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실(이 글은 순수 창작품임)

공에 찢어진 눈이 콩이다

narrae 2012. 5. 9. 01:06

주역(周易)은 만상(萬象)의 근본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즉 건곤(乾坤)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少男 少女로서

먼저 원소 1 주기율의 다음인 원소 2 주기율인 少女와

원소 6 주기율 다음의 7 주기율인 少男이 

양쪽 대칭적 외벽으로 해서 합하여 乾인 老陽이 됨과

中女 3 주기율과 中男 6 주기율이 합하여 老陽이 됨이요

長男 4 주기율과 長女 5 주기율이 합하여 老陽이 됨을 주지해 할 필요가 있다

이 것이 곧 합하여 원소 1 주기율로 돌아감과 같은데

이 때 陰인 곤지(坤地)는 乾의 陽만큼이나 陰인 것으로 電子로 살을 이룬 듯 돈다

이 것은 곧 양성자의 양(量)과 전자의 量이 비례하는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그 사이 이온性을 낳는 것이

건괘상(乾卦象)의 三陽에 陰이 띤 효(爻)의 기능으로 성질을 이룸과 같다고 봐야 함이다

이 것이 일함수를 내는 기밀이지만

실제 이온을 두 개는 빼도 세 개를 뺄 때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고 

爻만 바뀌는 것이 아닌 卦가 바뀌기 때문에

다른 인식적 시각을 갖지 않으면 잡기 힘들다고 봐야할 것이다

허허! 보면 볼 수록 신통방통 점입가경일세

기왕이면 여기에 젓가락질 잘 하면 세계적 특허가 될려나

 

 

*일함수(Work Function): 물질에서 전자 하나를 빼내는 데 필요한 최소 에너지.

 

 

風의 내장으로 먹고 사는 쓸개

 

우리가 대기권의 오선지같은 층을 하나의 음악이라고 할 때 

이를 하나같이 펼칠 수 있음은 

인체학적 측면에도 쓸개의 역할로 봄이다 

최소한 인간이 태어날 때

원소 5 주기율을 내장해야 할 때는

대기권의 다섯 층을 그대로 쓸개에 붙여놓고 

자기장의 모든 변화에 적응하도록 되어 있음과 같다 보는 것이다

 

 

창(窓)이 없으면 비가 없어도

 

창이 없으니 비가 없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온다는 소식이 저 먼 꿈치에 있다

허리 띠가 없다

덕장엔 명태가 제 가죽을 남긴다 

명으로 태어나면 태가 옷 한 벌

황으로 태어나도 옷 한 벌

뻘가죽같은 망둥이같았던 세월

숲에도 고릴라가 복령처럼 났다

 

 

원소 3 주기율과 4 주기율 간의 허물

 

보통 소리의 차원 

찢어지는 차원을 震雷라고 하는데

여기서 방향성을 갖춤을 의미하고

긴 타원형이든 둥근 원형이든 

하나의 형태로 함은 離火라고 하는 것으로

그래서 뱀은 다리가 없기에 원소 3주기율인 火로 한다

즉 원소 3 주기율은 뱀처럼 길죽한 띠같은 타원형이어도 火로 함이요 

여기서 한 쪽이 찢어지며 터지는 것이 원소 4 주기율이요 

또한 용이 다리가 난 것과 같기에 이를 방향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주기율 간의 승화력

 

우리가 金을 생각의 힘이라고 할 때

분명 원소 4 주기율인 木은 꺾을 수 있다

허나 이 원소 3 주기율인 火局에서는 

스스로 모양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

그래서 이 3 주기율의 종자는

썩어도 준치라 이무기라고 하는 것인데

매우 강한 용광로같은 열성으로

꺼져가는 불씨처럼 묻힌 듯 해도

화로의 알불처럼 또아리를 틀고 인고할 줄 안다

그러니 봄날이면 순이 돋듯

속에서의 불도 팔다리를 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용으로 마음대로 化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용이 불을 내뿜는 것이 아니라

불이 용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용이 잘나 이무기가 아니라 

이무기가 잘나 용이 된다는 것이다

허나 최소한 몸을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으려면

쇠가 녹은 듯 

원소 2 주기율의 차원의 몸을 갖춘 도력이어야 하는 것이다

 

 

卦象의 거부 반응 없는 동질성의 접착력

 

우리가 나무를 접목 시킬 수 있음은

이 대기권이 손풍(巽風) 木에 해당 되기에

風에서 이동이 가능함과 같은 것이라고 할 때

불이 불로서 接火가 됨은 원소 3 주기율이요

金이 金으로서 接金이 됨은 원소 2 주기율이 된다

고로 나무는 물에서 生을 받으니 수경(水耕) 제배가 되는 것이요

이미 꽃은 나무에 목경(木耕) 제배가 된 것이며

열매는 이미 꽃가루에서 불거져 나오니 토경(土耕) 제배라고 봐야 할 것이니

 

 

인과의 바탕성

 

易上 震雷는 長男이요

손풍(巽風)은 長女라 함인데

이 것은 건곤(乾坤)의 지류(枝流)이다

즉 씨앗이 기둥이라면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씨앗 자체도 震이나 巽에 해당된다

그러니 자식을 가진 자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그 宮 자체가 일생이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장남이면 이 것은 일생의 것이요

나의 장남은 長年에 해당하는 것이니

전자는 씨앗인 것이요

후자는 가지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람이 말 한 마디 소리 하나하나 덕을 베푼 자는

장남이나 장녀 쪽에 그 덕망이 숨겨져 내려 줄 수 있음인데

자손에 미치지 않더라도

자신이 태어날 때 장녀나 장남  쪽으로 복을 받든가

아무리 박복하게 태어나더라도 장년에는 피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질은

그 후손들이 목소리 좋은 성악가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

또한 가장 악질적 죄인 것

즉 음식이나 공기같은 것이 직접적으로 추달이 될 수 없음을 악용해

많은 사람의 생명에 크나 큰 영향을 주었다면

대개권의 최대 농축이 원소 5 주기율 상으로 색과 맛이 드러남에

그 것이 최대의 원소적 순도라고 해도

그 속에도 이러한 혼탁이 겹쳐저 있음으로서 어대든 간다

이는 큰 자식의 인과에도 대물림이 크며 

자신에게는 肝係나 四肢에 불구로 환생할 수 있음이다 

 

 

공에 찢어진 눈이 콩이다

 

공에 찢어진 눈이 콩이다

부처님의 하루 식사량이 콩 한 알

그래도 空思想에 알맹이랍시고

눈까지 심어진 뜻이라고 복되어 있다

이런 부처이니

종일 굶는다고 미동이나 할 것이든가

공이라는 것

콩 알 하나 채우듯 맞춤같이 입는 것

콩에는 공의 옷이 있다

부처가 냉혹하다기보다 엄연함이다

 

 

콩팥이라는 것에는

 

원자 번호 1 수소

마치 현(絃)을 한 번 튀긴 듯 콩! 한 할

팥은 밭 이랑 낸 듯 핼륨의 땅

아! 기타 소리 딩동댕이여!

기타통 큰 배의 구멍 ㅇ에 코가 박혀 콩!

세 개의 현(絃)인 팥

기타가 귀같이 허공을 알아 감응하는 듯

기타의 머리는 간뇌(間腦)만 같았던 것

조율의 손을 감싼 대뇌(大腦)

아! 단단히 손등처럼 싸안은 두개골(頭蓋骨)

탄력 좋고

탄력 좋고

콩은 머리로 돌돌 말은 듯

그 놈 에미 힘들게 머리 꽤나 크게 나왔네

 

 

형산강(兄山江)

 

형산(兄山)에 마주한 제산(弟山)이 있다

형산 겨드랑이 아래에서 점 하나 찍고

가로지른 강이 丹이 된 형산강이 있다

또한 마주하여

제산 겨드랑이에 丹이 박히니

母의 점  하나엔 포항 공대가 있다

丹이 마주한 丹의 母여!

자명컨데 효자(孝子)를 끼고 사는구나

 

 

양파의 노래

 

영일(迎日)이니 또한 보낼 것이나

또한 연일(連日)이면 잉태도 해보는 것이나 

보내기 아쉬워 연일(延日)이여!

차라리 무지개 띠가 무너진 듯

산이 없는 트임새에 따라드는 어귀라고 이어 받았는가

그로서야 천 년을 해로 보내도

바위의 미소는 그 해일 뿐임을 알게 하는 것이든가

 

 

 

대범이란 무엇인가

 

대볌이란 무엇인가

이 것을 알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사주를 볼 필요가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무인(武人)이지만

사주의 내적 강도(剛度)는 매우 상이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서

한국의 박정희와 대만의 장개석을 들 수 있다

장개석 사주는 용광로에 쇠를 녹이는 사주이니

몹쓸만 하면 용광로에 집어 넣는 형상이고  

박정희 사주는 정각(亭閣)의 네 기둥 뿌리와 같은 것으로

건축물의 축조 형태와 같아서

장개석 사주와 반대로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하는 사주인데 

장개석은 매우 대칭적 억부(抑負)의 구조이기 때문에

종신 총통을 해먹기는 좋은  것이다

그런 기질로 해서 자신의 며느리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가차없이 결단했음을 보면 그 일향성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박정희의 사주는 인신사해(寅申巳亥) 사맹신(四孟神)을 다 갖추었기에

모든 사람을 균형 있게 취용하는 대범함을 갖춘 것으로

다만 어느 한 쪽이든 지나친 것은 용납 안 하는 것으로

다방면 골고루 취용하는 균형성을 갖추나 

결국 그 한 쪽의 지나침 때문에 무너지게 되어 있는 사주구조인 것이다

 

 

 

선종(善終)과 호상(好喪)의 의미

 

 

우리가 선종과 호상의 의미를 논할 때

한 번 쯤은 공자님의 사주와 제갈 량의 사주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 것을 과연 그 인물의 사주이냐인 것이라 논하기 전에

그 인물의 특성과 닮은 것으로 그만인 사주 또한 없다 

공자님 사주는 부와 모 사이가 空三合을 이루나 사이가 요원한 것이며

신구(新舊)의 조화를 잘 이룬 격에다 맑은 것인데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자적 사주로서는 그만이다

또한 무엇을 섬김으로서 받들 줄 알며

온고지신적으로 뜻을 심음으로써

일생을 펼치고 살아옮이 많은 이에게 맑은 지혜가 되게 하는 것으로서

官쪽에서 空을 쥐고 탁 트인 듯이 하니

더 이상 좋은 풍광일 수 없음으로 탁함이 없다

마치 꽃봉오리가 함초로이 열린 형국이기도 한데

그 열린 부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일 갈라 확 트인 것이듯

시원할 뿐 아니라

또한 공삼합이기 때문에 없는 듯 있는 것이 허공 중에

부모가 함께 잘 어울려 있듯  신비감도 갖춘 것이라고 봐야 함인데

이는 마치 공자님의 부모가 당신들의 사이를 갈라 박을 터트려 주되

하늘이 열린 사이의 그 이별에도

오작교를 건너듯이 널찍히 건널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연연 생생이 잘 되었으되

큰 그릇임을 이런 식으로 열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히 산과 들이 함께 어울린 것에 물줄기의 원천일만큼 그윽하다

이에 비해 제갈 량의 사주는 합이 교활하도록 잘 되어 인출함에 

재주가 백단이라 할 수 있음에도 산을 넘지 못 하는 사주이니 

천하를 통일하지는 못 했지만 

이 제갈 량의 사주를 약간 비타협적으로 바꾸어 년과 월을 제지할 수 있다면  

박정희의 사주와 닮아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천하를 통일할 수도 있거니와

또한 그 전에 절명할 수 있고

후에도 선종이 어려운 사주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살아감에 있어 

분노라는 것 중에 

제갈 량이 주유를 죽일 때의 그 몰아가는 능청이라는 것이

저 것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천 년 묵은 여우이지 않는가 하는 것도 있었으니

 

 

반면교사(反面敎師)

 

요즘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제 눈 밖이면 XX 새끼니 욕을 바르는 판에

그렇다고 반면교사라는 것이

조선시대의 점잖은 체면 시대의 향수만 갖는다고 

못난 면이 더 잘 나 보이지도 않는 것이 

머리에 소똥도 안 벗겨진 어린 것들이

양반이랍시고 어른과 여자는 천하답시고

사서삼경 좀 깨우쳤다 싶으면 

어깨와 눈에 힘주고 다니는 가관이다보면 그래도 한결 나은 듯이 해도

참으로 두렵고 소름이 돋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 또한

오늘날의 압받감에 비해 덜하지 않는,

구조적 압박으로서의 부자유성에 있는 경직성이기에

어찌 보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사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과연 그 것에 대체할 민주주의가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면

그렇게 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지만 

어느 나라든 그러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민주주의가 된 것도 아니니

또한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된다는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것이니

한 편으로 보면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폭정도

제 종묘사직이나 후사를 생각하지 않고

왕조의 자존심도 없이 막갈 수는 없는 것이기에

무슨 처신이든 도망가듯이 처신은 않는 법이니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의 실질성이란 것이

많이 가지면 카바가 되는 듯이

도망가고 물러나면 그 뿐이라는

회피와 외면으로 묻혀버릴 수 있는 것에 비해 

봉건사회는 그래도 나름의 책임성을 갖춘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상식적으로도 무리수같지만

聖君은 그래도 왕권에서나 맞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권좌 자체야 빛나고 맑은 곳이라 쳐도 

오르기 전에 겨 묻은 개 똥 묻은 개가 되어어서야

성스럽다고 한들 어찌 제 의지로 요순지세를 만들 수 있더란 말인가 

 

 

추상과 현실

 

보통 四柱 上으로 도벽(賭癖)은 단절성에서 잘 나타나는 것으로

특히 요즘에서는

도벽만으로 굳이 특별한 병이라기 보다 

제품 생산 공장에서 밤새우는 사람이나 

주식이나 선물에 밤새우는 사람이 다르다고 볼 때 

주식에 밤새우는 사람이 도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아무리 시대가 바뀐 것이라지만 

자신이 힘껏 노력하여 일궈놓은 재산을 

아들이 경제학 박사라고 증권에나 매달려 제산을 다 날렸다면 

과연 유산을 남겨줄 정나미가 나겠는가와

또한 정서가 같은 것일 수 있으냐와 

서로가 용해되는 것보다 

아주 처연할 정도로 파괴적이지 않나하는 것도 되는 만큼 

우린 투기를 당연시하고 마치 실물적으로 쟁취함이

석사 박사의 최고봉인 냥 하는 것도 도벽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굳이 따로 도벽일 수 없는 바에야

