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타요가 프라디피카(105절∼111절)의 내용을 살펴보자.

‘열쇠로 문을 열 듯이 요기는 쿤달리니로 해탈문을 열어야 한다. 위대한 여신은 입을 다물고 잠들어 있다.
그 입은 브라마란트라, 아픔도 고뇌도 없는 장소로 올라가게 하는 문이다. 쿤달리니 여신은 칸다위에 잠들어 있다.
그녀는 요기에게 해탈을 준다. 쿤달리니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은 해탈된다’

이 가르침 대로라면 쿤달리니의 각성만으로도 커다란 깨우침을 얻게되며, 궁극적인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금벽고문용호경(金碧古文龍虎經)의 서문에서는‘도가(道家)의 공부는 실로 성명(性命)에 관련된 것으로, 얻는 것이 적으면 이 땅에 머무르며 수명을 연장하게 되고, 크면 신선이 되고 성인이 된다’고 적고 있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초인적인 능력에 대해서도 쿤달리니 각성에서 뿐 만 아니라 차크라의 수행 단계에서도 부수적으로 여러 가지의 초능력이 발현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면서 초월을 갈망하게 되며, 존재에 대한 의문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또 초감각적인 것들을 체험하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절대적인 힘과 교류하여 초능력을 얻고자 하는 소망은 누구에게나 공통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심층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강한 원망(願望)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신앙형태로 발현하였다.
그런데 이 간절한 소망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쿤달리니라고 사라스와티는 주장하고 있다.
‘기도를 하거나 명상을 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쿤달리니의 각성과 관계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라스와티는 또 ‘영적생활의 목표는 그것이 삼매든 열반이든 합일이든 또는 해탈이든 간에 모두가 쿤달리니의 각성을 바탕에 둔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육체와 정신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다. 우선 육체적인 변화는 병의 요소가 일체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런 현상은 우주의 원초적인 힘이라는 쿤달리니의 강력한 생명력이 세포에 가득 차기 때문인데, 병이 있던 사람도 깨끗하게 치유된다.
그 뿐만 아니라 아무리 술을 많이 먹어도 머리가 아픈 적이 없고 항상 가을 하늘처럼 맑기만 하다.
이처럼 거의 완벽한 건강은 바로 고차원의 명상을 수련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육체의식을 망각할 정도의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통증이나 평상시와 다른 조그마한 이상감각이 몸에서 느껴진다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쿤달리니 각성이 정신적인 면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쿤달리니가 각성 되면 큰 지혜의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창조력을 탄생시킬 수 있다.
비젼, 심령적 체험을 겪게 될 뿐만 아니라, 예언자, 성자, 예술가, 시인, 작가,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완전한 각성이 이루어지면 작은 신, 신성의 화신이 된다’라고 사라스와티는 주장하고 있다.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를 각성하면 법열, 또는 입신상태에 든 요기나 신비가들 처럼 수시로 초월의식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변해가게 된다’면서,‘초월의식은 정신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물질계를 초월한 경지로 상승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쿤달리니를 각성하면 명상 중에 별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육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통증이나 이상감각 또는 감촉이 없는 데다 호흡까지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엷고 면면히 이어진다면 정신은 맑고 초롱초롱하면서도 육체를 초탈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경지가 바로 초월의식 즉 삼매의 전 단계인데, 여기에 도달하면 크리슈나의 말처럼 각성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나의 수행 경험에 비추어, 우주와의 합일이든지 삼매, 또는 견성 등등의 종교에서 말하는 최상의 경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 것이 그 목적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몸속에서 잠자고 있던 자율제어기능이 갑자기 활성화하면서 고차원의 의식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심신을 개조하게 된다.
이 때문에 마음이 바뀌고 그래서 취미나 기호, 집착하는 것까지 바뀌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은 눈앞의 대상들에 집착하지만 각성자들은 생각이나 행동에서 이들과는 멀리 떠난 경지를 보여 준다.
천재들의 지적, 예술적 창조에서 보여주는 능력들을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황홀, 망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의식상태를 일반인들로서는 이해가 전혀 불가능하다
쿤달리니 각성 이후의 현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세간의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여서 미덥지 않으면서 신비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천고의 비밀, 천기 누설이라든지 신비로움으로 인식되어온 쿤달리니는 이제는 더 이상 천기누설이나 신비로운 것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쿤달리니 각성으로 조성되는 고차원적인 의식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평상차원의 의식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비밀이나 신비는 접하려고 하여도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 해당하는 말이다.

고피 크리슈나의 말을 들어보자

‘쿤달리니의 각성이야말로 인류 앞에 놓인 최대의 과업이다. 인간의 지성은 아무리 바쁘게 찾아 헤매 보았자 인간이 우주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바로 이것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열리지 않는다.
이것에 의해서만 과학은 생명의 근원이 생명의 배후에 존재하는 불사(不死), 전지(全知)의 힘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의해 선천적인 천재가 아닌 인간들이 높은 재능을 함양할 가능성을 갖게 되며, 나아가 이것에 의해 진보를 가속화하고 번영을 촉진하는 커다란 통로가 얼마든지 인간의 영안(靈眼) 앞에 전개되어 올 것이다.’

고피 크리슈나의 주장을 계속 경청해 보자

‘정말로 이 과업이 현실화한다면 변신과정이 시작됨에 따라 초월의식이 찾아오면서 의식의 대해(大海)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경이 그 자체보다 더 경이로우며, 수수께끼보다 더 수수께끼로 가득 찰 것이다. 거기서는 모든 생명들이 무수한 형태로 드러난다. 모든 것이 추하면서 아름답고, 선하면서 사악하며 즐거움과 괴로움, 현실세계의 이중성이 하나로 통합된다. 이 실험은 우주창조의 절대적인 증거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현시대의 인간 존엄성에 어긋나는 경박한 일들이나 부패한 오락 등에 낭비되는 인간적 에너지 및 자원을 정화하고 활용하기 위해 자연이 마련해 준 새롭고 건전한 방향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심신양면으로 고상한 사람들이 자신의 육체로 이를 실험하고 응용한다면, 인류들은 심령적 정신적으로 거인들을 배출하는 시대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21세기의 인류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바르게 주도할 자격을 가질 것이다.’

쿤달리니는 힌두교든 불교든 또는 기독교든 토속신앙이든 특정 종교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생을 구하거나 인간 본래의 면목을 탐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쿤달리니는 종교를 구별하지 않고 지혜를 주고,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며, 강을 건너는데 안전하고 편리한 땟목 구실도 다 하였다.

