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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金丹)의 비밀

narrae 2013. 12. 24. 07:17

금단(金丹)의 비밀

오쇼 라즈니쉬 강의


김 현 배 역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는 그 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전래
또한 신비스럽기만 하다. 서양으로 건너가 번역 소개된 이 책은
원래 중국 선도(仙道)의 고전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나중에 가서야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이 책의 유래는 중국의 유명한 8선 중의 한 사람인 당대(8선 )의
여동빈(呂洞賓)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동빈 자신은 그것을
노자(老子)가 『도덕경』을 써 주었다는 관윤희(關尹喜)에게로 돌리고 있어
이 책의 기원은 그대로 중국 선도의 교조(敎祖)라고 하는 노자에게까지
소급된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필사본으로 정착된
이 책의 최초 목판본이 나오게 된 것은 17세기이며 활자로 인쇄가 된 것은
18세기 청나라 권륜 황제 시대이다.
원본의 편저자인 혜진자(慧眞子)라는 도인에 의하면 이 책의 일부는
고서점가에서 발견되었고 나중에 친구가 소장하고 있는 책자를 통하여
빠진 부분의 원문까지 완전히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책은 순수하게 「태을금화종지』의 내용만이 실린 단일본이었으나,
1920년 북경에서 1천부가 간행될 당시 여기에 류화양 선사의 『혜명경
(慧命經)」이 합본 형태로 묶이게 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책자의 형태가
갖추어진 것이다.
서양으로 건너가 많은 저명한 학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이 책은
선도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그들의 머리를 온통 수수께끼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으나, 기(氣)라든가 신선(神仙)과 같은 선도 용어에
친숙해져 있던 옛 동양인들에겐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지는 간결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거의 서양화되어 버린 현대의 동양인들에게 있어
이 책은, 이제 그것을 최초로 접했을 때의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비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 선도의 맥락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도교에서 말하는 무량수(無量壽), 즉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하는 선도는
그 밭생지가 중국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우주의 주재자인 원시천존(原始天尊)이 복희(伏羲)에게
전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태양신을 숭배했거나 또는 태양신 그 자체로
알려져 있는 복희는 주역의 팔괘를 만든 존재로서 신농(神農)이라는 신선에게
그의 도를 전했다고 한다. 신농은 자신의 몸을 생체 실험의 도구로 삼아
초목을 먹어가며 하루에도 80여회나 중독에 걸리면서
각종 약초를 발굴해낸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선도를 광성자(廣成子)라는
선인에게 전했으며, 광성자는 천이백 세에 도를 찾아 나선 중국
최고(最古)의 황제인 황제(黃帝)에게 그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황제는 침구 의학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내경(黃帝內經)』에 나오는
전설상의 인물로서 그로부터 도를 이어받은 것이 바로 선도의 교조
(敎祖)로 일컬어지는 노자인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인물인 노자는 성은 이(李)요, 이름이 담이다.
전설에 의하면 모친이 잉태한지 70년 만에 오얏나무 밑에서 낳았다고 하여
성을 이씨로 하였다고 한다. 노자는 원시천존 또는 영보천존(靈寶
天尊)이라고도 하는데 당 황제가 봉한 태상노군(太上老君)이란 도호가
일반적으로 그를 존칭해서 부르는 칭호이다.
노자는 그의 도를 소양제군(小陽帝君) 왕현보에게 전하고 왕현보는
정양제군 종리권에게 전했다. 중국 8선 중의 한 사람인 후한의
종리권(鍾離權)은 그의 나이 오백 세, 당나라 즉천무후 시대에 역시 8선의
하나가 된 제자 여동빈에게 도를 전해 주었다. 여동빈은 이 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있는 인물로서 경문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조사
(祖師)'란 여조사(呂祖師), 즉 여동빈을 가리킨다. 여동빈이란 신선은
송, 원, 명, 청의 각 시대에 나타난 유명한 선인들에게 선법을 전수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까지도 대만에 나타난 적이 있다고 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암이요, 자는 동빈인데
당나라 때 인물로서 처음에는 선도에 크게 통하였고 나중에는 불도에 입문하여
역시 크게 통하였으므로 여조사(呂祖師)로 불리게 되었다.
여동빈은 두 제자를 두었는데 해섬제군(海蟾帝君) 유성종(劉成宗)에게는
방중술을 위주로 하는 쾌락형의 선법을 전수했고, 전진교(全眞敎)의
창시자인 중양진인(重陽眞人) 왕덕위(王德威)에게는 금욕적인 선법을 전했다.
그리하여 유해섬으로부터는 장백서(張伯瑞) 석행림(石畜林)
설자현(薛紫賢) 진리환(陣泥丸) 백자청(白紫淸) 팽학림(彭鶴林)에게 법맥이
이어지고, 왕중양으로부터는 마단양(馬丹陽) 송피운 이태허(李太
虛) 장자경(張紫瓊) 조녹독(趙綠督) 진상양(陣上陽)에게 이어져 이 두 줄기가
중국 선도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선도라고 하는 것은 흔히 세간에서 알고 있듯이 단순히 수명이나
연장하여 불로장생을 꿈꾸는 그런 비술이 아니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본래 성품인 단을 회복하고자 하는 반환의 도이다.
그래서 선도를 단도(丹道)라고 하기도 하고 또 그 단의 낳고 죽음 없는
심원한 성품으로 인하여 금단도(金丹道)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잃어 버린 본래의 단을 회복하여 불로불사의 금단을 이룬 사람을 가리켜
신선(神仙)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도는 이 단(丹)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에 따라 크게 천단법(天丹法),
지단법(地丹法), 인단법(人丹法)의 세 가지로 구분이 된다. 천단법은 천지의
기를 흡입하여 다지는 것을 본체로 삼고, 지단법은 각종 약초와 약물의
복용을 본체로 삼으며, 인단법은 남녀의 성관계를 본체로 삼는 방중술
선법을 가리킨다. 중국의 선도는 이 세 가지 선법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나름대로 배합해 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분파들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 북 파 : 중국 북부에서 성행. 내단파 또는 단정파라고도 하며,
천단법을 위주로 하여 불로불사의 금단을 이루고자 함.
전진교, 오류파, 용문파 등이 여기에 속함.
· 남 파 : 화남 일대에서 번성. 인단법 위주. 삼봉파도 여기에 속함.
이순도, 황원길이 창시한 파.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가 선도 다른 파와는 달리 단을 만들지 않고 직접
몸에 특수한 파장을 걸어 체질을 바꾸어 몸을 기화시켜 가는
신비한 파.

외단파 : 지단법을 위주로 하여 약초와 약물을 조제 복용.
부주파 : 부적과 주문을 사용해서 천지의 기운을 부리고 도술을 사용하는 파.
점험파 : 역경을 위주로 하여 천지 자연의 기의 흐름과 인간의 운명이
어떻게 어우러지는가를 탐구.
무공파 : 무술 단련에 기를 운용하여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내는 파.
· 적선파 : 원료범이라는 선인이 창시. 선한 일을 하여 공을 쌓아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가고자 함.