보통 사주에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이 없으면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니나

자식이 없으면 더욱 그 없는 작용으로 편고(偏枯)될 수 있음이고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이 없고 財星이 많으면

생산적 투자 없이 돈을 벌어야 하기에

영업직으로서 손수 뛰어 벌어야 하는 경우가 많음이니

이  경우도 사회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막히면

특히 투자 없이 돈을 벌려는 것이기에 도벽이 생기기 쉽고

인수(印受)가 좋으면 부동산 투기나 학위, 특허 등으로 돈을 벌려는 적성이 많고

여자의 사주인 경우는

남편의 도벽은 인수(印受)가 없는 자가 흔히 있을 수 있는데

이 것으로 인수로서의 공동 취향이나 공부 등이 있으면 가교가 되지만

인수가 없으면 남편이 무얼 돕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기에

도벽에 빠지는 수가 있다

꼭 도벽이라기보다 어느 한 쪽으로 내몰리기 쉽고 빠지기 쉽다고 봐야함이다

이는 즉 官星이 비겁(比劫)에 대해 투자 없이 쟁취하려는 것이고

왕자나 되는 듯이 여자가 벌어오는 돈에 의지하는 것으로

합법적으로 계약을 통한 상호성을 갖춘  것이 아닌

주먹구구식이며 구두식으로 통용하는 예가 많고 

또한 육탄적으로 대시헤 옴이 많기 때문에

직업을 가져도 불법성이고

정규직이 아닌 것으로서 의지함이 많게 되는 것이다

印受인 母가 없는 사주에 母가 없이 살아야 하는 삶은

특히 차남이나 차녀면 몰라도 

장남이나 장녀면 더욱 막중한 책임의식을 갖추게 되는 삶이 되기에

애들에게 잘 해두고 친구나 형제들에게 잘 해 주어 후덕한 편이나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몸에 배는 것이기에 

실제 자신의 장애에 대한 중간자적 역할의 단절로 성장하기 때문에 

남의 문제는 해결을 해줘도 자신의 일은 해결을 못 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즉 이 것이 필연이듯 자의와 상관 없이 형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는 곧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식상(食傷): 사주학 용어로 食神과 傷官을 줄인 말로 투자를 의미하기는 하나

감가삼각비(減加償却費)를 뜻하는 것은 아님

허나 또한 감가상각비는 식상에서 발생하는 것이니 요처(要處)가 되는 것이다

점술 상으로 財가 식상 쪽의 공망으로 빠지면 감가상각비 쪽으로 사기가 발생하고 

과다 책정이거나 이중 장부로 빠져 나간다고 볼 수 있음인데 

이 것은 곧 실제 상황에서 그 손실분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 드러나는 현상이거나

이미 복원이 되었는데도  나타나면 문제성이 있음을 의미하며

文書의 공망인 쪽으로 빠지면 집을 사더라도 평수나 약관이 실제와 달라 사기 당하는 수다

또한 우리가 食傷이라는 것을 볼 때

先天數를 987654 역순으로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를 셈하는 것인데

이 걸 보면 무엇인가에 대칭이 되는 감가삼각비이지 않나 하는

기준점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 <明> 字는 달이 해를 품어서 밝은 현상이다

그냥 날 日이라면 光이라 하고 말 일이나 

明은 짝이 있다

또한 陰陽間이 있다는 것이다

즉 원소주기율 상의 같은 1 族이 날이요 光이라면

月은 전형원소 상으로 8 族에 해당되는 빛 그림자라는 것이다

또한 이 明 字에 日이 가려지거나 벗겨지면 陰氣가  세고

月이 가려지거나 벗겨지면 陽氣가 셈을 의미한다

 

 

각도기

 

즉 기문(奇門)은 15 씩 접으니

실로 란탄족과 악티늄의 드는 수량과 같고

지리(地理)에 해당됨이라고 볼 때

이 것으로 10으로 나누면 旬으로 함인데

즉 이 旬에 초두 변(草頭 邊)을 두어 순(荀)이면

이는 곧 원소 4 주기율인 나무인 것으로서의 묶임이라는 것이 됨이다

즉 전이원소 10 묶음이 곧 열흘 묶음 순(荀)이 됨이라 하는 것이다

본래 門은 3 日을  하나로 묶은 36 時를 말하는 것이고

10 배율이면 360 각도가 나는 것으로 이를 수적 분각(手的 分角)이라고 한다

여긴 10 년 大運이란 門을 통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즉 둥근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원주율의 천기 누설

 

원주율 상의 최적의 길이가 3.14로서

三을 원본으로 함에 三은 火인 것이니

모든 둥근 형태는 무지개처럼 빨강을

최고의 바깥 테두리로 하는 바

이러한 三까지의 절차를 우리가 보자면

먼저 빛이 하나의 線으로서 원소 1 주기율이라고 할 때

다시 반사되어 나가는 것

즉 반지름에 다시 반지름이 생김으로서

예, 둔각적(銳,鈍角的) 절개된 면과

각이 있는 分度가 생기는 것으로서

패임이 있는 것으로서 원소 2 주기율한 澤인 바 

이를 지상성으로 하여 못이라 함에

1을 天에 있는 것 

2를 地에 있는 것 

이 것을 불길로서 부풀리니 

둥그렇게 다시 원형으로 돌아가는 바

이를 人에 있는 것

원소 주기율 3인 인간으로서

심장이 뛰며 그 역할을 하게 한 것이 머리라는 것이리다

 

 

선천안(先天眼)과 후천안(後天眼)의 안목

 

우리가 원소 3 주기율 내의 차원에서

易象의 3이 불인 것이

후천수 3 인 것으로 이승의 나무의 차원으로 본다면

우리가 같은 스텝적 안목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3주기율적 눈을 갖고 저승에서 본다면

나무가 나무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훨훨 따오르는 불길로 보이는 것이 될 수 있음이고

後天 세계로 보는 이승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3 주기율적 易象으로 불이 타는 것이

나무가 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니

그만큼 시공의 차이를 얼마나 여실히 드러낼 수 있느냐에 달렸을 것이나 

이를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더 가깝다고 할 때

마음에서 물리적 시공을 일으키기 더 쉽다는 것이 될 수 있음으로

마음으로 실천성이 있어나는 논리를

시공적 차이의 대입이든

의식적 가상으로서 접근이든

집중력을 키움으로서 발견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무지개 홍(虹)은 충(蟲)이 있는가 

 

3은 원주율 3의 보푸라기 소수점 수와 함께  하는 것으로 卦象이 됨이요 

5는 지각(地殼)으로서 잡는 것이니 五行이 됨이다

7은 사차원적으로 시공을 접어 드러내는 것이니 

49제적(四十九齊的) 의미가 있고

9는 원심과 구심을 하나의 원으로서 같다고 함에 두어

우주의 끝머리를 지구의 끝머리와 함께 둥글게 둠이 있다

火는 겉은 단단하고 속은 두드러우니

모든 色이 빨강색 안에 다 듦이요

그 밑바탕에는 

소리의 파장 짧음의 푸른 빛으로 촉발하여

다시 內功으로 한 번 머금은 듯

노란 중간 마디 사이로 굵어질 듯이 하다 

다시 붉게 뱉음에 꽃이라 함과 같이

팔 다리가 길다고 하나 

생명체의 구곡양장보다 짧은 것이며

구곡 양장이 길다고 하나

발 없는 혓바닥 말이 천 리를 가는 것이니 

모든 것이 무지개 색 유충들의

색의 단층을 넘을 때마다 한 마디 씩

허물 벗기같이 하여 넘어가는 기능성인 것으로서 

우리의 세포 또한 무지개 띠만한 박피성으로도 

무한 탄생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듯이 하는 것이듯 

무지개는 무한 공간의 부피성의 압착과 같은 것 

그리고 절차와 순서와 같은 것

 

 

그늘빛과 길빛

 

인간은 동맥이 먼저인가

정맥이 먼저인가 하면 동맥이 먼저라고 하는데

나무는 동맥이 먼저인가 정맥이 먼저인가 하면

정맥이 먼저라고 한다

즉 나무가 붉었을 때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이라 했단다

즉 단풍일 때 걸어다녔는데

그 땐 푸를 겨를 없었음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땐 꼭 길빚을 갚는 듯이 다녔단다

허나 

마치 길빚을 갚지 못 하게 되자

길빛 대신 그늘빚으로라도 갚아야 하는 듯이 되자

마치 시작이 정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꿈쩍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듯

푸른 잎새를 내놓아야 하는 듯이 사는 것으로

그래도 잎새의 진을 빼어도 살아갈 수 있는 듯이

이 것이 木神의 典型이 아닌가 하는 것이니

 

 

다와 도의 심상

 

우리의 말 끝에 왜 다가 적절하느냐 하느냐 하면

이 ㄷ이라는 그릇을 최고로 벌려 다 내놓았다는 의미이고

최대의 허공적 벽으로 다 나왔다는 의미이고

또한 도라는 출발 선은

이 ㄷ을 다시 받든다는 형태로 ㅗ을 받치는 것이 되며 

또는 재차 출발한다는 의미이고

음정의 도에 다시가 있어 또가 되는 것이듯이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입맛을 다시는 것도

있는 것을 또 다시 다시는 것인지

제 입맛이 돋음에 나는 것인지 다른 듯이 하지만

결국 같은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空에도 절차가 있어 원소 주기율이라 함이다

 

우리가 한글의 욀 때

아야 어여 순으로 ㅇ인 자음을 기본으로 하느냐 하면

0은 土요 지구의 自轉이기 때문으로

이는 원소 1 주기율 1 족인 수소의 ㅁ과 ㅂ

즉 아버지와 어머니 버와 머인 것으로 중수소로 할 때

헬륨을 만듦으로서

8 족의 폭으로서 테두리를 갖게 함으로서의 공간성을 갖추는 것이나

아직 1 주기율은 징검다리가 놓여 있지 않은 상태와 같음에

그 사이를 프로타지처럼 내놓을 수 있음이 원소 2 주기율부터 함인데

이 때부터는 마치 동전을 문질러 드러난 그림의 평면에서 

다시 동전의 요철을 찾아가는 데드마스크를 찍는 듯이 할 때 

사이를 내 놓을 수 있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기초단위로서

원소 2 주기율인 태택(兌澤)으로서의 얼굴의 관상(觀相)을 의미하는 것이 됨이고

원소 1주기율 상으로서의 수소와 헬륨  사이가 빈 공간의 사이의 막에

거푸집을 내듯 입체성을 나타낼 수 있음과 같은 것으로 

원소 2 주기율부터는그 과정이 보인다는 것이요

또한 그 벨트 상으로 올려 놓을 수 있음과도 같다고 봐야할 것이다

 

 

시각(視覺)

 

이궁(離宮)에 火는

離宮인 꽃이 꽃을 피우는 형상인데

우리가 시야 상으로 나무나 꽃을 피우는 상태라고 할 때는

두 시공을 겸하여 보아질 때는 나무가 꽃을 피우는 형상이나

각기 달리 있을 수 있을 때는 

나무는 나무의 눈

꽃은 꽃의 눈이 따로 있다고 할 때는

나무도 불꽃로 보일 때

꽃도 꽃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나무가 꽃을 피우는 듯이

꽃이 꽃을 피우는

불이 불을 피우는 것이지만

이미 시차성을 극복한 두 시공의 접목으로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이라면

나무는 꽃을 낳기 위한 잉태에 든 것이고 봐야 함에

그냥 자궁으로 봐야함이라는 것이다

즉 이 자궁을 벗어나면 같은 불이나 꽃이라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 자궁의 역할이 바로

원소 주기율 상의 마지막 안정감인 8族이라고 봄이다

즉 우리가 주기율적 피막의 콩깍지가 끼지 않으면

불은 불로 보이고 물은 물로 보이는 것이요

사람이 사람을 낳 듯 불이 불을 낳았다는 것이 되지만

우리의 지수화풍이 갖는 주기율적 임신이라는 것은

오히려 무의 차원에 든 자루로 보면

한 편 유산될 듯이 근거하기에 

다른 주머니를 찬 듯이 방편이라도 나온 것같은 것으로서

나름의 주기율적 안목에 들면

나름의 온전성을 갖춰 태어날 수 있음에

왠지 시공이 안 맞는 쪽으로 자꾸

벽을 두는 것으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것으로서

결국 불이 불을 낳는 곳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이 나무의 태반에서 꽃으로 떨어지지 않고

나무로 다시 돌아감만 같은 불을 돌리고 있음과  같다 함이다

이런 주기율성으로

離宮을 현시각과 같은 공간 개념으로 하지 않고 볼 수 있다면 

어떠한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인인가

우리가 남쪽을 火로 할  때 

마음이 이는 순간의 나로 기준으로 하여 남쪽인 것이지 

다름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방향성임에도 바탕적으로 둔다는 것은

그렇다고 氣나 기능성이 무조건 없는 것을 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렇게 된다면

결국 離宮은 꽃으로 보이는 안목적 두께가 있다는 것인데

이 것을 주기율적 바탕의 다른 시각을 설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문우답

 

물은 0도 씨에서 어는데

고기는 왜 100도 씨에서 얼어요?