인류는 아득한 옛날부터 쿤달리니 역할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접근하기에는 너무 어려웠고, 수혜자도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신비에 싸 인 채로 전해져 왔을 뿐이다.
이제 쿤달리니는 더 이상 신비스러움이 아니며, 야생마의 사나움도 가셔져, 길들이고자 하면 누구에게나 가능하게 되었다.
21세기 초과학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쿤달리니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육체 속의 영적 시스


사람들은 '나'를 지칭할 때 해부학적 개념의 육체를 의미한다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명상이 순숙해져서 높은 초의식 상태에 이르면 우리 육체의 배후에 복잡하게 내재되어있는 영적 기관들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영과 육의 복합체라는 실상을 터득하게 된다.
이 영적 시스템들은 우리 육체의 감각기관을 초월한 초감각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포착이 되었지만, 최근 구미의 대체의료 학계의 노력으로 기초적인 체계는 그 베일이 걷히고 있다.
앞으로 과학이 이 영적체계를 좀더 깊숙히 파고든다면 사람들의 생각에 엄청난 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산소와 수소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과학이 증명함으로써 인정한 것처럼, 생사문제가 절대적인 문제로 될 수 없고, 진아(眞我)에 대한 개념도 상당히 현실화할 것이다.

에머슨은 그의 저서「대신령」에서 "인간은 모든 지혜와 선이 깃들여 있는 사원(寺院)의 외면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있는 먹고 마시고 계획하고 계산하는 인간의 형태는 참 모습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내부에는 신의 모든 속성을 지닌 심오한 영적 세계가 깃들여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에머슨의 주장에 대해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물질적인 영적 세계는 지식 형태의 방법으로는 아무리 밀접하게 접근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체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상이란 수단이 아니면 물질세계의 벽을 어찌할 수 없으므로 지식만으로는 현실적인 인식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 인간은 물질적, 에테르적, 감정적, 정신적, 또는 영적인 신체 등으로 다원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행복이라는 목표가 물질적 차원의 충족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정신적인 자양분 또한 영적인 승화도 동시에 추구하지 않으면 행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조건들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이뤄져야 영원한 행복과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내 자신의 생김새는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다.



1) 몸의 구조


요가 철학은 사람의 몸을 진아를 핵으로 하여 육체, 생명의 에너지인 프라나, 마음 등등 다섯 가지의 물질, 또는 비물질들이 층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는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체계는 언제 확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먼 옛날부터 요가 수행자 뿐 만 아니라, 신비가, 영능력자들이 주장해 왔다고 한다. 나 또한 명상중에 이 체계와 근사한 체험을 하였다는 것을 밝힌다.

진아를 핵으로 둘러싸고 있는 층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안나마이 코샤(물질의 층) - 육체

② 프라나마이 코샤(생명 에너지 층 = 에테르체)

③ 마노마이 코샤(마음의 층) - 아스트랄체

④ 비즈나나마이 코샤(지성의 층)

⑤ 아난다마이 코샤(지복의 층) - 코자르체

요가철학에 의하면 '나'라고 의식하는 육체는 진아를 감싸고 있는 다섯 개의 그릇중 하나인 껍데기에 불과하다.

육체를 제외한 네 가지의 층들은 사람들이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물질적 요소들이 아니다.

프라나마이 코샤는 안개와 같이 너울대는 파장이며 그 외의 세 개의 층은 미묘한 파동성을 띤 에너지 또는 광체(光?)이다.

진아를 감싸고 있는 다섯 개의 층에 대해 살펴보자.

① 안나마이 코샤 (물질의 층)

물질의 층으로서 가시적이고 해부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계의 육체를 말한다. 육체는 다섯 가지 물질원소 즉,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질세계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체이다. 이 육체는 전세의 카르마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인데, 명상에 숙달되려면 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② 프라나마이 코샤 (생명 에너지 층)


일명 에테르체라고도 부르며 사멸과 운명을 같이 하는 층으로 육체에 속해 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영시(靈視) 능력자에게는 육체와 완전히 합치되는 청백색 그림자나 우유빛 안개처럼 보인다고 하며 육체의 정확한 복사체와 같다고 해서 복체라고도 한다.
현대 의학이 밝혀낸 에테르체는 에너지와 물질의 중간 상태의 광선들로 만들어진 반짝이는 거미줄과 비슷한 미세한 에너지 선들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이 에테르체는 에너지 선들로 이뤄진 분명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위에 육체의 조직들이 물질적인 재질들로 형태를 이루고 한데 모여있다.
생체 조직들은 그 배후에 이와 같이 생기를 부여하는 에너지 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형체를 가지고 유지할 수가 있다.
이 거미줄과 같은 미세한 에너지 선들은 분당 15~20 사이클 정도의 속도로 끊임없이 약동하면서 육체의 활동을 유지시켜 준다.
에테르체는 수면중에도 기능을 발휘함은 물론,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 활동을 계속한다.
이 프라나는 주로 호흡에 의해 체내에 받아 들여진 것인데 프라나라고 하여도 그 기능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분류하면 다섯 가지의 중요한 프라나와 보조 프라나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a. 아파나 기… 발끝부터 배꼽 언저리까지 분포하는 프라나로서 배설작용이나 하지(下肢)의 움직임을 지배한다.

b. 사마나 기… 배꼽에서 심장 언저리까지 분포하며 소화기능을 주로 지배하고 있다.

c. 프라나 기… 심장에서 목 언저리까지 분포하며, 호흡작용으로 체내에 받아들여지며 육체에 활동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d. 우다나 기… 목에서 머리에 걸쳐 분포하는 프라나로 먹은 음식물을 위로 보내는 작용이나 발성 등 작용을 한다. 파탄잘리의 요가경전에 의하면 이 에너지를 완전히 조절할 수 있는 수행자는 몸을 가볍게 할 수 있고, 공중으로 걸을 수도 있다고 한다.

e. 우파나 기… 몸 전체에 분포하는 프라나로 지각신경이나 혈액순환작용을 지배한다. 또 각 프라나를 몸 전체에 순환시키는 작용을 하며 에테르의 원소를 지배한다. 에테르체를 구성하는 이들 프라나의 작용은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경락과 기의 흐름과 동일하다.
한편 이 에테르체는 생기체(生氣?), 신경 에너지체, 프라나체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③ 아스트랄체 (마노마이 코샤와 비즈나나마이 코샤)
산스크리트어로 스크슈마 샤리라 라고 불리며, 사하스라라 차크라의 자리인 머리 윗 부분에 위치한다. 이 아스트랄체는 인간 개개인의 개성을 결정하고 유지하며 육체가 사멸한 후에도 존재한다. 표현을 달리하면 육체에서 아스트랄체가 완전히 분리되면, 그 때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는 육체가 사멸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스트랄체가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가 있다. 이 경우는 아스트랄체가 단독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고 코자르체와 같이 나가는데, 이때 고차원의 진동을 갖는 힘의 줄인 실버 코드(silver code=혼줄)로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상태를 유체이탈(幽?離脫)이라 한다.

