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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3의 눈

narrae 2013. 12. 24. 07:21

2. 제3의 눈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원신(元神)과 참된 본성(眞性)만이 시간과 공간을 극복한다.
원신은 상대적 대립(陰陽)을 초월(無極)해 있다.
하늘과 땅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원신을 품는 방법을 깨달으면
음諦誇)과 양(陽)의 대극(對極)을 벗어나서
삼계(三界)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태(胎)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되면
원신은 방촌(方寸) 속에 거한다.
그러나 식신(識神)은 아래 심장(TL) 속에 거한다.
아래 심장은 외계(外界)에 의존한다.
사람이 하루만 굶어도 그것은 극도로 불편해 한다.
어떤 소리를 들어 놀라게 되면 심장은 두근거린다.
격노하게 되면 그것은 박동을 멈춘다.
주검을 보면 슬퍼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에 홀려 버린다.
그러나 하늘의 심장(天心)은 머리속(頭上)에 있다.
언제 그것은 움직인(動) 적이라도 있었을까?

하늘의 심장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방촌 속에 있는 진의(眞意)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겠느냐 라고

아래의 마음(不熟t·)은
강한 힘을 지닌 폭군(暴君)과도 같은 행동으로
천상의 지배자(天君)를 약한 것으로 보고 멸시하며
국정의 주도권(主導權)을 빼앗아 버린다.
그러나 원래의 왕궁『元官]이 강성해져 방호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강하고 지혜로운 왕(英王)이
왕위(王位)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양 눈은 마치 좌와 우에서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지배자를 보좌하는 신하(左右大臣)와도 같이
빛(光)을 순환시키기 시작한다.
안에서의 다스림(內政)이 이와 같이 질서를 이를 때
반역적이던 모든 간웅(奸雄)들이 그들의 무기를 고쳐 잡고
명령을 받기 위해 부복할 것이다.

불사(不死)의 선약(仙藥)을 얻는 길(丹道)은
정수(精水)와 신화(神火)와 의토(意土)의 세 가지로 되어 있는
위 없는 마술(無上訣)임을 알라.
정수( seed - water )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참된 에너지(先天眞一之氣)이다.
신화( spirit - fire )는 빛 )t)이요,
의토(沆ought-earth )는 중심에 있는 천상(天上)의 마음(中官天心)이다.

어느 날 한 왕이 그의 영리한 광대를 불러 어전에서 지팡이를 주고
말했다.
"이 지팡이를 벼슬의 증표로 삼고 너보다 훨씬 훌륭한 바보를 찾을 때까지
갖고 있다가 그 바보를 찾거든 그에게 주어라."
얼마 루 그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왕은 그 광대의 진실을 확신하고
그를 보기 원했다.
광대가 왔을 때 왕이 말했다.
"먼 여행을 떠나게 되어 너를 불렀다. "
"어디로 가시는데요 ? "
광대가 물었다.
"먼먼 나라, 저 세상이지"
"나으리, 나으리의 여행과 그곳에서 머물 일을 위해 준비는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안했단다. 나의 귀여운 바보야."
"그곳에 가면 나으리를 환영할 친구는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 "
왕이 대답했다. 그러자 광대는 슬픈 듯 고개를 떨구고는 그 지팡이를
왕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나으리, 이 지팡이를 가지십시요 이것은 나으리의 것입니다.
나으리께서는 준비도 없이 다른 세상에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으리 외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