이와 같이 다양한 파들이 존재하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은 국내에도
여러 선도의 맥이 존재한다. 이들 선법은 궁극적으로는 우화등선(羽化登
仙) 또는 백일승천(白日昇天)을 목표로 삼고 있다. 우화등선이란 보라빛
또는 백색의 빛이 감도는 가운데 몸이 기로 화하여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선도의 수행자들은 그 보랏빛 자하(紫霞)를
꿈꾸며 완성된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그 자하도 내지는 무룽도원을
이상향으로 갈구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국내에서도 선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선이나
호흡 수련에 몰두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우화등선까지 가기에는
요원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군다나 이렇다 할 만한 선도의
해설서도 제대로 나와있지 않아 옛 성현들의 선지식이 끊긴 상태이니
어려움은 더욱 크다 하겠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선도에서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태을금화종지』의 현대적인 해설서를 번역 소개하게 되니
용맹정진하고 있는 많은 구도자들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것임에
대단히 감회가 깊다.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1992년 봄 역자 씀

 

     <<목차>>

       1. 음(隆)과 양(陽)
        2. 제 3의 눈
        3. 빛의 회전
        4. 도(道)의 씨앗을 잇태하고
        5. 하늘같이 넓고 바다같이 깊게
        6. 코 끝에 감추어진 비밀
        7. 마음으로 듣다
        8. 영혼의 새벽을 향하여

        부록 1부
          혜명경(慧命經)」


   1. 음(隆)과 양(陽)


여조사(呂弔師)께서 말씀하셨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道)라고 한다.
도에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본성(本性)이요, 하나의 근본정신(元神)이다.
본성(性)과 생명[命3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의 빛」天光] 속에 들어있다.
하늘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양 눈(兩目) 속에 들어있다.
위대한 하나(太乙)란 무상(無上)의 것을 일컬음이다.
단(丹)의 오묘한 비밀(訣)은
유위(有儒) 가운데서 무위(無儒)를 얻는 데 있다.

황금 꽃⊂金華]은 빛(光)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물고을[水鄕1의 납(鉛)은 한 맛(∼味)을 낼 뿐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빛을 회전시키는 일』回光功)은
전적으로 되돌리는 법(逆法)에 의존하며
그리하여 상념들이 응집된다.
하늘의 마음(天心)은 해와 달 가운데 위치한다.

「황정경(黃庭經)」은 말한다.
'방촌(方寸)의 터와 방척(方尺)의 집(寸田尺宅) 안에서
생명이 다스려진다. '
방촌의 한가운데 고요의 자리(蕭台)가 ◎을 발한다.
그 보옥(寶玉)의 도성(都城), 보랏빛 궁궐(丹闕)에
지극히 비어있고 신령한輕虛至脚 熱神)이 거주하신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할 때는 몸 전체(全身)의  에너지가
그의 왕좌(王座) 앞에 조회한다.
마치 성스러운 왕(聖)이
도융難脚을 정하고 기본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을 때,
모든 나라」瀉國)가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듯이.
또는 주인이 고요하고 현명하면 남녀 하인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각자 자기 일을 하듯이.

그러므로 단지 빛만 회전시키면 된다.
이것이 가장 깊고 오묘한 비밀이다.
빛은 움직이기는 쉽지만 고정되기는 어렵다.
충분히 오래 회전만 되면 빛은 스스로 응집(凝集)된다.
이것이 바로
'고요히 아침에 날아오른다(默朝飛界)'고 말해지는 경지이다.

이 근본 원칙(宗旨)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다른 방법은 구할 필요가 없다.

상념을 거기에 순화(純化)시키기만 하면 된다.
상념을 순화시킴으로써 날아올라 천상(天上)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황금 꽃(金華)은 불사약(金丹)이다.
이 가르침은 아주 완전하지만 또 유동적이기도 해서
최고의 지성과 총명, 가장 완전한 몰입과 평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최고 수준의 지성과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수 없다.
이러한 몰입과 평정을 위한 고도의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야
그것을 수지획득(守持獲得)할 수 있는 것이다.

우화 하나‥‥‥

옛날에 많은 양떼를 가진 부유한 마술사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인색했다. 그는 양치기를 고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목장 주변에 울타리조차 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들은 자주 숲 속에서 길을 잃는가 하면 도망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계곡으로 떨어져 다치는 일까지 있었다. 왜냐하면 양들은 마술사가 자신들의
고기와 가죽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마술사는 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양떼들에게 최면을 걸어
우선 첫째로, 그들은 죽지 아니하며 가죽을 벗겨내도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우 유익하며 즐거운 일이라고 암시를 주었다.
둘째로, 마술사야말로 훌륭한 주인이며 그의 양떼를 매우 사랑하여
양떼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암시를 주었다. 그리고 세번째에 가서는, 양들이 걱정하는 어떠한 일도
바로 그날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을 생각할 아무런 필요도 없다고
암시를 주고, 나아가 전혀 양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들 중
일부에게는 사자라는 암시를 주었고 다른 일부에게는 독수리라는 암시를,
또 다른 일부에게는 사람이라는 암시를, 나머지에게는 마술사라는
암시를 주었다.
이후로 마술사의 양들에 대한 모든 걱정과 근심은 끝나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는 도망가지 않았고 마술사가 그들의 고기와 가죽을 취할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조오지 구제프( George Gurdjie()는 이 우화를 매우 사랑했다. 그의
모든 철학은 이 작은 우화 속에 다 들어있다. 그리고 이 우화는 일상적인
무의식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나타내고 있는 바, 인간의
현 상태에 대한 가장 멋진 비유이다.
인간은 하나의 기계이다. 인간은 기계가 되려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마치 기계처럼 살다가 기계처럼 죽어간다. 인간은 그의 의식을 위해
꽃피울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고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최면, 바로 사회와 정부와 조직화된 교회와 기존의
관리들 따위에 의해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노예를 필요로하고
인간의 영혼이 꽃피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만 하면 인간을 노예로
남겨둘 수가 있다. 사회는 그대들의 고기와 가죽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사회화니 문명화니 하는 모든 과정은 하나의 깊은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최면에 걸리기 시작한다. 그는 최면에 걸려
사회가 그의 구미와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그는 최면에 걸려 자신의 불멸을
믿게 된다. 그러나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는 있지만 최면에 걸려
자기 자신을 잃었기 때문에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최면이 계속된다면 그는 결코 불멸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단지 유한한 삶을 살 뿐이다. 그대들이 몸이라는 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죽게 마련이다. 태어나는 것은 죽게 되어 있다.
탄생은 몸의 시작이요, 죽음은 그 끝이다.
그대들은 몸 이상의 것을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몸 이상의, 혹
그 이하의 어떤 경험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해 온 어떤 것을 그대 속에서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것을
보았다면 그대는 불멸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얼굴, 본래의 얼굴,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 얼굴을 안다면 그대는 죽은 뒤에라도
자신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사람은 불멸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온통 죽음에 둘러쌓인 채 살아가고 있다. 사회는 그대가 육체
이상의 것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
사회는 단지 그대의 육체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대의 몸은 이용될 수 있지만 영혼은 위험한 것.
영혼의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언제나 위험하다. 그는 노예로 전락될 수 없다.
자신 속에 불멸의 영혼을 가진 사람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사회 구조니, 문화니, 문명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것들은 그에게 감옥일 뿐이다.
그는 기독교도나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군중의 일부일 수가 없다. 그는 철저한 개인( individual )으로 존재한다.
육체는 군중의 일부이다. 그러나 영혼은 그렇지 않다. 그대의 영혼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그 향기란 바로 자유이다.
그대의 영혼은 시장거리 따위로 쓰여질 수 없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그대의 육체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영혼을 위해 애쓰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사회에는 적신호가 된다. 그대의 관심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대는 외향에서 내향성으로 변한다. 그대는 내면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반면 사회는 바깥에 존재한다. 사회는 그대가 외향적이
되어주길, 그리하여 돈과 권력과 명예 따위에 관심을 가져주길 원한다.
그래야 그대의 에너지가 밖으로만 움직일 것 아니겠는가? 그대가 내면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것은 그대가 탈속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더 이상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이의 일부가 아니다.
그대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의 존재 속으로
깊은 잠수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영생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사회는 그대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저지한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란
바로 그대가 안으로 움직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관념을 심어주는
일이다.
마술사는 양들에게 그들이 사자라고 말했다. 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나아가 그들이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마술사라고
최면을 걸었다.
교회에 가는 것은 내면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절에 가는 것도
내면으로의 발걸음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최면을 걸어 교회에 가는 것이
마치 안으로 움직이는 것인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성직자들이란 정부
사회의 앞잡이에 불과하다. 성직자들은 항상 신비가들을 적대시해왔다.
신비주의자에게 가면 그대는 내면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 『태을금화종지( The secret of 燃e Golden Flower)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책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그대에게 몸 이상의
존재가 되는 방법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그대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비법을 줄 것이다. 이것은 그대가 꽃 피는 길, 씨앗 상태에서 벗어나
황금 꽃이 되는 방법을 보여 줄 것이다. 황금 꽃이란 우리가 인도에서
일천 잎의 연꽃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중국식 이름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꽃이란 완성을 의미한다. 꽃은 잠재력의 최상의 활현(活現)과 그
화현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존재의 아름다움과 웅장함과 찬란함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꽃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일천 잎의 연꽃이나
황금 꽃이 되지 않는다면‥‥‥
멀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회가 그대의 주위에 깔아놓은
함정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는 아직도
그대가 지구상에 태어난 목적의 일은 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는
한낱 씨앗일 뿐이며 아직 영혼이 아님을 기억하라.