바람이 불어 얼으니

빛이 불어 얼었구나

바람이 얼음을 만드는 동안

빛이 은하수를 수소로 만들었다

 

 

관점(觀點)

 

우리가 天地人에서 人에서 사물을 논할 때

四象 醫學에서 太陽과 太陰을 논하듯 체질적으로 논하지만

태양은 인간의 認知 上으로는 線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線이라는 것이 옆으로 보면 선으로 보이는 것이 인간이기에

線이라는 것이지만 우리가 직접적인 것은

정면으로 드는 화살과 같은 것인 点과 같은 뿐이고

실제 직접적이기는 하나 그 線을 서리지는 못 하니

그 접근 자체가 요원한 것이라고 봄이 아니라 

없는 것에 접근함과 같은데 

그 것이 자신이기 때문에 타적으로 볼 수는 없는 것으로  

이를 수소적 1의 관점이라 함이요

헬륨으로서 坤土인 太陰이 되었을 때 네 기둥으로 얼레를 만들 수 있음에

이 太陽을 감아 평면성을 낳을 수  있음에 2는 곧 面的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坤을 方이라고 함인데

여기서 陽이 일어남이 小陽이라는 것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며 입체성을 낳는데

이 입체성이란

마치 태양의 線이 地衣을 입고 일어서니 두텁게 살이 쪄 있더란 것이 되니

여기서 부터 안목이 생길 때는 면과 선을 해체할 수 있는 분별력은 그대로

태양의 線으로서

측면성(側面性)보다 전면성의 전신으로서

제 꼬리표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앞면의 눈 그대로 열려 바라보는 것이기에 

원소주기율을 초월하고 세상과의 모든 접촉을 초월함이 있다는 것으로

인간은 빛과 빛으로서 대화가 되지 않지만

이 天과 地와 人의 인식 중에

인간이 天에만 빠져도 대화가 가능한 안목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니 찾는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봐야 할 것이다

 

 

마른 똥막대기

 

우리가 소리가 나지 않았어도 약간 금이나 홈이 난 것을

원소 2 주기율로  함이요

세 개의 爻인 卦象 中에 택(澤)은 상절(上絶)이니

완전한 구슬에 입이 난 형태가 됨이니

어찌 보면 말과 대화의 차원이다가 아물리는 것이 됨이니

天上의 이야기는

벙긋이 웃는 구름과 같은 미소이다가 天上으로 사라지는 것이요

이 것이 강도 높게 충격이면 中間爻까지 갈라져 소리가 진동을 하나

아래 하연(下連)의 陽爻로서 감당이기에 더 크게 울리는 것이니

이를  진하연(辰下連)이라 하니

上에다 中까지 絶이되도록 친 것이라면 이를 천둥번개라 할 것이니

이를 원소 주기율 4로 함이 되나

澤上節을 地라 함의 2와 같음이요 

辰下連을 人이라 하여 4와 같음이니 

아예 上中下가 다 갈라져 坤三絶이 되었을 때

이 때에서야 坤이 곧 乾임을 알았을 때

갈라짐이 아니라 구멍만 낫을 뿐이라는 것이니

태풍의 눈에 마른 똥막대기가 빠져 나감을 봄인데

그래도 오줌이 먼저 나옴이 원소주기율 6이 水인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똥이니 원소 7 주기율과 같을 때

아! 모든 인연은 바람결따라 태풍처럼 엮인 것이로구나 

 

 

선천수와 후천수와 오행수

 

水素를 눈으로 함에 

수소의 수량(數量)으로 구슬을 꿴 듯이 함에 

이를 원자량의 數와 같은 것으로 

은 개체로서 낱개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서의 수리적 진행이기에 

산소의 원자량인 16을 취용함에 있어 

이를 선천수로 취용할 것이냐

후천수로 취용할 것이냐가 나오는 것인데

이 數가 數理的 연쇄성의 마지막으로 고개를 드민다고 생각하면

天의 수와 地의 수와 人의 수로 볼 때 人의 수로 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있다

그래야 周易의 上下卦象의 몸체를 투과해 爻象의 눈을 뜰 수 있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天과 地로 할 수 있는 수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인데

그러면 8 卦를 天의 數로 할 때

원소 8 개의 族을 天의 數로 함이 마땅하고

주기율을 地의 水로 함이

주역과 원소주기율과 관계가 최적의 합체성을 이룰 수 있다고 불 수 있는데

그럼 핼륨의 원자량이 4인 것이니 人에 미친  것으로서의

4 번째의 스텝으로 나온 눈이라고 할 때

다만 이 것이 원자 순서의 번호대로 매김되는 것이라면  수소 다음의 두 번째에 해당되니

이를 地數로 할당하는 2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 것은 나름의 유형으로 모양을 이루게 함의

어떤 질서 정연한 같은 형태의 수량이 아니라 

상이하게 달라도 두 개면 두 개로 취용할 수 있는

사물함의 역할과 같이 번호가 매겨진 것으로 보면

이는 곧 원자 번호를 의미하는 것이라 봐야 함이니

이 것은 八卦의 테두리 

八族의 테두리로 감아 돌리는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때 

이를 天數라 할 수 있음이다 

그러면 원자 번호 핼륨 2가  地的 數가 됨이요 원자량 4가 人的 數가 될 수 있음인데

그러면 1 주기율 上의 8族에 해당되니 8로 보게 된다는 것이 天數가 됨으로서

이로서 天地人의 數가 주역괘상적으로

원소주기율과 동일하게 진열된 것으로 봄인데 

 

이 것이 당연히 맞아들어감을 떠나 

거꾸로 설정을 하면 어떤 논리가 되느냐도 한 번 고찰해 볼 필요는 있다

즉 산소 원자량 16을 선천수로서 하고 

원자번호 8를 후천수로 하고 원소 2 주기율의 6族을 現行의 접촉수(接觸數)로 할 때

이렇게 되면 소강절(邵康節)의 매화역수(梅花易數)처럼 방향을 下卦로 취용하듯

族을 下卦로 취용하고

후천수를 상괘로 취급하고

선천수를 동효로 취급을 하면

앞의 설정과 반대되는 논리가 성립되어야 맞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게 닮은 점이 있게 된다는 것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설정은

산소의 원자량은 주기율 2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즉 族에 심어진 원소의 특성이 주기율의 함수를 안은 관계인가의 분석이다

즉 개연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 것이 함수관계라면 산소 원자량 16이 선천적으로 주기율을 만든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이를 8로서 나눌 수 있음에 팔괘를 번복할 수 있는 것으로서

주역의 괘상을 만들 듯 원소 주기율의 8族까지 만들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1로 하여 태양이라고 하는 것이고

2를 택궁으로 태음이라고 하는  것에는

태양의 근원적 陽이라는 것은 무지개나 音程이나 나무나

모두가 원(圓)으로 감쳐지는 것이지 한 쪽으로 돌출되지 않는 것이기에

무색계의 생식기는 돌출기가 없음과 같고

오히려 패인 홈이 있을 때 이를 태양에 대한 太陰의 성격으로서

그 태양인 본원의 라인을 기준으로 하는 복원력의 귀속성을 채운다고 한다고 할 때

그 공간성과의 접촉성에 있어 상대적인 것이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며

이는 곧 2 澤宮이 후천수로는 4에 해당하는 陰金임을 뜻하게 되는 것으로

그러면 수소를 둥근 구슬 형태로서 제 1로 할 때

중심을 가르지 않을 만큼  갈라지는 찰라를 핼륨적 陰이라면

수소와 핼륨의 사이가 비는 것이 아니라 

핼륨 자체가 그 그릇이 다 되지 않았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2 주기율부터 더 갈라져  8 族까지 넓혔을 때 坤土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원소 량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니

중앙과 나머지 부분도 다 갈라짐에 坤土라 함으로 할 수 있음이다

이는 곧 화두의 하나인 판치생모(版齒生毛)가 다 되었다는 것으로

원소 1 주기율의 핼륨은 완전한 판치생모가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인데

그러고 보면 生母라는 것에서 이빨 자체에서 난다기 보다

심어지듯이 원소가 붙은 듯이 한다는 것이다

즉 원소 2 주기율의 澤의 이빨에서야 8族이 다 구비된다는 것이니

그리고 여기에 주기율적으로 족을 

나무든 사람이든

원통형으로 균형이 있게 나타낼 수 있게 함과 같으니 

이 주기율과 족의 구성체에 단면적 세포와 같이 함에

그 속의 핵이듯 원자량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면 

최종적 DNA의 띠의 눈을 내놓을 수 있는 듯이  하는 것으로

周易의 爻辭에 까지와 눈이 난 것과 같다고  봐야할 것이다

 

 

혈(穴)

 

보통 원소 1주기율을 원(圓)이라고 할 때

2 주기율을 풍삭이 된 대지라고 할 수 있는데

또한 모든 사물의 穴을 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풍수로서의 기밀은

원소 2 주기율로서 틀을 이룬다고 봐야할 것이다

즉 1과 2가 天地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때

여기에 새벽 오오라가 불타는 꼬리까지가 원소 3 주기율이다

그리고 이 지구라는 몸체에도 돌아감이 있는데

여기에는 네 개의 다리이듯이 하다가

천지 간에 두 개씩 붙임수인 속내를 드러냄에 팔다리라 함으로서

원소 4 주기율로 함에 이를 人이라 함이다

이미 채바퀴 몸통의 원소 3 주기율에다

그 안에서 네 다리가 나옴에 다람쥐라 함이 있어

로켙풍은 그 남는 에너지를 예비용으로 다시 감아 놓는다

이를 원소 5 주기율이라 한다

녹수(綠水)는 차가우면서 잠잠하니 생명력을 길게 한다

이를 원소 6 주기율이라 함이다

그리고 이 수평을 기준으로 乾에서 깎인 골짝을 보니

도리어 山으로 보인다 

이를 원소 주기율 7이라 함이다

그래서 이 7인 山이라는 철(凸)과

저 원소 주기율 2인  택(澤)의 요(凹)가 합하니

다시 원소 주기율 1인 하나로 돌아가더라

 

 

제갈 량의 폭과 사마 의의 폭

 

우리가 兄化財空이라고 할 때

객관적으로 바로 집히는 것이

형제 중에 妻가 사망했거나 가출 아니면 재산 부도 등이든가

굳이 하루라도 못 보면 못 사는 사이라면

불구거나 말 못할 결함을 갖고 있기에 방황을 한다는 것이 나온다

그런데 남동생이 장가가자마자

큰 오빠가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는 예를 보았는데

이 것이 그 動하는 주체의 化의 작용이 강한 것이지

변효(變爻)로서의 대입(對入)의 작용으로는 설명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즉 오빠가 중풍이면

兄爻가 바로 財空으로 곧장 허망하게 되있다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고

動하는 주체의 변화를 드러내기에 化空이 바로 되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나 

전자는 부실한 사람이 들어옴으로서 멀쩔한 사람이 시름시름 가게 되어 있는 것에 비해 

후자로서의 설명은 집에 멀쩡한 사람을 들였는데 집안 사람이 병이 나니

그 일로 충격을 받은  형상이 되는 것이 되는 것으로서 

그 실질성이 주객 사이에 뒤바뀐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고로 이 정도로 세분되어야 편향되지 않고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父空이 자신을 生하면서 官으로 化했을 때

도둑이 관행적으로 문서를 검열하지 않는 것을 틈 타

빈 종이만 넘겨준 채 훔쳐 달아나는 일을 당할 수 있음인데 

이 걸 범인의 한 단면으로 보자면 

누군가 자신을 정식으로 취용하지 않은 자가 범인일 수 있는 것으로 다각성을 띤다 

그러므로 누군 대뜸 나와야 하는 길로서는

일괄적으로 집요하게 단순성으로 반복되는 지속성이어야 혼란스럽지 않는 해법과

더디고 속단적이지 않더라도

다각적으로 동향을 살펴야 선명해지는 길인 것도 있는 것으로서

이는 곧 양의 문제라기보다

근본적 자세의 질적 축적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으로

만약에 아낙이 官空에 빠지면

누군가 남편이 급히 사고가 났으니 돈을 보내라는 

사기성 전화가 올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것도 돈오점수(敦悟漸修)와 같은 소스의 두터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식의 상반적 극복을 위하여

 

우리가 보통 전신마비의 사주를 보게 될 때는

의외로 산다고 보아질 때가 있는데 

이는 본래 절명할 수 있는 운때나 환경 때문에 

명을 잇기 위해서 그 죽은 부분은 죽은 채로

그 것을 딛고 일어서는 것으로 

다만 신체적인 외형으로 드러남은

그 것을 지고 그 것을 극복하는 것이 듯이 드러남이 되고 

환경적으로 져야 할 때는

그 것이 간접적이되 몸으로는 지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이 지는 짐이 아닌 것 같아도 그 부담은 고생해서도 갖는 것이니 

이는 다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이다 하기 쉽고 자신이 아니다로 하기 쉬운 헝채일 뿐 

보이는 대로 떨구어놓아도 붙여놓기도 해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라는 것으로 볼 때

그 것을 극복함으로 해서 이겨나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음은

지체 장애라 해서 사주가 별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의외로

장애를 지는 것이 아니라

사지(四肢)가 아예 절단 되든가 없는 경우는 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四柱의 用神 또한 찾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두 개의 결합체가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는 강도 높은 것으로 여겨질 만큼

사주의 대가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용신을 한 쪽으로 몰아가질 못하는 난제로 시험을 치루듯이 

가를 틈조차 내기 어려운 숙제와 같은 느낌을 갖게도 하는데 

거기다 깍지기고 꼬아버린 듯이 해 용신이 있는 듯이 없는 듯이 하는 것이다

이럴 구조면 오히려 신체는 다 구비된 채 전신마비가 되어야 한 것이지만 

의외로  절단된 신체에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山水를 보아 風水學的으로 보자면

자연을 人命에 비유되어 나름의 행위적 고리를 전개하는 것이나

四柱를 보면 이와 반대로

산수화(山水畵)와 정물화(靜物畵)를 보는 듯이 단번에 와닿는 것이기에

실제 화가의 그림보다 더 사실화로 비치거나

추상적으로 비쳐지는데는 피카소의 그림을 능가하는 신선한 감을 갖는다 

이는 사주가 오십만이 넘는 유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창조성도 이만한 양만큼 들면

사물의 어떠한 단면이나 구석이라도 다 그낼 수 있는 양이기 때문인 것으로

우리가 산을 보아 산을 오르는 짐이나

바소쿠리에 흙 한 짐도 산을 지는 것이 같다 해도 

소인배는 짐이다 할 것이요

대인배는 산을 오른다고 할 것이니

이도 다 불구자라도 사회적으로 일깨워 주기에 따라서

큰 인물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너무 숙명을 논한다고 해서 인과에 너무 편리하게 붙이는 것도

한 편으로 죄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고보면

사주학이 숙명학이라고 하나

매우 경외감을 가질 정도로 위대한 품격을 그대로 갖춘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주를 보게 되면