삶은 죽음과 저 너머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대가
만약 죽음과 저 너머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바보다.
그는 훌륭한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삶이란 단지 기회일 뿐이다. 그대가 아는 이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요,
진정한 삶을 얻기 위한 기회일 뿐이다. 진정한 삶은 이 삶의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일깨워져야 하고 깨달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쉬 잠이 들며 아직 자신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생명이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면 소위 그대의 전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기나긴 꿈에 불과하게 된다. 그것은 달콤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악몽이 될 것이다.
진정한 삶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사는 것은 흙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사는 나무와 같다. 그것이 바로 삶에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없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광휘를 그대가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예수는 천국이 너희 속에 있다고 거듭거듭 말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황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들에 있는 백합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솔로몬의 부귀영화조차도 이만큼은 아름답지
못하였다.
백합은 그토록 아름다운데 사람은 왜 그토록 추한가. 왜 사람만이 추한가?
앵무새나 공작이나 사자나 사슴이 추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추함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작은 공작이고 사슴은 사슴이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가 붓다나 그리스도나 크리슈나일 때, 그의 전 존재를
깨달았을 때만 사람이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대는 어둠 속에서
헤매며 산다. 무의식의 깊은 동굴에 사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의식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대의 의식은 매우 희미하며
순간적이다. 그것은 매우 얇은 피부이다. 피부 두께 정도도
되지 않아서 조금만 긁어내도 그대는 곧 그대의 의식을 잃고 만다.
누군가가 그대를 모욕한다. 한마디 말, 힐끗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의식은 사라지고 그대는 격분과 분노와 폭력과 파괴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잠시동안 그대의 인간성은 사라져 버리고 그대는 다시 거친 동물이
되어 버린다. 사람은 동물 이하가 될 수도 있다. 그의 추락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사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올라가는 작업이요, 고된 일이라서 드물게 일어난다. 그것을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힘든 노역을 필요로 한다.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일은 배짱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가 표면에서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에 관한
진실이 될 수 없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그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
그대의 진실을 보기 위해 꿈으로 파고 들었던 이유이다. 이 아이러니를 보라.
그대의 실체가 그대의 실체 속에서가 아닌 꿈 속에서 탐구되어야 하다니
그대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대가
그렇게도 거짓되고 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어서 그대의 참얼굴을 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꿈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꿈과 꿈의 분석으로조차도 그대의 참얼굴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분석하려고 하는 자가 누구인가? 프로이트도 그대만큼 무의식적이다.
무의식적인 한 인간이 다른 무의식적인 사람의 꿈을 분석하게 된다.
그의 해석은 매우 제한되게 되어 있다. 그의 분석은 그대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투영이기 쉽상이다.
이 때문에 똑같은 꿈에 대해서도 프로이트식( Freudian ) 분석가와
 융식(Jungian) 분석가 그리고 아들러식( Adlerian ) 분석가의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더 많다. 그대는 헷갈릴 것이다. 똑같은
꿈이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된다. 그들은 그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융의 신봉자는 말한다. 저는 융의 신봉자로서 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대의 꿈들은 그대의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 의식적인 행위조차」
그대를 드러내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잠 속의 행위들이 그대를 드러내
줄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전히 프로이트는 올바른 궤도 위에 있다
약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꿈을 넘어 아무런 생각도 꿈도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 마음의 차원까지 가야 한다. 모든 생각들‥‥‥ 그리고 꿈은
사고의 일종이다. 매우 원초적인 그리고 그림을 통한 사고, 그러나
여전히 그것도 사고이다. 그대가 사고를 넘어섰을 때 그리고도 여전히
깨어 의식할 수 있다면, 마치 잠든 사람이 잠든 중에도 그대로 깨어 있어서
자신의 존재의 깊은 핵에서 작은 불꽃으로 램프가 타고 있듯이,
그대는 자신의 본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케 본래 얼굴을 보는 것이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껍데기들을
던져 버리게 된다.
그대의 개성( personality )은 단지 겯쳐지고 겹쳐진 껍데기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 이상하고도 무한한 가치가 있는 책 『태을금화종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단어 두 개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본성( essence )이고 다른 하나는 개성( personality )이다.
'personality'란 말은 가면을 뜻하는 'pusona'라는 어근으로부터 파생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 배우들은 가면을 쓰곤 했다. 페르소나
( persona)는 가면을 뜻한다. 개성은 가면으로부터 왔다. 배우에 맞게
다른 가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장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어느
하나의 가면을 사용한다. 하인에게 이야기할 때는 두말할 것도 없이 또다른
가면을 쓴다. 어떻게 그대가 똑같은 가면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주시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사장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말끝마다
"예 ! 사장님, 예 ! 사장님"을 연발한다.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겠지만
그래도 그대는 사장의 발에 입이라도 맞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하인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다르다. 그때 자신의 거만한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결코 웃지 않는다. 하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그를 인간 이하로 취급해야 한다.
어떻게 웃으면서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를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해야 한다. 그는 종이다. 사장에게
이야기 하던 것과는 다른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거기 하인이 있는 곳예서
그대는 거만하게 사장처럼 남아 있다. 친구에게 이야기할 때 그대는
또 다른 가면을 사용한다. 낯선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는 물론 다른
가면이 필요하다.
그대는 많은 가면을 사용해야 하고,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이 바뀌는 대로 그것들을 바꾼다. 그대의 개성은 단지 가짜 얼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성이란 무엇인가? 본성이란 어떤 가면도 없는 그대의 본래
얼굴이다. 본성이란 그대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다.
본성은 그대가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본성은 하나님이나
또는 그대가 무어라고 부르든지 간에 총체나 전체, 존재같은 것들에 의해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 본성은 존재로부터의 선물이다.
그러나 개성은 사회와 부모와 학교와 대학과 문화와 문명으로부터의