이 책,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는 매우 오래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들 중의 하나로서 지금으로부터 2500년 내지는
그 보다도 더 오래된 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책으로 하여 2500년 전은 쉽게 추적될 수 있다. 이 책은
모든 위대한 종교들에 대한 위대한 통합이다. 이것은 매우 드물고 독특하다.
『성경』은 크리스찬의 것이고 「탈무드』는 유태인의 것이며, 『베다』는
힌두교도의 것이고 『법구경』은 불교도의 것이며 『도덕경」은 도교도들의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책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는 특별히
어느 누구에게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의 것이다.
이 책은 도교의 가르침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삶과 존재에 대한
도가적 접근법의 개화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도 한 몫을 했다. 짜라투스트라의 가르침도 그
속에 들어 있다. 불교도들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기독교의 한
신비주의 분파인 네스토리안( Nestorians )도 그들의 몫을 했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 또한 이 책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책은 가장 통합적인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이 세계의 모든 전통들 가운데
있는 일체의 아름다운 것들이 하나로 결집되어 있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입으로만 전수되었고 이 책은 신비에 묻혀 있었다.
이것은 매우 비밀스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공개될 수 없었다.
이것은 제자에게만 공개되었다.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스승은
제자에게 이것을 전수하였다. 그 내용이 너무도 심오하여 잘못 가르쳐질 경우
커다란 문제, 이를테면 치명적인 결과가 야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올바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승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것은 강렬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마치 원자탄만큼이나 강력하다.

오늘날 원자력 에너지의 비의(秘意)는 일반 대중에게는 숨겨져 있다.
이것이 누설되면 커다란 위험이 초래된다. 만약 한 개인이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엄청난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그래서 원자력 연구에는 커다란 보안 대책이 요청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도 그대에게 내면적인 폭발에 대한 가장 비밀스런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비밀이 수호되었다. 은밀하고
비밀스런 방법으로 제자에게만 전수되면서. 그리고 이 신비를 전수받은
사람들은 책을 쓰는 것에 대한 모든 유혹을 뿌리쳤다. 사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그들의 영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무언가가 입으로 직접 전해질 때는 거기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이 살아있기 때문이고 스승이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낱말들이 아니다. 그 낱말들은 영혼과 활기를 갖는다. 스승의 경험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며 스승은 하나의 증인이 된다. 그것은 하나의
사변이나 철학이 아니요, 실제적으로 경험되어지고 살아진 그 무엇이다.
그리고 스승은 그 길을 여행했다. 그는 장애들을 알고 길을 잃을 수 있는
지점들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제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대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길을 잃을 가능성은 더 많아진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대의 에고( ego )가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안다는 생각, 이제 나는 이루어졌다는 생각, 그리고
만약 에고가 그런 상태를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그대의 어두운 계곡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정상을 잃어 버릴 것이다. 그대가 진리에 다가갈 때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고 싶은 커다란 욕망이 생긴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 그 전체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반쪽 진리를 나누는 것은
위험하다. 반쪽 진리는 거짓말보다도 더 위험하여 강렬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불구이다. 조만간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반쪽 진리는 수세기를 살아 수세기 동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반쪽 진리를 가지고는 어느 누구도 이루어질 수 없다. 길을 반만
여행한 사람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떠돌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다. 그대는 옛 것을 잃기는 했지만
아직 새 것은 얻지 못했다. 그대는 혼란 그 자체이다. 옛 질서는 무너졌는데
새 질서는 들어서지 않았다. 그대는 구름이 되고 혼돈에 쉽싸이게 된다.
보다 명료해지고, 보다 살아나고, 보다 빛으로 충만되기보다는
차라리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이리 끌리는가 하면
저리 떨어진다. 그대의 반쪽은 땅에 속하고 다른 반쪽은
하늘에 있다. 이제 그대는 머물 곳이 없다. 그대는 아무도 아니다.
이것은 그대를 미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수세기 동안 「태을금화종지』는
입에서 입으로만 전수되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입을 통해서 전달될 때 책은 항상 살아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모든 것에 대하여 통합된 이유이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중국의 도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그때, 인도로부터
새로운 메시지, 즉 붓다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달마 대사였다. 『태을금화종지』를 공부하던 사람들은 매우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어떤 기성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달마대사 또한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고
자명한 일이었다. 그들은 달마의 가르침이 그들의 가르침의 일부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똑같은 일이 조로아스토교도나 기독교의
네스토리안들에 대해서도 일어났다. 계속해서 무언가가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그것이 가치있는 것이면 즉각 수용되었다.
입으로의 가르침은 강물처럼 살아있고 자라난다. 새 물줄기가 들어와
그것의 일부가 된다. 일단 가르침이 기록되게 되면 더 이상의 것은
수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면 그것은 딱딱해지고 유동성을 잃는다.
그것은 죽은 시체가 되어 버린다. 이제 『태을금화종지』는 자라지 않는다.
수세기 동안 그것은 성장을 멈추었다. 그것이 기록이 된 이후
자라기를 멈춘 것이다.
왜 내가 그것을 강의하게 되었는줄 아는가? 그것이 계속 자라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정말 멋진 메시지이다.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이것을 되살리고 싶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나의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나애게 왔고 거듭나기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꽃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야 새 싹이 난다. 씨앗은 썩어야 한다. 씨앗이
사라져야 그때 비로소 나무가 자라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비록 작지만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이 책에 대해 강의를 해 나갈 것이다. 나와 그대들 사이에서 이
책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흘러갈 수 있다. 정말 이 책은
어떤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대가 이것을 이해하고 실행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더욱 부유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그대가 최면에 걸려왔다는 사실,
그리하여 최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가 틀에
짜맞추어져 왔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것이 오늘
당장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일어날 수 있다.
사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지금 일어난다. 씨앗도 지금 죽고 싹도 지금
꽃이 피며 새도 지금 노래하고 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라고만 하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것도
과거나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현재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일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이란
현재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란 단지 기억일 뿐이며 미래란 한낱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과거 속에 살도록 최면에 걸려 왔고 미래 속에 살도록 암시를
받아 왔다. "과거나 미래를 선택하거라"라고 어느 사회도 현재 속에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독교도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 그들은 모두 그대로 하여금
과거 속에 살도록 조종해 왔다. 그들의 황금 시대는 과거 속에 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파시스트, 그들은 모두 그대로 하여금 미래 속에
살도록 조종한다. 그들의 황금 시대는 미래 속에 있다. 유토피아가
도래하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면 그대는 정말이지 멋지게 살 수 있다.
그때가 바로 황금 시대다.
그대가 과거 속에 살아도 그것은 허상이요, 미래 속에 살아도 역시
헛된 꿈일 뿐이다. 어느 사회도 그대로 하여금 현재,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산야신( Sannyasin )이 되고 참 구도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탈자동화( de-automatize )시켜야 하리라.
그대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며 약간 더
의식적이 되어야 하리라. 그대는 의식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떤젠가 나는 죽어가는 사람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교수로 있던
대학의 교수였는데 그는 성공적인 인생의 정점에 와 있었다. 그때
심장마비가 왔다. 이런 일들은 바로 그대들이 정점에 있을 때면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다. 성공은 언제나 심장마비를 동반한다. 이후로는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심장마비로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를 보러갔다. 그는 매우
슬퍼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죽지 않을 걸세."
그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모든 의사들이 모두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해서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인가?"
내가 대답했다.
"첫째로 자네가 죽을 수 없는 것은 자네가 결코 산 적이 없기 때문일세.
자네는 죽기 위한 첫번째 조건조차도 갖추질 못했어. 지난 55년을
자네는 마치 잠자듯이 살아왔어. 자네는 꿈은 꾸었겠지만 살아보지는
못한 거야. 나는 자네를 오랫동안 지켜 봤다네."
그는 쇼크를 받고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잠시동안 죽음에 대한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 버릴 정도였다. 분노에 찬 눈으로 그가 말했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란 말인가? 조금이라도 예의를
차릴 수는 없단 말인가? 나에게 왜 이렇게 심하게 구는가?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자네는 그 위대한 철학을 논하고 있어. 내가 결코 산 적이
없다니, 지금이 바로 그런 말을 할 때란 말인가?"
나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분노는 사라졌고 그는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 내렸다. 그는 나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말했다.
"자네가 옳은 것 같아. 라는 결코 살지 못했어. 무례하다고 할 만한
것은 없었네, 자네는 정말 진실했어,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지."
그리고 그때 그 큰 감격으로 그는 한동안 완전히 깨어나게 되어 그의
얼굴에는 어느 누구라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바로 전존재의 오라(Aura)였다. 그는 나에게 감사하며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가 내게 말했었다.
"자네가 만약 여기에 없었다면 나는 나의 죽음마저도 놓쳤을 걸세.
내가 나의 삶을 놓쳤듯이 말일세.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죽음을 의식하고
있다네. 마침내 나는 한 가지 행복을 얻었어. 나는 이제 나의
죽음을 의식하고 있지 뭔가!"
그의 죽음은 아름다웠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아무헌 후회도 없이 죽었다.
그는 거의 죽음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는 감사와 기도 가운데 죽어갔다.
그의 다음 생은 완전히 질이 달라지게 되어있다. 죽음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될 때 그것은 새로운 삶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그대들은 순간순간을 살아야 한다. 삶이든 사랑이든 분노든 죽음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능한 한 의식적이 되어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 농부가 망상에 사로잡혀 채소밭에서 오이를 훔치게 되었다. 그의
생각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 오이 자루를 내다 팔아서 그 돈으로 암탉을 사야지. 암탉은 알을
낳아 품어 병아리를 깔거고 그러면 나는 그 놈들이 자랄 때까지 모이를
주어야지. 그런 다음에 녀석들을 팔아 새끼돼지를 사야지. 그 놈도 자라
새끼를 낳으면 팔아서 정원이 있는 집을 사야지. 그리고 정원에는
오이를 심고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지. 힘이 센 파수꾼도 고용하고
나는 때때로 정원에 나가 '이 봐 잘 감시해'하고 주의도 줘야지."
그 농부는 너무 꿈에 부푼 나머지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감시하던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는 농부를 붙잡아 단단히 혼을 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꿈과 상상과 투영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완전한 낭비이다. 그대는 순간과 현재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 그대의 의식이 모아져야 한다. 의식은 그대의 보물이다.
수세기를 흘러내려 오면서 고안되고 발견된 영적인 방법들이란
그대 가운데 보다 많은 의식을, 보다 많은 불을 창조하여 그대의 삶이
열정으로 타오르는 하나의 불꽃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흐리멍텅한 삶을 살고 있다.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그냥
되는대로 살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부주의는 어둠이요, 깨어있음은 빛이다. 이제 이 책은 그대 속에 보다
많은 빛을 창조하는 비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날‥‥‥ 황금꽃이

