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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證道歌 永嘉 玄覺 大師

narrae 2015. 11. 27. 03:25

 

[如天 無比 큰스님 입력]

君不見
絶學無爲閒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證實相 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頓覺了 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無罪福 無損益 寂滅性中莫問覓 比來塵鏡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誰無念 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放四大 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決定說 表眞乘 有人不肯任情徵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
摩尼珠 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淨五眼 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鏡裡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常獨行 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窮釋子 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貧則身常被縷褐 道則心藏無價珍 無價珍 用無盡 利物應機終不恡 三身四智體中圓 八解六通心地印
上士一決一切了 中下多聞多不信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從他謗 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我聞恰似飮甘露 銷融頓入不思議 觀惡言 是功德 此則成吾善知識 不因訕謗起怨親 何表無生慈忍力 宗亦通 說亦通 定慧圓明不滯空 非但我今獨達了 恒沙諸佛體皆同 師子吼 無畏說 百獸聞之皆腦裂 香象奔波失却威 天龍寂聽生欣悅
遊江海 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自從認得曹溪路 了知生死不相關 行亦禪 坐亦禪 語黙動靜體安然 縱遇鋒刀常坦坦 假饒毒藥也閑閑 我師得見燃燈佛 多劫曾爲忍辱仙 幾回生 幾回死 生死悠悠無定止 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
入深山 住蘭若 岑崟幽邃長松下 優遊靜坐野僧家 闃寂閑居實蕭灑 覺則了 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 箭還墜 招得當來不如意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 莫愁末 如淨琉璃含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江月照 松風吹 永夜淸霄何所爲 佛性戒珠心地印 霧露雲霞體上衣
降龍鉢 解虎錫 兩鈷金鐶鳴歷歷 不是標形虛事持 如來寶杖親蹤跡 不求眞 不斷妄 了知二法空無相 無相無空無不空 卽是如來眞實相 心鏡明 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萬象森羅影現中 一顆圓光非內外 豁達空 撥因果 漭漭蕩蕩招殃禍 棄有着空病亦然 還如避溺而投火
捨妄心 取眞理 取捨之心成巧僞 學人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損法財 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大丈夫 秉慧劍 般若鋒兮金剛焰 非但能摧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震法雷 擊法鼓 布慈雲兮灑甘露 龍象蹴踏潤無邊 三乘五性皆惺悟
雪山肥膩更無雜 純出醍醐我常納 一性圓通一切性 一法遍含一切法 一月普現一切水 一切水月一月攝 諸佛法身入我性 我性還共如來合 一地具足一切地 非色非心非行業 彈指圓成八萬門 刹那滅却三祇劫 一切數句非數句 與吾靈覺何交涉 不可毁 不可讚 體若虛空勿涯岸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取不得 捨不得 不可得中只麽得
黙時說 說時黙 大施門開無壅塞 有人問我解何宗 報道摩訶般若力 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我早曾經多劫修 不是等閑相誑惑 建法幢 立宗旨 明明佛勅曹溪是 第一迦葉首傳燈 二十八代西天記 法東流 入此土 菩提達磨爲初祖 六代傳衣天下聞 後人得道何窮數 眞不立 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二十空門元不著 一性如來體自同 心是根 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痕垢盡除光始現 心法雙亡性卽眞 嗟末法 惡世時 衆生福薄難調制 去聖遠兮邪見深 魔强法弱多怨害 聞說如來頓敎門 恨不滅除令瓦碎 作在心 殃在身 不須怨訴更尤人 欲得不招無間業 莫謗如來正法輪 栴檀林 無雜樹 鬱密深沉師子住 境靜林閒獨自遊 走獸飛禽皆遠去 師子兒 衆隨後 三歲便能大哮吼 若是野干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
圓頓敎 沒人情 有疑不決直須爭 不是山僧逞人我 修行恐落斷常坑 非不非 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 是則龍女頓成佛 非則善星生陷墜 吾早年來積學問 亦曾討疏尋經論 分別名相不知休 入海算沙徒自困 却被如來苦訶責 數他珍寶有何益 從來蹭蹬覺虛行 多年枉作風塵客
種性邪 錯知解 不達如來圓頓制 二乘精進勿道心 外道聰明無智慧 亦愚癡 亦小騃 空拳指上生實解 執指爲月枉施功 根境法中虛捏怪 不見一法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了卽業障本來空 未了還須償宿債 飢逢王饍不能飡 病遇醫王爭得瘥 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
勇施犯重悟無生 早時成佛于今在 獅子吼 無畏說 深嗟懞憧頑皮靼 只知犯重障菩提 不見如來開秘訣 有二比丘犯淫殺 波離螢光增罪結 維摩大士頓除疑 還同赫日銷霜雪
不思議 解脫力 妙用恒沙也無極 四事供養敢辭勞 萬兩黃金亦銷得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法中王 最高勝 恒沙如來同共證 我今解此如意珠 信受之者皆相應 了了見 無一物 亦無人兮亦無佛 大千沙界海中漚 一切聖賢如電拂 假使鐵輪頂上旋 定慧圓明終不失 日可冷 月可熱 衆魔不能壞眞說 象駕崢嶸謾進途 誰見螳螂能拒轍 大象不遊於兎徑 大悟不拘於小節 莫將管見謗蒼蒼 未了吾今爲君訣

*註:
1. 頓覺了 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돈가교 여래선...교후空空無大千...] 夢의 반대개념으로 쓰일때 覺은 [교]로 발음(제3강)
2. 9행에서 表眞乘은 表眞僧으로 쓰이는 용례가 오히려 뜻에부합하다(제5강)
3. 恒沙諸佛體皆同쓰恒또는 河를 써도 맞다.


證道歌 제1강

반갑습니다. 오늘 2월 22일 수요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어제까지 신심명을 끝내고, 오늘부터는 미리 말씀드린 대로 증도가를 가지고, 공부하도록 하게 됐습니다.
증도가 교재는 뭐 여기저기 곳곳에 흔하니까 다운을 받든지 복사를 해서, 출력을 해가지고 앞에 놓고 들으시면 편리하실 줄 압니다.

이 증도가는 신심명과 더불어 禪時(선시)의 白米(백미)라고, 예부터 같이 취급해 왔습니다.
그래서 신심명과 같이 결의 강의를 이어서 하는 예가 흔히 있어요. 책을 내도 그렇고, 강의를 해도 그렇습니다.
信心銘(신심명)은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이고, 이 證道歌(증도가)는 4조. 5조. 6조 혜능스님의 제자인 영가 현각스님의 저술입니다. 그래서 代數(대수)가 좀 밑으로 내려오지요.
그렇지만 이것도 역시 初期(초기) 禪宗(선종)의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좀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되겠습니다.

이름은 證道歌(증도가)! 증득할 證(증)자. 길 道(도)자. 노래할 歌(가)자니까, 그대로 그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다.
깨달음의 노래! 이렇게 해석을 해요. 깨달음의 노래다.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영가스님께서 이 증도가를 짓기 전에 육조스님을 만나서 깨달음을 인가를 받고, 거기에서 자신을 얻으셔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피력하는 그런 연유를, 사전에 좀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證道歌(증도가) 悟道頌(오도송)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요.
대개 오도송이라고 하면, 四言絶句(사언절구)나 五言絶(절)(오언절)이나 律(율)이나, 그 다음에 七言絶((칠언절)이나 율이나 이렇게 간단하게 흔히 오도송을 짓는데, 이 증도가는 그런 글에 비해서는 상당히 길지요.

禪房(선방)에서 증도가를 못 외우면,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禪院(선원)에서는 즐겨 읽는 그런 내용이기도 하고, 또 역대 조사 스님들의 글 들을 보면, 증도가를 인용 안하는 분들이 없어요.
그래서 법문 하실 때라든지 글을 쓰실 때라든지, 그 영가스님의 증도가의 내용을 상당히 많이 인용을 합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의 글로는 아주 널리 알려져 있어서, 이 염화실 법우님들 중에서도 잘 알고 계시는 분도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六祖壇經육조단경) 參請機緣品(참청기연품)이라고 하는 품이 있는데, 그 품에 보면 육조 스님을 친견하고, 깨달음을 얻었든지 아니면 당신의 깨달음을 인가를 받든지 하는, 그런 내력들을 쭉 소개를 합니다.
그 가운데 영가 현각 스님께서 한분 계시지요.
거기에 보면 영가스님은, 영가 지방 사람인데 성은 대(戴)씨이고, 어려서 출가를 해가지고 經(경)과 論(논)을 열심히 공부를 했고, 특히 天台止觀法門(천태지관법문)에 대해서 아주 정통을 했다. 그랬습니다.

천태지관이라고 하면 법화경을 근거로 해서, 어떤 하나의 學派(학파)를 구성한 천태학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선종보다는 그런 율이나 교학이 상당히 성행했기 때문에, 대개 율이나 교학을 아주 깊이 공부하게 되는 그런 관례에 따라서, 영가스님도 역시 천태학파에서 천태지관법문을 상당히 깊이 공부해서, 천태종에서 상당히 촉망받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태종을 계승할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알아주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육조스님을 만나서 선종으로 오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비난을 참 많이 받아요.
비난을 많이 받아서 이 증도가 안에서도, 비난을 하면 그 비난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를 해야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또 이 스님께서 평소에 비난을 받게 된 이유 중에 또 하나가, 어머니를 모시고 계셨고 또 누님까지 모시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절에는 살지 못하고, 큰 절에 이웃에 살았던 걸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천태지관법문 공부를 많이 했는데, 유마경을 보다가 [發明心地(발명심지)]라. 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육조스님의 제자 중에 현책스님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데, 그 현책스님하고 우연히 만나서 현책스님과 이야기해보니까, 영가스님의 그 불교에 대한 소견이 상당히 남달라서, 그래서 현책스님이 말합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상당히 깊은 경지에 까지 이르렀는데 법사가 누구냐?” 이렇게 물어요. 그러니까 영가스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방등경 이라든지, 유마경. 천태학 이런 것을 많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공부할 때마다 가르쳐 주신 그들이 다 스승이라서 어느 특정인을 스승이라고 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뒤에 유마경을 보다가 내가, 부처님의 마음의 종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깨달은 바를 증명해주는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육조스님의 제자 현책스님이 있다가, “威音王(위음왕)이전에는 뭐 누가 인가를 안 해줘도 되겠지만, 위음왕 이후에는 인가 해주는 스승이 만약에 없다면, 이것은 千年外道(천년외도)다.” 그랬어요.
위음왕 이라고 하는 威音王佛(위음왕불)은, 부처님 이름인데 최초의 부처님 이라는 그런 의미이고, 그 위음 이라고 하는 말은, 威(위)는 色(색)에 해당되고, 音(음)은 聲(성:소리)에 해당되고 그래서 거기에 상당히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최초 부처님을 威音王佛(위음왕불)! 이렇게 말해요.

그래 현책스님의 말씀 속에, 이전에는 인가를 안 받아도 되지만, 위음왕 이후에는 인가를 안 받으면, 千年外道(천년외도)다.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영가스님이 있다가 “원컨대 그러면 스님께서 나를 위해서 증거를 해 주십시오.”
증명을 서 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소견에 대해서, 불법의 그 깨달음에 대해서 들어보고 옳거든 인가를 좀 해 달라. 그래요. 그러니까 현책스님이 있다가, “내 말은 가볍고 조계산에 육조대사가 있으니까 그 육조대사는 워낙 덕화가 뛰어 나셔서, 사방에서 모두 사람들이 운집한다. 그리고 법을 얻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그래요.
“만약에 갈 생각이 있다면 내가 함께 동행 할 수 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현각스님이 있다가, “좋다. 그러면 같이 갑시다.” 이렇게 해서 현책스님하고 육조스님 앞에 가서 참배를 하게 됩니다.
그 영가스님과 육조스님의 처음 만남이, 또 우리 선종사 에는 굉장히 이야기 꺼리가 되고 있어요.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떡 처음 만나서, 보자마자 육조스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육조스님을 빙빙 세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주장자를 쾅 이렇게 땅에다 내려찍으면서 떡 섰어요. 그것이 자기의 그 어떤 견해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육조스님은 거기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하는가?
그것이 일종의 法擧量(법거량) 이고, 자기의 법을 상대에게 피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니 육조스님이 그냥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육조스님 하시는 말씀이 “대저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야 되는데, 스님은 도대체 어디서 왔기에 그렇게 크게 자존심 높고, 아만이 그렇게 높으냐?”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현각 스님이 있다가, “아이, 생사의 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한데 무슨 뭐 삼천위의 팔만세행 그거 갖출 겨를이 어디 있으며, 또 아만 말씀을 하셨는데 아만이고 뭐 그런 것이 여기에 끼어들 겨를이 어디 있느냐?” 이거지요. 생사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한데 그런 게 무슨 될 법이나 한 소리라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느냐? 현각 스님이, 젊은 스님이 육조스님에게 그렇게 사정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자신의 불법에 대한 견해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있다가, “그 뭐 생사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대는 생멸이 없는 무생의 도리를 체달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무상이 신속하다고 그랬는데, 또 그 신속한 가운데서도 본래 신속함이 없는 도리는 또 왜 깨닫지 못하는가? 그래서 뭐 생사일이 크느니 무상이 신속하다느니 어찌 그 따위 소리나 하고 있느냐?” 그렇게 육조스님이 받았어요.

받으니까 영가스님이 있다가, “체즉무생이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깨달으면 곧 생사가 없는 것이고, 요달 했다고 하는 것은 곧 신속함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리적으로 대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있다가, “그렇지 그렇지.” 맞는 말이라고, 맞는 말이라고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것이 일차 인가 라고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이런 대화들을 뒷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하기를, 육조스님보다 영가스님이 더 그 견해가 날카롭고 뛰어나다. 이런 말들도 해요. 얼핏 보면 그런 분위기도 사실은 보입니다.
육조스님은 금강경에서 해석을 달았는데, 다른 금강경오가해를 우리가 이렇게 보면서, 스님들의 그 주해보다는 상당히 젊 잖지요.
저는 그 비교해서 오가해를 볼 때, 정말 육조스님 답구나! 참으로 젊잖게 해석을 하셨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늘 하게 됐습니다.

그와 같이 法擧量(법거량)을 하고 법담을 나눌때도 그 사람의 어떤 가풍과 타고난 성격과 이런 것들이 사실 상당히 표현이 되지요.
그래서 이런 데서도 보면, 영가스님은 상당히 날카롭고 육조스님은 아주 무르익은 그런 젊 잖은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육조스님으로부터, “이와 같고 이와 같다. 그렇다 그렇다.”하는 인가를 받고, 그 현각 스님은 그만 위의를 갖춰서 비로소 예배를 드리게 되지요. 그리고는 그냥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육조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니까, 이제 인사하고 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있다가, 세상에 이렇게 급한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너무 급하지 않는가?”이렇게 하니까, 그것도 일종의 자기의 어떤 견해를 한 번 더 재점검하기 위한 그런 동작으로 볼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현각 스님이 있다가, “본자비동 기속야. 본래 동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령입니다. 그런데 어찌 빠르고 더딤이 있겠습니까?” 그랬어요.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있다가, “누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누가 본래 우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러니까 영가스님이, “인자자생 분별입니다. 아,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하는 것 아닙니까? 움직이던지 움직이지 않던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스님이 스스로 분별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 했어요.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있다가 “汝深得無生志(여심득무생지)니라. 그대는 아주 깊이 생사가 없는 도리! 생멸이 없는 그런 뜻을 참 제대로 알고 있다.” 이렇게 또 인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현각 스님이 있다가, 거기서 또 한번 또 반항조의 말씀을 합니다. “無生非有意(무생비유의)야. 생멸이 없고, 생사가 없다면 거기에 무슨 뜻이 있겠느냐?” 아, 생사가 없고 생멸이 없는데, 거기에 무슨 무생의 뜻을 깊이 얻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뜻을 얻었다 하니까 그 말을 물고 늘어진 것이지요. 그 무생에 생멸이 없는데 어찌 뜻이 있겠는가? 이렇게 또 말합니다.

세 번째 도전이 되는 것이지요. “무의수당분별과” 육조 스님이 있다가, 뜻이 없다면 그러면 누가 마땅히 그러한 사실을 분별하느냐 그러니까 “分別力非(분별력비)니다.” 분별을 해도 그것이 뜻이 아니다. 물론 분별하면 뜻이지요. 그러나 뜻인 사람이 있고,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전혀 뜻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육조 스님이 “善哉(선재)라 善哉(선재)라.” 아주 훌륭하고 훌륭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무려 세 번을 인가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체달한즉무생이고, 요달한즉 본래 빠름이 없다.”라고 하니까, “如是如是(여시여시).” 그렇다 그렇다. 하는 데서 인가를 받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곧 바로 인사하고 돌아가려고 하니까, 또 대화가 이어 지는데, 거기에 여심득무생지니라 그대는 무생의 뜻을 아주 깊이 얻었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인가가 있었지요?

그 다음에 끝에 와서 “善哉(선재)라.” 이것은 경전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善哉 善哉(선재선재)라.”하는 그런 표현을 써서 육조 스님이 또 한번 이렇게 확실하게 인가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리 일숙 하라.” 하룻밤만자고 가는 것이 어떤가?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현각 스님께서 하룻밤 자고 왔다. 그래서 一宿覺(일숙각)! 별명이 일숙각 이지요. 한 一(일)자. 잠잘 宿(숙자). 깨달을 覺(각)자.

그 하룻밤 자고 깨달음을 인가 받은 그런 특별한 사례가 됐다라고 해서, 그래서 일숙각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고, 그 후에 영가스님은 당신의 깨달음을 정리하는 영가집이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고, 그것은 세상에 좀 알려져 있지요.
특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영가 증도가를 썼는데, 이 증도가는 뭐 세상에 정말 이렇게 많이 읽히고, 정말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그 추앙을 받는 그런 증도가! 깨달음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대승결의경이라 하는, 경 이름을 붙여서 출판한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대승결의경이라. 아주 대승의 가르침이 그대로 여기에 다 무르녹아 있는 그런 경전이다. 경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 뭐 이런 뜻이지요.
육조스님 가르침을 우리가 [육조단경] 그러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경자를 붙이는데, 조사스님 말씀에 경자를 붙인 경우는 [육조단경]하고, 이 영가 증도가 [대승결의경]이라고 이렇게 붙인 이런 예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육조스님과 영가스님의 그 대화이고, 이 대화는 상당히 많이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되고, 참 아주 그 뭐라고 할까? 날카로우면서 지혜의 칼날이 번뜩이는 그런 영가스님의 지견을 볼 수가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뭐 영가스님에게는 또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또 다른 것들은 그때그때 봐서 설명을 드리기로 하고, 육조스님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당신의 깨달음이, 육조스님에게 인정을 받게 된 그런 내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고 육조단경에도 있듯이, 영가스님은 분명히 유마경을 보다가 깨달았습니다.
유마경을 보다가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육조스님에게 가서 그저 인정만 받았다는 사실이지요.
육조스님에게 가서 뭐 참선도 한 시간 한 적도 없고, 무슨 법문을 들은 적도 없고 그렇습니다.
그저 당신이 깨달은 이치를 만나자마자 앉지도 않고, 선 자리에서 그저 몇 마디 주고받은 대화에서 인가를 받게 된 그런 아주 특별한 사례지요.

그래서 더욱 증도가가 돋보이고, 저는 이 증도가를 어떻게 썼는지는 그 자세한 내력은 모르겠으나, 그 조계산. 육조스님이 계시는 조계산에서 그 인가를 받고, 정말 대장부로서 할 일을 다 마치고, 그야말로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그런 증명을 받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조계산을 정말 그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오시면서, 고향으로 향해서 가는 길에 저절로 흥얼거리면서, 읊다 보니까 이 증도가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저는 표현하고 있어요.

뭐 굳이 앉아 가지고 머리를 싸매고, 무슨 글자 맞추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습니다.
깨달음의 그런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아니 하고는 못 배겨서 나온 것이 이 悟道頌(오도송)이고 證道歌(증도가)지요. 옛날 깨달은 분들은 그렇습니다.
뭐 말을 하려고 우리처럼 이렇게 글을 꾸미고, 말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그래봐야 그 무슨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겠습니까?

이 깨달은 분들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정말 아주 큰 재산이 있기 때문에, 말을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것이지요.
저절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은 이쯤 되어야 최소한도 진리의 말씀은, 이쯤 되어야 그게 읽을 만하고 들을 만하지요!
그래서 이 깨달음의 노래 증도가는 아주 禪時(선시)에서, 또는 禪學(선학)에서 아주 높이 평가받는 그런 내용입니다.
가능하면 우리가 불교공부를 평생 한다면 신심명도 외우시고, 또 이 증도가도 외우시고 하면 좋지요!
저는 이거 어릴 때 외워 가지고, 선방에서 도량석을 할 때 천수경을 안 외우고 이 증도가를 가지고 도량석을 하기도 한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도량석을 해도 아주 좋은 그런 증도가지요.

그러면 증도가 본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證道歌(증도가)! 도를 증득한 노래다! 노래를 배우게 됩니다.
君不見(군불견)가? 첫마디가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글자대로 새기면 그렇습니다.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이것은 “여러분 들어 보세요.” 이런 뜻이지요. 여러분 들어 보세요.

또 이제 법문할 때, 그 법문의 표현을 示衆(시중)이라. 그런 표현을 임제록에서 많이 하는데, ‘대중에게 보이다.’ 그런 뜻이지요. ‘대중에게 보이다.’ 라고 하는 것은, 또 ‘들어 보세요.’하는 그런 것의 順(순)으로 표현을 했다면, 君不見(군불견) ‘보십시오.’ 이런 뜻으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絶學無爲閑道人(절학무위한도인)은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絶學無爲閑道人. 그랬어요. 처음부터 도인 이름이 나옵니다.
신심명에서는 至道(지도). 大道(대도). 中道(중도). 이런 말을 많이 썼습니다마는, 여기서는 道人(도인)! 바로 인격화 된것! 道(도)가 사람(人)의 것이 되어버린 것! 그것이 도인 이지요. 그 도인은 絶學(절학)이라고 첫째 표현을 했습니다.
뭐 이 절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공부를 다 해서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는 경지가 절학이지요. 그 배우는 것을 끊었다. 끊어졌다. 이 말입니다. 배우는 것이 끊어졌다.

아무리 공부해도 공부한 그런 흔적이 없고 공부한 상이 없는 상태를 絶學(절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뭐 글자 하나 배우고, 또 한 구절 이렇게 공부하면, 아주 기분이 좋고 또 그것이 마음의 양식이 된다고 상당히 그 뭐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이쯤! 도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한 흔적이 없고, 한 상이 없습니다. 그것이 절학이지요.
도인 일수록 사실은 경은 더 많이 보고, 어록도 더 많이 보고, 참선도 더 많이 하고, 사유도 더 깊이 많이 합니다.

하되 하는 것이 없는 것이 없는 것. 공부에도 그렇고 또 일상생활에도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에 그런 것을 無爲(무위)라 그랬지요. 造作(조작)이 없다. 할 일이 없다. 두 손 묶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루 종일 열심히 뭔가를 하되, 하는 것이 없는 것. 조작이 없고 한 흔적이 없고, 한 상이 없는 것. 이것을 무위라고 그럽니다.
불교에 아주 아름다운 말이 많은데, 그 중의 무위도 그 하나에 들어가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閑道人(한도인)이라 그랬어요. 한가한 도인. 도인은 도인인데 한가한 도인이다.
그러니까 딴 사람보다 공부를 열심히 더 몇 배를 더해도 한 것이 없고, 또 일상생활도 무슨 부처님께 예배를 드린다던지, 무슨 사경을 한다던지, 온갖 자기 신행을 행위를 하되, 조작이 없고 흔적이 없고 상이 없는 것. 그것이 무위지요. 그러니까 閑道人(한도인)이지요.

해도 함이 없이 하는 그것이 한도인 이지, 무슨 불상이나 나무나 돌로 깎아 놓은 어떤 그 물체처럼, 한 곳에 앉아서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한가함이 아니지요. 그러면 죽은 종교지요. 죽은 가르침이고...
불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진리를 알고, 지혜롭게 사는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더 활기차게 그렇게 살되, 그것이 마음에 어떤 흔적으로 상으로 또는 찌꺼기로 이렇게 남아 있지 않는 것. 그래서 한도인이라...

그래서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도가 체현된 사람. 도가 인격화 된 사람. 그래서 이제 絶學無爲閑道人(절학무위한도인). 뭐 그 한 구절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그런 내용입니다. 絶學無爲閑道人(절학무위한도인).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그랬어요.
이런 도인은 망상을 제하지도 않고 진실을 구하지도 않는다.
眞자는 眞理(진리). 또는 眞實(진실). 妄想(망상)의 반대말이지요. 뭐 眞心(진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眞想(진상)이라 해도 좋고요. 망상과 진상. 망령된 생각을 제하지도 않고, 참다운 생각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眞을 진상이라. 이렇게 想(상)자를 붙여서 보면 그 짝 앞엣것 하고, 망상과 對(대)가 되지요.

도인에게는 망상이 따로 있거나, 진상이 따로 있거나 진실이 따로 있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망상이라고 하는 것도, 도인에게는 망상이 이미 아니지요.
마치 어두운 방에 그 어두움이 우리는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한 생각 달라진 사람에게는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보지 않고, 방으로 보는 거예요. 방으로...
방은 어두울 때도 있고, 밝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주무시고요. 도인도 주무시고... 일상생활이 똑 같습니다. 같은데, 도인은 아무리 자도 도인의 잠이고, 부처님은 아무리 자도 부처님의 잠이거든요.
우리가 잠자는 것 하고 다른 점은,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방이 어둡다고 어두운 것만 보지, 방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차이예요. 어두움이 있고 밝음이 있고, 다 똑 같이 있습니다.

道人(도인)도 惺惺(성성)하게 깨어 있을 때도 있고, 또 아주 잠에 떨어져 있을 때도 있고 그래요. 그래야지요.
그렇지 아니하면 그 뭐 사람이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도인 이라고 할 것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망상을 따로 보거나 진리를 따로 보거나 진상을 따로 보거나 그렇게 나누어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자나 깨나 그것을 나누어 놓고 보고, 그 어떤 차별적인 것으로 그렇게 보고, 거기서 선악을 구분하고, 이게 선이다. 이게 악이다. 전부 그 알량한 자기 잣대고 자기의 틀이지요.

뭐 그것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선이고, 절대적으로 악이고 그런 것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도인의 경지는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그랬습니다.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망상이 아니니까요. 또 진상을 구하지도 않는다.
진상이라고 해봐야 말에 불과한 것이지, 무슨 또 진상이 어디 있습니까? 망상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뭐 이런 경지를, 이런 가르침을 본다고 해서 당장에 우리의 살림살이가 되거나 내 공부는 아니지만, 그렇지만 이런 도인의 그런 내면의 세계를 우리가 이렇게 읊조려 보고, 또 살펴보고 또 그것을 우리가 사유하고, 그러면 상당히 닮아져 가는 것은 사실이지요. 또 우리의 양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이, 無明實性(무명실성)이 卽佛性(즉불성)이요. 幻化空身(환화공신)이 卽法身(즉법신)이다. 그랬습니다.
앞에 구절하고 내용은 일맥상통 하는데요. 무명이라고 하는 것. 뭐 실상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쓸 것이 없고, 무명의 성품! 우리가 번뇌무명 해서 얼마나 중생들은 제거해야 할 문제이고, 또 그것을 떨어뜨려야 하고 어떻게든지 무명이나 번뇌를, 없애야 하는 그런 존재로 생각을 했는데, 또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찾으면 見性(견성)! 그 불성을 보면 견성! 성품을 보았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지요. 그대로 無明性品(무명성품)이 佛性(불성)이고 불성이 무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 하고, 전혀 다른 세계지요! 이게 참! 우리가 다시 생각 해 봐야 돼요.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 것. 무명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몹쓸 것인가? 그렇게 제거해야 할 것인가?

그 제거 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합니까? 그것이 많이
일어나면 답답해서 그냥 몸부림을 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불성이라고 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그 불성이 바로 우리의 번뇌! 무명! 이것이 바로 불성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幻化空身(환화공신)이 卽法身(즉법신)이다. 아주 허망하고 환영과 같고, 정말 헛된 몸. 우리 육신. 조금 뭐 가시에 찔려도 피가 나고 아프고 그렇지요?

정말 이 육신은 헛된 몸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법신은 영원불멸의 진리 진리의 몸이다. 이렇게 보지요.
그런데 이 영가스님의 말씀이 어떻습니까? ‘환화공신이 그대로 곧 법신이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 법신이 우리 육신 그대로다. 이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안목으로 육신을 보니까, 육신은 아주 쓸모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이고 정말 이놈 육신 때문에, 온갖 번뇌가 들끓는다고 그렇게 보지요.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게 법신이다 이겁니다.
이 육신 외에 달리 법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숙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허고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어떤 과제로 늘 외워서라도, 우리 마음에 이렇게 새겨두고, 언젠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내야 됩니다.

망상이 그대로 진상이고, 무명이 그대로 불성이고, 우리 이 허망한 육신. 허망한 몸뚱이가 그대로 법신이다. 법신과 육신이 둘이 아니다. 법성과 무명이 결코 둘이 아니다. 진실과 거짓이 결코 둘이 아니다. 하나라고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언젠가 증명해 내지 않고는, 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지요.
뭐 육신을 배제하고 법신을 찾는다. 무명을 배제하고 불성을 본다. 이렇게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도 사량 분별로라도, 이론적으로라도 정확하게 우리가 알고, 공부해야 된다는 거지요.

오늘 증도가! 육조스님과 영가스님이 만나서 주고받은 대화와 또 絶學無爲閑道人(절학무위한도인)은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無明實性(무명실성)이 卽佛性(즉불성)이요. 幻化空身(환화공신)이 卽法身(즉법신)이다.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證道歌 제2강

證道歌 永嘉 玄覺 大師
[如天 無比 큰스님 입력]
君不見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證實相 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증도가證道歌 제 2강.2006년 2월 23일

반갑습니다.

오늘 2월 23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어제에 이어서 증도가
법신각료法身覺了무일물無一物
본원자성천진불 本源自性天眞佛
거기서 부터 할 차례입니다.

이제 시작한 지 얼마 안됐으니까요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살펴보면은

군불견君不見가
그대는 보지못하는가,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잘 보세요
이런 뜻이죠.

절학무위絶學無爲한도인閑道人은
배움이 끊어지고 할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제하지도 아니하고 진실을 구하지도 않음이라

그건 이제 한도인閑道人의 하는 일이고
진眞과 망妄에 대해서 차별差別이 없는 거죠.
망상 妄想이나 진상眞想이나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것이기에
따로 구求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제거除去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증도가證道哥에서 서두에 나오지만 전편全篇의 정신으로 통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卽 불성卽佛性이요
환화공신 幻化空身이 즉卽 법신法身이다

사실 이 내용만 우리가 좀 납득이 되면은
증도가 전편에 대해서도 다 꿰뚫어 아실 수가 있고,
그다음 뭐 불교의 어떤 그 많은 가르침 중에서 그중에서도 아주 궁극窮極의 가르침을 다 통달通達을 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알기로는 어제도 얼핏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번뇌煩惱 무명無明과
우리들 진심眞心 또는 진여眞如 불성佛性 자성自性
이것하고는 별개의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상식적인 불교고 보통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건 이제 불교에는 여러가지 방편설方便說이 워낙 많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누구에게 또 어떤 수준에게 해당하는 가르침인지
우리가 참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증도가證道歌는
그야말로 영가永嘉스님께서 깨달으신 그 깨달음의 내용을
어떤 듣는 사람을 감안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그 어떤 그 터져 나오는 그런 그 깨달음의 감흥을
또 그 경지를 마음껏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누구 가르치려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그저 자기 자신의 어떤 깨달음의 경지를 다시 점검하고
또 자기 자신에게 확신시켜 주는 그런 입장에서 말씀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번뇌煩惱 무명無明이 그대로 불성佛性이다
참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이 아무데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죠.
그리고 더한것은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卽 법신法身이다 그랬습니다.
공신空身이라는 게 뭡니까 우리 육신肉身이예요.
허망한 몸, 환영幻影과 같은 몸, 또
그야말로 아침이슬과 같고 저녁 연기와 같은
이 허망虛妄한 몸뚱이입니다.

또 이 허망한 헛된 몸은 지금 우리가 병을 앓고 있으면
병들어 있는 이 몸이예요.
늙으신 분들은 늙은 모습 그대로의 이 몸입니다.
또 이런 저런 장애가 있는 분들은 장애 있는 그대로의 몸이예요.

사실 소중하죠.
소중한 입장에서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은
이걸 뭐 최고의 진리眞理의 몸, 법신法身의 몸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몸.
아무리 늙었든 때가 묻었든 뭐 병을 앓고 있든 장애를 가지고 있든
그 어떤 상황이든간에
우리가 이 몸 가지고 모든 것을 합니다.
그런 가치로 볼 때도 이건 뭐 더이상 참 소중할 수가 없구요.
여기의 가르침은 이제 그런 어떤 가치 입장에서라기 보다는
꿰뚫어본 모든 존재存在의 실상實相을 꿰뚫어 본
그런 안목眼目에서 보더라도
이대로가 법신法身이라는 것입니다.
병든 몸, 늙은 몸, 뭐 장애 몸, 때묻은 몸, 온갖 우리 몸뚱이
뭐 참 그 모순과 온갖 허물투성이가 우리 몸 아닙니까.
그런 것이 그대로
법신法身,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의 몸이다 그거예요.
또 우리 육신肉身 이대로 만약에 법신法身이 아니라면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법신이라야 돼요. 사실은.
이게 그대로 진리의 몸이라야 됩니다.
어디 갈 데 없어요 막다른 골목입니다.

이 몸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면요, 이 육신말고, 그 육신이 어떻든 간에 이 육신말고 달리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막다른 골목이예요

이건 뭐 깨달아서 하신 말씀이니까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좀 이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가지고 이건 이제, 불교를 사실 사변으로 이렇게 헤아려서 이해하는 것은 아니죠. 직관으로 아는 것인데,
설사 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 헤아려서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 지금 이렇게
말하고 보고 듣고 숨쉬고 아프면 아픈 줄 알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이육신肉身 이대로 그대로가 법신法身이예요.
이것 빼놓고 달리 법신法身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와 닿느냐 하는 것,
이게 이제 우리들의 숙제고 과제입니다.

그러나 이건 이제 선지식의 꿰뚫어보신 안목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이대로를 우리가 깨달아야 되고
이해해야 되고 또 느껴야 되는 거죠.
그게 우리의 할 일입니다.

무명실성無明實性이 곧 그대로 불성佛性이다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그대로 법신法身이다
라고 하는 것

이건 참 불교 전체를 아주 그 차원 높은 입장에서 말하고 있고 또 영가 증도가를 이렇게 서두에서 한마디로 요약을 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뭐 어떤 문제든지 문제해결의 어떤 그 방향을 찾는다면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될 것 같아요.

무명실성無明實性이 곧 불성佛性이고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이다

그래서 이 육신이 허망한
이 몸뚱이가 법신法身인 줄을 각요覺了하면
법신각요法身覺了 무일물無一物이다
그런 그 법신法身을 우리가 이해하면 깨달으면은 각요覺了하면 깨달으면 이 말이죠
육신이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무일물無一物이다.
한물건도 없다라는 말, 법신아닌 것은 한물건도 없다 이말입니다. 전부가 법신이다 이 뜻이죠.
텅비어서 공하다는 뜻이 아니고 여기서 무일물이라는 말은
보통우리가 무일물無一物이라는 의미와 여기서는 조금 달라요.그래서

육신이 법신法身인 줄 알면 법신각요法身覺了하면은
무일물無一物이다 법신法身아닌 것은 한물건도 없다,
전부가 법신法身이다.

여기서 또 이제 소동파의 무정설법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소동파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아주 오랜 세월동안 여덟 사람의 문장文章을 꼽으라면은
팔대가八大家를 꼽는데
그중에 소동파는 팔대가 중에 아버지 또 동생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이 다 팔대가에 들어가지요.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은 그, 저희들 뭐 염화실의 주제가主題歌라고 할 수 있는 관음예문 있잖습니까
기도祈禱의 주제가主題歌, 염화실의 주제가主題歌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 관음예문을
소동파의 여동생이 지었다고 그렇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제 참 그 분위기에 맞게 어떤 분이 참 잘 번역을
해서 우리가 지금도 그 관음예문觀音禮文 기도 祈禱를
끊임없이 하고 계신 분 계시고
또 한 때 제가 병원에 있을 때
그 많은 우리 염화실 법우法友들이
열심히 관음예문을 가지고
기도祈禱해 주셨습니다.

그런 그 집안의 소동파.
이분이 상총스님을 만나서 무정설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무정설법이란 말이 뭔 말인가
대개 이제 설법한다면 사람이 설법하고 사람은 감정이 있는 동물이고 감정있는 동물이 설법하는 것은 당연한데
무정설법無情說法, 뭐 산화석벽山花石壁 저 나무나 돌이나 이런 것들이 설법한다라고 하는 그런 그 상총스님의 높은 말씀을 듣고는
정말 그 생각에 일념이 돼서 천지를 분간 못하고 걷다가
큰 아주 개울에 물이 아주 지축을 뒤흔드는 그런 그
폭포수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는
비로소 이제 무정설법의 도리를 깨달아서 소위 지은
소동파의 오도송이라고 할 수 있는 시죠.
소동파 [蘇東坡, 1036.12.19~1101.7.28] 의게송偈頌
계성변시광장설 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 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 他日如何擧似人가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광장설법이다. 깨달은 사람의 광장설법이다.
진실한 설법이다.
그 광장설廣長舌 할때는 혀 설舌자를 써요.
설할 설說자를 쓰는 게 아니고
넓고 긴 혀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인도에서는 옛부터 풍습이
말을 할 때 혀를 이렇게 내미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면은 진실만을 말한다 이 뜻이예요.
그래서 경전에서는 이 혀 설舌자를 잘 씁니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혀는 곧 진실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이제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이라고
그렇게 이제 합니다.
이걸 뭐 그대로 부처님의 아주 깊고 넓고 오랜 설법이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아요.

그러면은 그 소리가 나는 시냇물 나는 곳이 어디겠어요.
산색山色이죠. 산山이죠 산천초목山川草木입니다.
그러면은 산천초목이 어찌 천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이 아닌가.
그러면
환화공신 幻化空身이 즉卽 법신法身
이란 그 이치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거죠.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법신卽法身이고 법신法身을 각요覺了하니까 무일물無一物이다
여기서 무일물이라는 것은 이 세상 그 무엇도 법신 아닌 것이 없다. 한물건도 법신 아닌 것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산색山色이 그대로 청정법신淸淨身 비로자나불이다
산천초목 할 것 없이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
이런 것이 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사람만 그렇다는 게 아니죠.
차원이 이제 그렇습니다.

그걸 이제 하루종일 물소리가 났으니까
밤이 돼서 그 물소리를 전부 계산해 보면 팔만 사천 법문이다
이제 부처님 설법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文이라고 하니까요, 거기에 맞춰서 팔만사천 법문이 되는데 이 도리를
저 물흐르는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천초목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이 이치를 누구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타일여하거사인 他日如何擧似人가

아주 참 기가 막힌 이야기죠. 그런데
누가 쉽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증도가의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 卽佛性이고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법신卽法身이라
고 하는 이 것도요 불교에서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최고의 차원입니다.
더이상은 뭐 없습니다.
그런 이치를 어떻게 사실 쉽게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제
이야기인데

불교에는 뭐 소승교小乘敎, 대승실교大乘實敎 대승돈교頓敎 대승종교大乘終敎 뭐 일승원교一乘圓敎 이런 식으로
교리 차원도 아주 많고요.
근기 따라서 수 많은 그런 그 가르침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고
환화공신 幻化空身이 즉법신卽法身인
이런 내용은
뭐 이제 최첨단의 그런 경지다, 이렇게 이제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되면은 무일물無一物이다. 한 물건도 없다.
모두가 법신의 세계다. 그런 법신의 세계고
그대로 화장장엄의 세계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원자성本源自性이 천진불天眞佛이다
우리들의 본원자성, 근본되는 자성자리, 자성 그것이 그대로 천진불이다.

이건 뭐 보통 이제 자성自性이라고 하면은 개개인,
또 개개사물의 독립된 그런 그 본체, 독립된 성품을 자성自性,
이렇게 말하고
법성法性하면은 이제 전체를 뭉뚱그려서 한꺼번에 다 말하지요.
개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에 있는 모든 존재 전체의 성품,
이런 뜻에서 이제 법성 이렇게 이제 말합니다.
그래 자성自性이나 법성法性이나 진여眞如나 결국 같은 뜻인데
말을 할 때 표현상의 어떤 그 범위가 조금 다르지요.
그래서 이제

본원자성本源自性이 천진불天眞佛이다.
이 자성은 사람의 자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자성입니다.
모든 존재의 자성自性이 그대로 천진불天眞佛이다.

천진불은 뭡니까.
조작이 없는 꾸밈이 없는 본래의 부처 닦음이 없는
뭐 이렇게 수행하고 닦아서 되는 부처는 그럼 수행안하면
또 부처가 안 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천진불天眞佛 , 본래불本來佛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는 거죠.

그것은 닦고 자시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인 줄 알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것이 진짜 부처예요.
그 외에 뭐 조각하듯이 이렇게 수행을 쌓고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세월이라든지 그런 학설도 많이 있어요.
별별 근기가 많이 있으니까 근기에 맞춰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서로 상반된 그런 교리가 많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사실은 우리 본성本性 그대로 우리들 자신自身 그대로가
천진불天眞佛이다.

아주 천진이라고 하는 것은 꾸밈이 없는 조작이 없는
수행이 필요치 않는 점차가 필요치 않는
본래모습 그대로 그 모습이 어떻든 본래모습 그대로가
부처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무명無明 그대로 불성佛性이고
이 육신肉身이 그대로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말 하고
아주 잘 맞아떨어지지요.
참 이런 이치는 아주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자고로 육조스님 제자인 영가스님의 이 증도가,
참 영가스님이 증도가 한 편 가지고
정말 오랜 세월동안 영가스님이라고 하는 이름이 빛나고
또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고 깨닫게 해주는 그런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아직까지
설사 본원자성이 천진불이고 모두가 법신이고 그런데,

개개인으로 볼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또는 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뭐
이런 등등 그러니까
오음부운공거래五陰浮雲空去來요이렇게 했죠.

오음이라고 하는 것은 삼과법문三科法門에 있어서
오온五蘊 육입六入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이걸 이제 일일이 우리가 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오음을 대표로 들었습니다.
우리 육신과 또, 육신과 관계되는 온갖 그 감정 이런 것들이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색色은 육신을 말하는 것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이제 우리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모든 것들 그리고 뭐
안의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좋구요. 색色을 나누면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되지요.
의義를 좀더 부연하면은 6식六識이 되고
또 이제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것이 우리 삶의 범주가 되겠는데 그런 것은
또 여전하잖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현재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아주 우리에겐 아직도 여전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절학무위絶學無爲 한도인閑道人이라고나 할까요
또 무명無明이 불성佛性이고 공신空身이 육신이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이 차원에서 보면은 그 오음五陰이니 삼독三毒이니 하는 것이 이미
그것은 오음이 오음이 아니고 삼독이 삼독이 아니다.
그래
오음五陰이라고 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공연히 오고간다
이거죠. 그러니까 우리 육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차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육신이 법신으로 봤을 때는 그건 뭐
그 육신은 이미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러니까 그것이 이제 법신으로 보느냐
우리에게 아주 그 우리 차원의 어떤 그
육신으로 보느냐 요는 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육신을 그대로 법신法身으로 보았을 때
이 육신을 형성하고 있는
오음五陰은 뜬구름이라 그야말로 헛되이 왔다 하는 것이고 부질없이 가고 오고 하는 것이고
또 오음을 근거로 해서 태어나는
탐진치貪瞋痴 이것이 근본 세가지 가장 뿌리 깊은 번뇌지요.
거기서 만의慢疑 다섯가지 번뇌煩惱를 치자면 이제
없신여기는 것 의심하는 것. 이렇게 해서 뭐 많은 번뇌煩惱가 있죠.

10사十邪 뭐 오리사五利使 오둔사五鈍使 뭐 여러가지
유식唯識에는 보면은 번뇌에 대한 그런 그 자세한 분류가 많습니다.
나아가서 이제 팔만사천 번뇌 이렇게 까지 이야기가 되는데
그런 그 많은 번뇌들, 또 그 많은 번뇌들의 근본이 되는
삼독三毒, 탐진치貪瞋痴
이것도 다 물에 뜬 거품이다 이거예요.
헛것이라는 거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허출몰虛出沒이라
헛되이 출몰出沒한다.
그래 이제 삼독이 삼독이 아닌거예요.
말하자면은 육신肉身이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이 차원에서는
삼독이 삼독이 아니고 오음이 오음이 아니죠. 그래서 그것은
우리는 그런 차원이 안됐을 때 그게 이제
삼독三毒이 되고 오음五陰이 되고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가 되지만은 이 차원에서는 삼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음부운五陰浮雲이 오음의 뜬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고 삼독三毒의 물거품이 헛되게 출몰出沒한다
이렇게 말 하는 거죠.

법신이 된 입장이고 삼독은 뭐 번뇌 무명 아니겠습니까.
그 뭐라고 했죠, 번뇌무명은,
불성이다 그랬습니다.

법신이 된 입장, 육신肉身이 법신法身이 된 입장
번뇌煩惱무명無明이 불성佛性이 된 입장
거기서 우리가 놓고 본다면은 그야말로
오음부운五陰浮雲 공거래空去來고
삼독수포三毒水泡허출몰虛出沒이라는 말이 납득이 가지요.

늘 외우는 우리 반야심경만 하더라도 어떻습니까
무안이비설신의 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 이런 말을 하죠.
그래서 한마디로 이제 저는 반야심경을 요약해서 번역을 하면
260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네글자로
우리말이 더 아주 함축성이 있어요.
나는없다 나는없다
우리말 네 글자면 반야심경 260자를 다 번역이 가능하다 하는거죠.

나는 이제 가끔 그런 기도를 하는데 반야심경 자꾸 외워보니까
글자가 많아서 뭐 관세음보살처럼
간단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번역해 낸 것이 나는없다입니다.
나는없다 나는없다

반야 심경 어느 구석을 읽어봐봐요. 결국은 나는 없다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이제 궁극적으로 나는 없다는 것인데
없는 것이 그렇다고 뭐 산화돼서 어디 공중으로 날아갔다 뜻이 아니고
그대로 있으면서 없는 경지를 누리니까 그게 뭡니까
오음부운五陰浮雲 공거래空去來고 삼독수포三毒水泡
허출몰虛出沒이죠. 또 그것은 그대로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卽 불성卽佛性이고
환화공신 幻化空身이 즉卽 법신法身인
그런 경지입니다.

없는데서 그야말로 활발발한
우리의 참사람이 거기서 이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죠

증실상證實相 무인법無人法
찰나멸겁刹那滅却아비업阿鼻業이라
그랬죠. 여기보십시오 이제
증실상證實相 무인법無人法
실상實相을 증득證得하고 나면은 인법人法이 없다.
인人은 여기서 이제 주관主觀이고 법法은 객관客觀이 되고
그렇습니다. 뭐 사람과 법이 아니라.
인은 이럴 때 이제, 아인我人하면 그땐 아我가 주관이 되고 인人이 이제 객관이 되고, 인법人法하면 그때는 사람이 주관이 되고.
조금 일관성이 있죠 인人하면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고 그외 것은 전부
법이다, 객관이다.

그러면 실상이 뭔지를 우리가 깨닫고 나면 실상이 여러분 뭐겠습니까
그대로 무명無明이 그대로 불성佛性이고
공신空身이 법신法身인것 그렇게 아는 것이 실상을 증득하는 거지 증실상이죠.
실상實相을 증득證得하니 너니 나니 그렇게 차별差別하고 분별分別할 것이 없더라
주관이니 객관이니 할 것이 없더라 이 말입니다.
증실상證實相하니 무인법無人法이라
인人과 법法이 없더라

그래서 찰나刹那의 멸각업滅却嶪이라 아비업阿鼻業이라
우리가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질 업嶪 이런뜻이죠 아비업阿鼻嶪이라고 하는 것은.
아비지옥에 떨어질 그런 업인데
예를 들어서 아비지옥에 떨어질 업이 있다고 치면
그 업은 어디서 생겼겠습니까.

나니 너니 하는 주관과 객관 나니 너니 하는 그 차별상差別相에서 부터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온갖 차별 差別이 벌어지고 번뇌망상煩惱妄想이 거기서 이제
무엿무엿 일어나죠.
그래서 뭐 아비지옥 阿鼻地獄도 있고 천당天堂도 있고 별별개 다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증실상證實相 무인법無人法이라
실상을 증득해서 인법人法을 나니 너니 하는 그런 그 차별상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 위에 건립되었던
아비지옥에 갈 업이라고 하는 거,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인人과 법法, 나와 너의 어떤 차별심에서 생긴 것이니까
그 뿌리가 없어져 버리면 어떻습니까
그 위에 건립되어 있는 업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진다는 거죠.
지옥에 갈 업이 아니라 무슨 업도 다 사라져 버립니다.

이 텅빈 공신空身 육신 肉身을 실상實相으로 볼 때 인법 人法이 없다는 거죠.
인법의 차별심이 없을 것 같으면
죄업도 없고 거기는 뭐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도 없습니다.
불업도 보살업도 없어져요.
죄업만 업이 아니라
불업佛業이라는 말도 있고 보살업菩薩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부처의 행동을 하면 그게 불업佛業이고요
보살행동을 하면 보살업菩薩業이죠
따라서 죄업罪業도 이제 가능합니다.

그런데 불업이니 보살업이니
죄업이니 아비업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너니 나니 차별하는 데서 부터 생기는 것이고 그 차별이 사라졌을 때 그런 모든 것은 순식간에 다 사라진다. 찰나에 사라진다.
찰나刹那에 아비업阿鼻業을 멸각滅却한다.
찰나에 아비지옥에 갈 업을 없애버린다.
그랬어요.

우리 천수경에 그런 구절이 있죠. 참회하는 내용중에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그랬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죄무자성罪無自性이다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실재하느냐?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뭐 참 잘 쓰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잘 활용하고 있지마는
잘 들여다 보면 마음은 텅빈거예요.
실체가 없습니다. 공적空寂해요.
이건 우리가 찾을 능력이 없어서 못찾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찾아도 못찾는 자리가 바로 마음입니다.
왜냐 마음은 실체가 원래 공적空寂하기 때문에.

죄罪는 자성自性이 없고
마음으로부터 공적空寂한 마음으로 부터 일어나는데
마음은 실체實體가 없는 것이니까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이라 죄도 없고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이야 죄도 없고 마음도 없고
마음이 없다는 걸 알면은 죄도 저절로 없는 거죠.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이라고 하는 것이
심心 마음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고
마음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면 그대로 거기에 건립되어 있던 죄도 없어진다. 그게 진짜 참회라는 거죠.

이참사참理懺事懺 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렇게 알고, 죄는 자성이 없다 본래 어떤 실체가 없다라고
이렇게 알고,
그야말로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할 필요가 있으면 절을 하고
절을 하면서도 죄란 자성이 없다 이렇게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중도적 관점이죠

그게 중도中道입니다. 영가 증도가도
중도中道의 어떤 그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앞서 배운 신심명에서도 중도中道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그렇게 되어 오고 있는데 죄니 복이니 하는 이런 것도 우리가
중도中道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전에 말씀드렸는가 모르겠는데 사찰을 많이 짓지 않습니까
또 사찰을 지으면 법당도 짓고 불상도 만들고 하는 데
얼마나 많이 동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찰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 그랬어요. 수월水月,
물에 비친 달과 같은 실재하지 않는 그림자의 도량이다.
축원할 때 뭐 거사바세계 남섬부주 동향 대한민국 범어사 수월도량 이렇게 나가지 않습니까

그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는 게 실재하지 않는 도량.
물에 비친 달 그림자 같은
그림자 달과 같은 그런 도량이다.
그렇게 이해해야 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도량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렇게 도량을 이해하고 또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가꾸고 건립하고 짓고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얼핏 생각하면 세속적인 논리로는
아주 이율배반적이고 말장난 같고 당치도 않은 이야기 같지만은
불교의 이치는 세속의 이야기 가지고는 그게 설명이 다 되지가 않죠.

중도 이론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렇게 수월도량水月道場
텅비어 없는 공한 도량으로 알고 열심히 건립하고
열심히 건립하되 그렇게 텅 비어 없는 공空한 도량인 줄 알라
그렇게 되었을 때 건립할 자격이 있는 거죠.
만일 그렇지 못하고 그 이건 뭐 무슨 뭐 확실한 도량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만약에 거기에 변고가 생겼을 때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겠습니까. 본래 그런 줄 알고 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대하는 사람의 차이가 그때 이제 확연히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죄의 문제든지 또 불사를 하는 입장의 문제든지간에
죄를 참회하는 문제, 불사를 해서 복을 짓는 문제,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중도적인 안목으로 우리가 대해야 되고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사佛事를 하는 문제도 중도적 中道的인 안목眼目으로 불사를 하고
참회하는 입장에서도 죄성罪性이 본래 공空한 줄 알고 참회해야 된다.
이게 이제 중도적인 입장으로 참회한다는 말씀이죠.
뭐 또 얼른 생각에 죄성罪性이 본래 공空하면 뭐 참회할 게 있겠나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가 있죠.
그래서 이제 거기에 이제 문제가 생기는 거죠.

죄성罪性이 본래 공空한 줄 없는 줄 알고 참회하는 것, 참회하되 누구보다 열심히 참회하되, 죄성이 본래 없는 줄 알아야 이게 진짜 참회다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아 천수경이 뭡니까 불교의 ABC죠.
아 그 천수경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불자아닌 사람도 천수경은 알고 있습니다.
천수경에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니 뭐 더 말할 나위가 없죠.
복을 짓는 문제 죄를 참회하는 문제 이 모든 것들이 중도의 원리에 입각해서 해야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대하는 문제도 그렇고
무엇이든지 존재의 법칙이 중도거든요 그러니까
중도의 관점에서 알아야 되고 중도의 관점에서 대해야 되고
인생도 중도의 관점에서
영위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나刹那에 멸각滅却 아비업阿鼻業이 가능한 거죠.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3강
증도가 3강

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頓覺了 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無罪福 無損益 寂滅性中莫問覓 比來塵鏡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반갑습니다. 2월 24일 금요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증도가, 깨달음의 노래
영가 스님의 깨달음의 노래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노래라고 말 할 수 있고, 증도가는 영가 스님의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저번에 우리가 공부 한 것은 신심명인데, 그것은 승찬 대사의 깨달음의 노래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았던 다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느낌과 아는 것이 있고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이 확철대오 같은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의 깨달음만이 깨달음은 아니죠.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일상을 사는 데도 하루에도 몇 번의 깨달음이 있을 겁니다. 공부에 대한 깨달음도 과거 조사스님들의 행적을 보면 몇 번씩 깨달았어요. 우리가 잘 아는 선요의 고봉 스님도 몇 번 깨달았고 간화선 제일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서장의 주인공인 대혜 큰 스님도 몇 번 깨달았습니다.
작은 깨달음이 여러 번 반복하다보면 큰 깨달음. 인생에 대한 깨달음, 도에 대한 깨달음, 불법에 대한 깨달음, 마음에 대한 깨달음, 확철 대오가 있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늘은 약장망어광중생하면 자초발설진사겁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이로다. 거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만약 거짓말을 가지고 중생들을 속인다면 발설지옥에 들어가서 모래수와 같이 많은 세월을 보내는 그런 고통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죠.
그동안은 아무나 말 할 수 없었던 폭탄선언 같은 말씀을 증도가에서 했습니다.
무명의 성품이 곧 그대로 불성이고 또 육신이, 허망한 환화공신이 곧 법신이다는 -다른 여러 말씀도 있겠지만은-특히 그 두 마디가 그동안의 불교 이론에서 보면 아주 획기적이고 폭탄선언과 같은 것이고 경천동지할 그런 주장이고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말을 그렇게 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고 깨달음의 안목에서 보신 대로 하신 말씀이거든요.
우리 허망한 육신이 곧 법신이고 이 허망한 육신에서 법신을 봐야 합니다. 이 허망한 육신이 법신인줄 봐야하고, 번뇌망상이 불성인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불성을 봐야하고 그것이 불성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론은 참으로 차원 높으면서 아무나 말 할 수 없었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거짓으로 한다면 정말 내가 지옥 갈 놈이다 그런 뜻이죠. 발설지옥. 거짓말 많이 하면 발설지옥에 간다, 혀를 뽑아서 보습을 간다 하는, 지장경에 보면 지옥 품이 있는데 지옥 이름이 여러 가지가 나와요. 여러 가지 지옥 중에서 발설지옥이 나옵니다.
진사겁, 먼지수와 같고 모래수와 같은 많은 겁을 지내는 고통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내 스스로 들어가서 살 것이다. 이렇게까지
정말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기의 확신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조 스님을 믿고 육조스님에게 까지 내려온 정법의 맥을 믿고 정법의 맥을 이어받은 영가 스님을 믿는다면, 이 말을 얼마만큼 가슴에 와 닿게 공부를 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지 말이 틀렸거나 이론이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슴에 와 닿고 납득이 되고, 하는 이게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실대로 당신이 보신대로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입니다.
돈가교 여래선하니 육도만행체중원이라.
頓覺了 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無罪福 無損益
몰록 가교했다. 깨달았다. 무엇을? 여래선을 깨달았다.
여기서 여래선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선, 조사선, 격외선, 의리선 등 선을 이야기 할 때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또 최상승선, 대승선, 소승선, 의리선, 조사선 그런 이야기를 곧잘 하는데, 여기서 여래선이란 선의 종류에서 열거하는 여래선이 아니고, 여래가 깨달으신 경지, 여래의 중생들을 건지기 위한 방편설이 아니라 부처님 마음 끝간 데의 최고의 경지, 바로 여래라고 할 수 있는 그 경지, 이것이 여래선이죠.
그건 다름 아닌 무명이 곧 불성이고 환화공신이 곧 법신이라는 이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알고 나니 육도만행이 체중원이더라. 육도가 뭐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지혜,
대승 불교에서 수행의 덕목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바라밀, 육도인 것입니다. 육도가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만행이라 이야기하죠.
이 육도만행을 낱낱이 닦아야 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는 경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이치만 알면, 여섯 가지 만행을 닦아야 하는 것이 마음의 본체 가운데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
체중원,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중국에 오셔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시고 또 그것이 달마스님의 특장이 된 가르침이 관심일법이 총섭제행 (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이치가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관심일법 총섭제행이라고 하셨고 그것이 크게 어필이 됐죠.
총섭제행, 여러 가지 수행이라고 하는 것에는 육도만행이 당연히 들어가는 것이고, 선종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이 되는 마음의 문제를 꿰뚫어 알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무명실성이 즉 불성이고 환화공성이 즉 법신인 이러한 경지, 여리가 체득한 여래선을 알 것 같으면 육바라밀 하나하나 닦지 않아도 그 속에 다 있다.
체중원, 체라는 것은 특별히 어떤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다 있다.
여래선을 깨달은 바로 그 자리에 다 있다. 원만히 갖추어져있다.
이런 뜻입니다.
불법은 중생의 근기가 여러 가지듯이 불법의 차원도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소견이 늘어가므로 한사람에게 한 가지 불법이 아니라 열 가지 스무 가지 백가지의 불법이 필요할 수 도 있어요.
소견이 늘 때마다 거기에 알맞은 불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팔만 가지가 있어 팔만 불법이 아니라 한사람에게 수백 가지 불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팔만 사천 법문이라는 것은 무한히 많다는 그런 뜻이죠.
다종다양한 그런 차원의 불법도 펼치면 많지만 그것을 궁극에 이른 입장이라면 단 한 가지, 여기서 말하는 여래선이고, 영가스님이 나타낸 주장으로는 무명이 불성이고 환화공신이 바로 법신이다 이 경지입니다.
말은 쉬워도 상당한 경지죠
끝간 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몽유명명유육취 교후공공무대천이라.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깨닫고 나면 사실은 마치 꿈꾸는 것과 같아서, 불교에서 깨달음의 내용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이해시키기가 어렵죠. 그래서 꿈을 비유해서 이야기하죠. 여기서도 꿈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가 꿈을 꾸면 어떻습니까. 꿈속에서도 평소의 현실처럼 똑같죠.
꿈을 꾸면 현실과 똑같이 다 있습니다. 사람도 있고 온갖 것이 현실과 하나도 다름없이 다 있습니다. 꿈속에는 분명하고 분명하게 육취가 있다. 육취란 삶의 여러 가지갈래, 방식입니다. 사전적인 뜻은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입니다.
하루 중에도 지옥의 삶이 있고, 아귀의 삶이 있고, 축생의 삶이 있고, 인간의 삶, 천상의 삶이 있고, 아수라의 삶이 있죠. 하루 중에도 얼마든지 육취의 길을 헤매고 다닙니다.
그게 여러 갈래의 삶의 모습이죠. 그게 육췹니다
꼭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근기에 맞춰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보니, 사실은 불필요한 학설도 많아요. 그래서 학설을 위한 학설, 문제를 위한 문제 이런 것이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 문제시 되는 것만 문제시 해야지, 크게 문제시 되지 않는 것을 문제시해서 말에 말을 달고 또 말을 달고 해서 소, 초, 뭐 온갖 것이 벌어지죠.
그렇게 헤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다 속에서 모래를 헤아리는 격이다. 그렇게 비웃어요.
그 말이 증도가에도 나옵니다.
입해선사 도자곤하여 가피여래고가처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헤아리는 것이다, 한갓 수고로울 뿐이다.그런 말을 했어요. 경전의 말씀이 물론 다 해당되는 근기에는 다 값지지만, 그러다보니 그 일들을 그대로 일삼는, 우리 삶과는 동떨어진 것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삶에서 문제가 되는 것만 문제를 삼아도 끝이 없는데, 공연히 문제를 만들어서 전전긍긍 할 필요는 없는 거죠.
육취도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문제 되는 입장에서 설명해야 되는 것이지, 지옥이다 아귀다 축생이다, 지금 우리가 그거 논할 때 됐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육취를 헤매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 하는 것이 사실은 급한 일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현실주의자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해서 내 삶에서 풀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제일 큰 과제지 죽어서 지옥에 가고 축생으로 돌고, 물론 그럴 어떤 꺼리는 안해야 옳긴 하지만, 죽은 뒤에 그런 곳으로 갈 것을 염려하기 보다는 오늘 당장 지옥을 헤맬 수도 있고 축생을 헤맬 수도 있는데, 오늘 남은 시간만 하더라도 얼마든지 그런 것이 펼쳐져 있습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죠. 당면한 육취를 잘 해결해가고 얼마나 슬기롭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말한, 문제시 되는 것만 문제 삼자.이거예요.
교후공공무제천이라
꿈속에서는 그런 게 분명히 있죠. 온갖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깨달을 각자인데 꿈의 반대말은 교라고 해석을 합니다.
교후공공무재천이라.
깨달은 뒤에는 텅 비고 텅 비어서 삼천대천세계마저 없더라.
그렇게 현실과 같았던 꿈속의 산과 바다, 부모가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근거인 이 땅, 이 지구, 그런 오랜 세월을 가진 지구도 꿈속에 다 있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이 어떻게 잠든 지 몇 분 안됐는데, 나보다 나이가 수십 살이 더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떻게 그 꿈속에 있었겠습니까?
꿈 꾼 시간은 불과 일,이분인데 꿈속에 나타난 역사는 수 없이 길다구요. 그런 이치를 잘 생각해보면 일념즉시 무량겁이라, 한 생각 속에 한량없는 세월이 다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후공공무재천 이라는 거죠. 꿈을 깨고 나면 공간적으로 삼천대천세계도 없고, 시간적으로 수많은 과거, 미래, 수많은 시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 이것은 전혀 딴 세상으로 보이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알고 느끼는 현실은 그대로인데 ,내가 느끼기에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이런 것을 깊이 사유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 맞춰서 풀어보고 또 깊이 생각해보고 하나씩 깨우쳐지고 참 신기한 공부입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공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문제도 사실은 깨닫고 나면 그런 문제들은 다 없다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불성이니, 무명이니 하는 것이 없잖아요. 같은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중생이니 부처니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것도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꿈속을 헤맬 때 있는 것이죠.
꿈 깨고 나면 뭐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제대로 깨달고 나면 성인이니 범부니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도 정말 말에 불과는 것이고, 편의상 표현하자니 그런 말을 지어서 일러주는 것이지 그게 있어서 그런 말을 만들어서 들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꿈을 깨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고 행여나 하나라도 걸려들까 해서, 성인들은 하나라도 방편을 베푼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죄니 복이니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꿈 속에서 꿈인 줄 알 것 같으면 어떤 잘못도, 영광도, 오욕도 뭐 영광이고 오욕이 될게 있습니다.
꿈 깨고 나면 꿈이란 것을 알 때 아무것도 아니죠..
미련은 남죠.
꿈에서 횡재를 했을 때 수백억을 줍거나 로또 복권이 터졌을 경우, 꿈 깨고 나면 미련이 한참 가죠. 어떤 경우는 어릴 때 좋을 꿈꾸면 몇 달도 가요. 지금은 꿈 기억도 전혀 안되지만은 그전에 보면 좋은 꿈꾸면 미련이 가더라구요.
그렇지만 그건 다 꿈입니다. 미련 갖는 사람이 어리석어서 미련을 갖는 거죠.
꿈인 줄 알면 미련도 뭐도 다 떨쳐버려야 옳은 거죠. 깨닫고 나면 이 도리를 재대로 알고 나면 죄니 복이니 하는 것도,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것도 없다.
지금 우리가 캄캄한 중생의 입장에서 헤매다보니 죄다, 복이다 손해다 이익이다 이러는 것이지 한 생각 돌이키고 나면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죠. 신심명에 뭐라고 했습니까.
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몽환공화 하로파착)
꿈이요 환영이요, 헛것인 것을 어찌하여 수고롭게 붙들려는가.
능엄경에도 각내관세간하니 유여몽중서라.
한생각 돌이키고 세상을 보니 꿈 속 같더라.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 전문가적인 깨달음이 있으면, 그런 안목을 갖추면 그렇게 보여요.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세상을 살기가 쉽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죄니 복이니 하는 것도 없고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것도 없다.
거기에 매달려서 우리는 아등바등 살다보니 온갖 고통이 벌어지고 도대체 그 꿈을 깰 줄 모릅니다.
우리는 자꾸 꿈이다 꿈이다 하고 꿈을 깬 성인의 말씀을 자꾸 들으면서 우리의 꿈은 자꾸 엷어지죠. 그러면 꿈을 깨게 됩니다.
잠깰 무렵에는 꿈이 스르르 엷어지죠. 그러다 잠을 깨듯이
이러한 말씀을 듣다보면, 예를 들어
증도가의 주인공인 영가스님은 유마경 보다가 깨달았다고 그저께 말씀 드렸죠. 그와 같이 깨달음의 말씀을 자꾸 접하다보면 깨달을 기회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니 복이니 하는 것이 없고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것이 없다.
적멸 성중에 막문멱하라.
寂滅性中莫問覓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는 그런 성품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거든요.
죄가 무엇이고 복이 무엇이고 묻거나 찾아 헤매지 말라.
막문멱하라.
적멸성. 적멸한 우리의 마음자리. 텅빈 마음자리.
이것은 없는 것은 아니죠. 그 본성이 적멸하고 공적하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어 빈병은 병이 비었다는 뜻이지 병이 없다는 말은 아니예요. 그런데 적멸성, 공적한 마음자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활발발하고 한 순간도 쉬는 것 없이 작용하지만, 그러나 그 본성, 꼬투리나 실체를 찾아보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 공적하다는 것이지. 그래서 적멸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죄니, 복이니,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직 우리가 미몽 속에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 거기서 뭐가 이익이고 복인지 찾을 수 가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적멸한 성품 가운데 묻고 찾지를 마라.
비래진경미증마 比來塵鏡未曾磨 로니
금일 분명수부석 今日分明須剖析
비래, 예전에는 때가 묻은 거울을 일찍이 닦지를 못했었는데, 거울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때가 잔뜩 끼어서,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육조스님이 오조스님에게 법을 받을 때 신수 스님, 오조 스님의 법을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 여겼던 신수 스님이
신시 보리수요 심요 명경대라 시시근불식하야 물사야진여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때때로 갈고 닦아서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고 했는데 육조 스님은 그것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죠.
여기 영가 스님도 비래 예전에는 깨닫기 전에는 때 묻은 거울이 있다고 생각을 했고 거기에 때가 잔뜩 끼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일찍이 그 때를 닦지를 못했었는데 금일에는 분명히 수부석이라.
금일에는 분명하게 거울을 쪼개었다. 깨버렸다, 닦아내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쪼갤 부, 쪼갤 석 이예요. 거울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그렇게 해야 영가스님의 뜻에 맞는 거죠.
금일에 수부석이라.
간혹 앞에 때가 끼었다고 하니 거기에 걸려들어 가지고 때를 닦아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거울마저 깨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야 육조 스님의 말씀, 명경역비대라.
밝은 거울이란 형상이 없다, 틀이 없다, 모양이 없다.
금일분명수부석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거울을 부정해 버렸다.
옛날에는 모를 때야 거울이 있다, 닦아야겠다 이런 등등의 생각을 했겠죠. 그렇지만 깨닫고 나니 거울 자체가 없다.
명경역비대라.
틀이 아니다. 거울의 틀이 아니다, 거울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 그런 내용입니다.
옛날에는 때 낀 거울을 닦지를 못했는데, 오늘은 분명하게 쪼개버렸네.
거울을 인정하고 쪼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없애버렸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시 한번 새기면
만약 거짓말을 가져서 중생을 속이면 발설지옥에서 진사겁 지내는 것을 자초하리라. 여래선을 몰록 깨달으니 육도만행이 그 가운데 원만했다.
꿈속에서는 밝고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고 나니 텅 비고 텅 비어서 대천세계마저 없더라.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으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 묻고 찾지를 마라.
예전엔 먼지 낀 거울을 일찍이 닦지 못했더니 오늘에 분명히 쪼개어 버렸네.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證道歌 제4강

誰無念 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放四大 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수무념 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 환취기관목인문 구불시공조만성 방사대 막파착 적멸성중수음탁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반갑습니다.
2월 27일 염화실 인터넷방송 강의 시작 하겠습니다
증도가 오늘은 지난시간에 이어서
誰無念 誰無生고 若實無生無不生이라
수무념 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라
라고 하는 여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그런 아주 엄청난 그 가르침이 있어서
참 불교공부를 할려고 하다 보면은 상당히 헤매기가 일쑤입니다.
언필칭 팔만사천 근기에 그 근기에 맞추느라고 팔만사천의 법문을 했다
그래서 뭐 우리 성전을 팔만대장경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다보니까 뭐 경전도 부처님이 설하셨다고 하는 경전도 별별 이야기가 많고
또 이야기가 여기에선 이 말하고 저기에선 저 말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나중에 맞춰보면 상반되는 전혀 상반되는 그런 그 이야기들도 많고요.