선물이다. 개성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가짜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이 개성을 가꾸며 본성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대가 만약 본성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완전히 삶을 헛산 것이다.
진정한 삶은 본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은 본성의
삶이다. 그대는 그것을 영혼이나 자신 속의 하나님, 또는 어떤 것으로라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기억하라. 껍데기는 그대가 아니며
심리학적 껍데기조차도 그대가 아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모세( Moses )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가 산에서 푸른 덤불로부터 불처럼 타오르고 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덤불은 타지 않고 있었으며 변함없이 신선하고 파릇파룻했다.
그는 이상했다. 그는 그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불이 저렇게 타고 있는데 덤불은 하나의 불꽃이면서도 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불로부터 나는 목소리를 들었다.
"모세야, 너의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땅은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유대인들의 우화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불이요, 그대의 개성은 바로 덤불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원한 불이다. 그것은 그대의 개성을 태우지 않을 것이다. 개성은 푸르게
남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그렇게 많은 자유를 허용해
주어서 만약 그대가 거짓된 채로 남아 있길 원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여지며
오케이다. 그대가 가짜가 되고자 해도 허용된다. 자유란 그대가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의 본성, 불꽃이 거기에 있고 개성도 거기에 있다.
그대는 개성이 가짜라는 말을 듣고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
안에 있는 불꽃이 그것을 태워버리지 않을까'라고 불은 차다. 태울 수가 없다.
그대가 개성을 가지기로 결정했다면 불은 그것을 태울 수 없다.
그대는 개성 속에서 푸르게 남아있을 수 있다. 개성은 계속해서 보다
많은 잎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 그대는 더욱 더 거짓될 수 있으며
완전히 가짜가 될 수 있다. 그대는 개성의 허위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하나님은 간섭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자유란 전체적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요, 인간의 영광이요, 또한 인간의 고뇌이다.
그대에게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대는 거짓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거짓을 선택할 자유가 한정된 동물들을 보자. 그 동물들은 거짓
되지 않는다. 어떤 동물도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애완 동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애완 동물들은 그대와 같이
살면서 본성이 파괴되어 개성을 갖기 시작했다. 그대의 개는 본성을
잃어 버렸다. 그 개는 화를 낼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꼬리를 흔들고 있다.
이것은 개성이다. 그는 누가 주인인지 그리고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는 외교적이 되어 버렸으며 뉴델리에 사는
사람들만큼이나 정치가답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꼬리를 흔들어댄다.
개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낮선 사람이 들어오고
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애매해서 그는 짖어댄다. 아마 그것이 해야 할 올바른 일이리라.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꼬리를 흔들고 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힌트를 얻으려고 한다.
집에 들어온 사람이 친구인지 적인지, 그가 적이면 그는
꼬리 흔들기를 멈출 것이다. 그가 친구이면 짖기를 멈출 것이다. 그는
주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힌트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주인의
그림자가 되어 버렸으며 더 이상 진짜 개가 아니다. 사람과 함께 살다가는
전영된다. 그들은 파괴된다.
만약 동물들이 그대와 같이 산다면 그대는 그들을 파괴한다. 그대는
그들의 자연적인 본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문명화된 것처럼
그들을 문명화시킨다. 그대는 자연이 그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도(道)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본성은 그대가 이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개성은 세상이 본성에
부가한 것이다. 본성은 항상 반역적이며 항상 독자적이기 때문에
세상은 본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세상은 어떠한 독존자(獨存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떼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은 반역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붓다나 크리슈나나 노자같은 사람을 절대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험하다. 세상은 고분고분한 사람, 현
상태에 고분고분하고 기성 관념에 고분고분하며 조직화된 교회와 국가와
그리고 멍청한 정치가들에게 고분고분한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사회는 복종을 요구하며 능률을 요구한다. 그대가 보다 기계적이 될 수록
보다 능률적이 된다, 그대가 보다 살아있게 되면 그대는 그처럼
능률적일 수가 없게 된다. 기계는 사람보다 능률적이다. 사회의 노력이란
모든 사람을 하나의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사람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를 더욱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꼴. 그를 더욱더 로보트와 같이 만들어라. 그의 의식으로부터
본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라. 그가 완전히 가짜가 되게 하라.
그를 남편이 되게 하고 그녀를 아내가 되게 하며 종과 주인, 이것과
저것이 되게 하되 절대로 본래의 자신은 되지 않도록 하라. 본래의 자기는
하나님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믿음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의 유일한 믿음은 근원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주인도 알지 못한다.
소위 이 사회라고 하는 것에게는 그런 유형의 존재가 매우 불편할 것이다.
이 사회는 인간 존재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착취하기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과
그대의 성장을 위하지 않는다. 그대가 자라는 것을 도울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대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대는 더욱더 독립적이
되기 때문에 사회는 그대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감행한다. 그대가 덜 자랄수록 그대는 의존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의존적인 사람은
믿을 만하다. 의존적인 사람은 언제나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의존적인 사람은 언제나 기댈 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정말 필요로 한다.
그는 어린애 같다. 그는 부모에게 기대며 성직자에게 기대며 정치가에게
기댄다. 그는 스스로 설 수가 없다. 사회는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계속해서 수많은 껍데기로 덮어 씌운다.
육체적인 발가벗음은 심리적인 발가벗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사회는
육체적인 발가벗음을 매우 두려워한다. 사회는 발가벗은 사람을 보면
당황해 한다. 그것은 시작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육체적으로 발가벗었다면
그는 제 일보를 내디딘 것이다. 이제 누가 그를 심리적인 발가벗음으로부터
막으려 하겠는가?
그리고 타는 덤불로부터 나온 소리가 모세에게 말했다.
"그대의 신발을 벗어라."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이다. 그대의 모든 옷을 벗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발을 벗어라. 신발은 그대의 발을 싸고 있다. 신발은 그대의 발을
덮고 있다. 발가벗고 서라. 신발을 없이 하라. 그 신발은 개성을 나타내며
발가벗음은 본성을 의미한다. 그대는 성스러운 땅 위에 있다.
그대의 신발을 벗어라.
그대가 본성과 조우하는 순간, 내면의 타는 덤불을 만나는 순간,
그대는 신발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대의 모든 껍데기들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대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벗어 던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요, 메타노이아( metanola )이다. 그것이 생에 있어서의
전환점이다. 그때 사회는 사라지고 그대는 한 개인이 된다. 그리고
오직 개인만이 하나님에게 연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단한 의식이
요구될 것이다.