두 정신병 의사가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한 사람이 말했다.
"자네는 잘있군. 그런데 나는 요즈음 어떻게 지내는가?"


사람들은 서로 묻는다. 아무도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그렇게 중요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에게 바보라고 하면 그대는
화가 난다. 왜인가? 때로는 슬퍼지기도 하는데 왜인가?
그대는 부서진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현명하다고 했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처럼 그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다. 이제 다른 누군가가 그대를 바보라고 한다.
그는 쉽게 아주 쉽게 그대의 현명함을 부서버릴 수 있다. 그대의
카드놀이 장소에 그는 돌을 집어 던졌다. 이제 모든 것이 부서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화를 내고 발끈하고 그토록 근심 걱정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그대에 대한 생각들만 알고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자 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바깥에서는 아무도 나를 알 수 없다. 그런 방식이 나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바깥에서는 내 몸만이 보일 뿐이다. 안으로부터라야 나의 의식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거울 앞에 섰을 때조차도 그대가 보는 것은 몸 뿐이다. 거울
속에서 그대의 의식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 보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거울에 비치지 않으며 반사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볼 수 없다. 그대는 눈을 감고 그것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 살아간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은 언제든지 그것을 거두어 가버릴 수 있다.
사람들은 거지가 되어 버린다.
그대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아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빌지 않고 그대 자신과 직접 조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그대는 아직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자신과의 조우로
, 자신을 직접적으로 즉각 보는 것으로써 시작된다.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으론
안된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그대의 행동은 볼 수 있지만 그대는 볼 수 없다.
그대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대 뿐이다. 다른 누가 아니다.
그대의 하인에 의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누구에게 양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도 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의 내부에는 깨어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도 다른 사람의 의견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깊은 잠, 그야말로 우리의 내부는 깊이 코를
골고 있다.
한 정신나간 교수가 이발을 하러 갔다. 그는 이발소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모자를 벗을 줄 몰랐다.
이발사가 말했다.
"모자 좀 벗어주시겠습니까?"
"아이고, 이거 실례했습니다. 여기에 숙녀가 있는 걸 몰랐습니다. "
자신의 얼빠진 마음을 들여다 보라. 보는 행위가 주의력을 창출시킬 것이다.
그대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주시하라. 지나가는 생각들,
되살아나는 기억들, 분노의 구름, 슬픔의 깊은 밤, 기쁨의 즐거운
아침. 내면을 스쳐가는 모든 것을 주시하라. 더욱더 정신을 차려라.
서서히 그대는 전체적인 깨어 있음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태을금화종지」가 가르쳐 주는 바는 바로 내면의 빛을 충만하게 하는
방법이다.