또 그 뒤 제자들의 가르침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들도
모두가 부처님의 사상을 그대로 정통으로 이어받았다고 인정되는 분들의
그 어록들이나 경전들을 이제 팔만대장경에 실어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세히 또 들어가보면은 그 상황에서 또 그 근기에 알맞게 말씀하시다보니까
그게 일관성이 사실은 없어요 없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이제 그 앞뒤 말을 맞춰보면 정반대의 그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게 또 불교입니다

왜그런고 하니 근기가 각각 다르고 또 근기가 다르고 말하는 경우가
또 이제 그 말을 해야 할 그런 그 경우가 또 다르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뭐 세상사에도 역시 이제 그렇습니다만은
그런데 이 증도가라고하는 이 깨달음의 노래
영각스님의 개인의 그 어떤 깨달음의 말씀이지만은
또 여기도 어찌 보면은 그 내가 읽은 경전의 이야기하고는 다르다
또 내가 읽은 조사스님의 어록하고는 다르다
이런 것을 가끔 느끼면서 아마 보시거나 듣게 될 것입니다.
뭐 저도 이제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을 이제 많이 하게 되구요
그렇습니다.

오늘 그 誰無念 誰無生고 若實無生無不生이라
수무념 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라
고 하는 거기도 보면은
대개 우리가 이제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 마음에 많이 일어나는 그런 그 생각들
이걸 이제 망상이라고 이렇게 하고 번뇌라고하고 이게 그러죠
그런 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짓누르고 그 억누르고
또 그래서 그걸 쓸어내고 제거하고
이렇게 해서 無念상태 무념상태가 되어야만 제대로 공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일반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지요.

또 어떻습니까?
生滅의 변화, 生死를 초월한다라고 하는 말은
곧 생멸로부터 떠나야된다 라고 하는 그런 그 뜻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의 생멸변화 (生滅變化)는 곧 우리의 생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생멸변화가 없어야 비로소 이제 생사를 떠날 수 있다.
얼른 들으면 상당히 타당한 그런 이야기 이죠
또 그렇게 이제 이야기하는 그 경전이나 어록도 많습니다.
또 현재 뭐 불교를 가르친다고 하는 이들도
이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물론 많고요
저도 이제 그렇게 이야기해야 할 경우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증도가에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자하는
이 구절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에요

누가 誰無念 수무념 누가 무념이라고 말하는가
무념이 되어야만 말하자면
궁극의 경지 불교의 궁극의 경지에 이른다고 말하는가
또 누가 생멸이 없어야만 된다고 하는가
생멸이 없어야 불교궁극의 경지에 오른다고 하는가 이런 말이에요.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은
그대로 생각이 있는 것, 생멸生滅이 많은 것
바로 이것이 부처고 이것이 궁극의 경지고 이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
이렇게 이제 말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 이제 약실무생 若實無生인데 無不生이라 그랬어요
만약에 실로 無生 無生하는데 실로 生滅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생멸이 실로 生滅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不生도 없다
불생이 없다는 말은 生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런 뜻이죠
그럼 전부 生滅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無念 無生滅이 말하자면
우리들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어떤 한 곳에다가 이렇게 응고시키고
生滅을 생멸하지 않도록 어떻게 그 말하자면 고정시키고
이렇게 해야만 그게 인제 그 불교 궁극의 경지라고
이렇게 이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가스님 말씀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멸하고 꼭 無生滅이 필요하다면은
생멸하는 가운데서 無生滅을 봐야 되고
無念이 필요하다면은
생각 속에서 無念을 봐야 된다 이제 이런 이야기죠

그래서 이제 잘못 전해진 그 불교가
무념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들을 기울이고
無生滅, 우리의 마음이나 또 뭐 그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게
생각으로 살고 生滅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무념으로 억지로 無念으로 만들려고 하고
억지로 無生滅로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별별 부작용이 다 생기는 거지요.

전번에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은 그 화두일념이 안 되어가지고
그 머리를 갖다 법당마루에다 쥐어박고 피가 낭자할 정도로
그렇게 정말 답답하니까 마음을 어떻게 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몸부림을 쳤다하는 그런 그 이야기를 했지요.
제가 직접 본 일이고 또 그 사람 가끔 또 여기 옵니다
와서 보기도하고 참 내가 이야기도 많이 하고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하고 그러는데

본래 우리의 그 마음의 속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우리가 잘 이해해야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그렇게 생각이 부단히 작용하고 흘러가는 것을 붙들어 맬려고 하고

부단히 생멸변화 하는 것을
그걸 어떻게 생멸변화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바람직한 공부인줄 그렇게 알고는 그만 그런 방향으로 가다가
이제 그런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데

지금 이 순간도 修行을 한다고 하고 불교를 한다고 하는 이들이
그런 것을 목표로 무념을 목표로 무생멸을 목표로 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공부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가 않을 거에요.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영가스님께서 여기서 이제 바로잡는 이야기입니다.
영가스님이 언제 뭐 그렇게 생각 일어나는 것을 생각이 없도록하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깨달은 분도 아니고
생멸이 있는 것을 생멸이 없게 만들어가지고
어떤 깨달음을 이룬 것도 아니에요
생멸 속에서 不生不滅을 보는 것이고
생각 속에서 무념을 거기서 보는 것이지
달리 무슨 뭐 생각을 붙들어매고 生滅을 고정시키고
이렇게 해서 무념을 얻거나 불생불멸을 얻는게 아닙니다.
不生不滅의 이치는 본래 불생불멸로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가지고
세상을 바꿔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는 눈을 우리보고 바꾸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느냐
생멸 속에서 불생멸을 보고
그 유념 생각 속에서 유념 속에서 무념을 보라

이렇게 가르친 것이지 뭐 흘러가는 생각을 붙들어 매라는 것도 아니고
생멸하는 것을 생멸하지 않도록 고정시키라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현재 우리가 그 수용하고 있는 이 삶이
가장 完全하고 완벽하고 완전무결하고 아무 잘못이 없고
아무 고칠 것도 없는 그런 그 모습입니다.

현재 뭐 불교를 알던 모르던 관계 없어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대로 그대로가 완전무결하고 아주 훌륭한 삶이라고 하는 것
이거 일깨우는 일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그런 것이지 뭘 어떻게 그 저기 저 뭐 분재하는 사람들이
그 나무가지를 그냥 비비꼬고 부여잡고 이렇게 해 가지고
억지로 어떤 모양을 내는 그런 식 그게 불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교는 그런게 아니에요.
그런데 공부를 잘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이
공부인양으로 그렇게 알고 있어요.
물론 그런 방편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런 방편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건 방편설이지 말하자면 궁극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보면은
喚取機關木人問하라 求佛施功早晩成가
환취기관목인문하라 구불시공조만성가
그냥 생각이 없는 사람, 생멸이 없는 사람 그건 뭐겠어요.
목석이죠. 나무나 돌로 깎아놓은 機關木人(기관목인) 이라고요.
機關木人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나무로 만든 사람 이 뜻입니다.
나무로 만든 사람을 불러서 한번 물어보라
나무로 만든 사람은 無念無生滅 무념무생멸이니까요.
생각도 없는 사람이고 생멸도 없는 사람이니까
아 그 산사람이라면 생각이 있는 것이고 생멸이 있는 것이
그게 산 사람이고 정상 이지요

만약에 그 생각도 없고 生滅이 없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 사람은 저기 나무로 깎아놓은 그런 그 저기 뭐
법당에 모셔놓은 불상이라든지 기타 굳이 뭐 불상을 들먹거릴 필요 없이
나무로 깎아놓은 그런 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無念이고 無生滅이니까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거지
그래서 이건 어떻게 보면은 야유조의 표현도 이제 약간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뭐 해석들이 아주 분분하고
딴 사람들은 또 이렇게 해석을 안합니다만은
나는 내 소신대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구불시공조만성
求佛施功早晩成가 이건 求佛施功早晩成이로다 라고 하면 안돼요.
求佛施功早晩成이리요 라고 하던지 求佛施功早晩成가 라고 하던지
이렇게 표현을 해야 합니다.

부처를 구하기위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 거
무슨 육바라밀 닦는다던지 참선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경을 본다든지 하는 이런 공을 베푸는 일로써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부처는 공 베풀어서 되는게 아니에요.

공 베풀면 물론 복도 생기고 지혜도 닦을 수가 있고
뭐 온갖 그런 소득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그렇게 그런 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 결과가 부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그 공을 베풀어서 얻는 부처는
그거는 이제 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無念無生은 공을 베풀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또 공을 베풀어서 이루어졌다고 할 때
그것은 그야말로 목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까
그 목석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바로
목석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에게 가서 물어봐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 것이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과거 조사스님 해석도 그렇게 했어요.
조만성 早晩成가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어느 때 이루어지겠는가
이루어질 까닭이 없다 이겁니다

뭐 이런 주장은 영가스님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들도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
자주 말씀을 드리는데 정말 본래 부처의
그런 이치를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거 알면 불교를 제대로 아는 것이죠

그래서 이 대목은 뭐 다른 증도가 해설서하고 전혀 이제 다른 데요
왜 이제 그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 것이
부처되는 것하고는 다른 일이냐
늘 이제 이야기하듯이 사람사람이 본래로 다 갖추고 있고
개개인이 완전무결하다

圓成 원성
원만히 이루어져있는 것이다
이건 뭐 조사스님들 입만 떼었다하면
언필칭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래 成佛이에요.

공을 베푸는 것은 그건 이제 뭐 치장을 하고 조각을 하고 장엄을 하고
그래서 뭐 모양새를 갖추고 하는 그런 거지요
부처가 뭐 그런 모양새 갖췄을 때 부처고 모양새 안 갖추면 부처가 아니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참 허망한 부처지요

그러니까 뭐 공덕을 지어서 어느 정도 복이 있어서
잘 먹고 잘 살 면은 부처고 뭐 그렇지 못하고 가난하면 부처가 아니고
이렇게 되어서야 어디 그 부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거 아니죠
그거는 세속적인 안목이고 세속적인 평가기준입니다.
그걸 소위 속제라해요.

세속적인 어떤 그 안목으로서 모든 것을 부처도 그렇게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는 그런 세속적인 안목이고
또 우리의 어떤 그 我田引水 아전인수격인 우리의 성향에 그럴 듯하게 생각이 되는
그런 방향으로 이제 부처를 계산하는 거지요.
참 그 곤란합니다.

그래서 無念無生이 뭐 생각을 한 곳에 잡아 매어가지고
無念無生이 되게 해서 그래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무불생이 되야된다
생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
그게 바람직한거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런 꼭 無念無生이 그 어떤 궁극의 목표라면은
無念無生의 원조인 機關木人기관목인 나무로 만든 목석같은 사람
나무로 만든 조각 거기에 물어보라 그 사람이 무념무생이니까
그 무념무생한 사람한테 물어봐야 無念無生이 그 어떤 것인지
알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求佛施功早晩成가 구불시공조만성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無念無生이 되리라고 온갖 노력을
머리를 그냥 법당마루에 짓찧고 이렇게 해 가면서
그렇게 공을 베풀어서 언제 되겠는가

망상 이대로 뭐라고 했어요?
無明實性이 卽佛性이요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다.
(무명실성이 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서두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그겁니다.
無明이 곧 佛性이고 幻化空身이 허망한 몸뚱이 그대로 法身이라고 했으면은
거기서 다 이야기가 됬지않습니까
그걸 우리가 잘 생각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잘 풀어나가지 않겠나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증도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그 구절에 있고
또 그것은 불교의 제일 어려운 점 첨단 불교라고 할까요
불교궁극의 이치를 설명하는 그 이해하는 그런 열쇠가 바로

無明實性이 卽佛性이요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다.
무명실성이 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다.
하는 바로 그 구절에 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폭탄선언 아닙니까?

이 육신 뭐 내 아프고 뭐 감기 걸리고
뭐 곳곳에 그냥 병 투성이고 장애 투성이고
정말 이 허망한 몸뚱이죠
바로 그것이 法身이라는 것입니다.

煩惱 無明 無明實性이 즉 佛性이라고 했잖아요.
번뇌 무명 그대로가 부처님성품 佛性이다
이 아주 그 더 이상 말할게 없는 결정설이에요.
뒤에 이제 결정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말 결정적인 그런 그 말입니다.
더 이상의 말은 있을 수가 없죠

無明實性이 卽佛性 幻化空身이 卽法身
무명실성이 즉불성 환화공신이 즉법신
그러니까 여기 뭡니까
무념이 되려고 하고 無生이 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데 그거는 아니라는 거에요.

그거는 機關木人 기관목인 나무로 만든 사람이 잘 아니까 그 사람에게 물어 보아라
그렇게 노력해가지고 求佛施功 구불시공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데
그게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그건 당치도 않다 이거에요.

부처님이 언제 無念입니까 조사스님들이 언제 무념입니까 무념
아니에요.
無念이면 뭐 목석이나 다를 바 없지요.
하등의 존경의 가치가 뭐 있습니까

그야말로 법당에 모셔놓은 불상이 부처지요
그래 생각해서 불상 그렇게 예배하고 그렇게 모시는지
그건 참 알 수가 없습니다만은
사람이 그게 그러한 것을 목표로 한다면은 그 참 허망합니다.

放四大 莫把捉하고 寂滅性中에 隨飮啄하라
방사대 막파착하고 적멸성중에 수음탁하라
그렇습니다.
四大를 놓아버려서 잡지를 마라
우리가 이 그러니까 여기도 얼른 들으면은
無明實性이 卽佛性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라는 말하고
무명실성이 즉불성 환화공신이 즉법신
여기 放四大 莫把捉 방사대 막파착 四大가 뭡니까
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四大肉身을 말하는 것 이죠
여기에 우리가 너무 매달리니까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다 뭐 결가부좌 해야만 참선이 잘 된다 해 가지고
결가부좌를 하 안 되는 다리를 그냥 결가부좌를 몇 년을 했다가
그냥 어떻게 요즘 뭐 관절염 앓아가지고
내 병원에 쫓아다니는 그런 예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 참 사대를 붙들고 거기에
뭐 그렇게 無念이 될려고 하고 無生이 되려고 하고
그렇게 공부하는 그런 사례들을 여기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사대 붙들고 그렇게 하지마라
이런 말이죠

寂滅性中에 隨飮啄하라
적멸성중에 수음탁하라
적멸한 성품가운데서 飮啄을 따라라
마음의 경지입니다.
그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린다 그랬어요.

또 그 유명한 그런 그 남악회향선사하고 마조스님하고 인가요
대화 유명한 대화 있죠
그 말이 수레를 멍에 했는데 수레가 가지 아니할 때
말을 때려야 옳습니까? 수레를 때려야 옳습니까
거기엔 소라고 되어있지요
소를 때려야 옳습니까? 수레를 때려야 옳습니까?

아 우리가 택시 그 저기 시내 가서 택시 잡으려고 할 때 차보고 택시 잡나요?
차보고 택시 잡지 않습니다. 운전수보고 택시 잡아요
천하에 쉬운 일 아닙니까? 천하에 알고 보면 그렇게 쉽고 간단명료하고
너무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이치에요
택시를 보고 저저 손을 흔들어서 부르지만은 그거 어디 택시보고 부른게 아니라구요.
운전수보고 저저 부르는거지
택시~라고 부르지만은 택시가 오라는 게 아니죠
운전수 보고 택시 몰고 오라는 뜻이지
옛날부터 그런 이야기를 다 해놓았어요.

무엇이 根本근본이고 무엇이 枝末지말인지 우리가 그런 것을 잘 알면은
그렇게 그 뭐 가부좌 안 되면 어떻습니까
다리 뻗고 참선하면 참선 안 되라는 법도 없고
의자에 앉아서 해도 아무 상관없는 것이고 다리 뻗고 해도 상관없는 것이고
행력선 좌력선 이라고 금방 또 뒤에 이제 나오는데
걸어다녀도 참선이고 누워있어도 참선이고
누워있으면 뭐죠 臥禪와선 아닙니까
누워있어도 참선이고 걸어 다니면 行禪행선이죠

거 뭐 스님들이 참선하는 스님들이 자고싶으면
아 이제 와선 좀 해야 되겠다 이렇게 이제 말도 합니다만은
거 좋은 말 이죠
禪하는 마음으로 잔다 이거에요 그게 와선이지요
선잠이라고 할까요 禪睡선수 참선의 잠이다
그렇게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放四大 莫把捉 방사대 막파착
사대를 놓아버리고 파착하지 말아라
그리고 마음의 원리대로 따르라

寂滅性中에 隨飮啄
적멸성중에 수음탁
음탁은 마시고 먹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졸리면 자고하는게
수음탁입니다.
적멸성가운데 그랬을 때 뭡니까
마음과 몸의 그 어떤 조화가 비로소 유지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뭐 四大肉身을 우리가 완전히 무시하고 살라하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사대육신에 너무 그렇게 매달려가지고 가부좌를 해야만
그게 온전한 참선인줄 그렇게 알고
그 가부좌는 억지로 되도않는 가부좌를 틀고 앉느라고
가부좌는 인도사람을 체형에 맞는 앉음새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맞는 게 아니라구요.

반가부좌하면 제일 편안합니다.
반가부좌 아니면 책상다리라도 괜찮아요.
뭐 앉는데 무슨 참선 있나요

그런데 그걸 우리나라사람 체형에 맞지도 않는 그런 그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고
아! 난 가부좌 틀고 뭐 10분 앉았다 뭐 20분 앉았었다 한 시간 앉았었다
이걸 자랑을 해 쌌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제 관절염 앓는다고 내 병원 쫓아다니다 볼 일 다 보고요

참 이 그래서 이 증도가 이것을 그 영가스님의 그런 그 오도송이지만
그야말로 부처님의 오도송인 화엄경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이고
또 이것은 그야말로 수행자들의 그 안목이 된다
모든 수행자들의 안목이 되고
또 부처가 되고 싶어 하는 불자들에게 바른길을 안내하는 것이고

또 禪詩의 白眉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들,
애선가들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주 애송하는
정말 애송하는 선시죠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이라
제행무상일체공이 즉시여래대원각이라
諸行이 無常하여 一切가 空한것이
그것이 곧 如來의 大圓覺이다 그렇습니다.

四大를 놓아버리면은 그야말로 몸 문제에 대해서
몸이 오고 가고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 쓸 일이 아니죠
몸이 또 이렇든 저렇든 또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마음 쓸 일이 아닐 때 비로소 마음과의 조화를 잘 이룬다.
결국 우리 몸은 그대로 無常하고 마음도 물론 無常해요.
諸行無常제행무상이란 말은 몸도 無常하고 마음도 無常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이 세상도 정말 무상합니다.
그래서 일체가 공해요.

信心銘신심명에서
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
몽환공화를 하로파착가 그랬지요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이다.

그리고 모든 천도재 반드시 읽어드리는 금강경
또 그 금강경은 그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다 라고
대표경전으로 해서 의지해야 할 그런 경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거기 이제 사구게 제일 근본이 되는 구절이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랬지요
요 구절 하고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제행무상일체공이 즉시여래대원각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라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라
모든 상이 상이 아닌줄
상이 아니니까 허망하니까
허망한 줄 모르면은 곧 여래를 본다
卽見如來즉시여래대원각이다
여래의 大圓覺이다.
여래는 뭡니까 깨달음의 경지에요.

뭐 역사적인 부처님 세존을 두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선방에 그 저 법당에 앉아있는 그런 부처님도 아니고
깨달음의 경지를 여래대원각 如來라고하고 大圓覺이라고 하고
凡所有相 모든 있는바 형상은 전부 허망한 것이니까
그 허망한 것을 虛妄한 것으로 보라
아예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그대로 여래를 본다
여래의 대원각의 경지다 여래다 깨달음의 경지다 이런 뜻 이죠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이다
이 아주 참 근사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여기는 전부 이제 공하고 없고 무상하고 텅 비고
또 凡所有相 皆是虛妄이고 이런 것이 이제 말하자면
如來의 경지고 여래의 圓覺이고
우리가 또 깨달을려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고
이렇게 이제 얼른 생각이 들도록 글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사실 맞아요.

그러나 그렇게 공한 줄로 보았을 때
凡所有相 皆是虛妄으로 우리가 제일로 이해했을 때 여래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곧 如來의 圓覺이다 라고 하는 말은
거기서 허망 속에서 허망하지 않는 영원불멸을
그대로 거기서 보게 되는 그런 그 이야기죠
그걸 뭐 꼭 드러내서 말은 안 했지만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치가 말하자면은 바로 여래의 대원각이다
그러한 이치가 여래의 대원각이다.
그러한 이치를 내 살림살이 내 안목 내 견해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그대로 여래의 대원각 이죠
그러니까 卽見如來 곧 여래를 본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참 이런 구절이요 어떻게 생각하면은 불교가 허무주의
또 어떤 空하고 텅 비어 없는 것 이런 것을 아주 지상의 제일이라
목표로 삼는 것 같지만은
우리가 그러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불교를 사실 제대로 이해 못합니다.
한 차원 다른거지요.
내가 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랬을 때
그 다음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
이런 말씀을 드려서
거기에서 이제 다시 내려오면은
비로소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중도의 어떤 그 이치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일단 그 우리가 이 사대에 대한 그런 바른 이해
또 諸行이 無常하다고 하는데 대한 바른 이해
또 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고 하는데 대한 바른 이해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우리의 저 앞에서 無罪福무죄복 無損益무손익 이라고 그랬는데
죄니 복이니 하는 것도 거기에서 텅 비고
또 업이니 뭐 죄니 하는 것도 또 물론 없고요
그 다음에 이익이니 손해니 無損益이니 하는 것도 거기서 다 텅 비는
그러한 그 경지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뭐 우리가 그 우리의 어떤 성향에 또 우리의 근기에 맞는
조그마한 그런 그릇이 필요로 하는
어떤 작은 이익 작은 소득 우리는 늘 거기에 연연하지요
큰 거 아주 툭 터지게 큰 것은 감히 우리의 그릇이라고 우리의 어떤 그 盆이라고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요 그렇게 작은 생각을 소인배 같은 작은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본래의 그릇은 본래 마음자리는 그런 게 아니거든요.
본래의 마음자리는 그런 소인배 같은 그런 그 모양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경전에서나 조사스님들의 말씀은 너무 큰 말씀
우리하고 뭐 너무 거리 있는 말씀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간혹 들지요
들지만은 본래로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마음자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은
당신 본대로 이야기 아니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어떻게 그걸 숨겨놓고 이야기를 합니까?
남겨놓고 조금만 이야기 할 수가 없잖아요.
그거는 이제 법을 아끼는 것이라고 해서 아주 경계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큰 허물이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들의 작은 그릇에는
이런 큰 소리가 얼른 납득이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의 근본자리는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고 납득하게끔 되어있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살림살이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는거
이걸 이제 우리가 이해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이다
제행무상일체공이 즉시여래대원각이다
여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은요.

誰無念 誰無生고 若實無生無不生이니
수무념 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니
누가 無念이라 했던가 누가 무생멸이라 했던가
만약 실로 生滅이 없다면은 생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喚取機關木人問하라
환취기관목인문하라
無念無生이 궁극의 목표라면은 無念無生한 기관목인
나무로 만든 사람에게 불러서 물어 보아라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 것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조만간에 이루어질 것인가
四大를 놓아버리고 잡지를 마라 붙들지 마라
고요하고 멸한 아무것도 없는 적멸한 성품 마음 가운데서 마시고 식음을 따라라
諸行이 無常해서 一切가 空한 것이 이것이 곧 如來의 大圓覺이다.



















證道歌 제5강

誰無念 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放四大 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決定說 表眞僧 有人不肯任情徵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
摩尼珠 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證道歌 제 5강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염화실 인터넷 방송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이 벌써 양력으로 2월 말일이네요.
우리가 2월 1일날 부터 방송법회를 새로 시작했는데 그새 한 달이 다 갔습니다. 그리고 음력은 또 이월 초하루가 돼서 오늘 아마 신도님들 절에 많이 가셔서 기도 하셨을 줄 믿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추워져 가지고 꽃을 시샘하는 눈인가 여기는 지금 눈이 와서 범어사에는 눈이 와서 눈이 조금 서려있습니다. 날씨도 상당히 쌀쌀하고요.매화꽃이 조금 피려고 하려다가 그만 움츠러들어 버렸습니다.아마 한달이나 지나야 제대로 이제 꽃을 볼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람 감정에 맞춰가지고 꽃 피는 것을 시샘한다, 봄을 시샘한다, 추위가 조금 봄에 오면 그런 말을 하지요. 그건 우리의 느낌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자연이야 어디 시샘이고 뭐 환영이고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환영도 없고 시샘도 없고 그렇습니다. 그냥 무심할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들이 자연을 좋아하는 거죠. 그야말로 스스로 자自자 그러할 연然자 저절로 그러할 뿐이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 뭐 저도 그래요. 이런 현상을 보고 얼핏 괜히 꽃피는 것을 시샘하려고 또는 뭐 새봄을 시샘하느라고 추위가 이렇게 찾아들었다 이런 표현을 거침없이 하지마는 사실은 거기에는 모순이 많이 깔려있죠.

오늘은 증도가
결정설決定說 표진승表眞僧을 유인불긍有人不肯 임정징任情徵하라
거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영가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셔서 많은 경전을 공부하시고 또 천태지관 天台止觀 천태학파天台學派에 들어오셔서 천태지관을 아주 깊이 익히셔서 천태종天台宗의 법을 계승하고 천태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촉망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마경을 보시다가 깨달음이 있어서 그 천태종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란 굳이 예속을 시키자면 이제 선종禪宗에 예속이 되는 거죠. 그래서 육조스님에게 와서 당신의 깨달음을 인가를 받게 되고 그러면서 완전히 선종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것도 그 스님이 그냥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이지 우정 천태종을 떠나서 선종으로 들어왔다, 선종사람이 됐다 이런 이야기들은 뒷사람들의 평이죠.

어쨌거나 영가스님은 그동안 공부를 참 아주 하느라고 했었는데 뭔가 미진한 게 있다가 깨달음을 이룬 이후 그래서 그 깨달음의 경지를 증도가를 통해서 자신있게 피력을 하시면서 여기서 말한 대로
결정설決定說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건 아주 결정적인 학설이다. 결정적인 설법이다. 이 이상 더 나아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렇죠. 그동안 뭐 여러분들이 불교를 접해서 공부를 많이 하셨을 줄 믿습니다. 저보다 더 훨씬 더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하셨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 분들이 왜 안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증도가 공부를 하면서 역설 죽 해왔던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요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 법신卽法身이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는 정말 어디에도 들어볼 수 없는 그런 아주 결정決定적인 말씀이죠. 그리고 더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그런 말씀이다. 그래서 결정설決定說이다. 스스로 결정설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더이상의 설명은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이제 말할 수가 있죠.

그리고 표진승表眞僧이라고 했는데 이 승자가 보통교재 내가 염화실에 올려논 교재에도 탈 승乘자 뭐 대승大乘 소승小乘할 때 쓰는 승자를 썼는데 그런 본本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여러가지 본本을 참고를 해보니까 중 승僧자 스님 승僧자가 오히려 훨씬 잘 맞아요. 그래서 여기서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표진승表眞僧 스님 승僧자. 음은 똑같죠.진실眞實을 표表한 중이다, 진리眞理를 표表한 중이다.이말이예요.

나는 결정決定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요. 그리고 진리眞理를 표表하는 중이다.
아주 당당하게 그렇게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이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라고 할까 그 당시 영가스님의 삶의 배경을 우리가 깊이 연구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 배경을 더듬어 보면은 이렇게 어떤 법法이라고 하는 탈 승乘자 보다는 나는 진리眞理를 표表한 중이다. 중이면 당연히 진리를 표한 중이고 진리眞理를 표表한 중이라면은 말하자면 이런 증도가證道歌에서는 결정決定적인 그런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개재介在다. 이런 뜻이죠. 그리고 또 개인적인 그런 어떤 마음들이 상당히 묻어있어요. 증도가證道歌에는 보면.
그래서 이런 데서도 탈 승 乘자 보다는 스님 승 僧자 중 승 僧자가 훨씬 더 뚜렷하다고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眞理를 표表한 중은, 중을 유인불긍有人不肯 임정징任情徵하라. 내가 이런 학설, 이런 주장, 결정적인 주장과 진리를 표하는 진리를 나타내는 이런 승려로서 어떤 사람이 있어가지고 유인有人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긍정肯定하지 않는다면 나의 주장과 어떤 그 나에 대해서 이런 말이죠. 긍정하지 않는다면은 마음대로 그 사람의 마음에 맡겨서 시비하고 따져보라 이런 말입니다.

임정징任情徵 정情에 맡겨서 징徵 따져보라생각대로 따지고 시비해보라 이런 뜻이예요. 느그 마음대로 한번 따져보아라.이 말이예요. 마음대로라고 하는 게 임정任情이죠. 정에 맡겨서 생각나는 대로 감정가는 대로 한 번 따져봐라.

아주 아주 그 뭡니까 자신감 넘치는 그런 말씀이죠. 니가 나를 긍정하지 않는다면은 마음대로 한 번 따져봐라.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법 승 乘자 탈 승乘자 보다는 중 승僧자가 훨씬 더 돋보인다 이렇게 봅니다. 또 그런 본本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본本이 있어서.

저희들이 은해사에서 증도가證道歌 사가해四家解를 냈어요. 증도가에 대한 그런 주해註解가 작년에 찾아보면은 네 분의 것이 있습니다. 뭐 더이상 더 있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찾기를 네분의 것을 찾아서 그것을 편집을 해서 사가해四家解를 책으로 낸 적이 있어요. 거기에 봐도 이제 중 승僧자로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놓고 보니까 승자, 중 승僧자가 훨씬 더 좋아요.

그야 말로 참 이 증도가證道歌는 도를 깨달으신 그런 노래이기 때문에 여기에 뭐 근기를 맞춘다던지 어떤 수준을 감안해서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껏 자기의 소견대로 자기의 지혜대로 자기의 견해대로 한껏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죠. 듣는 사람이 뭐라고 듣든 이해를 하든 못하든 그건 뭐 여기서 관계 없습니다. 일방적이죠.

마치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한 것이 그렇습니다. 근기에 맞추지 않고 그대로 당신의 깨달음의 경계를 설했다 이렇게 보는 게 이제 화엄경인데 내가 언젠가 말씀드렸죠.
부처님께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소회를 피력한 화엄경이 있다면은 영가스님에겐 증도가가 있다. 이런 표현을 말씀드렸습니다.
직절근원불소인直截根源佛所印이요 적엽심지재아불능摘葉尋枝我不能 이제 꼭 네 구가 딱딱 맞지는 않는데 어떨 때는 이제 운을 잘 맞추기도 하고 어떨 때는 운이 안맞기도 하고 어떨 때는 여섯 구 어떨 때는 여덟 구로서 이제 절로 나가다가 율로도 이제 나가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 이 앞부분에는 운이 그래도 맞췄어요. 위에서 이제 보면은
방사대막파착放四大莫把捉 그다음에
적멸성중수음탁 寂滅性中隨飮啄 이게 이제 운이죠. 그다음 제행무상일체공諸行無常一切空 은 이제 운자로 보지 않고
즉시여래대원각卽是如來大圓覺그러면 착탁각 이걸 이제 절로 볼때는 7언 절구로 볼 때는 운자 압운이라 그렇게 합니다. 시학에서 그래요. 그다음에 이제 오늘 공부하는

결정설표진승決定說表眞僧 승자죠. 그다음에
유인불능임정징有人不肯任情徵 역시 이제 이응으로 받침이 돼서 압운이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직절근원불소인直截根源佛所印이라고 하는 인자는 니은 받침이니까 이건 보지를 않고 그다음에 이제
적엽심지아불능摘葉尋枝我不能 능 그러니까 승징능 이렇게 이제 칠언절구로 볼 때는 고렇게 운을 선택하는 거죠.

참고로 이제 그것도 보면은 네 구로 하나의 시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직절근원直截根源은 불소인佛所印이요라고 하는말, 직절근원直截根源, 근원根源을 바로 꺾었다 근본을 바로 꺾었다. 이건 이제 나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경지, 부처님의 지견 부처님의 지혜에 몰록 들어갔다 이 말이예요.

부처님의 지혜에까지 나는 들어갔다 그게 직절근원直截根源입니다 근원, 근원자리, 근원자리를 바로 꺾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인가印可한 바다 그랬습니다. 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가印可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이 인가印可했다. 육조스님이 인가印可했죠. 육조스님도 깨달은 사람이니까 인도 말로 표현하자면 붓다가 됩니다. 붓다는 깨달은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꼭 석가모니를 뜻하는 것은 아니죠.

특히 이제 대승불교나 선불교에 와서 부처 불佛자는 깨달은 사람을 지칭하고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하는 경우가 아주 드뭅니다. 썩 드물어요.
여기서도 부처님이 인가印可한 바다 그러면 그냥 바로 깨달은 분이 인가印可를 했다 육조스님이 인가印可했죠. 그러니까 부처님, 모든 깨달은 사람의 지혜 모든 깨달은 사람의 지견 이것은 역시 깨달은 사람이 인가印可한 바다 나도 역시 그 반열에 올랐다 이거죠. 그런데

적엽심지摘葉尋枝는 아불능我不能이라 그랬습니다.
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 것은 내가 능하지 못하다
이 스님은 사실은 상당히 능한 분이예요. 그런데도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직절근원直截根源은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은 탄허스님께서 자주 말씀했는데 불교공부를 하는 데는 종지宗旨에 밝아야 된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종지宗旨에 밝아야 된다. 그건 이제 근본취지에 밝아야지 설사 뭐 글자를 좀 모르고 글을 좀 못 새기고 교리행상에 좀 어둡고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나 어떤 전거나 지문이나 이런 데 대해서 조금 어둡더라도 근본에 밝아야 이게 이제 발전이 있고 불교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종지宗旨에 밝아야 된다. 그걸 아주 많이 주장하셨어요. 저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엽적인 것보다는 종지宗旨에 우선을 두고 늘 저도 이제 공부를 해왔는데 여기 직절근원直截根源이라고 하는 것은 종지 宗旨에 밝다부처님 지견에 바로 들어간 일이다

그리고 적엽심지摘葉尋枝는 명상학名相學이라 이렇게 말을 해요. 이름과 형상에 대한 어떤 학문 그것을 교리나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나 전거나 옛날 말로로는 지문指文이라 그래요 가리킬 지指자 글 문文자 지문指文.

요즘은 논문을 쓸 때 자기가 인용한 말이 대장경, 무슨 대장경 몇 페이지 몇 째 줄에 있다 요런 것을 아주 열심히 잘 갖다가 이제 증거를 갖다 댑니다. 그게 이제 제대로 증거를 못하면은 부실한 논문으로 보지요. 누구 말을 인용할 때마다 그 말이 어디에 있는가 어느 책에 있는가 제일 오래된 근거를 갖다 댑니다. 그런데 이

영가스님 말씀은 나는 그런 데 대해서는 능하지 못하다 아불능我不能이라 그랬습니다. 명상학名相學 뭐 교리나 역사나 어떤 전거나 그 우리 불교 공부를 하는데도 어떤 한문이라든지 새기는 문제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종지宗旨 근본취지에 대해서는 밝아야 된다는 거죠. 영가스님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결정설決定說이고 표진승表眞僧이라 누가 나를 인정하지 못한다면은 마음대로 한 번 따져봐라 그러면서 직절근원直截根源은 불소인佛所印이다 얼마나 자신있는 말씀입니까 적엽심지摘葉尋枝 아 지엽적인 거는 나는 몰라, 딴데 가서 물어봐 저기 쫄대기 강사들이나 알지 그런 거 뭐 내 까지 그거 신경 써야할 일이 있느냐 뭐 이런 식이죠. 참 아주 멋있는 말씀입니다.
마니주摩尼珠 인불식人不識 하니 여래장리如來藏裡에 친수득親收得이라 마니주를 인불식하니 아주 좋은 내용이 나왔어요. 마니주摩尼珠는 번역하면 여의주如意珠라 그러지요. 마음대로 되는 구슬 뭐겠습니까.

이건 이제 왜 이 우리의 마음을 마니주, 여의주如意珠 뜻대로 되는 구슬이다 라고 이렇게 이제 표현을 했는고 하면은 아주 그 마니주라고 표현을 많이 하거든요. 구슬 심주心珠해서 마음의 구슬이다 이렇게 표현을 많이 합니다.
여의주라고 하는 전설의 구슬이고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지만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필요로 한 것은 소원만 하면 다,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는 거죠. 뭐 돈이 필요하다면 돈, 밥이 필요하다면 밥, 집이 필요하다면 집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 수 있는 구슬이 바로 여의주입니다. 그래서 여의주에다 우리의 마음의 공능을 비유를 했는데 지혜 공덕 우리가 좋아하는 행복, 복, 우리 불교에서 복이라고 하는게 행복이라는 뜻인데 행복이라는 것하고 복이라는 것하고 좀 달리 생각을 해요.

대개 이제 복福 하면은 무슨 오복五福 자손복 무슨 뭐 물질복 그다음에 명예복 뭐 이런 거 그런 그 세속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추구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 충족되어진 사람을 복福이라 그러죠. 우리 상식적인 복은 대개 이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제 보기 보다는 행복幸福이라고 행복으로 해석하는 게 좋아요

마니주摩尼珠는 그런 행복도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평화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자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다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여의주如意珠고 마니주입니다.
그게 이제 우리 마음이 갖고 있는 속성이고 공능이고 능력이죠. 그것은 사람 사람들이 다 갖추고 있죠. 전부 이 구슬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뭐 마니주라는 이름 가진 사람만 마니주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정말 좋은 구슬이죠.그것이 이제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모른다. 인불식人不識

마니주摩尼珠를 인불식人不識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이 증도가가 시 형식으로도 아주 멋을 부린 것이요 일곱자를 원칙으로 했지만은 간혹 이제 여섯 자를 이렇게 해서 뭔가 멋을 부렸습니다.

마니주摩尼珠 인불식人不識
여기다 이제 뭐 꼭 넣을 굴자가 없으면 어찌 해奚자 같은 거 어조사 해奚자 같은 거 넣어도 좋아요.
마니주해摩尼珠奚 인불식人不識 마니주여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다 이렇게 해도 아무 상관없는데 그렇게 여섯자로 만든 구절이 꽤 있죠 보면은. 그외에는 일곱자고 그렇습니다.

그 아주 좋은 마니주, 무엇이든지 다 우리 소원을 다 이루어 줄 수 있는 그런 구슬, 그런 그 마니주인데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또 활용을 못하고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조금 밖에 몰라요. 정말 뭐 만분의 일이나 알까 말까,

그런 그 마니주를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으면서 모든지 다 들어줄 수 있는 그런 그 능력의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그저 만분의 일정도 알고 또 활용하는 것도 한 만분의 일 정도나 그저 활용할까 말까 그런 정도 입니다.

이것을 이제 공부를 이 마음공부, 불교공부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 여의주如意珠에 대한 이해가 넓고 깊어지고 그 활용도의 범위가 훨씬 이제 높아지는 거죠. 활용도의 프로테이지가 자꾸 이제 높아지는 겁니다. 우리는 만분의 일을 안다면은 공부 좀 더한 사람은 만분의 이를 안다든지 천분의 일을 안다든지 아니면은 백분의 일을 안다든지 그렇게 이제 프로테이지가 높아지면은 아주 대단해지죠. 완전히 깨달은 사람들은 석가모니 같은 그런 이들은 특히 그걸 뭐 100퍼센트 다 알고 다 활용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이제 우리가 믿어야 되겠죠. 여긴

여래장리 如來藏裡에 친수득親收得이라
그랬습니다. 여래장리에 친수득이라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이 달라서 그렇지 마니주는 우리 마음을 공능의 입장에서 구슬이라고 말을 했고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마니주가 창고속에 여래라고 하는 창고 속에 감추어져 있다. 친히 거둬들여져 있다. 여래장如來藏 속에 친히 거둬들여져 있다. 이런 말입니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다른 말로 하면 여래가 있는 곳. 바로 부처님, 여래如來가 진리眞理가 또는 일심一心이 진여眞如가 자성自性이 그대로 진여眞如 여래如來 자성自性 일심一心 이게 다 같은 뜻입니다. 그 속에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낼 수 있는 그런 그 마니주摩尼珠가 그 속에 들어있다. 얼마나 아느냐, 아느냐에 따라서 그 활용도가 높아지고

불교 공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마니주를 우리가 알아가는 일입니다. 몇 퍼센트 아느냐, 또 아는 만치 또 얼마나 활용할 줄 아느냐 활용할 능력이 있느냐 이거예요.

이거 얼마나 알고 얼마나 활용할 줄 아느냐 이게 이제 불교를 얼마나 아느냐 이런 그 표현하고도 같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참 아주 특별한 가르침이죠. 신기하고도 아주 재미가 있고 특별한 가르침입니다.

육반신용六般神用 공불공空不空이요 일과원광一顆圓光 색비색色非色이라
마니주摩尼珠 인불식人不識이라고 하는 게송이 밑에까지 그렇게 이제 연결이 되는데 육반신용六般神用 여섯가지의 신통묘용神通妙用그랬습니다.

여섯가지 신통묘용神通妙用은 공空하면서 공空하지 않다. 여섯가지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이라고 하는 것은 두말할 것없이 육근六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근六根.
눈은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죠. 또 귀는 듣고 혀는 맛보고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전부 그 나름의 그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게 신통묘용이예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습니까 참 묘하지요.
뭐가 들어서 그런 능력들을 육근이 다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임을 다 그렇게 잘 하는지. 그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는 거예요.

찾아보면 그게 없어 공空해 그러면서도 공하지도 아니해. 마치 물속에 소금을 풀어놓으면 짠 맛이 있지 않습니까 짠맛은 보이지 않죠 보이지 않으면서도 짠맛은 분명히 있는 거예요. 또 아교도 그래요 붙는 성질 풀도 그렇죠. 풀, 풀이 그 붙는 성질이 그 눈에 보이는 건 아니예요. 그런데 붙는 성질이 분명히 속에 있어서 붙는 능력을 보이지요.

우리 눈도 보는 능력이 눈에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또 없다고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공불공空不空이라. 공하면서 공하지 않다.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충분히 이제 발휘를 하는 거죠.그걸 이제 우리가 신통묘용이라고 알아야 됩니다.
무슨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초능력을 과시하는 그런 거는 절대 신통묘용이 아니예요.공부하다가 그런 능력이 생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특히 목련존자는 신통제일이라고 하지마는 부처님은 목련존자보고 그런 그 초능력적인 그런 어떤 초인간적인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실은 목련존자는 외도들에게 순교당한, 맞아서 죽은 사람이죠. 만약에 신통을 그렇게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식 신통을 마음대로 발휘했다면 왜 맞아 죽을 리가 있겠습니까. 한꺼번에 수만명 수십만명도 죽일 신통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법을 거역하게 되는 것이고 순리를 거역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그런 그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되죠. 부처님은 그런 그 초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것은 불교에서 간혹 이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런 것을 배우러 절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참 위험천만한 발상이고 잘못된 생각이예요.

방거사의 게송인가요
중국의 아주 유명한 거사 방거사 나중에 또 이야기가 될 분인데 그 방거사의 게송에

신통겸묘용神通兼妙用이요 운수급반시運水及搬柴神라
신통묘용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 산에 가서 나무 해 올 줄 알고 우물에 가서 물길어 올 줄 아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방에 들어와서 어두우면 스위치 키고 나갈 때 불끄고 또 물이 필요하면은 수도꼭지 틀어서 물 받을 줄 알고 하는 그런 일이 그대로 신통묘용이다 그랬습니다.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뭐 먹을 줄 알고 피곤하면 잘 줄 아는 이 능력 이거 보다 더 뛰어난 신통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진짜 신통이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그것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육반신용六般神用 공불공空不空이요 공하되 공함이 아니하고 보면 없지만은 작용하잖아요. 부르면 대답하지 않습니까. 꼬집으면 아픈 줄 알아요. 그 아플 줄 아는 것이 어디 그 눈에 보이게 어디 있습니까 존재하지 않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그것이 어디에 그 뭐 혹처럼 붙어있나요 그렇게 붙어있지도 않습니다. 전혀 없어요. 없는데 부르면 대답할 줄 안다고요 아 이보다 더 훌륭한 신통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일과원광一顆圓光 색비색色非色이라그랬습니다.
한덩어리의 둥근 광명이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빛이면서 빛이 아니다 그랬습니다. 빛이면서 빛이 아니다 이게 역시 이제 여의주를 말하는 거죠. 마니주摩尼珠, 마니주는 한덩어리의 광명이니까 거기에서 모든 작용이 일어나니까 그 작용은 육근을 통해서 표현이 된다 그것을 이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저렇게 이야기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하나의 마음자리에서 일과원광一顆圓光이라고 그렇게 했고 하나의 마음이 육근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을 육반신용六般神用이라고 하고 이렇게 이제 표현 한 거죠. 뭐 일과원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 육근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일과원광이고 그 표현되는 그 근원은 바로 일과원광이다. 그것은 이제 빛이면서 빛이 아니다.그랬습니다.

한마음의 어떤 작용 한마음의 작용이 정말 아주 멋진 빛인데, 멋진 빛인데 정말 그 색이 기기묘묘하죠.
사람 성격 따라서 자기 관습 따라서 자기 아는 것 따라서 살아온 어떤 경험 따라서 자기 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런 그 따라서 또 어릴 때 어떻게 성장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어떤 사물을 보고도 어떤 사건을 보고도 그 표현이 각양각색입니다. 또 그날 뭐 컨디션이 어떻냐 또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느냐, 뭐 기분 좋은 편지 한 장을 받았어도 또 이제 사물을 보는 것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다 그렇지요.

기기묘묘한 색깔을 다 표출해 내는데 그런데 그 색깔이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색깔이면서 색깔이 아니다 빛이면서 빛이 아니다 일과원광一顆圓光이 색비색色非色이라
아 이런 것은 우리가 참 깊이 음미하고 잘 생각하고 또 공부하는 사람들 끼리 많이 토론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 표현도 해 보고 그렇게 할 수록 이해가 깊어지는 거죠.
불교공부는 다른 말로 하면 뭡니까
마음 닦는 공부고 마음 깨닫는 공부고 마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공부다 그렇다면 여기 오늘

마니주摩尼珠 인불식人不識하니
여래장광리如來藏裡에 친수득親收得이라
육반신용六般神用 공불공空不空이요
일과원광一顆圓光 색비색色非色이라

아주 뭐 불교의 핵심을 여기다 네구절에다가 갖다 놨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증도가에서도 뭐라고 할까요. 정말 엑기스에 해당된다고 할까
오늘 설명 여기까지 하고 다시 이제 해석해 보겠습니다.

결정설 표진승決定說表眞僧 결정적인 말씀과 진리를 표하는 승려를
有人不肯任情徵(유인불긍임정징) 어떤 사람이 있어서 긍정하지 아니할 진댄 정에 맡겨서 따져 보아라
直截根源佛所印(직절근원불소인) 근원을 바로 꺾은 것은 깨달은 분이 인가한 바요, 부처님이 인가한 바요.
摘葉尋枝我不能 (적엽심지아불능)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 것은 내가 능하지 못함이로다
摩尼珠人不識(마니주인불식) 마니주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如來藏裡親收得(여래장리친수득)여래의 창고속에 친히 거두어 들였도다
六般神用空不空(육반신용공불공)여섯가지 신통묘용이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고
一顆圓光色非色(일과원광색비색) 한덩어리의 둥근 광명이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6강
證道歌- 제 6강. (淨五眼 得五力~) 2006년 3월 1일

반갑습니다. 오늘 3월 1일 염화실 인터넷방송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증도가 淨五眼得五力(정오안득오력)은 唯證乃知難可測(유증내지난가측)라 고 하는 여기서부터 할 차례지요?
어제 摩尼珠(마니주)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야말로 여의주! 사람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는 여의주가 바로 우리들 마음입니다.
어떤 지혜와 자비도 또 공덕과 행복도, 평화도 자유도 모두가 우리 마음속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여의주에다 비유를 했지요.
그와 같이 소중한 정말 무어라고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그런 그 물건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해서 그것을 제대로 활용을 못합니다.

또 그 공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사용을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 불교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그 여의주가 가지고 있는 그 불가사의한 능력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한껏 활용하는 것! 이것이 불교공부다. 이렇게 정리해도 틀리지 않을 줄 믿습니다.

오늘은 淨五眼得五力(정오안득오력). 다섯 가지 눈을 청정하게 하고, 또 다섯 가지 힘을 갖추는 것은, 唯證乃知難可測(유증내지난가측)라 그랬어요.
우리 불교공부라는 것이, 마음의 공능을 이해하고, 그것을 한껏 우리가 활용해서 쓰면서, 한껏 누리면서 사는 것이, 이것이 불교공부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뭐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여기서는 五眼(오안)을 갖추고 五力(오력)을 얻는 것. 이것을 일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五眼은 금강경에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마는, 肉眼(육안). 天眼(천안). 慧眼(혜안). 佛眼(불안). 法眼(법안). 그러지요.
육안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눈입니다. 사물을 볼 줄 아는 눈이지요. 사물을 보는데 육안이 있어야 됩니다. 육안이 없으면 사물을 못 보지요.
그리고 천안은 뭡니까? 뭐 천안통이라 그래서 六神通(육신통) 중에 하나로 들어가 있기도 하는데, 그 어떤 신통의 입장으로 우리가 그렇게 뭐 초능력적인 그런 입장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멀리 내다보는 눈!

천안이라는 것도 결국은 멀리 내다보는 것이거든요. 거리에 상관없이 또 눈앞에 가려있는 것에 상관없이, 투시해 볼 줄 아는 그런 눈이라고 신통력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 표현을 합니다마는, 여기서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제일 우리들의 그 어떤 일상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혜안이라고 하는데, 혜안은 우리가 어떻습니까?
존재의 실상과 어떤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 보는 눈이 혜안 아니겠어요?
우리 일상생활에 그 사람 혜안이 있다 없다 그런 표현을 잘 쓰잖아요?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지혜의 눈이 있다고 하는 것은, 뭔가 사건과 사물과 또 세상과 인간의 어떤 그 실상과 이런 것에 대해서 그대로 사실대로 볼 줄 아는, 그런 그 꿰뚫어 볼 줄 아는 그런 눈이 지혜의 눈입니다.

정말 그 육안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요. 또 우리가 살아가는데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그런 천안이 있고, 그 다음에 무슨 이치 돌아가는 것. 세상과 사람의 실상을 어떤 꿰뚫어 보는 그런 慧眼(혜안)!
그 다음에 佛眼(불안)이라고 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부처님으로 볼 줄 아는 눈.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 할 거예요. 부처님으로 볼 줄 아는 눈!

역시 뭐 부처의 눈 에는 부처로 보인다. 이런 말이 있듯이, 부처가 되어야 부처로 볼 줄 아는 눈이 있다고 그러는데, 글쎄요. 뭐 정도 따라서 100% 그 어떤 불안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법화경의 사상 이라든지, 대승불교나 선불교의 궁극적인 사상을 자꾸 이론적으로라도, 우리가 듣고 보고 배우고, 그래서 우리가 깊은 사유를 통해서 우리의 사상이 되고 살림살이가 되었을 때, 그것은 곧 사람을 부처님으로 볼 줄 아는 그런 힘이 조금씩은 생길 거예요.
완전하지는 못하겠지요. 완전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생깁니다.

뭐 보통사람들도 “아, 그 사람은 부처님이야. 부처님이야.”이런 표현들을 간혹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부처님으로 볼 줄 아는 눈이란,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요.
그 다음에 法眼(법안)이라고 하는데, 이 법안은 진리를 볼 줄 아는 눈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법은 불교에서는 진리이니까요. 뭐 이 육안이나 천안이나 혜안이나 불안이나 법안이나, 이 진리를 볼 줄 아는 눈 까지도 따지고 보면 다 이렇게 서로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분하면 이렇게 나누어 질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뭐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고 하듯이, 살아가는데 안목이 제일입니다.
소견이 제일 이예요. 그 안목이니 소견이니 하는 것은 견해일수도 있고요. 사상일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생각일수도 있고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제대로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淨五眼(정오안)! 정말 마니주 같은 그런 위대한 구슬을 우리가 다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일차적으로 활용하는 길은, 이 오안을 갖추는 것.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고...

그 다음에 五力(오력)을 얻는다. 하는 것도 이것이, 信力(신력). 進力(진력). 念力(염력). 定力(정력). 慧力(혜력). 이렇게 하는데, 信. 믿음의 힘이다 그러지요.
첫째는 다섯 가지 힘 가운데 믿는 힘! 중요하지요. 그 다음에 믿기만 하면 어떻게 해요? 이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라고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정진하지 아니하면, 내 것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자기가 그것을 실지로 한발 한발 들어서거나, 실천에 옮기는 그런 나아가는 힘이 없다 이거요. 정진의 힘이 없다. 열심히 이제 뭐, 듣고 보고 읽고 지니고, 書寫(서사). 受持(수지). 讀誦(독송). 爲人(위인). 解說(해설). 그리고 思惟(사유)까지 이렇게 곁들여서 한다면 그것이 정진이 아니겠습니까?

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 모두가 이 정진력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염력. 생각할 念(염)자 念力(염력)인데, 이것은 기억한다. 사유한다. 하는 그런 힘입니다. 사유하고 기억하는 능력이지요. 반듯이 갖춰야할 그런 일입니다.

그 다음에 定力(정력)은 禪定(선정)의 힘이지요. 이것이 기억하고 사유하고 정진하고 믿고 하는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어떤 실체화 되어 갈 때, 그것이 세월이 가고 우리의 공부가 쌓이고 이렇게 되면, 뭔가 그것이 실체화 되어가요.

우리 마음에 어떤 안정감을 가져오는, 어떤 선정의 힘이 거기서 생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정력이다. 선정의 힘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선정의 힘이 궁극에 가서는, 말하자면 지혜! 지혜를 낳게 한다. 지혜를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지요.

그 지혜는 부처님이 성취한 그 지혜까지 우리가... 보통 뭐 모든 사람이 다 그 나름의 지혜가 있지요.
있지만 우리의 궁극의 목표는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그 지혜! 모든 깨달으신 분들이 성취하신 그 지혜가 나의 것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표지요.

그래서 五力(오력)은 믿을 信(신)자 신력. 나아갈 進(진)자 진력. 생각 念(염)자 염력. 안정할 定(정)자 정력. 지혜라는 慧(혜)자 혜력.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눈을 청정하게 하고, 다섯 가지 힘을 얻는 것. 청정하게 한다는 것도 결국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지요. 가진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나한테 어느 정도 이렇게 윤곽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실체화 되기 시작 하지요. 오안이나, 오력들이...

뭐 꼭 완벽하게 깨달아야만 물론, 오안이나 오력이 역시 완벽해 지겠습니다마는, 설사 완벽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공부한 만치는 역시 그 나름의 오안과 오력이 있습니다.
멀리 보는 눈도 있고요. 또 지혜의 눈도 있고요. 부처님으로 볼 줄 아는 그런 뭐 어떤 사변에 끝난, 사량분별에 끝나는 그런 부처님으로 보는 눈이라 하더라도, 지혜도 역시 설사 짧은 지혜라 하더라도, 또 성인들의 가르침을 빌려온 그런 지혜라 하더라도, 그 나름의 지혜가 있게 마련입니다. 또 진리를 보는 눈도 있고요.

이 唯證乃知難可測(유증내지난가측)라. 고 하는 것은 오직 증득해야, 깨달아야만 이에 알 일이고, 가히 측량할 수는, 측량하기는 어렵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듣고 사유해서 아는 사람은 아는 것만큼 알지요. 그것을 또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듣고 사유해서, 또 그 나름대로 크게 깨달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아는 것도 상당이 효과적이고, 결국 그런 것을 인연으로 해서 큰 깨달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뭐 잘 아시다시피 육조 혜능 같은 이들은, 나무 팔러 갔다가 우연히 금강경 구절, 한 구절을 딱 듣고는 그만 거기서 생각이 확 바뀌었지요.
인생과 세상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듣고 아는 힘인데, 사람 따라서 듣고 사유하는 것이 그렇게 차이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듣고 사유한다고 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이 일을 그렇게 낮추어 볼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唯證乃知難可測(유증내지난가측). 크게 완벽하게 깨달아야만 비로소 알 수 있고, 그 외에는 측량할 그런 일이 아니다. 이렇게 너무 그렇게 높이 설정을 해놓고, 아무도 이르러 가지 못하는 장소에다가 설정을 해놓고, 이야기하기로 하면 아무도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어요. 서로가 그저 공허할 뿐입니다.
어떤 해설을 보면 너무 높이 설정을 해놨어요. 그 당신은 깨달았느냐 하면 못 깨달았다고 그러거든요.

당신도 못 깨달은 것을, 너무 높이 그렇게 설정 해놓고 그래야만 된다. ~~하면 ~~한다. 이렇게 항상 假定(가정)으로 끝납니다. 그렇게 해서 남의 일로만 우리가,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우리노력으로 쌓은 만치, 우리노력으로 공부한 만치 또 역시 오안과 오력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證(증)자. 오직 증득해야만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증득한 것. 그 나름대로 깨달은 것. 그 나름대로 아는 것도 또한 아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한발 올라가고, 또 높이 있는 것을 또 한 단계쯤 이렇게 가까이 내리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어떤 그 접근할 수 있는 그런 그 방향으로 해석을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저는 평소에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鏡裏看形見不難(경리간형견불난)이요, 水中捉月爭拈得(수중착월쟁염득)가. 이것은 이제 摩尼珠(마니주)의 작용. 여의주의 작용. 작용과 여의주 본체에 대한 어떤 그 설명인데, 그 거울을 우리가 비유를 하자면, 거울 속에 형상을 이렇게 보는데 어떻습니까? 잘 보이지요? 얼굴이 잘 보입니다.
얼굴에 뭐 화장이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또 옷을 입은 옷매무새가 어떤지 아주 정확하게 보고, 뭐 빈틈없이 잘 고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보는 데는 어렵지 않다. 거울에서 형상을 보는 데는 어렵지 않다. 마니주의 그 작용. 그 작용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작용은 활 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어제 그 六般神用空不空(육반신용공불공)이라고 해서, 여섯 가지 신통묘용이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다. 아주 그 활 발발하게 여섯 가지 신통묘용을 이 한 물건이 들어서, 그렇게 작용하고 있다. 그랬어요.
그 작용은 분명히 있습니다. 見不難(견불난)이예요. 그것은 이제 말하자면 거울로 치면 그림자와 같은 것이지요.

그 마니주의 실체는 아닙니다. 실체는 아니면서 그것의, 그 마니주의 작용이지요. 한 물건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그 실체를 우리가 내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예요.
그 水中捉月爭拈得(수중착월쟁염득)가. 물 가운데 있는 달을 건지려고 한들, 어찌 잡을 수 있겠는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텅 빈 것이고, 정말 작용은 잘 합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작용을 해요.
그러나 그 작용하는 것을 우리가 손으로, 이렇게 실체를 어떻게 만지려고 하는 것은 그거는 어려운 일이다.

참 표현이 아주 깊이가 있고, 묘미가 있고, 그러면서 참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말씀이지요.
鏡裏看形見不難(경리간형견불난)이나, 水中捉月爭拈得(수중착월쟁염득)가. 뭐 비유하자면, 이런 식으로 표현도 안합니다.
이것은 뭐 일곱 자 詩(시)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장황한 그런 말을 제대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아주 간결하게 말을 아끼고, 글을 아껴 가면서 표현 했습니다. 물론 신심명은 더 하지요.
신심명은 훨씬 더 그 참, 어떤 말이나 글을 절약 하면서 썼지만, 역시 증도가도 상당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은 참 깊이 우리가 생각해 볼 그런 꺼리가 되고, 읽고 읽고 읽으면서 생각해 보면 거기에서 우러나는 그 맛이요, 무궁무진 합니다.
뭐 요즘 아주 좋은 보이차를 스무 번 서른 번, 우려먹는다고 하지만, 이건 뭐 그에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水中捉月爭拈得(수중착월쟁염득)이라고 하는 이것은, 우리가 작용은 하지만은 그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는, 우리 한마음의 어떤 그 작용과 본체에 대한 설명인데,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많아요.
좋은 시가 하나 있는데, 이게 이제 글쎄요.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통도사 대웅전 주련에 보면 거기는 불상은 모셔 놓지 않았지요. 설사 불상을 모셔 놨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짜 부처는 아니다.

부처님이 실제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이것을 설명하는 그 입장에서 주련을 붙여놓은 것이 있어요.
月磨銀漢轉成圓(월마은한전성원) 素面舒光照大千(소면서광조대천) 連譬山山空着影(연비산산공착영) 孤輪本不落靑天(고륜본불낙청천) 이라고 하는 네 구절인데, 하늘에 아주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기를 정말 그 뛰어난 사람들의 안목이지요! 그 은하수의 밭을 돌고돌고 도느라고 그렇게 갈고갈고 갈아져서, 둥근달이 되었다. 더욱 더 둥근달이 되었다.
그래서 그 흰 얼굴로서 광을, 빛을 펼치는데 그 빛이 삼천대천세계를 환하게 비추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치고 있다.
素面舒光照大千(소면서광조대천)! 그런데 連譬山山空着影(연비산산공착영) 孤輪本不落靑天(고륜본불낙청천)이라.

성성이라고 하는 그 원숭이가 있지요? 팔이 긴 그런 종류의 원숭이입니다. 그것을 오랑우탄이라고 하나요?
보통 그것을 이쪽에서는 성성이라고 그러는데, 그것을 산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뫼 山(산)자를 해서...
그래 성성이라고 하는 원숭이들이 팔을 이렇게 잡고 잡고 연결해 가지고서, 못에 떨어져 있는 그 그림자 달을 건지려고 건지려고 했지만 결국은 건질 수 없었다.
왜냐? 孤輪本不落靑天(고륜본불낙청천)이라. 그 둥근 달은 본래 저 청천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못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그 대로 있고, 그 하늘에 있는 그림자 달이 연못에 그냥 비쳤을 뿐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연못에 비쳤을 뿐인데, 그것을 실체인 냥 건지려고 한다.
그런 옛날이야기가 있지요. 부처님의 오백 아라한 제자들을 두고 한 소리인데, 가섭 불 당시에 그 원숭이가 사람들이 부처님께 뭐 온갖 공양을 올리기에, 그 원숭이는 사람 흉내를 잘 내잖아요.

그 뭐 과일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떡도 올리고, 뭐 밥도 올리고, 돈도 올리고, 그러는데 자기들은 그런 것 보다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특이한 그런 공양꺼리를 준비해서 올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렇게 500마리의 원숭이 들이 의논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들이 늘 보기에, 보름이 되면 연못에 아주 희고 둥근달이 그 못에 이렇게 떠 있는데, 아주 먹음직스럽고,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같이 보이니, 그것을 건져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의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보름이 되어서, 그 위에 나무가 있는데 남무에 올라가 가지고, 그 못에 둥그렇게 비친 흰 달을 건진다고, 500 마리의 원숭이 들이 손을 내리고 또 내리고 또 내리고, 이렇게 해가지고 달을 건지려고 하니까, 어떻겠습니까? 물에 떨어져 있는 달을 건지니까, 물만 출렁거릴 뿐이지요.

그래 달이 또 깨지고, 물은 흔들리고 달은 깨지지요. 그래 한참 있으니까 어떻습니까? 또 물이 잔잔해 지면서, 역시 달이 둥글게 나타나지요. 또 그것을 건지려고 하고, 또 건지려고 하고,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그러다가 그만 그 원숭이 들이 힘이 다해서, 가진 힘이 다해서 모두 다 그 못에 빠져서 죽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공덕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려고 했던 그 공덕으로 모두 태어나 가지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제자가 되기는 했는데, 이 오백나한이라는 이들이 전부 현생에 도둑 이었지요. 처음에는 전부 도둑 이었는데, 그 도적떼. 500명의 도적떼가 어느 날 법문을 듣고는 전부 마음을 한꺼번에 돌이켜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정진을 잘 해 가지고, 500아라한이 되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러면 왜? 도적떼는 되었느냐?

그 도적떼가 된 것은 원숭이로서 항상 남의 과일을 훔쳐 먹는 업이 있어 가지고, 그래서 역시 훔치는 도적이 되었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훔치는 도적이 되었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던져가면서 그 참 부처님께 좋은 공양을 올리려고 했던 그 인연 공덕으로, 모두가 깨달음을 성취하고 아라한이 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쨌든 못에 떨어져 있는 달은 아름답고 멋있지만, 그것은 진짜 달은 아니다.
이 한 물건의 그 작용은 정말 활 발발하고 별별 작용을 다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손으로는 만지고, 발로는 걷고요.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뭐 좋은 일이 있으면 아주 기뻐하고, 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화내고, 그것이 살림살이 인데, 그렇지만 그 한 물건의 실체는 정말 어딘가 숨어 있지요. 어딘가 숨어 있습니다.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한 물건이다. 마음이다. 진여다. 자성이다. 법성이다. 뭐 여래장이다. 또 여의주다. 뭐 별별 그런 그 一法千名(천명)이라고 해서, 한 가지 이치를 가지고 천 가지 이름이나 그렇게 나열 합니다.
뭐 열반이니, 뭐 보리니, 원각이니, 그 뭐 또 선에 와서는 無影樹(무영수)그림자 없는 나무니, 無孔笛(무공적)이니, 뭐 별별 그런 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있지요.

이 문제는 그렇습니다. 우리사람들의 진실한 생명이고, 또 이것을 발견한 불교의 이 이론! 여기에 대한 이론이야 말로 불교의 생명이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정말 이러한 발견을 한 불교! 불교의 진정한 생명은 이 이론이다!
또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참다운 생명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 대승불교나 소승불교나, 또 선불교나 어디 없이 이 문제는 다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鏡裏看形見不難(경리간형견불난)이요, 水中捉月爭拈得(수중착월쟁염득)가. 거울 속에서 형상을, 그 그림자 형상이지요. 그림자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물 가운데에 떨어져 있는 그림자 달을 어찌 실체로 건질 수 있겠는가? 그 말입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고, 한 번 처음부터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淨五眼得五力(정오안득오력)은, 唯證乃知難可測(유증내지난가측)라. 다섯 가지 눈을 청정하게 하고, 다섯 가지 힘을 얻는 것은 오직 증득해야 이에 알고, 측량하기는 어려움이라.

鏡裏看形見不難(경리간형견불난)이요, 水中捉月爭拈得(수중착월쟁염득)가. 거울 속에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아니하나, 물 가운데 달을 잡는 것은,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잡아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7강

常獨行 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窮釋子 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貧則身常被縷褐 道則心藏無價珍無價珍 用無盡 利物應時終不恡

證道歌 제 7강

반갑습니다.
3월 2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상독행常獨行 상독보常獨步하야 달자동유達者同遊열반로涅槃路라 하는 구절부터 공부할 차례입니다.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휴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금요일 본래는 강의를 해야되는데 2월에도 그랬듯이
청림회 강의시간이 우리 염화실 방송강의 시간하고 겹쳐져서 첫 금요일은 늘 그렇습니다. 월 첫 금요일은 청림회 강의 때문에 염화실 강의는 휴강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토요일 일요일 연달아 휴강이네요.
염화실에 나오시는 학생들 3일 연달아 휴강이 돼나서 아주
즐거우시겠습니다 (웃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학생이 되면은 노는 날이 아주 즐겁죠. 일종의 보너스입니다.