꿈을 꾸는 것도 이 아스트랄체와 코자르체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마음(마노마이 코샤)과 지성(비즈나나마이 코샤)은 일반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확한 의미로는 구분되어야만 한다. 마음은 단순히 대상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여 지성에 그 판단을 의뢰하게 된다. 마음은「받아들이는」, 그리하여「행동을 지배하는」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의 활동과 유지는 프라나를 매개로 하여 마음의 기능에 의하여 작동된다. 지성은 부디 라고 도 부르는데 마음이나 감각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인 모든 체험이나 지식을 식별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사람이 사물을 식별하는 작용을 감각기관, 마음, 지성과 연계하여 설명해 보기로 하자. 눈이 어떤 사물을 포착하여 그것을 전기신호로 바꿔 대뇌의 시각중추로 정보를 보낸다. 그것만으로는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눈을 뜨고 보고 있어도 다른 생각에 몰두하거나 최면상태라면 시각중추와 연결되지 않는다. 시각기관 등 감각기관에서 보내온 정보는 마음에서 미묘한 에테르의 파동으로 번역되어 지성에 판단을 맡긴다. 따라서 지성은 마음이 보내온 정보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 지성이 내린 결정은 자아에 보내진 다음 다시 마음으로 돌아온다.

다음에는 마음이 지성의 결정에 따라 감각에 반사작용을 하도록 명령한다. 이처럼 마음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작용을 하는 기관이며, 지성은 지적인 판단을 내리고 통제를 하는 기관이다. 명상중에 지성은 번뜩이는 빛의 덩어리로 머리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음은 그 속에서 빛의 구(球)를 이루며 빛나는 형태로 보인다. 이 빛은 감정의 움직임이나 정신상태에 따라 항상 그 색채를 바꾸어 간다. 이것이 마음과 지성이 합쳐진 아스트랄체의 모습이다.


④ 코자르체 (아난다마이 코샤)

싱가 샤리라 또는 카라나 샤리라 라고 불리며, 진아를 가장 가까이서 감싸고 있는 층이다. 코자르체는 다시 태어나는 윤회(輪廻)의 본체이며 산스카라 라고하는 전세로 부터의 일체의 기억이 소장되어 있다.
현상 세계에서 '나'라는 육체의 형태를 만드는 원인이며, 우주의식이나 희열, 환희 상태를 감수하므로 지복의 층이라고 한다.
명상상태에서 번쩍이는 황금색의 광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황금의 체라고도 일컽는다.
이 체의 기능에 의해 처음으로 '나'라는 자아의식이 인식되며 진아는 이 체의 배후에 존재한다.



2) 차크라


우주는 두 가지의 요소 즉 아카샤와 프라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요가철학은 설명하고 있다. 아카샤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며 공간을 의미하고, 프라나는 에너지를 의미하고 기(氣)라고도 부른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아카샤에서 전개되었다가 다시 아카샤 속으로 용해되는 순환을 되풀이한다. 아카샤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또 괴멸시키는 역할을 하는 힘이 프라나이다. 프라나는 물질이나 정신 또는 지성이 아니면서 모든 사물들의 속에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모든 우주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면서 물질에 대해서는 에너지 형태로, 생명체에 대해서는 생명력으로 발현하는 것이 프라나이다.

우주 구성의 바탕이 되는 아카샤가 사람의 몸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차크라이다. 따라서 아카샤인 차크라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프라나이다. 차크라는 산스크리트어(語)로 원(圓) 또는 바퀴라는 의미이다.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둥근 형상이며,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의 중심들을 가리켜 차크라 라고 부른다. 차크라는 쿤달리니가 각성되면서 척추속을 흐르는 수슘나라고 부르는 에너지 통로를 통하여 머리로 솟아오를 때 가장 활동이 왕성해진다.

차크라는 해부학적으로는 감지할 수 없으며, 뚜렷하게 육체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신비하고 오묘한 기관이다. 명상중에 차크라가 있다고 추정되는 부위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영시가 가능하였을 뿐이다. 현재 첨단기기의 발달로 현대의학에 의해 차크라는 상당 부분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인간의 정신신경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미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이 연구에서 과학자들은 차크라에 주목하게 되었고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과학자들은 심전도 계측기나 전기 뇌 촬영기, 거짓말 탐지기, 신체 주위의 전자 자기장을 측정하는 스퀴드 등 첨단 장비를 사용하여 생체 에너지와 척추에 있는 심령센터에서 방출되는 자극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 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자기장을 측정하면서, 신체에 접촉하지 않고서도 효과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연구로 밝혀진 차크라의 형태는 소용돌이 치는 깔대기, 즉 와동혈(渦動穴)의 모습으로 몸의 앞과 뒤로 대칭을 이루면서 몸밖으로 튀어나와 회전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와동혈들의 몸속의 자리가 육체의 주요 신경총과 일치하고 있으며 이 들은 제각기 여러 개의 작은 와동혈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숫자가 차크라의 꽃잎 개수와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한다.

학자들은 작은 와동혈을 페털(petal)로 표현하였는데 높은 속도로 회전한다고 하였다. 이 와동혈들은 저마다 고유의 회전 주파수에 공명하는 에너지 진동을 소화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는 이런 와동혈들이 상당히 많아서 과학자들은 대 차크라 7개와 소 차크라 21개로 나누고 있는데, 요가에서 말하는 일곱 차크라와 대 차크라 7개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대 차크라의 위치는 정수리, 머리, 목, 가슴, 태양총, 천골과 기저의 7개인데, 숫자와 위치, 또 생리적 역할까지도 요가경전에서 밝힌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7개의 요가 차크라는 다음과 같다.

① 물라다라…척추의 기저부에 위치하고 4개의 꽃잎을 가진 주홍색 연꽃

② 스와디스타나…천골에 위치하며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진 심홍색 연꽃

③ 마니푸라…배꼽부위의 태양 신경총에 위치하며 10개의 꽃잎을 가진 청회색의 연꽃

④ 아나하타…가슴에 위치하며 12개의 꽃잎을 가진 짙은 적색의 연꽃

⑤ 비슈다…인후부위에 위치하며 16개의 꽃잎을 가진 자주색 연꽃

⑥ 아즈나…양미간 속의 머리에 위치하며 두 개의 꽃잎을 가진 은색 연꽃

⑦ 사하스라라…정수리에 위치하며 일천개의 꽃잎을 가진 빛의 집단 이 일곱 개의 차크라에 대한 기술은 탄트라 요가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다만, 색깔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아즈나 차크라의 꽃잎의 숫자가 과학자들이 96개라고 주장한 반면 탄트라는 2개였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차크라의 위치인데, 예를 들어 마니푸라 차크라를 탄트라가 배꼽부위의 태양 신경총에 있다고 한데 반해, 의학자들은 태양 신경총이 있는 몸의 앞과 뒤에 와동점들이 있으며, 이 둘을 합하여 한 차크라로 보았다. 이 차이를 차크라의 강력한 모터가 작동하는데 따른 회오리가 앞뒤로 동시에 드러난 현상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요가의 한 방파는 앞면의 소용돌이를 차크라의 반사현상으로 주장하고 있다.

기저의 물라다라 차크라와 정수리의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다른 차크라들과 같이 전후에서 작용하지 않고 수직으로 연결되어 오르내리고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또 앞쪽의 차크라는 그 사람의 감정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뒤쪽의 차크라들은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학자들은 차크라들이 세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차크라들은 제각기 오오라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오오라를 활성화시키면 동시에 육체가 활성화한다.