격리성이 뚜렸한데도 신체적 감수로 붙어있게 하고 

억누르며 딛고 일어서게 하는 데는 

정상인이 외적 환경에 그런 디딤돌로 일어서는 법칙의 사주와 같은 것은

사주 속의 모든 개체들이 자유롭고 선명한 데서 

용신도 잡기 쉽게 나오는 길의 숨통과 같은 것으로 살아기는 마찬가지로 

정상인과 차별 없이 인물이 됨을 볼 수 있으나 

절단성이나

한 부분 없이 태어나 극복해야 하는 사주는

의외로 용신조차 붙어

잡아 끌기도 힘든 묘한 관계로 틈을 주지 않음만 같은데

그렇다고 인물되지 말란 법은 아닌 것이니 

다 用神으로 차고 나온 가치는 神만이 아는 것이고 

인간이 매김하기는 너무 월권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만 왜 사주를 선천성으로 보게 되느냐는 명약관화하는 것이니 

애가 태어날 때 두 몸이 하나로 붙어 나든가

두 짝의 어느 한 부분이 붙어 있음에 떼어내야 할 때

어느 한 쪽을 없애야 하는 경우를 봉착한 것과 같이

만일 사주가 후천적이라면

몸이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경우라면

나중에는 하나라도 바로 쓸 수 있게 하듯이 

사주 형태가 분명 떨어져 격리되어 있어야 함에도

도리어 用神이 붙어버려 강하게 응결되어 있음에

한 가닥의 운신을 잡아야 다 잡고 일어설 쓸모로서의 

부득이 절단이 되어야 하는 필요성에서 나타난다 것이고 보면

선천성으로서의 갈등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데서 

사주란 것만 보는 데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있으니

이 것이 선견한 자들의 실례로서 드러남으로서 보게 되니

그 분들의 하나라도 인류의 가치에 남기려는 취지가 한 의지로 배쳐졌음에

더 큰 존경심을 취하게 하는 것으로서

또한  왜 이 글을 올리느냐는 것도

四柱란 것이 이 정도의 세분성을 갖춰야

본질로의 기로(岐路)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도체(全導體) 의식과 반도체(半導體) 의식 

 

우리가 보통  빙의의  상태를 전도체적 의식이라면 

주역은 반도체적 의식이라고 봐야 함인데 

아무리 전도체적 속도라  할지라도 

센스적 반도체 역할이 없으면 공유할 수 없는 

지나치는 바람에 불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은 반도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진화는 것으로 봐서

빙의가 흐르는 자체의 센스는 있다고 할지라도

또한 그 무애성(無碍性)에 순수성을 자랑할지라도  

인간의 인지 능력 내에서의 반도체적 센스가 축적되지 않는 한

길에서 얼핏 관심을 끄는 듯한 집중이다 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하나의 기인적 현상을 지니거나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두뇌적 접근을 하게 하는 것으로 

반도체적 집적율과 같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름의 센스적 해석이 나와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일상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서 

반도체적 지성인이기보다

무언가 와닿게 보여주는 것도 없으면서

마냥 인생을 전도체인 것만으로 바람몰이를 한다면 

그래도 자의적 실체성인 반도체적 인간 진화에

실제 다 그렇고 그렇다는 둥만 할 뿐인 것으로 

바람만 안개같이 일으켜가며

자신의 존재나 확인 시키려는 교할성만 미소 속에 감출 뿐으로

손도 안 대고 코나 풀려는 유형의 인간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림자의 두께가 핀 그래핀의 두께

 

먼저 원소 3 주기율 상의 실리콘의 차원보다는

훤씬 미립적 차원이 2 주기율의 탄소인 것이며

전에 설한 바 대로

원소 1과 2 주기율은

3 주기율인 빛의 차원을 넘는 작용을 하는 금속성으로

이 것이 인지적 차원으로 듦이 원소 4와 5 주기율이라고 할 때

전이원소의 금속성으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것으로 전형 원소가 전이원소 간의 全導와 半導의 의미가

기반성을 달리하며 둘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즉 비유가 되자면

원소 1과 2 주기율에서는 그림자의 두께지만

4와 5 주기율의 두께가 되면

빛을 넘은 그래핀의 두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건 실제 한 주기율 차이의 비교급인 경우이고

원소 주기율 전반적으로 볼 때는

원소 4 주기율이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원소 6 주기율이 전자의 바다를 이루는 것으로 볼 때

원소 7 주기율이 반도체적 기능이라는 것으로

8 주기율이면 부도체적인 것이라 개연성이 없음을 뜻는 것으로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접근이 

이 계통의 전문성에는 매우 서툰 짓거리로 볼지 모르지만 

주역과의 상호성에는 분명 그 본궤도와 일치됨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건 총론(總論)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와 그래핀의 나이테 

 

나무의 주 구성원은 탄소이다

마치 나무가 불타면 탄소로 돌아가는 것은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나무의 나이테와 탄소의 나이테는 같다

나무는 자신의 우주를 음미해도

산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열어 놓은 듯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탄소의 육각형 관문이

千의 숫자를 하나 씩 모금 삼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 육각형은 선천수(先天數) 987654와 같다 

이 것이 두 개인 것으로 12 地支가 된다

이 것은 6의 복사와 확장성을 의미하는 유기성을 의미한다

나무는 불 타 재로 돌아가도 탄소는 영혼처럼 남는다

인간 또한 불타도 탄소로 돌아간다

이 육각형의 출구여도 사방 무한 퍼짐성의

무한 공간으로 차고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원소 1 주기율의 치마 폭에

중앙에 하나의 (墨點)이 떨어져 퍼져나감과 같다

이 탄소 하나에 도력(度力)은 없는 것인가

그 마음 한 알이

원자폭탄(原子爆彈)보다야 저 하늘의 새구름을 만들고도 남으리라 

 

 

 

일함수(Work Function)와 易의 유동성

 

우리가 易을 원소주기율과 총괄적으로 설명할 기틀만 만들어 놓으면

이 때부터는 일함수의 허실과 유기성은 오만 상상을 동원할 수 있으며 

다각적 시각의 접근을 열어놓음과 동시에

신통방통 요체를 접근 시켜 대증할 수 있음에 모자람이 없다 

 

*일함수(Work Function): 물질에서 전자 하나를 빼내는 데 필요한 최소 에너지.

 

마음의 실질성이 부여됨만으로 가능한가

 

경험 상으로 父 下에 孫이 伏되어 있음에

집을 살 동안까지는 애 가지는 것을 보류한 사실을 보았는데 

이 父 下 伏이란 것은 부모를 잘 모시기 위해서 

애 낳는 것을 미루는 형상이 더 적절한 것으로 

왜 그러냐 하면 父母任는 현존하는 상황인 것이기에 

그 실제성 아래 엎드려 있는 것이지만 

집이란 아직 갖추지 않았는데 그 아래 복됨을 나타낸다는 것은 

마음의 집이 아닌가 하는 데서 매우 심도 있게 가려낼 수 있어야 

약간의 차이에도 완전히 틀리 듯 보일 수 밖에 없는 소통성에 

큰 효용성을 낳는다고 봐야할 것이다

 

 

탄소의 삼원성(三元性)

 

왜 원소 2 주기율 上으로 일어날 수 있느냐는

2 주기율은 地라는 것으로서 평면성을 갖춘 것으로

이 건 1 주기율의 평면성에 원소성으로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음에

또한 2 주기율적 겹으로 깔 때는 3 주기율 상의 실리콘과 같다는 것이 된다

곧 탄소가 구형(球型)을 이룰 수 있음에 1인 天으로 하고

원통형(圓筒型)으로 이룰 수 있음에 이를 人으로 하고 3이 됨이요 

막(膜)으로 얇게 펼 수 있음에 이를 地로 하고 원소 주기율 2으로 할 수 있음이다 

 

 

동남풍에 붙여

 

절처봉생(絶處逢生)인란

연(鳶)이 얼레 쪽으로 감아 놓은 것으로 봄이요

火가 鳶인 겻에 木이 長生이 되면

木이라 할 바람을 의지할 수 있기에 鳶을 띄울 수 있음을 말하며

이는 곧 제갈 량이 동남풍을 기다림과 같다고 봐야 하 것이다

進神이 衝이면 세게 당겨 鳶의 줄이 끊어지는 기세이고 

退神이면서 衝이면 얼레를 풀어도

결국 센 바람 때문에 끊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곧 모든 현상이나 물질이 속도에 의해 구분되어져

떨이지고 붙었다 하는 개념이 형성되는 것이기에

속도의 궁극적 효용성이 곧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즉 빠름의 차이로 원점화 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시공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세워야 함에

먼저 겁살의 속도로 원점화할 때

또한 일함수가 겁살적 압축이라고 가정을 둘 때

논리적 전개로서 다른 응용편을 가정해 볼 때

빨리 풀고 늦게 풀고 하는 것에 따라

아무리 색계와 무색계가 시공이 다르더라도

결국 그 시공 속의 시간으로 맞출 수 있음에

사람이 죽어 시공적 차이로 뿔뿔이 흩어지면

그 시공적 차이로 다시 만나기 어려워도 즉시 만날 수 있음은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의 인식인

녹음 테이프 감기식의 

앞뒤 간의 행로에 속도와 관계짓는 것이라고 봐야함인데

우리가 숫자 개념이란 그 부호의 그림적 단면이 아니라

순서가 잇닿은 나열인 것으로 꿴 것으로 봐야 함에

이 선이 닿고 차고 나갈 수 있기의 센스로 넘나들 수 있음이어 하는 것이다 

무색계에서도 곧장 이승의 욕계로 즉현할 수 있는 기능을 갖게 되는 것으로서

이 것이 천백억 화신으로 나타날려면

이 일함수의 구심에서

어느 시공이든 얼레감기와 같이 그 속도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면

이 일함수 하나에 나아가는 길이에

천백억 시간을 꿰찰 수 있음이듯 引力이 가능한 바가 있다고 봄인데

이는 겁살적 태풍의 실을 감고 있는 중에도

얼레의 양쪽 측면은 변함없는 얼굴 그대로 지피울 있다는 듯

이런 원소 2 주기율의 양극성이

원동기의 브어시에의 촉각을 민감하게 하는 것으로

이목구비와 오장보다 얼굴에 집결해 놓음과 같은 것으로

고요의 바다 같음이 큰 얼레와 같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태풍처럼 다닌다고할지라도

태풍은 팔 다리에 해당되는 목 아래라고 봄이요 

분명 얼굴은 측면적 고요의 바다의 목으로 나온 듯 

태풍의 눈은 

化身의 조각품같은 얼굴이 벙긋이 한다고 해도

그 空性이 

바위의 얼굴만큼이나 지속성일 수 있는 재질과 같음이듯

줄의 중간적 기점을 취용해 化하여 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즉 어느 중간적 기점의 맥이든 머리에 집중이 되는 것이니  

이는 다 우리의 마음의 평정심에서 그 궁극성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서

그 어떠한 시간의 줄로 감아도 원점적인 얼굴일 뿐이며

개체성에 있어서도

공간적 개체성과 시간적 개체성이 있는 것으로서

그 차이를 태풍과 태풍의 눈 차이만큼이 내놔야

구심 있는 여러 가능성을 배놓을 수 있는 것으로

이 것은 고요 따로 바람 따로가 아니라

흐르는 중에 내놔야 하는 것이고

아무리 시달리는 중에도 내놔야 하는 데서는 

몸 다로 머리 따로가 아니게 발현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것은 바람이라는 것도

어느 시공으로 보면 태풍과 같은 것이고

어느 시공으로 보면 나무와 같은 것을

바람은 바람이구나 흘러보내야 함이고

물은 물이구나 보내야 함에

너무 내가 바람에 있고

열에 치받침에 있음에도

산은 산일 수 없고 물은 물일 수도 없는 것으로서

내가 내일 수 없게 타(他)에 집착된 것으로서

어찌 보면 직면한 것과 상관 없이

나는 나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원칙으로

겁살을 감는 얼레의 모토가  되는 눈으로서 관점을 두자면 

거듭 겁살적 시공을 유념해 볼 필요가 강조되는 것으로

통상의 욕,색계를 넘어섬으로서 무색계로 된다면

그럼 무색계를 넘어서면 부처가 된다는 것을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러니 넘으면 없는 것과 같기에 넘지를 못함이라고 하는데

허나 성단이 없어지면 태양이 없어져도 

태양인 없어진다고 성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그대로 태양의 火는 色界인 것으로 볼 때

태양계가 있는 星團은 무색계로 본다면

색계의 소멸에도 무색계는 있는 것이요 

성단이 소멸되어도 다시 다른 성단이 생김과 같으니

이로서 이 우주가 電子의 粒子가 흩어져 있는 그대로의

부처가 일어날 수 있음과 같다고 봐야할 것인데

그러니 이 얼레의 진, 퇴신을 잘 응용하면 

실제 신의  실제성과 어느 시공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어데로 이동하는 것인가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약적 시스템을 두고 접근이 되면 

신이 과연 시공을 초월하는 듯이 꿰찰  수 있는냐의 확인인 것인데

즉 星團의 속도를 갖는 시공과 

태양계의 속도를 갖는 시공과는

서로 한 번 벗어나면 같은 공간이기에

오히려 그 꿰도의 차이만큼 다르게 흘러야 하는 것이지만

이 것이 다른 공간성으로 보면

마치 전자 하나에 모인 듯도 하면서 

온천지가 電子인 것으로 뿌려진 듯이 하는 것이니

이로서 손바닥에 펼쳐 보이는 듯이 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에 아무 것도 없어보이나 

종이를 접듯이 마술과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천백억 화신(千百億 化神)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마치 계란의 뒷면을 깨야 알 듯이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천백억 모래알에 천백억으로 化할 수 있음에 가능한 

이열치열식 화신의 결과믈을 낳기도 한다는 것으로

이는 두 개의 시공의 벽을 뚫으면 시공의 초월인 듯이 하지만 

초월이 되지 못 하고 두 개의 차이를 엄연히 보게 하는 것이며

우리가 시공을 쫓아 가려면 시간을 쫓아야지

空을 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되기도 한다는 논법도 나온다는 것이다

시간을 꿰듯 염주처럼 관통해야 타임머신이 되는 것으로서 

한 공간 속에 시간의 얼레를 잘 관찰되어야  한다는 것되 되는 것이다  

 

 

얼굴은 소수점이다

 

왜 얼굴이 소수점인가 하면 

얼굴은 관상학적으로 70 대에 가장자리로 빙둘러 원을 그리게 된다

이 것을 0으로 할 때 80 이전은 다 소수점 안에 있다는 것이 된다

 

 

김치의 고향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나 민감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周易의 접촉면이라는 것은