상독행常獨行 상독보常獨步하야 달자동유達者同遊 열반로涅槃路라
그랬어요

여기서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걸어다닌다
얼핏 보기에는 뭐 당신과 벗할 사람이 없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는데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 벗 삼을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어떤 사고와 그 생활이 전혀 이 사람과 그 동떨어지죠, 일상생활 뭐 먹고 자는 건 똑같다하더라도 그래도 그 생각하는 바가 영 다르니까 정말 홀로 사는 그런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또 이 대목에서 해석하기를 어떤 세상사와 벗하지 않는다 짝하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많이 해석을 하지요.
홀로 다니고 홀로 걷는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세상사와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뭐 벗이 많죠. 사람도 벗이 많고 세상에 짝할 사람도 짝할 일도 많습니다.짝할 사람도 많고 짝할 일도 많습니다. 관심가는 데 내가 즐거운 데 아직도 미련 몬 끊고 뭐 이것저것 기웃거리고요 또 해보면 즐겁고 많죠 아직은.

더불어서 우리가 어떤 계기에 즐기긴 하더라도 빠지진 말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자세죠.
세상에 처해 살면서 그 어떤 세상사와 또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서 같이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빠질 정도까지는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죠.

여기서는 어떤 속된 일, 또 세상의 일, 또는 번뇌, 뭐 망상, 불필요한 것들 이런 것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는다
상독행 常獨行 상독보常獨步 그런 뜻으로 보면 이게 아주 훨씬 더 멋있죠. 도인이 돼서 함께 도반할 사람이 없다 이런 의미는 좀 협소한 뜻으로 우리가 해석을 하지요
그렇습니다.정말 뛰어나 있다. 세상사에 뛰어나 있고 속된 일과 뛰어나 있다. 그래 달자동유達者同遊 열반로涅槃路라
통달한 사람끼리는 열반의 길에서 동유한다. 같이 노닌다
그랬습니다. 달자동유達者同遊열반로涅槃路라 통달한 사람끼리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닌다
참 멋있죠.

그러니까 영가스님의 관심사는 어떤 속된 일. 세속적인 일, 무가치한 일 이런 데 관심사가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열반의 길, 세속의 길이 아니라 열반의 길, 깨달음의 길, 진리의 길, 이것이 자신의 관심사고 또 그러한 그 어떤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 거기서 노닌다 그랬습니다.
유유상종이라 그러죠.

우리 불자들도 뭐 불자들끼리 아무래도 편하죠. 이야기가 통하고 또 불자라 하더라도 사람들 근기와 인연에 따라서 아주 각양각색입니다. 참 다양하죠.그러니까 뭐 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기도하는 데로 함께하고요 또 어떤 주문이나 무슨 진언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그쪽으로 함께 하고
여기 염화실은 성인의 가르침을 이렇게 가까이 하면서 그 분들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거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모여서 이 시간에 우리가 강의를 하고 강의를 듣습니다.
다 이게 유유상종인데 영가스님도 그럴 것입니다.
달자동유達者同遊 열반로涅槃路라
통달한 사람들끼리 함께 이렇게 노닌다
또 노니는 세계는 앞에서 말했던 어떤 세속적인 것 이런 것과는 다른 어떤 세계에 노닌다. 이렇게 이제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조고신청 調古神淸 풍자고風自高요 모췌골강貌悴骨剛 인불고人不顧 라
그래서 이런 도인의 삶은 그 곡조가 옛스럽고, 아주 전통이 있다 하는 거죠 조고調古라고 하는 것은.
조調는 여기서 곡조曲調라는 말이지만은 아주 뭡니까, 운율이 삶의 운율이죠. 노래 곡조가 아니라 삶의 운율이 아주 옛스럽다 어떤 정신의 운율이죠.

그리고 여기 신청神淸하는 것은 정신은 뭐라고 할까 아주 맑다 이거죠.곡조는 옛스럽고 정신은 맑다 이런 것들은 뭐
정신은 맑다하는 것은 이해 되겠지만은 조고調古 곡조는 옛스럽다. 격조格調라고도 하고 뭐 조격調格이라고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그건 옛스러운 전통이 있는 것이고 정신은 아주 맑고

풍자고風自高그랬어요. 도풍 道風이라고 하겠죠.뭐 법풍法風이란 말도 쓰고, 도풍道風이란 말도 쓰고, 가풍家風이란 말도 씁니다.
그 가풍家風은 스스로 높다. 아주 높은 가풍을 가지고 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영가스님 자신을 이야기하는데 뭐 당당히 깨달은 사람으로서 또 육조스님에게 가서 당당히 인가를 받았구요 이제 거칠 것이 없습니다. 뭐 천불이 출세해서 덤빈다 하더라도 하나도 겁날 것도 없고 아주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모췌골강 貌悴骨剛 인불고人不顧라 그랬습니다.
얼굴은 초췌하고요 뺨은 아주 깡말라 앙상하게 돼서 뭐 얼핏 보기에 영 사람같지 않아서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
모췌골강貌悴骨剛 인불고人不顧라
모貌는 췌悴하고 골骨은 강剛해 그래서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 얼굴은 초췌하고 뼈는 깡말라서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더라.
얼마나 그 깨달음의 문제에 고심했으면 이렇겠습니까. 또
이런 구절을 우리가 읽으면은 부처님 고행상이 떠오르시죠.
부처님 고행상, 정말 힘줄이 다 드러나고요 혈관이라 할까 뼈가 그대로 다 드러나는 피골이 상접한 그 부처님의 열반상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영가스님도 깨달음의 문제에 얼마나 골몰했기에 이런 모습을 하셨을까 이런 것도 우리가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모습 외형적인 그런 어떤 삶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참 형편없지요. 그러나 수행자가 또 도를 통하는 사람이 뭐 그런 데 그렇게 연연하고 그런 걸 문제 삼을 까닭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궁석자 구칭빈窮釋子 口稱貧이나
실시신빈實是身貧도불빈道不貧이라 아주 좋은 말이죠.
이것은 물론 출가 수행한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말씀을 귀에 담고 본받아야 될 그런 이야기입니다.

궁窮한 석자釋子가 말하자면 궁색한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아주 궁색하게 사는 석자釋子, 석자釋子하면은 석가모니의 제자 그 부처님의 제자들 뭐 이런 뜻이죠. 석자釋子 뭐 여기에 사부대중이 다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어요. 꼭 출가수행자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죠. 왜냐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교를 좋아하고 깨달은 그 어떤 경지가 참으로 우리가 수긍이 가고 거기에 소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 그런 어떤 삶의 가치관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힌 사람이라면은 이 범주 속에 안들 까닭이 없죠.

궁색한 부처님의 제자,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은 그 말입니다.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은
실시신빈實是身貧 도불빈道不貧이라.
실은 이 몸이 이 육신이 처하는 어떤 상황들 이것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실시신빈實是身貧 도불빈道不貧 참 이렇게 돼야 되는데

스님들은 석자釋子라고 여기 했듯이 성이 세속에서 쓰던 성을 쓰지 않고 전부 이 석가모니釋迦牟尼 석釋자를 쓰죠
이건 도안법사라고 동진시대 도안법사라고 서기 한 300년경에 계셨던 스님인데 그 스님이 그걸 주장하셨어요. 그래서 그 후로 전부 이 동양권에서는 전부 이제 석무비 뭐 석누구… 이렇게 이제 성을 굳이 쓸라면은 불명 앞에다가 석釋자를 썼습니다. 전부 석씨가 된다는거죠 부처님의 제자니까. 그래 석씨가 된다 그랬는데

아주 웃지 못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전에 청담스님이 그 스님 성이 이씨거든요 이청담 이청담 이제 그랬는데 명함을 이청담이라고 이제 찍어가지고 그때 대만에선가요 불교도 대회가 있었는데 명함을 이청담이라 이렇게 내밀었어요.

근데 모습은 아주 그 스님은 육환장도 짚고 다니시고 또 누구보다도 아주 모범이시고 종정까지 지냈고 총무원장도 두번이나 지내시고 대단한 이론가시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뭐 형색도 항상 가사장삼을 수하고 다니시고 육환장 짚고 다니시구요 거 택시 타고 버스타고 하는데 얼마나 가사장삼이 번거롭습니까 곧곧에 걸리적지고 그리고 육환장이 얼마나 번거롭습니까, 택시에 들어가지도 않구요 그런데도 기어이 형색을 그렇게 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만치 어떤 승행이라고 할까 모양을 중시했던 스님이죠.

그런데 그런 모양을 하고 그 대만불교도대회에 갔었는데 명함을 그렇게 이청담이라고 찍어가지고 내밀어 주니까 모양을 보고 스님들 좌석에 앉히려고 하다가 명함을 보고는 이 안내하는 사람들이 그만 저 밑에 처사들 거사들이 앉는 자리에 앉혔다는 것입니다.
그래 항의를 하니까 이청담 아니냐고 석청담 같으면은 스님들 자리에 앉히지만은 아 이씨를 쓰니까 이건 아직도 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앉혔다 라고 하는 그런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그런 그 일이 있었구요.

그만치 이 동양권에서는 출가한 스님들은 반드시 성을 쓸 때 석씨를 써야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죠.
그 속성을 그렇게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직 속물이 덜 떨어졌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고 어딘지 모르게 하옇든 그 세속을 연연해 하고 좋아하는 그런 그 어떤 마음씨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궁석자窮釋子 구청빈口稱貧
실시신빈實是身貧 도불빈道不貧이라
참 이런 구절은 우리가 부끄럽기도 하고 참 반성할 점도 많고 그런데 요즘은 사실 이 몸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몸은 부자고 도가 부자라야 되는데 도가 오히려 가난하고 반대가 됐죠. 딱.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은 요즘 스님들의 대다수가 실로 몸은 부자고 도는 가난하다 글자를 그렇게 바꿔야 될 그런 상황입니다.

뭐 세상이 부자가 됐죠. 우리 어릴 때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에 막 새마을 운동 일어날려고 할 그 무렵에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그 때 생각하면 지금은 몇 백 배 우리 국가가 부자가 됐고, 따라서 국민이 부자가 됐고, 그러다 보니 따라서 이제 스님들도 이제 저절로 부자가 돼서 수용이 아주 그 넉넉한 그런 상황입니다. 몇 백 배 부자가 됐죠. 아마 우리나라가 그때 60년대초 60년 61년 62년 그 무렵에 비교를 해본다면.

그런데 사람들이 느끼는 어떤 그 삶의 질을 생각해 볼 때는
그렇게 좋아졌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경제적인 풍요는 몇 백 배가 좋아졌습니다. 뭐 수출 같은 것은 통계상으로 보면은 뭐 3000배, 60년대 초에 비교 한다면 뭐 3000배나 그렇게 불어났다 그러죠.
그때 뭐 천만불 수출했다고 뭐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뭐 얼만지도 모를 정도죠. 그런 것들을 우리가 한 번 뭐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현실하고 비교를 하면서

우리가 정말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가, 또 우리가 그 가치있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과연 가치있는가, 그것이 정말 우리 삶에 정말 가치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도 한 번 그 과거 삶과 연관시켜서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은 뭐 부족한 게 좀 있더라도 마음이 넉넉해지실 것이고 다른 문제들이 많이 해소 될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할 줄 알면은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많이 해소가 되리라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스님들도 참 세상이 부자가 되다 보니까 스님들 생활도 부자가 되고 도道가 부자가 되어야 되는데 몸이 부자가 되니 이게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 이제 빈즉신상貧則身常피누갈被縷褐이요 도즉심장道則心藏무가진無價珍이라
그랬습니다. 가난한 입장으로는 몸에 항상 누갈縷褐을 입었고 누갈縷褐은 이제 누더기죠. 누더기를 입었고 도의 입장으로서는 마음에 무가진보無價珍寶를 감추고 있다
참 이래 돼야 되는데 그 반대 현상이 너무 많죠
정말 누더기 속에 도가 있어야 되죠.

또 웃지 못할 일은 그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승복이 전부 광목이었습니다. 나이롱이라고 하는 것이 나오기 전이었거든요. 그래서 광목을 가지고 뭐 사철 다 입었는데 광목옷을 가지고 사철 다 입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한 두 벌, 많아야 세 벌, 가지고 입었는데 잘 떨어지죠, 광목이 참 잘 떨어집니다.
그래서 많이 기워 입었어요. 기워 입고 또 양말도 기워서 신고요. 그래서 양말 아주 두껍게 기워 신기 때문에 아주 신기는 아주 푹신하고 좋죠, 근데 한 번씩 빨아 놓으면 그게 며칠 말라야 다 마를 정도로 그렇게 잘 마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양말을 깁는, 기울 때 뭐 전구 아주 튼튼한 전구가 있으면 그걸 애지중지하면서 가지고 다니면서 양말 기울 때 쓰기도 하구요, 그담에 그보다 더 먼저 생긴 것은 노장스님들이 발 같이 나무를 깎아 가지고 그 가지고 있습니다. 어지간히 이제 알뜰하게 사시는 노장스님들 보면 의례히 그게 있어요. 그래서 목형 발에다가 양말을 씌워 놓고 기워요. 그러면 아주 잘 기워지죠. 그런 것들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용도 해 봤구요.

그러다가 뭐 갑자기 그냥 나이롱이 나오고 그래서 이제 나이롱 옷을 입고 싶어하고 그 나이롱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나이롱 중 나이롱 중 하고 이렇게 놀리기도 하고 그 번쩍번쩍하고 질기고 그게 사실 지금 보면 그렇게 천할 수가 없는데 그게 그렇게 아주 좋게 보이고 부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뭐 잠깐이었죠. 그 나이롱이라고 하는 것이, 나이롱 양말이든지 나이롱 천 이런 것이 잠깐이었는데 그담에 이제 화학섬유가 나와가지고 뭐 모직하고 몇 퍼센트 이렇게 섞이어서 나오는 그런 것들도 있고 이제 그렇게 해서 옷이 잘 안떨어졌죠. 그런 옷을, 광목옷을 입다가 그런 옷을 입으면서 부터 옷이 잘 안떨어졌는데 그 전에 광목옷을 입을 때 떨어진 옷을 입기 시작해서 누더기를 많이 이제 스님들이 어쩔 수 없이 옷이 누더기가 돼서 누더기를 기워 입었는데 그 뒤 시대부터는 그 누더기는 옷이 누더기는 되지 않고 또 누더기는 입고 싶고 그래서 떨어진 옷을 입고 뭔가 구참이라고 하는 그런 자랑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제 옷을 누덕누덕 기워입기도 하고 천을 짤라가지고 공연한 새 천을 짤라가지고 이제 여러 조각을 만들어서 누더기를 만들기도 하고 멀쩡한 옷에다가 그 천들을 주워가지고요 이렇게 누덕누덕 붙이기도 하고 그래 아주 새 옷에다가 그런 그 천조각을 여기저기 붙여가지고 너덜너덜 해서 입고 다니는 그런 것도 상당히 오랜 기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거의 잘 안보이죠.

천 조각을 여러 조각으로 대서 옷을 만든 것은 간혹 보이는데 누더기처럼 그래 만들어서 입고 다니는 옷은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만치 세상이 빨리 변하고 상황이 이제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참 그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새 옷에다가 일부러 천조각을 누덕누덕 기워가지고 입고 다니는 것 참 그 볼썽사납고 참 역겹게 생각이 드는데 또 그게 좋다고 또 입고 다니는 그런 골 빈 사람들이 또 적지가 않았었어요. 뭐 그런 거 저런 거 옛이야기를 우리가 이렇게 굽어보고 한 번 되뇌이면 또 재밌는 추억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빈즉신상貧則身常피누갈被縷褐이요
도즉심장道則心藏무가진無價珍이라
가난한 입장으로는 떨어진 누더기를 입었고 항상,
도의 입장으로서는 마음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그런 보배를 감추고 있다.
삶의 가치관이 이래 돼야 되는 거죠. 정말 자기 어떤 진리에 대한 소신, 불법에 대한 소신이 확고한 사람은 뭐 외양적인 어떤 그 삶에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문제 삼지를 않는데, 보면은 너무 요즘은 참 의식주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는 그런 그 폐단들이 있지요.

뭐 일반인들이야 당연한 것이지만은 명색이 스님이라고 하면서 의식주 문제, 뭐 절을 너무 화려하게 고급스럽게 할려고 한다든지 그걸 뭐 또 자랑스럽게 생각 부끄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든지 이런 그 폐단들 그 참 뭔가 본분을 망각한 그런 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뭐 이런 이야기도 지금 우리 염화실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아무데서나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또 그런, 말도 이젠 맘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무가진無價珍용무진用無盡하니
이물利物응시應時종불린終不恡이라
무가진보無價珍寶 마음의 어떤 그 불법이라고 하는 거 또 진정한 그 인생의 가치, 그게 마음의 문제가 됐든지, 그걸 도 道라고 했든지 그나름대로 저 앞에서 일과원광색비색 一顆圓光色非色이라고 하는 그 어떤 구슬, 한덩어리의 구슬 마니주라고도 하고 그랬죠, 마니주라고 하는 그 구슬에 대한 어떤 그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죠.

그래서 그것을 무가진보無價珍寶라 그렇게 합니다 값으로 매길수 없는 진보珍寶 그런데 그것은 그 사용이 끝날 때가 없어요 무궁무진합니다. 아무리 쓰고 뭐 쓸수록 어쩌면 빛이 더 나는 거죠. 세상의 보배나 재물은 어떻습니까, 쓰면 쓴 만치 줄지요. 다하죠. 그래서 결국은 아무리 많아도 그게 이제 다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그 보배에 대한 이해, 그 보배에 대한 깨달음, 또 그 보배에 대한 어떤 자기만의 아주 확고한 소신 이런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이물응시利物應時 종불린終不恡이라 물物 중생들을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때를 이롭게 한다.
응시應時할 때 응기應機 근기라고 하는 기機자로 된 본도 있어요. 그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닌데 저는 어릴 때 이물응기종불린利物應機終不恡이라 이렇게 이제 외웠었는데 여긴 또 이물응시利物應時 때에 이제 맞춰서 때에 사람들을 맞춰준다. 그래서 마침내 아끼지 않는다.
이물응시利物應時 종불린終不恡
물物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을 말하는 거죠.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때를 맞춰주는 데 있어서 마침내 아끼지 아니한다.

이 마음에 대한 그런 자기 확신과 자기 안목과 자기 깨달음이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명해주고 베풀어주고 한다면 그건 뭐 끝날 날이 있겠습니까. 쓰면 쓸 수록 더 빛나지요. 더 이제 자기 확신이 서는 거고 더 아주 뚜렷이 자기에게로 아마 다가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초발심자경문 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에 있는 말이죠.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 一朝塵이라
저가 이제 출가할 때 이 구절 하나 소개받으면서 출가의 동기가 됐는데, 절에 가서 처음 이제 우리 수행자들이 공부하는 첫 경전이 바로 초발심자경문이죠.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그다음에 자경문自警文 이 세가지가 이제 한데 합해져 있는 그런 그 책인데 그 자경문이라는 책에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 一朝塵이라
초발심자경문 중에서 한구절을 선택하라면 당연 이 구절을 이제 선택을 합니다.
삼일간 마음을 닦은 것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동안 물질을 탐해봐야 그것은 결국 하루 아침의 먼지가 되고 만다.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것이고요.
또 마음의 문제는 무한한 것이고 하기때문에 그렇고.
또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정말 어떤 우리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살면서 당장에 뭐 어떤 세속적인 부를 버릴 수는 없지요.
가지고 살아야 되죠. 당연히 가지고 살아야 되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 그것 말고도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
그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
거기에 대한 그 이해가 깊어질수록 어쩌면 뭐 부도 더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무가진無價珍용무진用無盡이라
이 무가진보無價珍寶는 사용함에 있어서 다함이 없으니
중생을 이롭게 하고 때에 응해주는데 마침내 아끼지 아니함이라 아낌이 없다 시절에 맞춘다는 거죠. 시절에 맞추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아낌이 없다.

삼신사지三身四智체중원體中圓이요
팔해육통八解六通심지인心地印이라
그랬습니다. 삼신사지三身四智는 체중원 體中圓이요
삼신三身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神이라고 그러죠 법신 보신 화신. 이것은 뭐 부처님에게 모두 세 가지 몸이 있으니 해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神이다 이렇게 하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도 다 법신 法身 보신 報身 화신 化神이 있습니다. 그게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 보신 화신과 차이가 있겠죠.

뭐 차이가 없는 것은 법신法身입니다마는 마음자리입니다만은 보신報身이라는 것은 그 영향력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법신자리, 마음의 근본자리는 차이가 없는데 보신報身 과보의 몸 이러죠. 그건 이제 덕화이기도 하고 영향력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얼마나 유루복有漏福이라도 많이 짓고 살았느냐 온갖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면서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전혀 이제 다릅니다.

그래 비유를 할 때 그래요, 달이 이제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똑같은데 그건 이제 모든 사람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어떤 경우의 사람도 똑같은 것이고 그다음에 달이 하늘에 있긴 있지만은 구름에 가려 버리면은 그게 이제 안 비치죠 전혀 빛이 안나죠.
그리고 또 초승달은 설사 구름이 없다 하더라도 그 빛이 미미합니다. 그런데 보름달은 환-하죠. 그와 같이 같은 달인데도, 달, 원달은 변함이 없지만은 세상에 빛을 비치는 데는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죠. 그게 이제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그래 사람이 똑같은 사람인 입장도 있지만은 그 똑같은 데서 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그런 입장도 반드시 있다는 거지요.
사람들이 이웃에 끼치는 영향, 가족에 미치는 영향, 사회에 끼치는 영향 그것도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거 많이 다릅니다.

그 다음에 이제 화신化神인데요 삼신三神중에 화신化神은 이건 이제 역할이죠. 예를 들어서 뭐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학교에서는 선생님이구요 집에 오면은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또 친구들에게는 친구가 되고 또 손자에게는 할아버지가 되고 또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되고, 이게 이제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다른 역할들입니다. 그걸 이제 천강유수千江有水 천강월千江月이라 그걸 이제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강마다 물이 있고 그 물에는 달그림자가, 그림자 달이 비친다 그와 같다는 거죠.

그래서 대개 요즘사람들은 역할이 열 가지 이상은 됩니다. 아무리 뭐 조그맣게 아주 미미하게 살아도 열가지 이상의 역할은 다 하면서 삽니다. 그게 이제 화신化神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체體 가운데 원만히 갖추었다
그랬어요.

체體는 이제 음 그 도인스님들 따라서 또 경전따라서 그 표현하는 것이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영가스님은 체體자를 잘 써요 체體. 요건 이제 근본 根本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성自性이라고 진여眞如 법신法身 뭐 이렇게 할 수가 있는데 이 영가스님은 보면은 이 체體자를 그렇게 잘 써요. 이 증도가 안에서 일곱 번인가 그렇게 나옵니다.
그 임제스님 같은 경우는 사람 인人자를 잘 썼고요.
육조스님 같은 이들은 육조단경에서 성품 성性자를 또 잘 씁니다. 또 어떤 데는 이제 뭐 마음 심心자를 잘 쓰는 마조스님이라든지 기타 스님들은 마음 심心자를 잘 쓰는 경우도 있고. 같은 뜻입니다.

마음가운데 원만하다 이래도 삼신이 법보가 삼신이 내 마음 가운데 원만히 갖췄다. 이렇게 해도 하나도 틀리지 않죠.
그러나 이제 영가스님은 마음 심心자나 사람 인人자나 이런 말을 쓰지 않고 체體자 몸 체體자를 즐겨 쓰신다는 거 이것도 우리가 눈여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지四智 라는 것이 이제 네 가지 지혜인데요.
우리들 마음이 이렇게 성인의 가르침을 자꾸 이제 공부해 가고 또 사유하고 그래서 어느날 또 큰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하다 보면은 뭐 네 가지 지혜가 이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 그릇만치 다 네가지 지혜가 있어요. 설사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완전하지 못한 대로 네가지 지혜가 있고 완전하면 완전한 대로 네가지 지혜가 있고. 깨달음의 그런 그 상태는 사람마다 아주 천차만별일 수가 또 있습니다.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는데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그런 지혜다, 그다음에 평등성지平等性智다.
대원경大圓鏡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누구든지 다 가면 다 아주 그 완전한 그런 그 어떤 그 마음의 지혜 이런 입장에서 대원경大圓鏡이라고 그렇게 했고 그것이 이제 누구에게나 다 평등하다. 또 누구든지 다 비출수 있다. 어떤 사물이든지 다 비출수 있다 그래서 평등성지平等性智다,
우리 마음을 지혜의 입장으로 볼 때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해서 세분화해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묘관찰지妙觀察智 지혜는 어떻습니까 아주 관찰을 잘 하죠. 아주 잘 살핍니다. 잘 살필 줄 아는 게 지혜의 아주 특징이기도 합니다.
또 평등한 그런 그 속성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지요. 그다음
성소작지成所作智라고 하는 게 있는데 하고자 하는 것을 전부 성취하는 지혜 소작을 이루는 지혜 지을 바를 다 이루는 지혜다 그게 이제 성소작지成所作智 네가지 지혜입니다.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이게 우리들이 평소에는 지혜, 지혜 이렇게 이제 뭉뚱그려서 하고 마는데 그것을 세분화해서 이야기 하면은 대원경지大圓鏡智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이 환하게 비추고 그것은 어떤 평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잘 살핀다 뭐 머리칼 하나도 빠뜨리고 비추는 게 아니죠 그게 묘관찰지妙觀察智, 그리고 이 지혜는 무엇이든지 다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성취시킬수 있다 이게 이제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겠습니다.

이런 것도 역시 체중원體中圓이다 체중원 體中圓.본체 가운데 다 있다.근본속에 다 있다.마음속에 다 있다 사람속에 다 있다 자성속에 다 있다 진여속에 다있다 다 갖췄다. 다 해당됩니다. 체중원體中圓이라는 말이

팔해육통八解六通심지인心地印이라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 이것도 마음 땅의 도장이다. 역시 이제 체體자를 같이 쓸 수가 없어서 같이 써도 좋아요. 그런데 이제 같이 쓰면 글로서 이제 좀 모양이 그렇죠.
그래서 여기는 마음 심心자를 공통적으로 잘 쓰는 마음 심 心자를 썼습니다. 마음 가운데 도장이다.
팔해탈 八解脫육신통六神通
팔해탈八解脫은 뭐 해탈 우리가 언필칭 해탈하면 그걸로 끝이죠 그래서 이제 해탈을 길게 설명하지를 않습니다
설명해봤자 삶과 죽음으로부터의 해탈解脫
뭐든 하나씩 하나씩 해탈해 가다가 궁극에 가서는 삶과 죽음으로 부터의 그 해탈을 이뤄야 그게 진정한 해탈이다. 근데 그걸 이제 또 세분화해서 여덟가지 해탈을 이제 이야기를 하죠.
여덟가지 해탈은
먼저 어떤 대상을 오로지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우리가
개인의 감정을 제거한다. 그것도 하나의 해탈이고요.
또 나아가서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것
그것도 다른 것으로 부터 다 이제 해탈이 되는 거니까.
다시 또 외경으로부터 마음을 분리한다.
그다음에 몸과 마음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 이 단계에서 이제 주로 무한한 공간을 생각해 가지고
외계의 차별상을 또 없애고
또 그 마음의 작용과 몸이 무한한 경계에 도달한다.
또 그 더 넓은 공간이나 마음의 경계를 이제 초월한 근원자리에 이른다.
또 그 근원이 항상 현실 위에 나타나게 되는 그런 그 경지
뭐 팔해탈을 그렇게 세분해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뭐 그거 그 세분화 한 데 대해서 크게 우리가 마음 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해탈解脫 그것도 우리 마음 가운데 다 이미 있는 것이다

육신통六神通은 이제 잘 아시는 대로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또 뭐 타심통他心通 누진통漏盡通 신족통神足通 이런 것들을 이제 육신통이라 그러죠.
그것도 역시 우리 마음속에 다 있는 것이고
체중원 體中圓이나 심지인心地印 이나 다 같은 의미로 우리 마음속에 다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8강
證道歌 永嘉 玄覺 大師

[如天 無比 큰스님 입력]

君不見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證實相 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頓覺了 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無罪福 無損益 寂滅性中莫問覓 比來塵鏡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誰無念 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放四大 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決定說 表眞僧 有人不肯任情徵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
摩尼珠 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淨五眼 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鏡裡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常獨行 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窮釋子 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貧則身常被縷褐 道則心藏無價珍 無價珍 用無盡 利物應時終不恡 三身四智體中圓 八解六通心地印
上士一決一切了 中下多聞多不信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從他謗 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我聞恰似飮甘露 銷融頓入不思議

證道歌 제 8강

반갑습니다.
오늘 3월 7일 음력으로는 2월 8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매달 8일은 음력 8일은 이제 약사재일이고요
오늘은 2월 8일로 치면은 부처님 출가일입니다.
그래서 각 사찰에서 아마 출가일 행사를 여법하게들 하셨을 줄 믿습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의 그 4대 기념일이라 이런 말을 쓰는데
첫째 이제 잘 아시는 사월 초파일, 부처님 탄생일이 첫 기념일이고 그다음 이제 탄생하셔서 2월 8일
2월 8일이 이제 출가일인데 바로 그것이 오늘이죠.

이 출가일은 사실은 불교의 출발이 부처님의 출가에서 부터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출가를 하지 않으셨으면 불교가 출발 할 수가 없었고 불교가 탄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부처님의 출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은 상당히 의미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또 머지않아서 이제 2월 15일은 열반일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출가에서 열반까지』
이렇게 이제 타이틀을 붙여가지고 성대하게
법회를 하는 곳도 있고 또 특별히 기도를 올리는 그런
사찰도 있고 그렇습니다.
상당히 뭔가 불교적인
순수한 불교적인 행사를 하기가 아주 좋은 그런 날이죠.
물론 그 가운데 부처님 생애를 통해서 보면은
그 가운데 12월 8일이라고 하는 것이 또 이제 성도재일이 있습니다만은 그것은 이제 12월 8일이구요.
순서상으로 보면은 탄생 출가 성도 열반 이렇게 이제 순서가 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날짜가 2월 8일과 2월 15일
이렇게 이제 모두 일주일 아주 법회하기 좋고
기도하기 좋고 용맹정진하기 좋은
계절도 아주 초봄이 돼서요 크게 춥지도 않은 그런 날이라서 이것을 잘 활용을 해서 행사를 잘 치루면은
참 좋은 불교 행사가 될 줄 압니다.

물론 뭐 동지라든지 그 다음에 백중이라든지 기타 다른
그런 그 뭐 또 심지어 삼월 삼짓, 입춘, 정초 이런 것들은 사실 알고 보면 순수한 불교적인 기념일은 아니죠.
그러나 이제 이쪽 우리나라에 와서 불교가 우리 나라의 어떤 풍습과 이렇게 서로 영합을 하면서 그런 풍습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잘 교화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그런 그 방편으로
그런 날짜를 또 불교에서 잘 사용하고 있죠.
그런 점에선 뭐 또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출가에서 열반까지의 이 기간을 우리가 좋은 기도일로 정해서 한다든지 아니면 뭐 특별한 경전 살림을 하는 그런 기간으로 정해서 한다든지 하면은 이건 정말 아주 순수한 불교행사가 되고 또 부처님을 한번 다시 정말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그 소재가 아주 충분하리라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출가는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이 처음에 마음먹은 그 일이 있어서 출가를 하려고 했지만은 부왕의 만류도 있었고 여러가지 국가적인 상황이 그러해서 그 뭐 남에게 알리고 그렇게 출가하진 않았습니다.
한 밤에 성을 넘어서 그 마부 차익이란 사람만 데리고 말 한마리를 탄 채 그렇게 이제 출가를 했죠.
그리고 나서 이제 부왕이, 출가한 줄을 알고 다섯 명의 그
시중들 사람들을 보내서 함께 수행하도록 하라, 지켜주기도 하고 보호도 하고 하면서 함께 수행하도록 하라 해서
그 사람들이 뒤에 다시 뒤따라서 출가를 해서 그들이 이제 결국 오비구五比丘가 최초의 오비구가 되고 한 그런 연유입니다.

음 어느 부모, 어느 가족이 자식의 출가를 찬성하거나 그럴 경우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래서 대개 출가한 사람들은 보면은 출가할 때 부처님이 그랬듯이 뭐 쉬운 표현으로 도망 나오지요.
몰래 집안 사람 아무도 모르게 이제 도망 나오는 것이 대개 전례로 되어 있습니다. 뭐 부처님이 그랬고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의지는 확고하고 주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주니까 만류를 하고요. 그래 되면은 어쩔 수 없이 뭐 조금 모양새는 그렇지만은 그래도 그렇게 이제 대개 출가를 합니다.

이 출가는 부처님께서 이제 출가를 하셔가지고
불교가 출가 단체로부터
출가한 사람에 의해서 다시 또 출가한 단체가 형성이 되죠.
그게 이제 오비구 다 모두 출가한 사람들이죠.
그러면서 이제 여섯째 비구가 야사죠. 그런데 여섯 째 비구 야사의 부모가 야사를 찾으러 부처님에게 왔다가 찾아가진 못하고 부처님의 그 덕화에 감화가 돼서 그들이 부처님 앞에 서원을 세웁니다.

우리는 재가 불자로서 신명을 다 바쳐 부처님을 보호하고
또 승단을, 출가 승단을 보호하는 그런 그 재가 신자로서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면서 살겠습니다. 하는 그런 이제 서원을 세우게 되죠.
그러면서 이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생기게 됩니다. 재가 신자가 이제 생기게 되죠.

처음에 부처님, 교주인 부처님이 출가를 했고 또 그 첫 단체인 오비구가 출가를 한 사람들 중심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불교에서 출가라고 하는 거 참 무시 못하죠.
아무리 대중불교, 대승불교라고 하지만 출가에 대해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보면은 출가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아요. 또 법문이 순수출가한 사람들을 위한 그런 법문도 많고 그런 글도 많습니다. 보면 뭐 아주 엄격하죠.

강원에서 치문반이라고 하는 반이 있는데 그건 오로지 치문 책 한 권을 일년 동안 공부 하는데 그 치문은 거의 출가한 초기 사람들을 경책하고 어떤 그 행동거지를 익히고 또 어떤 가치관이라든지 수행자로서의 정신을 함양시키는 그런 내용들이 많이 이제 실려 있죠.
그래서 다른 표현으로 하면은 순전히 잔소리만 잔뜩 담겨있다. 뭐 이렇게 하면 좋은 일이고 저렇게 하면 안되고 뭐 이런 이야기들이 있죠. 그런데 그걸 보면 참 별별 이야기가 많습니다. 옛날 스님들이라서 읽어보면 뭐 숨이 막힐 듯한 그런 그 말씀도 많죠. 요즘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데 유명한 발심수행장이라고 원효스님의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은
이심중애離心中愛를 시명사문是名沙門이요
불연세속不戀世俗을 시명출가是名出家라
아주 참 유명한 말씀이 있죠. 마음 가운데 애착 떠나면 그것이 사문이다. 출가사문이다 이거죠.
수행자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꼭 집을 나와야만 그렇게 사문이고 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마음 가운데 속된 어떤 애착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수행하는 사문이다.
그리고 불연세속不戀世俗을 시명출가是名出家라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름 하여서 출가라고 한 다.
몸은 출가 해 있으면서도 세속을 그리고 세속적인 것을 그리고 그러면 그건 인제 출가가 아니라는 거죠.

출가해서도 세속을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 불교 안에도 보면은 그게 세속적인 건지 출가인의 일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취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뭐 글씨를 쓴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그것만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어요. 뭐 차를 한다든지 이런 것 뭐 도자기를 한다든지 이런 거 전부 속된 일이고 세속 일이지 그걸 업으로 삼아서는 출가인으로서는 아니죠.
그런 것을 출가인의 당당하고 떳떳한 일로 생각한다면은 그건 뭔가 참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원효스님의 지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세속적인 일에 연연해 한다면 그것은 출가인이 아니다.
그랬습니다.

그외 뭐 치문이라고 하는 책에는 그대가 이미 출가 하였으니 뭐 어쩌구 아주 뭐 엄격한 가르침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들의 현실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아주 참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닮아야 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부처님과 조사의 삶을 그대로 닮아야 그게 이제
출가라고 한다. 이런 그 말씀도 있어요.
오늘 증도가 들어가기 전에 출가일에 대해서 조금 언급을 드렸습니다.

오늘 증도가는
상사일결上士一決일체요一切了하고
중하다문中下多聞다불신多不信이라
그랬습니다.

우리 불교에서 이제 근기根機라는 말을 잘 쓰는데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
크게 나눠서 그렇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여기에 영가스님 말씀도 상사上士라고 하는 것은 상근기라는 그런 의미죠.
윗 선비, 상근기라고 하는 말보다는 선비 사士자를 써서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 아주 좋은 표현이죠.

상근기上根機는 한번 해결함에 일체一切를 다 마친다. 그말이예요.한 번 결단함에 또는 한 번 해결함에 일체를 다 마치고
삼신사지三身四智 또는 팔해육통八解六通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 바로 앞에 있었던 그런 내용들 그게 이제 우리 마음 가운데 체중원體中圓이고 심지인心地印이라고 했잖습니까
법보와 삼신三身과 또 네가지 지혜가 우리 신체 가운데 우리 본체 가운데 원만히 다 구족돼 있고 또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이라는 것도 우리 마음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 그것을 한번에 다 터득하는 것 이건 이제 상근기上根機라는 거죠.
그다음에 중근기中根機나 하근기下根機는 다문다불신多聞不信이라그랬습니다.
많이 듣고 해도 많이 믿지를 않는다. 글자대로는 그렇죠. 많이 들어도 들은 만치 다 믿지를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 장자, 노자인가요 보면은
상사문도上士聞道에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상사가 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중사문도中士聞道에 중근기가 이제 도를 들으면은
약존약망若存若亡이라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불교의 이야기를 듣고도 들은 대로 그대로 열심히 행할 줄 아는 사람은 그거는 상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학식이 많다 뭐 어떻다 그런 건 불교에서는 하등의 관계가 안되는 거죠.
이런 그 이치를 듣고, 그 이치가 그냥 수긍이 가고 마음이 끌려서 열심히 행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은 상근기고
중근기 하근기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이제 머뭇거려지는 사람은 이제 중근기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사문도下士聞道에는 대소지 大笑之라
하근기가 들으면은 크게 비웃는다. 이제 그런 말을 했어요.
노자 도덕경에 있는 말인데
하근기下根機가 불소不笑면 불소不笑면 부족이위도不足以爲道니라. 하근기가 비웃지 아니할 것 같으면 족히 도가 되지 않는다. 하근기에게 까지도 그렇게 도가 이해되기를 바랄 거는 아니라는 거죠. 또 그렇게 이해 될 수도 없는 것이고
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이제
본래 우리 마음 가운데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지만은 그것을 중하근기들은 잘 믿지를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불교 공부를 해서 또는 불교를 믿어서 뭐 성불을 한다, 견성을 한다, 해탈을 한다, 열반을 증득한다 등등 여러가지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것을 영가스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 불교 수행, 불교공부란
단자회중但自懷中에 해구의解垢衣라 그랬어요.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 있는 때 묻은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구의垢衣 때묻은 옷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이나 번뇌나 이런 걸 말하는 것이고 또 무명이니 번뇌니 하는 것이 뭔가 그야말로 옷에 때가 묻어 있듯이 그렇게 묻은 것은 사실은 아닙니다. 편의상 표현하자니 그렇지
이건 어떤 미망이고 착각이예요. 미망과 착각을 무명이라고 하고 번뇌라고 합니다.
번뇌가 어떤 덩어리가 이렇게 지어서 있거나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뭐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려서 닦아내야 할 그런 것으로 있는 게 아니예요. 우리가 그런 이치를 잘 모르는 것, 그것이 무명이고 번뇌입니다.
절대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번뇌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게 아니예요.

그러기 때문에 비유컨대는 수억만 년의 어둠이 있는 그 어떤 동굴이 있다고 칩시다. 누구도 한 번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동굴은 수억만년의 세월동안 어두웠죠. 그런데 거기다 전기를 가설해가지고 한순간에 스위치를 올리면은 순간에 그 어둠이 다 사라집니다.
수억만년의 세월 동안 어두웠다고 해서 그 어둠이 천천히 뭐 한 시간이 걸리거나 열흘이 걸리거나 그렇게 시간을 요하지 않습니다. 밝아지는데요.
왜그런가 어둠이라는게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무명이니 번뇌니 하는 것도 역시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절대 이거 뭐 갈고 닦고 손질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하나 없어지는 그런 것이 무명이 결코 아니예요.

그래서 육조스님하고 신수스님하고의 그런 어떤 견해 차이 때문에 결국은 신수스님이 정통 법맥을 잇지 못하고 북방에서 그렇게 크게 당대 이외에는 크게 빛을 못 본 이유가 거기 있지 않습니까 그 뭐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하여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라
때때로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때가 끼지 않게 하여라.
그러니까 무명과 번뇌가 뭐 때처럼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자꾸 끼고 하는 것으로 그렇게 착각한 것이죠.
육조스님은 깨닫고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거지.
하초야진애何處惹塵埃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한물건도 없는 그 자리에 무슨 때가 끼겠느냐 이거예요.

한물건도 없다고 하는 것은 무명 번뇌도 한 물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야 되요. 이런 문제를 뭐
번뇌다 무명이다 때묻은 옷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얼른 머리에 떠올리기를 그런 것이 실재하는 냥으로 그렇게 떠올리는 거 이게 참 큰 착각이거든요.
바로 이런 그 착각이 말하자면 번뇌라면 번뇌고 무명이라면 무명인 것입니다.그래 그것만 없으면은 그대로 깨달음이지요.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가
어쨌든 그것을 뭐 때묻은 옷을 벗어버리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의 일이야.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자기의 공부를 자랑하겠는가
정진을 자랑하겠는가 그 정진 자랑할 일이 아니죠.
예를 들어서 꽃이 피면 봄이 와 있는 거죠. 굳이 뭐 봄봄 할거 뭐 있습니까. 이미 봄은 와 있는데. 내가 봄이다 봄 왔으면 내가 봄이다 하고 뭐 봄이 자랑하는 거 봤습니까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가
참 아주 좋은 말이죠. 우리가 이 자기가 뭐 잘하는 일 이런 것들 뭐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을 잘 다스리고 잘 관리하고 살림을 잘 살면요, 그 뭐 가족들 있는데 굳이 자랑 안해도 저절로 느끼게 돼 있어요.
그걸 자랑을, 쫌 했다고 자랑자랑 해싸으면 그건 인제 못봐주죠. 그걸 소위 불교에서는 상相낸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의 입장 또 깨달음의 입장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송곳을 주머니에 넣어 놓으면 어떻습니까.
저절로 그 뾰족한 끝이 밖을 밀고 나오죠. 그 주머니에 송곳 들어있는 줄다 알아요 나중엔.
그와 같이 우리 공부가 이제 그렇습니다.

웃지 못 할 이야기인데 어떤 토굴에 사는 스님이 평소에 이렇게 늘 게으르다가 저 밑에 이제 산어귀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은 얼른 방에 들어가서 정진하는 모습을 따악 취하고 마당에 가까이 와서도 모른 처억 하고 앉아있다하는 그런 소리 우리 지대방에서 많이 듣는데 참 뭐 사람의 근기가 여러가지다 보니까 그런 재밌는 일도 있습니다.

단자회중但自懷中에 해구의解垢衣언정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 때묻은 옷을 벗어 버릴지언정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자기의 정진을 자랑하겠는가
이런 말씀 속에는 사실 그 영가스님의 어떤 개인사정, 그 아주 세세한 그런 그 문제들이 사실은 많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천태종 계통에서 천태지관을 많이 익히고 또 워낙 뛰어나신 분이라서 천태종에서 법을 계승해서 크게 천태종을 일으킬 그런 인물로 손꼽혔는데 결국은 선종의 어떤 그 육조스님의 법을 잇고 선종사람이 이제 됐는데 그러다보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많은 공격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걸 뭐 굳이 당신이 깨달음에 대해서 자랑한다고 그 이해될 일도 아니고 또 자랑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자랑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다음 밑에 글이 이제

종타방從他謗 임타비任他非하라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로다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이 비방하는데 맡겨두고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데 그르다고 하는 데 맡겨두어라.
그러니까 깨달음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다만 눈에 보이는 천태종 쪽에 있다가 선종으로 갔다라고 하는 그 표면적인 것만 가지고 얼마나 비방이 많았겠습니까. 뭐 시시한 사람같았으면 비방도 따르지 않죠. 워낙 뛰어나신 분이니까 그렇게 비방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비방들을 이겨내느라고 참 그 눈물겨운 그런 그 어떤 고비가 있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은 영가스님은 어머님을 모시고 계셨구요 또 누님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절에 제대로 떳떳하게 살진 못하고 큰 절 옆에서 이렇게 겨우겨우 토굴 비슷한 데서 그렇게 아마 살았던 거 같애요.

그러니까 이 영가스님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는데 천태종에서 선종으로 왔지, 선종을 좋아했지 그래 결국은 선종으로 와 버렸죠. 그리고 또 어머님을 모시고 있고 누님을 모시고 있어노니까 아 그 참 여러가지 출가한 승단에서는 그런 일들이 아주 좋게 볼수도 있어요 사실은 좋게 볼 수도 있지만은 누군들 뭐 부모 없으냐 왜 출가한 사람들끼리 모여사는데 저 혼자만 효자라고 부모를 모시고 그렇게 절에서 살면은 어떻허느냐 그 비난을 충분히 받을만 해요.
그래서 사찰에서는 보면은 아직 세속적인 그런 인연 물론 불가피한 인연이고 마지못한 그런 인연이고 부모라고 하는 인연은 지중한 인연이지만은 그 인연을 끊지 못하고 이렇게 아직도 사찰에서 그렇게 모시고 있다고 하면 이건 충분히 비난 받을 일이 됩니다.
스승인 육조스님이 어떻습니까. 혼자 나무 팔아서 노모를 모시고 있다가 그 노모를 집에다 그냥 두고 혼자 출가했잖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그랬거든요. 사실 육조스님도 노모를 모시고 절에 와서 살아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습니까 출가단체라고 하는 것은 출가인들의 엄격한 규칙이 있고, 어떤 그 출가인들만이 사는 그런 풍토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 풍토에 안맞거든요. 그래서 이제 수많은 비난을 철없는 사람들의 비난이겠죠만은 그런 그 수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런 문제를 정말 스스로 소화해 내느라고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는 거 같애요. 안 그러면은 이런 이야기 그렇게 길게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몇 구절이 이제 그 문제예요.
남이 비방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은 이렇게 이렇게 소화했노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영가스님 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우가 다르고 정도의 차이가 물론 있죠만은 다 겪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는 것이 불교적인 입장이고 그것이 가장 현명하게 수용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이런 데서 우리가 한 번 눈여겨 둘 필요가 있어요.
여기에 이제

종타방從他謗 임타비任他非
저 사람이 비방하는 데 맡겨두고 저사람이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하는데 비非자는 그르다 하는 뜻이죠 방謗자는 비방할 방謗자는 그르든 옳든간에 무조건 비방하는 것이고 비非자는 그르다는 뜻입니다. 아닐 비非자 틀릴 비非자니까요. 그르다고 하는데 맡겨둬라 그 사람이야 그렇게 하든지 말든지.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로다
그래봤자 그사람이 나를 비방하고 욕을 하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을 들고 하늘을 태우는 것이다. 한갓 스스로만 피로할 뿐이다
그랬습니다. 횃불을 들고 하늘 태우려고 아무리 해봐야 하늘이 탑니까 어데.
그렇게 표현했어요. 아주 멋진 표현이죠.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라 자기 자신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은 그동안 깨닫기 이전부터 비방을 들어왔을 테니까 지금 깨닫고 나서 상황을 보니 사실 이렇게 자기 자신은 마음에 걸릴 것이 없다라고 했지만은 얼마나 곤욕을 치뤘기에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부처님도 참 비방을 많이 들은 분이예요. 우리는 뭐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 아주 위대한 성자라서 하등의 뭐 남으로부터 욕들을 분이 아니고 비방 들을 분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주 비방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외도가 와서 그당시 인도의 어떤 종교적인 성자들이 참 많았거든요. 그런데 뭐 갑자기 어떤 젊은 성자가 턱 나타나서 대개 인도의 성자라면 뭐 60 70 80 이렇게 돼야 이제 큰소리치는 성자인데 아 부처님의 35세에 성도를 하셔가지고 35세 때부터 성자로 그렇게 추앙을 받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새파란 젊은 사람들이 어디서 떡 이렇게 깨달음을 이뤘다 해가지고는 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리구요 다른 종교를 믿다가도 글로 오고 그럼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기 제자들을 다 빼앗기고 자기 신도들을 다 빼앗겼으니 그거 가만있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 와가지고 그냥 삿대질을 하고 욕을 퍼붓고 별별 해꼬지를 하는 상황을 많이 겪었습니다.부처님도. 일일이 기록할 가치가 없어서 기록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래 부처님도 그런 말을 했어요.

자기를 향해서 비방하는 것은
바람을 향해서 흙먼지를 뿌리는 거와 같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서 흙먼지를 뿌리면은 뿌리는 사람쪽으로 당연히 다 돌아오죠 흙먼지가.
아주 부처님 다운 현명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전에 보면 피를 물고 상대방에게 뿌리는 거와 같다 그랬어요. 아주 섬찟하지요.
피를 물고 상대방을 향해서 뿌린다고 하는 것은
악담을 하고 비방을 하고 남을 욕하고 하는 것을 흙먼지에다가 비유를 했다가 아주 심한 경우는 부처님도 피라고 까지 입에다 피를 무는 일이다 이렇게 아주 섬찟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피를 물고 상대를 향해 뿌렸지마는 그 피가 상대 옷에 튈 수도 있고 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리가 멀면 전혀 관계가 없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피를 문 사람 그사람의 입에는 이미 피가 한입 가득하다는 사실을요 그걸 부처님께서 일깨워주시는 거예요.
모든 비난하는 사람, 남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악담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있죠.
어떤 외도가 와가지고 그러니까
자기 제자들을 많이 빼앗긴 사람이죠. 그리고 또 명성이 자꾸 높아지고 하니까 타종교의 지도자가 와가지고는 사정없이 욕을 하고 악담을 하고 그럽니다.
그걸 다 듣고는 이제
말씀다하셨습니까 하고 마지막에 묻지요
그래 말다했다고 하니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떤 집에 방문을 했는데 그 집에서 좋은 음식을 많이 차려내왔다. 손님대접을 위해서, 그런데 그 손님은 마침 식사를 하고 왔기 때문에 그 집에서 차려놓은 음식을 하나도 들 수가 없었다. 그랬을 경우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겠는가 그러니까 이 외도가 뭣도 모르고
아 그거야 음식차려놓은 사람것이지 누구 것은 무슨 누구겠느냐고 이렇게 이제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는 것이죠.

그래 당신은 나에게 훌륭한 음식을 차리듯이 아주 온갖 비방과 악담을 했는데 나는 그것이 하나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가 않았어. 그러니까 그 모든 비방과 악담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는 참 역시 이제 아주 점잖으신 표현과 아주 현명한 그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부처님은

여기는 이제
파화소천把火燒天도자피徒自疲라
그랬어요. 불을 잡아서 하늘을 태우는 것이라 그일은 결국 스스로 피로할 뿐이다.

아문흡사我聞恰似 음감로飮甘露하야
소융돈입銷融頓入부사의不思議로다그랬습니다.
나는 흡사 그 욕설과 비방의 말씀이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다.
소융돈입銷融頓入부사의不思議로다
그 비방과 욕설이 녹고 녹아서 불가사의한 어떤 해탈의 경계에 녹아들어간다.
이건 뭐 살다 보면은 참 그렇죠. 남이 비방을 하고 나에 대해서 음해를 하고 욕설을 하고 괜히 시기질투하고 그런 것 다 압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평소에는 참 섭섭하고 못마땅하고 속도 상하고 그런데 한생각 돌이켜 보면요

저것이야말로 진짜로 나에게 덕이 되는 일이구나
내 수행과 내 어떤 그 마음의 폭을 저런 일을 통해서 얼마든지 내가 마음의 폭을 넓히고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계기가 되는구나 전부 내한테 뭐 잘한다 잘한다 하고 그저 고분고분 하고 전부 칭찬만 하고 이런다면 그 사람에게 무슨 수행이 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주 우리가 꼭 필요한 생각인데요.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잘 하는 것 그거 꼭 좋은 건 아니예요.

뭐 충언忠言은 역이逆耳나 이어행利於行이라고
충성스러운 말 아주 충고의 말은 귀에 거슬리죠. 그렇지만 우리가 실천하는 데 살아가는 데는 아주 이로운 것입니다.
良藥은 고어구苦於口라 그랬죠.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은 몸에는 아주 좋죠. 건강을 북돋워주는 그런 이치가 있듯이
충고의 말, 일단 귀엔 거슬리지만 그것이야말로 내 자신을 성장시키고 나를 사람되게 하는데 아주 좋은 것이죠.

유교에는 또 그런 말이 있죠.
도오선자道吾善者는 시오적是吾賊이오
도오악자道吾惡者는 시어사是吾師라.
나를 훌륭하다 좋다 뭐 잘난 사람이라고 자꾸 추켜주는 것은 나의 적이다.
그런데 도오악자道吾惡者는 시오사是吾師라
나를 나쁘다 못난 사람이다 잘못하는 게 많다라고 이렇게
충고를 자꾸 해주는 사람 그 말은 정말 나에게 스승이다 그랬습니다. 틀림없는 말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교를 통해서 이것저것 다 그냥 덮어두고요, 자신을 비방하고 모함하고 헐뜯고 하는 그런 것 세상 살면서 그거 안듣는 사람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뭐 누구로부터 또 내가 잘못해서 듣든 잘했는데도 듣든 간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뭐 못한다 비방하는 소리 욕설 뭐 이런 거 안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불교에서 모든 것 다 제쳐두고라도
이 문제 하나만 제대로 우리가 수용을 하고 우리 마음에 잘 그런 그 받아들이고 해결할 줄 아는 그런 그 어떤 그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은 이건 뭐 보통 그 소득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소득이예요. 뭐 불공해가지고 뭐 큰 복짓고 공덕 돌아오고 하는 것 이게 문제가 아니죠.
그래서 이것은 영가스님께서 개인의 어떤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을 한다는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 할 것인가.
자기를 음해하고 비난하고 욕하고 비방하고 잘못했다고 하는 이런 것들 늘 우리가 겪는 일인데 이러한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새겨보면요
上士一決一切了 (상사일결일체요)
상사는 한번 해결함에 일체를 다 마치고
中下多聞多不信(중하다문다불신)
중근기 하근기 중사 하사는 많이 들어도 많이 믿지를 않는다.
但自懷中解垢衣(단자회중해구의)
다만 가슴 가운데에 스스로 가슴 가운데에 때문은 옷을 벗어 버리거니
誰能向外誇精進(수능향외과정진)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從他謗(종타방)
다른 사람이 비방하는데 맡기고
任他非 (임타비)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하는데 맡겨 두어라
把火燒天徒自疲(파화소천도자피)
마치 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는 것이라 한갓 스스로 피로할 뿐이도다.
我聞恰似飮甘露(아문흡사음감로)
나는 그 비방하는 말을 들으니
나는 들으니 흡사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銷融頓入不思議(소융돈입부사의)
녹아서 불가사의한 경계에 몰록 들어가는 도다.
다 들어가는 도다 불가사의한 경계가 바로 수용하는 마음 자세죠 그것을 이제 부사의 경계라 그랬습니다.

증도가 공부 오늘 저녁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9강
證道歌- 제9강 (觀惡言 是功德 ~) 2006년 3월 8일

반갑습니다. 3월 8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증도가 我聞恰似飮甘露(아문흡사음감로)하야 銷融頓入不思議(소융돈입부사의)로다-31 하는 대목을 공부했습니다.
그 앞에서부터 從他謗任他非(종타방임타비)하면 把火燒天徒自疲(파화소천도자피)로다-30 我聞恰似飮甘露하야 銷融頓入不思議로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불교공부를 하고 또 불교를 믿어서, 자기 자신을 비방하거나 자기 자신을 나쁘다고 하거나, 또 그르다고 하거나 또 음해를 하거나 모함을 하거나, 또 시기 질투를 받거나 그럴 경우, 그것을 어떻게 소화 하는가?

영가스님이 소화하듯이 그렇게 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거의 그러한 경지에 버금가는 정도로 우리가 아등바등 좀 애를 써서라도, 그러한 문제를 잘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부처님을 믿고, 불교를 믿고 불교공부를 한 그런 아주 최상의 소득이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 해 봅니다.

오늘도 그 이야기에 이어서요. 觀惡言是功德(관악언시공덕)이니 此則成吾善知識(차즉성오선지식)이라-32 그랬습니다.
악언을 관하는 것, 나쁜 말을 관찰하는 것, 이것이 공덕이다. 그러니까 나쁜 말 그것이 나에게는 공덕이라는 그런 뜻이지요.
어제 소개를 했습니다마는, [도악자는 시오사]라 나를 나쁘다고 하는 그 사람은 나의 스승이다. 그랬습니다.

악한 말을 우리가 듣고 거기에 즉각 우리는 반응을 하지요. 뭐 비방을 했든지 욕을 했든지, 뭐 또 나쁘다고 했든지 모함하는 말을 들었든지, 전해 들었든지 어쨌든 간에 그런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들은 전부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이것을 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아주 발끈 성질부터 내는 그런 경향이 사실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잘 소화 하면, 그거야말로 참 나에게는 큰 공덕이 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此則成吾善知識(차즉성오선지식)이라 그랬지요? 이것이야말로 나의 선지식을 이루는 것이다. 나에게 선지식이 된다. 그랬습니다. 한 생각 그 달리 하기에 달렸는데요. 이런 것들은 한 생각에 달렸습니다. 참 간단한 일이면서도,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공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이것을 공덕으로 소화하지 못한다면 사실 불교 공부한 소득이 없지요.

뭐 영가스님은 크게 깨달으신 분이니까, 나는 감로수를 마시는 거와 같다. 나를 비방하고 나를 욕하고 나를 훼방하고 음해하고 하는, 그런 소리 들을 때 마다 감로수를 마시는 거와 같아 가지고, 정말 불가사의한 그런 해탈경계에 녹아서 들어간다. 그랬습니다.
그 뭐 달마스님은 독약을 여러 번 마셨지요. 그래서 독약을 마실 때 마다, 그것이 보약 이상으로 아주 얼굴이 부숭하고, 아주 그 몸이 불어나고, 아주 건강 해지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글쎄요 뭐, 상징적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그 우리가 나를 비방하고 나를 나쁘다고 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욕하는 그런 소리를 우리가 잘 소화하면 정말 좋은 수행이 될 것이고, 정말 큰 깨달음이 될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내 인격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뭐 더 없이 좋은 그런 소재가 될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좋은 어떤 수행은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밤잠을 안자고 그 아등바등 용맹정진을 일주일 하던지, 일생을 용맹정진을 하던지 아니면 뭐 기도를 그렇게 하던지 하루에 뭐 삼천배를 십년을 하던지 이런 것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비방하고 자기를 나쁘다고 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제대로 잘 소화해내고, 그것이 정말 나에게 큰 공덕이 되도록 전환을 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떤 정진보다도 큰 정진이고, 어떤 용맹정진보다도 훨씬 더 값진 용맹정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觀惡言是功德(관악언시공덕)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악언을 관하는 것. 이것이 공덕이다. 대단한 말이에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선지식이다.
선지식은 뭡니까? 나를 깨우치고 나를 사람 되게 만들고, 나를 가르치고 나에게 지혜의 눈을 열어주는 것이고, 나를 인도해주고 나를 그야말로 끝끝내는 부처의 경지로까지 이끌어 주는 사람이 바로 선지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나쁘다고 하는 그 말. 나를 비방하는 그 말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나의 선지식이 된다.

나를 좋은 말로 가르치고 아주 높은 법으로 가르쳐주는 그런 그 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뭐 법화경을 공부하고 신심명을 공부하고, 증도가를 공부하는 그런 어떤 아주 차원 높은 불조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보다도, 사실은 나를 욕하고 비방하는 말을 우리가 잘 소화할 줄 안다면, 그것이 천 배 만 배 더 나은 선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요. 그거 하나 제대로 소화하면 더 이상 사업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不因訕謗起怨親(불인산방기원친)이면 何表無生慈忍力(하표무생자인력)가-33 그랬습니다.
訕 謗. 비방할 산자. 비방할 방자지요. 비방하는 일을 인해서 원친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비방을 통해서 원수와, 친한이. 이것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아니라면, 그다음 공부한 것을 드러낼 그런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何表無生慈忍力(하표무생자인력)가 無生慈忍力! 이것이 도를 닦은 사람. 도를 이룬 사람. 불교를 깊이 공부한 사람. 수행을 많이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정진력. 법력. 능력. 도력 이것이 바로 無生慈忍力(무생자인력)인데요.
生死(생사)가 없는 慈悲(자비)와 忍辱(인욕)의 힘이다. 無生慈忍力이라고 영가스님은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마는, 어쨌든 이것은 자신이 공부한 능력. 공부한 효력을 어찌 표할 것인가?
뭘 가지고 표하겠습니까?

뭐 斷食(단식)으로 보여주겠습니까? 절하는 것으로 보여주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富(부)를 가지고 세상에서 크게 보시하는 것으로 보여주겠습니까? 어떤 것을 가지고 보여주겠습니까?
그것보다도, 자기 재산을 다 털어서 뭐 희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더, 자기의 어떤 수행력을 보여주는 길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자기를 비방 했을 때 그 비방을 잘 소화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력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無生慈忍力(무생자인력)을...
그런 일이 아니라면, 비방을 인해서 원친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면 어찌 無生慈忍力을 표할 수 있으랴?
수행력을 표할 수 있으랴? 공부한 힘을 표할 수 있으랴? 공덕 닦은 것을 표할 수 있으랴? 불교 믿은 것을 표현할 수 있으랴? 아니면 그 동안 불교공부 한 것. 이것을 표현할 수 있으랴? 참, 기가 막힌 말이지요.

영가스님은 그렇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마는, 천태종과 선종과의 그 관계에서 많은 비난을 들었고, 또 뒤에 보면 자기는 野僧家(야승가). 야승의 집에서 고요히 앉아 살고 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를 모셨지요. 누나를 모셨지요. 그래 놓으니까 큰 절에서 떳떳하게 제대로 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野僧家 라고 집 가자를 썼어요. 사찰에서 살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방을 받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당신에게는 아주 큰 수행이 됐고, 그것이 큰 공부가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뭐 근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수행이 많이 되지요. 또 자녀들의 진학 때문에 불교와 인연을 맺는 사람들도 참 수없이 많습니다. 어쩌면 뭐, 우리 자녀를 참 내 뜻대로 진학을 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찾아온 곳이 절이고, 절에 와서 부처님께 무턱대고 자기 감량대로 한번 빌어 보고, 기도 해보고, 그래서 그러한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다가 이런 저런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뭐 불교교양 대학도 알게 되고, 법회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다 듣게 되어서 차츰차츰, 불교의 넓은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지요.

그 집안의 일. 또 어떤 사업상의 일. 자녀의 진학문제. 이런 것이 하나의 선지식이 되어 가지고, 그 인연으로 정말 불교의 진정한 정법에 눈을 뜨고 아, 정말 사람 사는 길이 이것뿐이구나! 하는 그런 것에 까지 깨닫게 되는 그런 인연이 되는 것이지요.
참! 고마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소박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게 절에 빌러 왔다가 그것이 인연이 돼가지고, 정말 부처님의 거대한 법에, 또 정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 라고 하는 사실, 이건 얼마나 참 소중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르지요.

처음에는 뭐 기복적으로 들어 왔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정법으로 회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그 정말 영가스님에게는 참으로 아픈 상처라고나 할까요? 그런 그 비방들을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상황에서, 자신은 그것이 큰 선지식이 되었고 큰 수행이 되었다. 여기에서 내가 이것을 잘 소화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내 공부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뭐 병이 없다면 뭐 진통제나 의술이 어떻게 표현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의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픈 사람이 있어야 의술이 표현 되는 것이지요.

어둠이 없다면 밝음을 표할 길이 없지요. 아무리 훌륭한 좋은 등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두워야 뭐 이거 등불을 한번 켤 텐데, 어둡지 않으면 등불을 켤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둠 때문에 등불을 밝히게 되었다. 그 비방을 인해서 원친을 일으키는 이 일 때문에, 당신의 無生慈忍力(무생자인력)을 표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다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법을 어찌 쓰겠습니까?

해탈의 법이 아무리 좋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인간에게 있어서 생노병사의 고통이 없다면, 그 쓸 기회가 없는 거예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또 세상에 우리가 악을 미워하지만 악이 없으면요. 자비나 뭐 이런 좋은 법. 선법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비심이 있다 하더라도, 자비를 베풀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不因訕謗起怨親(불인산방기원친)이요 何表無生慈忍力(하표무생자인력)까-33 하는 이 말은 이런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가 있으니까 생노병사에서 초탈하는 법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비방하는 일이 있어서, 말하자면 영가스님은 당신의 수행력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 영가 증도가 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뭐 그 적지 아니한 그런 글이 여기서 쓰여 졌는데, 從他謗任他非(종타방임타비)에서 부터요. 다른 사람이 비방 하는데 맡겨두어라. 그리고 그르다고 하는 데로 맡겨두어라. 그래봤자 나에게는 횃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는 것이라.
태우는 그 사람만 피로할 뿐이다. 나에게, 하늘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하등의 이상이 없는 것이다.

어제 그 말씀드렸지요? 바람을 향해서 흙먼지를 뿌린 거와 같고, 피를 물고 상대를 향해서 피를 뿌린 거와 같고, 좋은 음식을 차려 놨는데 그것을 먹지 않았을 때, 그 음식이 바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거와 같이, 비난이니 비방이니 음해니 욕설이니 하는 것은 결국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에게로 되돌아간다. 이런 뜻이지요.

我聞恰似飮甘露(아문흡사음감로)하야 銷融頓入不思議(소융돈입부사의)라-31 나는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거와 같아서, 不思議한 경계 속으로 전부 들어가 버린다.
그야말로 그것이 나에게는 큰 보약이다.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깨달음을 얻게 됐고 수행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까지 말해도 좋지요.

그래서 惡言(악언)을 觀(관)하는 것이, 이것이 공덕이다.
악한 말이야 말로 참으로 공덕이다. 아! 참, 이거 마음에 깊이 새겨서요. 이 순간부터라도 우리가 이렇게 알고 산다면, 뭐 불교공부 끝입니다.
이거 하나 우리가 제대로 내 살림살이가 된다면, 이것이 뭐 얼마나 큰 소득 입니까? 대단한 소득이지요.

악한 말이, 이것이 공덕이다. 그리고 나의 선지식이다. 나를 인도 해주고 나를 이끌어 주고, 나를 깨우쳐 주는 선지식이다.
비방하는 일을 인해서 원친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아니라면 어찌 無生慈忍力(무생자인력)을 표할 수 있겠는가?
불교 공부한 힘을, 수행한 힘을, 도 닦은 힘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뭐 아이고 나야 뭐 수행도 안하고, 공부도 아니 해서 아무
법력이 없다. 이런 그 변명을 하실지 모르지만, 한 시간을 공부했으면 한 시간 공부한 만치 법력이 있게 돼있고, 1년을 불교에 몸담았으면 1년 몸담은 만치, 그 나름의 어떤 수행력이 있습니다.

없을 까닭이 없어요. 당연히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미미해서 크게 드러나지 않을는지는 모르지만...
불교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공짜가 없다는 이치를 배우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좋은 일을 해도 헛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는 것도 결코, 헛것이 아닙니다.

어디엔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冥薰加被力(명훈가피력)이지요. 그야말로 나도 모르는 결에 어디엔가 그 영향력이 끼쳐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런 것이 冥薰加被力이고, 또 그 나름의 법력이 표현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셔야지요. 절대 자신의 그 어떤 공부라든지 수행을 너무 비하해서, 겸손은 좋지만 그것을 너무 비하해서 내가 무슨 법력이 있나. 내가 무슨 인욕의 힘이 있나. 무슨 정진력이 있나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 다음에 宗亦通說逆通(종역통설역통) 定慧圓明不滯空(정혜원명불체공)-34 이런 말인데, 종도 또한 통하고 종지도 또한 통하고 설법도 또한 통하여 정과 혜가.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고 밝아서 공에 체하지 아니한다. 공에 막히지 아니함이로다. 그런 뜻인데, 宗 이라고 하는 것은 宗旨(종지). 根本趣旨(근본취지). 줄거리지요.

여기서는 말하자면 불교의 근본취지를 또는 세상과 인생의 근원을 확실히 밝혀서 알고 있다. 이것이 宗亦通(종역통)입니다.
그리고 그 알고 있는 것을 그것이 곧 불교이고, 진리 이고, 도이고, 인생이고 그렇지요. 그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할 줄도 아는 것. 표현할 줄도 아는 것. 이것이 중요해요. 알기만 하고 표현할 줄 모르면, 그것은 좀 부족하지요. 그것은 說不通(설불통)입니다. 宗(종) 은 통했는데, 說不通(설불통)이라...

우리 불자들을 보면 심증은가요. 불교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심판인지 표현을 잘 못해요.
10년을 불교와 인연을 맺은 사람도, 정작 자기 자매나 형제들에게 불교이야기 제대로 한마디 전해주지 못한다던지, 이웃에게 불교이야기를 제대로 못해준다던지 하는 그런 경우가 참 많아요.

또 뭐 다른 종교를 믿는 그 친구들 만나 가지고, 막 그냥 사정없이 공격을 퍼붓고 설명을 하면, 속에는 틀림없이 아니고 자기 나름의 소신이 분명히 있는데, 아닌데 싶으면서도 도대체 어떻게 한마디도 설명을 해주지 못하는 그런 사례들이 참 많습니다. 아주 많아요.