1933년 언젠가 구제프는 피터( Peters )를 불러 헨리 허드슨 ·호텔의
전 뉴욕 백화점에서 이 시범을 보여 주었다. 피터는 구제프의 젊은
제자였으며 구제프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스승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전혀 관례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스승도 관례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관례라고 하는 것은 성직자의 자질이지 스승의
자질이 아니다. 스승은 언제나 혁명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멋진 실험이다.
주의깊게 들어라.
피터가 도착했을 때 그는 저녁 식사에 오기로 되어 있는 몇몇 주요
인사를 위해 접시를 닦고 야채 요리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구제프는 사전에도 있지 않은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들에 대한 낱말들로
구성이 되어있는 '영적 학습'을 손님들에게 하기 위해 피터가 필요
했다고 말했다. 그 즈음에 구제프는 네 글자로 되어있는 낱말들과 외설적인
문구들을 마스터했었다.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열다섯 명의 복장 단정하고
예의 바른 뉴윽인들로 그들 중에는 기자와 저널리스트도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아첨하는 듯한 무대를 올린 후에 주최자는 겸손하게
탁자에서 자신의 일(work )과 미국을 방문한 이유에 대한 손님들의
즉석 질문에 답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영어선생에개 윙크를
보내는 것과 함께 갑자기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 인류의 슬픈 타락과
네 문짜의 허사(expletive )에 의해서나 묘사가 가능한 존재로의
탈바꿈이 유난히도 이 나라를 쉽쓸고 있으며, 그래서 그 현장을 적나라하게
알아보기 위해 그가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그는 이러한
괴로운 상황의 배후 원인은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이 지성과 교양의
명령은 절대 따르지 않고 외적 욕망의 지시만을 따른데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는 특히 잘 생긴 여자 하나를 지적하면서 그녀의 옷차림새와
화장에 대해 칭찬을 늘어 놓았다. 그런 다음 아주 정중하게, 그녀의
몸치장 뒤에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성적 욕구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손님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여러
종족과 국가의 성적인 관습에 대한 자세하고도 상세한 묘사와 함께 그
자신의 성적 묘기에 대한 이야기로 뛰어들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근사하고 오래된 아르마낵( Armagnac )으로 푸짐하게
대접받았을 때쯤, 손님들은 그들의 억제력을 잃고 곧 말 이상의
것이 되어버린 음담 패설의 교환에 가담하게 되었다. 구제프는 그가
모욕했던 여자와 함께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은 이제는 오입이나 그 유사한 것들이
그날밤의 스케줄에 들어 있는 것으로 믿게 되어 각각 다른
호실에서 나체의 다양한 단계들을 연출하면서 육체적으로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곡예가 절정에 달한 바로 그때, 구제프는 팔팔하게 떨어져 나와 주연을
끝내라는 벼락과 같은 명령을 던지면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수업은 끝났다. 여러분들은 내가 저녁 일찍 했던 이야기의 타당성을
여러분 자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하였으며, 그 덕택으로
이제 여러분은 자신들의 진정한 실태를 부분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중요한 수업' 에 대한 댓가로 수표와 현금의 지불을
기꺼이 수락하겠다. "
피터는 구제프를 알기 때문에 놀라지도 않고 기록을 했는데 들어온 돈이
수천 달러에 달했다.
모두들 떠나고 난 후 구제프는 접시를 닦고 있는 피터를 돕기 위하여
부엌으로 가 그날밤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역겨웠다는 대답이었다.
구제프는 웃으며 꿰뚫는 듯한 눈으로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역겨움이라‥‥‥ 참 좋은 느낌이군 그래. 그러나 이제는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어. 누가 역겨웠지?"