매우 실제적임에도 흡수되어 찍어발라 나오듯

간접적 의지로 제 모형을 본떠나오듯이 접근하여

인식의 틀을 독자적으로 순수하다고 할 때

굳이 사물의 현상적 두각에

다 일치되어야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판단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물리적 결론에 같아야할 필요는 것는 것으로서

나름대로의 센스일 뿐

무엇을 절대적으로 닮았다고 할 수 없는 주역이다보니

무엇보다 물처럼 완전 흡수적 상태

즉 붙었든 떨어졌든

독자적 해석이 나와야 하는 것처럼 중요한 패턴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합일적(合一的)인 면을 갖춘 자라면

우리가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깨우침도

결국 오래된 김치처럼 흰 더껑이를 두른 듯이 할 때

어떠한 새로움이라기 보다

사주가 효소화에서 자연 그 화합물로서

배추에 있어서 그 양념의 역할로서 역사를 숨죽인 덧으로 할 때

곧 어감 그대로 배추(背追)의 간격

즉 선천수적 행렬 987654를  

시간적 간격으로 숨죽인 것으로 양념(兩念)이라 할 있는 것이 

김치라는 것이니 

이 것이 123456인 순행으로 갈 수 있음이 金인 거울을 의미하는 것이니

서로 대칭적 바란스의

이를 금치(金置) 즉 김치라 함이 최고의 과학적 논리도 됨이 아닌가  

그러니 곰팡진 사물이라 해야하나 

곰팡이는 陽地의 때인 것처럼

우리는 곰팡이를 곰팡이로만 다 익혀질 것이 아니라

양지의 피안(彼岸)처럼 읽혀질 때

인간은 암팡지다고 할 때

사물은 곰팡지다는 서술형에서 곰팡내가 나는 것으로

움직임마져

시간의 모노그래픽이 때가 보이듯 한 몸조를 한다고 본다면

때는 절임의 소금과 같은 역할이 아니라

배추의 역할에서 그 기본으로 하고 바늘이 나오듯이 하는 것으로

양념은 그 수 놓은 손가락과 같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탄수화물의 탄소적 우주

 

우린 탄소를 볼 때

원소주기율 전반적인 것을

하나의 원소에 다 넣을 수 있느냐의 집적 회로와 같은 것으로

마치 시공이 다르듯

다른 우주적 최대공약수가 나올 수 있느냐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 할 때

또한 탄수화물과 탄소 연대를 함깨 주입되고

이입이 될  수 있다면

과연 이온 상의 전자는 어떤 식으로 전파되느냐에 따라

시공을 초월한 개념을 인식화할 수 있는 것으로

때를 볼 수 있음이라

이를 세포 상의 눈에서 일어나는 때로 간주함이 원칙을 해야할  것이다

 

 

이가 나라는 것 이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발효

 

효소란 내 인생의 저림의 축소판으로

자신의 저림의 해석을

우리의 몸으로 들어감으로서

우리 몸의 저림의 해석을 이열치열처럼 경험하며 나오듯

즉 땀 흘리고 시원한 맛과 같은 샤워를 느끼는 것으로

오히려 인생의 배추와 양념이 동시적인 인체에

배추의 꼬리를 훑어 냄으로서의 때인 것으로

스스로는 둘이 되 흘러 보냄에 있어 때가 닿는 것 

이 것이 시간이기에

이를 먹고 사는 것이 서케인 것으로 다 이라는 것이 되니 

이벌레가 윤회의 설화를 낳는 것이니 

 

 

차라리 싸가지라고 해라 

 

예전엔 이의 새끼를 싸가지라고 했다

즉 서캐의 새끼를 싸가지라고 했다 

그러니 이의 새끼를 싸가지라고 했음이니 

그냥 이 XX 저 XX 하는 것보다 차라리 싸가지하고 함이 낫겠다 

아주 친한 친구 간에도 네 엄마 XX

점잔은 귀동자같아도 입에서 나오는 욕은 섬뜩하다

차마 엄마 앞에 XX를 붙이기 뭐 하니 

거기서 부터배배 꼬으며 삼천포로 빼내는 것이 두루뭉시루하다  

욕의 급브레크가 거기까지는 무의직적으로 가고 보는 습관에서다 

이 것은 고치기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친구 간에도 차별을 두어지는 기세 싸움이라는 것이니 

이 경쟁 사회에는 친구라면서도  

서로 밀리지 않으려는 면역력과 같이 치열함을 본다

무엇보다

나이 한 오육십 세 정도 되는 양반들이 동창회라고 마치고 집으로 가는 모양인데 

참으로 점입가경의 지경에 이러른다

요즘 애들과 똑같이 이 XX 저 XX로 줄창 시끄럽게

저 나이에 사회인과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욕을 해대는데

듣는 이로서는 역겨울 정도지만 참 정겹게도 헤어진다 

꽤나 자리 이야기하는 행색을 보니

사회에서 유지급에다 잘 나가는 생활인 것같은데

왠지 겹쳐진다는 것이

모든 일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이든가 하는 것이다

   

 

생산적 食神이라는 것과 인수(印受)인 옷

 

우린 생산적 食神이라는 것으로

항상 전면적(前面的)으로 함에 늘 새로운 듯이 살지만

자신이 입은 옷은 무얼 입었는지 모르기에

참 무지하게 죄업을 짓는 곳에 살지 않나 하는 것도 있다

입었다고 해도 입은 자처럼 덕망이 없다는 것이다

즉 현생의 앞은 띠와 풀이지만

내생(來生)은 짜여진

옷 한 벌이 나와야 제대로 코 안 빠진 것이라 봐야함이고

풀이 통통하게 살쪄가며 살았다고 해도

마른 오징어처럼 바싹 눌려 붙어도

옷 한 벌은 되는 것으로서

몸 뿐아니라 정신적 섬유성도 좋아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나름의 옷처럼 고귀한 품격처럼 동여맴도 돋보여야 함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가 물질을 발견하여 제품을 완성도 있게 하기까지

無라는 개념에도 무우 저림이라는 것으로

이는 陽의 저림이라고 할 때

이 것이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  순서로의 123456의 병행(倂行)을

저림으로 987654로 행함과 같아보이게 하는 것으로

有와 無 上으로 저림이 서로 마주 하듯

서로 양 극에서 출발하는 듯

같이 담궈도

배추와 무우는 서로 바주하며 깍지를 끼는 저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는 남녀 간에 한 짝의 後者라고 칭한다면

전사(前者)는 兩 이목구비 간에 한 짝을 말하는 저림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후자(後者)는 이목구비의 총칭적 짝을 맞춤이란 것이니 

 

 

배추가 일출에 저려 지났을 때 무우는 일몰에 저려 지새웠다

 

배추와 무우가 각기 다른  순도라고 매김할 할 때

이 것을 절임의 농도에 있는 것으로 하나로 친다면  

이 것이 곧 水를 맛으로는 함(鹹)이라는 것으로

1로 하는 것으로서 

투명한 거울과 같아도 감(鑒)과 같은 구실도 맛봐야 하지 않겠는가는

六識의 한 부분이

사방팔방을 하나같이 쥐었다 폈다 하는 것으로

시각이 아니어도 청각

청각이 아니어도 설각이듯이

우리가 아니 보인다고 듣는 것은 되니

識이 천상층으로 까지 가야 

그 짜임새가 각각의 층으로 지평을 열 수 있다고 할 때

이 걸 六識의 극치의 변(邊)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무지개적 켜가

제 색깔로만 뭉쳐져 다시 사방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볼 때 

곰삭아도 곰팡이가 한 꾸껑을 덮을 수는 것으로

결정적 개화든가

배출이라고 보면

백태가 위를 덮듯 이를 때라고 하는 것은

이도 다 세포의 겉과 같은 양상을 띠기에

세포에서 일어나는 때와 같다고 봐야할 것이다

우리가 물질상이나 실질성으로 이치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와 같다는 의미를 부여할 때

그 드러나는 한도 내에서의 벽의 두께로 저림이 되는 경우와 같다면

경험적 신축성도 포함되는 바

즉 물을 1로하는 바는 공간적 시공을 펼칠 수 있기에

어느 마디에 가서는 지기울적 벽으로 층층을 이뤄간다고 할 때

수소를 시발점으로 생긴다는 것을 확연시할 때

소금은 시간적 요소의 출발선으로 맛의 水係인 짠맛으로 기준으로 삼는 바

여기에는 저림성과 같은 축지법(縮地法)과 축시공법(縮時空法)이 되는 것으로

즉 속도 상으로의 함축으로서 시공을 줄임과 같다 할 수 있는 것으로

결국 원자 1인 수소와 같은 자성(自性)으로

시공의 경계의 폭을 늘였다 줄였다 한다고 봐야 함에

양자(量子)와 분자(分子) 사이의 미시안(迷視眼)을

자신을 중심으로 모래시계처럼 뒤집을 수 있듯

확대성이 곧 대칭성의 기준과 같음을 부여함에

그 한 라인에 이탈하지 못하는 생명과 같게 했음과 같은 것으로

시간은 분명 人體의 때와 같다고 봐야할 것인데

시간이 순간 순간

피부과적(皮膚科的)으로 때가 일어남을 윤곽적 해석의 범위로

취용함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것으로서

이는 곧 원소 주기율 2면 천지가 합해 있는 깔끔하게 짜인 천이라고 할 때

또 하나를 실이 하나의 물결처럼 모래강을 빠져나가듯이 하는 것으로

이 것을 조감도로서 바라보는 각도로서는

흐르는 냇물이 병행 선상이 듯 비치며 

대지의 풍광을 맞춰 지나간다고 볼 때

실제 연변의 모래를 스몄을 뿐 아니라

한 쪽의 봇물로 몰아 모래알을 모판 처럼 네모나게 깔아서

심게 하였을 뿐 아니라

사물들을 일으켰음에도 물은 자신이 투명해 

물이 물임을 모르고 지나침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나 

그래도 화창함이라는 것은 

그래도 아이의 미소에 마냥 감동이 저미어 헌신적으로 쫓기에 

어쩜 물이 물임에 가까이 챙기는 것은 본능적으로 가니  

여기에 모든 동식물들이 원통으로 일어남에 키가 커는 것으로 

밀고 또 민다는 것이니  

이를 삼차원적으로 봄에 人이 三이라 함의

또한 원소 2주기율이면 천지가 접한 중에 논을 이룸에 

第 三의 引子가 강하게 일어나기에

탄소가 먼저 제 짝을 맞춰보고 남은 전자를 전송 보내니

이 모두를 큰 공간성으로 흩어지게 하다

다시 한 쪽으로 몰아 넣은 수 있는 듯

탄소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미치고자하는 돗자리를 다 짜고

그 위에 앉은 손님을 태워 전자결 좋은 바람에 실어 보내는 듯

그 센스가 부스러기 되어 나올 때

또한 그 센스가 스스로의 땀을 음미하는 인생을 즐기는 것

 

 

소리의 한 음정에 비치는  것

 

소리란 소리 자체로 보면 분명 턱을 넘어온 것이라보면

그 높낮이에 따온 것이니

어느 한 음정의 소행과 같이 온다는 것이니

이 것은 소리가 빛 자체에서 나름의 문양을 갖춘 듯이

전파되어 옴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것이 탄소의 성정(性情)으로 번식하는 동향과 같은 것이라면

하나의 유전성을 띄고 있다고 봐야함인데

좀 더 강한 에너지가 주입된 것이

이온 상으로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도 된다

 

 

모음(母音)의 형상학  

 

ㅏ는 둔치인 나

ㅐ는 냇물인 내

동네 입구 정자의

평상에 누워 부채질

나가 말이여! 하는 디

벌써 느낌표도 드러누어 다리를 놔줬는지

들판을 가로질러 기행문을 쓰는데

앞에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 

나를 다시 삼겹살 찌우는

내가 말이여! 하는 내자 

나가 너무 편했나 

나 삼겹살은 잘 둔 내 마누라 탓이여!

 

 

천상락(天上樂)

 

꽃은 일향성이 있어 

그림자를 남기며 반쪽으로 남는다 

물은 전방향이라 

커고 한 점이요 

작아도 한 점이다

일향성은 마디 마디 

대나무처럼 잎새를 피운다 

그 공이 해석되는 자만이 

천상락을 누리는 것이 아니리   

 

 

자음(子音)의 형상학

 

기름은

지름을 못 해

둥둥 뜬 기름이다

ㄱ으로 미끄러지는 중에

한 번 더 박차를 가해 ㅈ이 되었으면

지체되나 가로질러 갔을 것을

최소한 바이스 받침이 되 듯

소리는 일어난 것은 되었을 터

 

 

천둥산

 

천둥산아!

천둥산아!

너와 나는 천둥으로 만나는가

천등으로 만나는가

저 베넷구름일 때 어화 둥둥이었던가

다시 천둥이면 몇 등위로 갈꺼나

천둥아 천둥아

우린 둥이 몸으로 알아봐 사랑했다

그 것은 빛이 한참 지난 후였지

얼핏 누구의 기억처럼 남았다  싶을 때

돌처럼 단단했지

아! 천둥산아

천둥산아!