그건 종은 통했는데 설은 통하지 못했다. 이렇게 좀 뭐라고 그럴까? 불려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렇게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를 알기는 아는데 마음속으로 짐작은 하고 있는데, 도대체 설명은 한마디도 못합니다. 그것을 다 겸해야 옳지요.
겸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서 공에 滯(체)하지 않는다. 이것은 공에 체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말은 공을 깨달아서 잘 수용하고 있되, 거기에 떨어져 있지 않는다. 이런 말이지요.

空(공)만 아는 것이 아니라 有(유)도 안다. 空만 쓰는 것이 아니라 있음도, 有도 쓴다. 그것이 中道(중도)라고 해서, 뭐 이 [영가 증도가]도 역시 중도의 원칙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중도의 안목이지요.
유와 공을 함께 수용하고 필요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 그것이 이제 유와 공의, 있음과 없음의 조화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이지요. 선정만 가지고 있어도 안 되고, 또 지혜만 가지고 있어도 안 되고,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게 조화를 이를 때, 그 때 선정에만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혜에만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공에 체하지 않는다 는 것은 그런 의미지요.

非但我今獨達了(비단아금독달료)라 恒沙諸佛體皆同(항사제불체개동)이로다-35
비단 내 혼자만 홀로, 내가 지금 홀로 통달 해 마친 것이 아니요. 비단 이것은 두 번 새기면 좋지요, 우리가 보통 “비단” 하는 말과 똑 같습니다. 비단 내가 지금 홀로 통달 해 마친 것이 아니요. 恒沙諸佛體皆同이로다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모든 깨달은 분들의 본체가 다 같도다. 이랬습니다.

恒沙諸佛(항사제불)라고 하는 본도 있고요. 河沙諸佛(하사제불)이라고 하는 본도 있고 그렇습니다. 항하강의 恒(항)자로 쓴 경우. 또 물 하자의 河(하)자로 쓴 경우. 둘 다 맞아요. 맞는데 본에 따라서 조금씩 그 차이가 납니다.
저는 항사라고 읽었으니까 恒沙(항사)라고 하겠습니다.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깨달은 분들의 그 본체가 다 같다. 그랬습니다.

항하강의 모래는 뭐 그 한강의 모래나 해운대 백사장의 모래하고 달라요. 아주 가늘고 곱습니다.
그야말로 밀가루 같아요. 그 한 주먹만 하더라도 그 숫자가 얼마겠습니까? 그 모래알 숫자가...
그런데 항하강의 모래 수라고 하는 것은 뭐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고 많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많고 많은 깨달은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恒沙諸佛(항사제불)이라고 하는 말은,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모든 깨달은 분들이 똑 같이 그렇게 내가 깨달은 경지하고 똑같다.
여기서는 다른 표현으로 하면, 나도 부처님이다.
나도 많은 부처님 속의 하나다. 이런 뜻이 돼요. 똑같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 정도로 참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이렇게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열반경에서 광역도아 이마가 넓은 소 잡는 백정이 문득 깨달음을 이루고 칼을 착 집어 던지면서 “나도 현겁 천불의 일수 다. 천 부처님 중의 나도 한 사람이다. 그 하나다.” 라고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평생 소만 잡는 백정이었는데,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눈을 뜨고 나니까, 아 뭐 백정이니 뭐니 그것이 무슨 문제겠습니까? 깨달음의 그 안목이 중요한 것이지요.
참 아주 기가 막힌 그런 이야기지요. 열반경에 그런 광역도아 라고 그랬는데, 우리 보통 서장이나 선요 같은데 잘 등장 합니다.

열반경에 있는 이야기지마는, 넓을 廣(광)자. 이마이자 인데 이마가 널찍하고 뭐 소고기를 하도 많이 먹어서 그 이마에 기름이 번들번들하고, 아마 그런 의미로서 광역이라고 그런 표현을 했을 것 같아요.
백정 이름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 그런 백정이 험상궂기는 좀 험상궂었겠습니까?

그런 백정이 어느 날 소를 썰다가, 칼을 착 집어던지고 “나도 천불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참, 통쾌하지요. 기건 뭐 우리 아전인수 격으로 불자라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만이 이런 소리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뭐 동서고금의 철학 서적이나 위인들. 성인들의 그 책을 남 못지않게 읽었는데, 이런 아주 시원시원하고 통쾌한 이야기는 일찍이 불교 이외에는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참 기가 막히지요?

여기 영가스님도, 육조스님에게 떡 깨달음을 인정받고 나서는, 恒沙諸佛體皆同(항사제불체개동)이라 나만 通(통)한 것이 아니라, 여기는 오히려 부처님보다도 자기를 먼저 내세웠어요. 나만 이렇게 잘 난 것이 아니라, 다른 부처님들도 나만치 잘 났다. 이런 식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이쯤 되어야 그래도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공부한 그런 보람이 있지 않을까 참 부러운 대목이기도 합니다.

獅子吼無畏設(사자후무외설)이여 百獸聞之皆腦裂(백수문지개뇌열)하고-36
香象奔波失却威(향상분파실각위)하고 天龍寂聽生欣悅(천룡적청생흔열)이로다-37
이것이 같은 이야기인데요. 獅子吼無畏設. 영가스님의 이러한 말씀이 그대로 사자후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내만 이렇게 잘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처님들도 나처럼 안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이게 사자후지요. 뭐 음성이 크다고 해서 사자후입니까?

이렇게 정말 겁[畏(외)]없는 소리. 정말 확신에 차있는, 확신에 차있는 그런 말씀! 이것이 사자후입니다.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내 소리를 듣고 백수는 聞之皆腦裂(문지개뇌열)이라. 여기서 百獸(백수). 백가지 짐승은 그 소리를 듣고 전부 뇌가 찢어진다. 골이 깨졌다. 이런 이야기인데 이것은 이교도나 외도들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서두에서 어떻습니까? 無明(무명)이 곧[卽(즉)] 佛性(불성)이고, 幻化空身(환화공신)이 곧[卽(즉)] 法身(법신)이다.-2 그랬습니다. 이것이 또 獅子吼無畏設(사자후무외설)입니다.
누가 일찍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감히 이런 말을 못하지요. 이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고, 무명이 그대로 불성이다. 참 대단한 말씀이지요. 불교 궁극의 말씀입니다.
전혀 방편이 없습니다. 그대로, 實法(실법)대로, 실법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것이 다 獅子吼無畏設(사자후무외설)이지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 듣고 보통 우리가 상식적으로, 무명은 제거해야 할 것. 번뇌는 제거해야 할 것.
그리고 불성은 저 깊고 깊은 그 속에, 이 무명과 번뇌를 다 헤치고 헤치고 헤쳐서, 저 밑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불성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지요. 그건 이제 소승들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百獸(백수). 백가지 짐승들이라고 하는 것은, 외도나 이교도들. 전혀 불교하고 관계없는 그런 이들은 대가리가 깨진다. 이런 뜻이고...

그 다음에 香象(향상)은 奔波失却威(분파실각위)라 코끼리지요. 코끼리는 아주 분주하게 위엄을 잃고 달아난다. 그래 여기 코끼리는 소승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법화경에서 5,000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바로 여기서는 그런 경우의 소승들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뭡니까?
부처님의 깨달음의 그 법! 말하자면 뭐 그대로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어떤 모순과 어떤 그 비리와 온갖 그런 그, 중생으로서의 부족한 점을 다 가지고 있는 그대로 부처님이다!
손 한 번 들어도 부처님이요. 부처님 앞에서 뭐 나무불 한 번만 해도 부처님이요. 절 한 번만 해도 부처님이요. 염불 한마디만 해도 부처님이다 하는 이런 큰 소리를, 그야말로 사자후를 하니까 그 동안 소승적으로 익혔던 그런 사람들은 그만, “아 이건 우리가 들을 일이 아니다.”하고, 내용상 그렇습니다.

제가 앞뒤를 전부 뒤섞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니까 5000명이나 되는 상당한 그 오랜 세월동안 공부 했다는 사람들도 전부 자리에서 박차고, 그 부처님 설법 자리에서, 어지간하면 참고들을 것이지, 설법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요. 일어났다고 하는 것... 그래 그 사람들 수준으로는, 그 사람들의 어떤 그 좁은 소견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

奔波失却威(분파실각위)이지요. 분주하게 달아나서 위엄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도대체 그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법석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부처님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그 다음에 天龍(천룡)은 寂聽生欣悅(적청생흔열)이라 그랬습니다. 天龍. 하늘의 용 이지요. 하늘의 용은 가만히 듣고, 이 이야기 뭐, 非但我今獨達了(비단아금독달료)라 恒沙諸佛體皆同(항사제불체개동)-35이라는 말이라든지, 無明實性卽佛性(무명실성즉불성)이요 幻化空身卽法身((환화공신즉법신)이다.-2 이라든지, 이런 말씀을 듣고 너무 기뻐서, 뭐 크게 듣는 것 같지도 않고, 고요히 마음속에 새기면서 아주 기쁨에 넘친다. 이런 말입니다.

欣悅(흔열)을 연다. 法喜禪悅(법희선열)에 충만해 가지고 아주 그 禪悅樂(선열락)을 누리는 그런 입장을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菩薩根基(보살근기)라는 것입니다.
법화경도 그랬지요. 이것은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다. 佛所護念(불소호렴)이다.
부처님이 정말 아끼고 보호하고 애착하는, [뭐 애착은 내(큰스님) 표현이지마는], 부처님이 아주 아끼고 보호하고 애착하는 그런 가르침이다.

“최고수준에 있는 보살들만을 내가(부처님) 가르치기 위해서, 남겨두고 비장해 두었다가 이제 내가 가르침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설하노라.” 하는 그런 형식으로 법화경에 돼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수준에 이른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가슴에 와 닿고 공감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法喜禪悅(법희선열)의 즐거움에 젖어든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獅子吼無畏設(사자후무외설) 百獸(백수)는 聞之皆腦裂(문지개뇌열)하고 香象(향상)은 奔波失却威(분파실각위)하고 天龍(천룡)은 寂聽生欣悅(적청생흔열)이니라.
백수. 향상. 천룡. 이렇게 해서 백수는 異敎徒(교도), 外道(외도), 불교에서 말하는 외도이고, 향상은 소승을 말하는 것이고, 천룡은 보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자후라고 했기 때문에, 백수 향상 천룡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법으로서는 獅子吼無畏設(사자후무외설)은 부처님의 설법이지요.
최상승의 설법이고, 그 다음에 이제 그 최상승의 아주 첨단 불교의 그 가르침을 들으니, 거기에 대해서 근기 따라서, 수준 따라서 이러한 어떤 표현이 나타나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觀惡言是功德(관악언시공덕)이니 此則成吾善知識(차즉성오선지식)이라-32 악언을 관하는 것. 이것이 공덕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선지식을 이루는 것이다.

不因訕謗起怨親(불인산방기원친)이면 何表無生慈忍力(하표무생자인력)가-33 비방하는 일을 인해서 원친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면, 生死(생사)가 없는 慈悲(자비)와 忍辱(인욕)의 공부한 능력. 효력을 어찌 표할 것인가?

宗亦通設逆通(종역통설역통) 定慧圓明不滯空(정혜원명불체공)-34 종지도 또한 통하고 설법도 또한 통하여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고 밝아서 공에 막히지 아니한다.

非但我今獨達了(비단아금독달료)라 恒沙諸佛體皆同(항사제불체개동)이로다-35 비단 내가 지금 홀로 통달 해 마친 것이 아니요.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모든 깨달은 분들의 본체가 다 같도다.

獅子吼無畏設(사자후무외설)이여 百獸(백수)는 聞之皆腦裂(문지개뇌열)하고-36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백가지 짐승은 그 소리를 듣고 전부 뇌가 찢어진다.

香象(향상)은 奔波失却威(분파실각위)하고 天龍(천룡)은 寂聽生欣悅(적청생흔열)이로다-37 코끼리는 아주 분주하게 위엄을 잃고 달아난다. 하늘의 용은 가만히 듣고, 法喜禪悅(법희선열)에 충만해 가지고 아주 禪悅樂(선열락)을 누린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10강

반갑습니다.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3월 9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증도가
유강해遊江海 섭산천涉山川하야
심사방도위참선尋師訪道爲參禪이러니 하는 대목부터 할 차례입니다

유강해遊江海 섭산천涉山川
우리 불자들도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영가스님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들을 만한 그런 어떤 법회法會가 있으면 가서 듣고 기도처祈禱處도 잘 다니고 요즘 뭐 사찰순례 성지순례 등등 많이 하지요

근래에는 옛날 같지 않고 교통이 아주 발달해서 다니는데 아주 편리하게 돼서 옛날사람들 보다 훨씬 많이 다닐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다니는 것이 그만 업이 되어가지고 그저 다니는 그 일로 그저 목적을 삼고 자기 신행생활로 삼는 그런 사람들도 또 있어요 보면은.

영가스님도
유강해遊江海 섭산천涉山川이라
강과 바다에 다니면서 산과 내를 건너서
심사방도위참선尋師訪道爲參禪이라 스승을 찾고 도를 묻기 위해서 불도를 묻기 위해서 묻고 참선을 했더라
그런 말입니다.
천태학天台學을 깊이 연구했다고 했죠


또 중국불교의 총림叢林의 형태라든지 스님 생활의 그런 형태를 보면은 초기에는 율문을 한 5년에서 10년간 그렇게 익히게 돼있고 그리고 나서 경학을 공부하고 그다음부터 각자 취향 따라서 율학律學을 전문으로 하든지 참선參禪을 전문으로 하든지 아니면 화엄학華嚴學을 전문으로 하든지 천태학 天台學을 전문으로 하든지 염불念佛을 또 전문으로 하든지 이렇게 이제 나눠져 가게 되죠
그럴 때 이제 옷색깔도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래 갱의更衣라 이런 표현이 있어요 역사서에 보면은.
옷을 갈아입다 그랬습니다. 옷이 색깔이 아마 종파에 따라서 옛날에 달랐던 모양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그런 법도가 제대로 잡혀있질 못합니다.
제대로 오랫동안 잘 지켜 내려왔는데 또 역사의 흐름 따라서 변화가 많이 있었죠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의 생각여하에 따라서 종교는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이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간에 공백기간이 상당히 있어서 지금은 아직도 제자리를 못 찾고 있습니다만은
옛날에는 참 그런 것들이 선종사찰 염불종사찰 율종사찰 이런 것이 아주 제대로 특색을 갖추었고 또 소속된 스님들도 옷 색깔이 다르고 어떤 경우는 옷 모양도 다르고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가스님도 이 육조스님에게 와서 인가印可받기 까지는 많이 헤맸던 것 같고 스승을 찾아서 또는 다른 어떤 학문적인, 경학을 하기 위해서 많이 다녔던 것 같습니다.

다니는 게 참 좋은 일이예요.
이러한 목적으로 심사방도尋師訪道스승을 찾고 불도를 묻기 위해서 참선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제 이런 목적으로 다니는 행각은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늘 있어 왔던 일이고 또 필요한 일이고 반드시 해야됩니다.
영가스님 스스로 이제 그렇게 했었다는 거지요.

이런 이야기 난 김에 우리 강원講院에서는
통방학인通方學人 남행강사南行講師 이런 말이 있어요
통방학인通方學人이라고 하는 것은
경학經學을 공부하기 위해서 강원에 들어와 가지고
예를 들어서 A라고 하는 강원에서 몇 해 한 4, 5년 공부하고 나서 어지간히 했다 싶으면은 그다음에 또 다른 강원으로 이제 옮깁니다. 가서 처음부터 다시 또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고 그 다음에 또 딴 강원에 또 옮기고 옮기고 이렇게 해서 어느 지방이든지 지방에 구애받지 않고 다 다니면서 공부했다 해서 통방通方 통할 통通자 지방이라는 방方자 해서 통방학인通方學人이런 그 말이 있구요.
그래서 통방학인을 학인들 중에서 제일 무서워 합니다.
워낙 견문이 넓고 많은 스님들을 친견했고 아는 것이 많고 학인으로서 역사도 오래 됐기 때문에 그래요.

그다음에 남행강사南行講師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스님에게서 평생 공부를 해서 그 스님의 법을 받은 그런 경우가 아니고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을 때 선재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을 찾아 다니면서 공부를 해서 비로소 큰 깨달음을 이뤘듯이 강사노릇을 하는 데도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남쪽으로 오십삼 선지식 찾듯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다녔다고 해서 그래서 남행南行 남쪽 남南자 행할 행行자 남행강사南行講師라고 이런 말을 해. 또 남행강사를 상당히 알아줍니다.
어떤 특정한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고 많은 스승에게서 많은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죠

요즘은 통신이 발달되고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많은 스승 많은 교육기관을 거치게 되지만은 옛날에는 그게 참 어려웠죠. 한 스승을 만나면 거의 뭐 평생을 그 한 사람에게서만 공부하는 예가 허다했는데 거기에 아주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용감하게 뛰어나가서 다른 지방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다니면서 공부했다고 하는 것은 이건 보통 용기가 아니죠.
통방通方이라고 이제 방方자가 저 방 방房이 아니고 지방이라고 하는 방方자입니다. 모 방方자 카는.

통방학인通方學人 남행강사南行講師
그런 그 사례들도 경학을 공부하는데 그러한 일들도 영가스님이 말씀하신 유강해遊江海 섭산천涉山川 심사방도위참선尋師訪道爲의 경우와 같은 거지요.

우리 불자들이 또 좋은 점이 이 절 저 절 아무 절에나 다닐 수 있구요 어느 뭐 자기 원찰이 설사 정해져 있다손 치더라고 이웃절에 무슨 큰스님이 오셨다든지 좋은 행사가 있다든지 하면은 거기 가서 참여 하고 법문 듣고 하는 것이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어려움이 없습니다.
뭐 시내 사찰에 한 두어 곳 다니고 저기 시골 사찰에 또 한 두 서너 곳 정해놓고 다니고 그렇죠.
보통 이제 뭐 적을 두고 다니는 사찰이 한 너덧 개는 보통 이제 되는데 다른 종교에서는 그런 그, 큰 혜택이라고 하는 데, 그런 혜택이 없죠. 참 이 불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혜택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러다보니까 소속감은 물론 부족하기는 하지만은 소속감이라는 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에요 자유롭게
불교교리 자체가 어디에도 구애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행생활을 하는데도 어디에 소속되거나 하는 것을 크게 높이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니면서 한껏 공부하고 법문 많이 듣고 견문을 이제 넓힐 수 있으면 그게 이제 바람직한 거다 이렇게 봅니다.

영가스님의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강사가 경학을 공부하는 것이나 또 보통 신도가 불교를 공부하는데도 역시 이제 이러한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도 이제 해봅니다.

자종인득조계로自從認得曹溪路
그렇게 다녔었는데 자종인득조계로自從認得曹溪路로
조계로曹溪路 조계曹溪의 길에서 인가를 받음으로부터 이렇게 이제 하면 좋죠.
조계의 길에서 인가를 받음으로부터 그것은 이제 조계산에 가서 육조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하는 것입니다.
또 조계산의 육조 혜능스님은 어떻습니까. 저기 이제 부처님에게서 가섭존자로 가섭존자에게서 아난존자로 상나화수로 또 우바국다로 이렇게 죽 이제 법맥이 내려오고 그다음에 이제 달마스님으로 부터 또 혜가 이렇게 내려와서 그 전통 법맥을 그대로 계승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전통적인 불교다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불교가 바로 정통불교다 그렇게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정법의 바른 맥을 이어받은 그런 그 조계의 길조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을 담고 있죠
그런 조계曹溪의 길에서 인가를 얻음으로부터

요지생사불상관了知生死不相關이로다
생사가 나하고는 관계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 알았도다 그랬습니다.
생사해탈이 불교의 목적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죠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그 동기도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해서
노병사老病死를 보고 또 출가수행出家修行하는 사람을 이제 보게 되는 것이 사문유관四門遊觀의 태자의 경험인데 거기에서 역시 노병사老病死를 보지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게 되고
사람이 저러한 것을 꼭 맞이해야 되는가
저러한 실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이것을 이제 고민하다가 결국은 생사해탈의 길을 찾아서 출가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영가스님도 여기에서 정말 늘 마음속에 어떤 문제로써 담고 있던 생사해탈生死解脫의 문제 이것이 이제 완성이 됐다는거죠
육조스님에게서 인가 받음으로부터 생사가 나하고 관계되지 않는다 하는 거 상관없다는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도다 이런 말입니다. 정말 스스로 자신있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으면은 참 이 대단한 거죠.

행역선 行亦禪 그렇게 되니까 행역선行亦禪 좌역선 坐亦禪이요 어묵동정語黙動靜에 체안연體安然 이라 그랬습니다.
걸어다녀도 참선이고 앉아있어도 참선이고 누워있어도 참선이고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도 대화한 그대로가 참선이고
일체가 참선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잠을 자도 참선이고요.
그것이 이제 행역선 좌역선입니다.
그래서 어묵동정語默動靜 말을 하든지 묵묵하든지 그리고 움직이든지 또 고요히 있든지 여기에 체가 편안하다 여기서 이 체體자가, 영가스님은 체자를 잘 쓰신다고 내가 말씀 드렸죠, 신체라고 해도 좋고 본체라고 해도 좋고 그냥 체體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체體라고 하는 말속에는 몸도 마음도 이 분의 모든 삶이 체體자 하나 속에 다 포함되어 있죠.
내 삶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해도 좋죠 왜냐 전부 선禪이니까가나오나 참선이고 앉으나 누우나 참선이고 잠을 자든 식사를 하든 다 참선이니까
그래서 이제 이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정도가 되니까

종우봉도縱遇鋒刀라도 상탄탄常坦坦이요 가요독약假饒毒藥이라도 야한한也閑閑 이라
이런 말을 했어요
참 대단한 법력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우리가
불교 공부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좀 하고 가서 기도 좀 하고 가서 절 좀 하고 이렇게 사경이라든지 또 뭐 그 나름대로 불교에 몸담고 몸과 마음을 이렇게 실어서 시간을 보낸 것들이 그 나름대로 다 공부죠. 그 나름대로 다 수행이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제 영가스님이 누리는 정도는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가고 오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이런 그 일체 생활속에 뭔가 표현이 있을 거에요
뭔가 그 색깔이 있을 것이고 뭔가 효과가 있을 것이고 뭔가 향기와 어떤 맛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뭐 스스로 겸손해서 뭐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수양이 안됐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그 향기와 맛이 틀림없이 있다고 하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어떤 그 난관이라든지 자기 그 삶의 구비구비에서 만나는 어려움 이런 것에 대해서 그 나름의 어떤 그 인내라고 할까 소화력이라고 할까 수용력이라고 할까 이런 것이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는
비록 창과 칼을 만난다 하더라도 항상 태연하다 상탄탄常坦坦이다 그랬어요 또
가요독약假饒毒藥이라도 야한한也閑閑이라
설사 독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또한 마음에 아무 동요 없이 한가하고 한가하다 이렇게 까지 했습니다.
과거 이러한 분들 이야기가 있죠
달마스님도 독약을 6번이나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법사 같은 분들도 왕명을 만나서 일찍이 돌아가셨는데 엉뚱하게도 요진나라의 임금이 승조법사가 워낙 그당시에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환속을 시켜서 재상으로 삼아서 나라의 정치를 잘 해보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머리를 기르고 재상이 되어서 정치를 하기를 여러번 간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승조법사는 들어주지 않았다는 거죠. 또 들어주지 않았음으로해서 오늘날 승조법사僧肇法師의 이름이 지금까지 빛나고 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이제 왕은 왕대로의 어떤 자존심과 체면이 있어서 승조법사를 사형을 시켰다 그랬을 때 승조법사가 마지막으로 게송 하나를 남긴 그런 이야기도 있죠

사대원무주四大元無主
오온본래공五蘊本來空
장두임백인將頭臨白刃하니
유여참춘풍猶如斬春風이라
사대는 원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이다
이 사대와 오온을 통해서 내 육신이라고 이렇게 하고 나라고 하고 나의 생명이라 이렇게 하는데 그 사실 그 내용 들여다 보면 텅 비어 없는 것이고 공한 것이다

우리가 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반야심경만 하더라도 늘 그러죠. 그것이 우리가 얼마나 나의 살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승조법사 같은 이들은 그런 도리가 백퍼센트 자기의 공부가 되고 자기의 살림살이가 되었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이제 머리를 가지고 긴 칼 앞에 들이댔는데도
그야말로 마치 칼로써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 아무 동요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없고 마음의 상처도 없고 동요도 없다 하는 그런 그 표현을 했습니다.
그건 그 분들의 일이구요.

우리들의 어떤 그 생활 속에 불교공부라고 하는 것
또 이렇게 공부하고 기도하고 경전읽고 등등 불교에 우리 마음쓰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노력들이 생활에 어떤 그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얼마나 우리가 마음이 태연자약하고 동요없이 잘 수용하고 소화해 낼 수 있겠는가
이런 걸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거죠
뭐 승조법사나 달마대사는 그들의 일이고 그렇습니다.

여기 뭐 어제는 비방이니 음해니 비난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오히려 아주 기분 좋게 그야말로 감로수를 마시는 거와 같다 그것이 나에게 선지식이다 그로 인해서 나는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 하는 그런 의미가 어제 있었습니다마는
여기는 거기서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야말로 칼과 창으로 바로 내 생명이 떨어지는 그런 순간에도 나는 아무 동요가 없다 하는 그런 정도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 무슨 뭐 비방이니 음해니 이런 거 그게 무슨 마음이 동요될 까닭이 있겠습니까 참 대단한 경지라고 봐야죠

우리가 설사 이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 성인의 가르침을 자꾸 접하고 사유하고 그래서 그것이 나의 마음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젖어 들어서 내 살림살이가 되게 하는 그런 일이 최선의 길입니다.

이런 공부를 하다가 이런 말을 우리가 들을 때 아휴 자신을 살펴보면은 도대체 나는 뭔가 내공부가 이게 된 건가 안된건가 수십년 뭐 불교에 몸담고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전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효과가 없으니 이게 뭐 공분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그 나름대로 틀림없이 그 나름의 효과를 거기서 내고 있으리라고 믿고 또 우리가 또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지금 이러한 시간을 변함없이 꾸준히 갖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 밖에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요.
무슨 특별한 비방秘方이 있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이제

아사득견연등불 我師得見燃燈佛하사 다겁多劫에 증위인욕선曾爲忍辱仙이로다
이런 말도 있죠
영가스님 이런 표현들을 자주 떠올리는 것으로 봐서 참 고초를 많이 겪었던 그런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저 앞에서도 뭐 종타방從他謗 임타비任他非 비방에 대한 이야기 거기에 대해서 적지 않은 양이었죠.
여기도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옛날에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그 금강경 우리가 익히 아는 금강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옛날 설화에 의하면은 아사我師, 여기는 나의 스승, 그 본사本師죠 석가모니 물론 가까운 스승은 육조 혜능이지만은 근본스승은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스승이 연등부처님을 득견得見 친견하고서 다겁에 일찍이 인욕선인爲忍辱仙人이 되었더라
인욕을 닦는
어제도 말씀 드렸고 그저께도 말씀 드렸지마는
불교수행을 하고 불교공부를 하고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해서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정말 자기를 비방하고 음해하고 모함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내가 뭐 잘했던 잘못했던 잘 못한 사람을 보고 잘 못했다고 할 때 더 화가 나죠 잘못했는데 잘못했다고 지적을 하면은 화가 안 날 것 같죠. 천만에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더 화가 나게 돼 있어요 어쨌든 잘못든 잘못했든 간에 우리들 자신이 비방을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음해를 당하거나 하면은 못 참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수행의 어떤 그 척도로써 삼을 수 있는 그런 그 소지가 여기 연등부처님에게서 석가모니 부처님 전신이죠 인욕선인 노릇을 오래 했다
그런 이야기가 이제 여기도 나오고 금강경에는 뭐 금강경을 근거로 해서 하신 말씀이겠죠.

그래 금강경에는 보면은 과거어5백세過去於五百世 내가 과거 5백세 동안에 말하자면은 인욕선인이 되었었다 그래요.
그 대목에는 연등부처님이 나오진 않지만은, 뒤에 이제 연등부처님에게 인가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은 과거 5백세동안 인욕선인으로 살았다 그랬습니다.
5백세 동안에 인욕하는 것만 공부했다고 이렇게 할 정도니 참는다고 하는 거 내가 비난을 받았을 때 참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또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문제 다 제쳐놓더라고 이거 하나만 사실 내 살림살이가 될 수가 있다면은 뭐 더이상 바랄게 있겠나 이런 말씀을 종종 드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금강경에 부처님께서 사상四相이 없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사상이 없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내가 옛날 가리왕歌利王에게서 할절신체割截身體 신체를 낱이 베이었다. 그 때 나는 아상我相도 인상人相도 중생상衆生相도 수자상壽者相도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난날 절절지해節節支解 마디마디 이 몸을 잘라낼 때에 내가 아상我相이 있었거나 수자상我相이 있었거나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분노를 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고 또 이제 또 수보리須菩提야 또 기억해 보니 과거 오백세過去五百世동안에 이렇게 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 이제 영가 증도가에서
아사득견연등불我師得見燃燈佛해서 다겁多劫에 증위인욕선曾爲忍辱仙이라
하는 것은 금강경의 뒤의 이야기가 돼죠.
내가 또 생각해 보니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 되었었다
그 이야기에 해당되고

앞의 이야기는요 내가 옛날 가리왕 歌利王에게서 할절신체割截身體했다 그리고 내가 그때에 절절지해節節支解했다 마디마디 몸을 잘라내는 그런 경험을 겪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인데 이걸 이제 혼동해서 생각하면 안돼요.

어떤 이들이 금강경 강의 할 때 그것을 이제 혼동해서
그 때 인욕선인으로 있을 때 어떤 산중에 있다가 왕이 낮잠 자는 사이에 궁녀들이 인욕선인을 찾아와 가지고 예배를 하고 있으니까 왕이 낮잠에서 깨어나서 선인을 추궁을 해서 인욕을 닦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낱낱이 몸을 잘랐고, 나중에는 잘라진 신체가 도로 붙었고
그리고 뭐 왕은 팔이 떨어졌다 이런 그 설화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걸 그렇게 볼 것이 아니고 물론 이제 오백세 동안 인욕을 닦을 때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마는
여기에 이제 아석위 我昔爲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라고 하는 말은 이거 역사가 분명히 있는 일을
불멸후 5백년 경에 금강경을 편찬하면서 석가모니가 살아 생전에 겪었던 일을 연결시켜가지고 여기 금강경에서 상이 없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부처님은 겉으로 좋은 점만을 가지고 우리가 이야기 할 때는 왕자 출신이고요 정말 호화롭게 살다가 출가를 해서 성도를 하신 그런 그 대성자로 그렇게 알고 있죠
그렇지만 또 불우하고 불행한 면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7일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그리고 출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당시 정치상황이 출가할 수 밖에 없는 그 가비라국은 머지않아서 멸망할 것을 이 싯다르 태자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출가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해서 정치를 해도 역시 빼앗길 나라고 출가를 해서 도망을 가도 역시 빼앗길 가비라국임에는 틀림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예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비라국 이라고 하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나라는 작은 도시국가예요. 나라라고 할 것도 없는 도시국가인데
이웃나라, 그 당시 16개 나라가 자웅을 겨루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이제 아주 두드러진 것이 4대국이라 해서 그렇게 있는데 그 이웃의 코살라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아주 강력한 나라죠
그리고 가비라국은 양반의 나라고 점잖은 나라고 도덕을 주장하는 나라고 그렇지만은 무력을 행사하고 국토를 널리 가지고 있고 병력을 아주 강하게 양성을 해가지고 호시탐탐 이웃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코살라국 같은 그런 나라하고는 도저히 게임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이제 약했었습니다 사실은. 국력으로 봐서는 그렇게 약했죠.

그래서 부처님 살아 생전에 한창 성도를 해가지고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많은 제자를 거느려서 성자로서는 인도를 뒤덮을 그런 시기에 그야말로 참 가슴 아픈 일이 있었죠

이웃나라 코살라국의 비유리왕이라고도 하고 유리왕이라고 하는데 금강경에는 그것을 고대로 이제 표기를 하지 않고 가리왕이라고 이제 음을 살짝 바꿔가지고 가리왕이라고 이렇게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유리왕 또는 비유리왕 이렇게 해요.
이이가 이제 파사익왕의 아들이죠. 비두다바라고 하는 그 유리왕인데 이 유리왕이 부처님의 고향을 점령하게 되지 않습니까 가비라국을 점령을 하게 되요.
부처님이 한창 교화를 왕성하게 펼칠 때입니다. 그 가슴이 좀 아픈 일입니까 그게.

천하의 부처님이 눈을 환히 뜨고 시퍼렇게 살아있는 그 순간에 이 파사익왕의 아들 파사익은 부처님 하고 동갑이고 능엄경에도 나오죠. 그런데 그의 아들이 새파란 젊은 아들이 부처님의 고향을 점령하게 되고 석가족을 멸망시키는 그런 그 상황을 정말 살아있는, 그 어떤 처참한 살아있는 눈으로 그 처참한 현장을 환히 보게 됩니다. 그랬을 때 부처님같은 분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절절지해節節支解라 마디마디 칼로서 내 살을 저미는 그런 아픔이었다 이런 표현을 하고 있어요 금강경에 금강경이 그런 의미인데 그걸 이제 옛날 아주 오랜 과거의 어떤 설화의 형식으로만 해석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이제 유리왕이 쳐들어가는 그 길목에 제자들을 데리고 바싹 마른 나무 밑에 가서 서 있었죠. 그러니까 이 유리왕이 지나가다가 한 떼의 수행자들을 보고는 가만히 살펴보니까 부처님이거든요.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부처님에게 가서 인사를 합니다. 자기 부왕하고 동갑에다가 아주 친하게 지냈구요. 그렇지만 정치인들의 야욕이라고 하는 것은 뭐 이건 못말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도 이제 자기 부왕과의 관계라던지 천하의 성자 부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가는 길목에 있는 것을 보고서 가서 인사를 드리게 됩니다.
근데 보니까 바싹 마른 나무밑에 있거든요.
유리왕이 그럽니다.
부처님이시여 어쩌자고 저 옆에 저렇게 무성한 숲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 그늘에서 쉬시지 왜 이렇게 타들어가는 나무 밑에 이렇게 계십니까 라고 물으니까
그대가 나의 조국 가비라국을 쳐들어 가서 나의 형제자매 석가족을 무참히 살해하려고 하는 이 순간에 내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바로 이 타들어 가는 이 나무와 같다 내마음은,
그렇게 이제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말에 그만 유리왕도 마음이 아팠던지 그땐 이제 회군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한 번 물리쳤어요. 부처님의 그 참 아주 그 정말 인간다운 호소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두번째 또 그렇게 이제 쳐들어 왔는데, 돌아가서 유리왕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 눈앞에 가비라국의 국토가 어른거리고 그 재산 모든 것이 욕심이 나니까 더이상 참지 못하죠. 그래 또 이제 두 번째 쳐들어가는데 두번째 역시 길목에서 그렇게 이제 부처님이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또 물리쳤어요.

그리고는 세번째 또 역시 유리왕이 쳐들어 오는데 그때는 부처님이 자리를 피합니다 그때는 그런 방법을 써도 유리왕이 마음을 돌릴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처님 체면도 말이 아니고 부처님도 그러한 사실을 이제 알게 되고 해서 그만 부처님도 거기에서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는 그런 현장을 부처님이 다 목도하게 되는데 그 아픔을 금강경에서는 가리왕歌利王이 할절신체割截身體라 그랬습니다. 칼로 신체를 베는 아픔이었다, 절절지해節節支解라 마디마디 저미는 그런 아픔이었다. 그렇게 하죠 그래서 나는 그러한 아픔을 겪으면서 그 순간도 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과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었노라 그래서 나를 비웠기 때문에 나를 제대로 철저히 비웠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고초를 견딜수 있었다. 이런 표현입니다. 요즘말로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하자면요

그래서 그 전쟁 이야기는 아주 이야기가 긴데
그래 이제 마지막 그당시 가비라국의 왕이 마하남이라고 하는 왕이었는데 유리왕이 쳐들어 와서 왕복을 하고 항복을 해도 이 사람들이 군인들이 무지막지 하니까 사정없이 살상을 하니까 부탁을 특별히 부탁을 합니다
내가 저 물 속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만 우리 백성들이 도망을 갈 수 있게 좀 해달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그 정도야 들어준다고 하면서 이제 약속을 합니다.
그 도망가봐야 물속에 있는 동안이 뭐 기껏해야 오래 있어야 4,5분 정도밖에 못있을텐데 4, 5분 동안 도망가봐야 뭐 얼마나 갈까 싶어서 그렇게 약속을 하죠
그래 마하남이라는 왕은 물 속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나올 때 까지 살상을 멈추라고 명령을 내리고 물속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안나오는 거예요.
그래 그때 이제 도포자락을 잘라가지고 예를 들어서 자기 몸을 바다에다 묶고 거기서 이제 그 마하남이라는 왕은 물 속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10분이 지나도 30분 1시간이 지나도 안나오니까 이제 들어가서 확인을 해보니까 그렇게 죽었더라는 거죠.
그 순간에 이제 석가족들은 다 뿔뿔이 도망을 가서 그나마 몇 명이라도 살 수 있었다 하는 그런 아주 참 정말 아주 비극적인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죠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그 교화를 왕성하게 하던 그 순간에 가비라국은 멸망하고 석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고 불행한 사람입니까
저는 그래요 불교 역사에서 제일 불행한 분이 석가모니라고 그런 이야기를 간혹 기회가 있으면 합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어떤 사회적 지위라 할까 이런 것들이 보통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정말 성자로서 그 많은 제자들과 많은 신도들이 따르는 그런 시기에 그런 그 고초를 당하게 됐었던 것입니다.
우리 스승도 말하자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연등불
燃燈佛을 친견하고 다겁多劫에 인욕선인忍辱仙人이 되었었다
이 이야기는 이제 금강경의 아어我於 과거過去 오백세五百世 하는 그 이야기에 해당되고

그 앞부분에, 옛날에 라고 하는 석昔자 옛 석昔자를 썼어요, 옛날에 라고 하는 것은 살아 생전 옛날, 몇년이 흘렀는지 그건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옛날을 말하는 것이지 뭐 몇 생 이전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그대로 부처님이 몸소 겪어서 정말 가슴 아팠던 그런 그 사연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회에 여기 이제 석가모니도 나오고 인욕선인도 나오고
그건 꼭 금강경을 근거로 한 말씀이라서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영가 증도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 11강

幾回生幾回死 生死悠悠無定止 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
기회생기회사 생사유유무정지 자종돈오료무생 어제영욕하우희

入深山住蘭若 岑?幽邃長松下 優遊靜坐野僧家
입심산주란야 잠음유수장송하 우유정좌야승가



?寂安居實蕭灑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격적안거실소쇄 각즉료불시공 일체유위법부동

住相布施 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주상보시 생천복 유여앙전사허공 세력진전환추 초득래생불여의

반갑습니다.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3월 10일입니다.
내일은 벌써 주말이네요.
이번 주는 제가 하루를 빠져서 그런가! 훨씬 더 빠른 것 같습니다.
뭐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살다 보니, 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게 시간 같고, 세월 가는 것 같이 빠른 게 없다 싶은 생각합니다.
인생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한생 가기 마련이긴 합니다마는 그래도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이치를 깨달은 과거 훌륭한 선지식 스님들 또 부처님들 이런 분들의 참 전 인생을 통째로 던져서 깨달음을 이루신 값진 깨달음의 내용을 뒤 사람들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공부하면서 정말 수없이 고개도 끄덕거리고 무릎도 치면서 환희하고 또 공감하고 뭐라고 할까요? 법희 선열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이러한 진리를 공부하는 참다운 이치를 공부하는 이런 일에 기쁨과 맛을 느끼고 여기에 어떤 사는 재미를 느끼고 신심을 일으키고 하는 이런 마음 이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희유한 것이고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 해서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래요. 세상에 그 얼마나 사람들의 눈을 또 귀를 마음을 유혹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보다는 그래도 의미 있고, 보람 있고 참으로 어떤 법희 선열에 가까운 그런 즐거운 맛볼 수 있는 이런 진리- 이런 진리를 공부할 수 있는 일 참다운 이치를 공부할 수 있는 여기에 동참하신 취미를 가지신 분 그런 많은 분들 평소에도 생각하면 고맙고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 대상이 누가 되었던지 간에 이런 삶 이런 뜻을 삶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상당 있다고 하는 것 참으로 고무적이고 위안이 되고, 마음 든든한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幾回生幾回死(기회생기회사) 生死悠悠無定止(생사유유무정지)라 "몇 번이나 태어났고 우리가 몇 번이나 죽었던가?” 뭐 과거 우리가 살아온 것을 기억은 못합니다마는 그래도 짐작을 할 수 있죠. 또 성월량일고 해서 성인의 말씀을 통해서 많이 들어 왔기 때문에 또 저절로 자연스럽게 믿게 되고 또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봐도 그런 것 같고 그것이 우리 불자들에게는 우리 인생을 일회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끝없이 반복하면서 산다고 한다는 것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幾回生幾回死(기회생기회사) ‘몇 번이 태어났고 우리가 몇 번이나 죽었던가?’ 하루 밤 하루 낮 이것을 예를 들어 한 생이라고 생각하고 잠들었을 때는 죽음이고, 죽음을 통해서 그 다음에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듯이 밤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듯이 죽음이 지나고 나면 또한 새로운 생이 시작되듯이 그렇게 우리가 미루어 생각해 보면 아~ 밤이 지나고 나면 또한 새로운 미루어 생각해 보면 아침이 시작되고 그리고 또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간 뒤에 또 밤이 오고 밤이 지나고 나면은 또 이제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 되고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았을 때는 낮의 어떤 그 생활이라고 한다면 죽음 저편으로 가게 된 것은 잠들어 버린 어떤 밤의 생활이다“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죠. 이렇게 미루어 보면 참 이 성인의 말씀 깨달은 분들의 말씀이 이렇게 마음에 뭔가 마음에 와 닳죠.


生死悠悠無定止(생사유유무정지)라 우리 “하루하루가 아주 유유히 끝없이 아득하게 흘러가듯이 삶과 죽음도 그렇게 유유히 아득하게 정지하지 않고 흘러간다.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이건 멈출 내야 멈출 수가 없죠.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에 사람이 올라서서 있는 거와 같이 어쩔 수 없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게 돼 있는 거죠. 밤낮이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도 이것도 한순간도 멈출 추가 없습니다. 거기서 내려 올수가 없어요. 이 흘러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가 한순간도 멈출 수가 없고 거기서 내려 올수가 없어요. 차 같으면 빨리 달리는 싫어서, 차에서 내려와서 서 있을 수가 있겠는데, 인생의 흐름이라고 하는 거 이것은 도대체 세울 수가 없고, 자기가 그 어떤 기계라고 할까요? 차라고 할까요? 어떤 거기서 내려와서 내 혼자만 내려와 멈출 수가 없는 그런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어떨 때는 참 그런 생각이 들지요.


저 깊고 깊은 산중에 그것도 산 뒤편에 아주 이름 없는 평생 누구 한번 쳐다봐 주지 않는 이름 없는 바위가 되어 수천 수 만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있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어요.저는 그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렇게 멈춰 있고 싶지만은 아무 생각도 없이 무념무상으로 멈춰 서 있고 있지만은 멈춰 서 지지가 않는 것이 우리 인생이에요 내가 잠을 자든 무엇에 몰두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 간에 내 인생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참 이런 것을 보면 우리 인생을 각자 자기 인생이라고 하지만은 자기 마음대로 살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미 이 흐름이라고 하는 이 굴레 속에 우리는 함께 흘러가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幾回生幾回死(기회생기회사) 生死悠悠無定止(생사유유무정지) 영가스님께서도 생과 사의 문제를 굽어보니까? ‘참 얼마나 여러 번 태어났고 얼마나 여러 번 죽었던가? 그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유유히 흐르고 흘러서 멈추지를 않는구나?’ 그런 가운데 다행히 정말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自從頓悟了無生(자종돈오료무생)이라 “無生 생사가 없는 저긴 생사가 유유히 흘러간다.”幾回生幾回死(기회생기회사)‘몇 번이나 태어나고 몇 번이나 죽었든가‘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한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멈추지가 안는다. 이렇게 해 놓고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았다.


생사 없는 도리를 돈오하고부터 於諸榮辱何憂喜(어제영욕하우희) “모든 영광과 오욕에 무슨 근심이 있고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다. 근심이니 기쁨이니 하는 이런 것으로부터 모두 초월했다 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니 오욕이니 하는 이런 것도 인간사에서 소소한 일에서 영광도 있고 오욕도 있지마는 크게 보면 삶과 죽음에서부터 오는 거죠.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에서 오는데,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이것을 초월하고 나면 결국은 기쁨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入深山住蘭若(입심산주란야) 岑?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로다
“深山에 들어가서 아주 깊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蘭若에 머문다.” 난야라고 하는 것은 원래 아란야라고 하는 거죠. 아란야의 적정처 그러니까 번거로움이 없고 시끄러움이 없는 곳 이런 뜻이 아란야라고 합니다. 심산에 들어가면 벌써 고요하죠. 그런데 특히 난야는 더욱 더 번잡한 일을 다 제거한 곳 사찰을 아란야라고 합니다. 또 산중에 조용히 혼자 수행하는 토굴 같은 곳도 역시 아란야라고 하구요. 그런 깊은 산중에 작은 조용한 토굴을 하나 지어서 그기에 살고 있다.

岑?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로다.
분명히 이 스님은 보면 큰절에 대중들과 오랜 세월 같이 한 것 같이 여겨지진 않습니다. 물론 한때는 그렇게 살았겠지만, 몇 번 말씀드렸듯이 어머니와 누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큰절에서 그렇게 모시고 살 형편이 못되지요. 그렇다고 총림에는 공양주를 뭐 요즘 사찰처럼 보살님을 시키는 그런 예도 업구요. 모두가 행자나 스님들이 후원 일까지 맡아서 하기 때문에 굳이 여자의 손이 필요하거나 그런 총림의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총림에서도 크게 쓰이지를 못했을 것이고, 또 여러 가지 사항으로 그런 큰절 옆에 작은 더 깊고 깊숙한 곳에 작은 암자하나 만들어 놓고 거기서 암자라 해야 뭐 형편없는 집이겠죠. 그래 놓고 아주 골똘히 깊이깊이 수행만 열심히 했던 것으로 그렇게 짐작이 됩니다. 이것이 저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그런 것 같아요.

入深山住蘭若(입심산주란야) ‘심산에 들어가서 난야에 머무니 조용한 곳에 머무니’, 岑?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로다
그 영가스님 사는 곳은 깊은 산 잠음이라 하는 곳은 아주 높은 산을 의미하는 곳이고, “幽邃라고 하는 것은 높고 그윽하고 깊숙한 곳 낙락장송 아래로다.” 높고도 깊숙한 그런 산 중에 그기에 또한 장송까지 있다 이겁니다. 큰 낙락장송이 쭉 이렇게 서 있는데 그 밑에 조그마한 집을 하나 지어 놓고 그래 살았을 것이다‘ 이 글대로라면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岑?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로다
내가 사는 곳은 바로 그런 곳이다. 이치를 설명하는데 끝나지 않고, 간혹 자기의 입장과 자기의 생활 상황 같은 것들도 글 속에 많이 나타나죠. 특히 선시를 간단하게 한수씩 쓰는데 보면 옛날 스님들이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어떤 풍경들을 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 풍경을 그리는 것 속에 당신의 살림살이라고 할까요. 절 집안에서는 살림살이라고 잘 써요. 공부를 살림살이라고 합니다. 세속에는 예를 들어서 물질적인 것 잘 벌어들이고 그것을 잘 관리하고 잘 가족들이 잘 분배를 하고 잘 활용하고 이걸 것을 살림살이라고 하죠. 불교에서는 ‘살림살이라고 하는 말은 쓰는데 사실은 자기가 공부를 얼마나 하고 또 그 공부가 어떤 경계를 만났을 때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나 마음에 순하는 일이나 이런 등등의 경계를 만났을 때에 내가 그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것이 살림살예요.

그러니까 형식은 똑같죠. 세속 물질을 사는 살림살이나 마음을 사는 살림살이나 그런 살림살이들이 충분히 시속에 또 표현되는 그런 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역시 영가스님 증도가에도 자신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으면서 그것이 곧 당신의 정신세계요 당신의 도의 세계고, 또한 정신적 마음의 살림살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네요. 岑?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로다
이런 건 뭐 入深山住蘭若(입심산주란야) 岑?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로다優遊靜坐野僧家(우유정좌야승가)
?寂安居實蕭灑(격적안거실소쇄 ) 이런 건 작구 익숙하게 읽어 가지고 글자 뜻을 깊이 알고 또 한 자 한 자 몇 번씩 써 보면서 그냥 소리를 약간 내서 읊조리며 읽으면 그 맛이 있어요. 入深山住蘭若(입심산주란야) 岑?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로다 이렇게 읽으면 그 맛이 의외로 어떤 느끼지 못했던 맛을 느끼게 됩니다.

優遊靜坐野僧家(우유정좌야승가)라 優遊(우유)는 한가히 노닐다
(優)넉넉할 우 (遊)놀 유 넉넉히 아무 걸릴 것 없이 답답한 것도 없고, 부족함도 없이, 쫓기는 것도 없고 옹색한 것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마음 편안한 것을 우유라 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넉넉하게 고요히 野僧家(야승가)에 앉았다.” 야승가라고 했죠. 야승의 집이다. 이게 아마 암자도 암자 모습을 제대로 갖췄으면 이런 말 못했을 거예요. 큰절은 더욱 아니고요. 몇 번 말씀 드렸듯이 당신의 처지와 여러 가지 보살펴 드려야 할 그런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이렇게 큰절 옆에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허름한 집하나 해 놓고서 거기서 온 가족이 다 함께 수도를 잘 하고 살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 정신세계는 이와 같이 넉넉하고 조용히 그냥 야승의 집에 야승이 뭡니까? 원주 별좌 한번 못살았다 이거죠. 부전은 더 못살았고, 총무나 삼직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주지는 언감 생신 도저히 꿈도 못 꾸는 그런 상황에서 살았다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를 여기 뭐 하러 담겠습니까? 이건 괜히 내가 하는 넋두리죠. 넉넉한 마음으로 고요히 야승의 가의 집에 야승의 집에 앉아 있으니,


?寂安居實蕭灑(격적안거실소쇄)라 고요할 격? 고요할 적寂 “고요하고 고요해서 安居편안히 살고 있는데 실로 참으로 蕭灑하다.” 뭐 소쇄원이라고 하는 곳도 있죠. 소쇄라고 하는 아주 깨끗하고 아주 상쾌하고 상그럽다 뭐라고 할까 물 뿌린 듯이 아무도 오지 않고 깨끗한데다가 물을 뿌려서 깨끗이 쓸어버려서 티 하나 없는 그런 느낌을 주는 환경을 말하는 거죠. 참으로 소쇄하다. 이것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요.
?寂安居實蕭灑(격적안거실소쇄)라 진짜 소쇄하다 소쇄의 의미가 진짜 내가 사는 이런 상황에서 또 나 같은 정신으로 나 같은 생활 환경으로써 이렇게 사는 것이 이거야 말로 정말 소쇄한 그런 정경이다. 이런 표현이 되겠습니다.


覺卽了不施功(각즉료불시공) 一切有爲法不同(일체유위법부동)이라 覺卽了不施功(각즉료불시공)라 “깨달으면 곧 마치고 공을 베풀지 않는다.“ 내가 자주 말씀 드렸죠.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치를 알면 그것뿐이다. 그 외에 달리 다른 노력은 필요치 않다. 그리고는 인연 따라서 자기 분 따라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랬어요. 인연 따라서 분 따라서 살면 되는 것이고 굳이 애써서 꼭 이래야 된다. 꼭 저래야 된다 하는 그런 것은 사실은 물론 그런 것을 좋아하는 근기를 위한 방편이죠. 그렇지만 사실은 실법에 있어서는 방편을 떠난 진짜 법에 있어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覺卽了不施功(각즉료불시공)에요. 이치를 알면 그뿐 이예요. 진리라는 것이 뭐죠. 참 진眞 이치 리理예요. 참다운 이치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참다운 이치. 세상사에 대한 참다운 이치 인생에 대한 참다운 이치 그것을 깨달으면 그뿐 이예요. 아~ 이것이 삶이구나! 이것이 인생이구나! 이것이 정말 참 이치구나! 진리구나! 이것이 즉 법이구나 ! 이것이 도구나! 사는 길이구나. 法이라는 것도 뭡니까? 물수 변에 갈 거죠. 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 조작이 없는 것. 물은 그대로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지갈 길을 잘 찾아서 가지 않습니까? 밑으로 밑으로 낮은 곳을 향해서 그렇게 갑니다. 그게 法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것. 그런 것을 깨달아서 그기에 맞게 무리 없이 순리대로 사는 것 이게 불교입니다.


覺卽了不施功(각즉료불시공)라‘깨달으면 그걸로 끝나고 마치고 공을 베풀지 않는다.’ 그래요 깨닫기까지는 우리도 이렇게 증도가도 배우고 금강경도 독송하고 천수경도 독송하고 절도 하고 정말 머리를 찧어 가며 용맹 정진도 하구요.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노력 그런 정진이라야만 꼭 깨닫는다 하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것하고 깨닫는 것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과거 깨달은 분들이 그런 노력을 해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잘 아는 육조혜능 같은 이도 나무 팔러 갔다가 금강경 구절 하나 듣고 그냥 깨달아 버렸지 않았습니까. 또 여기 영가 증도가의 주인공도 유마경에서 한 소리에 턱 지혜의 눈을 뜨게 되고요. 그렇습니다.


一切有爲法不同(일체유위법부동)이라 그랬어요. 공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전부 일체 유의 법이 다고 그랬어요.공을 베푼다는 것이 뭐예요. 육바라밀을 위시해서 기도하고 용맹 정진하고 뭐하고 뭐하고 불교의 주문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문도 많지만, 주문이 그리 많아요. 뭘 배워야 된다. 뭘 외워야 된다. 내가 어느 날 주문을 대게 신봉하는 그런 사이트에 들어가게 됐는 데, 그 무슨 주문을 이야기하면서 그 주문이 세상에서 제일이고 무슨 부처님 이름 십만 십억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보다 이 주문을 외우는 게 좋다 이식으로 해 놓았어요.


참 방편 기가 막히죠. 그런 소리 들으면 어지간한 사람들 혹하죠. 야, 이렇게 근사한 게 있고 이렇게 공덕이 많은 게 있는가 싶어 가지고 그래서 참 방편은 정말 멋진 방편을 잘 썼다 그런 방편에 걸린 사람은 참 열심히 잘 할 것이고, 참 우리 같이 어둡잖아 가지고 방편에 안 걸린 사람들은 참 방편 잘 썼다 하고 웃음이나 한번 웃고 마는 그런 상황이 될 텐데, 그 외에 그 주문을 칭찬해 놓은데 보면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해 놓았어요. 그래 보다가 그만 아니다 싶어서 덮고 말았는데, 무슨 주문이라고 하면 다 아실 것 같아서 그 주문 이름은 대지를 않습니다마는 그래요. 그래 공을 베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육바라밀을 꼭 닦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뭐 주문이나 기도나 무슨 참선이나 다 필요하긴 하죠. 하면서도 꼭 그것이라야 된다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覺卽了不施功(각즉료불시공)이라 알면 되는 거요. ‘알면 되는 거지 굳이 공을 베풀어야만 된다 하는 조건은 없다’는 것입니다. 공을 베푸는 일은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이다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은 각각 다르죠. 전부 같지 않습니다. 변화무쌍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사람 근기 맞춰서 이야기 된 거예요. 그러니까 뭐 방편에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할 건 절대 없고, 잘한다고 그렇게 격려를 해 줘야 돼요. 어느 날 그 방편에 열중하다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는 그 방편을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 방편이 한결같지가 안잖아요. 유위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위법은 전부 조작이 있는 것이고 만든 것이고 일부러 그렇게 해 보는 것이고 그게 유위법입니다.


一切有爲法不同(일체유위법부동)이라 “일체 유위는 법이 한결같지가 않다.” 같지가 않다. 영가스님께서 정말 깨달으시고 그 깨달음에 대해서 뭐 더 과장해서 하고 싶으면 했지 정말 없는 이야기를 할 까닭은 없고, 무슨 방편을 써 가면서 아껴 가면서 또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대로 아무래도 당신이 깨달은 이치보다야 말에는 그 어떤 한계가 있으니까, 그 표현이 아무래도 많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부족함을 느꼈을 거예요. 의례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뭐 꽃 한 송이를 봐도 내가 느끼는 것하고 표현하려고 하면 언어가 이렇게 참 정말 온전치 못한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데 마땅치 못한가 하는 것을 스스로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정말 바른 이치를 깨달으신 분으로서 그 이치를 설명하려고 하는 데는 그야말로 말이 참 부자유하고 온전치 않다고 하는 것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표현돼 있는 말씀은 그대로 우리가 방편이라고 볼게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마땅하다 하는 생각입니다.


住相布施 生天福 (주상보시 생천복) 猶如仰箭射虛空(유여앙전사허공)라 “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하는 것은 천상에 나는 복이다.” 뭐 보시 좀하고 상좀 내면 일단 칭찬받죠. 칭찬받으면 기분 좋습니다. 그게 천상에 난거죠. 또 죽은 뒤에도 천상에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천상에 나는 인천인과교는 복 지어서 좋은데 떨어진다. 그런 것은 불교 교리 상에도 불교에 들지 안 해요. 소승교에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천인과교라 이렇게 말하지 그건 천당을 주장하는 그런 교에서나 필요한 거죠. 그런데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니죠. 여기서 상에 머물러서 보시하는 것은 천상에 나는 복이다. 그랬어요.


정말 금강경에서 보시를 말씀하시면서 끊임없이 상에 머물지 말고, 무주상 보시 무주상 보시 얼마나 많이 합니까? 우리 불자들은 절에 다닌 지 한달만 되면 무주상 보시를 알아들어요. 그만치 무주상 보시가 좋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은 그 속성이 상내기를 좋아하고 아무리 상을 안내려고 해도 자기도 모르게 상이 나가고 상이 표현이 되고 그래요. 그게 어느 날 바른 이치를 깨달았을 때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되겠죠. 미리 그걸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상 보시 상에 머물러서 상을 내면서 보시하는 것은 천상에 나는 복이다.


猶如仰箭射虛空(유여앙전사허공)이라“마치 하늘을 향해 가지고 화살을 쏘는 것이다.” 화살을 위로 향해서 쏘는 것이다. 위를 향해서 쏘면 어떻습니까? 쏜 사람의 어떤 힘에 따라서 올라가는 탄력이 있는 동안까지는 올라가죠. 올라가다가 그게 10미터가 됐던지 100미터가 됐던지 올라가다가 올라가는 힘이 다 떨어지면 결국은 땅으로 내려오죠.


勢力盡箭還墜(세력진전환추)라 “勢力이 다하면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도리어 떨어진다.“ 화살은 도리어 떨어진다. 招得來生不如意(초득래생불여의)라 ”來生에 如意치 못함을 초래하게 된다.“ 여의치 못하고, 내 뜻대로 안된다. 복지 어서 두고두고 복을 우려먹고 복을 받으면서 살아야 되겠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보시할 때 복을 지을 때 그냥 순수하게 하고 싶어서 해야지 아휴 네가 복 받아야 되겠다. 내생에 복 받아야 되겠다. 그 어떤 좋은 과보로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생각 없이 그냥 순수하게 불쌍한 생각이 나면 주고, 어느 사찰에 불사하는데 도울 마음이 나면 그냥 주는 거예요.


아~ 이걸 어떻게 하면 물론 스님들은 방편으로 뭐 이런 저런 유혹하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어떤 대가를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또 그런 방편에 걸려드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여기서 증도가의 입장에서 증도가를 앞에 놓고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라면 그냥 주세요. 그냥 보시할 수 있는 마치만 자기가 해도 후회되지 않는 마치만 그냥 주세요. 후회되는 일은 절대하면 안 되니까요. 해 놓고 후회되면 그것은 상내는 것보다 더 안 좋지요. 후회하는 그 순간 아깝다 싶은 생각이 들면 그건 벌써 상을 내는 것이고, 어쩌면 아마 지은 복을 까먹게 될 것입니다.


여기 勢力盡箭還墜(세력진전환추)하여 招得來生不如意(초득래생불여의)勢力이 다하면 땅으로 떨어진다. ‘복 지은 것이 다하면 상을 내서 보시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다할 것 같으면 그 다음에 그 복을 복의 대가를 제대로 생각한 만치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거죠.’그대로 주면 아무런 상없이 단돈 천원이라도 아무 바라는 바 없이 대가 없이 그런 생각도 없이 어렵긴 하죠. 그렇게 주면 그 복은 영원히 갑니다. 그 복은 정말 한순간 아주 작은 보시라고 하더라도 정말 그렇게 마음에 흔적 없이 보시를 했다면 그것은 영원히 간다고요. 그런데 흔적 없기가 참 어려운 거죠. 招得來生不如意(초득래생불여의)란 그런 뜻입니다.

이제 세력이 다해서 화살이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어떻게 됩니까? 땅으로 내려오면서 땅으로 그냥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화살 끝이 밑으로 향해서 떨어지죠. 그러면 어떻게 되죠. 땅 밑으로 깊숙이 박히게 됩니다. 그러면 화살이 처음에 하늘로 올라가기 이전보다 더 낮은 곳에 가 있고, 더 못해요. 복 짓는 일도 그렇습니다. 복 짓는 일도 그래가지고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유루복 조작이 있는 이런 복을 삼생의 원수다 이런 말을 해요.


이건 경전 밖의 불교입니다. 경전 밖의 이 뭡니까? 경전에도 없고, 교리에도 없고, 하는 그런 불교가 또 있어요. 이 삼생의 원수다. 이런 말은 복을 짓는다고 일생 허비하고, 그 복을 받는다고 일생 허비하고, 그 다음에 그 후에 떨어져서 복진 타락이라고 해요. 복이 다하면 더 현재의 상태보다도 더 못한 곳으로 떨어져요. 마치 화살이 올라갔다 내려오면 땅속으로 박히듯이 그래서 현재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태보다 훨씬 더 못한 대로 떨어진다. 그랬습니다. 유루복은 그래요. 주상 보시는 그와 같습니다. 참 상당히 주의해야 할 그런 일이죠.


상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표현하지는 말아야 된다는 거죠. 속에 꾹 참고 어떻게 하더라도 자기가 삭혀야지 마음속에서 상이 나는 거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죠. 내 수양이 거기까지니까 그런데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것만 해도 아주 장한 거죠. 뭐 사찰에 보면 뭐 종종 그런 일이 있겠죠. 여기 뭐 그전에 범어사에 어떤 스님이 원주스님 내가 잘 아는 스님인데, 그 스님한테 어떤 신도가 보시를 상당히 했다고 그래요. 상당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스님이 자기가 생각했던 그런 스님이 아니더라 이거야 그래서 이런 자질구레한 소리가 몇 가지 있는데 자기가 생각 기대했던 그런 스님이 아니더라. 그래서 줬던 보시를 도로 빼었다고 하는 거예요. 달라고 해서 도로 찾았다는 거예요. 그 돈 액수가 오천만 원이예요. 상당한 돈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우리 도반 스님에게 또 그 신도님이 도반 스님에게 시주를 많이 했어요. 그 신도님은 전국에 시주를 아주 많이 엄청 많이 한 분이예요. 도반 스님에게 시주를 하고 절도 지어 주고 잘 하면서 한참 사이가 좋을 때, 그 얘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아 그래서 범어사에 어떠어떠한 스님이 있는데 내가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들으니까야) 확인 한 것도 아닌데 들으니까 그 스님이 어떻다 해서 빼었다고 이걸 자랑이라고 그걸 하더라는 거지. 그런 그 스님도 나한테 그 얘기를 안 했을 텐데 결국은 그 스님하고도 사이가 안 좋아져서 그 스님이 신도님하고 원수가 되다시피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그 신도를 또 흉을 보면서 그런 소리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들은 거죠. 허~~허~ 그렇게 말 안 해도 속에서 상이 일어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은 그것을 표현만 안 해도 그건 상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상을 내면은 결국 가서 화살이 땅 밑으로 꼽히는 것과 같이 복진 타락이라 해서 그걸 아주 경계를 많이 하고 있어요. 이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 보는 조사 스님들은요. 그것을 상당히 경계를 많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루복은 삼생의 원수다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짓는데 일생 걸리고 유루복 받느라고 떵떵거리고 수용하느라고 그래서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성인의 공부도 못하고 도는 말할 것도 업구요.


사실 정말 부유하게 살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 불교 공부 깊이 하는 사람 내 못 봤어요. 뭐 불자라곤 해도 이름이 불자지 시명이 불자지 불교 공부 깊이 하는 사람 없습니다. 뭐 자기 복 관리하다 볼 일 다보지 언제 불교 공부에 관심 가질 겨를이 있습니까? 불교 공부에 맛 들인다는 것 쉬운 게 아니에요. 불교 공부에 정말 맛들인 사람들이 제일 진짜 복 많은 사람들이고 훌륭한 분이고 상근기고 아주 현인입니다. 사실 나는 당당하게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복 많고 유루복 많은 사람이요 대개 부유한 사람들 회사가 몇 개씩이나 되고, 이런 사람들 불교 공부 깊이 한다는 사람은 들어 보질 못했어요.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옛날에 깨달으신 분들이 삼생의 원수다라고 했던 갔습니다. 유루복은 적당히 있어야지 너무 많이 있으면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또 현명한 사람 정말 현명한 사람은 많이 있어도 괜찮지요. 여기에 마침 영가스님께서 유루복에 대해서 이렇게 아주 시원하게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勢力盡 箭還墜(세력진전환추)하니 招得來生不如意(초득래생불여의)로다 來生如意지 못함을 초래하는 도다.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친불회 임제록 합동강의
안녕하십니까?
오늘 3월 13일 염화실 인터넷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월요일 친불회하고 합동으로 법회하는 날인데 친불회 회원님들이 차가 막혀서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친불회 회원들이 오면은 그때 이제 임제록을 가지고 하기로하고 일단은 증도가를 가지고 지난시간에 하던 다음부터 그대로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분들이 오면 다시 이제 임제록을 가지고 하도록 하고요.

지난시간에 유루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유루복도 알맞게 있어야 되지요. 전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만은 그러나 또 너무 유루복이 많아도 크게 사람 살아가는데 크게 보탬이 되는건 아닙니다. 뭐 유루복이라고 하는거야 기껏해야 뭐 의식주문제 해결하는 거지요. 물론 의식주문제 해결도 얼마나 질적으로 우수하게 해결하느냐하는 그런 문제는 있겠습니다만은 그건 뭐 한이 없는 것이구요.

그래서 영가스님의 깨달음의 안목에서 볼 때에는 이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 조작이 있는 것 뭔가 이렇게 애써서 자연스럽지 못하고 무언가 애써서 하는 그런 것들은 늘 변화가 많으니까 그것은 사실은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정말 변화가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위의 도리 또 우리의 본성, 또는 본연의 도리 이것이 이제 가장 믿을 만한 것이다.

그래서 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하는 것은 천상에 나는 복이다. 마치 그것은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거와 같아서 올라가는 힘이 있는 동안까지는 올라가지만은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내려오는데 내려와서 그냥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속 깊숙히 파고들기때문에 그것은 유루복이 다 하면은 현재상태보다도 더 못한 그런 삶을 살게된다는 것입니다.

뭐 정치인들이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보면은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그렇죠. 올라갈 수 있는데까지 올라갔다가 나중에 그것이 福盡墮落복진타락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다 되었을 때 떨어지는 것 보면은 보통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못한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뭐 형무소에 간다든지 자신이 안가면 가족이 간다든지 하는 그런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여기서는 이제 너무 지나치게 그렇게 치우쳐서 찾지 말라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다음구절이
爭似無爲實相門에 一超直入如來地리요 그랬어요.
쟁사무위실상문에 일초직입여래지리요

어찌 무위실상문에 한번 뛰어서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겠는가! 거기까지가 이제 사실은 그 내용이 거기까지 이제 이어지는데 무위라고 하는 말 불교에서 참 많이 써요. 이건 인제 하지 않는 상태로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굳이 뭐 꾸며서 한다든지 어떻게 조작을 한다든지 억지를 부려서 분에 없고 인연에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유위법이고 그건 허상이라고 그러지요.

실상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상태에 있는 그 모습, 본연의 모습 그 거기에서 뭔가 완전한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 이걸 이제 무위실상문 이라 이렇게 합니다. 그런 도리에서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그것이 이제 제일이라는 거지요. 아무리 유위 복을 많이 지었고 노력을 해서 뭐 올라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니까 그래서 전혀 그런 것과 관계없는 그런 이치가 분명히 있으니 그런 이치에 그~ 마음을 두어서 거기에 어떤 그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하라. 행복을 찾도록 하라.

또 여기서는 이제 絶學無爲閒道人절학무위한도인이라고 했지요. 도의 삶을 누리는 그런 삶을 거기서 찾도록 하라. 이렇게 인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증도가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동안에 친불회 회원들이 모두 지금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증도가는 여기까지하고 친불회교재 임제록을 가지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공부 시작했습니다.
그 임제록 공부하던 거 그대로 진행할테니까
임제록은 우리 교재 보통 교재 14-1부터 할 차례인데요.