이것이 실제 상황이다. 그대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대의 속
마음과는 아주 딴판이다. 인류는 심하게 타락했으며 표면의 행동과
내면의 의도가 별개라는 구제프의 관찰에 대해 손님들은 마음이 상했고
화가 났었다. 그대는 설명을 늘어 놓는다거나 합리화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의 변명은 변명일 뿐이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조차도
못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여자가 강간당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녀가 강간당하는 것을
원하고 있어서,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것을 불러들인다. 그녀의 어떤 제스처나, 걸음걸이, 옷차림새나
이야기하는 방식들이 모두 강간에 대한 미끼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놀라고 화가 나 격앙된 듯이
경찰서와 법정에서 싸운다. 만약 그녀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본다면 그녀는 더욱더 놀라게 될 것이다. 사건은 그녀 자신의
노력으로 욕망을 충족시켜 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면의
실제적인 동기를 모르는 채 계속해서 이런 이중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시하라. 그 주시가 그대를 매우 예민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냥
주시하라. 그대의 진짜 동기는 무엇인가? 이것이 그렇지 않다고 그대
자신을 확신시키려 하지 말라. 그냥 하나의 거울이 되어 그대의 행위들을
바라보라. 그냥 그대 행동의 조용한 파수꾼이 되어 왜 그대가 그런
일을 하는지,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항상 경계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가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는
이런 일을 이야기하는 개성이요,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되는 일을 하는
그대의 실체이다. 그리고 웬일인지 둘은 서로 조절해가고 있다. 여기서
갈등과 마찰과 에너지의 낭비가 생겨난다.
내면에 하나의 욕망이 있고 바깥에는 그 반대되는 것이 있는 대부분의 경우
그 일은 일어난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은 왜인가? 반대되는 것을 통하여
그대는 그대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적으로
깊게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매우 뛰어난 것처럼
행세한다. 열등한 사람만이 뛰어나기를 바란다. 정말 뛰어난 사람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열등 의식으로 고통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가가 된다.
그것만이 그들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얼굴에 '나는 의롭다' 라는 표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깊은 내면에 있어서는 그 반대라는 것을 안다. 그는 죄의식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무가치함으로 깊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이제 그것을 숨기는 유일한 길은 성자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소위 성자라고 하는 자들은 죄인들과 조금도 다른게 없다.
유일한 차이라면 죄인들은 정직한데 반해 성자들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백 명의 성자들로부터 진짜 성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 이상일 뿐만이 아니라 기대 이상이 될 것이다. 99%가 /
가장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대들에게만 가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장은 너무 교묘하여 다른 사람들만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까지 속이고 있다. 사실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속여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가 성자라고 믿기 시작할 때 그때
가서야 그대 자신도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성자는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안다. 비록
온 세상이 그가 성자가 아니라고 떠들어 댈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이해는 내면적이다. 그는 곧바로 자기 자신과 조우한다.
그의 경험은 직접적이며 실제적이다. 그는 그의 본성을 안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은 산을 알고 불멸을 알고 죽음 것을
아는 첫 발자국이다.