저 빛 너머 살 때는 그림자에 묻힌 듯 살겠지

천등의 불을 켜고

 

 

복음(複吟)과 사진

 

일상 복음(複吟)이란 복사물이나 사진을 의미하며

감평 상으로

영상물을 보게 되는 것이라면

父이면 비오는 장면일 수 있는데

空亡이면 인화가 안 된 필름의 상태라고 한다

월파(月破)가 공망이면 거의 산 자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하는데

효(爻)가 공망이면서 生을 받으면 사진 인화 중인 것으로서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며 

이미 있는 것이랴면 

그 부분이 삭제된 것이거나 모자이크화 된 것으로 보는데

다만 月破인데 空인 爻가 충(衝)을 만나면

사진 중에 영혼이 찍혀 드러날  수가 있다

우리가 보통 官을 鬼라고  하나

이 것은 오행 상의 간격에 의한 유형으로 보는 것으로

이와 달리 공망도 鬼로 볼 수 있음에

그 공망은 그 해당자가 鬼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목청의 기지개

 

아침의 도를 저녁에 본다

꽃을 보았는데

대궁이 부둥키는 대로 살이 찌다가

고개를 내민다

이미 무지개 살집으로 송알송알 맺힌  것이

더 도타웁게 느려터진 오선지의 살이 붙을 즈음에서

대궁이 부둥키는 대로 살이 쪘다

 

 

왠지 정숙함의 덕망이 아쉬운 시대 

 

우린 한가지를 극복해야 한가지가 엄연함을 깨닫는 것으로

시간 上으로도 늘 모자라는 듯이 하면서 기로는 늘 있기 마련이니

일방적으로 헤쳐 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길이 통했다고 할지라도 운빨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오직 길만 보고 가는데 있어서의 왕골과 같다고

역사의 짜임새로만 치부한다고 할지라도

그리 미덥지 않는 상처투성이와 같을 뿐인 것에

서로 아전인수격인 상황의 변명에 치우칠  뿐인 것으로 

이는 결과론적인 것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에 

이보다 더한 중요성은

그 찰라의 기로의 맥점에서 체크 무늬의 촉부분과 같은 것으로

써내려 갈 수 있는 서술성의 긴 맥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 더욱 

그 두터움의 아쉬움을 남기는 것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가지의 포인트를 모르면서

겨드랑이를 가지고 날개를 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本卦에서의 공망은 이미 空이된 것으로 보나 

變卦에서의 공망은 이 공이 차야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공이 들어오는 상태와 같은 것이기에 

공이 드는 개체와 차는 개체와는 다르다는 것이며

공 자체가 차는 주제라기보다

공에 흡수되어 빠져 나가는 주제로서의 단면성을 강조하는 것이 됨이며

또한 진퇴신에 있어서의 모호함을 한 번 벗겨보자면

먼저 복음이라면 사진의 짝퉁인 것인데

그러면 복사라도 그 시간의 사이가 있는 것이니 

그러면 진퇴신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봐야 함인데 

이 정도의 정밀성으로 들어가면 

일반적 감평에는 효용성이 없는 것으로 오히려 방해요소가 되는 것이니 

이 정도의 세분성에서는 

일상적 감평과는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러할 필요가 있느냐이며 

이 걸 직업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경우는 아예 엄두도 낼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는 배부르게 신선놀음의 차원이 아니면 어렵다는 것으로

또한 배부르면 여기에 메일 긴장감같은 것은 없는 것이니 

관심만 가져도 다행일 판이 인간인 것이고 보면

치열함을 더 요구하는 판의 이 길은

배부르다고 올 길은 더더욱 못 된다는 것이니

모든 이치는 그 형태의 벽을 넘어야 

다른 형태의 길도 달리는 것이니 

이 복음과 진퇴신의 같음과 다름을 엄정히 볼 수 있어야 

시공의 차원에서 시간의 줄을 뺄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니

무엇이든 그 합당성 없이 논리적일 수 없다는 것이요

근접성 없이 보았다고 함에 그림이 없지 않는가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중이 그렇게 쉽게 해당되기 어려움 또한 인생이라

이는 설정 상의 시각에 따라

해당되는 분별력의 여분이 늘 부족함으로 밀리게 되어 있다는 것과 

어차피 상피적 세련미일 뿐인 것으로  

일괄적으로 둔한 맛에 해당되기도 하는 심지일 때 

일상사에는 배려 쪽으로 더 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러한 것이기도 한데

어찌 보면 의리는 더 난 듯이 하여 접착력은 더 있는 듯이 하며

부지불식 간에 적자적 피동형으로서야

판단의 기준은 잡스럽지 않아야 하는 것에 내몰리는 것으로어야

어떠한 뭉치든 동짓날 새알처럼 뭉치는 것이니

오히려 인간적 동질감으로 더 큰 동아리를 이루는 것으로

이미 식견이라는 것이

일간지의 앵무새적 식안(識眼)을 한결같이 먼저 여는 듯이

또 갑론을박에 눈치만 늘어나는,

무엇보다 인간은 고요함에 묻히는 것 중에도

夢에 묻힌 안정감으로 그로 무식쟁이라고는 않는다는 것의 

직분성만 갖춘다면 무지도 참 좋은 탈바가지로 먹고사는 무대와 같은 듯 

알량한 아전인수격의 꽤를 부려대며 여유를 부리는 것보다는

좀 더 진솔하게 열심히 연구하는 중에  민감함이 돋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좀 더 세분성에 강조되는 일면에

그 후하다는 담배 한 까치의 인심이 듯이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함께 피울 수 있는 한 匣의 을박(乙搏)이어야 함에도 匣에 甲만 있는 듯이 투사같기만 하는,  

이는 서로 엄격히 구분이 되어 겸손해야 하는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의 절박성에 

더더욱 아카데미를 눈치코치로 만드는 꼴이 되고 말게 하는 것보다야  

돌발성과 같은 예지와

좀 더 영감적 흭득의 인연이기에는

더욱 민감한 센스를 세워 둘 필요는 있는 것이기에

분별의 정밀성을 갖추어야 하는것으로서 

무엇보다

인간 사이에 정숙함의 덕망이 아쉽게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질만이 정숙하구나 

 

요즘 참 말이 많다 

특히 인문 계열이라면 먼저 시끄럽다는 이미지가 나오고 

골이 윙윙 울리는 것같고

차라리 이공게열이라면 

정숙하고 말끔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이 

기계나 연구실이나 정숙도와 청결도로 진화하는 것이니 

자연 환경의 이미지 그렇게 와닿는 것이고

특히 이 계통에 일하는 사람 

특히 남보기에는 하잖아 보이나 

생산직에 일하는 사람들이 최고로 욕을 못 하는 부류에 속하고 

매우 고등적(高等的) 인문(人文)에 머리 터지도록 싸맨 곳에서는 

욕마져 처절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다 환경의 자업이지 않는가?

이도 다 과학이 철학을 앞서는 것이라 하는 것인지도

 

 

원소주기율과 오감(五感)의 배치

 

우리가 원소 3 주기율을 빛이라고 할 때

원소 2 주기율은 빛을 들이킴으로 알  수 있고

원소 3 주기율은 빛의  관통력으로 알 수 있음이요

원소 4 주기율이면 빛에 의지해서 경락을 붙여야 알 수 있는 것이

원소 5 주기율이면 살이 더 쪄야 알 수 있음이요

원소 6주기율은 마치 전리층처럼 유연해야 함이요 

원소 7 주기율이면 어덴가 박혀 있는 데서

전리층(電離層)처럼 하청(下淸)된 순도에서 살아 있음과 같다

마치 6 주기율은 대기층에서 열권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지구 자기장에 의해 매장된 이온의 구름이

원소 7 주기율처럼 무겁게 광물처럼 한다고 봐야 함이다

 

 

원소 4 주기율의 예술성과 원소 5 주기율의 둥지

 

우리가 원소 5 주기율을 巽風이라고 할 때

원소 4 주기율은 震雷인 것이 되는 것인데

그러면 원소 5 주기율은 대기권의 다섯 층을 말하는 것이 되며

원소 4 주기율은 악기의 권역이라고 할 수 있음으로서

만물은 악기인 것이다

여기서 탄소적 천지인 삼재(三才)

즉 球, 圓筒, 平面으로  나눌 때

이를 음악으로는 소나타 형식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것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의 3 악장에 잘 나타난다

그런데 베토벤 음악은 점진성이 강해 

마치 원소 5 주기율의 살집으로 보면 대기권의 성층권에 해당되는 것으로

매우 격정적이어도 매우 숙련된 다듬질로 넘어가는 편이

성스러움에 비유될 정도이고 보면 

슈베르트 교향곡 9 번도 세 번 번쯤 접혀 넘어가는 편인데

매우 과감한 절제가 있으며 털어내는 것이 있고 보면

꼭 기상도를 보는 것같은 것으로서

과연 두 사람의 음악을 들으면 누가 더 인간적인가 하는 비교를 낳게 한다

즉 슈베르트의 교향곡 9 번은

마치 대기권 다섯 층을 다 지나는 듯이 냉온이 절제되어 있음이 기막히다는 것인데

즉 天으로 한 번 꺾고 地로 한 번 꺾고

그로 나오는 人의 카뗀짜가 기가 막히다는 것으로

이는 天上性을 넘은 기막힌 희열과 같은 것으로

정말이지 열반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모자람이 없다

즉 원소 4 주기율의 음악이 원소 5 주기율의 기운을

같은 선상으로 놀 수 있다는 것의 심층을

이렇 듯 판단의 메카니즘이 나올 수 있다는데

위대한 창조적 구성 요소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지 않나 하는 것이다

 

 

이래 저래 심호홉이나 크게 할 뿐이지

 

요즘엔 왜 그리 남의 아이디에 관심이 많은지

내 입구로 들려 해도 접근이 안 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비밀번호 접속이 잦아서 그렇다고 하니

또 무심에 무심으로 더할려고는 한다만

그나마 겨우 이렇게 고개 내밀고

겨우 내 눈 내 맞춰가며 사는 것

더 이상 숨길 이유도 없이 사는 것을

무얼 그리 더 알려고 안달복달이 났는지

알게 모르게 갉아댈려고만 하니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먹을 일이지

 

 

물 위의 달은 인공위성일  수 있는 것

 

안 나는 것같아도 

알 껍질은 나는 법이요

원소 3 주기율 상으로는

물 위의 달은 달인 것이요

원소 4 주기율 상으로는

물 위의 달은

허공 중의 인공위성인 것이라

이 이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공간적의 의미의 in을

사용하는 볼펜의 주체로는 in ballpen이라 함이라

 

 

인문학적 자기장(磁氣場)

 

착각도 오지게 하다 보면

같다고 해도 같지 않고

다르다 해도 같아지게 있는 것인데

이 것이 확연히 드러날 것같아도 순간과 같아

표현에 떠올려지기에도

안 다리 거는 씨름과 같음에

일상적 실례마져도

아득히 떠오를 듯 뭉게구름만 하다

입이 떨어질래도 떨어지지 않고

붙일래도 붙여지지 않는 것이니

이 걸 인문학적 자기장이라고 해야 하나

 

 

진화와 창조성

 

저 아득히 무색계

우주가 돌고 아니 돌고가 무색할 즈음

모든 것이 반물질과 함께 소멸되었다 싶을 즈음

비가 걷혔다 싶은데

물방울 하나가 남았다 싶을 즈음

그 것도 돌고 돈다 싶으니

극에 머리가 돋는다 싶은 게 정류자처럼 빼니

그 틈 사이로 이목구비가 양쪽으로 갈라진다

애초 성운(星雲)이 오장(五臟)처럼 

산소배출기처럼 흡인력을 가질 때

이미 진화는 창조성을 따라 갔느니  

 

 

바람이 꿈깰 일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비로 자나

비로 자나

천상수도 수요

지하수도 수리니

지하수 수맥

천상에 자나

천상에 자나

간밤 바람이 꿈 깰 일이구나

 

 

프리온과 원소 2 주기율

 

우리가 천상계에서 빛을 삼켜 그 정보를 이해하는 차원이 가능한 것은

원소 2 주기율에서 3 주기율은 과자처럼 먹을 수 있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핼륨의 네 개의 수소는 소의 네 개의 위장과 같은 상징성을 갖는다

본래 완전한 坤地는 유전형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유전형을 가지면 근본적 바탕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유전형을 보존해 주는 것이 된다

이러한 원칙은 양성자로서의 유전적 형태에 

電子와 함께 단백질을 구성할 수 있기에 염기성을 갖추는 것이나

우리가 원자 내의 陽性子 없이 電子만으로 단백질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라면

간단히 말 해서 염기로 엮이는 원소의 효가 공망이 발생하면

DNA의 구성 없이 구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음의 메카니즘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오히려 이러한 대증으로서의 실증이 입증될 때

오히려 소의 되새김적 맛이라는 것과

천상인(天上人)이 빛을 되새김질로 맞보는 것과

동일한 조건을 갖는다는 걸 알 수도 있는 것으로

원소 1 주기율은 뇌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으로 보면

水素 內의 유전성을 핼륨으로서 소화하는 기능과  같이 할 때

소가 풀을 되씹듯 

天人들이 빛을 삼켜 되새김하는 절차성의 원본과 맞딱뜨린다고 봐야 함이다

 

 

프리온 [prion]

 

동물과 인간에게 치명적인 신경퇴행성 질환인 해면상뇌질환을 일으키는 병원체.

프리온은 포유류와 조류에서 발견되는 정상적으로는 무해한 단백질의 변형체이다. 정상적인 형태의 그 단백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두뇌에 있는 세포들의 표면에 존재한다. 프리온 단백질은 오직 변형된 구조를 가졌을 때에만 질병을 일으킨다. 병원성 단백질은 감염을 통해 두뇌에 침투할 수도 있으며, 또 그 단백질의 생산 암호를 만들어내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남으로써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일단 두뇌 속에 자리잡으면, 이 병원성 단백질은 주변의 정상 단백질들을 변형체가 되도록 유도함으로써 증식해간다. 단백질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또 다른 요인, 아마도 신체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정상적인 단백질이 여기에 관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상 단백질의 구조는 알파 나선이라고 하는 유연한 코일들이 많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변형 단백질에서는 알파 나선들 중 일부가 베타 띠라고 하는 편평한 구조로 펼쳐진다. 정상 단백질의 구조는 프로테아제라는 세포 효소에 의해 다소 쉽게 무너질 수 있지만, 불규칙적인 단백질의 구조는 이 효소의 활동에 강한 저항을 보인다. 따라서, 프리온 단백질은 증식해가면서 프로테아제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대신에 신경세포 내에 쌓여서 신경세포를 파괴한다. 신경세포 파괴가 점차 진행됨에 따라 결국에는 두뇌 조직에 해면과 같은 모양의 구멍들이 숭숭 뚫리게 된다.

프리온에 의해 발병되는 질병 중 인간에게 걸리는 것은 크로이츠펠트-야콥병, 게르스트만-스트라우슬러-샤인커병, 치명적인 가족성불면증, 쿠루의 4가지가 있다. 그 밖의 질병으로는 동물들에게 걸리는 스크래피(진전성 질환), 광우병, 노새사슴과 엘크의 만성위축병이 있다. 수십 년간 의사들은 이러한 질병들이 슬로우바이러스(slow-acting viruses 발병하기까지 잠복기가 긴 데서 유래한 이름)에 감염되는 데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질병들은 슬로우바이러스감염(slow infection)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종종 그렇게 불리워진다.