14-1. 文字에 속지 말라

師示衆云 사시중운 하는 대목입니다. 제목을 나는 文字에 속지 말라. 그런 제목을 붙였어요. 문자라고 하는 것은 말이라든지 또 어떤 뭐 경전의 가르침이라든지 아주 뭐 조사스님들이 아주 정말 높은 지견에 의한 고도의 지견에 의한 그런 그 가르침까지도 이 속에 다 이제 포함됩니다.

물론 문자를 가지고 그 어떤 진리를 또는 도를 전하는 하나의 수단방법은 되지만은 그것이 또 어떤 결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쫓아가고 거기에 집착하면은 그건 이제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이런 수단 방법인 문자를 손가락이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하나의 방편이다 수단이다 그런 뜻입니다. 달은 따로 있지요. 달은 따로 있는데 달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이제 가리키는 것이지 그러면은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고 그것이 모두인 양으로 그렇게 알아서는 안된다하는 그런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이 이제 문자라는 거지요. 문자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師示衆云 사시중운
임제스님이 대중스님들에게 보여서 말씀하시기를 요즘 학도인은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또한 요컨대 스스로를 믿을 것이고 自信 스스로자字 믿을신字입니다. 스스로를 믿을 것이요.

莫向外覓 막향외멱하라
밖을 향해서 찾지 마라. 여기서 이제 바깥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은 전부 바깥입니다. 자기 자신의 어떤 진실을 믿을 일이지 그 외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어떻게 한다든지 조사가 나타나서 어쩐다든지 아니면 무슨 보살이 나타나서 어떻게 한다든지 하는 것 그건 다 남이지요 경계에 불과 합니다. 아무리 뭐 부처님 아니라 어떤 그 훌륭한 그런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 아닌 다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을 향해서 찾지 마라.

總上他閑塵境하야
총상타한진경하야
모두들 요즘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보면은 부질없는 그런 경계를 숭상해서

都不辨邪正하나니
도불변사정하나니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리지 못하니 거기에 무엇이 邪사인지 무엇이 正정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이 손가락인지 무엇이 달인지 무엇이 실법實法인지 무엇이 방편方便인지 이것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뭐 지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로서 전달하는 것인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쓰기는 쓰지만은 이 말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말에 너무 집착하거나 떨어지지 말라고 하는 그런 가르침을 부처님도 누누이 말씀하시고 조사스님들도 말씀으로써 하시면서 역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말에도 집착하거나 떨어지지 말라. 그런 말을 하지요.

다만 저 조사가 있고 부처가 있는 것은
皆是敎迹中事라
개시교적중사라 그랬어요.
뭐 부처가 있느니 조사가 있느니 하는 또 보살이 있느니 나한이 있느니 얼마나 경전상에 많이 있습니까? 교적중사敎迹中事 교敎의 자취 가운데 있는 일이다. 이거 우리가 잘 기억해야 돼요.

예불할 때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시아본사라고 그렇게 합니다. 본사 본 스승 그래요. 그 외에는 사실은 전부 본 스승이 아닙니다. 전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소개받은 분들이에요. 관세음보살이든지 지장보살이든지 문수나 보현도 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소개받은 분들이지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本師 근본本字 스승師字 본사라고 그렇게 표현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敎迹中事 교적중사
교의 자취가운데 있는 일이다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고 만나게 되는 그런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조사라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조사라는 것도 전부 어떻습니까? 뭐 기록상의 근거를 두고 우리가 조사님 조사님 하는 거지요. 임제스님도 지금 우리 입장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임제록을 보고 있는데 임제록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임제스님을 우리가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교는 그런 점이 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철저히 자신까지도 부정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자신까지 부정했을 때 그때서 비로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그런 그 이치 그런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은 남겨두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만 부정한다면은 그건 이제 서로 잘못된 견해가 되겠지요. 그건 이제 있을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철저히 자기 자신의 말씀까지도 부정해 버림으로 해서 진정 당신이 전하고자하는 그 의미가 듣는 사람에게 전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뛰어난 점이고 또 특별한 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사가 있다 뭐 당연히 조사가 있다 부처가 있다하는 말 속에는 임제스님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지요. 그 다 敎迹中事라 교적중사다. 임제스님 임제스님 하지만은 이게 다 임제록을 통해서 우리가 다 아는 거지요. 그렇지 임제스님은 아니잖습니까?

皆是敎迹中事라
개시교적중사라
有人拈起一句子語하야
유인념기일구자어하야
유인은 어떤 사람은 한 구절의 말을 잡아 일으켜서

或隱顯中出하면 便卽疑生하야
혹은현중출하면 변중의생하야
곧 은연중 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은隱이라 그러고 잘 알려지는 것을 현顯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알듯 말듯하게 그 말하자면은 드러나는 듯 숨은 듯 이렇게 이제 그 뭔가 사람을 한번 떠 보는 그런 형식으로 그렇게 이제 한마디를 내 놓을 것 같으면은 거기에 곧 의심을 낸다 이거지. 뭐 우리화두가 다 그런 거죠.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했을 때 없다라고하면은 거기에 그만 또 자기의 어떤 그 불교적인 지식을 동원을 해서 없다라고 하는 그 말에 매달려서 이러쿵저러쿵 이제 의심을 일으키게되고 사량을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제 그런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이 요즘사람들에게 이해가 안 되니까 그게 전부 공안公案 화두話頭가 되고 문제가 되고 그렇지 제대로 알려 그 당시 스님들은 일부러 그렇게 의심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에요. 이제 모르니까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은 그래서 이제 어떤 구절이던지 어떤 말씀이든지 그렇게 내놓게 되면은 거기에 들어붙어서 곧 의심을 낸다 이거죠.

그래서 照天照地에 조천조지에 이건 이제 이리저리 생각한다는 거에요. 하늘을 비추고 땅을 비춘다 라고 하는 말은 이리저리 생각하는 거죠. 이게 뭐 그래서 무자 십종병 이니 이런 말이 있지요.

무자화두가 이제 보통 간화선에서 제일 많이 거론되는 화두가 무자화두고 또 간화선을 제일 처음에 크게 주창한 이가 대해종고선사인데 그 분이 무자화두를 많이 권했었어요. 그러면서 뭐 무자십종병이니 하는 그런 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照天照地조천조지라고해서 이리저리 생각한다. 하늘을 비치고 땅을 비친다라고 하는 말은 어디 구석구석 생각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다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열 가지 병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게 진짜 있다는 소린가? 아니면 누구를 뭐 한번 떠 보려고 하는 소린가? 유와 무의 상대적인 무인가? 별별 그런 궁리를 다 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열 가지나 그렇게 나올 수 있는지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게 정말 여러가지죠. 그러니까 없다라고 하는 그 한 마디 말에 열가지 병이 붙을 수 있다.

방가심문傍家尋問이라 그래요. 앞뒤로 옆집으로 앞뒷집으로 옆집으로 좌우로 그냥 찾아다니면서 또 묻고 그렇게 한다는 거지요. 그게 이제 뭐 전적을 뒤진다든지 뭐 참고서를 뒤진다든지 아니면 조사어록을 뒤진다든지 등등 이리저리 그저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경전이나 어록을 뒤지기도 하고 하는 그런것을 照天照地 傍家尋問 조천조지 방가심문이라.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해서 야태망연也太忙然이로다. 그렇게 해봤자 해결이 안 되지요. 그래서 또한 크게 망연하다 아득하다 이겁니다. 전혀 크게 바쁘다 바쁠 망 忙字지요 바쁘다 또한 아주 그 이것저것 뒤지고 찾고 헤아리고 분별하느라고 아주 뭐 바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말입니다.

大丈夫兒여 莫祇麽論主論賊하며
대장부아여 막지마론주론적하며
그렇게 그런 식으로 문자상이나 또 조사스님들의 어록이나 이런 것을 쫓아가면서 그렇게 주인을 논하고 그 다음에 적을 논하고 이게 이제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은 틀리고 이런 뜻이죠. 여기서 주인과 적. 이건 이제 정치적인 그런 그 당시 어떤 상황으로 이런 용어를 썼는데 누가 주인이냐 누가 도적이냐 성공한 사람이 주인이고 뭐 패한 사람이 도적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뭐 주인과 도적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성공하면 도적도 주인 노릇하는 것이고 패하면은 정치에서 패하면은 주인도 도적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뭐 주인을 논하고 도적을 논한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용어를 그렇게 써서 그렇지 어느 것이 맞는거냐 어느 주장이 맞는거냐 이런 이야기죠.

論是論非 논시론비
옳은 것을 논하고 그른 것을 논하며

論色論財 논색논재
색을 논하고 재물을 논해서 별별 그 많은 그냥 동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다 해서

論說閑話過日하지말라
론설한화과일하지말라
논설로써 부질없는 말하며 세월을 보내지말라 말 막자 莫 字를 거기다 해석하지요. 그런 식으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 이거에요.

山僧此間에는
산승차간에는
산승의 바로 이 자리 그러니까 임제스님 회상에는 임제스님이 많은 대중들을 모아놓고 사람들을 지도하는데 내가 펼치고 있는 바로 이 법석에는

不論僧俗 이요
불론승속이요
승과 속을 논하지 않는다 이거야 그걸 따지지 않는다 이거지 그게 뭐 도라고 하는 것이 승속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도의 본질에 있어서 본다면은 승속을 따로 이야기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어떤 살아가는 형식이 다소 이제 다르다면 다를까 그것도 뭐 꼭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거에요. 세속에 사는 사람도 스님 출가한 승려 이상으로 스님같이 사는 사람이 있고 출가한 승려도 세속인 이상으로 속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그거 뭐 전혀 그런 분별이 없지요.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은 그러니까 당연히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不論僧俗이라
불론승속이라
승속을 논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내 앞에 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盡識得伊라
진식득이라
그들의 정체를 다 알아본다 숨길 수 없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디에 관심이 있고 얼마나 어떤 그 문자나 어떤 그 역사나 아니면 그런 그 지식 이런데 휘둘리고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환히 내다보고 있다 이거야

盡識得伊다
진식득이다
다 그것을 내가 알아본다 그들의 정체를 내가 알아본다

任伊向甚處出來하나
임이향심처출래하나
그대들이 어느 곳을 향해서 왔던 간에 어디에서 왔던 간에 이건 이제 뭐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지요.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고 평소에 그 사람 살림살이 뭐 지식이나 사상이나 관심사나 이런 것들이 무엇이었던 간에

但有聲名文句하면
단유성명문구하면
다만 성명문구 대개 뭐 스님 찾아온 사람이 다른 장사하러온 사람이야 있겠습니까? 어쨌든 도에 관해서 알려고 오는 사람들이니까 자기 나름대로 경전이나 어록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이제 들고 오는 거지요. 거기서 들은 지식과 거기서 이제 자기 나름의 어떤 그 공부한 것을 가지고 이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성명 문구에요. 경전어록을 성명문구라 그렇게 이제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다만 그런 성명 문구를 가지고 올 것 같으면
皆是夢幻이라
개시몽환이라
그런 것은 전부 몽환이다 이거야 꿈이고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건 그들 그 들고 온 그 사람은 진짜인지 모르지만은 그들이 들고 와서 내 놓는 거 입을 통해서든지 뭐 하여튼 내놓는 그들의 살림살이는 전부 몽환이다 이거지. 여기에 이제 뭐 들고 온 그들 자신은 이런 이제 내가 말을 했지만은 그런 말은 여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지요. 그러나 그들이 들고 온 물건은 다 가짜다 이겁니다. 그게 뭐 부처님 화엄경이 되었던 뭐 열반경이 되었든 법화경이 되었던 금강경이 되었든 어떤 그 대승불교의 진수라고 하는 것을 들고 오더라도 그건 다 가짜다 이거지 몽환이다 이거야 들고 온 그 사실 그 사람 그 당체는 좀 다르지요. 그건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들고 와서 귀중하다고 내놓는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질문을 하게 되니까 그래서 이제 이런 말이 ......


다음은
14-2. 사람에 따라 모습을 나타낸다.

却見乘境底人하니
각견승경저인하니
도리어 경계를 타고 오는 사람을 보니 이랬는데 이제 경계에 끄달리는 사람 또는 경계를 사용하는 사람 그 어떤 경계 여기서는 이제 타고온다 라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좀 능동적인사람, 경계를 부리는 사람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어요. 탈乘 字기때문에.. 그런 사람을 보니

是諸佛之玄旨라
시제불지현지라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경계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거야 능동적으로 是諸佛之玄旨라 제불지현지라 이것은 모든 깨달은 사람의 안목이다 깊은 뜻이다 이거죠.

佛境이不能自稱我是佛境이요
불경이불능자칭아시불경이요
부처의 경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능히 스스로 자칭해서 낳은 부처의 경계다 하는 경우는 없다는 거지요. 그런 소리 한다면 그건 뭐 백발백중 그거는 엉터리고 잘못 자신이 착각에 떨어져있는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착각에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은 사기 치거나 둘 중의 하나죠.

還是這箇無依道人이 乘境出來니라
환시자개무의도인이 승경출래니라
무의도인 또한 그 이 무의도인 저개무의도인 하는 말이 참 중요한 말인데 의지함이 없는 도인 일 말입니다. 여기 뭐 임제스님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임제스님께 물으러온 학인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그야말로 본래인本來人 임제록에서 자주 말하는 무의진인無依眞人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인本來人 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아무 그런 치장도 어떤 그 장식도 없는 그런 그 본래인, 본분인 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고 왜 이제 그런 이를 무의도인이라고 하는가 하면은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라고 하는가 하면은 우리는 참 어디에 근거하고 의지하고 어디다가 살아온 어떤 경험과 역사와 자기의 어떤 상식과 관습과 이런데 전부 기준을 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살아와요. 그래도 정말 그것도 아닌 뭐야 잎도 다 떨어지고 가지도 다 떨어지고 나무로 치면 이제 원 둥치 하나만 남아있는 듯한 그런 그 본래인, 본연의 사람 이걸 이제 무의도인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도 잘 써요. 피부탈락기이라 무슨 뭐 잎도 가지도 다 떨어지고 껍질마저도 다 벗겨진 그런 알짜 원줄기만 남아있는 듯한 그런 그 어떤 본연의 인간 그걸 이제 말하는 거지요.

무의도인
這箇無依道人이 乘境出來니라
자개무의도인이 승경출래니라
경계를 타고 온 것입니다. 경계를 부리면서 경계에 끄달리지않고 경계를 활용하면서 온 것이다.
그게 이제 저 앞에서 말한
乘境底人이 諸佛之玄旨다
승경저인이 제불지현지다
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 뜻 이죠

若有人이出來하야 問我求佛하면
약유인이출래하야 문아구불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서 부처 구하는데 대해서 묻는다 부처되는 것 성불하는 것을 묻는다 이거야 성불하는 것을 물었으니까 아주 대단히 존귀한 것을 물었지요.
그러면 나는
卽應淸淨境出하고
즉응청정경출하고
바로 그 부처의 경지에서 응해준다 맞아준다 이거에요. 부처의 경지에 응해서 내 놓는다 이거지 뭐든지 뭐 묵묵히 있는 게 부처라고 한다면 묵묵히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아니면 뭐 이 사람 수준에 맞춰서 그 어떤 태도나 자세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보살에 대해서 묻는다.
有人이問我菩薩하면
유인문아보살하면
부처보단 좀 차원이 좀 낮다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 보살의 경지에 대해서 물으면
我卽應慈悲境出이라
아즉응자비경출이라.
보살은 자비가 위주니까요. 그래서 나는 곧 자비에 맞춰서 그 자비의 경지에다 응해가지고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出출이라는 것은 내놓고 보여주고 그러니까 근기 따라서 보여준다는 거지요.

또 有人이問我菩提하면
유인이 문아보리하면
보리는 깨달음이니 도니 뭐 이런 말을 쓰지요. 그러면은 나는 곧 응해가지고 淨妙境 정묘경에 응해서 내어 놓는다. 淨妙境 그건 이제 바로 깨달음의 경지, 도의 경지 여기서 말하는 보리의 경지니까 거기에 맞춰서 내놓는다.

有人이 問我涅槃하면
유인이문아열반하면
나에게 열반에 대해서 물으면은 열반은 고요한 것이니까 모든 망상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고 뭐 편안함까지도 사라진 그런 상태죠. 그건 적정입니다. 적정에 맞춰서 적정경계에 맞춰서 내놓는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러한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 境界인즉은 萬般差別이나
경계인 즉은 만반차별이나
묻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내놓으니까 그런 그 내놓는 경계가 보여주는 경계가 만 가지로 차별하지만은
人卽不別이라
인즉불별이라.
나 자신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니냐 이거지. 다르지 않은 내 한 사람이 그런 여러 가지 상대에 따라서 그렇게 이제 나타내 보인다.

所以應物現形은 如水中月이니라
소이응물현형은 여수중월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應物現形 응물현형 중생에게 맞추어서 사람에게 맞추어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 고 허니 물에 비친 달과 같다 水中月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래 이제 달이 보름달이면은 물에 보이는 달도 보름달일 것이고, 그믐달이면은 역시 그믐달로 나타날 것이고, 초생달이면 역시 초생달로 나타날 것이고, 칠팔일의 달 같으면 역시 칠팔일의 달 모습으로 그대로 나타날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걸 이제 보통 천강유수천강월 千江有水千江月 이라는 이런 말을 쓰는데 천 강에 물이 있으니 천 강에 달이 비친다. 달 비치는 것도 그때 달의 모양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렇게 이제 강에 비친 달도 늘 다르죠.

그게 이제 부처님의 그 응신 또는 화신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상대에 따라서 나타내 보이는 차별된 모습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사실은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달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지요. 달은 뭐 그믐달이라 하더라도 가려서 그믐달로 보이고 초생달로 보이는 것이지 원달은 뭐 전혀 변동이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임제스님이 오는 상대에 따라서 이런저런 경계를 내 보인다 하더라도 임제스님 자신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건 뭐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사람마다 다 같을 거 에요.
그 다음 또 한 대목 하겠습니다.


14-3. 大丈夫

道流야 그대가 若欲得如法이면
도류야 야욕득여법이면
만약에 그대들이 만약에 여법함을 얻고자 한다. 여법.. 불교에서 여법이란 말 잘 써요. 아주 뭐 사람이 아주 여법하다. 행사를 여법하게 한다. 그럴 때 아주 잘 씁니다. 하는 일이 생활이 또는 뭐 사람 됨됨이가 이런 모든 것들이 여법하게 한다. 여법하게 살자는 그런 소리도 결제 때마다 잘 쓰는 말이고 그렇죠.
그 여법함을 얻고자한다면

直須是大丈夫兒라야 始得다
직수시대장부아라야 시득다
바로 모름지기 대장부라야 된다. 여기서 여법이란 내가 설명한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법에 맞는, 진리에 맞는, 도에 맞는 그런 것을 여법이라고 하고 있죠.

若萎萎隨隨地하면
약위위수수지하면
시들시들하거나 흐물흐물할 것 같으면 그걸 이제 형용한 말입니다. 위위수수지 만약에 그 시들시들하거나 萎萎위위는 이제 시들시들 그 어떤 식물이 시들시들 하다는 거 에요. 흐물흐물하다는 것은 隨隨地수수지라고 말하고 萎萎隨隨地 위위수수지할 것 같으면 則不得也즉불득야하야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지 대장부가 그럴 수가 없지요. 천하를 삼킬 그런 기개가 있는 사람을 대장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夫如시[斯瓦]嗄之器는
부여시[사와]사지기는
이제 깨진 소리 또 깨진 그릇을 이제 시라고 하고 갈라진 목소리를 사라고 그렇게 하는데 어떤 깨진 그릇 같은 그런 깨진 소리그릇은 이 말이야

不堪貯醍醐이나
불감저제호이나
다 깨진 그릇에 제호같은 아주 좋은 음식을 담을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만약 큰 그릇 이라면은
直要不受人惑이라
직요불수인혹이라
이 참 임제스님 잘 쓰는 말이지요.
곧바로 不受人惑불수인혹 사람들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남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남에게 안 속는다 이 말입니다. 그 남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나 뭐 불보살까지도 다 사람에 해당돼요. 그들의 가르침도 역시 다 그 속에 포함됩니다. 어떤 뭐 고준한 그런 그 설법의 내용도 역시 사람에 해당되는 거지요. 나 내가 아니니까 첫째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어떤 것에도 그것은 경계가 되고 어떤 상대가 되 면은 그건 이제 아니라는거죠.

여기서 이제 임제스님은 한결같이 본래인, 진정한 자기 자신 그걸 이제 무의진인 이라는 그런 표현을 쓰는데 그걸 가장 중요시 여기지요. 그거 하나만 제대로 우리가 깨닫고 그것이 자기 살림살이가 만약에 된다면은 더 이상은 없다는 거에요. 부처고 조사고간에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성불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전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다 그 속에서 포함되어 있고 그 속에서 해결이 다 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 따르네요.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아주 임제스님 말씀 가운데 無依眞人무의진인 또는 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런 말이 아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런 유명한 말입니다. 곳을 따라서 주인을 지으라. 글자대로 해석을 하면 그거죠. 어느 곳에 있던지 어느 상황에 있든지 자기가 처해진 상황이 무엇이건 간에 항상 주인으로서 있으라. 이런 말이에요. 주인으로서 있으라. 이게 이제 참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隨處作主 우리는 현재 내 자신 진정한 내 자신을 대개 이제 망각하고 그저 시시각각으로 다른 것에 눈을 돌립니다. 없는 것에 눈을 돌리지요. 있는 현재 내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매~ 시시각각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립니다. 이미 주인을 망각한 것이고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고 객 노릇을 하는 거지요. 나그네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 자기를 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니까 隨處作主 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잘 이해를 해야 돼요. 그렇게 隨處作主 하면 어느 곳에 있던지 주인 행세를 하게 되면은 立處皆眞이라. 서 있는 그 곳이 자기가 처해 있는 그 곳이 자기가 뭐 사장이 됐던지 사원이 됐던지 뭐 노동자가 됐던지 사용자가 됐던지 어떤 그 입장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 있는 그 곳이 진리의 세상이다. 진실한 세상이고 진리의 세상이다. 개진皆眞이라 그랬어요. 자기 처해있는 자리가 무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장소에 처해있던지 내가 내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내 자신으로서 있느냐 아니면 어디에 휘둘리면서 어디에 미혹되고 거기에 놀아나면서 있느냐 하는 것 이 이야기입니다.

이건 아주 임제록 전편이 이 한마디 가지고 이야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팔만대장경 전체가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다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니지 않겠나. 그처럼 이제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이란 말이 중요하고 임제록의 뭐 안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但有來者어든
단유래자어든
다만 나에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皆不得受니
개불득수니
말하자면은 미혹을 받지 않는다. 받지 않는다 이거야. 미혹을 앞에서 이제 不受人惑불수인혹이라고 했는데 그 인혹을 받지않는다.

儞一念疑하면
이일념의하면
그대들이 한 생각 어떤 그 의심을 갖게 되면은
卽魔入心이라.
즉마입심이라.
자기 자신에서 1mm라도 벌써 거기서 어긋나게 되면 그건 이미 마가 우리 마음에 끼어든 것이다.

예컨대 보살이 의심하면은
生死魔得便이라
생사마득편이라
보살이 의심할 때 그러니까 상당한 수준에 있는 사람이 마음에 틈이 생기면 그대로 생사의 마가 편리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但能息念이요
단능식념이요
그러니 다만 망상의 생각을 쉴 것이고

更莫外求
갱막외구
다시는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라.

오늘 아주 중요한 얘기가 참 여러 번 나오는데 임제록의 핵심이 바로 이거죠. 언제나 자기 자신 챙기라는 겁니다.
임제록이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얼마를 알았든 전혀 불교와 불교공부가 없는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 임제록 같은 이런 그 제대로 된 가르침을 우리가 접해서 안목을 바로 세워야 앞으로 불교공부하는데 다른 길을 헤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 공부하면서 다른 길로 헤매가지고 불교 안 믿는 것보다 더 못하게 된 그런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들여다보면 더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안타까워요. 그거 뭐 조사어록 그 차원 높은 조사어록을 불교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서 되느냐 하지만은 임제스님이 그런 것을 분별하지 아니했고 모르는 사람일수록 이런 정견을 바른 소견을 세워주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평소에도 늘 합니다.

그러니까
息念식념
다른 생각을 쉬는 것. 그리고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둘이 아니죠. 생각 쉬는 게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는 것이고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고 모든 게 내 자신에게 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생각을 쉬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物來卽照하라
물래즉조하라
사물이오면 곧 그대로 비춰보라

儞但信現今用底하면
이단신현금용저하면
그대들이 다만 현금용저現今用底 지금에 쓰고 있는 것만 잘 믿으면

一箇事也無니라
일개사야무니라
하~ 일도 어떤 일도 아무런 일도 없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게 뭐겠습니까? 말하는 사람은 말하게 하는 것, 듣는 사람은 듣는 그 사실, 보는 사람은 보는 그 주인공 이게 현금용저에요. 그거 가지고 현금 사용하고 있는 것. 뭐 손을 움직이는 사람은 손을 움직이게 하는 그것일 것이고, 걸어가는 사람은 걸어가게 하는 그 주인공일 것이죠. 그거만 우리가 제대로 확신을 하게 되면은 아무 일도 없다. 뭐 육바라밀 닦는다 무슨 뭐 참선이다 염불이다 간경이다 이런 일이 하등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一箇事也無일개사야무 어떤 일도 거기에는 붙을 수가 없다 필요치도 않고. 일 끝난 거지요.

어떻게 보면 임제록 그 가르침이 불교공부로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인데 또 이게 이제 어렵게 들리는 사람도 많죠. 뭐 무슨 뭐 삼천 배를 해라 뭐 주문을 외워라 이러면은 오히려 쉽게 생각을 하고 그런 것은 잘 따라서하고 잘 이해를 하는데 이렇게 아주 쉽고 간단한건 또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 참 그것도 아주 묘한 일이지요.

一箇事也無니라 일개사야무니라.

오늘 공부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단락이 덜 끝났습니다 만은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證道歌 제13강
證道歌 永嘉 玄覺 大師
증도가 영가 현각 대사

君不見
군불견
絶學無爲閒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절학무위한도인 부제망상불구진 무명실성즉불성
幻化空身卽法身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환화공신즉법신 법신각요무일물 본원자성천진불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證實相 無人法
오음부운공거래 삼독수포허출몰 증실상 무인법
刹那滅却阿鼻業 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찰나멸겁아비업 약장망어광중생 자초발설진사겁
頓覺了 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夢裏明明有六趣
돈각요 여래선 육도만행체중원 몽리명명유육취
覺後空空無大千 無罪福 無損益 寂滅性中莫問覓
교후공공무대천 무죄복 무손익 적멸성중막문멱
比來塵鏡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誰無念 誰無生
비래진경미증마 금일분명수부석 수무념 수무생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약실무생무불생 환취기관목인문 구불시공조만성
放四大 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諸行無常一切空
방사대 막파착 적멸성중수음탁 제행무상일체공
卽是如來大圓覺 決定說 表眞僧 有人不肯任情徵
즉시여래대원각 결정설 표진승 유인불긍임정징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 摩尼珠 人不識
직절근원불소인 적엽심지아불능 마니주 인불식
如來藏裡親收得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여래장리친수득 육반신용공불공 일과원광색비색
淨五眼 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鏡裡看形見不難
정오안 득오력 유증내지난가측 경리간형견불난
水中捉月爭拈得 常獨行 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수중착월쟁염득 상독행 상독보 달자동유열반로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窮釋子 口稱貧
조고신청풍자고 모췌골강인불고 궁석자 구칭빈
實是身貧道不貧 貧則身常被縷褐 道則心藏無價珍
실시신빈도불빈 빈즉신상피루갈 도즉심장무가진
無價珍 用無盡 利物應時終不恡 三身四智 體中圓
무가진 용무진 이물응시종불린 삼신사지 체중원
八解六通心地印 上士一決一切了 中下多聞多不信
팔해육통심지인 상사일결일체요 중하다문다불신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從他謗 任他非
단자회중해구의 수능향외과정진 종타방 임타비
把火燒天徒自疲 我聞恰似飮甘露 銷融頓入不思議
파화소천도자피 아문흡사음감로 소융돈입부사의
觀惡言 是功德 此則成吾善知識 不因訕謗起怨親
관악언 시공덕 차즉성오선지식 불인산방기원친
何表無生慈忍力 宗亦通 說亦通 定慧圓明不滯空
하표무생자인력 종역통 설역통 정혜원명불체공
非但我今獨達了 恒沙諸佛體皆同 師子吼 無畏說
비단아금독달요 항사제불체개동 사자후 무외설
百獸聞之皆腦裂 香象奔波失却威 天龍寂聽生欣悅
백수문지개뇌열 향상분파실각위 천룡적청생흔열
遊江海 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自從認得曹溪路
유강해 섭산천 심사방도위참선 자종인득조계로
了知生死不相關 行亦禪 坐亦禪 語黙動靜體安然
요지생사불상관 행역선 좌역선 어묵동정체안연
縱遇鋒刀常坦坦 假饒毒藥也閑閑 我師得見燃燈佛
종우봉도상탄탄 가요독약야한한 아사득견연등불
多劫曾爲忍辱仙 幾回生 幾回死 生死悠悠無定止
다겁증위인욕선 기회생 기회사 생사유유무정지
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 入深山 住蘭若
자종돈오요무생 어제영욕하우희 입심산 주란야
岑崟幽邃長松下 優遊靜坐野僧家 闃寂安居實蕭灑
잠음유수장송하 우유정좌야승가 격적안거실소쇄
覺卽了 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각즉요 불시공 일체유위법부동 주상보시생천복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 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유여앙전사허공 세력진 전환추 초득래생불여의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 莫愁末
쟁사무위실상문 일초직입여래지 단득본 막수말
如淨琉璃含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여정유리함보월 아금해차여의주 자리이타종불갈
江月照 松風吹 永夜淸霄何所爲 佛性戒珠心地印
강월조 송풍취 영야청소하소위 불성계주심지인
霧露雲霞體上衣
무로운하체상의

證道歌 제12강

반갑습니다.
3월 14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이어서 오늘 증도가 단득본但得本막수말莫愁末
여정유리함보월如淨琉璃含寶月
여기서부터 할 차례인데 어제 친불회 법회하고 겹쳐지는 바람에 한구절 밖에 못했죠.

정사무위실상문爭似無爲實相門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여래지入如來地리요 이렇게도 하고요.
그러니까 어떤 유위법을 닦아가지고 변화무쌍한 유위법有爲法을 닦아가지고 설사 천상낙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유컨대 마치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화살이 이제 힘 있는데까지 올라가다가 힘이 떨어지면 도로 내려올 밖에 없죠. 그것이 뭐 순식간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아주 길고 긴 어떤 생을 우리가 생각한다면은 몇십년 설사 복을 누린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잠깐 사이고 또 복이 다 끝나면은 모두 좋지 아니한 그런 말로를 보이는 그런 현상들을 많이 봅니다.

특히 뭐 다른 나라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나라에서 소위 권세라든지 부라든지 명예라든지 이런 것이 있다는 사람들의 말로를 보면 대개 그렇죠 거의 뭐 우리가 소상하게 몰라서 그렇지 아는 것만 하더라도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좀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 줄 알아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그래서 여기는 무위실상문無爲實相門에서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들어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어찌 그와 같겠는가 이렇게 이제 여래의 경지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만 설사 여래의 경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 상태에서
현재 있는 이대로의 모습에서 뭔가 완전한 것을 깨닫고 거기에서 만족할 줄 알면은 그게 무위법無爲實이고 다른 표현으로 하면은 여래如來의 지地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래의 경지라는 것은 진리의 경지지 우리가 신앙적으로 특히 대승불교권에서 부처님을 아주 과장되게 어떤 만행만덕을 갖추고 아주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어떤 복과 신통력과 이런 것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장엄되어 있는 그런 어떤 그 인격자를 그리기가 일쑤죠 이쪽 대승불교권에서는 부처님을 대개 그렇게 상상을 하는데 사실은

여래如來란 바로 진리眞理 그 자체고 진리 그 자체란 현재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현재 이러한 상태대로 완전하다 하는 그런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곧 여래如來고 더 이상은 이제 없죠
설사 뭐 복을 닦고 뭘 닦아가지고 아주 근사한 인격자가 설사 됐다손 치더래도 그건 이제 유위법有爲法이라는 거죠

고 앞에서 보면은 각즉요불시공覺卽了不施功이라 이러한 이치를 현재에 들어가 완전한 줄을 알면 그걸로 끝이다 더이상의 공을 베풀 필요는 없다 더이상의 노력은 필요치 않다. 각즉요불시공覺卽了不施功 깨달으면은 그걸로 끝이고 공功을 베풀 필요가 없다 이런 말을 했어요 .

이런 상태에서 이러한 지혜가 있은 뒤에 그 다음에 사무량심을 행한다든지 육바라밀을 행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어떤 목적하에서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냥 삶입니다.
그냥 어떻게 또 이런 그 이치를 다 안들 또는 도를 통하고 견성성불을 했다 한들 삶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니까 삶은 늘 지속되기 마련입니다.
지속되는 삶을 어떤 모양으로 살 것인가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육바라밀이죠.
그게 이제 불자의 살아가는 덕목인데 삶의 모습이지 그것을 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것을 주욱 닦아서 어떤 경지에 이르겠다. 어떤 목표를 내가 달성하겠다 하는 그런 뜻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본래는.
그냥 살아가는 모습이예요 그런 것들이.

그래서 그런 일들을 이런 각즉요불시공覺卽了不施功의 이치를 알고는 그런 일들을 인연 따라서 하면서 사는 거죠
뭐 안하게 되면 또 안하는 것이고 하게 되면 하는 것이고 이것입니다. 그게 이제 무위無爲의 경지고 실상實相의 경지고 여래지如來地의 경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현재 지금 없는 모습 가정해 보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자꾸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모습 현재 있는 이대로 이것이 이제 실다운 모습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제
단득본 막수말但得本 莫愁末이니 여정유리함보월如淨琉璃含寶月이라 다만 근본을 얻지 지말적인 것을 염려하지 말라
그랬어요. 지말적인 것을 염려하지 말라.
여기서 근본과 지말이라는 것은 근본을 얻으면은 지엽적인 것은 저절로 따라온다 이런 뜻이 됩니다. 그래서 근본은 요 밑에서 비유를 하기를 여정유리如淨琉璃 라고 했는데 유리를 말한 거죠. 유리는 지금 우리가 창문으로 사용하는 그런 유리가 아니라 옛날 광석으로 캐낸 아주 둥근 그런 큰 크고 둥글고 그것이 투명하고요 그런 아주 보물에 해당되는 칠보중의 하나죠. 그런 아주 깨끗하고 크고 둥근 유리 구슬에 달이 거기에 비춘 거와 같다. 보배달이 비춘 거와 같다 여기 보배달이라고 한 것은 그냥 달이라 해도 괜찮은데.

그런 크고 둥근 유리구슬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축구공만한 그런 유리구슬이 아주 밝은 달이 비추고 있을 때 밖에 이-렇게 쟁반에 올려져 있다 그러면 달이 거기에 촤악 반사될 거 아니겠어요. 그안에 이제 머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보월含寶月이라고 하는 것은 달이 그 속에 비춰들어서 그 속에 달이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이제, 글로는 이제 그런 표현입니다.

깨끗한 유리라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고 또 다른 말로 하면 법신이고 진여고 불성이고 우리가 갖추고 있는 그것을 뜻하는 것이고 거기에 그냥 불성 그 자체는 누구나 동등하고 똑같죠 그러나 거기 이제 달이, 유리는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달이 비췰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이제 문제가 되겠죠
우리의 불성과 진여 법신 이것은 이제 한결같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무슨 반야 해탈 지혜 어떤 복덕 이런 것들이 이제 거기에 갖춰 질 수 있느냐 하는 것 그것을 이제 수용하는 것 이런 것들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확철대오를 예를 들어서 했다고 할 경우는 똑같은 그 마음에 그런 아주 훌륭한 장엄이 잘됐다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복덕과 해탈과 온갖 신통과 설법과 이런 것들이 장엄이 잘 되어 있다 그런 뜻으로 보월이라고 여기 이렇게 표현하는 거지요. 그것을 아주 아름답게 표현을 했습니다.
마음자리는 근본이 되고 그것은 또 비유하면은 유리구슬이 되고 지엽적인 것은 저절로 따라온다 하니까 해탈이니 지혜니 복덕이니 하는 거예요. 그건 저절로 떠오르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구슬이 떠억 이렇게 놓여 있으면 달이 떠오르면 달이 거기에 비취게 되어있다. 그와 같이 지말적인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딸려오게 되어 있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능해차여의주旣能解此如意珠하니 자리이타종불갈自利利他終不竭이라
그랬어요. 여기 기능해차여의주旣能解此如意珠라고 하는 것을 어떤 본에는 아금해차여의주我今解此如意珠
나 아我자 이제 금今자 그게 더 오히려 친절하죠.
이미 능히 이 여의주를 풀어놓았으니 이렇게 이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이 여의주如意珠를 풀어놓았으니
이렇게 하면은 더 가깝습니다. 기능해차旣能解此나 아금해차我今解此나 뭐 뜻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죠.

이 여의주如意珠라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보월寶月을 머금고 있는 유리라 이렇게 비유를 할 수가 있고 우리 본성本性의 완전무결함을 우리가 제대로 믿고 이해하고 깨달아 아는 것 그것이 이제 말하자면은 여의주如意珠죠. 그러면은 그 여의주로써 사람들에게 베푼다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이걸 이제 이 여의주를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가 아니고 풀어 놨다 이 말입니다. 끌러놨다 이거죠.
아는 것 가지고는 부족하죠 알았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의주를 내가 풀어 놨다 그럼 이걸 나눠줘야 되는 거죠. 이걸 팔든지 뭐 어떻든 나눠주는데 자리이타종불갈自利利他終不竭이라
쓰는 데 있어서 나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데 아무리 아무리 나도 이롭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베풀어 줘도 결코 조금이라고 손해가 나거나 닳거나 줄거나 이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면 베풀수록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지가 않죠. 지혜를 쓰면 쓸수록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자리이타종불갈自利利他終不竭이죠
마음의 도리는 그렇습니다.

뭐 구지화상이 손가락 하나 세우는 것을 보고 말하자면 깨달았죠 당신도 그 깨달음을 가지고 평생을 손가락 법문을 했는데 손가락 세우는 법문을 했는데 평생을 써도 다 못 썼다. 일지두법문一指頭法門 한손가락의 법문을 평생을 써도 다 못썼다. 결국 그게 뭡니까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런 거지 뭐 다른 거겠어요.

불교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를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느끼고 그것을 또 이제 제대로 깨닫고요 그래서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이고 나의 살림살이이고 내 재산이고 나의 참생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죠 불교는

그래서 그것이 어디 뭐 끝날 날이 어디 있습니까 마음 가르쳐주는데 아무리 아무리 가르쳐주고 가르쳐줘도 그건 뭐 줄어들거나 달라지거나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꽃을 들어 보여도 마음 보여 주는 것이고 손가락을 세워도 마음 보여 주는 것이고 할을 해도 마음 보여 주는 것이고 방을 한 번 휘둘러도 마음 보여주는 것이고 경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마음 보여 주는 것이고 관세음보살 불러도 마음 보여 주는 것이고 지장보살 불러도 마음 보여 주는 것이고 일체가 마음에 대한 자기 그런 그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확신이라고 해서 좀 그렇지만 우리들 수준으로 표현하면 확신이죠. 근데 그 확철대오해서 정말 그것이 손에 사물이 잡히듯이 그렇게 눈에 싹 들어오는 그런 경지라면 어떻게 한들 다 마음 보여주는 일이지 일거수일투족이 마음 보여주지 않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다. 근데 그게 뭐 닳을 택이 있나요. 마음 보여주는 일이 이게 설법이고 이것이 지혜고 이것이 보시고 그러는 거죠 진정한 보시죠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풀어놓았다 여의주를 풀어놓았다. 여의주는 마음대로 되는 구슬 아니겠습니까 마음대로 되는 구슬이니까 아무리 아무리 써도 닳을 까닭이 없는 거죠.

구슬비유를 많이 하죠. 심주라고 해서 마음의 구슬 심부주라고 하는 그런 글도 있습니다마는
법화경에도 계주비유繫珠比喩라고 하는 게 있죠 옛날에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는 거부장자가 돼 있고 한 친구는 거지가 돼 있고 그렇죠 두사람이 만나서 이제 부자로 사는 친구가 이 거지 친구를 집에 초청해서 잘 먹이고 술도 실컷 마실 수 있도록 여러 배려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부자인 친구는 아침 일찍부터 볼 일이 있어서 외출을 해야 되겠는데 아 이 거지인 친구가 너무 잘먹어서 곯아떨어져서 늦잠을 자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에게다 이제 평생 쓰고도 남을 그런 여의주, 아주 값이 얼마인지 도저히 값을 따질 수 없는 그런 어마어마한 보물을 주머니에 넣어줬다는 거죠 그리고는 볼 일 보러 나갔고 이 거지인 친구는 자다 깨어 가지고 하루 대접 잘 받았으니까 잘 쉬었다고 그렇게 하고는 이제 나가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 이 사람 거지는 항상 거지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대로, 몇 년이 지난 뒤에 또 만났는데 역시 이제 거지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이 부자친구가 그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이야기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마어마한 그런 그 평생 쓰고도 남을 그런 보물이 있더라 그래서 이제 그때부터 부자로 살게 되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이제 법화경에 계주비유도 있는데 그와 같이 여기 증도가에서도 여의주, 아금해차여의주我今解此如意珠 라고 하는

이 여의주는 우리들의 보물 뿐만 아니라 불교의 보물이고 우리들의 참생명이고 그렇습니다. 이거 우리 제대로 알면 정말 어떤 상황에서든지 참 넉넉하고 아주 뭐 겁없이 살고 당당하게 살고 아주 뭐 신나게 살 수 있고 모든 문제 해결이 이 여의주如意珠에 달려있고 이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내가 나한테 쓰던지 남에게 이롭게 하던지 자리이타종부갈自利利他終不竭이라는 거죠 자신에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로워서 끝내 다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그 표현입니다.

이것이 뭐 영가스님의 증도가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많이 이제 이런 문제를 언급하는데 증도가처럼 이렇게 아주 선명하게 직접 우리 가슴에 와닿게 이렇게 표현한 그런 예들이 흔치가 않죠 그다음

강월조송풍취 江月照 松風吹
그래 얼마나 부자입니까 여의주를 끌러 놔서 나도 쓰고 남도 쓰고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되었으니 이제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돈 벌 일도 없고 거지일 까닭도 없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아주 뭔가 마음이 아주 맑고 넉넉하고 그런 그 경지를
강월송풍취江月照 松風吹
영야청소하소위永夜淸霄何所爲라
저는 증도가 공부할 때 이 구절이 참 그렇게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어릴때 치문을 배우면서 증도가를 여덟 구절씩 배웠는데 부수적으로 배웠는데 그때부터 이 구절이 그렇게 아주 뜻도 모르고 그렇게 좋았었습니다.
강월조송풍취江月照 松風吹
강에 달은 비추이고 솔바람은 불어온다는 거죠.
밤새도록 긴 밤 맑은 하늘 무엇을 할 바냐
아무것도 할 바가 없죠.
그야말로 여의주를 풀어놨어. 여의주를 풀어놔가지고 이 여의주를 남도 쓰고 나도 쓰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냥 맘껏 마음껏 쓰는데 무엇이 부족한 게 있겠습니까. 그 부족함이 없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뭐 산중에서 강에 달이 비취고 솔바람은 불어오고 무엇이 부족할 것이냐 운치가 그럴듯하지만 그런 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이 스님은 큰 절 옆에서 그저 겨우 어머님과 누님을 모시고 겨우겨우 지낼만한 그런 아주 어려운 처지에 살았었죠. 그러나 환경이 설사 어렵다고 해서 마음까지 그렇게 궁핍한 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저앞에서도 있었듯이궁석자구칭빈窮釋子口稱貧이나 실시신빈도불빈實是身貧道不貧이라 실로 육신의 생활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하는 그런 말씀도 앞에서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불성계주심지인佛性戒珠心地印이요
무로운하체상의霧露雲霞體上衣로다
그랬어요. 불성佛性계주戒珠심지인心地印이요 불성이니 계주니 하는 것은 불성佛性인 계주戒珠 이렇게 이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불성佛性은 뭡니까 깨달아서 잘 아는 거죠 그게 이제 불성의 특징이고 그것을 또 계주戒珠라고 표현한 것은 밝고 깨끗하고 때가 없어서 그래서 이제 계주戒珠라 그럽니다.
계戒라고 하는 그자체가 벌써 모든 허물과 혼탁한 거 이런 것을 다 떠난 것을 계戒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계戒의 구슬이다 이렇게 말하면 뭐 누가 계를 지키느냐 안지키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계戒 그 자체는 이미 아주 깨끗하고 가치 있고 청정한 그런 구슬이다 하는 뜻에서 이제 불성계주佛性戒珠라 그렇게 합니다. 그건 이제 뭐 심지心地라는 말도 크게 계주니 불성이니 하는 말과 다른 말은 아닙니다. 근데 그것이 이제 불성이라고 표현하든지 계주라고 표현하든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 마음 땅의 도장이다.
하는거죠. 마음땅의 도장이다.

무로운하 체상의霧露雲霞體上衣라
그랬어요. 무로운하霧露雲霞 이걸 이제 옛 사람들부터 참 시원스럽게 해석을 한 것을 못 봤는데 이 무로운하霧露雲霞는 구슬에다가 불성계주에다가 말하자면은 어떤 장엄을 치장이라고 할까 장엄이라고 할까 이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신령한 구슬이나 어떤 그 신령한 물체가 있으면 거기는 당연히 어떤 영기가 서리고 그 영기가 서려야 그것이 더욱 더 돋보이죠

예를 들어서 처음가는 아주 깊고 높은 신비한 산에는 의례히 안개가 끼거나 구름이 끼거나 뭔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어떤 신비감이 있습니다. 그걸 이제 영기가 서린다 그러지요. 그래 안개가 끼기도 하고요. 안개가 피어오르기도 하고 의례히 깊은 산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무로운하霧露霧雲霞 이게 이제 안개 무霧 이슬 로霧 구름 운雲 또 노을 하霞 이런데 역시 안개 하霞자죠
그런데 이런 어떤 그 신령한 구슬에 당연히 거기에 신령스럽고 영기가 서리는 그런 그 뜻으로 무로운하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이제 체상의體上衣라는 거죠. 여기 체體라고 하는 것은 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가스님은 항상 그 체體자를 쓰기를 좋아하십니다. 마음 심心자보다 훨씬 더 많이 쓰고 성품 성性자보다도 더 많이 쓰고요.
임제스님이 사람 인人자 썼듯이 영가스님은 체體자를 그렇게 즐겨 쓰셨다고 내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죠.
이건 이제 본체 뭐 신체라고 해도 괜찮구요. 그냥 체라고 하고 그뜻을 우리가 이해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로운하는 비유고 구슬도 결국은 비유인데
우리의 마음을 예를 들어서 불성계주라고 한다면 그냥 단순한 마음이어서는 안된다. 아주 신령한 마음이어야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비와 지혜와 복덕과 그야말로 사무량심이라든지 해탈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장엄이 돼야 그게 이제 그럴듯한 그런 마음이 되는 거죠. 그냥 깡마른 마음가지고는 별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요
이러한 공부, 여기에 대한 깊은 이해 나아가서 깨달음까지 우리가 성취하게 되면은 결국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그런 그 장엄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구슬이 신령스러우면 거기에 영기가 서리가 되어 있듯이 우리 마음이 제대로 마음노릇을 제대로 하면 자비와 지혜와 해탈과 복덕과 열반 이런 불교에서 말하는 그 아주 멋진 것들이 저절로 거기에 입혀진다는 것입니다. 본체에 입혀지는 옷과 같은 치장이 된다는 거죠. 장엄 莊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전체적으로 아주 잘 표현한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성계주佛性戒珠는 심지인心地印이라 이거는 우리 마음의 도장인데 그것이 죽은 마음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것이 결국은 어떤 지혜와 자비와 해탈과 열반과 사무량심 이런 것들로 잘 치장이 되고 장엄이 되어야 그게 이제 제값을 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죠 그것도 억지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치 불성계주의 실체에 대한 깊은 믿음과 이해와 깨달음이 있으면은 저절로 장엄이 되게 돼있습니다. 그게 또 묘한 이치죠. 그러니까 억지로 장엄한다고 해서 장엄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연스럽게 장엄되게 돼있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증도가 강의를 여기까지 하겠는데 다시 정리해서 새겨드리겠습니다.

단득본 막수말但得本 莫愁末리니
여정유리함보월 如淨琉璃含寶月이라
다만 근본을 얻고 지말적인 것을 근심하지 말지니 마치 깨끗한 물 위에 보배의 달이 포함된 것과 머금은 것과 같음이로다
아금해차여의주 我今能解此如意珠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풀어놓았으니
자리이타종불갈自利利他終不竭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강월조 송풍취江月照松風吹
강에 달은 비추이고 소나무에 바람은 부는데
영야청소하소위永夜淸霄何所爲
긴 밤 맑은 하늘에 무엇을 할 바인가
불성계주심지인佛性戒珠心地印
불성의 계구슬은 마음땅의 도장이요
무로운하체상의霧露雲霞體上衣
무로운하는 체 위의 본체 위의 옷이로다
여기서는 무로운하霧露雲霞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구슬이라했기 때문에 무로운하의 비유를 들었고 무로운하의 본 뜻은 자비와 해탈과 열반과 사무량심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하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14강
證道歌- 제9강 (降龍鉢解虎錫 ~) 2006년 3월 15일

반갑습니다. 3월 15일 염화실 인터넷 법문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증도가 降龍鉢解虎錫(항룡발해호석) 兩鈷金環鳴歷歷(양고금환명역력)-55 이라고 하는 곳부터 할 차례입니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밥그릇이 발우이고, 또 어디 다닐 때 의례히 짚고 다니게 돼 있는, 그런 육환장 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은 육환장 짚고 다니는 분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는 그것이 걸어 다니지도 않고, 차를 타고 다니니까 차에 넣을 수도 없고, 여러 가지 거추장스러워서 그래서 짚지를 않는가 본데, 오늘은 발우와 육환장이야기가 처음부터 시작이 됩니다.

降龍鉢(항룡발) 발우는 그냥 발우가 아니고, 용을 항복받은 발우다. 물론 발우라고 하는 밥을 담아 먹는 발우지요.
이 발우도 부처님 당시 때는 하나를 가지고, 다 썼습니다.
하나에 밥도 담고 반찬도 담고 그랬지요.
지금도 태국 같은 그 남방불교에는 탁발을 나가는데 발우가 아주 커요. 우리나라 발우보다도 아주 큰데, 거기에 밥도 담고 반찬도 담고 그렇게 탁발을 그렇게 합니다.

이쪽에서는 또 이쪽의 그 생활습관에 맞추어서 변형을 좀 해서 발우를 네 개를 사용하지요.
그래서 물 담는 그릇. 또 반찬 담는 그릇. 국 담는 그릇. 밥 담는 그릇. 이렇게 네 개를 펼쳐놓고, 그렇게 공양을 합니다. 그런데 그 발우라고 하는 것이 단순하게, 여기의 말씀은 공양을 하는데만 사용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제 아주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 또는 불법을 전하는 하나의 방편으로도 쓰였다. 이런 의미가 있어요.

용을 항복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보통 불자님들이 잘 아시는 소위 그 삼가섭이 있지요?
뭐 우르빌라 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 그렇게 삼가섭이 있는데 마하가섭이라고 하는 제1조 마하가섭하고는 관계가 없는 三迦葉(삼가섭)이 있습니다.

그 삼가섭이 본래는 火龍外道(화룡외도). 불을 섬기는 외도였다. 그래요. 본래는 어떤 기록에는 보면, 그 부처님께 출가를 했다가 다시 화룡외도를 섬기게 됐다. 그런데 부처님이 발우를 가지고 불을 뿜는 용을 발우에다가 잡아넣어서, 꼼짝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부처님께 돌아오게 됐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발우가 부처님의 법력을 과시하기도 하는 그런 법을 펴는 뭐 방편으로도 쓰이는 도구다. 이런 의미지요.
이 발우를 應量器(응양기) 라 그렇게도 해요. [양에 맞는 그릇] 이런 뜻인데, 그 워낙 크다 보니까 많이 자시는 분은 많이 담을 수도 있고, 적게 먹는 사람들은 적게 담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이제 아예 그릇이 크니까, 자유자재로 그렇게 쓸 수 있다. 그래서 應量器다. 자기 양만큼 덜어 먹는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제 사찰에서는 음식을 받으면 절대 남기지 않도록 되어 있고, 그 먹을 만치만 자기가 덜어서 먹도록 그렇게 되어 있지요.
뭐 요즘 소위 뷔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스님들 발우공양이 뷔페의 원조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3000년 전부터 우리는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解虎錫(해호석)이라고 해서, 호랑이의 싸움을 말린 석장. 주장자. 이 錫 은 석장 이라고 해서 주장자라고 하는 그런 뜻인데, 옛날에 스님들이 짚고 다니던 그런 주장자입니다.
이것도 僧稠(승조) 스님 이라고 하는 그이가 두 마리의 호랑이가 아주 치열하게 싸우는데 이 주장자로써, 말하자면 호랑이두 마리의 싸움을 말렸다. 그것이 法力(법력)이라는 것이지요.
法力으로써 호랑이의 싸움까지 말린 그런 연유가 있는 주장자다.

발우도 그런 연유를 가지고 있는 발우고, 주장자도 그렇게 뭐 모양내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연유가 깊은, 또 법력이 담겨 있는 주장자다. 그런 뜻입니다. 그 주장자를 두고 말할 것 같으면, 兩鈷金環鳴歷歷(양고금환명역력) 이라고 그랬어요.

주장자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는고 하니까, 중앙에는 浮屠(부도)처럼 그렇게 올라와있고, 그 윗부분에 양쪽으로 두 고리가 있는데 그 고리는 다리미 鈷(고)자인데, 금강저모양의 어떤 그 다리미를 이렇게 만들고 거기에 다시 고리 세 개씩, 한 쪽에 세 개씩 그렇게 걸었습니다.

그래 두 다리미를 만들고 한 다리미에 고리 세 개를 걸어서, 결국은 六環杖(육환장). 여섯 고리의 주장자. 이런 뜻이지요.
그래서 兩鈷에 여섯 고리가 세 고리씩, 쩌렁쩌렁 歷歷(역력)하게 울린다. 이런 뜻인데, 그것이 다 상징하는 것이 있지요. 두 金剛杵(금강저) 제가 다리미라고 그렇게 했는데, 金剛杵라는 뜻도 돼요.
금강저 모양의 양쪽 두 개는, 眞諦(진제). 俗諦(속제). 出世間(출세간)의 어떤 이치와 世間(세간)의 이치.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제와 속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眞諦와 俗諦가 양쪽에 균형 잡혀서 어떤 조화를 이루는 것. 그러니까 주장자 하나로서 결국은 불교를 다 표현하고 있다. 이런 그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장자를 짚고 다니므로 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한 순간도 잊지 말라 하는 그런 의미이지요.
그 중에서도 특히 兩鈷(양고) 라고 하는 그 양쪽으로 금강저 두 개가 있는 것은, 진제와 속제. 유와 무. 左(좌)와 右(우) 남과 여. 있음과 없음. 有와 空(공) 이런 모든 상대적인 관계를 두 금강저가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양쪽에 있음으로 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래서 속제. 세속적인 것에 너무 떨어져도 그것은 치우친 것이고, 출세간적인 것에 너무 떨어져도 그것도 역시 치우친 것입니다. 출세간에 있으면서 세간을, 말하자면 다 수용하고 또 세간에 있으면서 출세간적인 것도 다 수용하는 것.
남과 여의 관계도 이제 그렇고, 안팎의 관계도 그렇고, 좌우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뭐 오른손은 그, 말하자면 쓰는 용도가 물론 있지요. 그렇지만 바쁘면 오른손도 왼손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 왼손이 쓰이는 용도가 있습니다마는, 또 뭐 경우에 따라서는 왼손도 오른손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고요.
남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남자하는 일이 있고, 여자 하는 일이 대체적으로 나누어져있지만, 그래도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엇바꾸어가면서 얼마든지 그 균형과 조화를 이뤄 가면서,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

이것이 세상사이고 또 그러한 이치를 우리가 알고 제대로 사는 것. 이것이 중도적인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兩鈷(양고) 라고 하는 것은 中道(중도)를 표현하는 것이지요. 중도란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것.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을 잘 조화롭게 우리가 균형 잡아서 살아갈 줄 아는 것. 이걸 의미하는 것이고, 세 고리씩, 세 고리씩 그것은 육바라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이란 뭐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우리 불교인들의 일상생활에 실천해야할 덕목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이 육바라밀 그 속에는 참선도 들어있고 온갖 것이 다 들어있지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육바라밀을 통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불자들의 삶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사는데 이 육바라밀의 덕목을 실천 하면서 산다. 그러면서 이제 진제와 속제의 그 균형을 잡아가면서, 남자와 여자의 균형을 잡고, 있음과 없음의 균형을 잡고, 무상과 실상의 균형을 잡고, 그런 조화를 잘 이해하면서 거기에 그 물 흐르듯이, 아주 순리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이상적인 삶! 이것을 육환장 하나에 다 담고 있는 것이지요.

참 그 멋지지요.
이 불교에는 뭐 무슨 할을 한번 하는데도 그 불교적인 그런 어떤 깨달음의 의미가 그 할 속에 다 담겨있고요.
손가락을 한 번 세우는데도 역시 불교의 오묘한 이치가 다 담겨있고, 뭐 연꽃 한 송이만 가지고 우리가 보더라도, 거기도 역시 불교적인 그런 의미가 다 담겨있고, 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육환장. 이거 하나 만으로도 그 불교의 의미가 잘 담겨져 있는데, 특히 그 兩鈷(양고) 라고 하는 것은 두 금강저라고 하는 것이 아주 참 의미심장하고, 거기에 또 우리가 그 상반된 두 가지를 조화롭게 잘 엮어가면서, 이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하는 것! 이겁니다.

그 이런 것을 보더라도 이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얻어 내자고하는 그런 수단과 목적이 아니라, 바로 삶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은 바로, 불법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가 됩니다. 완전한 불법을 전하는 것이다.
뭐 깃발에다 경전을 새겨서 바람에 펄럭이게 하는, 그런 나라도 있지요. 그것 보다는 육환장을 이렇게 짚고 소리를 냄으로 해서, 거기에 진제와 속제! 그래서 중도가 되는 것! 그리고 육바라밀을 그렇게 상징하는 그런 육환장이 훨씬 의미가 들어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不是標形虛事持(불시표형허사지)라 이런 것. 발우나 육환장 이것이 형상을 표하는 헛되게 가지는 그런 일이, 헛된 일로 가지는 것이 아니다. 모양만, 다시 말해서 뭐 폼 잡자고 가지고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스님임네” 하고 이렇게 모양 갖추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如來寶杖親蹤跡(여래보장친종적)이로다-56 여래의 보배! 그 주장자이고 그것은 부처님이 친히, 몸소, 말하자면 자취를 보이신, 본보기를 보이신 그런 일이다.
여래의 보배 주장자를 친히 본받음이다. 친히 蹤跡을 보였다.
그것은 결국은 부처님의 삶은 중도와 육바라밀의 삶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여기의 이야기는 중도와 육바라밀의 삶을 불교적 삶이다.
그것은 주장자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참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주장자 하나가 멋지지요.
이 시대는 좀 그런 주장자를 짚고 다니고 하기는 좀 번거롭기는 한데, 최소한도 이런 것을 잘 만들어 가지고 사는 방에다 이렇게 세워 놓기도 하고, 마루에다 이렇게 걸어 놓기도 하는 그런 정도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不求眞不斷妄(불구진부단망) 了知二法空無相(요지이법공무상)이라-57 眞도 구하지 아니하고, 진리도 구하지 아니하고, 망상도 끊지 않는다.
저 앞에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1 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지요? 망상을 제 하지도 아니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아니한다.
여기 不求眞 이라고 하는 말은 똑 같지요. 不斷妄 이라고 하는 것도 不除妄. 제할 除(제)자나, 끊을 斷(단)자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앞뒤로 그저 말만 바꿔놨지요.
不除妄想不求眞 不求眞不斷妄. 똑 같은 뜻이지요.

了知二法空無相(요지이법공무상)이라 그러니까 끊지 않고 제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제거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 調和(조화)지요. 그것이 中道(중도)입니다.
그 육환장 이야기를 했는데, 양쪽으로 두 금강저가 늘어뜨려져 있고, 거기서 여섯 개의 고리가 나있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두 금강저라고 하는 것이, 眞도 되고 妄도 되고요.

그 다음 진제가 되고 속제가 되고,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고, 좌가 되고 우가 되고, 안이 되고 밖이 되고, 그런 이 세상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상대적 관계를 그렇게 두 금강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조화가 바로 중도인 것이고, 이상적인 삶인 것이고, 큰 도가 되는 것이고, 지극한 도가 되는 것이고, 證道(증도)할 때 도를 깨달은 것! 바로 그 경지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래서 了知二法空無相(요지이법공무상)이라 이 二法. 眞과妄. 또 상대적인 모든 것. 그 두 가지 법을 了知 하는 것이 공하여 무상함 이다. 무상함을 알았다. 요지 했다 그래요.
二法이 공하여 형상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진제. 속제. 진과 망. 좌 우 이렇게 하지만 고정된 그런 형상은 없지요. 두 가지 법이 공하여 형상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았도다. 了知 분명히 알았도다. 형상이 없으면서 또 두 기지가 또 각자의 역할을 하고,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또 분명히 나눠져서 독립된 존재로서 또,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중도적인 삶입니다.
뭐 남자네 하고 또는 여자네 하고, 그렇게 고정된 고집을 부리거나, 고정된 어떤 그 위치를 취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상이 되어 버리지요. 無相(무상)이 아니라 상이 되어버립니다.
본래 없는데, 없는데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이 착각을 해가지고 그렇게 고집을 세우는 것이지요.

그 그러면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화가 깨지는 것이지요. 그 중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본래 중도로 존재하는데, 그 존재 원리에 맞게 살아라 하는 것이 불교지요.
二法이, 상대적인 두 가지 법이 공하여 고정된 형상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이여 卽時如來眞實相(즉시여래진실상)이라-58 이랬지요.
고정된 상도 없고 또 공한 것도 아니고, 또 공하지 아니함도 아니다. 그래 이제 어떤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본 사람은 이렇게 표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그 우리 상식으로는 안 맞는 것 같지만, 이것이 맞는 말입니다. 相도 없고 空도 없고...

뭐 상이 없으면 공이라야 된다고, 이렇게 우리가 봐야 되겠지요. 또 공이 없으면 분명히 상이라고 봐야 된다. 이렇게 생각 하겠지만, 그게 아니지요.
상이 없으면서 공도 없고, 또 공하지 아니함도 없다. 이것이 불교적 논리이고 중도를 설명하는, 다시 말해 진리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런 것을 우리가 익숙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 그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다. 중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중도가 여래예요. 여래가 중도이고...
그래 이 세상은 뭐 중도의 이치에서, 중도에서 벗어난 게 아무것도 없다. 이러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곧 여래에서 벗어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여래이고, 여래는 바로 중도의 원리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서 이렇게 길이 엇갈려 가지고, 그 존재의 원리대로 살지를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다시 그렇게 이런 이치를 깨달은 분들이 우리에게 일러 줬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알고 본래로 그렇게 존재하는 원리대로 돌아가서 살자! 이것이지요.

그래서 여래의 진실상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여래의 참모습 이라고 그래 버렸습니다.
뭐 달리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뭐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아니함도 없다. 이것이 중도지요.
이것은 무엇이 그러냐?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렇고 육신이 그렇고 마음이 그렇고, 우리 인간의 일체 감정이 그렇고, 일체가 다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相이라고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없지 아니하다고도 할 수 없고,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 그 중도를 아주 잘 설명한 간단한 말이고, 또 이것은 곧 여래를 말한 것이고, 여래는 진리를 말한 것이고, 여래니 진리니 중도니 하는 것은 곧 모든 존재의 존재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無相無空無不空. 모든 것이 그렇게 존재해요. 지금 제가 말하는 말소리가 그렇고, 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컴퓨터가 그렇고, 내 육신이 그렇고, 내 마음이 그렇고, 마음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온갖 좋고 나쁜 감정이 그렇고, 미운감정들, 좋은 감정들, 일체 감정들이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전부 그 원리로 존재한다. 그래 이것을 그대로 우리가 마음에 수용을 하며는, 바로 깨달은 사람이지요.
그 영가 스님 같은 경우는 깨닫고 나니까, 전부 이렇게 존재하니 그 존재원리대로 우리에게 일러 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心鏡明鑑無碍(심경명감무애)하야 마음의 거울은 밝고, 또 밝으니까 비치는 것이 걸림이 없으니, 廓然瑩徹周沙界(확연영철주사계)로다-59 확연히 환하게 이 말이지요. 환연하게 瑩徹. 빛나고 빛이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 하더라. 확연히 밝게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 하더라.
모래수와 같이 많고 많은,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고많은 세계에 두루 하더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이제 영가 스님 같이 깨달으신 분의, 마음상태지요. 마음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心鏡明. 마음의 거울은 환하게 밝고, 밝으니까 뭐 비추는데 어디에도 못 비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해가 뜨면 어떻습니까? 빛이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밝지마는, 빛이 없는 곳까지도 환하게 밝지요.
방에 뭐 빛은 안 들어왔어도, 문을 통해서 환하지 않습니까? 그 빛이 들어온 것이지요.

그것이 뭡니까? 瑩徹(영철)이지요. 환하게 瑩徹! 밝게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 한다.
그렇듯이 마음이 어디에 이르러가는, 집중하는 곳만 밝은 것이 아니고, 마음이 어디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모든 존재의 실상을 환하게, 이치를 환하게 꿰뚫어 알고 있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마음을 써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안 써도 저절로 그렇게 알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한 것을 이렇게, 그러한 영가스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萬象森羅影現中(만상삼라영현중)이요 一顆圓光非內外(일과원광비내외)로다-60
어떤 데는, 一顆圓明非內外(일과원명비내외)라. 이렇게 써진데도 있는데 光(광)자가 더 좋지요.
萬象森羅. 森羅萬象이라고도 하고, 萬象森羅 라고도 하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것이 影現中이라. 그림자. 그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가운데에 그림자로 나타난다.

우리는 전부 하나하나 그저 걸리지요. 우리 안목에는 전부 그대로 실재하는 거예요.
그 전부 눈을 찔러오고, 귀를 찔러오고, 일체가 걸리고, 그 뭐 마음에 드는 것은 금방 좋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싫고 일일이 다 걸립니다. 그림자가 아니에요.

이 영가 스님의 입장에 있어서는 우리마음 가운데, 中자는 體中(체중)이라 해도 좋고, 心中(심중)이라 해도 좋고 그런데, 그 내 마음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나있다.
모든 존재가, 세상에 일어난 사건들 까지도 그림자로 타나나 있다.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얼마나 쉽겠습니까? 살아가는데...
그림자인데요. 그거 뭐... 그림자 이렇게 드리우면 거기 지나가는데 하나도... 예를 들어서 아주 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더라도, 그 그림자 앞을 지나가고 그림자를 지나가는데 뭐 창에 찔립니까? 뭐 어쩝니까? 전혀 창하고 관계없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또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그 사건들. 또 내 주변에 내가 앓고 있는 그런 일체 인생사들. 이런 것들이 그렇게 그림자처럼 나타나 보인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가볍고요.
세상사가 전부 그림자이고, 그렇다면 나도 또한 그림자일 수밖에 없지요.

그림자가 그림자를 만났으니 어떻게 보면 허황한 것 같지만, 참 그, 그 때야말로 비로소 사는 맛이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집착하고 걸려가지고, 처처에 걸리지요.
곳곳에 일마다 걸리고, 일마다 가슴앓이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一顆圓光(일과원광)이 非內外(비내외)로다 한 덩어리 아주 원만한 광명이 있는데, 그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요. 內外가 아니다 이것이지요.
몸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이것을 마음을, 그 뭐 아예 한 물건이라 하든지 아예 쉽게 우리가 마음이라고 해버리지요. 마음이 맞지요. 또...

능엄경에서 이제 부처님과 아난존자가 七處傳心(칠처전심) 이야기를 하지요?
일곱 곳에서 마음을 밝혀내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아란존자가 탁발하러 갔다가 마등가 여에게 유혹을 당해 가지고서 잘못될 뻔했는데, 부처님이 그것을 아시고 문수보살을 시켜서 능엄주를 가져가서 주문을 외워서, 구제해 오지요. 그러면서 부처님이 따지고 묻습니다.

“넌 도대체 어떻게 왜 출가를 했으며, 출가를 한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이렇게 하니까,
“나는 부처님의 그 훌륭한 모습을 보고, 너무 그 훌륭한 모습에 감동이 되어서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봤다니 무엇이 봤느냐?” 이래요. 그렇게 질문을 하니까 아난존자가 있다가,
“눈이 보고 마음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래 네가 대답 잘 했다.” 이러면서 “눈이 봤다고 하자. 과연 눈이 보는 거냐?”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따져 들어가게 되지요. 그래서 나중에 “마음이 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됐는데,
“그럼 마음이 어디에 있는데 보느냐? 보았다고 하느냐?” 하니까 “안에 있습니다.” 그래요. 얼른 생각에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요.