둘째는 자아의식의 다른 측면들의 계발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는 차크라들이 제각기 특정한 정신적인 기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오오라 사이에 에너지를 전달토록 하여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신경센터인 차크라들은 척추 내벽에 접합하고 있는 것으로, 모두가 각각 하나의 내분비선과 신경총에 연결되어 작용하고 있다.

차크라들은 우주적 또는 기본적인 에너지를 흡수하여 이를 분해하여 나디라고 부르는 에너지 통로를 통해 내분비선들과 신경총, 그리고 육체에 양분을 공급하는 혈액에 보낸다. 과학자들은 차크라가 육체와 정서, 심리, 심령, 그리고 영적 요소들의 총합체라고 설명하고 있다. 차크라들은 다시 정서, 심리, 심령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두뇌의 조정 메카니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척추의 차크라들의 각각의 수준들은 육체의 각각의 조직을 조절하는 동시에, 신경계와 마음의 기능 수준을 나타나게 한다고 하였다. 또 에너지는 제1 차크라(물라다라)에 있는 출입구(경혈)를 통해 한 층에서 다음 층으로 전달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출입구들이 막혀 있다.

이것들은 영적 정화작용의 결과로 열리게 되는데, 그러면 차크라들은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의 에너지 전달 역할을 하게 된다. 에테르체 안에 있는 차크라들은 제각기 그것을 둘러싸고 또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는, 다음 번의 더 섬세한 신체 속에 있는 차크라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감정체들 속의 차크라들은 그 다음 번의 더 섬세한 정신체 속의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고, 이런 식으로 모든 일곱 층의 차크라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제 사라스와티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생명은 진화하고 있으며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서서히 진행되는 인간의 개인적 진화는 각각의 차크라들을 통한 여정이다. 물라다라 차크라는 우리가 진화를 시작하는 자리이며, 사하스라라는 진화가 끝나는 차크라이다. 물라다라는 인간에게는 첫 시발점이지만 동물에게는 가장 높은 차크라이다."

사라스와티의 말을 계속 경청해 보자.

"차크라는 인간 구조속에 소 우주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차크라는 인격의 전체적인 파노라마를 만드는 체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일련의 만다라를 보여준다. 사람은 차크라의 상승 수준에 따라 각각 서로 다른 진화의 도상에 있으며, 그 진화도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스와디스타나 차크라의 영역에 있는 사람은 욕망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세계 를 보며, 마니푸라 차크라에 있는 사람은 권력 본능의 확대라는 관점으로, 아나하타 차크라에 있는 사람은 모든 인간들에게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차크라의 진화정도는 신경계의 활동과 의식상태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낮은 수준의 사람은 높은 수준의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사람은 이전에 낮은 수준에 있었던 경험이 있어서 넓은 경험의 폭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차크라들 역시 발달해 가는데, 각 차크라는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신적 패턴들을 나타낸다"고 밝히고 있다. 차크라의 각성은 인격의 상승, 영성개발 등 인간 차원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차크라가 각성되면 즉시 의식과 마음에 변화를 가져온다. 물질, 명예, 권력 등 모든 욕망과 애증, 고통과 좌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위의 환경과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품격에 따라 각각의 차크라와 연결되어 사고하고 판단하면서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세상을 효과적으로 살기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의식의 변형을 통해 무절제한 사고와 탐욕, 그리고 마음이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스러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나를 위한 노력과 병행하여 본래의 나, 미래의 나인 진아의 진면목을 발현하기 위하여 차크라, 또는 쿤달리니 각성에 대한 관심과 노력도 매일의 생활과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① 물라다라 차크라 물라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초, 근본이라는 뜻으로 차크라들의 근원이 되는 차크라이다.

물라다라 차크라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수행이나 영성개발을 위한 최초의 관문으로 쿤달리니 요가에서는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이 차크라는 생식기와 항문의 중간지점인 회음 또는 척추의 기저부에 자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똬리를 튼 뱀이나 남근, 또는 삼각형으로 묘사되는 생명력의 보고인 쿤달리니 샥티가 세 바퀴 반의 똬리를 틀고 척추를 따라 흐르는 척수의 중심 신경관인 수슘나 통로와 맞대고 있다. 그러나 물라다라 차크라가 작동되면 쿤달리니 에너지는 즉시 머리를 치켜들고 입을 벌린 채 수슘나 통로를 통해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② 스와디스타나 차크라 스와디스타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자아의 거주지라는 의미이다. 스와디스타나 차크라는 물라다라의 위쪽 방광 부근 하복부 신경총에 자리잡고 있다.

③ 마니푸라 차크라 마니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보석의 도시라는 뜻이다. 마니푸라 차크라는 배꼽 높이의 척추 부위에 있는 태양 신경총에 자리잡고 있다.

④ 아나하타 차크라 아나하타는 산스크리트어로 늙지 않는다, 또는 건강함이란 의미이다. 아나하타 차크라는 가슴 속 심장부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아나하타 차크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더 있다. 심장부위 외에도 가슴 중앙부와 심장 위의 비육체적인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것 등이다. 차크라는 정묘한 비물질체이기 때문에 그 위치가 해부학적으로 어느 곳이다 하고 정의할 수는 없다. 나의 체험으로는 가슴 중앙으로 추정이 되었지만, 추정일 뿐 확실히 중앙이라고 고집하기는 어렵다.

⑤ 비슈다 차크라 비슈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순수, 순결을 뜻한다. 비슈다 차크라는 인후부위의 경동맥 신경총에 자리잡고 있다.

⑥ 아즈나 차크라 아즈나는 산스크리트어로 권위, 명령, 무한한 힘이란 의미이다. 아즈나 차크라는 양미간 뒤 두뇌속의 송과선 신경총에 자리하고 있다. 이 차크라는 밝은 은색의 두 잎을 가진 연꽃으로 상징되는데, 나의 체험으로는 각종 색깔이 어울어진 현란한 구체였다. 아즈나 차크라는 직관의 눈 또는 제3의 눈이라고 부른다. 물라다라 차크라에서 각성된 쿤달리니와 이다.