경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책에 관련된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이 책은 중국에 있는 신비주의 단체에서 생겨났다. 이 신비주의 단체의
창설자는 잘 알려져있는 도교 조사(祖師) 여동빈(呂洞賓)이다. 여동빈은
어디서 이 비전을 전수받았는가? 여동빈 자신은 그것을
스승 관윤자에게로 돌리고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관윤자는 바로
노자(老子)가 「도덕경을 써 준 인물이다.
노자는 평생 한 마디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글을 쓰라는 요청을
거듭거듭 거절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전수했다.
그러나 그는 글을 쓸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참된 도(道)는
말하여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표현될 수 있는 도라면 이미 가짜이다.
그것은 오직 스승과의 내밀한 접촉을 통해서만 배워질 수 있다.
그 외에 전달될 방법이란 없다. 오직 스승과 제자가 일체를 이루는
깊은 곳, 제자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곳, 스승과 제자의 벽이 무너지고
그들의 의식이 서로에게 용해되는 그런 곳에서만 배워질 수 있다. 오직
그런 만남 속에서만, 그런 하나됨 속에서만 도는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거듭 거절했던 것이다.
그는 매우 오래 살았다. 그가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물소를 타고 중국을 떠났다.
하필이면 왜 물소인가? 그의 모든 가르침은 물흐름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말했다. 물과 같아야 한다. 그 흐름, 유동성, 신선함,
항상 바다를 향해 움직이는 것과 같이‥‥‥ 그리고 물처럼 되어야 한다.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수용적이고 사랑스러우며 맹렬하지 않게‥‥‥
바위와 같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위는 강한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 물은 약한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결코 겉모습에 속지 말라. 결국 승리는 물의 것이며 바위는 찢겨
모래가 되어 바다로 떠내려 간다. 부드러운 물에 의해 결국 바위는 사라진다.
바위는 남성적이다. 그것은 남성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이다. 물은 여성적임과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은 것이 승리한다. 물은 언제든지 굴복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굴복당함으로써 승리한다. 그것이 바로 여성적인 길이다.
여성은 언제나 굴복을 통해 승리한다. 남성은 정복하기를 원하지만 그의
궁극적 결실은 패배이다. 그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물소를 타고 중국을
떠났던 것이다.
어디로 갔는가?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아 히말라야로 갔던 것이다.
참사람(眞人)은 사는 법과 죽는 법을 안다. 그는 완전하게 살다가 완전하게 죽는다.
그는 축복 속에서 살다 축복 속에서 죽는다.
완전히 홀로 있기 위해 그는 히말라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경에서 붙들렸다. 국경에서 그를 붙든 사람은 윤희(尹喜)라는 관령(關
令)이었다. 그는 중국 국경의 최변방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노자는 그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다른 길이 없었다.
윤희는 노자를 설득했다.
"선생님은 이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떠나면 곧
몸도 버리시겠죠 제발 몇 자만이라도 남겨 주십시오 만약 거절하신다면
저는 선생님을 보내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생님께서 지불해야할
통과 비용입니다. "
그리하여 노자는 윤희의 집에 사흘을 머물면서 『도덕경』을 썼던 것이다.

전해내럭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태을금화종지』는 여동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동빈은 그것을 노자가 『도덕경』을 써 주었다는
스승 윤희에게 돌리고 있다. 윤희는 제자들에 의해서 관윤자(關尹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는데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노자를 설득할 수 있었겠는가. 노자는 평생을 걸쳐 거절해 왔는데
이 사람의 요청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사람에게는 노자조차도
거절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태을금화종지』가 노자와 관련되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노자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다. 노자 자신은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전에 있던 것이며 이후에도 또 다시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에 새로운 진리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을 가져왔을 따름이다. 항상 그렇다. 진리는 동일한데 표현만
달라진다. 노자가 말한 것은 그 이전에 크리슈나가 말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크리슈나가 말했던 것은 나중에 붓다가 말한 것과 똑같았다.
붓다가 말했던 것은 그들의 표현방식이 너무 달라 그 핵심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지성이 요청되겠지만 마호메트나 예수나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던 것과 동일하다. 그 형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표현
수법이 다르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요, 다른 개인들이며
그들의 독특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새롭지도 낡지도 않다.
진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것은 영원하다.

이 책, 『태을금화종지』는 다시 살아나 신성(神性)으로 향하는 문을
발견할 수 있는 영원한 원천들 중의 하나다.

경문으로 들어가자.

여조사(呂祖師)께서 말씀하셨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라고 한다.

도( Tao )라고 하는 말은 본질적으로 길을 의미한다. 목적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여질 수 없다. 목적지는 알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으며
형언할 수도 없는 채로 남는다. 그러나 그 길에 관해서는 무언가가
말해질 수 있다. 그래서 도가( Taoist)들은 신( God )이니, 진리니,
니르바나( Nirvana)니 하는 말들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붓다는 말한다.
붓다들만이 길을 볼 수 있으며 그 길을 따를 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진리는 그대 자신의 경험이어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규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길은 규정지을 수 있다. 확실해질 수 있다.
스승이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순 없다. 그러나 길은 줄 수 있다.
일단 길이 있게 되면 필요한 것은 그 위를 걷는 일뿐이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내가 그대 대신 걸을 수 없고 그대 대신 먹을 수 없다. 그대 대신
살 수 없고 그대 대신 죽을 수 없다. 이 일들은 각자가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보여 줄 수 있다. 나는 이미 그 길을 걸은 자이다. 도란
단순히 길을 의미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라고 한다.

멋진 정의이다. 조사께서는 말한다. 홀로 존재하는 것, 어느 누구의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늣 것, 그대가 그 위를 걷든 걷지 않든 간에
항상 존재하는 것.
누가 걷고 걷지 않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전존재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따른다. 알고서 그것을 따를 수 있다면
그대의 삶은 무한한 기쁨이 될 것이다. 모르는 채 따른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넘어질 것이며 즐길 수 있는 것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정원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지만 그는 얼이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술에 취해있거나 혼수 상태에 있거나 마취 상태에 있을지」
모른다. 그를 정원에 데리고 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적이다
새소리가 들리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꽃내음이 바람결을 타고 와
그의 코를 간지렵혀도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태양이 그의 위에
빛나고 빛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도 그는 모를 것이며 산들 바람이 =
그를 어루만져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를 나무 아래 시원한 곳에 눕혀도
그는 모를 것이다. 사람이란게 이렇다.

우리는 도 속에 있다. 다른 있을 만한 곳이 있겠는가? 사는 것은
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은 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숨 쉬는 것은
신 속에서 숨쉬는 것이다. 다른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듯이 도 속에 사는 우리도 완전히
도를 망각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너무도 명백하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도를 잊는 이유이다. 물고기는 바다를 너무도 잘 안다. 그 속에서
태어나 결코 그 곳을 떠나지 않는다. 물고기는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도 속에 있고 신 가운데 있으며
도 속에서 도를 통하여 산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도는 존재한다. 도가 없이는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별이 뜰 수 없으며
피가 흐를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탱해 주는 기본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을 때에야 생명은 존재한다. 존재
속의 광대한 질서를 보라. 그것은 혼돈이 아니다. 질서다. 왜 거기에
그렇게도 많은 조화가 존재하는가? 조화를 이루어 유지시켜 주고
만물을 일치시키는 법칙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우리
존재를 통하여 도와 어울린다.


도에는 이름도 형상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본성이요, 하나의 근본
정신? primal spilt)이다.

생명의 바다가 우리를 포용하고 있다. 순수한 본질은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그것은 존재요, 근본 정신이다. 어떤 이름도 그것을 담을 수 없다.
모든 이름이 그것의 이름이다. 그리고 어떤 형상도 도에 대하여
특별한 것이 될 수 없다. 모든 형상이 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도는 수백만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나무와 함께라면 푸르고 꽃과 함께라면
붉다. 사람과 함께라면 사람이요, 물고기와 함께라면 물고기다.
그것은 동일한 법칙이다. 도라는 말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넣어도 무방하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도가들은
도(道)라고 부른다.
불교도는 그것을 다르마( Dharma )라고 부르며 유태인들은 로고스
( Logos )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두 같은 의미이다. 어떤 이름도 그것을
주워 담을 수 없으며 혹은 아무 이름으로도 표현이 가능하다.

본성과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의 빛(天光) 속에 들어 있다.
하늘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있다.