프리온은 다른 모든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는 유전물질인 DNARNA 핵산이 없다는 점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다른 모든 병원체들과 구별된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단지 감염을 통해서만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유전병이나 산발성 질환으로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은 산발성이 가장 흔하지만, 3가지 방식 모두를 통해서 나타난다. 프리온 단백질은 감염 병원체로 작용할 수도 있고, 다른 유기체에 전달될 때에는 전염병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또 돌연변이의 유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프리온 질환은 또한 산발적인 발병 패턴을 보인다. 즉, 전체 집단 중에서 질병이 발생하는 사례는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변형 단백질의 생성을 야기하는 내재적인 분자 차원의 과정은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연구자들은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과 같은 다른 신경퇴행성질환 역시 프리온 질환을 일으키는 것과 유사한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핵산이 결여된 전염성 입자라는 개념은 생물학에서 일찍이 유례가 없던 것이다. 이처럼 극히 예외적인 성격 때문에 처음에 과학계는 프리온설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를 정제하려는 시도는 아주 어려웠지만, 1980년대 초에 미국의 생화학자 스탠리 프루시너(Stanley B. Prusiner)와 동료 과학자들이 '단백질 같은 감염 입자(proteinaceous infectious particle)'를 발견했으며, 그것을 줄여서 '프리온(prion)'이라 부르게 되었다. 프리온과 관련이 있는 핵산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프리온 모형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특이한 입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얼레의 측면적 얼굴

 

2 택궁(澤宮) 즉 원소 2 주기율은

페이스 즉 얼굴이라고  한다

이는곧 수소를 심으로 해서

네 기둥의 방향성으로 해서 둥글게 감는 형상으로 볼 때

이 1주기율적 바탕에 澤인 것인 것으로

澤은

우그러들었다는,

틈이 났다는,

샌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걸 메워 줄 수 있어야 하는 기능으로 위장(胃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인 乾宮과 구멍이 난 澤宮에 이를 메우는 坤宮이 곧

위장을 의미하며 배라고 하는 것이 된다

이 삼 박자의 차원이 원소 3 주기율까지의 차원이라고 하고

염화 미소(閻花 微笑)의 차원이라고 하는 것이요

第 1 句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2 주기율로 물고 3 주기율로 웃었다는 것에서다

句는 소리이다 그래서 이는 원소 4 주기율이 됨이다

즉 뇌가 수맛(水膜)으로 싸여진 수소와 같은데

위장으로서 곰방대 심줄과 같이 채워 넣을 수 있어야 함에

헛바람을 넣음에 광우병이 생기는 것이며

이러한 통로도 주역의 爻에 空亡이 생긴 요점을 잘 정리해 보면

좀 더 양자물리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결국 물리학적으로는 어느 선까지 접근을 했으나

다만 설명할 수 없는 인과율의  한 경로에 머무는 곳까지 닿을 수 있음에

과학적으로 수긍할 이해의 접목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數理의 환(丸)

 

우리의 수리가 그 성정 그대로 연속성을 갖는다든가

그 것으로 매김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변(邊)이 丸을 만들 수 있는 각각의 시공성 때문인 것이다

즉 시공의 환이 되기에 수리(數理)의 믿음이 되는 것이고

그 수리가 어떤 절차의 과정으로서의 수의 진행이 되든

그 것이 내적 차이를 갖고 있더라도

같은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그 것이 차원적으로 봐서 조화(造花)의 형태든 실화(實花)의 형태든

하나의 공성(空性)은 채워 넣은 수리의 동일성으로

수의 합체를 이루어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와 오의 뉘앙스

 

이가 쓿다고 한다

참으로 이 쓿다는 말은 곡물을 벗길 때 쓰는 말인데

몸의 이벌레에도 쓴다

그래서 서캐인 것인지도

이웃이란 말도 이의 웃이다

이 웃도 우캐라 한다

곧 쌀에 벗겨질 껍질같은 이웃이 있다는 것이 된다

이 우와 오의 뉘앙스라는 것도

내가 남에게 베풀면 웃이 되는 것이고

남이 나에게 베풀면 옷이 되는 것이다

 

 

빌미와 기생충

 

이란 것이  

몸에서 몸을

저라고 하지도 않고

그라고 하지도 않고

오직 이라는 것으로 쓿는다고 서캐라 한다면

이처럼 한 마디로 말하기 힘드는 거대한 몸체에 빌미는 이는 것이지만

빌미로서 기생충이 쓿는 듯이 하는 것이고 보면 빌미로 덕을 크게 본다고 홍익인간이라도 빙자한다만

또한 약한 자는 그 빌미로 부도덕하게 되어도 당연한 듯이 한다

돈이 많으면 자식 유학 거창하게 보내고

거기다 잘 되면 명가(名家)는 되는 판에야 못 따라온다고 핀잔이면

따라가지 않더라도 흉내라도 내주야 하니 

왕따에다 풀칠까지 달리는 문제가 아니면 다행인 것

누가 뭐라나

알아서 척척하게 되어 있는 것이

서비스 업의 상승력인 듯이 

언제나 언행은 부드러워야 하는 것은 상식인 것 

그러니 그 밑에 따라 갈려면 비교적 모자란다는 흉내에도

또한 떨어졌단 행색도 못 내니

또 이리 저리 끌어다 끌어다

노인네 삼짓돈까지 아쉽게 하다 보면 

노인네는 말한 마디 못 하고

끙끙 능력 안 되면 짐이야 안 되어야 하지않는가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또 그 아래 약한 자는 몸을 팔아서라도 자식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에는

언제부터인가 지성이 건전한 가정과는 별개의 것이 되고

인생 즐기는 맛은 이래 저래 핑계로 자유로워도

또한 그 것이 문명의 잘 난 맛은 즐기는 맛이 아니면 뭔가 하는 것으로

그래도 손가락질은 받으나

그럴지언정 자식이라도 잘 되면 되는 것이지 하는

자식이란 게 외형적으로 맞춰 주질 않으면 부모로 안 보는 것에

자연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서야 개인적으로만 몰 수도 없는 것에서

이래 저래 이미 자식 쪽으로 너무 쏠려

외형적 가치의 부모만 환영받는 시대로 교묘히 고개 돌릴 틈조차 주지 않으면

무슨 재주로 남타령을 하느냐는 식의

참 신기한 것은 이러한 노인 경시를

벌써 노인네 인구 많은 후휴증의 징조인 듯이

우연히도 보게 되는 것리지만 

힘 없고 능력 없는 파지 줍는 노파가 하는 말이

<자꾸 늙은이 인구가 많아서 나라가 힘들어진다고 하는군요>라

참 어구가 막히게 가슴이 덜컹 내려 앉게 한다

이 걸 보면

이가 아니라

저가 되든가

그가 되든가로 떨어져야 할 것에

다 하나같이 이일 뿐인 것에

한 때 누구는 자신의 과오를 역사가 말해 줄 것이라더니

이 건 한 술 더 떠는 고단수인 것인지 

오지도 않는 일을 벌써 온 듯이

메아리도 울림증같이 

반복 수업에 구구절절한 듯이 저들 입에서 나온단 말인지 

 

 

마음의 원소적 양파(兩派)로서의 힘

 

보통 원소 3 주기율의 안목에 든 수리(數理)라는 것은

어떤 형태의 개체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수리적 낱개의 개체일 뿐으로 하는 것으로

그러면 마음이 전반적인 구심력을 갖는 것이라면

념(念) 자체가 여러 시공을 초월하여

감(感)을 낼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소수점을 뒤집어 수소(水素)에서의 관점

 

소수점을 뒤집어 수소에의 관범이라는 것은

마치 코끼리 다리 더듬 듯

터진 풍선이 공교롭에 뒤집어진 채로 꽈리 풍선처럼

불거 나와 그려나가든가

아니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규칙성을 보이되

어느 반 쯤에 경계가 있음으로 하든가

아니면 개체 상으로 수시로 그렇게 뒤집혀 짐으로 펴든가

 

 

나름의 센스를 부착하기

 

예를 들어 공기 방울이 0의 소수점으로 채우질 못 하고

둥글게 나갈 때

그럼 소수점을 채우지 못한 나간다고 해서

물이 없는 것이 아닌 것으로서의 둥근 형태의 氣와

물의 氣는 어떻게 다르냐에 따라 우주가 천 자락이냐의 식별성

 

 

양자공학적(量子工學的) 쪽집게

 

空亡은 그 전체를 하나로 할 수 있는 띠와 같다

그래서 공망은 소수점을 채우는

즉 1을 채우는

1로 할 수 있는 여백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공망이 발동한다 함은

그 空의 수리만큼 빈 채로 공기 방울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空을 채우면 1이 됨으로서 물로 하나인 것과 같은 것이니

원소로 보면 水素를 체웠음에

주기율적 다를 원소에 수소와 같이 하여 들었다는 것으로

이는 이온의 유동성에 앞서

개체적 기능성의 메카니즘을 알 수 있음이다

 

 

고깃집은 외롭다

 

요즘 도시의 밤을 보면

고깃집은 군중처럼 군집하며 늘어나는데

주변은 더 어둠다

우리가 고기가 문제라고 떠들 때만 해도

고깃집 외에도 다 훤했는데

요즘에는 환하게 섬처럼 보이는 것은 고깃집 뿐이다

씨알도 안 먹힐 것같은 것이 먹히고 남은 것이 

이젠 누구 누구의 얼굴조차 모를 정도로 주변은 어둡고 침침할 뿐이다

마치 깡 마른 강 웅덩이에

모래무지나 버들치가 수양버들 그늘에 마냥 고마운 듯이 한다

이 것이 우연이더란 말인가

어찌 그리도 조명등이 그 것 하나의 무대 뿐인 듯이 잘도 비추는지

참으로 기막힌 백성이 아니든가 

 

 

단위를 넘나드는 시공성의 확보를 위한

 

시공이 다르더라도 단숨에 한 손바닥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개념

이 환(丸)이라는 글자를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구궁도(九宮圖)의 회전체를 하나의 단상에 올여 놓아

단상 1에 소똥구리 뭉치 0을 합하여 10이라 함이다

100은 또 그 10 뭉치를 10개로 해서 100이다

즉 0이 두 개여도 크기가 다른다는 것이다

그럼 일례로 124라면 백에 24라는 것이 되지만

2와 4를 합하여 6이 된다고 함을 취용할 때

이는 곧 두 시공을 하나같이 취급함과 같은 것이다

즉 십 단위의 시공과 일 단위의 시공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역리(易理)의 계산에는 이런 식으로 셈법을 많이 하는데

한 시공 상으로 질서적 순서를 보전하는 시간의 연쇄정에 있을 수 있음도만물이 시공을 초월했음의 수리적 함수를 가짐에 있는

그  바탕 위에 있는 것으로 의미를 엮어가되

바라볼 뿐 관여됨이 없다는 것이 되기에

두 수리가 병행하는 중에도

서로 걸림이 없는 상태라는 입증이 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책임감

 

어찌보면 벌써 오랜 예전과 같이 여겨지는데

이미 지방 터미널마다 대형마트가 설 때

지방의 돈을 서울로 다 가게 한다고 말이 많은 것이었는데

이 것은 단순히 대형화에 먹힌다는 것보다

지방의 돈이 지방으로 돌지 않는다 데 심각성을 문제삼은 것이었다 

옛날보다 더한 듯

말 많은 자는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돈을 서울로 서울로 되어 버렸는데

그 장단에 사람도 서울로 서울로 끊임이 없다즉 사람들이 그 것이 지자체 상황인지

전국구 상황인지 그리 분별력 있게 인지를 하려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언제부터인가 불문율과 같이 교묘히

들은 바도 없고 느낀 바도 없는 듯이 묻히고 묻히고 하는 것이 되어가는 것으로

시민들은 자가용에 감질난 듯 거리와 상관 없이 잘도 들끓기 마련인 것이라

이 것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기둥 다 갉아 먹히고 마는 형상인 것에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방자치를 하고부터 더 활개가 난 것을 보면 기막힌 노릇인 것

나름의 자치적 컨소시엄으로 대형화하여 입주 시키는 노력을 않은 것은

분명 방임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인 것으로서

나름의 정치적 받침을 해주어야 하는 것을 외면한 것이다 

개인적으로서의 지방기업은  파산하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기업일수록 지방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지자체가 제 밥통을 걷어차고 그저 중앙에 훌러주는 밥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원체 중앙의 미끼가 좋으니 일언반구도 엄두가 안 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이 것인 물질로만 한게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라는 기틀이라는 것도 

자유경쟁으로 하는 것은 좋지만

그리고 개별적 가치의 존중을 모토로 수긍하는 것도 좋지만

상황이 지방자치적 상황이냐

전국구적 상황이냐는 잘 분별하여 처신을 하여야 하는데

즉 자신들의 무리로만 이룰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컨소시엄적으로 큰 인물됨을 내세워야 하는데

마냥 지자체 우두머리로 한 머리 내밀겠다고

오합지졸만 이끌고도 타협점을 잘 찾았다는 것으로

마냥 책임감을 못 느끼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일 것이다

 

 

운명이란

 

운명이란 아무리 한 길로 갈려해도 과오는 남기 마련이다 

그 건 어차피 지구축도 기울기마련이니 겨울과 여름이 오는 것과 같다

그래도 모든 생명력을 그 걸 이기고 나온 것이다

우리가 계절을 운명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사주 상으로 대운을 계산할 때 그 선에 있기 때문이다

즉 환경이란 계절적 기울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팔자도 기울임에 맞춰 기울음으로 의지하며

결국 중화의 하나로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팔자 상으로는

좋은 사주보다 대운을 먼저 복으로 치는 것이다

그 것이 기본적 안녕과 평온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생명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고

실수도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력이란 계절 너머의 가치라 한다

즉 계절을 이기고 나온 가치라는 것이다

우리가 계절적 과오를 남긴다고 하더라도

그 너머를 함부로 행사하려 한다면 결국 그 것은 계절의 문을 포기한 것이다

즉 다음 생에는 운이 닫힌다는 것이다

이 것이 지구를 떠난 별의 세계인 숙명(宿命)이라는 것이다

운명의 관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가 거칠 듯 무간지옥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왕도 팔자가 있는 것이며

옥황상제나 전륜성왕도 팔자 있음이다

이는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바다

 

 

달 이야기

 

인간이 잠 자고 꿈 꾸는 것은

달이 뜨기 때문이다

달의 모성은 대단하다

달거리가 그렇게 지킴이다가 오게 하였으니

보내놓고도 늘 돈다

 

 

28 수(宿)과 숙명(宿命)

 