핑갈라가 상승하여 아즈나에서 합일하면 '나'라는 자아가 사라진다고 한다. '나'라는 의식이 있는 한 이원성의 세계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는 자신의 잠재의식을 포함한 의식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쿤달리니와 이다. 핑갈라가 합일하여 아즈나 차크라가 각성되면 자아가 사라지게 된다. 자아를 느끼지 못하게 되면 이원성이 사라지게 되고, 이때 비로소 제 삼 의 눈이 뜨이게 되고 삼매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 자아가 사라진다고 하여 항상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육체의식을 초월하여 삼매에 들 때 잠깐 사라지는 것이며, 명상을 끝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자아가 사라지면 공에 빠진다고 우려하는 내용이 선어록(禪語錄)에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맨몸으로 앉아서 혼침상태에 빠진 공과 아즈나 차크라가 각성되어 자아를 이탈한 공의 차이는 마치 녹슨 쇠와 황금과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공은 마치 빛이 없는 무한한 공간에 독존하는 찬란한 북극성과 같<으며 이 북극성같은 의식은 본래 자성의 의식이어서 맑고 투철하기만 하다. 이 경지가 지나가야만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차크라의 수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신성함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 단계가 견성은 아니며, 요가 서적에 씌여 있듯이 신통을 부릴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다만 진아에 대한 어렴풋한 단서를 확인한 단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⑦ 사하스라라 차크라 사하스라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천 개의 꽃잎이라는 의미이다.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두뇌 내부의 끝부분인 정수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명 범(梵)의 좌(座)라고도 부른다.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수슘나의 종점에 자리잡고 있어서 쿤달리니 샥티에게도 종점이면서 반환점이기도 하다.

쿤달리니가 사하스라라에 도달하면 개인적인 자아는 사라지게 되며, 몸안에 내재해 있는 우주 에너지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우주 의식과 일체가 된 수행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신성함을 감지하고, 신격을 깨닫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가서적을 보면 쿤달리니가 사하스라라에 도달하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어, 마치 수행의 목적지에 도달한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물론 쿤달리니가 사하스라라 차크라까지 와서 머무는 동안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환청이나 환영들을 체험하게 되고, 얼마간의 깨달음을 얻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이한 능력을 얻어, 이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도 있
다. 그러나 쿤달리니의 각성 과정이나 각성에서 얻는 깨달음은 대단한 것
이 아니다.
쿤달리니 각성 그 자체는 감각적인 현세 외에도 영적 세계가 실재하고 있
다는, 마음으로부터 분명하고 확실한 자각이라고 생각하면 옳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쿤달리니의 각성은 진아를 찾기 위한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
어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3) 나 디

나디는 흐름이라는 의미이며 차크라와 연결되어 신경 또는 의식이 흐르는 통
로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경조직이나 정맥, 동맥 등 구조가 크고
가시적인 나디들은 현대 의학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가시적인 나디 외에도 물질적인 형태를 갖지 않는 불가시적 나디들이
무수하게 많은데, 이는 육체적인 구조가 아니라 생명과 의식의 기초를 이루
는 에너지이다.
탄트라는 이와 같은 불가시적인 7만2천 개의 무수한 나디들이 온몸을 덮고 작
용하고 있다고 하며, 이 통로들이 자율신경계와 동일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 나디중에 14개의 중요한 나디가 있으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나디가 이다
와 핑갈라, 수슘나 이다.
모든 나디는 수슘나에 종속되어 있으며, 프라나는 수슘나를 통하여 골반 신경
총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뇌에까지 흐르며, 물라다라 차크라는 이들 세 나디의
집결지이다.
수슘나는 인체 중심에 위치하며 척수를 통해서 흐르는데, 쿤달리니 샥티가 각
성하면 물라다라 차크라에서 시작하여 이 수슘나를 타고 두뇌로 올라간다.
척수의 수슘나 왼쪽과 오른쪽은 이다 나디와 핑갈라 나디가 각각 흐르고 있
다. 핑갈라 나디는 육체를 역동적이며 활동적으로 만들어 주며, 생명력과 남
성적인 힘을 부여하는데, 오른쪽 콧구멍으로 흐른다고 한다.
육체와 심리기능은 이 두 나디의 기본적인 기능의 토대위에서 작용한다.
이다 나디는 심리적 면을 조절하고, 핑갈라 나디는 생명력을 담당하고 있는
데, 이러한 양극체제는 서로가 보완하도록 장치되어 있어서 사람이 균형있고
조화로운 상태로 행동하도록 해준다.
이다는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으로, 핑갈라는 부교감신경으로 인정되고 있는
데, 이다와 핑갈라가 요가의 행법으로 정화되면 수슘나가 각성되어 쿤달리니
샥티가 상승하게 된다.
수슘나가 척수를 따라 흐르면 동시에 이다와 핑갈라도 척추뼈 외부에서 척수
를 따라 흐른다.



4) 쿤달리니

진아를 회복하기 위해 수행하는 도상에서 쿤달리니의 각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는 것인가?
현존하는 모든 관련 서적이나 종교, 그리고 스승들은 한결같이 진아를 추구하기 위한다면 명상을 하여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쿤달리니의 각성만을 강조하였고 명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명상과 쿤달리니의 상관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는 쿤달리니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인도의 힌두교나 중국의 도교에서는 각각 쿤달리니와 소주천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과장된 이유는 쿤달리니 각성이 지극히 희소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엄격한 의식과 조직적인 수행으로도 각성되는 것이 아니고, 철벽같은 의지로도 도저히 접근하지 못하는 성역이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돌발적인 각성을 제외한다면 진아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쿤달리니 각성은 노력은 하지만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진아를 탐색하는 방법으로는 오로지 명상을 위주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생을 송두리째 걸고 용맹정진을 해도 거의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진아를 탐구하는데는 명상과 각성된 쿤달리니가 하는 역할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쿤달리니가 각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물질세계에 국한되어 있던 각
성자의 의식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하고, 그 확장된 의식이 영적으로 대변혁
을 이뤘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육체적으로는 인체의 구성 요소들을 철저히 수리,개조하여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여준다.

그럼 명상은 무엇 하는 것인가?
쿤달리니가 각성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정비된 바탕에서야 명상은 진아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유일한 추진력이며 나침반이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어떤 시점에서는 일정한 호흡방법으로 시도하면 누구든지 쿤달리니의 각성이 가능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그 후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영적 변화가 일어나 인류에게서 쿤달리니 각성이라는 혜택을 거두어가고 말았다.
동시에 영적 감각과 시각을 상실해버린 인류가 초의식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드러내 주는 쿤달리니의 향수에 매달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아를 추구하는데 함께 사용하였던 쿤달리니는 상실하였지만 명상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화두를 잡고있든 묵상을 하든 또는 기도라는 형식을 빌리든,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명상에 인생을 걸고있는 수행자들은 무수하게 많다.
마치 바닷가 갯벌에서 집을 짓겠다고 용을 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쿤달리니가 각성되지 않은 몸 즉, 물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식과 육체는 아무리 건강하고 건전하다고 하여도 비물질 세계로의 여행에는 적응하지도 못하지만 감당해 낼 수가 없다.
진아를 탐색하는데 절대 조건인 쿤달리니 각성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나는 기(氣)의 전달방법에서 그 원인을 발견하였다.
요가의 여러 가지 호흡방법과 도가의 방법은, 쉽게 익힐 수 있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용하고 있지 않은 똑같은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단전호흡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전국 도처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도장들이 한결같이 단전호흡을 상표로 내 걸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발견한 그 호흡방법이 수련을 하게 되면 백이면 백 모두다 상기가 되기 때문인데, 그 결과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기가 상기되는 것만 방지하게 된다면 쿤달리니 각성이 누구나 가능해 질 것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진아를 찾는 일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비유를 한다면 집을 짓기 위해서는 우선 대지를 마련하고 목수를 선정한다.
그리고 설계대로 필요한 모든 자재를 구입하여 목수의 지시에 따라 쌓고 바르면 집이 되는 것이다.
단단히 다져진 기초가 된 상태의 대지와 그 옆에 쌓여진 모든 자재들의 더미 그 자체를 쿤달리니의 각성된 현상으로 보면 된다.
명상의 역할은 바로 목수의 역할과 같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목수가 유능하다 하더라도 땅이 없고 집 지을 자재가 없는데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아무리 신통한 명상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진아를 탐색하는데 성공을 바랄 수는 없다.