그대는 형상을 볼 수 있고 그대의 몸을 볼 수 있다. 몸은 형상이요,
본질을 싸고 있는 실체이다. 그러나 본질은 볼 수 없다. 그것은 눈에는
안보이며 감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매개체도 없이 즉각
느껴져야 한다.
그대는 내 몸을 보고 나는 그대의 몸을 본다. 이것은 매개체를 통해서이다.
내 눈이 그대가 여기 있는 걸 알려준다. 그대의 눈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려준다. 그러나 누가 아는가? 눈이 혹시 속이고 있지나
않은지. 그들은 때로 정말 속인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대는 새끼줄을
뱀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이 뱀처럼 보일 때 그것은 정말 뱀처럼 위협을 준다.
그대는 두려워 뛰기 시작한다. 그대는 또 사막에서 그곳에 있는
오아시스를 보기도 한다. 그것은 그대가 너무 목이 말라 그것이
이곳에 있기를 바란 나머지 스스로 만든 착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눈은 종종 속인다. 그러므로 누가 알겠는가.
만약 진리가 매개체를 통해서 알려진다면 거기엔 항상 의심이 남게 된다.
거기에는 확실성이 없다. 절대적인 확실성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해야 한다. 대강 확실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한 길밖에 없다.
즉 매개체가 없이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감각을 통하지 않고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가 알려지는 방식이다. 그대는 생명을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경험이 아닌 주관적인 경험이다.

본성과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의 빛 속에 들어있다.
하늘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 있다.
그대는 이 양 눈을 가지고 있다. 양 눈은 도가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 현대 과학만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두
눈은 단지 보이는 대로의 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 눈은 그대 속에 있는
음과 양을 대표한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뇌가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누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대의 오른쪽 뇌는 여성적이요, 왼쪽 뇌는
남성적이다. 그래서 그대의 한쪽 눈은 양(남성)을 대표하고, 다른쪽 눈은
음(여성)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대 속에서 음과 양이 만날 때 그 만남은
하늘'이라고 불려진다. 그대의 음과 양이 합일을 이루는 바로 그
내적 만남.
예수는 말했다.
"양 눈이 하나가 될 때 빛이 생길 것이다. "
그는 도교의 연금술사처럼 말하고 있다. 양 눈이 하나가 되면 빛이
생길 것이다. 양 눈이 하나가 될 때, 음과 양이 서로의 속으로 사라질 때,
그것은 궁극적인 오르가즘의 체험이 된다. 그대가 연인과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것은 그 체험의 일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순간적이라서 그대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지나가고 난 후라야 그대는 알아차린다. 그것은 찰나에 사라진다.
그러나 맛은 보았다. 음과 양이 합일될 때의 맛을 조금이나마 본 것이다.
이것은 내적인 만남이다. 순간이지만 그것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러나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탄트라(tantra)와 도
( Tao )와 요가( Yoga )와 세계의 모든 위대한 가르침들의 사명이었다.
내부의 남성과 여성을 인식시키는 일, 탄트리카( Tankika)들은 그것을
쉬바( Shiva)와 샤크티( Shakti )라고 불렀고, 도교도들은 그것을 음과
양이라고 불렀다. 그대 속에 있는 음과 양의 극, 그대
속에 있는 밤과 낮, 그들은 서로 만나야 한다.
하늘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있다. 양 눈이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을
볼 수 없다. 하나가·될 때 그것이 일어난다. 엄청난 빛의 폭발이 있게
된다. 짜라투스트라는 그것을 화염의 폭발이라고 불렀다. 노자는 그것을
빛의 폭발이라고 불렀다. 똑같은 것이다.

그대는 세례 요한의 진술과 조우해야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내 뒤에 불로 세례를 주러 오시리라고 그가 말했던 바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물세례는 외적인 세례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물은 외적인 흐름을 의미한다.
기억하라. 외적인 흐름은 하향식 흐름과 같은 의미며, 내적인
흐름은 상향식 흐름과 같은 의미다. 아래로 흐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밖으로 흐르며 안으로 흐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위로 흐른다. 물은 항상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물은 외적인 흐름을 대표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 여행은 외적 여행이다. 불은 언제나 위로 향한다.
그리고 '위'는 '안'과 동의어이다. 그 여행은 항상 내면으로이다.
세례 요한은 말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나는 종교의 겉모습을 주고 있다.
내 뒤에 구세주가 오면 너희에게 내적인 세례, 즉 불의 세례를 줄 것이다.
예수 자신은 계속해서 외쳤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
그러나 기독교도들에 의해서 그 의미는 완전히 왜곡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그것을 잘못된 행위에 대한 뉘우침으로 해석하였다. 그것은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회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되돌아감과
복귀와·들어감이다. 그것은 되돌아가 본래 성품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 repent )라는 낱말은 돌이킴( metanoia )을 의미한다. 돌이키는 것,
180도 돌아서는 것, 계속 밖으로만 흐른다면 그대는 물로 남는다.
안으로 돌아설 때 그대는 불이 된다.
그리고 양 눈, 양 불꽃, 의식의 양쪽이 교합하여 완전히 연결되어
하나의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을 가리켜 플라톤은 '홀로를 향한 흘로의 비
상( flight of 沆e alone to the alone )'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하나( The great one )란 무상(無上)의 것을 일컬음이다.
그대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대는 그 위대한 하나가 된 것이다.
이것이 도가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대가 하나가 된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된다.

단(丹)의 오묘한 비밀은 유위 가운데서 무위( non-action )를 얻는 데 있다.

이것은 잠재적인 말이다. 양 눈을 하나로 만드는 비밀은 무엇인가?
음과 양을 합일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대가 더 이상 양극이지 않도록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하나가 되도록 그대의 남성과 여성을 서로의
속으로 용해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하나됨 속에 축복이 있는 것은
모든 긴장이 사라지고 갈등이 사라지고 근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단(丹)의 오묘한 비밀은 유위 가운데서 무위를 얻는데 있다.

남성은 행위를 대표하고, 여성은 무위를 대표한다.
그대는 무위에 도달하기 위하여 행위를 이용해야 한다.
노력없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그대는 움직여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고 아무것도 남겨둠이 없이
완전히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 그 창조성 속으로 모든 에너지가
녹아지게 될 때 모든 에너지가 빨려 들어간 바로 그때 갑자기 변형이
일어난다. 물이 100도에서 증발하듯 전체적이 될 때 행위가 증발하고
무위가 뒤에 남게 된다.
먼저 그대는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하고 모든 에너지를 춤 속으로 몰입
시켜야 한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무위의 춤이
시작될 때 그 신비한 경험이 시작된다. 그때 그것이 무위이다. 첫째
그대는 무위 속으로 가기 위하여 행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명상의 전부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묻는다. 왜 행위의 명상을 가르치냐고 그것이
무위를 발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극한까지 격렬하게
미친 듯이 춤을 추어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가 그 속에 들어있게 되면 그
순간이 찾아온다. 그대는 춤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도 아무런 노력도 없다. 그것은 행위없는 행위이다.

황금 꽃은 빛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 '물고을(water-region )의 납
(lead )은 한 맛을 낼 뿐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황금 꽃은 하나의 상징, 그대의 에너지에 양극이 사라지고 하나가
되었을 때의 상징이다. 그때 엄청난 빛이 방출되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그것은 마치 황금 꽃이 그대 속에서 핀 것과 같다. 그것은 상징이다.
말 그대로 거의 사실인 상징이다. 꼭 그와 같이 일어난다. 지금 그대는
어둠으로, 어두운 밤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 그대는 새벽이 된다.
그대는 어디에서도 그대의 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빛은 존재한다.
어떠한 원천도 없다. 그것은 원천이 없는 빛이다. 그러나 일단 그 황금빛을
알게 되면 그대는 불멸자가 된다. 더 이상 죽음은 없게 된다. 빛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생명, 전존재가 오직 빛으로 되어 있다. 모든 것은 빛의 형상이다.
그대는 현대 물리학에 조회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은
모든 것이 빛이라고 하는 도(道)와 완전히 의견을 같이한다. 형태는 변한다.
그러나 빛은 계속된다. 빛은 영원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경전들이 빛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그것이 시작이다. 만약 태초가 있었다면 달리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빛으로라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초란 결코 없었다.
이것은 하나의 우화일 뿐이다. 사실 빛은 언제나 존재해 온 것이다.
코란은 하나님이 빛이라고 말한다. 수피( Sufi )들에 의해 하나님에게
붙여진 이름 중의 하나가 누르( Nur)이다. 누르는 빛을 의미한다.
그리고 맛은 동일하다.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든 그대 안에서 일어나든
맛은 같다. 불성( Buddhahood)의 맛은 동일하다. 붓다는 말했다.
불성의 맛은 바다와 같다고 그 맛은 북쪽에서도 볼 수 있고 남쪽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쪽에서도 볼 수 있고 저쪽에서도 볼 수 있고
가장자리에서도 볼 수 있고 한가운데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의 맛은
똑같다. 불성의 맛이 바로 그렇다. 영원한 빛을 얻는 순간 사람의 삶은
단일한 향기를 풍긴다. 그 향기는 완전한 각성 속에 들어있다. 그의
무의식은 사라졌다. 그의 존재 속에 더 이상 어두운 곳이 없다.
만약 프로이트주의자들이 그런 사람을 진단해 본다면 의식, 단지 의식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코 무의식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프로이트주의자들이 그대를 들여다 본다면 한 곳만이 의식이고 나머지
아홉은 무의식, 즉 그대 마음의 단지 십분의 일만이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100%가 의식이다.