그래 안에 있다고 하니까 그걸 또 꼬투리를 잡고 부처님이 하나하나 분석해냅니다. 그 분석해 내는데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음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또 “밖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곱 곳에 있다고 이렇게 하나하나 지적해 가다가 결국은 일곱 곳에도 있지 아니한 것으로 그렇게 이야기가 돼서, 뭐 어디에 있다 라고도 말할 수도 없고, 어디에 없다 라고도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이론이 전개되는 내용 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非內外.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그러면서 안과 바깥을 다 포함 하고 있지요.
그런 아주 신기한 물건이 우리에게 있고, 그 신기함이, 신비하고도 신기한 그것이 참 나이고, 나의 주이공이고 나의 참 생명입니다. 그 외의 것은 뭐 일체 것이, 일체 것이 다 그야말로 萬象森羅影現中(만상삼라영현중)이지요. 그 마음 가운데 一顆圓光(일과원광)가운데, 그림자처럼 스쳐가고, 나타났다가 스쳐가는 그런 일들이다.

참 이, 짧은 글인데도 아주 그 의미심장하고요. 선사들의 이런 그 마음먹고 지은 詩(시)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의미심장하고, 많은 뜻이 그렇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참, 읽을수록 그 맛이 우러나고, 또 제가 이해한 만치 설명을 드리지마는, 또 이해를 얼마나 했겠으며 설명을 또 얼마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자꾸 읽고,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고, 내 어떤 인생경험을 거기서 투여를 해서, 거기서 또 이제 각자 자기만의 그 맛과 향을 거기서 느끼고, 맛보아야 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豁達空撥因果(활달공발인과) 茫茫蕩蕩招殃禍(망망탕탕초앙화)라-61 그랬어요.
여기까지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럼 뭐 인과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뭐 萬象森羅(만상삼라)가 影現中(영현중)이라. 마음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랬고,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이다. 모든 존재가 無相無空無不空이다. 相도 없고 空도 없고 空하지 아니함도 없다. 그것이 여래이고, 여래의 진실상이고. 그것이 중도이고, 그것이 도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놓으니까, 그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그 현상은 전부 연기로 되어 있고, 인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인과도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이는 것이지요.
그 늘 중도 이야기를 할 때, 어디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래 인과가 없다고만 이렇게 무시해서도 그것도 안 되고, 또 꼭 그것이 있다고만 그렇게 고집해도, 인과를 초월한 그 중도의 경지를 우리가 모르는 것이지요.

그 있음과 없음의 중도적 이치를, 참 어떻게 우리가 마음속에 잘 정리하고, 또 그것을 내 어떤 견해로, 내 인생의 어떤 안목으로 그렇게 정리를 해 둘까? 하는 것. 참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여기 영가스님은, 豁達空撥因果(활달공발인과) 활달하게 텅 비어 가지고 없다고 해서 인과를 무시한다.
撥자는 쓸어버릴 발 자인데, 인과를 쓸어버린다. 무시해 버린다. 이 말입니다.

활달히 공하다고 해가지고서 인과를 무시해 버려서, 인과를 무시 해버리며는, 豁達空撥因果 하며는, 茫茫蕩蕩招殃禍(망망탕탕초앙화)라 망망하고 탕탕해서, 그러니까 아득하고 아주 텅 비어서 앙화를 초래한다. 이 말입니다.
인과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다고 크게 인과에만 매달릴 것은 아니로되, 또 인과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지요.

인과를 없다고 무시해 버리고 하며는, 茫茫하고 蕩蕩해서殃禍를 불러들인다. 그럼 뭐 걷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자기가 지어놓은 인과가 어디 가서 어떻게 돌아오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재앙을 만나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棄有著空(기유착공)도 病亦然(병역연)이니 還如避溺而投火(환여피익이투화)라-62
인과가 있다 없다 하는 것. 이것도 有를 버리고, 있음을 버리고 없는데 집착하면 그 병이 보통이 아니에요.
또 없는 것을 버리고 있는 데만 집착하여도 그것도 보통 병이 아니고요.

글쎄요. 이런 이야기 익숙하지 않고, 사유가 미쳐 이르지 못한 분들은, 그 참 알쏭달쏭 하게 들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이 이러한 가르침이 아주 제대로 된 가르침이고, 전혀 방편이 없고 그대로 직설로 그 이치를 설명한 것입니다. 정말 卽說呪曰(즉설주왈)이지요.

그러니까 인과문제라든지, 존재의 문제라든지 이것을 유를 버리고, 공을 집착할 것 같으면 그 병도 또한 똑같다.
또 공을 버리고 유에 집착해도 역시 그것도 똑같은 병이다. 예컨대 還如避溺而投火(환여피익이투화)라 그랬어요.

도리어 물 속에 빠지는 것을 피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러니까 물 속에 빠지는 것도 문제고요. 불 속에 타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 죽는 것이지요. 치우치면 죽는 것입니다. 치우치면 재앙 이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경전이나 조사스님 어록이 끊임없이 中道(중도). 中道 中道를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 겁니다.

본래 이치가 그렇게 치우치지 않도록, 치우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람들도 본래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데, 뭐 이것저것 살아오면서 그 누적된 그런 경험과 지식과 쓰잘데 없는, 자기의 그 아집과 이런 것들이, 또 어디서 뭐 어디 한 마디 딱 들었거나, 자기가 어떤 비정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자기의 어떤 관점을 이루어요.

그것이 자기의 잣대에만 들이대는 틀이 되어 버린다고요. 그래서 어디 가도 그저 그런 줄로 아는 것입니다. 어디 가도 그런 줄로 아는 거라...
그런 것은 아니지요. 상황 따라서 늘 변하게 마련인 것이고, 예를 들어서 뭐 물이 끓고 하는 문제도, 그 고산지대에는 가면 백도가 안 되어도 끓지 않습니까?

예컨대 그런 거와 같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물들은, 어디에도 그렇게 우리가 치우쳐서 생각할 일이 아니다. 또 그렇게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실상을 그 有와 無가 그것이 共存(공존)하고 있다고 하는 그 實相(실상)을 바로 보라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유와 무. 있음과 없음에 조화를 이루어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 인과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눈앞에 있는 일체 현상들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 소중한 인생을 살면서 물에 빠져도 안 되고, 불에 타도 안 되겠지요.

우리가 어디에도 치우치는 것은,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참, 명확하지요?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이 영가 스님의 이런 가르침은요. 정말 아주 훌륭한 가르침이지요.

우리가 본래 치우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치우치기를 좋아하게 돼있으니, 치우치고 사니 제발 치우치지 말고 中道의 원리로 살라. 그것이 여래이고, 그것이 도이고, 그것이 말하자면 불교의 이상이다. 이상적인 삶이다. 뭐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15강

捨妄心 取眞理 取捨之心成巧僞 學人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사망심 취진리 취사지심성교위 학인불요용수행 진성인적장위자

損法財 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손법재 멸공덕 막불유사심의식 시이선문요각심 돈입무생지견력

大丈夫 秉慧劍 般若鋒兮金剛焰 非但能摧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대장부 병혜검 반야봉혜금강염 비단능최외도심 조증락각천마담

震法雷 擊法鼓 布慈雲兮灑甘露
진법뢰 격법고 포자운혜쇄감로


반갑습니다.
오늘 3월 16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증도가證道歌 오늘은


捨妄心 取眞理여 取捨之心이成巧僞로다
사망심 취진리 취사지심 성교위


하는 거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꿰뚫어 아는 분들은 흔히 말하기를 종지宗旨에 밝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 앞에서 이제 종역통宗亦通설역통設逆通 그런 말을 했죠.
종지宗旨에도 통하고 설법說法에도 통한다 이런 말을 했는데
시종일관 말씀이 한가지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이제 종지宗旨에 밝은 사람들의 이야기죠.
뭐 경우에 따라서 근기에 맞추고 상황에 맞춰서 좀 다른 소리도 물론 할 수는 있습니다마는 그건 뭐 잠깐이고요.
그러나 이제 종지宗旨를 아는 사람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늘 주된 사상이 한결같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 영가 증도가도 오늘 사망심취진리捨妄心取眞理 망심妄心을 버리고 진리眞理를 취하는 것이여 이것은 버리고 취하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위巧僞를 이룬다. 아주 교묘한 거짓을 이루게 됐다.
거짓을 행하게 됐다 하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저 앞에도 불구진부단망不求眞不斷妄 또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이런 말들이 있었죠 한결같습니다.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이나 또 얼마전에 있었던
불구진부단망不求眞不斷妄 이나 여기서 이제
사망심捨妄心 취진리趣眞理하는 것이 거짓이다 취사지심取捨之心이 취하고 버리는 이마음이 거짓을 이룬다 이렇게 이제 하는 것이나 뜻이 똑같죠.

여기 교위巧僞 라고 하는 것이 보통 우리 상식으로는 취하고 버리는 것이 보통사람의 삶인데 그것이 좀더 깊이 들어다 보면은 거짓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묘할 교巧자 거짓 위僞자를 써서 거짓을 이룬다. 아주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얼핏 보기에는 맞는 일이죠 보통 상식적으로 보기에 맞는 일이고 세속적인 안목으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당연한 일인데 좀 더 전문가적인 안목에서 보니까 그게 이제 거짓이라는 거죠. 그래서 교위巧僞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맞는 것인데 눈을 뜬 사람의 소견으로는 그게 엉터리니까 그래서 이제 거짓을 이룬다 그랬습니다.

취하고 버리는 것이 모든 존재存在의 존재원리存在原理에서 볼 때 맞지 않다고 하는 것, 모든 것은 상반된 것이라 하더라도 똑같이 동등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와 의미를 그대로 우리가 인정해주고 또 인정해줬을때 상반된 서로에서 어떤 조화調和를 찾아낼수 있다는 거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취하고 버리는 것이 맞지 않죠. 그러니까 그것은 이제 중도中道적인 삶에 맞지 않다. 그렇게 이제 이야기를 쭈욱 해왔습니다.
영가 증도가도 한결같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래서 그러한 그 아주 깊이 있는 존재원리存在原理에 입각했을 때 취하고 버리는 것은 맞지가 않다. 하는 것이죠.



學人이不了用修行하니
학인 불요용수행


공부하는 사람이 그러한 이치를 요달了達 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수행修行을 하니 그러니까
근본적인 입장에서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고 하는 것 그게 망심이 됐든 진리가 됐든 우리가 망심이니 진리니 나누는 자체가 벌써 좀 잘못된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감량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그렇게 이제 수행修行을 하니


眞成認賊將爲子로다
진성인적장위자



참으로 도적을 오인해서 아들을 삼음이로다 그랬습니다. 이건 이제 밤에 자다가 소리가 나기에 가만히 들어보니까 발소리가 나는데 아들이 아마 목이 말라서 자다가 물을 떠먹으러 나간 줄로 그렇게 오인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었는데
아들이 저렇게 왔다갔다 하느니 이렇게만 생각했다는 거죠 그게 이제 진성인적장위라眞成認賊將爲子라. 참으로 도적을 오인해서 아들을 삼는 것이다.

그건 이제 정말 취사심取捨心 망심이니 진리니 하는 그렇게 나누는 것 그것이 이제 사실은 도적인데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나누는 것이 좋은 일인냥으로 그렇게 아는 거죠.

우리하고는 보통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상식하고는 전혀 다르죠.
우리는 나누는 것 취사하는 것 분별하고 선택하고 가리는 것 이것이 옳은 일인 줄 아는데 사실은 그것 때문에 진리眞理를 못깨닫고 중도中道적인 삶을 못살고 아주 훌륭한 그런 바람직한 대도大道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損法財 滅功德은 莫不由斯心意識 이니
손법재 멸공덕 막불유사심의식


그러한 분별심이 말하자면 알량한 우리들의 사변 우리들의 심의식 6식 7식 8식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심이 아주 뛰어나면 우리가 공부를 잘한다고 한다든지 머리가 영리하다고 한다든지 총명하다고 한다든지 세속적으로는 그렇죠

그런데 그러한 그 어떤 사량분별심은 아무리 뛰어나야 그건 결국은 법法의 재산 진정한 법의 재산을 덜어내고 손해보게 하고 참다운 공덕을 없애는 소멸하게 하는 그런 일이다.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법의 재산을 손해보게 하고 덜어내게 하고 공덕을 멸하게 하는 것은 막불유사심의식莫不由斯心意識 이다
이 심心 의意 식識을 말미함지 아니함이 없다 그랬습니다.
심의식은 심心은 8식이라 그러고 의意는 7식이라 그러고 식識은 6식이라 그러고 이건 뭐 우리들의 깨닫지 못한 그 마음의 어떤 차원을 이렇게 심心 의意 식識으로 이렇게 나눠서 이야기 합니다.


그반대로 심心을 이제 6식이라고도 하고 의意는 7식이고 뭐 식識은 8식이다 이렇게 이제 설명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렇게 다르게 말해요.

어쨌든 우리들의 의식이 현전의식이 있고 잠재의식이 있고, 현전現前意識의식 심층의식深層意識 크게 나누면 이제 그렇게 둘로 나눌 수가 있죠.
그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는 의식이 또 있다고 하죠.
그걸 7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7식은 상합제팔上合第八하고 하합제육下合第六이라
위로는 8식에 합하고 아래로는 6식에 합하기 때문에
6식은 현전의식이라고 할 수가 있죠.

말하자면은 어떤 빙산일각을 우리가 그림으로 상상을 한다면은 표면 위에 떠있는 것을 6식이라고 할 수 있고 물 표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는 부분을 8식이라고 할 수 있고 바로 그 표면 위와 표면 아래를 연계시켜주는 그 중간 수면상의 어떤 과정을 7식이다 이렇게 이제 이야기 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의 깊고 얕음을 통 털어서 이야기 하는 거죠.
이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의 사량분별의 어떤 그 능력 또는 사량분별하는 그런 근거, 사량분별하는 의식의 분별의 주체 그렇게 이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이제 얕은 의식이든지 깊은 의식이든지 아니면 중간의식이든지 그렇게 이제 볼 수가 있는 거지요.

그 의식때문에 그렇게 손법재 멸공덕損法財 滅功德을 한다는 거죠.
법재法財진짜 법의 재산이 되는 것은 손해를 보고 진정한 나에게 공덕功德이 되는 것은 손해를 본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범부들이 생각하는 그 상식적인 것하고는 정반대죠. 범부들은 심의식을 현전의식이든지 무슨 심층의식이든지 이런 것들을 잘 활용을 해가지고 거기서 계산을 해내고 거기서 잣대를 재고 틀을 맞추고 이렇게 해서 나에게 이익한가 손해인가 이렇게 이제 산출을 해내는데 사실은 그것은 진정한 법의 재산과 진리 재산과 공덕에는 오히려 위배되는 것이고 반대되는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是以로 禪門에 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力이로다
시이 선문 요각심 돈입무생지견력



그렇기 때문에 선문禪門에서는 이 깨달음을 종宗으로 삼는 으뜸으로 삼는 이 선문禪門에서는 요각심了却心이라
이 심의식心意識을 심心자는 심의식心意識이예요 심의식心意識을 요각了却해버린다.
깨달을 요了자 버릴 요了자 마칠 요了자 이러는데 이 요각了却은 떨쳐버린다 이렇게 해석하는 게 좋습니다. 벗어버리고 떨쳐버리고 이런 뜻이죠.
그래 심의식을 선문禪門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을 떨쳐버린다.

그래서 이제 심의식心意識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화두라는 방편을 이용을 해가지고서 현전의식도 중간의식도 그리고 심층의식도 다 벗어나는 아주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라고나 할까요.
그런 아주 뭐라고 할까 깊은 경지 아주 높은 경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의식을 그렇게 끌고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그런 식의 공부가 상당히 권장이 되고 있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의 한 입장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문禪門에는 심인식心意識을 요각了却해버린다.
인정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떨쳐버린다. 벗어버리고
돈입무생지견력頓入無生知見力이라
이것은 앞서 설명한 간화선을 통해서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갔든 아니면 그런 경지를 밟지 않고 육조스님이나 영각스님이나 이런 이들처럼 경문의 한 구절을 듣고 바로 심의식이 미치지 못할 어떤 차원에 계합이 되든 그건 뭐 관계 없습니다.

꼭 이제 그런 그 화두를 들고 동정일여動靜一如 뭐 몽중일여 夢中一如 병중일여 病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 그런 경지를 다 밟아서 가는 그런 경우도 있고, 육조스님이나 영가스님같이 한마디 말에 그냥 바로 그런 것을 초월한 그런 그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그런 길도 얼마든지 또 있고 그렇지요 그래서 꼭같은 길은 아니예요.

예를 들어 상봉에 올라가는 그 산 상봉에 올라가는 데 걸어서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내려오는 방법도 있고 얼마든지 방법이 있습니다.
또 올라가는 길도 여러 길이 있죠.
계곡을 계곡을 밟아서 아주 고생스럽게 가는 길도 있고 잘 닦여진 길을 갈 수도 있고 그와 같이 어떤 심의식心意識을 초월한 그런 무생지견력無生知見力의 경지는 말하자면 선문禪門에서 아주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받는 그런 경지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무생지견력無生知見力 생사가 없는 생멸이 없는 지견知見의 힘에 한꺼번에 들어간다. 몰록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심의식心意識 사량분별로서 어떻게 어떻게 꿰어맞추고 계산해 내고 하는 그런 것은 떨쳐버리고 벗어버린다 하는 것입니다.
선문에서는 이제 거기서 벗어난 삶을 그렇게 높이 사니까요.

예를 들어서 선문답禪問答을 한다 하더라도 임제록 같은데 우리가 보아왔듯이 어떻습니까
뭐 이렇게 이쪽에서 법거량法擧揚(法擧量)을 이렇게 던졌는데 저쪽에서 머뭇거리고 얼른 대답을 못한다 이거예요. 머뭇거리고 대답을 빨리 못하는 것은 심의식을 굴린다는 뜻입니다. 머리를 굴리고 생각을 짜아내는 거죠.
그건 이미 심의식의 일이지 직관의 능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禪은 직관直觀을 중요시 하거든요.
그 이제 직관력이라는 것은 바로 무생지견력無生知見力에서 나오는 대답이고 어떤 법거량이고 행위여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도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무생지견력無生知見力에 생멸生滅이 없는 지견知見의 힘에 몰록 들어간다.


大丈夫 秉慧劍 하니 般若鋒兮金剛焰 이로다
대장부 병혜검 반야봉혜금강염



그렇게 된 과정에서의 나오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건 뭐 대단한 지혜다. 어떤 망상과 번뇌와 사량분별과 그리고 잡된 소견 정말 정지견正知見이 못되는 그런 그 알음알이에 의한 소견들은 사정없이 지혜의 칼로 일도양단一刀兩斷 두동강을 내버린다. 그런 표현으로서 여기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죠.

대장부가 지혜智慧의 칼을 잡은 것이요 반야般若의 칼날이요 금강 金剛의 불꽃이로다.
그랬어요. 혜검慧劍 이나 반야봉般若鋒이나 금강염金剛焰 이나 한칼이죠. 하나의 칼인데 그 칼은 지혜의 칼이고 칼날은 반야의 칼날이고 그 칼날에서 번뜩이는 빛은 금강반야의 빛이다.

뭐 결국은 표현을 조금씩 달리해서 그렇지 하나의 칼에 그 칼 이름은 지혜의 칼이고 반야의 칼날이고 거기서 번뜩이는 그 서슬이 푸른 그 런 빛은 바로 금강의 빛이다.
염焰자는 거기서 뿜어나오는 어떤 그 신령스러운 기운, 뭐라고 할까요. 아주 그 섬찟하고 번떡이는 빛을 금강염金剛焰이라 이렇게 이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그 참 마음을 제대로 밑바닥까지 깨닫고 나면은 철저히 내 살림이 되고 나면은 거기에서 뿜어나오는 그 기운이라고 하는 것은 그 대단하다는 거죠. 아주 날카롭기로 말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날카롭고 그래서 취모검吹毛劍이다 이런 표현을 하죠. 취모검.
머리카락을 갖다가 칼날 위에다 이렇게 얹으고 입김을 사악 불기만 하면 머리카락이 스르륵 잘려서 떨어질 그럴 정도로 날카로운 칼이다.
그걸 이제 이 선가禪家에서 취모검吹毛劍 불 취吹자 터럭 모毛자 칼 검劍자 취모검吹毛劍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 마음의 지혜로운 입장을 날카롭고 지혜로운 입장을 표현하는데 왜 그렇게 날카로운가 그러니까 뭐 크게 힘쓰지 않고도 그 위에 무엇이든지 닿기만 하면 다 잘라지는가 그것은 이제 잘못된 사상, 잘못된 소견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뭐 다른 어떤 그 물질을 말하는 게 아니죠.
잘못된 생각이라든지 사상이라든지 안목이라든지 지견이라든지 이런 잘못된 것들이 결국은 그게 이제 분별심이고 망상이고 그렇지요. 그러니까 분별이니 망상이니 그런 표현보다는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상 잘못된 주의주장 이것을 사정없이 잘라버리는 그런 그 칼과 같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불교공부를 제대로 잘했다고 하는 것은 소견所見이 바로 들었다는 뜻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소견所見이 바로 들었다는 뜻이지 그외에 다른 게 아니예요.

불교가 우리 마음속에 이렇게 들어오고 생활속에 들어와서 결국은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인생으로써 가장 의미있고 보람되게 살자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은 그 인생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무엇보다도 우리가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거 이게 우선하는 아주 급선무죠
잘 알아야 그것을 잘 쓸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기계가 하나 있다고 그러면 그 기계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우리가 잘 알면 십분 잘 활용하지요.
그런데 그 기계를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은 그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은 그 엉뚱하게 쓰고 백분의 일도 제대로 못쓰지 않습니까.

우리 뭐 컴퓨터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은 그렇습니다. 컴퓨터 저는 처음에 워드만 했어요. 경을 번역하고 쓴다고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들은 아주 여러가지 재주를 다 부리더라고요 그런데 그 비교해보니까 나는 백분의 일도 못쓰는 거예요 사실은 요즘에 뭐 이렇게 인터넷도 하고 이렇게 방송도 하고 해서 어느 정도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조금은 발휘를 한다고 할 수가 있지만 그래도 잘 쓸 줄 아는 사람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예컨대 그와 같이 우리 인생에 대해서도 인생이 갖고 있는 그런 그 온갖 능력을 소상히 파악을 해서 거기에 맞게 잘 활용을 하면은 그게 이제 정지견正知見 바른 소견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불교는 인생을 그렇게 파악해서 그렇게 살자고 하는 데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불교는 안목眼目을 우선시 하고 지견知見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옛날 조사스님들도 그래요. 자기 제자에게 나는 그대의 눈 밝은 것을 중요시 여기지 그 외에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나는 크게 마음쓰지 않는다 이런 말을 했어요 눈 밝은게 우선이라구요 눈밝으면 바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길로 가지말라 해도 바른 길로 가게 되어 있는 게 이 이치예요. 그래서 눈밝은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지혜의 칼, 대장부大丈夫가 지혜의 칼을 가졌다. 반야의 칼날이고 금강의 불꽃이다.이렇게 이제 우리 마음을 바른 지견을 이렇게까지 표현한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는고 하면은 올바른 사상과 올바른 소견과 올바른 지견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디 이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소견이 바로 박혀가지고 불교를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못하게 되는 그런 상황은 없어야 돼요.

이것이 참 아주 무서운 말이죠.
대장부 병혜검 大丈夫 秉慧劍 반야봉혜금강염般若鋒兮金剛焰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우리 마음의 이치 사람이 살아가는 실상 그게 곧 마음의 이치인데 그것을 제대로 알면은 뭐 다른 잡된 사상과 잡된 그런 주의주장 그런 것이 붙을 수가 없죠.
붙기만 하면 그냥 그야말로 취모검吹毛劍 위에 어떤 물건도 다 잘려나가듯이 그렇게 잘려나가고 맙니다.

우리 불자들이 그런 그 제대로 불교 공부를 하시고 불교를 제대로 믿는 분들은 이런 안목眼目 소견所見이 아주 바로 서 가지고 무슨 지엽적인 것 그거 뭐 일일이 무슨 12인연이 어떻고 8정도가 어떻고 이런 거 뭐 잘 외운다고 불교 아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뭐 천수경 잘 외운다고 그거 불교 아는 것도 아니고요.

소견이 어떻게 바르게 돼 있느냐 이것이 이제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불교는 눈 밝은 것을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지혜의 칼날은



非但能摧外道心 이라 早曾落却天魔膽 이로다
비단능최외도심 조증락각천마담



그랬습니다, 내가 지금 말씀드린 그런 내용들이 외도外道의 마음이고 천마天魔의 마음이죠.
비단 능히 외도들의 마음을 꺾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마天魔 하늘 마구니의 간담을 떨어트리게 했다
그렇죠. 소견所見 바로 딱 들어놓으면요 누가 와서 뭐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참 어떨 땐 딱한 것이 실컷 좋은 이야기 바른 소견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했는데 들고 와서 질문한 꺼리는 보면은 아주 엉뚱한 소리를 하거든요. 참 그럴 때가 안타까워요.
그거 이제 뭐 들고와서 질문할 게 뭐 있습니까. 스스로 생각해 보면 자기가 그동안 듣고 생각한 것에 비춰서 이렇게 계산해 보면은 이게 바른 생각이다 바르지 않은 생각이다 이것이 그냥 나올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엉뚱한 질문을 들고 오는 경우를 간혹 이제 봅니다.
잘못된 소견은 여기에 붙을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비단 외도外道들의 마음을 꺾어 버릴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마天魔의 간담을 떨어뜨리게 한다.
이건 이제 외도外道나 마魔나 이게 뭐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 잘못된 소견 아주 뭐라고 할까 아주 사사한 거 참 불교가 워낙 광범위하고 또 자비롭고요 폭이 넓고 하다보니까 별별 그런 소견들이 많이 붙어있는 곳이 또한 불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바른 지견을 세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잡아 나가야 되겠죠.

뭐 전혀 불교냄새 안나도 좋습니다.
어떤 몸가짐 이런 것이 마음가짐 이런 것이 뭐 절 할 줄 모르면 어떻습니까 합장할 줄 모르면 어때요 단 그 소견이 바로 돼 있으면 그 사람이 불자입니다.
그렇게 알아야 되는 것이지 무슨 뭐 그야말로 흔히 하는 소리 절순이처럼 보살물이 자르르 흐른다고 해서 그게 꼭 바람직한 불자는 절대 아닙니다.
진정한 불자佛子는 여기 말한대로 어떤 잡된 소견도 거기에 붙을 수 없도록 올바른 지견이 올바른 소견이 바로 서 있는 것 그래서 그 소견이 바로 서 있는 사람에게는 뭐가 붙을 수가 없어요.

선거 때 자기 소신이 확실하다고 이렇게 드러난 사람에게는 누가 와서 뭐라고 유혹을 하질 않습니다. 어디든지 그래요 절 집안이나 사회나 보면은 누가 유혹하는 사람이 없어요.
저사람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한 사람이라서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말한 대로 또 요청한 대로 그렇게 돌아올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아무리 욕을 해도 그 사람은 우리 편일 것이고 아무리 뭐 감싸줘도 우리 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붙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겐 맑지요. 아무것도 뭐 생기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들 뭐하겠습니까. 또 그런 거 아예 처음부터 그런 데서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구요.

이참 무서운 소리죠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고 있는 것은 반야의 칼날에 금강의 불꽃이다. 그것은 비단 능히 외도外道의 마음을 꺾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마天魔의 간담을 떨어트리게 하는도다.



震法雷 擊法鼓여 布慈雲兮灑甘露로다
진법뢰 격법고 포자운혜쇄감로


법의 우레를 떨치고 그 얼마나 참 이 영가스님의 자신 넘치는 말씀입니까. 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그당시 당신의 사상과 당신의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들으라고 하는 소리기도 해요 사실은. 그런 의미가 상당히 많을 거예요.

그래서 비난을 많이 받았고 외도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제 부르짖는 그런 의미로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당시 영가스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하는 사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야되겠죠.

진법뢰 격법고震法雷 擊法鼓여 포자운혜쇄감로布慈雲兮灑甘露로다
법의 우레를 떨치고 당신의 밝은 안목, 올바른 사상, 참 투철히 깨달으신 안목에서 뿜어나온 사자후獅子吼 이걸 말하는 것이죠 사자후라는 게 소리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바른 주의주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의 우레를 떨치고 법의 북을 침이여 포자운布慈雲 자비의 구름을 펼치고 감로甘露 감로의 물을 감로의 법비를 뿌림이로다 그랬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하자면은 올바른 깨달음에 의해서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사자후獅子吼 하는 것을 이렇게 이제 의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의 우레가 진동하고 법의 북을 두드린다. 내가 이렇게 주장을 펴고 이런 올바른 사상을 드날리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일이다. 그리고 자비의 구름을 펼쳐 가지고서 감로수를 뿌리는 일이다.

감로는 불사약不死藥이라 그러죠. 감로甘露 단이슬이라 그러는데 이것은 불사약이라 그런 표현을 합니다. 말하자면은 생사를 초월하는 그런 진리의 가르침 이런 뜻이죠. 감로甘露 라는 말은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 이렇게 투철히 깨달아가지고 추호만한 의심도 없고 추호만치도 미진한 게 없는 그런 입장이 돼서 당당하게 자신의 그 주장과 자신의 길을 반대하고 모함하고 음해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이 사자후가 이건 이제 뭐 그 말이 듣기가 참 거북해서가 아니라 자비의 구름을 펼치는 것이고 불사의 감로법을 펴서 그 어리석고 못난 소견을 가진 잘못된 소견을 가진 사람들을 내가 제도하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16강
2006년 03월 17일 證道歌 제16강 (龍象蹴踏潤無邊~)

증도가
반갑습니다. 오늘 3월 17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증도가 어제 이어서 오늘은 용상축답윤무변龍象蹴踏潤無邊 하니 삼승오성三乘五性이 개성오皆惺悟로다 그랬습니다.

이글은 계속 뜻이 연결되어 있는데요, 그 앞 구절이 진법뢰 격법고震法雷 擊法鼓하면 포자운혜 쇠감로布慈雲兮灑甘露로다.
법의 우뢰가 진동하고 법의 북을 두드리며 자비의 구름을 펼치는 것이고 감로의 법비를 뿌리는 것이로다 그랬습니다.

영가 스님께서 그 당시로서는 참 정말 큰 깨달음을 얻으셔서 당시 불교에서는 아무나 주장할 수 없었던 획기적인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뭐 많은 말씀이 있겠지만은증도가를 근거를 해서 우리 익숙한 말로 표현하자면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고 불성! 불성해서 우리의 진심, 참마음 이것을 상당히 알고 싶어 하고 찾고 싶어 하고
또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바로우리 번뇌 망상 누구나 다 사용하고 있는 일상생활의 그런 마음
이것이 그대로가 불성이다라고 하는 참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고 또 법신 법신 하는데 법신이라고 하는것이 다름 아니라 이 육신이 바로 법신이다 환화 공신幻化空身이 즉법신卽法身이다
이것이야말로 법의 우뢰고 법의 북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야말로 자비의 구름을 펼치는 것이고 감로의 법비를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교의 안목으로 볼 때 최고의 어떤 경지에서 나오는 이런 말씀은 뭐 비유컨대
용과 코끼리가 사정없이 차고 밟고 앞으로 앞으로 실천해 나아가는 그런 모습과 같아서 그 차고 밟고 나아가는 그 어떤 영향력이 유는 이제 윤택함으로 해서 나아가는 영향력이 끝이없다, 그랬습니다.

무변하다. 영가스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셔셔 증도가의 어떤 높은 가르침을 펼치므로 해서 이제서 비로소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님의 가장 높은 안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눈을 뜨게 됐다 하는 거죠!
그런 것을 이렇게 아주 뛰어난 글 솜씨와 표현력으로써 그야말로 종도 설하고, 통하고, 종지도 통하고 설법도 통했다. 라고 스스로 자신있게 말씀하셨듯이
이와 같이 뛰어난 표현력으로서 이렇게 하는데 이러한
그 설법을 통해서 삼승오성 개오성이로다. 삼승은 그대로 성문. 연각. 보살. 여러 차원의 그 수행자들을 일컬을 수 있는 것이고 오성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선성, 악성, 정성, 부정성, 천재성해가지고
별의별 고정된 견해의 어떤 소유자들을 다섯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성이나 오성이나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견해의 차별성 또 온갖 근기의 차별성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차별을 가진 견해와 근기라 하더라도 다 영가스님의 이러한 엄청난 가르침을 듣고서는 전부 다 깨친다. 이런 말입니다
성오
깰성 성자는 잠을 깨다, 꿈을 깨다, 술을 깨다. 이런 성자지만 성오라고 붙여서 우리가 마음을 깨닫다라는 뜻으로 같이 쓰기도 합니다.
어떤 수준의 견해든 어떤 수준의 근기든 간에 다 무명실성이 즉 불성이고 환화공신이 즉 법신이다. 라고 하는 이런 큰 가르침을 통해서 전부 눈을 뜨게 되고 전부 깨달음을 얻게 됐다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 더 얼마나 고구정령하게 말씀 드릴수가 있으며 이 이상 어떻게 또 드러내서 진리의 실상을 확연히 드러내서
우리 승가에선 화반탁출和盤托出이라고 그래요, 떡을 쪄서 꺼내서 썰어가지고 알맞게 쟁반에다 내놓는 것이 아니라 화반탁출이란? 솥에 다 드러내 놓는 그런 경우를 화반탁출 이라고 그래요.
떡 소반까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다 손님에게 갖다 바쳤다.
그야말로 영가스님의 영가증도가의 가르침은 당신의 그 깨달음의 높은 경지를 가르침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깨달음 경지를 그대로 다 드러내 놓았다 이대로 말씀을 드릴수가 있습니다. 그 높은 법문을 듣고 여기서 그야말로 귀가 열리고 눈이 떠져 야죠!
그렇게 안 되면 어쨌든 그 우리육신이 그대로 법신이고 망상이 다 그대로 진심이다라고 하는거 그
런거 불구진 부단망 여러번 나왔죠! 또 부대망상 불구진
여러 번 같은 표현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그 망상을 제거해야 된다고 평소에 말했고 그래서 진심을 찾아내야 된다고 그렇게들 이야기 하셨는데
재대로 깨달으신 영가스님은 그게 둘이 아니다 이거죠.

그래서 망상을 제거할 필요도 없고 따로 진심을 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런 것이다. 이런 말씀에 우리가 귀가 열리지 않고 눈이 열리지 아니하고 다시 뭐 더 이상 어디 가서 열릴 길은 없습니다. 뭐 이걸 그저 증도가를 열심히 쓰고 읽고 쓰고 읽고 사유하고 잠잘 때 이런 구절 하나 머리에 딱 가지고 잠들고 그렇게 하다보면 저절로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지 않을까 그랬습니다.

여기 삼성오성이 개성오로다 온갖 견해 온갖 근기 들이 다 깨달음을 얻는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영가 스님께서 깨달으셔셔 자신의 그 됨됨이 자신의 법기 법의 그릇은 여기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자신의 근기를 설산비니갱무잡이라 그랬는데 설산에 사는 흰소가 다른 풀을 먹지 아니하고 비니초라고 하는 풀만 먹어서 다시는 더 이상 잡초를 먹지 않는다.
설산비니 갱무잡이란 그 일곱자가 그렇게 긴 이야기인데 일곱자로 표현 되있어요.
설산에 사는 백우 흰소가 비니초만 먹고 더 이상 잡초를 먹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 백우 흰 소는 비니 초만 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놓는 어떤 젖을 제호만 내 놓는다. 순전히 제호만 내놓는다. 나는 제호만을 늘 받아들이도다.
제호는 보통 이제 우우를 짜가지고 여러 그 단계를 거쳐서 제일 하치는 뭐고 그다음 뭐고 그다음은 뭐고 해서 가장 맛있는 것으로 정제를 했을 때 그걸 가지고 제호라 한다.
제호산미!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제호라고 하는 것인데 글쎄요 내가 먹어본 경험으로는 연유! 연유라고 요즈음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옛날에 보면 깡통에 어린아이들 식용으로 연유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걸 먹어보면 맛도 진하고 어릴 때 기억으로는 그렇게 가장 맛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제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당히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낸 우유로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게 이제 엇비슷하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설산에 비니초만 먹고 자란 흰소는 아예 다른 뭐 초기단계 이단계 삼단계 거친 우유나 거친 치즈나 이런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제호만 내놓는다.
순전히 제호만 내놓는다. 더 이상 가공할 필요가 없다 최고 산미인 제호만 순전히 내놓는데 나는 항상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 제호만을 받아들인다 이제 말은 그래요,

속 뜻은 뭔고 하면 바로 불성사상입니다. 불성사상!! 법화경에도 있지만 은 대 백우거라! 그러죠! 능엄경에도 대 백우라고 하는 흰 소 이야기가 나오고 법화경에도 대 백우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는데 바로
불성!! 부처의 경지!! 그러니까 이것은 그 불교에서도 많고 많은 그런 그 가르침 중에서 전혀 방편의 티가 거기 붙지 아니한 순수한 불성 사상. 일불성 사상, 그것만은 내가 받아들이고 그래서 부처님이 바로 그것을 내놓으면 나는 그것만을 받아들인다.
불교 안에서 나는 그것만은 받아들인다 이거예요 온갖 방편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도 또 근기 따라서 사람들이 정말 진짜 좋은 것은 가질려고 안하고 방편설을 가지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은데
염화실 법우님들은 최상승 공부를 하시니까 불교에서도 그 최첨단의 견해를, 최고의 견해를 가지고 말하자면 순수한 불성사상으로 그렇게 이제 이렇게 불교를 이해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으면 합니다.

이 증도가에서 영가스님 말씀이 바로 그거에요 나는 불교안에서 잡다한 근기 따라서 방편설이 많이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불성사상만 받아들이고 내가 내놓는 것도 전부 불성사상 만 받아들이고 나도 내놓 는것도 전부 불성사상만 내 놓는다 그런 뜻이예요.
사람이 부처님이다 뜻이죠!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망상 그대로가 뭡니까? 진심이고, 진리고, 그대로 육신그대로가 법신이다. 하는 사상 그대로입니다. 전부 그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불교에서 순전히 불성만 내놓는데 불법 안에서 그것만 내놓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 들인다.
이런 형식으로 이제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설산에 있는 백우 흰소 에 빗대어서 그렇게 말을 하죠! 그 불성이라고 하는것은 그 한 부처의 성품이란 다른 말로 하면 일성이고, 일성이고, 그래서 일성이 원통이 원통일체성이다 일체성품에 다 통한다.
여기서 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성품 이것이 통일된 성품입니다. 일체성품의 다 원만히 통한다.
그리고 하나의 법은 일체법을 두루두루 다 포함한다. 일법이 변하면 일체법이다 그랬어요.
영가스님같이 깨달은 안목으로 볼때 한 개인의 성품이 모든 사람들의 성품과 원만히 다 통하고 있고 영가스님 안목으로 볼때 모든 사람성품이 다 통하고 성질이 같아서 알고 보면 공명하게 되있는거죠!
진리적인 그런 입장에서 볼때 사람 사람이 아무리 다르고 사람과 동물이 다르고 사람과 식물이 다르고 다르다고 그렇게 우리 눈에도 보이지만 사실은 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성품이고, 그 하나의 성품은 모든 존재의 다양한 성품과 전부 원만하게 통한다.
자신의 한 가지 법이 또 일체 존재들이 살아가는 그 법과 역시 통하고 그래서 두루두루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비유로 들자면 일월一月이 보현일체수普現一切水 하니 일체수월일월섭一切水月一月攝 이로다
하나의 달이 일체의 물에 널리 나타난다. 천강유수 천강월이라 그러죠!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에 달이 비춘다.
일체수월 일월섭一切水月一月攝이라 일체 물이 있는 온갖 곳에 물에 비치 는 달이 하늘에 있는 하나의 달에 다 포섭된다. 그와 같은 비유죠. 그와 같이 일체 그 밑에 확실하게 집고 넘어 가죠.

제불법신諸佛法身이 입아성入我性이요 아성환공여래합 我性還共如來合이라 그랬습니다.
모든 깨달은 사람의 법신이 내 성품에다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또한 같이 여래에 합한다. 아성이 환공여래합이라 제불법신이 입아성이요 아성환공 여래합이라.
우리는 낱낱이 독립된 존재로 있지만 전부 우리가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좀더 깨어있는 눈으로 볼 때 전부 통일되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가까이 있는 비유로 들자면 여기서 내가 지금 내 컴퓨터에 대고 방송을 하죠! 듣는 법우님들은 각각의 집에 있는 개인의 컴퓨터로 다함께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 듣고 있지만은 이십명 삼십명 사십명 오십명 듣고 있지만은 듣고 있는 그 소리는 내가 말하고 있는 하나의 이 소리는 내가 말하고 있는 하나의 소리에 다 포섭이 되죠.
일월이 보현 일체수하니 일체수월일월섭과 같고 제불법신이 입아성이고 아성환공여래합이라..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컴퓨터의 소리나 내가 말하는 것이나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성질이 같은 것이고 그래서 서로 같이 울리고 있다. 공명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이고 부처님과 나와 부처님의 관계 나와 부처님과의 관계 나와 옆에 있는 사람과 관계들이 나와 먼 거리에 계시는 여러 법우님들과 이런 관계들이 지금 뭐 표면으로 보면 따로 따로 독립되어 있고 떨어져 있지만은 내면으로 보면 다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또 다른 비유들 들어보면은
산봉우리가 여기저기 많죠!! 따로 독립된 산입니다. 우리나라 큰 산 작은 산이 많은데 우리나라 산이 수 천 개 수 만개가 있겠는데 그게 전부 독립돼 있지만 산이 많지만 밑으로 내려오면 하나의 땅으로 통일되어 있죠!
하나의 땅에서 여기서는 이렇게 솟았고 저기서는 저렇게 솟았고 그래서 여기서는 지리산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가야산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금정산 이라하고 여기서는 금강산 이라하고 여서서는 백두산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표면만 보고 우리가 하는 소리죠. 그렇습니다. 조금 밑으로 내려가 보면 하나의 땅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죠.
그와 같이 각자 개체의 산으로 보는 안목과 통일된 하나의 땅덩어리로 보는 안목! 통일된 하나의 땅덩어리로만 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별개의 땅으로만 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별개의 달도 마찬가지 하나의 달과 연결되어 있고 그러면서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고 여럿이 면서 하나인 그런 입장을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하나의 달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도 여기저기 물의 그림자 비추는 그런 달이 하나의 달과 사실은 연결되어 있고 그러면서 또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고 여럿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제불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고 그래서 내 성품이 곧 제불법신이고 제불법신이 곧 내 성품이다. 뭐라고 할까요?
한 꺼풀 걷어내면 통하게 되어있고 통일이 되어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죠. 이러한 문제를 우리가 사량분별로 이렇게 가름해 보아도 어지간히 짐작이 가죠.
이런 이야기는 그렇게 어려운게 아닙니다. 짐작이 가는데 영가스님같이 확철히 깨달으신 안목으로 볼때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펜과 다를 바가 없이 당연이 한 이야기처럼 보일 것입니다.

일지구족일체지 一地具足一切地 비색비심비행업 非色非心非行業이라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존재의 존재 양상은 앞에 설명한것과 같이 조금 덧붙인다면 천지가 여아동근이고 만물이 여아 일체다 그런 말도있죠. 하늘과 땅이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불교에서 흔히 쓰죠. 잘 생각해보면 설명한대로 짐작이 가고 조금 한 가지 더 눈을 뜨고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전혀 캄캄한 중생의 입장과 수행을 많이 하고 눈을 많이 떠서 높은 경지에 있는 입장, 그런 관계는 또 어떨까? 그래서 시간과 공간, 종횡, 좌우 이런 관계는 어떨까 하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죠!
일지구족일체지하니 비색비심비행업이라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은 일지라는 것은
첫 단계 불교에 처음 입문해서 처음 아는 단계 그 다음에 일체지를 구족했다고 하는 것은 올라갈 대로 끝까지 다 올라간 단계 이것을 일체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지위가 모든 지위를 다 갖추고 있다. 하나 속에 다 가 있다 사실은 편의상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불교의 수행의 점차를 십신, 십주, 십향, 십행, 십지, 등각, 묘각, 보통 52위 점차를 이야기 하는데 그것도 그런 근기에 맞도록 펼쳐 놓아본 하나의 가설이죠!

그런데 이것이 마음의 문제란 말입니다.
그래서 비색비심비행업이라 그랬습니다.
마음의 문제라고 하면서 육신을 떠난 마음이 따로 없고 마음과 육신이 무언가 작용을 일으키죠,
그것을 행업이라 말하는데 이 그 무엇도 하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색 육신만도 아니고 비심 마음만도 아니고 비행업만도육신과 마음이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아니다.

어느 특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틀린 말입니다.
이것은 도를 증득한 노래 영가스님께서 깨달은 그 당체, 경지를 조금도 수식 없이 고스란히 드러내 놓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일체구족일체지 한다. 한 지위 속에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결정설!! 결정적인 설법을 관심 있게 듣고 깊이 사유해서 이해를 해야되지 않겠나 합니다.
그리고 불교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고 육바라밀을 열심히 닦고 한가지로 말하면 복도 유루복도 지어야 지혜도 갈고 닦아야 하고 그것이 팔만사천 공덕문이라 어떻게 하면 이루어지는가?
결정설!

탄지원성 팔만문 彈指圓成八萬門 손가락한번 튕기는 사이 찰나멸겁삼지겁 刹那滅却三祇劫! 찰나에 삼지겁 동안 닦아야 할 수행문도 (소멸,멸각 ) 없애버린다. 삼 아승지겁 동안 수행해야할 수행문도 다 찰나에 멸각해 버린다. 한 생각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거죠.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영가 스님이 확철히 깨달은 분이니까 이런 말씀을 하셨고 그래서 영가스님의 이런 표현을 뒷 조사스님들이 많이 인용합니다. 
불교공부 한 사람치고
증도가를 못 외우는 사람이 없고 다 높이 칭찬 안한 이가 없고 법문할 때 인용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불교안목의 기증!!  증도가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소견이 잘못 되었다, 영가스님이 착각했다고 반기를 든 주장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워낙 투철한 깨달음을 하셔서 길게 설명하지도 않고 한 두 구절의 시 형식을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내 놓습니다.
얼마나 시원합니까? 탄지원성 팔만문이요 찰나멸겁 삼지겁이다.
불교는 이렇게 시원한 것입니다. 갑갑하고 답답하게 만들면 잘 못된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이치가 그렇지 않는데 이치와 달리 당신 마음대로 속시원 하다고 덮어 놓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체수구 비수구요 一切數句非數句 여오영각으로 하교섭가 與吾靈覺何交涉 일체수구!! 수구라고 하는것은
여러 가지로 차별한 법구. 문구, 경전 구절 어록들, 법수, 수구라고 하는 것은 법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숫자로 전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법수라 해서 표시하는데 큰 사전같이 한권으로 돼있습니다.
일승 삼승 삼보 이런 식으로 숫자가 들어가서 어떤 가르침의 뜻을 전한 것! 사홍서원, 숫자가 들어간 것이 전부 법수라고 하는데 숫자가 들어간 것과 아울러 일체 법구나 ,문구, 경전들 통틀어서 일체수구라 그런다

일체수구 여러 가지 구절들 이것이 여러 가지 구절이 아니다 말이 말이 아니다. 법문이 법문이 아니다.
내 신령스런 깨달음과 무슨 교섭이 있을 것인가!
팔 만 대장경하고 나 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 경전은 경전이고 나는 나다. 한 생각 잘 해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감동하는 내가 중요하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경전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고 감동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보면 나 아닌 다른 아무리 현란하고 화려한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내 신령스런 깨달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제 말씀하셨습니다.
훼방할 수도 없고 찬탄할 수도 없다. 내 신령스런 깨달음에 관계가 안 되니까 이것은 찬탄할 수 없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훼방할 수도 없다. 찬탄할 수도 없다 일체수구들을~~
불가훼 불가찬 不可毁 不可讚 일체수구비수구 여오영각 하교섭이라
경전이나 어록이 고맙고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자리 하고는 별개의 것이니까 그렇다고 꼭 별개라고 선을 그을 것은 아니예요.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자성, 참나, 말하는 당체, 이야기 소리를 듣는 그 주인공에 무게를 싣고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 이런 가르침 속에서는 그런 것을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체약허공물애안 體若虛空勿涯岸이라 일체수구 온갖 팔만대장경 가지고는 이 드넓은 우리 마음의 본체, 당체자리 그것에 무슨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당체자리는 체약허공물애안 體若虛空勿涯岸이라~
체는 허공과 같아서 애안이 없다. 저 허공은 어디가 한계가 없죠! 정말 무한합니다. 애안~ 한계, 어느 가 예 를 들어서 못이 있으면 못의 가장자리를 애안이라 하지요.
허공은 가장자리가 없어요. 지금 천체망원경을 가지고 수백억광년까지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과학의 한계고 좀 더 발전하면 더 먼 거리도 볼 수 있겠죠.
아무리 그래도 더 먼 거리를 볼 수 있는 망원경이 개발된다하더라도 그래도 다 끝까지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끝이 없으니까~~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심체도 우리의 당체자리, 본체 자리도 그와 같다 그렇게 드넓은 세계가 나의 실체인데 참 나의 실체에 대해서 팔만대장경에서 설명해 놓은 것에 거기에 해당이 되겠는가?

불리당처상담연 不離當處常湛然!!
    
불가훼 불가찬!!
그런 가르침을 통해서 이만큼이라도 이해하고 당체자리, 참 나의 실체에 대해서 이 정도라도 짐작을 하고 이해를 조금이라고 이해하게 되니까 그렇다고 훼방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고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가스님의 차원이죠.
우리 같은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것은 아니죠! 일체수구팔만대장경 그거 뭐 별거 아니다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건방이 들어가지고 그렇게 할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영가스님도 극한 표현보다는 훼방할 것도 아니고 찬탄할 것도 아니다.

체약허공 물애안 體若虛空勿涯岸 불리당처 상담연 不離當處常湛然!
우리의 본체, 우리의 신체 나 자신의 당체자리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證道歌 제17강

반갑습니다.
오늘 3월 20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주말들 잘 보내셨을 줄 믿습니다. 강의 들어가기 전에 생각났을 때 한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떨 때 강의 마치고 이야기한다고 메모를 해 놓고도 못할 때도 있고 또 강의 전에 이제 할려고 준비해놓고도 못할 때도 있고 또 그래요. 개인일이 좀 있어가지고 내일하고 모레, 화요일 수요일 이틀간 휴강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화요일 수요일 강의가 없습니다. 차질 없기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여기서부터 이제 할 차례인데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불리당처상담연 멱즉지군불가견


앞에서 이어온 이야기와 연관 지어서 우리의 그 마음자리는 사실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처에 있다.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 맑다. 이런 말입니다. 깨끗하고 맑고 고요하게 그렇게 그 자리에 있다. 여기서 당처라고 하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견문각지 見聞覺知하는 바로 그 자리를 당처라고 합니다. 지금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요. 여러분들은 말소리를 듣고 또 이제 모니터를 보고 또 손도 움직이고 발도 움직이고 또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 따라서 즉각 반응하는 작용하는 바로 그 자리를 당처라고 합니다. 그 자리는 그런 뜻이죠.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거기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찾으려고 하면은 분명이 이 자리에 있기는 있지만 찾으려고 하면은 알 것이다.




君不可見 군불가견


그대들은 보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대들은 볼 수 없다. 그 자리에 분명히 있지만은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볼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래요 그것은 이제 깨달은 사람도 뭐 그렇게 사물을 보듯이 그렇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뭐 깨닫지 못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覓則知君不可見 멱적지군불가견


찾은 즉은 그 실상에 대해서 알 것이다. 이런 말이죠.
그대들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지요. 이것이... 일체 것을 다 주재하고 또 주인 입장에 있고 그것이 들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고 그것은 화엄경에서 말했듯이 부처와 중생과 이 마음 이것이 하나인 바로 그 자리이죠. 그것이 당처자리고 그것이 보고 듣고 見聞覺知 견문각지하는 자리이고 그렇습니다.

불교는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사실은




取不得 捨不得 不可得中에只麽得이라
취부득 사부득 불가득중에 지마득이라


그래서 이것은 늘 이제 불교의 종지가 그렇고 또 제대로 깨달으신 분들의 한결같은 말씀이 늘 근본종지를 그렇게 밝히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取不得 捨不得 不可得中에只麽得이라
취부득 사부득 불가득중에 지마득이라

그랬는데 이것을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한 순간 어느 한 자리도 나와 떠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취할려고 해도 취할 수가 없고 取不得 취부득 또 버릴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는거죠. 이 참 마음을 실체를 이렇게 잘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또




不可得中에 只麽得이라.
불가득중에 지마득이라.


그랬지요.
얻을 수 없는 가운데서 또 그렇게 얻어요. 이건 이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은 또 우리가 잘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볼 만한 일이 있으면 보게 되고 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듣게 되고 손이 필요하면 손이 움직여지고 발이 필요하면 발이 움직여지고 그게 지마득 只麽得 이지요. 그러히 얻는다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렇게 얻는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바로 그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으로잡을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은 그러나 또 우리가 필요로 하면 그 자리에 아주 너무나도 분명하게 작용을 하고 현현한다 하는 그런 그 뜻이지요.

불교에는 이런 그 근본종지에 대한 그런 그 소견이 확실하게 세워져야 됩니다. 지엽적인 거 그건 좀 몰라도 돼요. 내가 간혹 말씀드리지만 천수경을 못 외워도 상관없고 전혀 뭐 행동거지라든지 모습에 불교냄새가 안 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요는 이 소견이 제대로 드는 것 이게 이제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고 근본적인 것이고 아주 중요해요.

요즘 뭐 이 불교를 왜곡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어떤 한 스님의 이야기가 우리 염화실 카페에도 올랐고 뭐 곳곳에서 이야기가 되고 있고 책도 많이 팔려서 이런저런 그 불교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혹세무민하는 그런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불교 TV에서 법문도 그 스님이 했는데 나도 한번 들은 적이 있어요. 우연히 한 일 년쯤 전인가요.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서 권유를 해 가지고 사람들이 듣고는 권유를 해 가지고 방영을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 또 뭐 호법부에다가 조계종 호법부에다가 건의를 해서 그런 문제를 좀 시정하게 하라고 하는 건의사항 같은 거 이런 것들이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그런 것들이 불교는 지혜의 종교인데 지혜를 앞세우지 못하고 잘못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는데 말하자면은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팔정도 이야기에도 정견이 첫째에 있지요. 바른 소견 이런 뜻 아닙니까? 무엇이든 올바르게 볼 줄 알면은 바른 소견을 제일 우선으로 하고. 또 正知見 또는 뭐 眞正見解 진정견해 지혜의 말씀 또는 뭐 바른 소견을 갖으라고 한데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용어를 통해서 많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바르고 참되고 바른 견해 이것이 이제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임제스님께서도 늘 말씀하시거든요. 어떤 것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眞正見解 진정견해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시급하다. 그랬습니다. 무엇이 진경견해인가 하면서 또 바로 여기서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불리당처상담연 멱즉지군불가견


우리 마음의 실체에 대한 옳바른 이해 또 이것은 또 나라고 하는 사실이죠. 뭐 마음이라고 하니까 조금 거리가 있는것 같습니다만은 사실은 그것이 나의 실상이고 나의 참모습이고 우리들의 모든 것이고 우리의 전부다. 이런게 있는데 그것에 대한 이해가 바로 진정견해 眞正見解 바른 소견이고 정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달리 다른 지엽적인 소리 뭐 한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죠. 무슨 또 불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은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위하는 사상에서 효도 사상에서 온 것이기는 한데 그것이 너무 이제 많이 필요 이상으로 이용을 하고 있어서 뭐 천도재를 지내는 그런 그 일들이 참 너무 많아요. 보면은... 다른 종교에서 무슨 뭐 법당에다 뭐 귀신만 모셔놓은 법당이다. 이런 비난을 들을 만도 해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 이런 것을 등한시하고 전혀 불교답지 못한 뭐 아주 지엽적인 거 그런 것을 가지고 위주로 절은 운영한다든지 무슨 불교를 선전 한다든지 한다면 그거 위주로 한다고 하는 거 그게 문제가 되는 거 에요. 그건 뭐 불교의 정법 중에서 소소한 아주 작은 뭐 어쩜 안해도 상관없는 그런 일을 가지고 앞세워서 그렇게 하는데.. 결국은 의식주문제 해결하자는 거지 별거입니까 사실은 근데 꼭 그렇게 안 해도 의식주문제는 해결이 되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왜곡되게 많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그런 참 위대한 바른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뭐 그 스님이 어디서 법문한다면 와~ 모이고 부산에도 지부가 있는데 일 년치가 밀려있어서 일 년 후에나 받느니 어떻느니 그런 이야기가 들리고 야단이에요. 그게 이제 바른 소견이 들지 않아서 그런 거거든요. 바른 소견 든 사람들이 많이 많아서 그런데 휩쓸리는 사람들 그런데 이제 관심을 너무 지나치게 갖는 사람들을 깨우쳐줘야 되는데 이게 이제 그야말로 사면초가 四面楚歌라 초나라 말을 하는 사람은 많고 제나라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뭐 그런 격이죠.

그래서 바른 소견을 가지고 바른 정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적고 사법에 사법이 따로 뚜렷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그 삿된 소견에 놀아나는 그런 그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그건 뭐 사회적인 학식이 있고 없고 하고는 아무 관계없어요. 대다수 사람들이 사회적인 그런 그 학벌은 높은데도 이제 그런데 휘말리거든요.

지견이 없고 배운바가 없고 성인의 가르침에 대해서 제대로 고심한 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최소한도 우리 염화실에 출입하는 법우님들만이라도 최상의 지견 불교안에서 최상의 안목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도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의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건 뭐 아는 사람들이 깨우치는 것이지 모르는 사람들이 깨우칠 수는 없는 거거든요. 스님이라고 무턱대고 그렇게 이제 옳은 말이라고 알고 넘어가는 그런 그 신도들 수준도 이제 문제입니다. 믿을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스님이라고 해서. 그러니까 이걸 우리가 공부를 잘 해서 자기 그 어떤 지혜로써 잘 판단을 해야지 항상 남의 말을 듣고 놀아나서야 이게 어디 될 일입니까? 안 되는거지요.

여기 아주 그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불리당처상담연 멱즉지군불가견
取不得 捨不得 不可得中只麽得
취부득 사부득 불가득중에 지마득이라.


우리의 참 실상을 우리 마음의 실체 우리 참 생명의 그 실상을 이렇게 아주 멋지게 표현한 이런 그 최상승 가르침이 이렇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그 시시한 그런 그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 혹한다고 하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죠. 또 이 마음의 그 실상은


黙時說 說時黙
묵시설 설시묵이요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이라

이런 표현도 했습니다.
黙時說묵시설 묵묵할 때 설하고 또 설할 때 묵묵하다. 그러니까 묵묵하면서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면서도 묵묵하다. 그러니까 動동과 靜정이 항상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이제 중도적으로 우리 마음은 존재하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묵묵한 건 끝내 묵묵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끝내 말만 많은 것도 아니고 말할 때 말하고 묵묵할 때 묵묵하고 이것이 이제


黙時說 說時黙 묵시설 설시묵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이라

크게 베푸는 문이 열리니 옹색함이 없다. 아주 툭 터져서 시원하다. 이런 이야기죠. 大施門開란게 뭡니까 육근 작용입니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작용 이게 인제 신통묘용이지요. 육근작용을 통해서 이렇게 활발발하게 신통묘용을 발휘하고 있는 거 이게 크게 베푸는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지요. 이거 외에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옹색함이 없습니다. 하나도 뭐 볼 때 보고 들을 때 듣고 갑자기 우리가 공부하다가도 밖에서 누가 큰 소리 문을 두드리거나 그러면 얼른 또 작용을 합니다. 법문 듣는 이야기는 또 제쳐놓고 또 뭐 갑자기 또 사람이 찾아오면 또 그 맞이하죠. 이게 大施門開아닙니까? 얼마나 활발발하게 잘 움직입니까?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 참 끊임없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건마는 우리는 거기에 어떤 그 이해가 부족하고 사유가 부족하고 느낌과 깨달음이 부족해서 자꾸 이제 나 아닌 다른 어떤 경계에 그렇게 휘둘리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有人問我解何宗
유인문아해하종고하면
報道摩訶般若力
보도마하반야력이라고 하리라.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정말 사자후를 부르짖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당신은 무슨 종취를 아는가? 무슨 종을 아는가? 이렇게 만약에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말하기를 마하반야의 힘이다. 라고 하겠다. 그랬어요. 마하반야의 힘이다. 당신 도대체 무슨 어떤 종지를 알고 있기에 그렇게 당당하고 그렇게 큰 소리 치고 정말 그 들어보니 아주 시원시원한 그런 그 가르침인데 어디서 그런 행이 나오느냐 어디서 그런 안목 그런 설법이 나오느냐? 라고 한다면은 마하반야의 힘이다. 마하반야가 뭐지? 위대한 지혜지요. 위대한 지혜의 힘이다. 위대한 지혜란 게 결국은 한물건 제대로 이해하고 한 물건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지요. 뭐 그 다른 거 있습니까? 그 있지 알면은 그냥 마음대로 그냥 쓰는 거지요. 그야말로 그


무가진보


無價珍用無盡 무가진용무진이라


無價珍寶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 보배를 그저 아무리 써도써도 다 할 수 없는 거 용무진이라. 아무리 써도 다 할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게 마하반야의 힘이지요. 그것을 제대로 자기가 느끼고 활용할 수 있게 되니까 그게 힘으로 작용하는 거지요. 우리는 거기에 대한 확신이 아직도 좀 부족하기 때문에 큰 힘으로 작용하지 못합니다. 이건 이제 우리가 얼마만치 이해하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있고 거기에 대한 깨달음이 있느냐에 따라서 이제 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각각 다르지요. 그래서 육조스님도 이 영가스님의 스승인 육조스님도 마하반야바라밀을 불러라 라고 하는 그런 그 육조단경의 말씀이 있어요.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은 결국은 이제 내 자신을 이끌어 내는 거에요. 내 자신 속에 잠재되어있는 위대한 지혜의 힘을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곧 자기를 불러내는 거에요. 잠자고 있는 나의 위대한 힘을 불러내는 것. 아직 잠들어 있는 나의 훌륭한 그런 지혜의 안목을 깨우는 것이지요. 그게 이제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이걸 자꾸 부른다는 것은 어디 뭐 우리가 부처님이나 사실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은 예를 들어서 뭐 불상이나 보살상이 법당에 있어서 그 어떤 경계를 상상하기가 쉬워요. 대개 그렇지요. 또 어떤 데는 그런 그 어떤 불상을 머리에 떠 올려라. 이런 가르침도 있어요. 보면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불상도 아니고 보살상도 아니고 무슨 역사적인 무슨 그 사실도 아니고 결국은 어디 갈 데가 없어요. 마하반야바라밀은 결국 내 속으로 들어온다는 거지요. 내 속에 잠재되어있는 무궁무진한 그런 지혜의 힘을 일깨우고 끌어내고 하는 것. 그래서 어떤 염불보다도 마하반야바라밀 이라고 하는 염불이 좋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워라.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하고.

서울의 불광사 광덕스님께서 개척하신 불광법회에서는 다른 염불을 하지 않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우지요. 육조스님의 가르침을 본받아서 아마 그렇게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로 그 힘이라고 하는 거 에요. 내 힘이다. 이거에요. 내 힘이다. 어떤 종지를 알기에 당신은 그렇게 큰 소리 치느냐 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나에게 잠재되어 있던 내 힘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노라고 대답하겠다. 이런 뜻입니다. 종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렇게 딴 데 다른 옆길로 새지를 않아요. 이야기가




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혹시혹비인불식이요 역행순행천막측이라


혹 어떤 사람들은 옳다고 하고 혹 어떤 사람은 그 소견이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하지만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옳다고 해도 사실 제대로 모르고 또 그르다고 하는 사람은 더욱 모르고





人不識이요 逆行順行을 天莫測이라.
인불식이요 역행순행을 천막측이라.




이 도리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역행도 하고 순행도 해.
보통사람의 상식에 거슬리는 것을 역행이라 하고 보통사람들의 상식에 맞는 행동을 순행이라 그렇게 하지요.

하늘도 천신도 측량하지 못한다. 천신도 도대체 저게 어떤 행동인지 도인의 그런 그 말씀과 행위는 그 근본을 천신도 모른다. 측량을 못한다. 이런 표현입니다. 그래요 그 깨달음의 깊이가 그만치 깊기 때문에 또 거기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못 알아듣지요. 뭐 꼭 깨달아야 된다기보다는 우리의 사변으로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 늘 사유하고 또 이런 그 깨달으신 분들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겨서 생각 많이 해 본 사람들은 그런대로 짐작을 하지요. 그렇습니다.




我早曾經多劫修라
오조증경다겁수라


나는 일찍이 다겁을 지내면서 수행했다. 오랜 세월 수행했다. 이 뭐 겁이라는 게 사전적의 해석이 그런 겁이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아주 오랜 세월동안 많은 수행을 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소리지 이게 뭐 내 무턱대고 하는 소리인줄 아느냐 그런 말이에요.




不是等閑相誑惑
불시등한상광혹이로다.


등한히 무심하고 소홀하게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거야 그냥 무책임하게 이렇게 말하기 좋아서 이런 소리 하는게 아니다. 이건 정말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그야말로 피와 땀이 서려있는 그런 그 수행을 통해서 지금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거에요. 그렇지요. 그 뭐 정말 그 제대로 아는 소리 한 마디 한다고 하는 것은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얼마나 많은 수행과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거기에 있었겠습니까? 그런 걸 우리가 생각하면은 사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깨달음의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는 접하기 쉽고 많다고 해서 좀 이제 등한히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한마디 한마디가 등한히 생각할 그런 일이 아니에요. 등한히 하지를 않았습니다. 뭐 대충 그냥 대강 그저 말이 쉬워서 하는 소리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정말 그 속에는 피가 스며있고 살이 녹아 있고 그의 그 오랜 세월의 그 정신이 그 속에 바로 담겨있는 그런 말씀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의 그런 귀중함을 그래 알 때 아무래도 좀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建法幢 立宗旨 明明佛勅曹溪是
건법당 입종지요. 명명불칙조계시로다.



건법당 법의 깃대를 세우고 건립하고 종지를 세우며 법의 깃발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진리의 깃발 그대로 영가스님께서 주장하시는 이 사상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뭐 법의 깃발을 꼭 세워서 세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자후 하시는 것이 그대로 깃발이고 그것이 이제 곧 그 말씀 속에 사자후 속에는 아주 근본 중요한 뜻이 있기 때문에 종지를 세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천수경에 수지신시광명당 수지심시신통장 이런 말도도 있지요. 우리가 불법을 받아가지는 이 몸은 광명의 깃발이다. 그랬어요. 광명당! 참 멋지지요. 큰~ 깃대가 서 있고 거기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것은 지혜의 빛으로 눈부시게 만든다. 이게 수지신시광명당이에요.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 지니는 우리의 몸은 그대로 광명의 깃발이고 수지심시신통장이라 부처님의 가르침 이 깨달음의 가르침을 받아 지니는 우리의 마음은 그대로 신통의 창고다 신통장! 신통의 창고다. 더 이상 뭐 달리 다른 신통이 없다는 거에요. 이것을 받아가지는 이 마음이 그대로 신통의 창고다.

이걸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서 내 살림살이로 삼는다면 여기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거지요. 인생사에 있어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것이 신통의 창고지요. 불법 그 자체는 그대로 신통의 창고입니다. 그걸 이제 제대로 받아가지면 수지심시신통장이 되는 것이고 받아가진 우리의 육신은 수지신시광명당이에요. 그가 가는 길에 항상 지혜의 빛이 나고 그래서 이제 리더가 돼서 어느 가정이나 한 단체나 한 사회에서 리더가 되어서 앞으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바른 길을 이끌어 간다 하는 거죠. 그래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저기 아주 그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끌고 가면은 참 그야말로 동타지옥 同墮地獄이라고 하는 거지요. 함께 지옥에 떨어진다. 그런 말이 있는데 함께 이제 밝은 지혜의 깃발을 향해서 우리가 간다면은 다 밝은 언덕으로 저 언덕으로 올라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말씀은




建法幢 立宗旨요
건법당 입종지요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드날리며


明明佛勅曹溪是로다.
명명불칙조계시로다.

이렇게 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분명하게 부처님의 명령이다. 부처님의 훈시 훈계다. 너무나도 분명한 부처님의 훈계고 부처님의 명령이고 그리고 조계가 바로 그것이다.

조계라고 하는 것은 조계산에 계시던 육조스님 육조스님의 정신과 육조스님의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육조스님에게 가서 인가를 받아 왔잖아요. 영가스님의 정신이란 곧 육조스님의 정신이고 영가스님의 사상이란 곧 육조스님의 사상이고 그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뭡니까? 명명불칙이죠. 부처님의 명령, 부처님의 훈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이것이 곧 조계 육조스님의 가르침이고 그것은 곧 내 말을 통해서 이 증도가라고 하는 이 사자후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걸 이제 법을 거슬러서 전통을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보면은 부처님에게서 제1조 가섭존자라고 하는 뜻이죠.