명상이나 참선을 수행하는데 쿤달리니가 그토록 필요한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우선 육체에 작용하는 역할을 본다면 인체를 완전히 개혁하여 명상을 하는 동안은 간지럽다거나 결린다든지 하는 미세한 피부, 신경의 작용까지도 일체 일어나지 않는다.
허리를 펴도 전혀 불편하지 않으면서 호흡이 미세하게 이뤄진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몸이 완벽하여 의식에 감각의 기능이 감지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영체적(靈?的)인 면을 보자.

쿤달리니가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도달하여 머리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면 백회를 비롯한 모든 육체의 관문이 터지게 되며, 신인(神人)합일, 천인(天人)합일 등의 여러 가지 초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심령적인 현상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수행자들이 그토록 바라는 상념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도 있고, 따라서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를 감지하게 된다.
이것은 육체의식을 초탈한 경지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이 쿤달리니의 각성이 이뤄주는 것이다.
나는 참으로 진아를 탐구하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쿤달리니를 각성시키지 못했다면 하루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제 운명대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쿤달리니의 각성과 소주천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이함허(李涵虛)가 지은 도규담(道竅談)에 실린 물라다라 차크라 각성방법을 보자.
영부영모(靈父靈母)는 거슬러 와서 교구(交?)하고 거슬러 오는 법(逆來法)을 시종 떠나지 말아야 한다.
정기(鼎器)가 서면 신과 기가 만나고, 신과 기가 만나면 두텁게 쌓이고 두텁게 쌓이면 충돌이 굳세다.
충돌이 굳세면 관규(關竅)가 열리고, 관규가 열리면 하거(河車)의 길이 뚫리게 된다고 적혀 있다.

탄드라 경전의 해석에 따르면 "잠들어 있는 정적 에너지를 동적 에너지로 변화시키면, 중력의 법칙에 위배되는 과정이 생기면서 척추속의 척수를 통해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 에너지의 힘은 아파나의 양이온과 프라나의 음이온이 결합함으로써 생겨난다"고 하였다.
영부(+)와 영모(-)가 교접하는 것과 양이온과 음이온이 결합한다는 것은 똑같은 말이며, 이로 하여 단전에 기가 쌓이면 꽁무니뼈를 가격하여 쿤달리니가 각성한다는 말과 관규가 열린다는 뜻이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쿤달리니가 골수를 타고 상승한다는 의미를 도가에서는 하거(河車)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수레는 육지에서 다니지만 하거는 물에서 다니므로 단법(丹法)에서 오묘한 말로 비유한 이름이라고 참동계(參同契)는 하거를 설명하고 있다.
역시 함허가 지은 삼거비지(三車秘旨)를 보면, 하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운기(運氣)이니 소주천(小周天)이고, 둘째는 운정(運精)으로 옥액(玉液)하거이며, 셋째는 정기겸운(精氣兼運)이니 대주천(大周天)이라고 하였다.
소주천의 방법을 살펴보면 하단전에서 양화(陽火)가 일어나면 미려(尾閭)에 옮겨, 미려의 뽀족한 뼈의 두 구멍 가운데로부터 척추를 통과하여 옥침(玉枕)을 지나 이환(泥丸)에 들어간다.
모름지기 한 길로 운기하여 기를 목구멍까지 끌어들여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하리시가 밝힌 기의 경로를 들어 보자.
사하스라라 차크라에서부터 지바나디라고 불리는 통로를 통해 가슴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 지바나디는 수슘나의 연장이며, 따라서 수슘나는 곡선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차크라로부터 시작되어 척추를 따라 뇌에 이르고, 다시 거기에서 구부러져 가슴에서 끝난다.
이 가슴에 이르면 요기의 삼매는 영원하다.
가슴이야말로 최후의 중심지이다. 여기서 요가와 도가의 차이가 난다.
요가는 쿤달리니의 종착점이 진아가 있다는 가슴이라고 지적하여, 쿤달리니 샥티가 가슴까지 가는 것은 기를 운기(運氣)하여 가는 것이 아닌 당연히 쿤달리니가 가는 코스의 개념이었다.
다시 말하면 요가에서는 기를 생각대로 끌고 다닌다는 운기라는 개념이 없다.
소주천은 목구멍까지 끌어와서 단전까지 내려보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소주천을 운행하는 하거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함허는 도규담에서 하거의 출발점을 두 가지로 말하였다.

첫째는 진기가 이환(泥丸)에 오르면 이에 하거의 길이 열린다 하였고, 둘째는 관규가 열리면 거슬러 운행하는 길이 열리고 하거의 길이 뚫리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의 말은 쿤달리니가 머리 정수리에 도달한 다음에 생각으로 기를 운행시킨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려의 장벽이 열리면서 척수위로 기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쿤달리니는 생각으로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첫 번째의 내용은 쿤달리니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내용은 현재 도가 및 단학에서 취하는 내용과 같다.
따라서 두 번째의 지적은 쿤달리니의 각성이 아니고, 의지로서 기를 조성하여 쿤달리니의 진행로를 따라 운행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내용이나 나의 생각이 옳다고 한다면 첫 번째 내용과 같이, 한 때는 쿤달리니가 각성되었지만 그 후 실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요가나 도가나 모두 쿤달리니의 각성이 미궁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함허의 삼거비지에는 소주천을 제외하고 옥액하거와 대주천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물론 내가 하거에 대해서 연구할 기회가 없어 모른다고 하여도,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머리에는 엄청난 양의 기가 계속 올라오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이 후유증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머리에 집중된 엄청난 양의 기는 처음에는 정수리를 뚫고 하늘로 치솟기도 하고 외부의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한다.
이 경우 백회가 뚫리고 또 오색찬란한 광채가 나타나는 현상일 때는 신인합일이나 천인합일의 경지를 체험한다.
그리고 나서도 엄청난 기는 온 몸을 헤집고 다니면서 대주천의 경로까지 모두 뚫어 버린다.
이 차이를 어떻게 규명해야 할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쿤달리니나 소주천의 각성은 더 이상 책에서나 보고 구전으로 듣는 신비나 꿈이 아니다.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방법이 개발됨으로써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쿤달리니는 종교나 신분 또는 남녀의 성별도 구분하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쿤달리니를 각성하면 깨달음을 얻은 성인으로 받들어지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한다.
비록 성인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물질계인 이 현상을 초월함으로써 진아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고, 생사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한 견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에는 뿌리가 위에 있고 줄기와 잎이 아래로 자라는 불멸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 나무는 사람의 육체를 묘사한 것으로 머리가 뿌리이며 척추가 줄기이다.
그리고 의식이나 생각, 감각 등은 이 나무의 잎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나무는 거꾸로 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체의 신경 구조와 작용을 나타낸 것으로, 이 나무를 알면 진리를 깨달은 자라고 한다.
이것은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영적 각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쿤달리니를 각성하면 이 나무의 뜻이 저절로 마음에 닿게 된다.