빛을 회전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되돌리는 법( backward -flowing
movement )에 의존하며 그리하여 상념들이 응집된다. 하늘의 마음은
해와 달 가운데 위치한다.

다시 기억하라. 해는 남성 에너지를 대표하고 달은 여성 에너지를 대표한다.
그리고 심장은 그 중간에 있다. 심장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것이 심장의 아름다움이다. 심장은 신성하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리고 정확히 양자의 사이에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남성 에너지 쪽으로 너무 많이 추구하게 되면 너무 능동적이 되어
수동적이 되는 법을 모른다. 그러한 일이 바로 서양에서 일어났다.
서양은 해 지향적이다. 너무 능동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동성으로 미칠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스피드 시대, 모든 것이 즉시
처리되어야 하고 인내와 기다림이란 없다. 그들은 수동적이 되는 법,
인내하는 법, 기다리는 법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수동적일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상실했다. 그들은 휴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모른다.
그들은 휴일에 가서조차도 오히려 더 능동적이다. 서양에서는 일요일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휴일이라서 그렇다.
사람들은 너무 여유가 없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휴일이 오면 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휴일이 오면 그들에게는 천만 가지 할 일 투성이다.
해야 할 의무나 필요가 있어서냐 하면 절대로 아니다. 휴식하며
살 줄을 모를 뿐이다. 그들은 잔디밭에 누워 대지와 함께 할 줄 모른다.
나무 아래 말없이 앉아 그냥 있어볼 줄 모른다. 기어이 그들은 집
주위에서 잡다한 일들을 시작하게 마련이다. 이걸 뜯었다 저걸 고쳤다
차 엔진을 열었다가 그리고 일을 시작하고야 말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끝까지 능동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평생 내내 은퇴하면 그때 가서 즐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즐길 수 없고 쉴 수도 없다. 사람들은 은퇴하고 나면 쉬
죽는다. 심리학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십 년은
더 일찍 죽는다고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의미없게 되었고 의미없어 왔고
쓰레기에 불과했던 삶을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돌진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시 원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마음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은 채 빨리, 보다 빨리 가야 한다는 것 뿐이다.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원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서양은 해 지향적이다. 동양은 달 지향적이다.
동양은 너무 수동적이고 너무 운명론적이다. "아무것도 해선 안된다.
그냥 기다려라.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어리석음이요, 바보짓이다. 동양은 가난하고 게으르고 너절너절하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도처에 비참함과 빈곤과
거지와 질병이 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
무엇을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단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일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하나님은
오실 것이다. 다른 무슨 할 일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여성적인 마음이다.
『태을금화종지』는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말고 극단으로 치우치지도  말고
정확히 한가운데 머무르라고 말한다. 그때 균형이 있게 된다.
그때 사람은 능동적이면서도 그의 깊은 내면은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바깥은 해 지향적이지만 안은 달 지향적이다. 그대 가운데 해와 달이
만나게 하라. 그리고 정확히 한가운데 머무르라. 초월은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빛을 회전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되돌리는 법에 의존하며 그리하여
상념들이 웅집된다.

남성은 중심이자 주변이다. 그대가 주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많은 사명들이 나타난다. 주변은 다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심은 하나이다. 그대가 중심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중심 핵에서는 모든 사념들이 사라진다. 각성만이
남아있다. 이 신비한 문구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그리하여
모든 사념들이 응집된다.

빛은 내면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그대가 나무를 바라볼 때 그대의 눈은 나무에게 빛을 던지고 있다.
그럴때 빛은 밖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빛은 내면으로 돌아선다.
메타노이아( metanoia), 회개, 돌아섬, 그리고 빛이 자신의 존재를
향할 때 거기에 자기 인식과 자각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자기 인식은
그대에게 자유, 즉 모든 혼란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육체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
그대 속에는 영혼이 창조된다. 이것이 바로 구제프가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대들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것은
메타노이아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황정경( The book of 撫e Yellow Castle )』은 말한다.
방촌(方寸)의 터와 방척(方尺)의 집 안에서 생명이 다스려진다.

육체라고 하는 이 작은 사원 안에서 생명은 조절이 가능하다.

방촌(方寸)의 한가운데 고요의 자리(簫台)가 빛을 발한다. 그 보옥의
도성 보랏빛 궁궐에 지극히 비어있고 신령한 신이 거하신다.

이 모순을 보라. 비어있음과 생명. 생명은 남성이요, 비어있음은 여성이다.
생명과 비어있음은 둘다 내면의 하나님의 양면이다. 차별을 두어
선택하지 않을 때,전혀 선택하지 않을 때,그대가 단순히 주시자가
될 때 그대는 한 면이 삶이고 다른 면이 쿡음인, 한 면은 완성이고
다른 면은 무( nothingness)인 하나님이 된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할 때는 몸 전체의 에너지가 그의 왕좌( throne )앞
에 조회(輧會)한다.
그리고 빛이 안으로 움직여 내부에서 회전할 때 바깥으로는 유출이
전혀 없게 되어‥‥‥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하던 것이다.
조용히 앉아 모든 문을 닫아라. 그러면 빛이 내면에서 순환한다. 그
때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모든 신비가 담겨 있는 육체를 인식하게 된다.
이 작은 육체가 우주의 전신비를 담고 있다. 그것은 소우주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할 때 몸 전체의 에너지가 그의 왕좌 앞에 조회한다.
마치 성스러운 왕이 도읍을 정하고 기본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을 때
모든 나라가 공물을 가지고 다가오듯이, 또는 주인이 고요히 하여
현명하면 남녀 하인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각자 자기
일을 하듯이.

그리고 이 빛이 내면에서 움직일 때 몸은 하인이 된다. 감각들은
매우 양순한 하인들이 된다. 그대는 그들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대를 따른다.
이것이 도의 아름다움이다.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며 어떤 성품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는 말한다. 그냥 빛으로 충만되거라.
그러면 모든 것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빛만 회전시키면 된다. 이것이 가장 깊고 오묘한 비밀이다.
빛은 움직이기 쉽지만 고정되기는 어렵다. 충분히 오래 회전만
되면 빛은 스스로 응집( cristallization )된다. 이것이 바로 '고요히
날아 오른다. '고 말해지는 경지이다.