第一迦葉首傳燈이라 제일가섭수전등이라


제일 첫째 가섭존자가 제일 먼저 그 등불을 전해 받았죠. 그리고 이제 아난존자에게 전해주고 이렇게 쭈욱 이렇게 전해가지고 그게 이제 가섭존자 아난존자 상나화수 우바국다 제다가 미차가 바수밀 불타난제 이런 식으로 전해 내려와서 28대에 오면 달마스님이 되지요. 제가 이 이야기 때문에 자료실에다가요 전등계보를 올려놨습니다. 보신분도 있던데 참고로 전등계보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대수와 그 이름들 이것은 전부 저에게까지 내려오면서 또 내 제자들 이름까지도 아예 뭐 거기다 밝히고 밝히게 된 연유도 거기다 간략하게 써 놓았는데 28대 달마스님인데 달마스님한테 와 가지고는 이제 달마스님까지가 서천의 기록이다. 인도의 기록이다. 이거에요.




法東流 入此土 법동류 입차토라.



법이 동쪽으로 흘러서 차토에 들어왔다. 중국에 들어왔다. 이거죠. 중국에 들어와 가지고 보리달마가 초조라 보리달마스님이 이 초조가 되는 거지요. 그 다음에 혜가스님이 2조가 되고 그 다음에 이제 승찬 도신 홍인 이런 식으로 이제 중국에 와서 중국의 대수가 쭉 내려가죠. 이렇게 내려가면서 그야말로 우뚝우뚝 한 번씩 아주 그 참 큰 봉우리와 같은 그런 그 위대한 그런 사상가들이 또 나타나지 한번씩




六代傳衣天下聞이라
육대전의를 천하문이라


그래 육조스님에게까지 이제 내려오는 것이 육조스님까지
내려오면서 옷을 전했다 그러는데 법을 전하는데 대한 법은 모양이 없는 것이니까 신표로서 가사를 전하고 발우를 전하지 않습니까. 그게 이제 傳衣전의라 옷을 육대까지 옷을 전하는 것을 천하 사람들이 다 들어서 알고 있다.

그 중에 육조스님에게서 법을 받은 사람들이 아주 숫자가 많아지는데 나도 이제 그 중에 한 사람 들어간다. 이제 영가스님 말씀은 그런 뜻이죠. 후인득도를 하고서 그 육조스님 밑에 와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도를 얻었는데 후인들이 도를 얻었는데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육조스님에게서 공부한 사람들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고 또 그 밑에서 남악회향과 청원행사가 양대산맥으로 벌어지는데 그 밑에서 또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져요. 그런 그 많은 제자들이 그렇게 내려오는 것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랬습니다.

이걸 이제 여기서 조금 언급을 하면요. 사실 이렇게 불교의 근본 종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그런 그 계기가 우리나라가 뭐 불교의 인구가 많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흔치않고 잘 없는 줄로 그렇게 압니다. 그래서 이제 이 대수代數가 지금 쭉 이렇게 내려와서 중간에 한번 짚어야할 스님이 어떤 이가 있는고 하면은 환성지안선사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67대에 해당되는데 그러니까 가섭존자를 1대로 쳤을 때 67대에 해당되는 이가 환성지안선사고 그 밑에 호암체정 이렇게 쭉 내려와 가지고 만화스님이 이제 동학사에 계셨구요. 그 스님은 강사스님입니다. 그 밑에 경허스님이 이제 계시지요. 경허스님도 한국의 불교를 중흥하신 아주 위대한 인물이죠. 우리나라의 불교에 대한 공헌은요. 부처님은 지나간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선과어불이라 先過於佛(?) 그런 표현이 있어요. 그런 정도로 큰 영향력을 끼친 분인데 정작 이제 그 스승은 강사를 지냈던 만화스님이죠.

그 경허스님까지 내려오면서 사실 중간에요 배불정책 때문에 그렇게 이제 불교가 제대로 구색을 갖추고 또 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한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흔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이제 경허스님 밑에 뭡니까 만공스님 있고, 혜월스님 있고, 수월스님 있고, 한암스님 있고, 용성스님도 있는데 용성스님 같은 이들은 이제 정식법맥을 경허스님한테 공부는 했지만은 법맥은 저 위에 환성지안스님에게로 9대나 땅겨 올라가지고 글로 이제 원사환성 遠師喚惺이라 그래요. 멀리 환성스님을 잇는다. 그런 표현이 있어요. 그렇게 이제 환성스님에게로 이어 버리죠. 그래서 이제 그 용성스님 제자는 그렇게 대수가 상당히 앞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식계통으로 이렇게 밟은 이들은 그야말로 경허스님 밑에 한암스님이고, 한암스님 밑에 이제 탄허스님이 되고, 탄허스님 밑에 이제 내가 되고, 내 밑에 이제 내 제자들이 되고 이렇게 되는데 내가 거기에 글을 쓰기를 이런 말을 했어요.

“비록 그들의 수행과 그리고 나의 수행과 지견이 옛 어른들에 비교할 수도 없으며, 조사의 문중은 고사하고 멀리서 조사의 뜰이 있다는 소문만 듣고 환희하는 정도라 하더라도 이 시대에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들의 그릇만치 만이라도 불법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법을 이어간다는 것에 대하여 비웃기만하고 팔짱을 끼고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랬어요.

그러면서 이제 아울러 은사스님 쪽 법맥은 법맥이라 하질 않고 그건 은맥이라 그러지요. 그건 이제 환성지안으로 용성스님으로 동산스님으로 그 다음에 지효스님으로 여환스님으로 이렇게 이제 대수가 이어지는데 용성스님은 68대가 되어버려요. 한암스님하고 같이 치면 76대가 되는데 68대로 그렇게 껑충 뛰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대를 잇는다고 하는 거 이것도 조선 중엽부터 말엽에 이르기까지는 사실은 상당히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런 어떤 그 한국불교의 역사의 현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은 이러한 종지를 이렇게 밝히고 이런 공부를 우리가 인터넷상을 통해서 하고는 있는데 지금 공부하시는 분들이 그 다음에 이제 내 밑으로 이제 대를 잇는다는 거지요. 뭐 여러분들이 또 다른데 그렇게 인연이 있어서 대를 이었으면 또 그걸 이제 대(代)수라고치고 공부는 뭐 이 사람한테도 하고 저 사람한테도 하고 여러 사람한테 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그랬었었고 또 그래야하는 것이니까 관계는 없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대를 그렇게 잇지를 않았다면은 이거는 승속을 막론하고에요. 법을 공부하고 법의 대를 잇는 다고 하는 것은 승속에 관계가 안돼요. 우리가 이제 스님들이 이것을 기록하다보니까 스님위주로 그렇게 했지 그러니까 이런 점에 대해서 좀 바른 정법을 참말 이 시대에 희유한 정법을 공부한다하는 그런 근기와 자부심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내 다음으로 계산을 한다면은 내가 78대가 되니까 79대가 되는 택 이지요. 79대 내 제자들은 건당식을 한 사람들은 죽 이제 이름을 거기다 열거하기도 했습니다만은 그렇게 이제 생각하시고 이게 뭐 부끄럽고 어줍잖은 짓이다. 이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는 이 시대 사람으로서만이 그 법을 공부하고 또 우리가 전해줄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지 누가 딴 사람이 있어서 또 이걸 가르칠 것이며 이걸 또 전해 주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할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 있어서는 우리의 그릇이 아무리 부족하고 법이 아무리 보잘것 없다손 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못나도 왕자는 왕자고 잘나도 왕자고 못나도 왕자는 왕자니까요.

그와 같이 생각을 하시고 스스로 이렇게 그 어떤 전법의 맥을 이었다라고 생각을 하시면은 그렇게 이제 대수를 쳐서 생각하셔도 아무 상관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지금 좋은 시대 또 이래 인터넷상으로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으로서 그냥 다 여러분들 듣는 사람들에게 그냥 모두 법을 전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이렇게 해서 이제 법은 전해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시고 거기에 더욱 공부를 많이 해서 채워야지요. 그 빈자리를 각자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가득히 채워서 청출어람 靑出於藍이 청어람靑於藍이라고 스승보다 훨씬 더 뛰어난 법제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은 더욱더 앞으로 정법이 구현하는 한국불교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상당히 의미 있는 이야기로서 요즘 그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그 어떤 그 비불교적인 현상에 대한 말씀과 또 그 나름의 법을 우리는 공부하고 또 뒷사람들에게 내가 공부한 만치 전해주는 그것이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고 책임이기 때문에 그런 그 전등계보에 대한 말씀도 아울러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하고 내일하고 모레 이틀은 휴강입니다. 죄송합니다. 주말 이틀 동안 쉬었는데 하루하고 또 이틀 쉬고 또 그렇게 되었어요. 그렇게 아시고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18강

眞不立 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二十空門元不著
진불립 망본공 유무구견불공공 이십공문원불착
一性如來體自同 心是根 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일성여래체자동 심시근 법시진 양종유여경상흔
痕垢盡時光始現 心法雙亡性卽眞
흔구진시광시현 심법쌍망성즉진


반갑습니다
3월 23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이틀 쉬었는데 모두 잘들 지내셨죠 학생들은 아주 그 쉬는 날이 많으면 좋아하죠 이틀 놀고 하루 강의 하고 (웃음) 또 이렇게 이틀 쉬었고 또 이제 이틀만 공부하면 또 이틀간 또 이제 노는 날이 주말이 다가옵니다 (웃음)
개인 사정으로 그렇게 이제 쉬게 돼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좀 부담이 적은 것이 모두 각자 안방에서 이렇게 뭐 음
듣고 싶으면 듣고 말고 싶으면 말고 하는 그런 그 관계라서
사실 저가 뭐 불의에 좀 쉴 일이 있어도 사실 부담은 훨씬 적어요.

그렇다고 또 책임을 안느끼거나 그런 건 아닌데 만약에 어디서 이제 그 오프라인에서 하듯이 그렇게 이제 어느 장소에 집회를 한다면은 멀리서 오고 또 시간 맞춰서 다른 시간 빼놓고 이제 오고 뭐 하는 그런 경우에 펑크를 냈다고 하면은 상당히 그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아주 발달한 시대에 우리가 사니까 그런 것들도 없이 아주 편리하게 됐습니다.
오늘 쉬는가보다 하고 이제 다른 공부 하면 되고
또 이제 뭐 공부가 있는 날은 또 이제 들어와서 공부하구요
강의하는 사람도 부담이 적고 듣는 사람도 뭐 덜 미안코 그런 경우인 것 같애요.

뭐 어쨌든 그렇고 오늘은 증도가

眞不立 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이라
진불립 망본공 유무구견불공공

라고 하는 부분부터 하게 됩니다.
여기에 진眞과 망妄의 관계가 상당히 여러 번 나오죠. 처음에도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그 이제 망상妄想이라고 하는 게 망妄이고 불구진不求眞하는 게 진심眞心이라 하든지 진실眞實이라고 하든지 진리眞理라고 하든지 그건 다 말이 달라서 그렇지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진眞과 망妄이 수차 그렇게 반복이 되는데

사람들의 관심사가 진眞과 망妄에 대한 그런 그 관심이 사실 많아요. 특히 진리를 추구하는 어떤 그 종교의 가르침에서는 특히 그런 것들을 많이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문제를 깨달음의 안목으로 분석해 낼 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된 것이냐 이런 것을 깨우쳐 주는 것 이것이 이제 종교의 어떤 그 지도자로서 또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로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분별해서 잘 가르쳐 줘야 할 그런 그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진眞과 망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죠.
다른 경전에도 진망眞妄에 대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또 조사스님들의 어록에도 진망眞妄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구요

여기도 오늘 첫마디가 진불립眞不立 망본공妄本空이라 그랬는데
진眞도 참된 것도 세우지 않고 또 망령妄靈된 것도 그걸 뭐 우리가 인정할래야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존재다
그 세우지 않는다는 것, 진眞도 세우지 않는다면 진眞이라 할 것도 사실은 없다는 거죠.
진짜 진眞이라고 하면은 그건 당연히 세워야죠. 주장을 해야 되고 앞에다 내 놔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세우지 않는다고 하는 걸 보니까 진眞도 별 것 아니고
망妄도 본래 공空하다고 했으니까 망본공妄本空이라 그거 뭐 굳이 공空한 망妄, 없는 망妄을 가지고 굳이 뭐 문제 삼을 것도 없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이런 뜻이 돼요.
그러니까 진과 망에 대해서 중도적인 안목을 가지고 본다 하는 것이죠.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게 이제 우리 마음에 얼마나 체득이 되느냐 또 내 생활에 얼마나 적용이 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마는 뭐 이론은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생활에 사실 적용이 되고 내 살림살이가 돼야 되겠죠.
이론은 그래 진眞도 사실은 세울만한 것이 아니고 망妄도 본래 本來 공空한 것이라서 굳이 그것을 제거할려고 그렇게 끙끙댈 까닭이 없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유무구견불공공有無俱遣不空空이라
있다 없다 뭐 진이 있느니 망이 없느니 하는 그런 있다 없다 하는 그런 것들을 전부 같이 보내버린다.
구견俱遣 함께 보내 버리니 또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다
이게 이제 또 불교만이 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논리인데
공하면 공하고 공하지 않으면 공하지 않아야 하는데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다 그랬어요.

공하지 않다는 말은 있다는 이거죠
또 있으면서 공하다 또 공하면서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같은 뜻이죠
그러니까 거기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꼭 있다 꼭 없다라고 이렇게 치우치지 아니하면은 그게 이제 함께 보내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은 있는 것도 공하지 아니하고 그러면서 또 치우치지 않았으니까 공한 것이구요
쉽게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사실 우리가 있다고 믿는 것도 불교적인 그 어떤 조그마한 상식만 가지고도 있다고 우리가 인정을 하지 않잖습니까 모든 삼라만상이 본래 공하다
또 우리가 늘 잘 외우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것
무안이비설신의 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 無色聲香味觸法
해서 내자신 주관적인 내 육근도 공하고 없고 또 육근의 대상인 육경도 없다 이렇게 이제 보잖습니까

없는 것으로 말해놓고 부정을 한 번 거친 뒤에 다시 비로소 긍정을 하게 되면은 그때는 사는 것이 참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고 구름에 달 가듯이 어떤 삶도 정말 가볍고 아주 그 정말 어디에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로 그때 비로소 이제 사람으로서 사는 맛을 한껏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집착을 해가지고 아주 진하게 그래 사는 것이 사는 맛을 느낀다고 불교에서는 보지 않고요
정말 가벼운 마음이 됐을 때 객관적인 입장이 돼보세요
내 인생이 남의 인생처럼 그렇게 보일 때 그 때 참으로 아주 그 시원스럽고 아주 가볍고 아주 멋진 인생 대아大我 큰 나의 삶이 비로소 전개된다 그 때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 내가 공空하다고 보았을때 내가 텅비어 없다고 보았을 때 다시 말해서 무아無我를 제대로 체득했을 때 그때 정말 대아大我 큰 내가 실현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뭐 생멸도 두려울 것이 없죠.
어떤 정의를 위해서 보다 큰 일을 위해서 이 몸 하나 던지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흙 한 줌 공중에 뿌리는 거와 같이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 하는 그런 의미로 우리가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 이제 유무구견有無俱遣이라고 하는 것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거 있다고 여겨지는 것과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다 어디로 보낸다 구견俱遣 보낼 견遣자지요.
보낸다라고 했으니까 어디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거기에 치우치거나 편견에 떨어지지 아니했을 때 그것은 나에게 홀가분한 것이 되죠. 아주 홀가분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뭐 내 몸을 위시해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들 내 물건들 내 소유들 이런 것들을 전부 버려야 된단 말인가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죠.

그대로 잘 평소처럼 잘 활용을 하되 거기에 이제 치우치지 아니하고 너무 애착하지 아니하고 거기에 목을 매지 않고 그래서 썼을 때 크게 써도 크게 애착 없고 남을 줘도 그렇고 나에게 생겨도 그렇고 거기에 크게 끄달리지 않는다는 거죠

이제 끄달리면 그때부터 이제 힘들기 시작하는 거죠. 생겼을 때 끄달려도 마찬가지고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을 때 끄달려도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이제 그야말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듯이 내 주변의 모든 인연들 내 삶의 그런 그 여러가지 인생사들 이런 것들이 아주 수런 수런 스치고 잘 지나가는 그러한 그 입장이 되는 것 그게 이제 불공공不空空이죠.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또 공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내 할 일은 다 하되 나는 끄달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집착하지 아니하면서도 내 할 일을 다 한다. 자식 키울 일 다 키우고 집안 살림살이 다 살고 사업할 일 있으면 다 사업하고 그 뭐 목을 맨다고 하 집착해서 목을 맨다고 그 사업이 꼭 잘되나요. 그런 거 아니죠.
어떤 의미에선 객관적으로 남의 일같이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훨씬 잘 보입니다.
잘보이면 사업도 잘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돈벌이도 잘하고 장사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참 그게 이제 인생을 잘 살 줄 아는 열쇠인데 그게 이런 불교 깨달은 성인들의 가르침은 실상을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참 이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어떨 때는.
가깝게 느껴지면서 다시 말해서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또 그게 쉽지 않고 쉽지 않으면서도 어떨 때는 또 이런 대목을 가만히 이렇게 음미하고 사유해 보면은 손에 또 잡힐 듯하고 그런 거죠.
그래서 진불립 眞不立 망본공妄本空
진과 망을 어떤 꼭 진에다 망에다 두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상대적인 관계를 그렇게 진과 망에다 두고 이야기하면 되는 겁니다.

불교의 중도 이론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관계로 세상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상대적인 관계에 어디에 한쪽에 치우치면은 그건 병이된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양쪽을 다 함께 수용할 줄 알아야 된다.
부정도 하면서 함께 수용을 할라면은 부정해야 되요.
둘 다 부정할 줄 알아야 둘 다 수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게 이제 수용하는 것과 부정하는 거예요. 긍정과 부정이 사실은 그게 제대로 되려면 둘이 아닌 것이죠.
그것도 이제 불교 이론입니다. 뭐 긍정할라면 한쪽은 부정해야 되고 한쪽을 부정하려면 한쪽은 긍정해야 되는 게 아니냐 하지만 그게 아니죠

둘다 긍정하고 둘다 부정하고 둘다 부정하면서 둘다 긍정했을 때 비로소 둘 다 살아나고 원융무애하고 정말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사람이 모든 그 얽히고 설킨 관계속에 살아가면서 거기에 조화를 이루면서 아주 이상적으로 살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배가 강을 타고 내려가는 데 이쪽 강변에도 저쪽 강변에도 닿지를 않아야 그 배가 순조롭게 잘 가죠. 어느 한 쪽 강변에라도 가서 닿으면은 부딪치면 이제 파선이 되고 또 닿아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은 강을 따라서 제대로 가지를 못하는 거죠.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비유들자면 이제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일상사에서 늘 접하고 있는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마치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갈 때 이쪽 언덕에도 저쪽 언덕에도 가서 닿지 않고 거기에 또 머물지 않고 중간으로 처억 이렇게 가면서 중간으로 잘 내려 가려면 어떻습니까.
이쪽 언덕도 있고 저쪽 언덕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쪽과 저쪽 양쪽을 다 인정하면서
양쪽 어디에도 가서 닿지 않는 거죠. 그건 닿지 않는 다는 말은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양쪽을 다 부정하면서도 양쪽을 다 인정하고
그랬을 때 조화로운 그런 행선行船
배가 진행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이치가 뭐 눈에 선하시죠.
그와 같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든 그 얽히고 섥힌 관계들이 사실은 그렇게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그런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내가 소화를 하면서
원융무애하고 또 집착하지 않고 조화를 이뤄가면서 그렇다고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야 이게 참 묘미입니다.
아주 정말 불교만이 말할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중도적 삶이죠.

그러니까 불상을 무슨 뭐 부처님이라고 껌뻑 넘어가게 그렇게 우리가 집착해도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나무로 만들었다라고 해서 무턱대고 불상이라고 무시해도 안되는 것이고 나무로 만든 불상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또 살아있는 부처님처럼 예배하고 존경해서 예불을 드리기도 하구요 또 그렇게 하면서도 한 편 저건 나무로 만든 조각이야. 추우면은 갖다 땔 수도 있어 아 이런 그 참 큰 마음 당당한 마음 이런 마음도 가질 줄 아는 것 이게 이제 좀 철들고 좀 성숙한 불자라고 할 수 있겠죠.
또 잘못 오해해가지고 또 함부로 할까 참 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염화실 가족들은 이제 뭐 불교의 바른 지견을 그동안 많이 훈련을 했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二十空門에 元不著 이라
이십공문 원불착

그랬어요.
불교에는 참 이 모든 존재를 존재 그대로 보는 것은 일차적인 안목이죠 그건 이제 불교나 비불교나 다 볼 줄 아는 안목입니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그런데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안목은 이것은 불교적인 안목이고 거기서 한차원 달리한 안목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이 무의 철학이요 공의 철학이요 반야 600부의 가르침이고 그렇게 볼 줄 알 때 거기에서 비로소 이제 색다른 그런 그 지혜 정말 세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그 반야지혜가 거기서 나올 수가 있다. 또 그렇게 볼 줄 아는 그것이 반야지혜다.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이 그게 반야지혜거든요.
그래서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그 문제가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반야부 경전을 설하기 이전에는 전부 있다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됐다 그렇게 볼 수가 있어요. 불교 경전전체를 우리가 나눠놓고 보면은 그다음에 이제 그 21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하셨다 그러는데 그건 이제 모든 있는 것에서 한 차원 달리 해가지고 완전히 바꿔가지고 없는 것으로 보는 안목을 거기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게 이제 경전이 제일 많아요.
600권이나 되는 그런 반야부 경전이고 또 부처님이 49년간 설했다라고 했을 때 무려 21년간을 없다고 하는 어떤 이치를 우리들에게 설해준 것이다 그래요.

그래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게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고 또 차원높은 안목입니다. 그래서 이제 무無의 철학이니 공空의 철학이니 이런 것들이 불교 안에 아주 많지요.
우리가 반야심경에서 내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뭐 끊임없이 없다 없다 없다 해도 뭐 어떻습니까

없다하는 말은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여전히 있어요. 있어가지고 거기에 없는 것으로 보기가 너무 힘드는 거예요. 고 관문 통과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봐요.
그래서 부처님도 그렇게 오랫동안 많이 설하셨다 이렇게 이제 보는 것입니다. 21년간 600부나 되는 경전을 설하셨다. 아 그렇죠.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이 관문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공空도 부정하는 공空도 이렇게 이십공문二十空門에 원불착元不著이라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건 이제 모든 사건, 모든 사물 일체제법이 다 공하다는 이치를 20가지로 그렇게 이제 설명하는 거죠.
스무가지의 공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스무가지의 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예를 들어서 부산 허공 따로 있고 서울 허공 따로 있고 무슨 대전 허공 따로 있고 대구 허공 따로 있고 아니죠. 허공은 뭐 없는 것이니까 텅빈 거죠.
그러니까 뭐 부산 공이나 서울 공이나 대전 공이나 대구 공이나
광주 공이나 사실은 말이 있을 뿐이지 공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치 뿐입니다.

그런데 워낙 유有의 세계를 공空의 세계로 보는 그 관문이 너무 두껍고 너무 그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스무가지 공이 이제 나오게 돼요. 이건 뭐 숫자를 이렇게 나열했지만은 하나인 공이다 이렇게 이제 이해를 하시고

그래서 내공內空 외공外空 그래싸요.
내공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게 육근六根이니까 말하자면은 무아다 무상이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그러죠. 그래서 이제 내공.
또 외공하면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인 뻔한 거 아닙니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것은 이제 여섯 가지 경계인데 이것 역시 무상한 것이고 무아한 것이다.그래서 공이다.

또 내외공內外空 그걸 이제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공하고 외공하고 사실 내공하면 전부가 공한 거예요. 안이비설신의가 공하면은 뭐 일체가 공하죠 뭐.
근데 이제 또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공하다고 했고 그래놓고 또 이제 반복해서 거듭거듭 거듭 우리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내외공內外空이라 그래요. 그래 육근과 육경계가 다 공하다.

또 공공空空 그래요 그다음 네번째는. 공한 것도 다시 또 공하다.
공한 것이 남아있으면 안된다는 거죠 뭐 공한 것이 어디 남아있고 자시고 하겠습니까 그냥 공일 뿐이지.
서울공이나 뭐 부산공이나 대구공이나 대전공이나 광주공이나 무슨 뭐 미국공이나 어디 뭐 유럽공이나 다 그 뭐 하나인 공 공간일 뿐이지 거기에 무슨 뭐 공한 것도 공하다. 이제 철저히 공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 뭐 대공大空 큰 공이다 그래가지고 동서남북東西南北사유 상하四維上下 시방세계가 다 공하다 그래 보면 큰 공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 다음에 이제 승의공勝義空이라 해가지고 아주 수승한 이치가 공하다. 그건 이제 열반이니 도리니 도니 깨달음이니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소립니다. 그건 이제 열반도 또한 공하다.
어떤 이런 말이 있어요.

설유일법設有一法이 과어열반過於涅槃이라도 아설역여我說亦如 몽환夢이라 하리라
설사 어떤 한 법이 있어서 열반보다 지나간다 하더라도 나는 공하다고 말하겠다.
이런 공종空宗의 아주 뭐 뭐라고 할까요 표어같은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반을 훨씬 지나가는 그 어떤 뛰어난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공하다 하겠다.
공종空宗에서 이제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다음에 유위공有爲空 이거 유위공은 욕계 색계 무색계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죠 그다음에 무위공無爲空 이것은 생기입멸의 어떤 변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것 그것도 역시 무위지만 무위자연이지만 그것도 역시 공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필경공畢竟空 그래서 끝까지 다 공하다. 어떤 존재도 철저히 공하기 때문에 철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필경에 공하다.

무제공無制空 끝없이 공하다 처음만 공한 게 아니라 중간도 공하고 끝까지 뒤에도 공하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뭐
산공散空 이건 이제 방산 뭐 기사 해가지고 모든 법은 사실은 전부 흩어지는 것이고 나로부터 떠나는 것이고 버려지는 것이고 놓아지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그런 식으로 산공이라 이렇게 표현하죠.
그다음에 이제 무변위공無變位空 변위하는 것이 없는 그런 것도 역시 공하다

본성공本性空 본성도 공하고 자성自性도 공하고 그다음 뭐 공상도 공하고 이상도 공하고 일체법이 다 공하고 불가득不可得도 가히 얻을 수 없는 것도 공하고 성품이 없는 것도 공하고 자성도 공하고 자성공이란 말 앞에서 했죠. 자상공自相空 저 앞에선 자상공이고 여기는 자성공이고 그다음에 무자성공 자성이 없는 것도 무성자성공이라 어떤 성품이 없는 자성도 공하고
이런 식으로 이제 공을 하나인 공을 가지고 스무가지로 이래저래 반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이렇게 공으로 붙여 본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공하지 않은 게 없다

그렇지만은 거기 이제 원래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게 철저히 스무가지로 공하다고 하고 또 공하지만은 거기에 공한 이치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 불공공不空空이니까 공하지 아니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또 공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원불착元不著이라 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존재들을 스무가지로 공하다 어쨌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은 어떻습니까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떤 그 이야기할 수 있는 사유능력이 있고
사유하는 본체가 있고 그렇지요.
그것을 뭐라고 해요
여래如來라고 할까요 우리 마음자리라고 할까 또 그런 것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 이런 이들의 그 뭐라고 지칭할 수 없는 그걸 뭐 마음이라고 하든지 일물一物이라고 하든지 그런 그 어떤 존재 그것은 모든 깨달은 사람들 다 같다.
일성一性 한 성품의 입장에서 보면 여래如來의 본체 本體가 저절로 같다.

一性如來體自同 이라
일성여래체자동

그랬습니다.
그건 이제 역시 우리 마음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사물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우리의 수행하는 행위도 중도로 이해해야 된다.
아까 뭐 불상에 대한 이해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대적인 인연들 그런 그 사물들 나와의 관계들 이런 것들도 중도로 이해해야 되고 역시 마음도 또 부처도 우리 본성도 중도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지 꼭 우리 마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역시 또 있는데 집착하는 것이 되고 있는 데 떨어지는 것 그게 되는 거예요. 그럼 마음을 제대로 아는게 아니죠.
그 마음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있고 또한 없고 이렇게 중도를 설명할 때 그런 그 이치를 수용하는 입장이 돼야 마음의 실체를 어지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 일성一性이죠.
한성품 여래如來죠 일성一性인 여래如來
내 일성 한 성품의 여래나 여러분들의 한성품인 여래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한성품인 그 여래如來는 체자동體自同그랬습니다. 본체가 실체가 그 당체 자리가 저절로 동일하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뭐 만물萬物이 여아일체如我一體다
또 천지天地는 여아동근與我同根이다 하늘과 땅이 전부 나와 더불어 한 뿌리다.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이런 표현들이 성립되는 거죠.

이건 이제 이것이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눈에 쏙 들어오듯이 그렇게 들어오게 하려면은 여기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있어야 되고
그야말로 어떤 깨달음의 눈이 있을 때 가능하겠죠.
일성여래 체자동一性如來體自同이라고 하는 것
이건 이제 대부정을 거쳐서 부정을 완전히 거쳐서 비로소 이제 긍정이 됐을 때 그 때 이제 그야말로 모든 존재가 그대로 여래고 진리고 그리고 나고 그리고 마음이고 이렇게 되는 거죠.
일체 것을 부정했을 때 비로소 내가 거기서 현현하는 그런 입장을 여기서 이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心是根 法是塵이니
심시근 법시진

마음은 뿌리가 되고 법은 진 경계 티끌이 된다 그랬는데 이건 이제 주객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심은 주가 되고 법은 객이 되고 그래서 이제 아법我法할 때도 그렇지요. 아는 주관이 되고 법은 객관이 되고 주객으로 나누어 지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항상 자기 자신은 이제 주인이 되고 주관이 되요. 그래서 그외 것은 전부 객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兩種猶如鏡上痕 이라
양종유여경상흔

그랬어요. 두 가지는 마치 거울에 낀 흔적과 같다. 때와 같다.
그러니까 주관이니 객관이니 이런 것도 이미 나눠놓고 보는 것이니까 나눠놓고 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중도적인 안목에서는 벌써 허물이죠.
그걸 이제 나눠 놓되 거기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 수용하고 수용하면서 그것을 또 이렇게 나눌 때 나눠 놓을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되려면 그런 입장이 되려면은 그것을 일단 부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종유여경상흔 兩種猶如鏡上痕이라 두가지는 사실은 거울에 낀 때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痕垢盡時光始現 이라
흔구진시광시현

그랬잖아요.
흔적인 때가 다 제거 됐을 때 흔구진제痕垢盡除라고도 하는데 흔구진시痕垢盡時 때 시時자로 써도 좋습니다. 흔구진시광시현痕垢盡時光始現 흔구가 때가 다 했을 때 빛이 비로소 나타난다. 그 광명이 비로소 나타난다. 그렇죠.

거울에 때가 많이 끼었다고 봅시다. 그게 뭐 동으로 만든 거울이든 유리로 만든 거울이든 크게 상관없죠. 그런데 이제 흔痕자 같은 것은 뭐 유리로 만든 거울에도 깨끗이 닦아놔도 손한 번 짚으면은 흔적이 남죠 때는 아니지만은 그래서 이제 흔구라고 합니다. 어떤 흔적이나 때가 됐던 간에 다 깨끗이 닦은 다음에는 빛이 광명이 비로소 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을 우리가 나누고 분별하고 어디에 치우쳐서 생각하고 하면은 우리 본 마음자리가 빛을 발하지 못해요.

우리가 사실은 크게 당당하게 대아大我로서 큰 나로서 삶을 펼치지 못하는 이유도 어찌보면은 주관이라고 하는 내가 주가 되고 나머지는 객이다 하는 그런 그 분별심이 있어서 그렇게 이제 큰 삶을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흔구가 다하면은 빛이 난다. 참말로 멋진 삶이 나타나고 대아의 삶이 거기서 이제 나타난다는 거죠.

그래서

心法雙亡에 性卽眞이라
심법쌍망 성즉진

심과 법 앞에 있었죠. 심시근心是根 법시진法是塵 했습니다 심은 주관이고 법은 객관이 되는데 주관과 객관이 쌍으로 없어졌을 때 쌍으로 없어질 때 내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부정됐을 때 본성 성품이 바로 진성이 된다.
여기서 진은 상대적인 진망의 진이 아니죠. 이건 뭐 정말로 표현하자니까 진이지 그야말로 우리의 참마음자리 성품이 곧 참마음자리다.

이 참마음 자리는 설명할 수가 도저히 없는 자리인데 상대적인 진과 망의 상대적인 그런 참마음이 아니고 본래심 하나뿐인 마음 온 우주가 삼라만상이 하나뿐인 이 마음

이게 이제 여기 진眞자 성즉진性卽眞이라고 하는 그 하나 뿐인 마음이 드러나려면은 주관과 객관이 다 사라졌을 때 제대로 이제 온 우주가 삼라만상이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이 납득이 가고 또 내 공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 저 앞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문제 또 진과 망 일반적으로 진과 망의 문제와 있음과 없음의 문제 이래서 이제 공으로 설명해오다가 여기 와서는 주관과 객관 그것도 역시 그건 이제 떨어지기가 더 어려운 것이니까. 그래서 이제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주관도 객관도 다 내 마음에서 사라졌을 때 진짜 내 마음이 나타난다. 심법쌍망心法雙亡에 성즉진性卽眞이라
성품이 곧 진성이 된다 정말 바람직한 성품이 된다.
이렇게 이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19강

嗟末法 惡世時 衆生福薄難調制 去聖遠兮邪見深 魔强法弱多怨害
차말법 악세시 중생복박난조제 거성원혜사견심 마강법약다원해

聞說如來頓敎門 恨不滅除令瓦碎 作在心 殃在身 不須怨訴更尤人
문설여래돈교문 한불멸제령와쇄 작재심 앙재신 불수원소갱우인

欲得不招無間業 莫謗如來正法輪 栴檀林 無雜樹 鬱密深沉師子住
욕득불초무간업 막방여래정법륜 전단림 무잡수 울밀심침사자주

境靜林閒獨自遊 走獸飛禽皆遠去 師子兒 衆隨後 三歲便能大哮吼
경정림한독자유 주수비금개원거 사자아 중수후 삼세변능대효후

若是野干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 圓頓敎 沒人情 有疑不決直須爭
야시야간축법왕 백년요괴허개구 원돈교 몰인정 유의불결직수쟁

不是山僧逞人我 修行恐落斷常坑
불시산승령인아 수행공낙단상갱

반갑습니다. 3월 24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증도가 오늘은

嗟末法 惡時世 衆生福薄難調制(차말법 악시세 중생복박난조제)
영가스님께서 여기까지 최상승의 법문을 하시고 거듭거듭 당신이 법을 이어온 전통에 대해서도 밝히시고 그러면서 또 중도의 이치를 반복해서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데, 생각해보니 그러한 정말 불교의 진수라고 할 수 있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최상승의 이치이고 또 불교 궁극의 정신 내지 사상이라고 할 만한 이런 당신의 설법에 대해서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좀 안타까워하는 그런 마음을 여기에서 표현하고 계십니다.

嗟末法 惡時世(차말법 악시세)
아! 슬프다 이 말법시대에, 그리고 악한 세상, 악한 때 세상,
또 惡世時라고 그렇게 된데도 있어요. 惡世時 그러면 악한세상의 시절에 그런 뜻입니다.

衆生이 薄福해서 難調濟로다
중생들이 박복해서 복이 엷어서 다스리기 어렵다. 조복받기 어렵다.
그렇습니다. 뭐 다스린다. 조복 받는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만은 이런 거 뭐 정말 높은 가르침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이해가 없어서 하시는 말씀이죠.
특별히 중생을 데려다가 조복을 받거나 다스리거나 그야말로 야생마를 잡아다가 길들이 듯이 중생들을 그렇게 길들이는 것은 아니지만은 이런 출세간적인 그런 세속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신과 다른 차원의 사상과 다른 차원의 이치 결국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바르고 참된 이치죠. 뭐 그게 진리라고 하는데 참된 이치에 대한 이해가 뒤떨어지는데 그 점에 대해서 말세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영가스님 시대만 하더라도 세월이 얼마나 오래입니까?
천년이 훨씬 넘은 그런 때인데 그때 벌써 말세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말법시대다 하는 표현을 썼습니다.
대개 금강경에 있었듯이 제5 오백년이라고 하는 오백년씩 오백년씩 짤라서 다섯 단계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고, 또 크게 세단계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는 세단계로 나누어진 입장을 이끌어다가 생각해 보면 쉬울 겁니다.

正法시대 천년이라고 그렇게 잡고요 부처님의 교화의시기 부터죠.
像法시대 정법과 유사하다 닮았다라고 하는 상자를 쓰는데 사람인변(人)에 코끼리상자(像)쓰죠. 상법시대를 천년을 잡습니다.
그리고 末法시대 만년을 잡아요.

그래서 천년은 정말 정법 부처님의 바른 교법이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고 이해하고
그 다음 천년이 또 그런대로 괜찮은 시대 다는 거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이해하는 그 정도가 상당히 괜찮은 시대다 그래서 상법이라 그러죠.
이천년이 지나버리면 이제 삼천년 시대에 접어들면서 부터 이천이 지난 이후부터는 말법에 해당되는데,
아마 그 당시 영가스님의 생각으로는 말법에 당도한 시대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신의 높은 깨달음의 견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去聖遠兮邪見深(거성원혜사견심)이요 魔强法弱多怨害(마강법약다원해)로다

去聖遠兮(거성원혜)
성인에게 이르러 가기가 멀어서 삿된 소견은 깊어지며 그랬습니다.

去聖遠兮라고 할 때 성인 가신지가 오래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뜻은 그것도 뭐 틀린 것은 아니지만은 이건 무슨 말인고 하면
성인은 부처님을 뜻하는 것이고 현재 우리가 예를 들어서 2500년이든지 3000년이든지 이렇게 생각 했을 때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간 세월의 거리가 멀다, 세월의 거리가 멀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가스님 때만 하더라도 옛날 구불 기를 써었니까 한 2000년 남직 되겠죠. 200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니까

그래서 去聖遠兮(거성원해) 성인에게 가기가 멀어서 이런 뜻입니다. 성인에게 가기가 시간적으로 멀어서 이런 뜻이죠, 그래서 삿된 견해가 깊다 그래요
성인이 돌아가신 지가 세상에 왔다가 가버린지가 그래서 멀다 이런 뜻은 아니에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거성원이라는 말이 도처에 나옵니다.
삿된 소견이 깊다는 거죠
사람은 끊임없이 경전강의하거나 , 어록강의하면서 주장하는 것이고 또 그것은 많은 조사스님들이 한결 같이 주의를 준 내용으로써 소견, 안목, 견해, 지견, 지혜 이런 것이 가장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삿된 소견, 삿된 견해, 삿된 지견이 깊고 그 자기의 어떤 악연이 너무 깊으면 정법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겁입니다.

비록 저는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평생 그래도 부처님의 정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늘 마음을 쓰면서 살아왔고,
지금까지 공부한 봐 대로 그렇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정법이다
그래서 정법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정법대로 우리가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그게 부처님 법을 만난 보람이 있다 이렇게 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다른 사람에게도 명색이 입을 열어서 불교라고 이야기하는 입장인데 그렇죠.
삿된 소견에 떨어지는 것, 불교를 잘못 알고 있는 것, 이것은 참 어떻게 생각해 보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죠.
왜냐하면 부처님과 인연은 있으면서도 사실 부처님 생각하고는 거리가 먼 엉뚱한 곳으로 이제 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魔强法弱多怨害(마강법약다원해)라
마구니 는 강하고 법은 약하다. 정법은 약해졌다.
마구니라고 하는 것이 불교를 꼭 해치는 그런 마구니 집단이 있었어 라기 보다는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들, 불교의 정법과 거리가 먼 그런 행위나 사고나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성하다는 것 많이 원망하고 해침이 있다.
多怨害 - 원망하고 해친다.

자기가 믿는 것이 사법이면서도 정법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사법이 정법을 해치게 되고 정법을 사법이라고 규정하는데 문제가 있는 거죠.
뭐 지금 이교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도 크게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닙니다.
불교 안에서도 마찬가지구요

聞設如來頓敎門 (문설여래돈교문)하여도 恨不滅除令瓦碎(한불멸제령와쇄)로다
여래의 돈교문 설하는 것을 듣고는, 如來의 頓敎門(돈교문)
頓敎門 이라는 것은 뭐 소승교 대승교 돈교 원교 일승 뭐 원교 이런 씩의 돈교가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은 이치를 앎으로 해서 그 속에서 다 해결되는 것 이게 頓(돈) 몰록돈 한꺼번에 된다는 뜻입니다.
돈오니 정수니 하는 그런 표현을 할 때 쓰는 頓(돈)자죠.
돈교라고 하는 것은 불교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무슨 세월을 이렇게 거쳐서 탑 쌓듯이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 구요. 어떤 존재의 실상, 바른 이치,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참되고 바른 이치를 알면 그것으로서 끝인 거죠. 참되고 바른 이치대로 살 면은 그만 공부는 다 된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頓敎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은 거기에 있다
如來의 頓敎門, 如來의 頓敎門을 설함 듣고도
경전 상에도 있지만 영가스님께서 설하신 증도가의 내용이 바로 如來 頓敎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너무나도 뛰어난 확고한 부처님의 사상을 듣고도
恨不滅除令瓦碎 (한불멸제령와쇄)
멸제해서 하여금 와쇄시키지 못함을 한한다.
瓦碎(와쇄)부셔버린다. 그런 거죠. 멸제하고 또 부셔버리지 못함을 한한다.
그러니까 여래의 진정한 가르침 정법을 듣고는 그것을 사법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것을 없애려고 하는 거죠. 사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없애버려, 없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없애버리지 못하고 승승장구하고 그렇게 자꾸 선법이 바른 정법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널리 퍼져가니까 그것을 아주 원망하고 한탄해 하는 그런 무리들이 있다 이말 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作在心 殃在身 하니 不須怨訴更尤人 이로다
작재심 앙재신 불수원소갱우인

바른 주장 정법을 부정하는 그런 사람의 마음, 이게 이제 그걸 이제 원망하고 한탄하고 어떻게 던지 없애려고 하고 또 해치려고 하는 이런 것이 전부 작재심이죠.
짓는 것은 마음에 있고 그 사람들은 결국은 이제 그런 업을 지음으로 해서 마음으로 업을 지음으로 해서 재앙은 몸으로 받는다. 殃在身(앙재신)
재앙은 몸에 있으니 짓는 것은 마음이 짓고 재앙은 몸에 있으니

不須怨訴更尤人(불수원소갱우인)이로다
자신에게 있다 이말 이에요.
몸이 라고 하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지어서 그들 자신에게 재앙이 있으니 모름지기 원망하고 허물하지 말라. 원망하고 하소연하고 거기서 다시 더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말라.

거 뭐 어떻게 뭐 합니까 그들을 잘 교화 시키고 깨우치고 하면은 좋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은 이렇게 경고라도 해야죠.
그렇게 마음을 서면은 정법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해치려고 하고 없애려고 하고 하는 그런 마음을 쓰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 재앙이 돌아온다.
그러니 절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원망하지마라
재앙을 받더라도 역시 그렇고 또 그런 것을 제대로 모르면 다시 검토하고 깊이 생각하고 자기에게 확신이 설 때까지 이렇게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무턱내고 무슨 금방 일어나는 생각, 금방 내리진 아주 얕은 판단으로 단정적으로 뭐라고 해가지고 비방을 한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죠.
그게 뭐 벌써 인격적으로도 뭐 사람이 어떤 말을 들었다고 무턱대고 그걸 자기 틀에다 맞추어서 더 이상 깊이 심사숙고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비판하고 없애려고 하고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 됨됨이로써도 좀 부족한 일이죠. 더구나 정법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면 자신에게 좋지 아니한 결과가 온다.
慾得不招無間業인데 莫謗如來正法輪로다
욕득불초무간업 막방여내정법륜

慾得不招無間業(욕득불초무간업)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초래하지 않고자 하거든
정법을 비방하고 정법을 없애려고 하고 정법을 말살하려고 그렇게 한다 면은 결국에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무간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꼭 지장경에서의 지옥이야기처럼 그렇게 이제 있어서 라기보다는 진리를 등진사람의 삶, 진리를 등진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가! 그것이 바로 무간지옥의 삶이다. 그런 뜻이죠.
그래서 그런 참 닮고, 바르고 참된 그런 이치를 등지고 살 때 그때 그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어마나 처참한가?
무간지옥과 같은 그런 업을 초래하지 않고자 하거든 절대여래의 정법을 비방하지 말라.
여래의 정법을 비방하지 마라.
이건 뭐 정말 제대로 진리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하고 희생을 많이 했습니까?
얼마나 큰 투자를 했습니까? 뭐 영가스님도 그려러니와, 특히 교주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은 태자의 지휘를 버리셨죠, 육년이라는 하는 귀하신 태자의 몸으로 육년이라는 세월을 피나는 고행을 했고 인도전역의 그 당시 아주 유명한 스승이라는 스승을 다 수소문하여 다 찾아다녔죠.
그리고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그렇게 고행을 하고 결국은 보리수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그런 거 정말 정상적인 깨달음을 성취하신 그래서 그로부터 나온 정말 사람이 살아가는데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롭고 진정 의미 있고 보람된 그런 삶을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여래의 정법을 비방한다면 그건 당연히 진리를 등진 삶이 되고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간지옥의 삶이다. 이렇게 이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무간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여래의 정법을 비방하지 마라. 간단하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栴檀林에 無雜樹하니 鬱密深沈師子住라
전단림 무잡수 울밀심침사자주

栴檀(전단)이라 하는 것은 인도에서 나는 향나무죠
향나무는 아주 독특한 나무기 때문에 다른 나무와 섞여서 살지를 못해요.
전단향나무 있는 숲은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단향나무의 숲에는 잡된 나무가 없으니, 이건 무슨 말인고 하니
정말 당신의 정법을 위한 이 주의주장과 이 설법에는 잡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시시한 소리 어떻게 합니까? 정말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으로써 다른 소리를 할 수 없는 거죠. 다이몬드 장사하는 사람이 무슨 어디 잡철이나 고철을 어떻게 옆에 놓고 같이 팔 수 없잖아요. 그건 집사람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죠.
그러나 뒤 조사스님들이 정말 아주 잘 알아주었고 그 뒤에는 비방도 당신이 들은 비방보다 칭찬들은 것이 뭐 두고두고 수천을 두고 세세생생 들은 칭찬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여기는 이제 자기의 진리의 삶,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전단림 숲에 아무런 잡된 나무가 없듯이 자기의 어떤 생활 주변에는 사자만이 산다.

鬱密深沈師子住 울밀림 심침사자수
전단향나무의 숲이 아주 꽉 절여 있다는 거죠
鬱密 울창하고 깊숙하다 그래서 사자가 거기에 머문다.
다른 뭐 잡된 짐승도 없고, 그야말로 숲도 전단나무 숲이고 사는 짐승도 사자다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긍지와 자부를 가지고 살았나 하는 것을 아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늘을 찌를 듯한 그런 높은 긍지와 자부심으로서 사시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境靜林閒獨自遊하니 走獸飛禽皆遠去라
경정림한독자유 주수비금개원거
境靜(경정) 경계는 고요하고 숲속은 한가하다 그래서 獨自遊(독자유)라 독자적으로 내 혼자 홀로 스스로 노닌다.
그러니까 이 높은 깨달음을 이루신 말 상대가 누가 감히 되겠습니까, 높은 깨달음에 있는 이런 인격자의 상대라고 하는 것은 쉽지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외롭죠 뭐 외로움이 있겠습니까? 마는 우리씩으로 표현하면은 정말 당신 혼자 높은 경지에 있고 그 당시 뭐 천태학파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은 이미 비난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고 자신의 공부를 이해 해주는 사람은 없고 그러니까

境靜林閒(경정림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거죠 경정은 조용하고 숲은 한가하다는 말이 뭔 말입니까 내 주변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내 혼자 거닌다.

走獸飛禽皆遠去(주수비금개원거)라
달리는 짐승과 날아다니는 새들은 다 멀리 멀리 가버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변에 정신적 수준이라 할까 불교적 안목이라고 할까 그들의 수행이라고 할까 결국에 금수에 불과하다 이거예요.
자신은 사자이라면 그 나머지는 저기 보통짐승이나 날아다니는 새나 이런 입장이니까 이야기를 해보면 도대체 이야기가 안 되고 그 선지라고 할까 높은 기백에 모두 두려워 떨고 상대가 안 되니까 멀리 멀리 피해버린다

走獸飛禽皆遠去(주수비금개원거)
어떤 숲속에 사자가 거닐고 사자 앞에는 다른 짐승들이 잡 짐승들이 가까이 하지 못한다. 이야기인즉 간단하지만
자신의 정신세계와 또 주변에 불교가 성하던 시대데 많은 공부인 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경지를 서로 이해해줄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야말로 同道(동도)라야 可知(가지)다 도가 같아야 가히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야기가 참 걸 맞는 그런 모습이죠.

師子兒 衆隨後(사자아 중수후)
정말 제대로 된 그릇이라면 사자새끼라면
중수후라 사자무리가 뒤를 따른다.
사자아중이 뒤를 따르는데

三歲 便能大哮吼 (삼세변능대효후)
사자는 세 살만 되면 곧 크게 어머니 흉내를 낸다는 거죠.
어머니 아버지가 뭐 산천이 쩌렁쩌렁하게 표호를 하는데 그 흉낸 다를 그대로 낸다는 거죠. 그래서 무슨 근기가 타고난 근기가 벌써 있다는 거죠 뭐 그런 표현입니다.

惹是野干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야시야간축법왕 백년요괴허개구)
만약에 野干 여우죠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그것은 백년요괴라 백년간 쫓아다녀 보았자 요괴에 불과하다 헛되이 입만 벌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아예 처음부터 그릇이 있다는 이거죠.
뭐 이것도 꼭 뭐 절대적인 표현은 아니지만은 당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또 주변의 도반들이라고 할까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에게 극구 당신의 깨달음 경지를 이야기 해봐자 도대체 들어가지 않고 하니까
그래서 이제 아이고 이것도 그릇이 있는가 보다 뭐 제대로 된 것은 싹부터 안다하는 그런 표현이 있듯이 불법을 공부하는 그런 입장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사자새끼로 출발하는 사람이 있고 아예 아무리 절 집안을 쫓아다니고 부처님하고 인연이 있다손 치더라도 결국에는 그 소견머리는 백년요괴 백년 묵은 여우에 불과하다.
정말 부처님의 올곧은 그런 정신하고는 거리가 멀다. 절 집안에 그런 예들이 많죠. 승속을 막론하고 그렇습니다. 스님이나 신도나 절 집안에 얼마나 익숙하고 그야말로 부처님의 맏아들, 맏딸 같은 그런 자부심을 갖고 그런 긍지와 그렇게 절 집안에 익숙한 그런 어떤 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사실 정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소견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례들을 우리가 얼마나 봅니까? 그러니 여기서 예나 이제나 다를 봐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영가스님께서도 참 사자 정말 참되고 바른 이치를 제대로 받아들여서 수용할 만한 사람의 근기는 따로 있구나.
사자새끼는 처음부터 사자새끼로 태어났지 여우가 사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우는 백년 사자를 따라다녀 봐야 여우일 뿐이지 이게 도저히 사자가 될 수 없다는 이런 한탄조의 표현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고 정말 자기 자신이 마음을 비우고 어떤 새로운 가르침 보다 높은 지혜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주 늘 새롭게 새롭게 달라집니다. 자기 소견도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고, 사고하는 것이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참 달라지는 것을 보기가 어려워요. 어렵긴 한데 그런데 아주 쉽게 한 두 마디에 그냥 생각이 싹 달라지고 자기의 어떤 신행생활이 영 달라져 버리고 뭐 그대로 신행을 겉으로는 하더라도 하든일은 그대로 하죠. 하든일은 그대로 하더라도 소견이 전혀 달라져 있는 그런 사람들도 또 많이 봅니다. 사실은 다 그런 건 아니죠.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볼 때 저 사람이 어떻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나 했는데 아마도 싹이 달랐던 모양이죠.
속에는 그렇게 정말 정법을 받아들일 그런 마음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던 사람들이구나.
전생부터 정법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던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저는 많이 하게 됩니다.
뭐 어떤 불교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느냐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짚을 수는 없지만은 대개 보면 내 주변에도 그래요. 저 인데 아주 잘한다고 참 신심 있고 봉사활동 잘하고 잘하기는 잘하는데 한 번도 내 책에 관심 있다거나 내 법문을 들어보고 싶다거나 이런 건 없어요.
보면 그 참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스님이니까 신심 있게 참 이렇게 잘 대해주는 것 그런 점은 또 배울 점이죠. 아주 참 순수한 신심으로 그렇게 살아가시는 좋은 모습이지만
불교 안에는 참으로 아주 다양한 가르침들이 있고 이왕이면 최고의 진수성찬을 먹어야죠.
왕의 음식을 앞에 놓고 당당하게 배불리 먹을 줄 아는 그런 용기와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래도 소득이 적고 이익이 적죠.

여기 영가스님의 말씀은 참 당신도 이런 한 말씀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대했고 상대하면서 자기의 정법을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귀가 철벽인지 도대체 먹혀들어가지 않더라 뭐 사자새끼는 따로 있구나. 아무리 절 집안에서 세세생생 생을 거듭하면서 드나들었다 손 치더라도 이것은 소견이 열리지 않으면 백년요괴 백년 묵은 요괴밖에 될 수가 없구나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圓頓敎는 沒人情이니 有疑不決直須爭이로다
원돈교 몰인정 유의불결직수쟁

圓頓敎(원돈교) 이것도 이제 앞에서 如來 頓敎門, 돈교와 같습니다.
원돈교
원만하고 한꺼번에 되는 가르침은 인정이 없다. 인정사정이 없다 이것입니다.
인정으로 될 일 아니죠.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영가스님께서 깨달으신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는 모든 존재의 실상, 사람이 살아가는 진정한 이치 이점에 대해서는 인정으로 해결 할 일이 아니다

有疑不決直須爭(유의불결직수쟁)이로다
의심이 있어서 해결 하지 못하거든 곧바로 모름지기 한번 따져볼 지어다.
다툴지어다. 다툴 쟁(爭)자를 썼습니다 만은 한번 따져볼지어다
서로 친한 사이다, 아는 사이다, 이걸 가지고 논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사이라 하더라도 정법이냐 사법이냐 하는 것은 냉정하게 따져야 되는 거죠. 친구사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는 친구고 부부는 부부고 가족은 가족이고 법은 법이다 이거죠.
정법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는 이건 사정없이 따져서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판가름을 지어야 할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서로의 관계를 그런 문제 때문에 관계를 해치게 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은 모자라는 사람이죠.
법을 이야기 하면서 거기에서 설사 좀 의견이 다르고 정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무슨 뭐 그것 때문에 서먹해지고 정이 좀 떨어진다고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정은 정이고 법을 논하는 일은 법을 논하는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圓頓敎는 沒人情이니 有疑不決直須爭이로다
의심이 있어서 해결하지 못하거든 바로 모름지기 다툴지어다.

不是山僧逞人我라 修行恐落斷常坑이로다
불시산승령인아 수행공낙단상갱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가? 참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조사스님의 어록에서 이렇게 속에 있는 적나라한 어떤 감정이라고나 할까요. 문제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문제점에 대해서 이렇게 아주 적나라하게 들어 내놓고 표현하신 어록도 크게 흔치가 않습니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되어있습니다.
증도가는 영가스님의 성격이 또 그러시고 당신이 살아온 처지가 많은 아주 뛰어난 분임에도 불구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아주 곤경을 많이 받았고요. 그러다보니까 당당하게 이런 표현을 쓰시지 않아나 이런 느낌도 듭니다.

不是山僧逞人我(불시산승령인아)라
산승이 아상 인상을 드러내려고 내 잘났다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人俄라고 하는 것은 내 잘났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정말 당당하게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게 내 잘났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 우리가 어차피 부처님의 법을 만나고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를 믿고 불교 공부를 하고 하는 그런 입장이라면 모두가 수행자인데 수행하는데 있어서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斷坑(단갱)과 常坑(상갱)에 떨어지는 것이다.
斷 단멸의 구덩이, 상존의 구덩이, 단멸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없다고 하는 구덩이
常은 항상 있다고 생각하는 구덩이 구덩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굴러 떨어지면 못 올라온다고 해서 구름갱자(坑)를 씁니다.
어째든 치우진 생각이죠. 치우진 소견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有와 無도 마찬가지이고요 있다 없다 도 마찬가지고, 단이다 상이다 이건
斷(단)은 죽은 뒤에 아주 우리 삶이라는 것이 없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
常(상)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 어느 것도 아니죠.
그러면서 어느 것도 다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면서 또 그것이 아주 없는 것이고 아주 없으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동시에 함께 나가는 것이죠. 그것이 죽은 뒤의 일만이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의 삶도 뭐 어떻게 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손에 잡히는 것이 뭐가 있어요.
환상 같고 꿈같고 영상을 보는 것 같죠.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고 영화를 볼 때는 실감나고 보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뭐가 있습니까? 그냥 빛이고 그림자일 뿐이죠.
우리 인생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인생도 결국 그런 입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만 생각해서도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영화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데서 빛과 그림자를 통해서 보고 웃고 울고 거기에서 감동을 받고 인생이 달라지고 할 수 있듯이
우리 인생도 그런 공하고 텅 비고 환상과 같고 환영과 같은 그런 입장이 있으면서도 또 정말 진지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그런 사실이 또 엄연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치우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상하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항상 있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항상 있으면서 무상하고 무상하면서 항상 있고 이게 내가 늘 말씀드린 중도적인 소견이고 중도적인 소견이란 존재를 바로 보는 것,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그런 이치다.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그렇고 수행을 하는데도 그렇고 어디에든 치우지는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恐落斷常坑(공낙단상갱)이라
斷滅(단멸)의 구덩이 常坑(상갱)의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건 뭐 수행이라고 하는 말을 빼버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유나 무의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서다.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주장 한다 이거요. 이렇게 비난을 들어가면서 손가락질 받아가면서도 당당하게 이렇게 정법을 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수행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인생이라고 하죠.

人生恐落斷常坑(인생공낙단상갱)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어디에든지 치우지는 그런 일이 있을까 그것이 염려다.

제대로 깨달으신 분은 누구나 끊임없이 당신이 보신 안목 중도적 안목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삶, 행복한 삶이고 우리가 마음에 그리는 이상적인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가르침 이죠. 우리가 八正道(팔정도)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 正見(정견), 바른 견해, 정지견, 진정견해
이것이 전부 중도적인 견해, 중도적 안목이다 이 뜻입니다. 정견이라는 것이
중도정견 그러잖아요. 모든 존재를 바르게 본다고 하는 것, 중도적으로 본다. 이 뜻입니다.

어제에도 말씀드렸듯이 배가 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이 언덕에도 저 언덕에도 닿지 않아야 제대로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죠. 어느 언덕에도 닿아버리면 그 배는 목적지에 이룰 수가 없습니다. 어느 언덕에도 부딪치지도 말고 닿지도 말고 정말 그러나 두 언덕이 있어서 물을 잘 막아 주어야 그 물을 따라 잘 갈 수가 있습니다.
부정하지도 못하고 긍정하지도 못합니다. 이쪽언덕도 저쪽언덕도 부정도 못하고 긍정도 못합니다. 부정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 언덕 때문에 배가 잘 갈수가 있고 긍정을 못한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닿아버리면 제갈 길을 못 가게 되는 거죠.
바로 이런 뜻입니다. 사람관계가 그렇고 물질관계 그렇고 일체 다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집착하거나 빠져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가르침이죠.
존재의 실상을 확철히 깨달아 가지고 꿰뚫어본 그런 안목이 아니고는 이런 가르침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뭐 이렇게 큰 소리 치는 것은 내가 잘났다고 자랑하기 위한 거냐? 아니다 이거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디에든지 치우쳐서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 이것이 염려가 되어서 하는 것이다.
깨달으신 분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 같이 그렇게 여겨지기 때문에 이런 표현합니다. 그러다보니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오늘 여기가지 공부하겠습니다


















證道歌 제20강

반갑습니다.
3월 27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증도가


非不非 是不是여 差之毫釐에 失千里라.
비불비 시불시여 차지호리에 실천리라.

거기서부터 할 차례인데 영가스님께서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시고 당시의 불교현황을 보니까 여러 가지 잘못된 점들이 많고 또 당신이 그 동안 알았던 불교도 사실은 크게 잘못되었었고 그래서 정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런 큰 사자후獅子吼를 지금 하시는 입장으로 이 증도가證道歌를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자신의 전통을 밝히셨고 또 당당하게 부처님의 정법이다고 하는 그런 그 취지도 말씀하셨고 또 이것은 누가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의 그 뭐라고할까 높은 정상위에 오른 사람의 어떤 그 외로움 같은 것 경전임안의 독자유라고 하는 등등의 그런 그 표현들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은 뭐 내 아상我相을 내고 내가 잘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행修行한다고 일생을 바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단상의 칠층 그런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서다. 이렇게 이제 앞에서 말씀하셨지요.

不是山僧이 逞人我라 修行에恐落斷常坑이로다.
불시산승이 영인아라 수행에공락단상갱이로다.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 정말 수행을 한다고 마음먹고 살 때는 거기에 희생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한 생을 다 바치고 바쳐도 그냥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삶을 다 포기하고 정말 이 진리하나 깨닫겠다고 하는 것. 바로 이것 하나 바라보고 그런 그 고행의 삶, 수행의 삶을 사는데 만약에 그것이 잘못된다면 얼마나 손해가 막대하며 또 정말 보람 없는 그런 삶인가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자신이 걸어온 길과 지금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것 이런 것들 전부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깨우쳐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깨달은 사람의 그 무한자비지요. 그래서 그러한 마음에서 내가 이렇게 자신감 넘치게 당당하게 자신의 깨달음과 또 그 깨달음은 부처님으로부터 달마스님으로 그리고 육조스님으로 이렇게 이어진 정말 추호의 잘못도 없는 그런 그 전통의 법이다 정법이다 하는 그런 말씀을 쭉 하시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결국은 이것은 내 자랑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이 치우친 소견에 떨어질까 그야말로 중도적인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데 어디에도 치우치면 그건 이제 예를 들어서 강물을 따라서 배가 흘러가는 입장이라면 이쪽 강 언덕도 저쪽 강 언덕도 닿지를 않고 중앙으로 쭉 흘러가야 제대로 갈 수 있는 거와같이 진리를 깨닫겠다 또 수행을 하겠다하면 바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이 치우친 소견 그것을 정말 잘 살펴서 떨어지지 않아야된다 하는 것입니다. 치우친 소견이란 유무有無 범성凡聖 단상斷常 부처중생 이런 모든 상대적인 개념槪念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옳다 그르다라고 하는 문제로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참 한마디로 옳다 해도 맞지를 않고 그르다 해도 맞지를 않는 것인데 여기에 이제 그름과 그르지아니한 것 또 옳은 것과 옳지 아니함 비불비 시불시非不非 是不是 비非와 불비不非와 시是와 불시不是 이런 것들이 차지호리差之毫釐의 실천리失千里라 이렇게 나눠놓고 이야기 합니다. 조금만 호리毫釐만치만 어긋나도 천리千里를 잃어버린다. 이렇게 표현했는데 정말 그렇지요. 남북南北으로 갈릴 때 그 갈라지는 그 기점은 어떻습니까? 호리毫釐만치 작은 것이지만은 정 반대의 입장으로 벌어지면 그것이 얼마 아니 가서 정말 백리百里나 천리千里를 어긋나게 되는 그런 이치理致와 같은 거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불교의 깨달음의 이치를 우리가 이해하는데 정말 그 깨달음의 이치에 맞게 우리가 마음을 써야 되고 거기에 알맞는 수행이 따라야 되는 것이지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치우친 소견을 가지고 불교에 임하다 보면은 정말 얼토당토아니한 그런 방향으로 간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건 뭐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두 말할 나위도 없고 보통 우리가 그냥 평범하게 불교수행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죠 정말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불교적이지 못한 그런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냥 누구보다도 신심 있다고 생각하고 누구보다도 바른 불교를 지향志向한다고 하는 그런 그 사고를 하는 사람들 얼마나 잘못 되었습니까?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모른다는 그런 자세가 되면은 돌아올 가능성이 이제 많죠. 그런데 이제 아주 틀림없이 옳다. 이것만이 정법이고 이것이 최고다 아주 뭐 세상에 둘도 없이 큰 스님이 가르친 법이기 때문에 이건 뭐 틀림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생각한다면 그건 문제가 많은 거지요.

좀 도가 높은 분들일수록 방편方便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근데 그 방편을 방편으로 알아야 할 텐데 방편인줄 모르고 그만 거기에 떨어져서 그것이 불교의 모두인양 큰스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그것이 불교의 모두인양으로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면은 참 곤란한 점이 많지요. 그 차지호리差之毫釐에 실천리失千里라는 것입니다. 호리毫釐만치만 어긋나도 천리千里를 잃어버린다.

예화를 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是則龍女頓成佛이요 非則善星生陷墜라.
시즉용녀돈성불이요 비즉선성생함추라.

옳은 입장으로 본다면은 용녀도 순식간에 성불을 했고 그른입장으로 본다면은 선성비구도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이런 이야기죠. 이제 다 경전에 있는 이야기인데 용녀는 법화경에 있는 제바달다품에 나오는 이야기이죠. 용녀가 뭐 용을 신앙하는 여자인지 아니면 뭐 그야말로 축생畜生인 용의 암용인지 그건 뭐 알 길이 없습니다만은 그것이 이제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축생이고 축생에서도 이제 암축생이라는 거지요.

그런 입장에서도 순식간에 성불을 하는 수가 있고 잘못되면은 선성비구는 열반경에 근거를 한다면 부처님의 아들로 되어있습니다. 부처님의 아들이 라후라 뿐만 아니라 또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아들인 누구보다도 정법을 바로 공부하고 바로 깨달아야할 그런 입장에 있는 부처님의 아들도 소견所見이 잘못되니까 그만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이런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뭐 옳다 그르다하는 것이 문제지 인척姻戚 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법을 논하는 데는 몰인정沒人情이라고 그랬지요. 인정人情이 없다 인정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뭐 친한 형제가 됐든지 가족이 됐든지 누가 됐든지 간에 정법을 가지고는 아주 가차 없이 우리가 따지고 논쟁을 하고 또 어떻게 하더라도 바른 가르침으로 우리가 돌아서야지 그렇다고 이제 뭐 사람관계가 소원疏遠해질 거는 없다는 그런 말씀을 지난 번에도 이제 드렸습니다.


吾早年來積學問하야 亦曾討疏尋經論이로다.
오조연래적학문하야 역증토소심경논이로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아주 젊은 나이에 학문을 많이 쌓았다. 그래서 또한 일찍이 소疏를 찾고 경론經論을 찾았다. 이제 소疏는 경經을 해석한 것을 소疏라 그러고 또 소疏를 좀 더 부연설명하면은 그건 초抄라 그래요. 소초疏抄라 이래 이렇게 강원에서는 부르지요. 또 경經이라고 하는 것 이것 역시 부처님의 경전經典을 경經이라고 하고 논論은 이제 경전을 해석하는 입장에서 이제 소疏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은 또 논論이라고도 그렇게 부르지요. 그래서 이제 경이나 론을 찾았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조사스님들의 저술著述이나 어록語錄들을 수 없이 찾고 읽었다. 그러면서

分別名相不知休라.
분별명상부지휴라.

명상을 분별하기를 쉴 줄을 알지 못했다. 명상이라고 하는게 뭡니까 이건 어디서 나오고 교리상으로 어떻고 소승교적으로 어떻고 대승교적으로 어떻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특히 구사론俱舍論이니 유식론唯識論이니 백법론이니 하는 그런 것들은 정말 아주 복잡합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선 그런거 이제 크게 많이 따지진 않지만은 그래도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도 아주 복잡해요. 역시 수행 점차같은 것만 하더라도 십신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뭐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이니 또 이런 것이 있고 또 대청산 법문이라고 해서 우리 심리현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든지 등등 그런 그 행상 교리행상이라고도 하고 또 명칭과 행상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인도라고 하는 나라가 명상하기 좋고 또 그러다보니까 부처님의 깨달음을 근거로 해서 얼마나 많은 그런 불교교학이 발전 했습니까 그런 것들을 또 중국이나 한국에 넘어오면서 그것을 또 연구하고 거기서 또 자기의 연구내용을 또 거기다 이제 첨가하고 그것을 또 뒷사람들은 읽느라고 뭐 참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월을 많이 보내지요. 不知休 부지휴라 쉴 줄 알지못했다.