5) 안타카라나

사람들은 누구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정신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런 생리 현상쯤으로 생각하고 무심히 살아가고 있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을 차단시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연상작용을 정신집중의 방법으로 제어하여 하나의 목표에 정지시키고, 나아가 그 하나의 목표마저 소멸시켜 무념무상의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 명상의 목표이다.
인도의 요가철학은 이미 수 천년 전에 의식과 생각의 흐름에 대한 연구가 완성되었는데 이를 안타카라나라고 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고 명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초기단계에서 사하스라라, 아즈나, 아나하타 차크라에 집중하면 안타카라나에서 밝히는 정신작용을 심안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정신작용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명상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므로 숙지하여야 할 것이다.
안타카라나는 진아의 구조를 이해함과 동시에, 관련 기관들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하는가 하는 의문을 해소해 주고 있다.
안타카라나는 내부에 있는 숨은 기관이라는 뜻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심령적인 기관이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관이 앞에서 설명한 머리부분의 아스트랄체와 가슴에 있는 코자르체를 지칭하는데, 이 두 기관이 상호협조하여 하는 작용이 바로 정신작용이다.

안타카라나는 샨카철학과 요가철학에서는 ①마나스 ②아한카라 ③치타의 세 가지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우파니샤드에서는 ①마나스 ②부디 ③아한카라 ④치타등 네 가지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우파니샤드의 네 가지 설을 취하기로 하였다.

마나스는 마음이며 부디는 지성에 해당되며, 이 두 기관은 머리부위의 아스트랄체에 소속되어 있다.

아한카라는 자아로 알려져 있으며, 치타는 잠재의식 또는 마음의 자료로써 마음을 이루는 원인인데, 이 두 기관은 가슴부위의 코자르체에 속해있다.

① 마나스

마음 또는 생각이라고도 하는데 정보를 받아들이고 주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마음은 육체와 부디(지성)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은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지성에게 전한다.

지성은 그 정보를 판단하여 다시 마음에게 돌려주면, 마음이 그 판단대로 육체로 하여금 행동을 유발시키도록 명령하게 된다.

따라서 육체는 마음의 명령이 없이는 어떤 행위도 하지 못하게 되며, 마음도 마찬가지로 지성의 도움이 없으면 기능이 정지되는 것이다.

마음은 두뇌 최상층의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있다고 보는데, 여기에는 계란모양의 부디 빛의 집단이 있고, 그 빛 덩어리 위에 마음의 빛이 있다.

심안(心眼)이라고도 하고 영안(靈眼)이라고도 불리는 내면의 영적인 감각에 의하면 마나스는 항상 크기와 색깔을 바꾸는 빛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심안 또는 영안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쿤달리니가 각성하게 되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빛이나 소리들을 보거나 들을 수 있다.
쿤달리니와 상관없이 기도나 명상을 하더라도 영적 차원의 소리나 현상들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데, 이러한 비물질적인 현상을 감지하는 능력을 심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 현상은 귀로 들리거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감촉이 되는데, 보이고 들리는 것이 눈이나 귀보다 더욱 분명하고 현란하며 바로 마음에 새겨진다.
이 빛은 심안으로나 볼 수 있는데, 마나스의 빛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크기나 색체가 변화하게 된다.

마음이 안정되면 달빛처럼 온화하고 평화로움을 느끼는 빛으로 나타나고, 감각이 억제되고 마음이 내부로 향하는 명상상태에서는 빛의 크기가 작아지고 감각기관과의 연결이 단절된다.

명상을 통해 상당한 경지에 이르면 마음은 육체의 감각들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미지(未知)의 것들을 직접 지각할 수 있는데 이를 투시능력이라고 한다.
파탄잘리의 라자요가 경전에는 "모든 기관을 지배하게 되면 마음이 내키는 대로의 빠른 운동, 감각을 떠나서 사물을 알 수 있는 힘, 세계의 근원을 지배하는 힘이 발현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은 물질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보다 정묘한 존재도 감수할 수 있다.
또한 마음은 눈을 뜨고 있을 때나 꿈을 꾸고 있을 때도 항상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② 부디

안타카라나의 두 번째 기관인 부디는 지식을 담당하고 있다.
직감, 식별감, 의식의 빛이라고 불리는 부디는 모든 체험이나 지식을 받아들여, 그것들을 분별하고 식별하며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부디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심장부위에 자리잡은 코자르체와 쉴 사이 없이 연락을 취하고 있다.
또 마음을 통하여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육체의 감각들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부디로 보내면 부디는 그것을 분석, 판단하여 코자르체로 보낸다.
코자르체에서는 전세(前世)로부터의 일체의 기억이나 인상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부디에서 보내진 일들과 관계된 기억이나 인상을 부디로 보내준다.
부디는 이를 판별하여 마음으로 보내며 마음은 이에 따라 육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부디는 이 자료를 동시에 코자르체에 보내 저장토록 한다.
사람은 계속되는 상념들의 연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 상념의 연속작용이 부디의 기능 때문이다.
마나스(마음)와 부디(지성)의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스트랄체이며, 두뇌 속의 브라마 란트라 또는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자리잡고 있다.

③ 아한카라

안타카라나의 세 번째 기관이며, 코자르체에 속하는 아한카라는 자아의식이 일어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내가 하고 있다거나, 나는 사랑한다 등의 의식이 아한카라에서 일어난다.
아한카라는 치타와 직접 관계를 맺고 간접적으로는 진아와 부디에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즉 아한카라는 치타속에 저장되어 있는 산스카라를 들춰내 부디에 보내며, 부디로부터는 새로운 산스카라를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인 산스카라는 치타에 보내 저장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이 자아는 우주 자아와 우주심(心)의 축소판이므로 우주 의식속에 있는 갖가지 기억이나 인상의 흐름을 받아 들이고 있다.
아한카라와 치타의 관계는 마나스와 부디의 관계와 비슷하다.

마음이 행동을 지배하고 지성이 지식을 장악하고 있듯이, 아한카라도 행동을 지배하고 치타는 지식을 장악하고 있다.

아한카라는 치타속의 산스카라를 끌어내고 새로운 산스카라를 치타속에 보내준다는 식으로 주고받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로 나 라고 하는 의식이 아한카라에서 발생한다.
이 '나'라고 하는 생각을 기초로 하여 모든 사고의 작용이 일어나는데 애정과 혐오의 감정은 '나'라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나'에 대한 집착이 계속해서 현상세계와 탄생과 죽음, 즉 윤회를 되풀이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아한카라는 심장부위의 에테르 공간에 있는 코자르체에 자리하고 있으며, 푸른 보석과 같은 빛을 내고 있으며, 공과 같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둥그런 빛은 번쩍이는 치타의 빛을 감싸고 진아를 품고 있다.