인간이 좀 더 구름에 달가듯이 풍류적일 수 있는 것은

지구가 28 宿이라는 좀 더 지엄한 바탕을 이룰 수 있음으로서 가능한 것이지

마냥 생겨먹은 대로 인간에 의존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28 宿은 천번지번(天煩地煩)이 있듯 좀 더 지옥과 같은 개념이 담겨져 있다

그럴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이 宿이란 것은 별을 의미하고 잠잔다는 의미인데

이 것이 땅에 잠긴 것을 의미하며 바람보다 더 견고하니

이 것이 꿈이가 생신가 하든간에

재봉틀로 치면 아랫실 즉 북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노래의 날개 위에 마냥 천상의 꿈이나 꾸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결국 숙명적으로 걸려 종살이 하려 온 것이니

아무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종 노릇이 마냥 좋을까

 

 

미생전본래면목(未生前本來面目)

 

자손이 있으면 삼대에 가서 빛날 것이요

자손이 없으면 삼세가 소멸할 것이다

아! 디뎠다 한들 내 별이였던가

때가 삼층밥같음에 노을이 붉을 뿐

이 이치에 메이니 못이 빠진다 

인간이라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겠을

고요가 평화롭기만  하다

 

 

원소주기율이 갖는 풍수적 인체

 

신경이 핏줄을 감싸는 것이니

즉 이 원소 7 주기율적 피부적 말초적

구성력이 되는

지하화이든 천상화이든 

그 발화의 점이 아니라

모세혈관을 신경계가 싸듯이 하면

격리 된 체로 여과되듯 투과 되듯이

나무와 꽃이라고 할 것과 같음에

 

 

수제비

 

물에는 물수제비

나무에는 녹잎 수제비

꽃에는 꽃수제비

열매에는 꼭다리수제비

꽃가루에는 진액수제비

 

 

오행의 역순(逆順)과 인체의 취지

 

어떤 뜻의 비밀이

그 것이 空이든 無이든

그 것이 빛과 함께 뭉쳐져 미친 것이

변(邊)으로서 구경(究竟)을 이루는 것이라면

일상 꽃이라는 염두에는

소나무에서 보이는 것처럼

나무에서 용암이 분출하듯 꽃이 아니라

이미 파견되었기 때문에

빛을 받아들이는 기능성으로서의 재생력과 회복성이라면

그 정도로 나무가 꽃이 아니라면

또한 빛이 물에서 튀는 에너지로 보아

나무로 아무리 커도 모자람이 없는

뜀뛰기와 같은 것으로서

나무 또한 빛의

마치 전파의 나무가 소리의 나무로

둔화(鈍化)되어 피는 듯이 할 뿐이라는 것에송진이 흐르는 만큼  꽃도 피는 듯이 하는 것을

 

 

서술통(敍述筒)으로서의 파자(破字)

 

아마 파자 풀이에 있어서 하나의 점적 부호로서

인연적 해석의 파자풀이보다

훨씬 전체적인 것으로서의 흐름 그대로가

마치 말린 음식처럼 가루내어 먹는 음식맛과 같이 하는 것이라면

제갈 공명이 냈다는 남양결 교련수라는 것이 있는데

과연 이 것이 그만한 활용성의 기능이 있는가는

과히 빛을 삼켜

그 맛이 언어적 구성을 갖는가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 있다

이 것은 그 내용의 조식보다

과학적으로 보면 초기 수퍼컴퓨터와 같은 광물성과 같은 것이며

매우 거칠고 날카로운 형태라

스스로가 큰 굴레로 인식적 보조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은데  

그래도 그대로다듬지 않고 확장적으로 조성되었음은 매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이 그래도 예술성을 나타내는 표현이 되는냐에 증언과 같다 

맛이 없고

그리 감성적이지 못한 호도 껍질을 가지고

그 것을 가루내어

마치 쌀에 글을 새기듯 조각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글씨의 조판과 같은 것으로

글의 서술과 조판적 행위가 따로 해석되는 것으로 

제 일차적 행위와 2 차적 행위로 따로 해석을 하게 된다면

이 것은 원소 1과 2 주기율의 차원이 아니라

6 주기율인 물에서 튀는 별모양을 다모아

거푸집적 형태로만 쌓여 누적된 것을 다시 파쇠하여

조각적 형태로 이해할 수 있는 낱말적 자휘(字彙)를

행위가 이어지는 것으로서의 집결체로 구성해

또 다른 서술형의 답이 나오는 것이라면

이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내밀성을

한 차원이 행하는 중에 내놓는 것과 같으므로

행 중에 내놓으라는 것에 매우 요긴한 발상이 될 수 있고

매우 과학적으로 실질적 돋보기가 될 수 있음도 된다

즉 서술에 용해지지 않는

서술형으로 고착되는 것이라면

굳이 병행적 서술만이 아닌 한 조각의 부호적 가치만으로

불현듯 영감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다는 것으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진행은

일일이 의문이 많아지는 일방적 행로에 브레이크될 수 있는

즉 교차로의 신호등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띠기도 할 것이다

예로부터 글자 하나로 푸는 단답형 파자로서의 인연보다

서술의 행이 모두 파자됨로서 다시 결집된 서술로서는

남양결 교련수의 가치를 좀 더 과학적으로 중시해야할 것으로

그냥 피막적인 인식인 것 

즉 보는 것만으로 느끼는 象의 형태가

그와 동화하여 이뤄나가는 유기성과 함께 할 때

다른 여러 감각적 느낌으로서의 인식 패턴의 숲을 이룬

한 단면성으로 자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서의

이 모든 것이 개인적 생각에서의 마음이

바다의 감성으로 뭉게구름적으로 일어나는 것보다

빛이 엽록소로 일어나는 것이 더 DNA적 병행선상이라고 봐야할 것이며

아무리 앞에서 破字的으로 산이 무너져도 뒤로는 줄이 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이 것이 관념화된 인식과 자연적 인식과 차이를 둘 수 있는 것이나

이러한 인식적 센스의 호환성이 자유롭던가 하는 경유는

마치 인간이 빙의만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음과 같다

즉 빙의란 신이 우리에게 빙의됨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시공에 빙의함으로서의 센스를 가짐도 있지 않나하는 것이 된다

즉 우리가 인식 선상으로 해석하는 서술이 빙의에 속하면

빛이 사물에 드는 것으로의 내면성인 것이

빛이 거푸집을 이루는 한 두께로서의 측면으로 스며듦에

스로 일어나는 성장력이란 것도 이러한 외변성의 접근도 가능하여

그 실체를 더욱 안목 상으로 드러내놓을 수 있는 것으로

마치 우리가 빙의하여 감으로서 역설적으로 드러낼 수 있음과 같다 할 것이다

 

 

주여!

 

점 하나의 주(.)여!

사람 하나 한가로이 않는 배에

해가 비친 점의 주(舟)여!

왕좌라도 누구라도 그  위에 앉으면 주인이라고

주(主)여!

 

 

불과해(不過海)

 

독도여!

한사코 한자가 우리나라 말임을 기념하여

독야청청 고조선의 민족

舟가 간다

舟가 온다

어쩌다 세월에 母가 낡아

舟로 트였더란 말인가

이젠 아득히 丹이 되어 오고

丹이 되어 가며

점 하나로 난리로구나

어찌 뱃머리 들썩거려도 

꼬리가 빠지지 않는단 말인가

아! 동해여!

앞으로 네 이름은 불과해(不過海)로 하려무나

이미 앞 용골은 어찌 된 丹인지

丹과 丹이 태극으로 돌면 母가 되고 말겠을

아! 동해여!

차라리 서로 지나치지 못할 母이니

불과해(不過海)로 하려무나

 

 

ㅇ와 ㄴ

 

풍수와 푼수

이 낱말로서도 군더더기일 때

그냥 ㅇ과 ㄴ

차고 우그러든 것

풍수! 

그 것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니

팽팽 탄력 있는 것이니

여기에 비춰 바람 빠진 것이 푼수라고 함이니

 

 

공망의 입장

 공망이 動하는 데

충(衝)이면 실(實)인가 산(散)가 하는 실질성은

왜 하필이면

버스를 기다린다는 것이

지하도로 입구 곁에 있었던 것인지

나중에 알고보니

가로 가든

지하도로로 오든

운전자 마음대로였던 것을

몆 몇은 지하차도로 바로 통과한다 싶어도

다들 옆도로로 오는데

디다리는 차는 느닷없이 지하도로에서 불쑥 머리를 내민다

앗차 이젠 놓치는가 싶은데

기막히게도

늘 호시탐탐 노린다 싶던 아낙네가 

손을 흔들며 뛰어나가 급히 속도를 줄이게 하고서야

그나마 한 참 지난 앞머리로 뛰어가 탈 수 있었으니動爻 공망은 주행자가 코스를 잊든가

질러가는 혛태를 나타내고

靜爻 공망은 기다리는 자가 코스를 착각하든가 하는데

꼭 시간과 공간은 재차 확인할 필요성을 간과한 것이다

進神까지 공망이면

어떤 행사로 인한 완전 폐쇄든다 한쪽 코스를 없앤 경우이고

空이 동하나 進神이 실(實)하면

그 정류장이나 중간 코스만 빠지는 경우이고

나머지는 본래의 코스로 보아야 함인에

이는 공간성에서의 진퇴성을 말하는 것이고

즉 이 것은 도로공사에서 행하는 공망인 것이고

이 것 또한 운전자가 행하는 공망이면

회사 내에서 코스를 바꾼 형태인 것으로서

이런 세분화가 있어야 

물리이든 화학이든 힌트나 영감이 될 기틀이 되어준다는 것으로

진실이 이렇듯 밝아짐에 있어서도

많은이들이 아침 안개처럼

침 한 번 삼키기도 전에

중턱에만 닿아 돌아가기 바쁜 듯이 살 뿐이다

이 것은 시와 공간의 허와 실을 말함인 것이니

세상은 겉보기보다 실한 것

그러니 너무 외양에 치우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두 개의 병행선상의 조우는  무엇인가

 

부호성이란 눈에 들어오는 감각의 섬세성이다

그런데 이 것이 파쇄되어 부호처럼 흩어진 듯이 하고

다시 조립된 듯이 할 수 있다면

그 부호의 모양이나 동하는 행태로 묘사되는 그림물과 같다면

이 것은 단답형의 파자놀음이 아니라

문장 자체로 짜집기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파자한 낱말들을

한 문장이 되게 연결된 이해와

인쇄 조판에 올려놓기 전에

올려지는 행위에 있어서의

글자 자체의 모양과 형상으로

하나의 서술이 따로 이룰 수 있는가에 따라

병행선을 구축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같은 원소 주기율 내의 무의식이

다른 族에서는 타의식인 동시에 자의식이 됨으로서

시공을 自他라 할 수 없는 것으로 다 수용하는 것으로 보는 차원에서는

이 주기율적 거울판이라는 것은 

곧 6 神通을 자유자재 판으로 올려 놓음과 같음에 

떡돌이어도 그 비색은 없으나 모양을 낸 소통은 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대화하는 서술적 장단과 같이

이 대지에 바람이 부는 것이라면

우리가 하는 행위는 파자적 산재로서

부호의 모양을 따라 판토마임처럼 일어날 수 있느냐와 상통하는 것이다

즉 3 주기율 火로서 인식하는 것은

원소 6 주기율인 바다에서 햇살이 부셔지듯 파자(破字)가 된다

이는 물의 흡수성으로 인식이 되지만

그 파편적 조각으로 다른 형상을 이룬다면

이 것은 빛이 나무의 탄소동화작용에

유기성으로 갖고 진행 중인 것과 병행함과 같다

즉  일은 일어나되 인식의 패턴이 다르게 일어나는 것으로

조각성과 파편성으로만 인식하기엔

내용적 맛이 아니더라도

빛이 사물에 그물망처럼 얽힘을 주로 하는 것에서

부착이 되어 응고되었다고 할 때

이 것이 껍질 뿐인 것에 불과하더라도

빛으로 된 각질로서의 파쇄된 모양만 가지고

그 뜻을 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것은 빛에 의한 다른 생성력에 잠복된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음에

이 직접적 그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물에 흡수된 골수적 행위와

반사된 다른 사물에 흡수된 두 개의 행위적 갈래를 취용할 수 있음과 같다

그러므로서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의식계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다른 병행 선상의 한 형태에 있다는

즉 인식에 드러난 서술성을 거품으로 하고

거푸집으로 하고

파자 속의 형태를 알맹이로 발견할 수 있는

기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느 문장을 보고 그 문장에 치우침이 아니라

글자의 한 모양새로 실질적으로 다른 비경을 발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상피성을 갖는 중요성은

초정밀적 천기에 드는 기능을 한다고 평가하여야 하며 

우린 이 상피성의 조합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아

물에 흡수된 의식보다 반사된 의식계로

그 내막을 모르고 치우침에 있으면서 판단이 서는 것이

껍질의 견고성과 함께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일상적 통용이지 않나  하는 것도 된다

얼마만큼 양쪽이 독립적일 수 있느냐의 관건도 되지만

이 것은 정밀해 보이는 쪽의 진행이

실상은 더 투박한 쪽으로의 진행일 수 있는 것으로

이미 사물의 고체화가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걸 우리가 빛의 빠르기 내의 인식구조라는 것에서의 껍질이라고 볼 때

다만 원소 1 주기율 내에의 커뮤니케이션은 알맹이로서 탁월하다는 것에서의

원소 1 주기율 상의 마음의 인식성은

매우 쇠와 같은감수성을 갖고

어떤 고리에서든 인연답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기율 간의 벽보다 族 間의 벽을 넘기가 훨씬 어려운 과제인지 모를 일이다

마치 주기율의 파쇄성이 원소라고 할 때

또한 이 섬세성에도 이 잡듯이 내몰리는 경우라면

벽이 곧 문이듯이 할 뿐이듯이 할 때

이 파자적인 조술이 되는 것에서

그 이해의 조형에도 미세성을 깨달아

느닷없이 선율의 마디에서 불현듯 깨우쳐 빠져나갈 듯이 하는 것이다

 

 

맷돌

 

돌이란 돌았다는 것이다

즉 돌았기에 돌로서 손에 잡힌다는 것이다

이도 매질하면 매돌이요

너무 맨들하면 안 되니  

이 것이 곰보면 맷돌이라

그래서 글자 두 자를 이을 때

ㅅ을 받치면 맷돌이니 사이에 무엇이 있을 것이요

그냥 붙으면 용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