이 경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언급되고 있다. 빛은 움직이기는 쉬우나
고정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고정시키려고 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요가가 시도하고 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요가의 어려움과
힘듬이 여기에 있다. 요가는 빛을 고정시키려 한다. 그것은 양 눈
사이의 빛조차도 고정시키려고 한다. 제3의 눈이 위치한 미간에 말이다.
요가는 고정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요가와 도의 차이점이다.
요가는 그것을 고정시키기를 원한다. 제3의 눈에 집중하라. 한 마디로 말해
이것이 요가 철학의 전부이다. 그대가 만약 그대의 전의식을 제3의 눈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대는 변형이 될 것이다. 그대의 두 눈이 하나가 되고
그대는 빛으로 충만될 것이다.
그리고 제3의 눈은 요가의 의식 도표상 여섯번째 센타인데 바로 그
제3의 눈 너머 여섯번째 위에는 일곱번째가 존재한다. 그 일곱번째는
'일천잎의 연꽃( The one-燃ousand-petalled lotus )'이라고 불리운다.
빛이 제3의 눈에 응축되면, 그리하여 너무 많아지게 되면 일곱번째
센타로 밀어붙여지게 된다. 그것은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분출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일곱번째 센타로의 분출은 수세기 동안 수백만 삶 동인
닫혀있던 봉오리를 개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도는 다른 견지에서 출발한다. 도는 말한다. 빛을 고정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것을 고정시키는 일 따위에 신경을 쓰지 말라.
그것을 순환시키는 편이 쉽다. 움직이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다. 마음은
언제나 집중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왜 마음의 역량을 사용하지 않는가?
왜 그 흐름을 타지 않는가?
도는 자연스런 학문이다. 조작하지 말라. 강요하지 말라. 스스로
문제거리를 만들어 내지 말라. 마음의 자연스런 힘을 이용하라. 마음은
움직이며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방랑자이다. 그것을 이용하라. 빛으로 하여금
길을 뚫게, 길을 발견하게 하라. 우리는 길을 여는 방법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빛으로 하여금 순환하게 하라.

순환을 통하여 도가들은 700개의 혈자리( point of acupuncture )를
발견하게 되었다. 몸 구석구석으로 유통시키면서 그들은 빛이 매우 강렬해지는
700개의 지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를 정확히
계산해 냈다.
이제 과학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정확히 700개의 지점이 존재한다.
이제 심지어 700개의 지점을 그려낼 수 있고 어디에 기(氣)가 부족하며,
어디에서 에너지가 올바른 경락( mendian )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는가 않은가를 알아낼 수 있는 기계까지 발명이 되어 있다. 도가들은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기계도 기술도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기법은 빛』氣]을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실질적인 방법, 그것을 순환시키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들의 접근 방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배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대가 계속해서 빛을 순환시킨다면 어느 지점에 가서
그것 스스로 응축된다고 한다. 그대는 고정시키는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순환시키고 순환시키고 또 순환시키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가가 목적으로
삼고 노력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도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자연발생이지만
요가에 있어서 그것은 노력에 의한 힘들고도 긴여행이다.
요가는 남성지향적이다.
그러나 도는 남성지향적도 아니고 여성지향적도 아니다. 도는 양자의
통합이다. 순환은 남성적 에너지요, 고정은 여성적 에너지다. 무위에의
도달, 행위를 통한 수동에의 도달, 노력을 통한 무위 자연에의 도달.

이 근본 원칙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다른 방법은 구할 필요가 없다.
상념을 거기에 순화시키기만 하면 된다. 상념을 순화시킴으로써 날아올라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황금 꽃은 불사약( The elixir of life )이다.

이것이 영생( ,mmortality )의 전비밀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 The philosopher's stone )의 전비밀이라고 부르던 것이며,
인도에서 암릿( imrit ), 불사약( elixir ) , 감로(nectar)라고 부르던
것이다. 이것은 연금술적인 문구이다. 이것은 그대의 화학을 연금술로
탈바꿈시키는 비밀들을 전해 준다. 조잡한 금속을 황금으로 탈바꿈시키는것.
지금 그대는 조잡한 금속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대는 비법들을
안고 있다. 만약 그 비법들이 작동된다면 그대는 황금으로 탈바꿈된다.
황금은 영원 불멸이다.

황금 꽃은 불사약이다. 이 가르침은 아주 완전하지만 또 유동적이기도 해서
최고의 지성과 총명과 가장 완전한 몰입과 평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최고 수준의 지성과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실현
할 수 없다. 이러한 몰입과 평정을 위한 고도의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야
그것을 수지획득(守持獲得)할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지성과 총명이다. 그것에 퍼해 염려하지는 말라. 만약 내가
영리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영리하게
태어난다. 지성은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자질이다. 누구나가 숨을 쉬며
태어나듯 누구나 영리하게 태어난다.
몇몇 사람은 영리하고 몇몇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비인간화시켜 온 아주 모욕적이고
퇴폐적인 관념이다. 비록 그들의 영리함이 표현에 있어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영리하게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음악에 소질이 있고,
어떤 사람은 수학에 소질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수학을 기준으로
삼을 때 음악가는 멍청하게 보인다. 만약 두 사람을 수학이 기준인 곳에서
시험을 치르게 하면 음악가는 뒤떨어지게 된다. 기준을 바꾸어라.
음악이 기준이 되게 하여보라. 그리고 두 사람을 음악이 기준인
곳에서 시험을 치게 하여 보라. 그러면 수학가가 멍청하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기준들을 선택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이유이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멍청한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성이 독특할 수는 있다. 시인은 사업가와는 다른 지성을 필요로
한다. 시인이 사업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사업가도 자신이 시인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정치가가 되는 데에 어떤 종류의
지성이 필요하다면 화가가 되는 데는 다른 종류의 지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백만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기억하라. 모든 사람은 영리하게 태어난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지성을 발견해야 한다.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일단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대는 명석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하여 잘못된 관녈들을 갸지고 있기 때문에 명철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가, 학교 선생이나 교장이나 대학이
그대더러 영리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준이란 게 기존의
기준일 뿐이다. 그들의 기준이 모두에게 통용될 수는 없다. 대학들은 아직
우주적이 아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지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지성의 현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단 그대의 지성을 받아들였으면 그것을 존중해라. 그대는 명석해질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시인은 그가 훌륭한 사업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멍청하다고 느낀다.
이제 이것이 혼란을 야기한다. 그는 스스로 열등 의식에 빠져 자기를
멸시하고 비난하게 된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보고자 하나 실패한다.
이것이 그의 주위에 흑막을 드리은다. 만약 그가 자신은 시인으로서 사업가가
될 기질이 아니며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이해만 한다면 그는 시인으로서 성공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지능이다.
그리고 그의 지성은 그 자신의 방식으로 꽃피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모방해서는 안된다. 사회가 그를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는 폭탄이
필요한 만큼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증오가 필요한 만큼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영화와 라디오와 TV에서 살인이 허용되는 이유이다.
그것은 추잡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장면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설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 사회는 증오를 통해
살고 있지, 사랑을 통해 살고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살인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오케이다. 만약 누군가가 단검을 그대의 심장에
꽂아 피가 철철 흐른다면 그것은 완전히 오케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사랑을 연출한다면 사회가 두려워한다.
사랑은 외설적인데 살인은 그렇지 않고, 연인들은 비난을 받는데
군인들은 상을 받으며, 전쟁은 괜찮은데 사랑은 안된다는 것은 이상하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지능을 받아들인다면, 그대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그야말로 완전히 영리해질 것이다. 모든 구름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대에겐 몰입과 평정이 필요하다. 지성과 총명은 마음의
남성적인 부분이다. 몰입과 평정은 여성적인 부분이다. 여성만이
몰입할 수 있다. 그것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녀는 자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다. 그대가 지적이지 못하면 그대는 말하여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스승이 그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여성적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것을 흡수할 수 없고 그것으로 잉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다. 요점을 보기 위하여 그대는 완전히 지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간직하기 위하여, 그것이 그대의 일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빛을 순환시키는 기법으로
들어갈 것이다. 주의깊게 똑똑하게 들어라. 이것을 흡수해 들여라.
이것은 그대의 일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경험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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