④ 치타

안타카라나의 네 번째 기관으로 진아를 반영시키는 거울이라고 일컬어 왔다.
치타속에는 전세로부터 현재까지의 일체의 기억이나 인상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자료라고도 하고 잠재의식의 대해(大海)라고도 한다.
사람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치타에 잠재하는 산스카라에 의해서 그 사람의 행동이나 기호, 개성 등이 좌우된다.
치타는 깊은 수면상태에서도 활동하고 있어서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자신이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그 동안의 인상을 표면 의식에 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치타의 본질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산스카라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현세뿐만 아니라 전세에서 무수하게 경험한 사건 등의 기억이나 인상이 치타속에 정묘한 파동으로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산스카라는 치타에서 발생하여 아한카라의 활동에 의해 비즈나나마이 코샤(지성의 층)로 옮겨져 의식화된다.
이것이 상념 또는 사고파(思考波)라고 일컫는 것인데, 치타에서 생겨난 것이든 감각에 의해 외부로부터 얻은 지식이든 지성의 기능은 모두 상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 화제를 바꾸어 생각해 보자.
아한카라에서는 '나'라는 자아의식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치타에서는 '나'를 나라고 주장할만한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일체의 기록이 저장되어 있다.
아한카라와 치타는 코자르체의 구성원이면서 코자르체가 '나'라는실체이면서 '나'라는생각 자체이다.
어디로부터 이 '나'가 일어나는가? 그것을 내면에서 찾아보면 곧 사라진다. 이는 현명한 추적 방법이다.
마음이 스스로의 본성을 계속 규명해 들어가면 결국 마음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마음이란 생각의 집합에 불과하며'나라는 생각'이 모든 생각의 뿌리이기 때문에 마음은 결국 '나라는 생각'일 뿐이다.
'나라는 생각'이 곧 한 개인의 탄생이며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 그 개인의 죽음이다.
또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육체와의 그릇된 동일시가 시작된다.
따라서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 고통이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각성의 열쇠



인도의 요가철학은 쿤달리니의 각성만으로도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경전에 전해 온다.
따라서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수행하는 수행단체들은 오 천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동안 쿤달리니의 각성을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해 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현재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무수한 쿤달리니의 각성자들을 배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집적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한 수행서적을 참고하여 수련한다면 누구나 각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뒤돌아보면 무수한 수행자들이 공들인 노력과 땀의 결실이 무엇인지 아연할 뿐이다.
쿤달리니는 이제 신비에 싸인 채 전설로만 회자되는 정도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쿤달리니 각성이 이렇게 희귀하고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신이 인색하여 인간들이 깨우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류들이 아직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 함수를 풀어내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쿤달리니 각성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 알아보자.

요가에서는 쿤달리니의 각성을 위한 방법이 하타요가, 크리야요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들 요가법중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는 데다, 번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한 생을 다 바쳐도 기약하기가 어렵다.
나머지 한 가지 방법이란 프라나야마, 즉 호흡에 의한 방법인데, 사라스와티는 이를 가리켜 신속하지만 폭발적이고 위험이 따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요가철학은 이미 프라나야마에 의한 각성법이 가장 쉽고 빠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호흡으로 인한 상기 현상과 각성시 샥티의 상승으로 빚어지는 부작용 때문에 프라나야마를 채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노력했지만, 아직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호흡법에 의한 각성방법을 우선 간단히 살펴보자.

쿤달리니를 각성하려면 쿤달리니가 잠들어 있는 물라다라 차크라의 관문인 꼬리뼈 부분을 두드려야 한다.
이 문은 누구나 두드리면 열리는 문으로, 문을 두드리면 자고있던 쿤달리니 샥티가 눈을 뜨고서 일어나 척추뼈를 타고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 현상이 쿤달리니의 각성인데, 피할 수 없는 난관이 있다. 물라다나 차크라의 위치인 꼬리뼈에 충격을 주는 것은 호흡으로 단전에서 생성된 기의 힘이다.
이 피하기 어려운 위험은 단전에서 생성된 기는 에너지화 되어 꼬리뼈를 향하여 가야하는데 그렇지를 못한다. 수행자 백이면 백 명 모두가 에너지화 되지 않고, 기화(氣化)되어 가슴을 타고 머리로 올라가는데 이를 상기라고 한다.
상기되는 부작용만 없다면 호흡법으로 쿤달리니를 각성하기 위해 10여일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제 이 해법을 알아보자.
호흡으로 생성된 기를 어떻게 에너지화 하며, 이 에너지를 어떻게 꼬리뼈로 보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호흡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수련하기에 어렵거나 복잡해서는 안되며, 복식호흡으로는 에너지를 조성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므로 부적절하다. 따라서 단전에 의식과 힘을 집중하는 전통적 의미인 단전호흡을 채택해야 하는데, 이 방법은 백이면 백 모두 다 상기되어 병을 얻게 된다. 현재 이 방식의 단전호흡을 가르치거나 수련하는 곳은 이 때문에 어디에도 없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샥티가 상승할 때 수반하는 부작용이다.
요가서적에 보면 나디가 정화되어 있으면 쿤달리니가 상승할 때 부작용이 최소화된다고 밝히고 있다. 나디는 신경, 정맥, 동맥 등 가시적 나디와 물질적 형태를 지니지 않는 불가시적 나디로 크게 두 가지로 되어 있다.
불가시적 나디는 14개의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다와 핑갈라, 수슘나가 대표적인 나디라고 하였다. 
저술된 요가서적을 보면 나디가 자율신경계와 동일한 것으로 기술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사라스와티는 핑갈라가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을 지배하고, 이다는 부교감신경을 지배하는 것으로 적고 있다. 따라서 샥티가 상승하면서 일으키는 부작용도 나디, 즉 자율신경에 의해 감소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쿤달리니 각성의 비밀 열쇠가 바로 자율신경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며 나의 발견이다. 아마 처음부터 쿤달리니를 각성하려고 시도하였다면 자율신경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건강을 위해 자율신경을 콘트롤하게 된 것이 우연하게 비밀의 열쇠를 쥔 셈이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과의 합일이나 열반을 이루는 일은 적어도 현재까지의 사람이라는 영육의 체제로서는 달성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영과 육의 무게 중심을 쿤달리니 각성에 의해 혁명적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목적은 어렵지 않게 이루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을 성취코자 한다면 그만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 위대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도 그만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까지의 수행자들이 쏟아 부은 노력에 비하면 나의 방법을 채택한다면 각성을 하면서도 대가라고도 할 수 없는 하찮은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출처 : 백운청산 티벳불교

출처 : 한국트랜서핑센터
글쓴이 : 스케쥴러(카루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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