마치 이제 비유컨대 뭐와 같은고하면

入海算沙徒自困이라.
입해산사도자곤이라.
그랬습니다.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는 격이라. 한갓 스스로 피로할 뿐이다. 바다에 가서 모래를 하나하나 한개씩 두개씩 그렇게 센들 얼마나 세겠습니까? 그리고 끝도없이 나열되어있는 모래인데 그걸 어떻게 다 세겠습니까? 불교의 교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뭐 꼭 필요한 것도 있지만은 필요치 않은 것도 있고요. 또 설명을 해 나가다보면은 그렇게 끝도 없이 설명이 이어지게 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무수한 가르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참 좋은 점도 있지만은 공부할려고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헷갈리는 그런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닷속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는 그런 격이다. 피곤할 뿐이다. 이거죠

却被如來苦訶責하니 數他珍寶라 有何益가
각피여래고가책하니 수타진보라 유하익가

각피여래却被如來 도리어 여래의 아주 호된 꾸지람을 아주 가슴에 파고드는 그런 아주 꾸지람을 입었다. 뭐 여래가 나타나서 영가스님에게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욕을 하고 그래서 꾸지람을 했다는 그런 뜻은 아니지요. 스스로 생각해보니까 잘못됐다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영가스님은 일찍이 교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당시에 존재하는 경전經典 다 읽고 또 어록語錄 다 읽고요 그렇게 그런 세월을 오래 보내다보니까 이런 말씀이 나오게 되는 거지요.

여래의 아주 아픈 꾸지람을 입으니 수타진보數他珍寶라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는 격이라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 딴 사람이 써 놓은 거 가지고 계속 책장 넘기고 글자 헤아리고 무슨 자인지 어떻게 새겼는지 이것은 교리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앞뒤가 어떻게 되는지 또 우리가 논문 한 편 쓴다하더라도 그것 뭡니까 출처 밝히고 지문대고 그래서 하나 틀리지 않게 앞뒤로 갖다 맞추고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이에요. 불교는 사실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문자에 그렇게 집착해서 문자에 헤매도록 되어 있는게 아닌데 또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업으로 그렇게 하지요. 그게 또 직업이기도 하고요. 논문 써서 학위 받고 그래서 또 뭐 강의할 자리 얻고 이러다보면 그게 그냥 불교를 통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그 일이 업이 되다 보니까 그 끝도 없이 그렇게 이야기를 또 펼쳐가고 새로운 이론을 전개시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건 이제 그걸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일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게 이제 남의 보물을 세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다.


경전을 우리가 펼칠 때 개경게開經偈라고 해서 무상심심미묘법 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이 염불을 이제 외우고 천수경千手經에도 첫머리에 그게 있고요. 또 이것은 스님들이 강원에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상강례上講禮라고하는 의식이 있는데 상강례上講禮에도 반드시 이 게송偈頌 을 외웁니다. 그건 이제 정말 부처님의 법은 위대한 것이고 정말 백천만겁百千萬劫에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다행히 받아 지니고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은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이다. 원컨대 여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있다. 그 말이에요. 그거 참 중요한 거지요. 여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있다. 그걸 늘 염두에 두고 경전을 접하고 불교에 임하고 또 강의를 듣더라도 강의를 하는 사람이나 강의를 듣는 사람이나 늘 그 취지를 잊어버리지 말고 경전을 보고 강의를 하고 불교 수행을 하라고 그것을 늘 이제 먼저 읽고 경전을 읽게 되어있고 또 그것을 먼저 의식을 통해서 읽고 강의를 하고 강원에서 공부를 하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라고 하는 그 의미가 참 중요한 거지요. 부처님법이 위대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을 잘못 알면은 입해산사도자곤入海算沙徒自困이 되어 버리구요. 참으로 여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은 참말 우리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어마어마한 그런 보물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從來로 蹭蹬覺虛行하니
종래로 정등각허행하니

예전에는 정등(층등?) 이건이제 비칠거린다는 뜻입니다.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칠거리면서 헛되게 행했음을 깨달으니 헛되게 수행했음을 깨달으니

多年에 枉作風塵客이로다.
다년에 왕작풍진객이로다.
오랜 세월동안 다년동안 잘못되게 풍진객을 지었더라. 풍진객風塵客은 뭡니까 정말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비바람 맞으면서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아주 고생고생하면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런 삶이라 말이야... 그러니까 문자에 집착해가지고 문자 연구하노라고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그것이 바로 풍진객風塵客의 노릇과 같다는 것입니다. 정말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아서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스스로 안식처安息處를 얻고 정말 쉴 곳을 얻어야 하는 것이 불교공부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안식처를 못 얻고 쉬지도 못하고 그저 끊임없이 헤매고 다니는 그런 삶이 되다보니까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풍진객風塵客을 지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種性邪 錯知解여 不達如來圓頓制로다.
종성사 착지해여 부달여래원돈제로다.

종성이 삿되고 그릇 지해知解 알며 그래되요 종성사種城邪 삿됨을 심는다는게 아니고 종성種性 그러니까 성품이 삿됐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처음에 이건 뭐 성품性品이 삿되다 어쩌다 처음부터 그런 거는 아니지만 말하자면 불교를 처음에 접할 때의 밑바탕 이게 종성이지요. 종자의 성품 이런 뜻이니까 그럼 이제 처음에 불교를 만날 때 그것을 종성種性이라고 하는데 지금같이 이렇게 밝은 세상에도 사찰을 잘못 만난다던지 또 스님을 잘못 만난다던지 불교단체를 잘못 만난다던지 그러면은 뭐 오랜 시간 오랜 세월 그런 허송세월을 하거나 뭐 허송세월만하면 괜찮은데 삿되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경우가 참 많죠.

그런거보면 정말 지금같이 밝은 세상 정보가 다 노출되어있어서 다 알 수 있는 그런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할까 잘못 들어서서 줄을 잘못 서서 첫 인연이 잘못되어서 그래서 이제 삿되게 되어가지고 잘못안다 착지해錯知解라 잘못 이해한다 이거야. 그런 경우가 참 지금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 뭐 이게 영가스님문제가 아니라 지금 오늘날 당면한 우리들의 문제지요.

우리 어릴 때 보면은 스님 생활하는 이들도 그래요. 강원에서 이렇게 같이 공부를 하다 보면은 과거 자기가 이제 어느 절에서 어떻게 살았다하는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뭐 사찰에 들어오자마자 아주 행자생활도 정상적인 코스를 밟고 그래서 얼마 안 있다가 바로 사미계를 받고 그래서 바로 강원으로 이렇게 들어와서 경전 공부하고 불교가 뭔지를 공부하게 되는 그런 코스를 밟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저기 시골에 독살이 같은데 떨어져 가지고 그때는 안목이 그거뿐이니까 그저 인연 따라서 그렇게 가 가지고 상당한 세월 5년, 6년 심지어는 10년 정도 그저그런 오랜 세월을 그저 그런 오랜 세월을 염불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그저 심부름이나 하고 일이나 하고 그냥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어찌어찌 객스님이 와가지고 대화를 나누다가 비로소 이제 깨닫게 되는 거지요. 객스님이 지나가면서 이렇게 살아서는 중노릇이 아니다 하는 것을 이제 일러주게 되고 그럼 어떻게 어느 사찰로 어떻게 가야 되느냐 이런 것들도 지도를 받게 되고 이렇게 해서 강원에 온 분들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난 오랜 세월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하면서 가슴을 치고 안타까워하는 그런 이들을 만났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뭐 50년대 말 60년대 초니까 얼마나 어리석고 정보가 어두웠던 때입니까 그때 대개 그럴 수가 있었지요. 신도님들도 마찬가지에요. 신도님들도 사찰을 잘못 찾는다든지 스님들을 잘못 만난다든지 이렇게 밝고 밝은 지금 세상에도 정법을 가지고 신도들을 지도하지를 못하고 자기 깜냥대로 그냥 적당히 사찰운영에 그저 매진하는 그런 이들이 뭐 적지 않지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헌데 다행히 오늘날과 같은 시대는 그래도 정보가 이렇게 많이 노출되어서 조금만 마음을 쓰면은 바른길을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종성種性이 삿되고 그릇 알며 부달여래 원돈제圓頓制로다. 여래의 원돈제圓頓制를 통달하지 못했더라. 원돈제圓頓制라고 하는 것은 저 앞에 이제 聞說如來頓敎門문설여래돈교문 할 때 돈교나 또 원돈교圓頓敎 몇 번 있었어요. 원돈교圓頓敎 돈교頓敎 뭐 이런 여기에 원돈제圓頓制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교圓敎의 가르침 돈교頓敎의 가르침 원만圓滿하고 한꺼번에 순식간에 몰록 되는 그런 그 가르침 그런 법 그런 법을 여래의 원만하고 몰록 한꺼번에 되는 그런 법을 알지를 못했더라. 잘못 들어서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스님들이 스님생활을 하는 것이나 신도님들이 불교를 신행하는 것이나 다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서면은 많은세월 허송세월 보내고 심지어는 일생을 삿되게 불교를 믿게 되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 하는 것입니다.

二乘精進은 勿道心이요 外道聰明은 無智慧라.
이승정진은 물도심이요 외도총명은 무지혜라.

이승二乘들 이게 이제 소승小乘을 말하는 거지요.
어떤 편협한 생각에 떨어져있는 그걸 이제 이승이라 그러지요. 성문연각聲聞緣覺이라고 하는데 그러는데 뭐 성문聲聞이 됐든 연각緣覺이 됐든 여기서는 어쨌든 소견所見이 잘못된 사람은 정진을 해도 그것은 도심道心이 아니다 이거에요. 아무리 정진을 제대로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심道心이 아니다. 하는 뜻입니다. 정법을 만나지 못하고 생각이 바르게 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뭐 절을 그저 몸에다 스프링 장치한 것 같이 번개같이 해 대는 그런 어떤 능력을 가졌다하더라도 그건 결코 소견이 바르지 못하면 도심道心이 아니지요. 불교는 바른 인생의 길을 가르치자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고 조사스님들의 뜻입니다. 그게 도심이죠. 그런데 그 어떻게 잘못 들어서서 참 어떻게 보면 너무 익숙한 것 같지만은 의외로 딴 생각을 하고 불교를 접하고 있다고 하는 것 그런 예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정진해도 하루에 삼천배 아니라 삼만배를 해도 도심道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거지요. 목에 피가 넘어오도록 관세음보살을 해도 부르짖어도 이게 이제 바른 수행의 길이 아니고 바른 불법佛法이 아니고 부처님의 본마음이 아니라 하는거 참 우리가 살피고 또 살피고 주의하고 또 주의하고 해야 할 그런 사실입니다.

외도총명外道聰明은 무지혜無智慧라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외도 불법 밖의 도를 외도外道라 그래요. 바깥외外자 길도道 자는 불법佛法 밖의 도道다. 그건 이제 아무리 총명聰明해봤자 智慧지혜가 없는 것이다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그 세속적이거나 정말 진리眞理와는 거리가 먼 입장으로 머리가 뭐 뛰어나가지고 하루에 책 한권을 다 외우고 세상에 뭐 모르는 게 없고 뭐 그런 총명함이 있다하더라도 지혜하고는 거리가 먼 거지요. 그런 건 뭐 잡된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지혜는 아니지요. 지혜는 이치를 아는 거에요. 모든 존재의 법칙을 아는 것이고 세상과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를 진리眞里 참된 이치를 아는 것이 참된 이치를 아는 것이 그게 지혜智慧지요. 그리고 무지혜無智慧라고 그랬잖습니까 외도는 아무리 총명해 봐야 그건 지혜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인생과 세상의 바른 이치를 아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亦愚癡 亦小騃니 역우치 역소애니


空拳指上生實解 공권실상에 생실해로다.


또한 어리석고 또 어리석으니 그래 이제 어른이 어리석은것을 愚癡우치라 그러고 아이가 어리석은 것을 소애小騃라 그래요 소해가 아니고 애입니다. 말마변에 이게 이제 잘못된 글자가 있는데 말마 馬변에 돼지해亥자가 아니고 말마변에 어조사의 矣자 삼각(마늘모)밑에 그 잃을 실자(화살시) 한 글자죠. 말마변에 그게 이제 어리석을 애자인데 아이가 어리석은 것을 애라 그래요. 어른이 어리석은 것을 우치라 그러고. 어리석고 또 어리석으니 공권지상空拳指上에 생실해生實解로다. 빈주먹에 안에 차 있다는 이해를 내는 도다. 실實자는 안에 이제 차있다 찰 실자입니다. 실다울 실자 알 실자 뭐 여러 가지 열매실자 그러죠. 차있을 실자 그러니까 뭐 이렇게 놀이를 할 때 그러지요. 의례히 주먹에 뭐가 있어가지고 몇 개냐 라고 하는 걸로 그렇게 알죠. 몇 개냐 하면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몇 개냐고 묻는데 간교한 어른들은 말하자면 빈주먹을 가지고 여기 몇 개 있느냐고 그러지요. 그럼 이제 거기에 이제 속게 되는 거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빈주먹에다가 뭐가 있다 라고 있다는 이해를 낸다. 고렇게 새기면 좋겠네요. 빈주먹에서 있다고 하는 이해를 낸다. 아니면 빈주먹에서 가졌다는 이해를 냄이로다.


執指爲月枉施功하고 根境法中에 虛捏怪로다.
집지위월왕시공하고 근경법중에 허날괴로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기 위한 것인데 손가락을 집착해서 달을 삼으니 그릇 공功을 베푸는 일이다. 방편方便에 떨어져있다 이겁니다. 방편方便에 떨어져 있으면은 방편方便이 목적하는 바가 있는데 다시 말해서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기 위한거지요. 손가락이 목적하는 바는 달입니다. 그러면 달을 봐야지요 그런데 그 손가락을 가지고 달이라고 생각하면은 큰 오산 아니겠습니까 실지 이건 비유인데 실지로 그런 일은 없지요. 그러나 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너무 방편方便이 화려하고 현란하니까 화려하고 현란한 그런 방편을 듣다보면 고만 거기에 떨어져버린다고요. 지금 뭐 거의 불교佛敎가 방편方便이라고 밖에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방편은 결국 거품입니다. 방편方便은 거품이지 실체가 아니지요.

그런데 지금 거의 방편方便에 그렇게 이제 방편도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화려하고 현란하고 그렇지요 그러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실법實法인줄 알고 그게 인제 진짜 불법佛法인줄 알게 되는 것 이지요. 그러니까 참 이게 문제가 보통문제가 아닌데 그래서 정법을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꾸 높아야되고 정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자꾸 많이 늘어나서 정법운동을 많이 펼쳐야 돼요. 정법 운동을 정법이 이로운 거에요. 정법이 크게 이로운 거라고요.

조그마하게 그게 이제 정법이 이해안된다고해서 자기깜냥에 맞는 그런 불교를 자기 나름대로 전혀 부처님은 생각한 바도 없는 그런 불교를 자기 나름대로 설정을 딱 해놓고 이렇게 만들어놓고 고게 불교다 라고하고 고 불교를 혼자 와서 하고 간다고요. 그건 뭐 팔만대장경에도 없는 불교라. 어떤 경우 신도들에게 들어보면은 우습지도 않지요. 정말 팔만대장경 평생 뭐 중노릇해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런 불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아요.

자기가 벌써 그런 불교를 만들어가지고 들고 와 가지고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들어와가지고는 그만 딱 법당에다 갖다놓고 고 불교 잔뜩 이제 위하다가 또 고걸 들고 고대로 집에 가져가요 올때 또 고 불교 들고 그대로 오고 더 이상 들을려고도 않하고 볼려고도 않하고 알려고도 않하고 그렇지요. 그게 이제 이미 절 안에 불교 안에 있는 방편도 그렇게 많고 복잡한데 또 각자가 또 방편을 그렇게 방편불교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신봉을 하니 얼마나 참 문제가 많습니까?


根境法中에 虛捏怪로다.
근경법중에 허날괴로다.


근경진중根境塵中이라고 되어있는 책도 있는데 법法이라고 하는게 맞아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의 법 가운데서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의 도리道理 가운데서 헛되게 날괴捏怪함이로다. 捏怪날괴라고 하는것은 누를 날捏자 괴이할 괴怪자인데 눈을 멀쩡한 눈을 이렇게 눌러가지고서 허공虛空에 뭐가 이렇게 그림자가 있는 것 같이 보이고 꽃이 있는 것같이 보이는 거지요. 그래서 괴이하게 되는 거지요. 잘못되는 거지요. 헛되이 날괴함이로다. 헛되이 눌러서 괴이하게 되었도다. 괜히 안 눌러도 될 눈을 누른다고요. 불교공부 한다는게 그렇게 엉뚱한데로 빠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경법根境法이라고 하는 것은 보고 듣는 그러니까 보는 근과 六根육근과 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意와 그 다음에 색성향미촉법 色聲香味觸法인 그런 그 관계 속에서 모든게 이루어지니까 그래서 이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執指爲月枉施功 根境法中虛捏怪라.
집지위월왕시공 근경법중에허날괴라.


참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면서도 지금도 우리가 지금공부하고 있는 불교가 정말 올바른 불교인가 끊임없이 우리가 점검하고 또 의심하고 또 사유하고 그리고 또 다른 어떤 가르침과 또 이렇게 비교하면서 정말 선택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은 참말 올바른 선택을 제대로 해야만 선택을 하지 않는 그런 그 중도 정견을 우리가 체득할 수가 있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21강

不見一法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了卽業障本來空
불견일법즉여래 방득명위관자재 요즉업장본래공
未了還須償宿債 飢逢王饍不能飡 病遇醫王爭得差
미요환수상숙채 기봉왕선불능손 병우의왕쟁득차
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 勇施犯重悟無生
재욕행선지견력 화중생연종불괴 용시범중오무생
早時成佛于今在
조시성불우금재

반갑습니다.
3월 28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증도가가 이제 얼마 안남았는데 증도가를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은 뭐 한번쯤 더하거나 이제 그렇게 하게 되면은 끝날 것 같은데 신심명하고 증도가 하고 해서 두 달 정도 이래 걸렸어요.

조금 이제 한가지 더하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료실에 『대승찬大乘讚』이라고 하는 것을 올려놨습니다. 그것을 복사해서 한글문서에서 좀 잘 키우고 만들어 가지고 출력을 해서 교재로 준비해 두시고 그걸 가지고 예습을 좀 하시면은 강의 듣기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승찬大乘讚』을 가지고 증도가에 이어서 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미리 준비 좀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不見一法이 卽如來니 方得名爲觀自在라
불견일법 즉여래 방득명위관자재

이렇게 했습니다.
한 법法도 볼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여래如來다 그랬습니다. 이건 이제 어떤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시는고 하면은 우리의 자성自性자리에서 볼 때는 일체一切 차별상差別相이 없다 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의 수준으로는 모든 차별상差別相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늘 심외무물心外無物이라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 그래요. 그래서 일체一切 차별상差別相을
그 없다라고 하는 말은 불견일법不見一法이라고 하는 말은 전체를 싹 쓸어버려서 텅 비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두되 그런 그 차별상으로 보지 아니하고
심외무물心外無物 마음 밖에 따로 물건이 없고
오직 마음으로 낱낱이 마음으로 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도안무물道眼無物이란 말도 있어요.
도道의 눈으로 보면 일체 차별된 하나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전부 도道다 전부 법法이고 전부가 마음이고
전부가 진여법계眞如法界다 하는 것입니다.

금으로 여러가지 조각을 만들어서 조각 모양은 차별하지만은 어떻습니까 전부 동일한 금이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죠.

물을 또 컵에다 담아 놓으면은 컵모양이 되고 바께스에 담아놓으면은 바께스 모양이 되고 흐르도록 해 두면은 흐르는 물이고 고여 있는 곳에서는 고여 있는 물이고 그것을 이제 온도를 가하면은 끓어서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온도가 낮으면은 얼음이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형태는 변하지만은 물의 성질은 동일同一한 것 하나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상이 없다.

그래 불견일법不見一法 한 법도 어떤 그 차별된 법을 보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량분별이지만은 이해하려고 들면 그렇게 이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 밖에 물건이 없고 도안道眼으로 보면은 차별된 사물이 없다. 그 경지가 그대로 여래如來다. 하는 것입니다.
이걸 이제 잘 이해하면은 밑에 이제 죽 뭐 다 이해가 되는 그런 내용이예요.

그랬을 때 방득명위관자재方得名爲觀自在라
바야흐로 이름을 관자재라고 한다. 보는 것이 자유자재하다 이거죠. 관세음보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이 됐든 아니면 그것을 낱낱이 해석해서 보는 것이 자유자재하다 했든 결국은 관세음보살도 보는 것이 자유자재하는 뜻에서 관자재니까요.
그래서 여기선 관세음보살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이름을 보는 것이 자재하다 이렇게 이제 설명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요
예를 들어서 불견일법不見一法 한 법도 차별된 것이 없고 일체가 다 마음으로 볼 것 같으면은 업장도 따로 업장이라 할 게 없다는 거죠. 그래서

了卽業障本來空이라
요즉업장본래공

자성自性자리의 그 차별差別없는 자성自性 그것을 깨달을 것 같으면 업장業障도 본래本來 공空하다
낱낱 업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낱낱 업은 그러니까 그냥 모든 것을 하나의 마음으로 그렇게 관찰을 하는 거죠 어떤 업을 지어서 어떤 업을 받든지간에 마음으로 보는 것이죠,

그래 깨닫지 못하고 그런 이치를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 그 이치를 모르는 입장에 있어서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현상대로 또 우리가 겪는 그 현상대로 그대로 말하자면은 업장을 이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뭐 업장은 인과하고도 관계가 되는데 그 유명한 말이 있죠
불락인과不落因果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에 떨어지느냐 안떨어지느냐라고 물었는데
인과에 어둡지 아니하다 그렇게 이제 대답을 했다는 거죠.
그 백장스님과 전백장 후백장의 그 유명한 대화죠

그래서 이제 이러한 도리를 불견일법不見一法이 즉여래卽如來인 이러한 도리를 다 깨달은 사람들은 인과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되느냐

그 세세한 인과를 다 알죠. 다시 말해서 금을 가지고 불상을 만들었든지 코끼리를 만들었든지 무슨 뭐 물고기를 만들었든지 칼을 만들었든지 그런 다른 형태를 보고 분별하면서도 그것이 금이라는 사실에 무게가 실려있는 거죠.
그런데 눈이 어두운 사람은 금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싣지 않고 모양에 그만 중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모양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것이죠. 불상이다 이렇게 보고 코끼리를 만들었으면 코끼리다 이렇게 본다는 거죠.

그와 같이 우리가 각각 다르게 받는 그런 인과因果도 전부 두루뭉숭이로 그 한덩어리로 그렇게 본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낱낱이 더 세밀하게 더 정확하게 보고 느끼고 하지만은
그것이 다 우리 마음작용이다
하나의 통일된 자성自性이다 라고 하는 그런 입장이 되니까 그게 이제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에 어둡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불락인과不落因果 인과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본성 마음의 본성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어떤 외형적인 것에만 끄달리는 것을 이제 인과에 떨어졌다. 그렇게 이제 말하는 거죠 그래

未了에 還須償宿債라
미요 환수상숙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구절이
깨달으면 업장이 본래 공하지만은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숙채를 갚는다. 묵은 빚을 갚는다 이거죠.

그러니까 깨달은 입장에서는 갚아도 갚는 것이 아니고 지어도 짓는 것이 아닌 그런 입장이 되고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는 낱낱이 갚는 것, 그저 눈에 보이고 어떤 그 차별상으로 드러나 있는 그것만 이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그릇에 어떤 그릇에 담겼냐 하는 그런 물의 형태만 보는 것이지 똑같이 동일한 물이다 물과 내가 하나가 된 그런 입장이 못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낱낱이 빚을 갚는 게 되는 거죠.

글쎄 이런 것이 어떻게 또 이해가 제대로 될런지 안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우리 자성자리에는 한 법도 차별된 법이 없다 하는 것 불견일법不見一法 즉여래卽如來 그것이 여래의 경지고 바로 여래다 이 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으면은 이런 것들도 이해가 돌아가리라고 그렇게 이제 생각이 됩니다.

조법사라고 승조법사라고 구마라습의 제자 중에 참 불행히도 일찍이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아주 희대의 그 명작을 남겼죠.
조론이라고 하는.

그분이 이제 돌아가실 때에 워낙 뛰어나니까 뭐 재상이 되어서 나라를 같이 다스리자 이렇게 이제 정치를 하자고 했는데 그 말을 안들었다고 해서 나중에는 이제 여러 번 청해도 안들으니까 그 당시 왕이 그만 죽이게 됐죠.
그랬을 때 이 스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의 그 오온은 본래 공한 것이다.
사대도 또한 본래 공한 것이다.
오온은 본래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대도 본래 공한 것이다
내 머리를 가지고 흰 칼날 앞에다 갖다대도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

이런 그 표현을 했는데 자기 살림살이가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말이 그 형장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자기 살림살이가 된 사람이라야 이렇게 형장에서도 태연하게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거죠.
절대 자기공부가 아니고는 거짓으로는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입장에서는 불견일법不見一法이 된 거지요.

죽음도 삶도 전부 그저 물결이 그저 출렁거리는 그런 현상으로만 보는 거죠. 물이 올라왔다고 해서 그게 생生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은 물이 내려갈 수도 있는 거죠 그거는 사死라고 할까요. 그 물이 바람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가지고 누가 그거 뭐 크게 문제 삼지 않죠.
우리의 생生과 사死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그와 같다는 거죠.
우리가 이렇게 높은 데 앉아서 물이 출렁거리는 것을 볼 때 그 뭐 올라가고 내려가고 그게 뭐 대수입니까
그게 원래 물의 본성인 것을요.
그와 마찬가지로 큰 마음으로 볼 때 생生도 사死도 그냥
큰 바다에 물이 그냥 바람 따라서 일렁이는 그런 현상과 같은 것이다. 죽음과 삶을 그렇게 본다는 거죠.

그게 이제 불견일법不見一法이 즉여래卽如來죠.
차별된 생과 사를 따로 떼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덩어리 마음의 한 물결로 보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그렇지 못하면은 어떻습니까

가사假使 백천겁百千劫이라도 소작업불망所作業不亡하야
인연회우시因緣會遇時에 과보果報를 환자수還自受라고 해서
낱낱이 백천겁이 지난다 하더라고 우리가 지은 업장은 없어지지 아니해 가지고 인연이 만나 떨어질 때 그 과보를 닥닥
받는다는 것입니다.

받는다는 것이 이건 뭐 정말 이건 이제 우리가 지은 과거 빚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받을 줄만 알면 그래도 괜찮죠
그런데 그래 생각 하지않고 그만 받게 되고 마니까 그 원망이 많고 한이 많고 앙갚음을 해야 되고 온갖 그 참 인간으로서 겪어야할 그런 아픔들을 많이 겪는다는 거죠.

그래 이제 불교가 이러한 이치를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에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손 치더라도 확철대오 하신 분들의 이런 깨달음의 말씀을 우리가 자꾸 들음으로 해서 이해가 좀 깊어지고 뭔가 수긍되는 점이 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우리들 자신을 이해시키는 거죠.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것에 대해서 이해를 시키게 되면은 자기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거 이런 그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습니까 일체가 다 부당하고 뭐 나는 그렇게 그런 일을 당하지 아니해야 되는데 왜 내가 당했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런 불교적인 이치를 가지고 잘 비추어서 마음이 가벼워질 수만 있다면은 이건 참 불교공부한 보람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크게 깨달아가지고요
정말 아무 차별상도 따로 보질 않고 나아가서 삶과 죽음까지도 하나인 마음의 한 파도의 모습으로 그렇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건 뭐 이야기 끝난거죠.

飢逢王饍不能飡하니 病遇醫王爭得差
기봉왕선불능손 병우의왕쟁득차

참 이 훌륭한 돈교頓敎 법문法門 원돈교圓頓敎교의 법문法門 더이상 나아갈 데 없는 아주 최고最高의 그 법문法門인데 이걸 이제 비유컨대는 배고픈 사람이 왕의 음식을 왕이 자시는 음식을 만났다 이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지를 아니해 그거 두려워서 못 먹는 거예요. 저 왕의 음식을 내가 어떻게 먹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은 병든 사람이 의왕을 만난들 아주 명의를 만났다한들 어떻게 나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좀 이 법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야돼요.
마음을 크게 가져야 되고 뭐 조사스님이나 부처님이나 우리 마음자리야 뭐가 다를 바 있겠나 나라고 해서 못할 이유가 가 있겠나 하는 이런 좀 어쩌면 건방진 생각을 좀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제 법이 들어갈 틈이 생겨요 그렇지 않으면 늘 자기 자신을 왜소하게 보고 그게 중생상衆生相이거든요.

중생상이라는 게 열등의식입니다. 그 열등의식에 늘 떨어져가지고는 아유 우리같이 못난 사람이 뭐 그 부처님의 높은 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래 되면은 참 이 불교 공부하는데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건 뭐 승속僧俗도 관계가 없구요 유식무식有識無識도 관계가 없고 유학무학有學無學도 관계가 없고 부귀빈천富貴貧賤이 관계가 없고 아무런 그런 문제가 차별差別이 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男女老少 아무것도 차별差別 되지가 않아요.

성철스님 법문 테이프에 있는데 옛날에 청담스님하고 성철스님하고 봉암사에서 사시면서 그분들이 젊으실 때만 해도 불교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를 못했을 때입니다. 일제 때니까요.
해방도 훨씬 더 전이죠.

이조 말에 불교가 피폐돼 가지고 뭐 그야말로 완전히 없어지다시피 그런 상황을 거쳐서 경허스님 대에 와서 조금 이제 불교가 살아났죠. 그러면서 또 일제가 들어와 가지고 여러가지 불교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그때 그 스님들이 몇 분 봉암사에서 결사를 해가지고 부처님 법대로 단 몇명이라도 모여서 법을 지켜나가자 하면서 이제 사 실 때인데 청담스님이 그 때 밖에 나가서 볼 일을 보고 쫓아 들어오더니 대중들을 막 불러 모으면서 아 이 신기한 이야기를 내가 가지고 왔으니 한 번 들어보라는 거예요.

그래 대중들이 다 모여서 청담스님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어느 시내를 지나다가 거지가 있기에 하도 불쌍해 보여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 그때 돈으로 상당히 많은 돈인데 5원이라든가 그렇다는 것 같아요. 그래 이제 큰 돈인데 그 사람을 주고 싶어서 그냥 주기는 좀 그렇고 해서 당신이 나무아미타불 세 번만 부르면 내가 이 돈을 주겠다 그건 이제 그 사람으로서는 뭐 몇 달 아니 한 일년간 동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정도의 그런 돈이라고 하는 것 같애요.

그래서 이제 그 돈을 줄 테니까 딱 꺼내가지고 보이면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줄테니까 나무아미타불 세 번만 불러라 그래서 이제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겠다는 뜻이죠 청담스님은. 그래서 이제 줄려고 이제 어차피 주는 거니까 그렇게 이제 줄려고 그 거지에게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거지가 손을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휴 그걸 내가 어떻게 부릅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부릅니까 이러더라는 거예요 도대체가.

그래 청담스님이 하도 답답해서 또 불르라고 불러 나무아미타불 세 번만 부르라고 내가 부를테니 따라 부르라고 이렇게까지 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람이 끝내 나무아미타불을 못 불러서 청담스님이 그 돈을 가지고 주지도 않고 돌아왔다는 거예요. 부르면 주겠다고 처음에 말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의 마음이 옹졸해 들어놓으면은 그거 나무아미타불 세 번도 못 부른다는 거예요. 아휴 그걸 내가 어떻게 부르냐고 이러더라는 거죠 세상에.

그래 청담스님이 세상에 사람의 근기가 여러가지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배웠지만 세상에 그럴 수도 있는가고 정말 놀랍고 신기해서 그 먼 길을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걸망을 내려놓은 채 대중들을 모아놓고 그 얘기부터 하더라는 거죠.
그 저 성철스님 법문 테잎을 들으면은 그 얘기가 나옵니다.
내가 조금 이제 변형시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이제 그렇게 알고 있어서 그 얘기를 가끔해요.
그렇습니다

여기에도 기봉왕선불능손飢逢王饍不能飡이라 병우의왕쟁득차病遇醫王爭得差 아 배고프면 무슨 왕의 음식 아니라 왕보다 더한 음식이라도 먹어야죠. 아 내놓는데 그걸 안먹어요? 당연히 먹어야 할 음식입니다.
그래야 이제 병이 들었을 때 명의를 만나서 치료도 받을 수가 있는 거죠.

명의名醫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을 뜻하는 것입니다. 병病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들의 번뇌병煩惱病 망상병妄想病 중생衆生들의 온갖 탐진치貪瞋痴 삼독 三毒의 병病 이런 것이죠

영가스님 같이 이렇게 참 확철대오擴撤大悟 하셔서 당신이 깨달은 바를 종역통宗亦通 설역통說亦通 그 표현에도 아무 걸림이 없이 아주 시원시원하게 당당하게 이렇게 하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왕의 음식과 같은 것이고 명의의 처방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그런 뜻이 담겨 있죠

在欲行禪은 知見力이니 火中生蓮終不壞로다
재욕행선 지견력 화중생련종불괴

욕심의 상태에 있으면서 선禪을 행하는 것은 지견知見의 힘이다 그래서 비유컨대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아서 그 연꽃은 마침내 파괴되지 않는다 이랬습니다.
이거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우리가 견성見性을 한다 도통道通을 한다 성불成佛을 한다. 또 수행修行을 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그 본능과 인간이 갖고 있는 온갖 탐진치 내지 팔만 사천 번뇌를 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고 선禪을 하는 것이고 우리가 경전을 이렇게 듣는 것이고 경전을 설하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다 사라지고 나서 그 감정이 깨끗한 그 감정이 목석처럼 된 뒤에사 비로소 그렇게 이제 설하는 것이 아니죠.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무슨 뭐 인간의 본능이라든지 보통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그런 모순이나 욕심이나 감정이나 이런 것이 뭐 하나도 없으려니 그렇게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이죠. 그것이 당연히 또 있어야 되는 것이고요.
보통사람의 그런 모순과 부조리를 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거기서 이제 뭔가 지혜의 눈을 뜨고 살 줄 아는 거 이게 바람직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그런 것을 불교에서는 하나로 표현할 때 연꽃을 가지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연꽃이 불교의 어떤 그 이상을 제일 잘 표현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연꽃은 어떻습니까 진흙에서 피죠 진흙이 아니면 연꽃이 필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진흙을 근거로 해서 진흙에다 뿌리를 내리고 핀다는 거죠 진흙이 뭡니까 욕심 내지 온갖 탐진치 삼독과 팔만사천 번뇌의 진흙이지요.
거기에서 지견의 어떤 그 힘을 키워내는 것 이것이 이제 불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욕행선在欲行禪은 지견력知見力이다 욕심에 있으면서 선을 행하는 것은 지견의 힘이다. 그게 지견이다 그게 지혜다 지견이라는 것은 지혜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지혜다 이거예요
목석이 성불하는 건 없죠.
그야말로 욕심도 많고 번뇌도 많고 열정도 많고 용기도 있고 패기도 있고 그런 사람이 공부를 훨씬 더 잘하지요.
착찹하고, 너무 이제 뭔가 그런 것이 적은 사람은 오히려 공부를 하기가 힙듭니다.

뭐 소설이긴 하지마는 수호지에 노지심이라고 하는 스님이 나오지요. 그 노지심이 얼마나 악행을 많이 저지르고 얼마나우락부락하고 술은 얼마나 많이 먹으며 또 사람은 얼마나 많이 죽입니까
아무도 당할 사람 없는 그런 그 스님이지요.
그런데 결국 이제 한 생각 탁 돌이켜 가지고 저기 저 항주의 육화사죠. 육화탑이 있는 그 육화사 거기에서 이제 강의 조수 소리를 떡 들으면서 한 생각 탁 돌이키죠.

비로소 이제 깨달음을 성취해서 결국 거기서 열반에 들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참 불교를 잘 아는 사람의 표현이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렇죠 그게
재욕행선지견력在欲行禪知見力이죠 화중생련火中生蓮이죠.
불속에서 연꽃이 핀 거와 같아가지고 이거는 뭐 무너지지가 않습니다. 아 이거 참 표현이 아주 대단해요.

유명한 노파소암老婆燒庵이라고 해서 염송拈頌의 제일 마지막 공안公案에 그런 게 있죠
옛날에 어떤 노파가 어떤 한 암주를 암자에다 스님을 20년동안 모셔놓고 공양을 이제 해드렸죠.
그래 늘 어여쁜 딸이 밥을 가지고 가서 늘 시봉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이제 어머니가 딸보고 이제 그걸 시키죠.
오늘은 니가 가서 그렇게 이제 공양 차려 드리고 모든 그 시중 다 들고 나서 스님을 스님에게 꼬옥 안겨가지고 정말 운우의 정을 나누는 같이 하면서 스님 이럴 때 어떻습니까 하고 한 번 물어보아라. 그렇게 이제 어머니가 시켰어요.
그러니까 이 딸이 가 가지고 그대로 했어요.

그러니까 그 암주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마른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三冬에 따사로운 기온이 하나도 없다. 삼동에 따순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 마른 나무에다가 찬 바위에다가 또 삼동에다가 그리고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했습니다 수행이 상당히 됐죠 이정도면은.

정말 이렇게 돼야 되는데 하는 생각을 우리가 살다보면은 많이 합니다. 제발 좀 어떤 인간적인 그런 그 번뇌라든지 욕심이라든지 무슨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으면 싶은 그럼 참 편하겠다 싶은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죠 이 스님이 거의 그런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갖다가 딸이 내려가서 어머니에게 고대로 전했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20년동안 겨우 속하를 갖다가 공양시켰구나 이거 속인보다 못한 놈을 갖다가 내가 공양시켰구나 하면서 그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지고 뛰어 올라가 가지고 암자를 불 질러 버리고 그 스님을 쫓아냈다 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노파소암이라고 해서 아주 알아주는 이야기입니다.

이거 뭐 실지로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염송에다 실어놓은 거죠 거기다 이제 어떤 스님이 평을 하기를 승려는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을 이제 갖춰야 된다 그러죠 행동이 아주 조신해야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삼천조항의 법규를 다 뒤져봐도 정황과 어떤 죄를 판단할 길이 없다 이 스님은 뭐 삼천위의 아니라 팔만세행을 가지고 다 따져봐도 하나도 법에 저촉 되는게 없더라 이거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참 노파에게 능지처참을 당했는가 그래서 하는 말이 그거예요
오직 능지처참 할 일이 아니라면은 관리를 보내어 조사하지 않는다. 이제 그렇게 표현을 했어요.

참 멋진 표현인데 관리를 보내가지고 조사를 했죠 딸을 보내가지고 이게 도대체 중이 공부를 제대로 하는가 못하는가 이렇게 살펴본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관리를 보내서 조사 했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그 능지처참할 정도의 그 죄라는 겁니다.
이건 뭐 삼천위의나 보통 시시한 세상 형법이나 이런 거 가지고 따질 그런 정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데에 대해서는 하등의 잘못이 없는 분이죠 그런데 능지처참을 당해야하는 그 어떤 큰 죄를 짓고 있다 이렇게 이제 (계?)암스님이란 분이 그렇게 이제 표현을 했는데 아주 재밌는 표현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이야기도 바로 그 뭡니까
재욕행선지견력在欲行禪知見力이니 화중생련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라 라는 것하고 아주와 상통하지요.

불교에는 워낙 그 역사도 깊으려니와 또 그 공부를 독하게 해야하는 것이 또 불교의 일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공부를 지독하게 한 분들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그 안목이랄까 그 깨달음이 정말 남다르고 그래서 그 표현이라 할까 그 지혜가 정말 뛰어납니다.

그래서 이제 불교의 가르침을 정말 아무리 뜯어봐도 참으로 보물이고 보물 중에 보물이라고 할만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무슨 소설가가 아니면 시인이 무슨 머리 좀 짜내갖고 써낸 그런 그 경전이나 어록이 아니거든요. 이거는

정말 인간으로서 기울일 수 있는 온갖 정성과 노력과 정진을 기울여가지고 거기서 또 크게 깨달음을 이뤘을 때만이 이러한 그 가르침이 나오는 것입니다. 뭐 고행하고 정진하고 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하죠 그러나 고행하고 정진하고 노력을 했어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은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만장경에 올라있는 그런 그 경전이나 어록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가르침이 아니예요.

이건 뭐 불자가 돼서 승려가 돼서 자꾸 아전인수격으로 자꾸 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의 가르침이 아주 위대하다고 자꾸 그냥 지꺼라고 자꾸 추켜세우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어떻게 해서 그 한마디가 나올 수 있었는가 그 내력을 더듬어 보면 이게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거죠

뭐 소설가나 시인이 그 머리 짜내가지고 머리 좀 총명하다고 그렇게 이제 기록하고 적어놓은 그런 그 내용하고는 전혀 이제 그 연원이 벌써 다르다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좀 아시고 좀 마음을 담아서 공부를 하시면 더욱 소득이 크다는 거죠

勇施는 犯重悟無生하니 早時成佛于今在로다
용시 범중오무생 조시성불우금재
이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용시비구라는 하는 이가 과거에 있었는데 아주 옛날 아주 오랜 세월 전이라고 그렇게 됐습니다. 중향세계衆香世界 무구정광여래無垢淨光如來라고 하는 분이 계실 땐데 그때에 용시비구라고 하는 수행자가 있었는데 인물이 워낙 잘나가지고 뭐 사모하는 여자들이 많았다고 그래요.

아주 특이한 이야기들은 불교에서 보면은 대개 여자가 이제 금기하는 사항 중에 제 1조인 여자가 의례히 등장을 하게 되고 그렇죠. 아난존자 같은 이가 연환이 있어가지고 능엄경 같은 위대한 경전이 탄생했고 역시 이제 용시비구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음행도 범하고 살인까지 이제 범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랬음에도 그게 이제 어떻습니까 바로 재욕행선在欲行禪이죠 그런데 거기서 이제 그런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과 번뇌 망상으로써는 그렇게 이제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범했으나 결국은 이제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을 듣고는
깨달음을 이뤄가지고서 비로소 그야말로 불견일법즉여래不見一法卽如來 요즉업장본래공了卽業障本來空 깨닫고 나면 업장도 본래 공하고 우리의 그 자성자리에서는 일체 죄니 복이니 하는 거 이런 그 차별상이 도대체 있을 수 없다는 그 자성을 확철대오 해 가지고 그야말로 부처가 됐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부처 이름이 보월여래寶月如來라 라고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용시비구가 중죄를 범해가지고 무생도리無生道理를 깨달았다.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았다. 생멸이 없는 도리를 깨달았다 그랬습니다.
중죄를 그렇게 큰 중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이제 망상과 번뇌와 탐진치 삼독의 결과죠 그런 것의 결과로서 중죄를 범하게 됐는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생멸이 없는 도리를 크게 깨달아가지고 자성자리는 생멸이 없으니까요 자성을 바로 봤다는 뜻이죠. 그래가지고서 이제 벌써 성불을 해가지고서 지금까지 그 아름다운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과거에 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그 허물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그 열정 그게 또 성불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정진을 아주 독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밑거름이 또 된 것이죠.

이런 사례를 들어가면서 뭐 영가스님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지만은 또 이제 그런 사례를 이렇게 들어가면서 보통 그 번뇌 많은 인간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 번뇌야말로 정말 크게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밑거름이 된다 이런 표현이죠.
참 아주 아 이 증도가 이거 제가 어릴 때 이거 배우면서 외우고 도량석도 이걸 가지고 하고 했습니다마는 나이가 들고 또 이제 연륜이 쌓일수록 그 맛과 그 느낌이 또 전혀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자꾸 읽고 또 쓰고요 또 이제 새겨보고 스스로 또 깊이 생각해 보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 속에 담겨 있는 그 깊은 뜻이 우리 마음에 더 많이 닿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證道歌 제22강
證道歌- 제22강 (獅子吼 無畏說~終) 2006년 3월 29일

반갑습니다. 오늘 3월 29일. 음력으로는 벌써 3월 초하루가 되었습니다.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증도가도 이제 끝날 무렵이 됐는데, 뭐 중요한 내용은 이미 다 나왔습니다.
영가스님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당신이 공부해온 것이 적지가 않았습니다만, 크게 깨달음을 이루고 보니 또 과거에 공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 그래서 당신의 그 깨달음의 내용을 여한 없이 설파를 했고, 이 내용은 누가 와서 질문 하더라도, 또 누구 앞에서라도 참으로 자신 있고 당당한 그런 표현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이여 深嗟懵憧頑皮靼(심차몽동완피달)이로다.
이런 표현들이 어떤 그 영가스님의 기개가 상당히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가 있지요.
도인스님들도 보며는, 자신의 그 성격이 다소 반영이 되는 것 같아요
깨달음의 경지는 설사 다르지 않다고 손치더라도, 각자가 타고난 독특한 개성이라고나 할까? 성격이라고나 할까? 이런 것들은 그 법문을 가만히 들어보며 는, 상당히 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희들 강원에서 많이 공부하는 뭐 선의 지침서라고 하는 그런 내용 중의 하나로서 禪要(선요)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선요의 주인공 高峰(고봉)스님은 보면 은 아주, 그야말로 이름대로 높은 봉우리이면서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위엄이 서리고, 또 정말 그 날카로운 칼날 같고, 칼날 같고 또 무서운 우뢰 소리와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반면에, 그의 제자 법을 이은 준봉스님이라고 하는 분은, 아주 온화하고 넉넉하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감싸주는, 그런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영가스님도 보며 는, 앞에서 공부했던 신심명의 표현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이런 표현들이 獅子吼(사자후)라고 하는 말이 몇 번 나왔는데, 정말 얼마나 그 동안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의 어떤 그 뭐라고 할까. 마음과 깨닫고 나서의 어떤 그 심정을 서로 비교해 봤을 때, 자신의 그 어떤 깨달음의 그 심정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獅子吼 라고 누구에게도 두렵지 않다. 이런 표현을 했어요.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 그리고 懵憧(몽동).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마치 頑皮靼(완피달)과 같은 그런 이들을 깊이 슬퍼한다. 그랬어요.
완피달 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한 말인데, 다루지 아니한 가죽 靼(달)자입니다. 이것이...

완악한 가죽 이러는데, 그 가죽을 벗겨서 그것을 가공을 잘해야만 그것이 부드러운 가죽이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대로 말려버리면, 이게 어떤 동물의 가죽이라도 아주 굳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철보다도 더 굳어요. 그렇게 굳고 어떻게 사람이 다룰 수가 없고, 쓸모도 없는 그런 가죽이 돼버리지요. 그러니까 굳기 전에 약품처리를 해서 가공을 해야만, 그것이 부드럽고 쓸 수 있는 건데 이 완피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루지 아니한 가죽. 가공하지 않은 가죽 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굳고 강하고 어찌할 수 없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그런 상태다.
그래 당신이 이렇게 정말 귀가 번쩍 뜨이고, 눈에 불이 버쩍 나는 이런 기가 막힌 그런 이치를 설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뭐 미동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슬퍼한다.’ 그랬습니다.

只知犯重障菩提(지지범중장보리)하고 不見如來開秘訣(불견여래개비결)이로다.
다만 중죄를 범하며 는, 菩提(보리)에 障碍(장애)가 된다는 사실만 알고, 여래가 열어놓은 그 비결을 보지 못했더라.
그래요. 그 뒤에 이제 또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는, 앞에서 용시 비구의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뜻으로는 사실 반복되고 있어요.

그 여래의 비결이라는 것이 뭐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공부해온 것입니다.
不見一法卽如來(불견일법즉여래)다. 그랬지요?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自性(자성)자리에서 보면 그 어떤 것도 그 속에 존재할 수 없다.이것이지요.
어떤 죄도 법도 부처도 중생도 존재할 수 없는 것.
心外無差別法(심외무차별법) 이라는 것이지요. 마음 밖에는 차별된 법이 하나도 없다. 一心(일심)의 법칙이지요.

그래 無罪福無損益(무죄복무손익)-10 이라고 그랬지요? 죄이니 복이니 하는 것도 없고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것도 없다.
바로 그 한마음자리라고 이해하면 제일 쉽습니다. 그것이 비결이지요.
그런데 또 그 어떤 방편의 입장에서 보면, 별 별 이야기가 많지요. 중죄를 범하거나 뭐 不通懺悔(불통참회)니 어쩌니 그런 이야기들이 많고, 도대체 깨달음과는 뭐 거리가 멀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밑에 보면,

有二比丘犯淫殺(유이비구범음살) 두 비구가 있어서, 한 사람은 음행을 범하고 한 사람은 살인을 범했어요.
그랬는데 수행을 잘하다가 그런 어떤 그 큰 죄를 범했어요. 저 앞에서 용시 비구는 혼자서 두 가지 죄를 범했고, 여기서는 두 비구가 한 가지씩 그렇게 범하게 됐다는 이야기인데, 토굴에서 둘이서 공부를 하다가 한 사람이 탁발을 하러 나갔었어요.

그런데 낮에 한 남아있는 비구가 낮잠이 들어서, 앉아서 좌선 하다 낮잠이 들어서 잠깐 누워서 자고 있는 사이에, 초녀 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하는 여자가, 마침 그 허름한 남자 곁을 왔다가 누워서 자는 비구를 보고는 그만 음심이 발동해서, 이 나무하는 여자가스님을 강간을 했다는 것입니다.

뭐 이상하게 들릴는지는 모르지만, 인도 사회에서의 어떤 풍경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그 뭐 초막이라는 것이, 집이라는 것이 무슨 벽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저 하늘만 가릴 정도의 그런 토굴인데,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한 그런 일이지요.

그래서 그 여자한테 이 비구가 당하고 나니까 낙심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도 뭐 잠결에 그렇게 자의로 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당하고 나니까 낙심을 하고, 평생 공부가 이게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반 비구가 탁발을 해서 돌아왔어요.
그래서 왜 그렇게 있느냐고 하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상황이 그렇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탁발하고 온 비구가 그만 화가 나가지고,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를 나가서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저 쪽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화가 나가지고 그 여자를 좇아가서, 그냥 엉겁결에 쫓아간 것이지요. 그래서 보복을 하려고 쫓아가니까 그 여자는 상황이 다급한 줄을 알고, 도망을 가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엉겁결에 죽었고, 또 음행을 한 비구도 그렇게 엉겁결에 음행을 하게 되었고,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우리가 수행자로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우바리존자! 지계제일 우바리존자에게 찾아가서 참회를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지계제일 우바리. 율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不通懺悔(불통참회)라. 참회가 통 할 수 없는 그런, 큰 죄라고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비구 250계의 조항으로 따지자면, 제일 큰 죄를 범했지요.

그러니까 이건 도저히 참회가 될 수 없다. 해가지고 물리쳐버렸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뉘우치고서 새로운 수행을 시작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갔다가 이렇게 배척을 당했으니까, 죄의 매듭만 더욱 증장시켜줬다. 增罪結(증죄결).
우바리존자의 그런 반딧불 같은 소견은 죄의 매듭만 증장시켜줬다. 그랬어요.

그리고나서 또 이 사람들이, 당시에 유마대사가 유명하니까 혹 유마대사에게는 뭔가 특별한 그런 가르침이 있지 않을까? 우리 마지막으로 유마대사에게 가서 한번 들어보고, 자살을 하든지 무슨 환속을 하든지 하자. 이렇게 이제 이야기가 돼서 그래 유마대사를 찾아 갔더니,
죄성이 본래 공하다. 우리의 자성자리에는 그런 죄니 복이니 하는 것도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달마대사와 혜가 스님! 또 혜가 스님과 3조 승찬 스님의 대화 속에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지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죄를 가져 와 봐라.”
“죄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 그와 같이 죄라고 하는 것이 본래 성품이 본
래 공한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마음의 자리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그래서 心生卽從從法牲(심생즉종종법생)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생김으로 해서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 법이 멸한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여래의 비결이지요. 여래가 열어놓은 비결이다. 다른 것이 아니지요. 마음의 원리가 곧 비결입니다
뭐 특별한 무슨 알아듣지도 못할 그런 呪文(주문)도 아니고, 무슨 손으로 이상한 짓을 하는 그런 結印(결인)도 아니고요.
바로 마음의 실체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하며는, 그것보다 더 뛰어난 비결은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이 두 분들이, 두 분이 유마대사에게 가서 그런 그 법문을 듣고, 頓除疑(돈제의)라. 몰록 의심을 제거했다. 망상을 제거했다. 이거예요.
그리고는 還同赫日(환동혁일)이 消霜雪(소상설)이라 그랬어요. 마음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마치 그 뜨거운 태양! 밝은 태양이 서리나 눈을 녹이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시원 하게 그만 마음속에 그런 그 번뇌 망상과 죄업이라고 하는 것이 다 녹아져 버렸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은 하겠지요. 인정을 하고 참회를 하겠지요.
이렇게 罪性(죄성)이 本空(본공)한 이치를 알고 참회를 해야 그게 진짜 참회가 되는 것입니다.
천수경 수준만 해도 어떻습니까?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
心若滅時罪亦亡(심약멸시죄역망)
罪亡心滅兩俱空(죄망심멸양구공)
是則名爲眞懺悔(시칙명위진참회) 이렇게 했잖아요.
천수경 뭐 다 외우시지요? 그와 같습니다. 이 이치의 입장에서 보며는...

그런 가운데서 참회를 해야... 뭐 무릎이 닳도록 참회를 하고, 하루에 3천배 아니라, 3만배 3십만배 하면서 참회를 해야 그것이 진짜 참회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이치를 모르고서 참회를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그것은 큰 소득이 없습니다.
이치를 그렇게 알고 참회를 할 때, 진짜 참회가 된다는 것이지요.

참회하되 참회하는 것이 아니고, 참회할 없는 입장에서 참회하는 것. 그것을 理懺事懺(이참사참)이라 그래요.
초발심자경문에 理懺事懺으로 可以消除(가이소제)하라. 가이 녹여서 제하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마대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마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가스님께서 사례로 여기다 또 갖다 놨지요.
저 앞에 용시 비구 이야기하고 똑같은 경우인데, 갖다 놓았습니다.

不思議解脫力(부사의해탈력)이여 妙用恒沙也無解(묘용항사야무해)라.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뭐 끝도 없지요.
또 그런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말 기기 미묘 하고, 정말 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이고, 그렇습니다.
자성의 이치이지요. 마음의 이치이고, 자성 자리에서 보면, 不見一法(불견일법)이라. 한 법도 볼 수가 없는 것.

그것이 여래라고 했지 않습니까? 심법은. 마음의 법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解脫力(해탈력)이여 妙用恒沙也無極(묘용항사야무극)이라.
묘한 작용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아, 다함이 없다.

四事供養敢辭勞(사사공양감사로)아 萬兩黃金亦銷得(만량황금역소득)이라. 이러한 이치가 내 살림살이가 완전히 된, 영가스님의 입장이라면 四事供養을 감히 수고롭다고 사양할 것인가? 네 가지로 공양하게 되어있지요.

신도들은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는데 네 가지인데, 하나는 房舍(방사)내지 臥具(와구). 그리고 의복. 그 다음에 음식. 그리고 의약입니다. 방사 의복 음식 의약. 또는 방사와 와구를 같이 쳐서, 와구 의복 음식 의약. 이렇게 이제 그 약이 중요하고요. 음식이 중요하고 입는 것이 중요하고 거처할 방사나 이부자리가 중요하다. 그래서 네 가지이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수고롭다고 사양할 까닭이 뭐 있느냐 이겁니다.
萬兩黃金亦銷得(만량황금역소득)이라.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쓴다 하더라도 다 녹일 수 있다. 이겁니다.
그것이 신도들에게 받아써도 빚이 될 까닭이 없다. 이렇게 이치를 제대로 알고 수행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도 녹일 수 있다. 그랬어요.

그런데 반대로 이런 말도 있지요. 금생에미명심 하면 적수도 양안소라. 금생에 이 마음의 도리를 밝혀내지 못하면 설사한 방울의 물을 누구에게 얻어먹었다 하더라도, 그 한 방울 에 물 값에 대한 빚을 녹이기 어렵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참, 정말 이 불법을 꿰뚫어 아시는 그런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은 참 능소능대하지요.
정말 동두래동두타 서두래서두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가르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가르치고,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이제 다양한 그런 가르침. 팔만 사천의 그 가르침이 있게 된다. 다 맞는 이야기지요. 萬兩黃金(만량황금)또한 녹일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粉骨碎身(분골쇄신)하여도 未足酬(미족수)라 그랬어요. 이 네 가지 은혜. 그 네 가지 공양과 또 네 가지 은혜가 있지요? 恩惠(은혜). 은혜를 많이 입고 살지 않습니까?
이 은혜에 대한 것도, 공양을 받은 것이나, 또 은혜를 입은 것이나 이런 데에 대해서, 粉骨碎身 한다하더라도 사실은 깨닫지 못하면 족히 갚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적수 도 양안소라. 방울 물도 또한 녹이기 어렵다. 라고 한 표현하고 분골쇄신해도 또한 족히 갚지를 못한다 한 것하고 똑 같지요.
그 은혜를 치면, 출가인 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교인들이지요 뭐. 출가인 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은혜와 국가의 은혜와, 그 다음에 삼보의 은혜와 중생의 은혜. 이렇게 네 가지 은혜를 치지요.
이 네 가지 은혜와 네 가지 공양. 이런 것에 대한 그런 빚. 그 빚도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一句了然(일구요연)하면 超百億(초백억)이라 그랬습니다.
한 구절. 한 마디에 환히 깨달아 버릴 것 같으면, 지금까지 진 빚. 수행 하면서 진 빚. 얻어먹고 뭐 입고한 모든 빚의 백억 배를 초과하는 그런 은혜를 갚는 길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萬兩黃金(만량황금)도 亦銷得(역소득)이라. 하는 말과 一句了然하면 超百億이라. 백억 배를 초과한다.
지금까지 입은 은혜보다는, 백억 배나 훨씬 초과해서 갚을 수 있는 길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이거 뭐 백억 가지 법문이라고 해석한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안 맞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에 환하게 깨달을 것 같으면 은혜의, 그 자기가 진 빚의 백억 배를 초과해서도 갚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 그렇지요. 금강경에서 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정말 금강경의 이치 하나를 제대로 우리가 이해한다면,
항하강의 모래 수 만치 많은 그런 삼천대천세계에다가, 금은보화를 가득이 채워서 보시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 그런 말을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 도리는 제대로 우리가 이해를 하고, 제대로 깨닫기만 하면, 그 말씀이 정말 맞는 말 이예요.

예를 들어서 뭐 금정산의 수백만 배, 수천만 배의 그런 금은보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것이고, 이 도리는 무한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그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참 그거 하나가 우리 가슴에 와 닿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지요.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이여 恒沙如來同共證(항사여래동공증)이로다.
法中王最高勝이라. 법 가운데에도 왕이다. 이겁니다. 뭐 여러 가지 가르침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가스님이 지금까지 하신 그런 가르침! 뭐 길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不見一法卽(불견일법)이 卽如來(즉여래)-114 心外無物(심외무물). 마음 밖에 아무 물건이 없다.

일체차별법이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다. 하는 바로 이 도리. 이 도리야말로 법 가운데에도 왕이다. 그리고 가장 수승하다.
이 도리를,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여래들이 다 함께 증득했다. 그래요. 그럼 깨달았다라고 하며는 뭐 다 부처님이고, 깨달으신 분인데, 다 여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깨달았다라고 하며는 모두 이 이치를 깨달았다라는 것이지, 다른 이치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고 많은 깨달으신 여래들이 다 같이 이 도리를 깨달았다. 이 이야기지요.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하니 信受之者(신수지자)는 皆相應(개상응)이로다.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풀어 놨으니, 解 자 는 뭐 설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풀어놨다.” 이거예요. 그야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온 그 증도가의 내용은, 바로 영가스님이 갖고 있는 여의주를 풀어 놓고, 그 여의주를 우리는 마음껏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저 앞에는 旣能解此如意珠(기능해차여의주)-52 그런 말이 있었지요? 이미 능히 이 여의주를 풀어 놨으니... 이 解 자는 풀어 놨다라고 그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여러분들에게 다 풀어 놨어...
지금 우리는 몇 날 며칠을, 그 여의주를 수용했어요. 여의주를 사실은 다 가지고 있지요.

다 가지고 있지마는 어떻습니까? 이해를 못하면 그 가지고 있는지 어쩐지 모르지요.
예를 들어서 캄캄한 어두운 곳에 보물이 있는데, 등불이 없으며는 볼 수가 없지요. 뭐 후레시를 가지고 비추어야 그것이 보물인지 뭔지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요?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 이 불법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누가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깨달은 사람이 제대로 설명해주는, 영가스님 같이 이렇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면, 아무리 설사 개인적으로 지혜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스승이 중요한 것이고, 또 스승도 이치를 제대로 깨달으신 분인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하고, 불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제대로 알고 설명을 하는가? 그렇지 못 하는가 하는 것. 이거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보물이 있는데 등불이 없으며는 그 보물인지 아닌지 모르듯이, 이런 훌륭한 이치를, 다시 말해서 우리들 가슴속에 다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데, 여의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누가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지혜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내가 지금 여의주를 다 풀어 놨다.” 그건 당신의 여의주를 풀어놓았고, 따라서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그 여의주를 말하자면, 영가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 우리가 이해하게도 되었지요.

그래서 그 여의주를 영가스님이 쓰시듯이, 우리도 우리 여의주를 마음대로 끌러서 활용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信受之者(신수지자)는 皆相應(개상응)하리라.
믿고 받아 가지는 사람은 다 상응할 것이다. 다 거기에 맞아 떨어질 것이다. 다 계합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了了見無一物(요요견무일물)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이라.
또 최후라고 해도 좋을 그 단계가 되었는데, 우리 일심자리에서 보며 는, 차별된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밝게 보고 밝게 보아 한 물건도 없으니, 환하게 꿰뚫어 본다 이겁니다. 실상을 꿰뚫어 보며 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이라.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어... 사람이니 부처니 하는 것은 우리가 편의상, 설명하기 위해서 지어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지 전부 환상이지요.
그리고 그림자이고요.
꿈속에서 무언가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나타나 보일 뿐입니다.

了了見無一物(요요견무일물)이라. 아무리 밝게밝게 살펴보아도 한 물건도 없음이여.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더라.
그러며는 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계는 뭐냐?
이 三天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 大千世界(대천세계)도 海中浮(해중부)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라.

물거품은 물에 잠깐 떠 있는 것이지요. 물의 변화에 의해서 잠깐 떠 있다가, 그냥 바로 물이 돼버리지요.
거품이라는 존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냥 꺼져 버리면 바로 물입니다.

一切聖賢 如電拂(일체성현여전불)이라. 그럼 그 가운데서 뭐 부처님이니 누구니 하는 수많은 깨달으신 모든 성현들! 그거는 번갯불이 번쩍하는 것이다 이겁니다. 번갯불!
아! 참! 대단한 표현입니다.
영가스님은 최소한도 이쯤의 안목이 됐다는 것입니다.

假使鐵輪(가사철륜)이 頂上旋(정상선)이라도 定慧圓明終不失(정혜원명종불실)이로다.
가령 무쇠바퀴가, 무쇠바퀴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제 좀 더 강하게 표현하면요?

머리를 부수고 지나간다. 내 몸이 산산조각이 된다하더라도, 가령 쇠바퀴가 내 머리위를 지나가서 나는 산산조각이 난다하더라도, 내가 깨달은 定(정)과 慧(혜)는 圓明(원명)해서 마침내 잃어지지 않는다. 몸뚱이 하고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그 뜻 이예요.

영가스님의 이 자신이 넘치고, 또 완전히 진리를 사무쳐서 보신 이런 분의 그런 아주 당당한 그런 가르침이고, 얼마나 아주 패기 넘치고, 기백이 넘치는 말씀입니까?
큰 그 쇠로 된 바퀴가, 머리 위를 지나가면서 골이 부숴 져서 뭐 산산조각이 설사 난다하더라도, 내가 증득한 정과 혜는 뚜렷이 밝아서 결코 잃지를 않는다.

日可冷月可熱(일가랭월가열)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중마불능괴진설)이라.
이런 진리에 합당한. 바로 진리의 말씀! 사자후의 말씀!
이것은 설사 그렇게 될 리는 없지마는, 해가 차갑게 되고 달이 뜨겁게 되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그런 어떤 세상이 온다하더라도, 뭇 마구니는 능히 이 진실을 眞說! 이 참 설법을, 진리의 설법을 능히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하! 이고!! 이렇게 자신 있는 말을 해야지요. 그만치 자신감이 넘치니까 자신 있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뭐, 거짓말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若將妄語誑衆生(약장망어광중생)인댄 自招拔舌塵沙劫(자초발설진사겁)이라-7 그런 말씀하셨지요?
만약에 거짓말을 가지고 중생들을 속일진댄, 나는 발설지옥에 가서 진사겁을 지내는 그런 과보를 내 스스로 받을 것이다. 그랬어요.
정말 자기의 생애를 다 바쳐서 큰 깨달음을 얻어 내었고, 그 깨달음에 의한 이런 당당한 설법! 참! 대단하고, 볼수록 아주 참 깊이가 있고, 감동적이고 그렇지요.

이런 것을 우리가 자꾸 공부를 해서, 마음에 이렇게 깊이 젖어 들며는, 더욱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象駕嶸漫進途(상가쟁영만진도)에 誰螳螂(수당랑)이 能拒轍(능거철)가.
코끼리로 수레를 해서 아주 위풍당당하게 끌고 가는데, 길에 뽐내면서 간다. 漫進途 라고 하는 아주 잘 난 듯이 뽐내면서 길에 나아가는데,
誰螳螂이 能拒轍가 어떤 당랑이가 능히 그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데는 誰見螳螂能拒轍가 해서 見(견)자가 들어있는 책도 있는데, 見자가 필요 없습니다.

어떤 당랑이가 능히 拒轍할 것인가? 수레바퀴를 막을 것인가? 당랑이라고 하는 그 벌레 있잖아요?
그것이 쇠똥이나 말 똥 속에서 나오는 조그마한, 개미보다 조금 큰 그런 벌레인데, 그것이 수레가 이렇게 지나가며는, 감히 그 수레바퀴를 막는다는 거예요.
막아봤자 거기에 뭐 조그마한 그런 벌레에 불과한데, 수레바퀴에 깔려 가지고 뭐 흔적이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아주 이 당당하고, 진리의 말씀! 眞說(진설)이라고 그랬지요?
진리의 말씀에 그 어떤 그런 그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 또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 또 아주 그 불교 안에서 아주 소소한 방편 설에 떨어져 있는 그런 소견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리 나의 주장과 나의 설법을 막으려고 한들, 또 반대의견으로 나온들 그게 어떻게 거부당할 수가 있겠는가?

도저히 이것은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 내가 이런 소리한데 대해서 구구하게 말이 많은 모양인데, 나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螳螂拒轍같은 것이다. 그까짓 벌레가 뭐 수레바퀴를 막아본들 어떻게 지가 당할 것이냐? 이런 아주 자신감 넘치는 말씀입니다.

莫將管見謗蒼蒼(막장관견방창창)하라 未了吾今爲君決(미요오금위군결)이로다. 관견을 가져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管見 이라고 하는 것은 대쪽같은 소견. 그러지요?
대를 이렇게 잘라 가지고, 대구멍 으로 하늘을 보며는 하늘이 조그맣게 보이지요. 대구멍 크기만치만 보입니다.
그 넓은 하늘이 대구멍 만치만 보이니까, 그렇게 소견이 좁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넓고, 정말 세상 넓은 것 보다 우리 마음은 더 넓은데, 그런 그 대쪽같은 소견으로 나의 이 진리의 가르침을 아주 蒼蒼히. 심하게 비방한다 이 말입니다.
비방하는 것을 아주 심하게 비방할 때, 이렇게 蒼蒼히 비방한다. 그러지요. 아주 심하게 이렇게 비방하지 마라.

해봤자 되도 않는 소리다. 그래 너희들이 모르고 그렇게 하니까, 未了에 吾今爲君決이라. 그대들이 모르니까 내가 지금 그대들을 위해서 풀어 주노라. 決자도 풀어줄 결자. 풀어 주노라. 다 해결해 주노라. 전부 해결해 주노라.
전부 뭐 어떤 그 문제가 있더라도 이치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전부 내가 이속에서 다 이야기 했고요, 사실은... 또 설사 미진한 의문이 있다면, 내가 다 풀어준다.

지금까지 증도가로서 그렇게 다 당신이, 모든 존재의 이치에 대해서, 진정한 불법에 대해서,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의 중도적 원리에 대해서 이렇게 내가 다 남김없이 설파했고, 그것은 모르는 그대들을 위해서 가르쳐준. 그런 해결해 준 그런 길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증도가 까지 오늘 이렇게 다 마쳤습니다.

참 중요한 내용이고, 이건 뭐 평생공부를 증도가 를 가지고해도 결코 손해 볼 일이 아니고, 뭐 신심명도 역시 그렇습니다마는, 이번에 또 여러 염화실 법우님들 덕택에, 또 이 증도가 공부를 이렇게 한 번 더 하면서 살펴보니까, 아주 그 증도가의 깊이와 높이가 그 전에 알고 있던 것하고 또 다르네요.
아무리 공부해도 더 할 것이 있는 것이, 바로 이 도리가 아닌가? 감동이 옛날보다는 훨씬 더한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염화실 법우님들 덕택이고요. 여러분들 도 이러한 인연으로 정말 부처님과의 그 인연이 되었는데, 이 세상에 그 어떤 보다도 소중한 인연이지요.
그 인연이 되었을 때, 정말 바른 소견을 얻어서, 인생을 좀더 바른 소견으로 유익하고 보람되게 살아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마음뿐입니다.

전번에 예고 해드린 대로요. 내일부터는 大乘讚(대승찬)!
자료실에 있는 대승찬을 가지고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대승찬을 준비해서 공부하도록 그렇게 하십시다. 이상입니다.





























불기 2555년 음력 이월 십일
지 담 홍 창 현
전화번호 : 010-4034-7717

출처 : 물빛 水牛
글쓴이 : 無水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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