헨리 베르그송은 금세기 초에 말했다. "과학에 의해 몸에 주어진
부가는 영혼에도 상응하는 부가를 요구한다" 라고.
현대인들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영혼이 결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과학과 기술이 몸에 많은 것들을 부착시켰기 때문이다.
몸은 더 강해졌고 더 오래 산다. 뇌는 더 강해졌고 더 지적으로 되었다.
몸과 몸의 일부인 뇌에 비교해 볼 때 영혼은 매우 가난하다.
그것은 거의 무시되었고 부정되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누가 자신의 본성에 관해 생각한단 말인가.
교회나 절간에 가는 것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발을 벗어 던져야 한다. 자신의 적나라한 본성 속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우주와 다시 연결시킬 수 있다.
실제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거기에서 뿐이다.

이제 경문으로 들어가자.

여조사(呂祖師)께서 말씀하셨다. 원신(元神)과 참된 본성(眞性)만이
시간과 공간을 극복한다.

내가 본성( essence )이라고 말해온 것을 여조사께서는 '원신'이라고
불렀다. 원신은 그대의 본질적인 혼이요, 그대가 신으로부터 가져온
가르쳐지지 않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마치 그대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었던 것처럼.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그대는 어떻게 존재하였는가?
아무것도 가르쳐지지 않았고 마음도 없이 그대는 무심(no-mind)으로
존재하였다. 거기에 축복이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 뱃속에서의 아홉 달 동안의 경험, 바로 그 아홉
달 동안의 경험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기억이
그를 따라 다닌다. 그 아홉 달은 그대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의식의 영역에서는 잊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깊이 그대 몸의 세포와
신경 속에는 그날들이 여전히 고동치고 있다. 그날들이 그대 존재 속에
여전히 들어있다. 마음속에서 의식이 안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변함없이
거기에 있다. 저녁에 그대가 깊이 잠든 바로 그때, 그대는 그대가
어디로 가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아침에 그대는 몸이 풀렸고
원기가 회복되었으며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삶이 그대에게 다시
일어난 것이다. 그대가 끌어 모았던 모든 먼지들이 사라졌다. 그대는
다시 신선하고 젊어진 것이다.
그대의 몸 속에 느낌이 있다. 몸이 평온해지고 조용해지면 무언가를
기억한다. 그 기억은 뇌 속에 있지 않다. 그대는 그대가 어디로 갔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오직 붓다만이 깊은 잠
속에서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깊은 잠 속에서도 그는 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깨어있다고 하는 소위 각성 상태에서조차
깨어있는 것이 아니다. 소위 ' 얼차려' 상태에서조차 그대는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은 열려 있으나 그대의 마음은 계속해서 천만
가지 생각들을 뜨개질한다. 내면적인 대화와 소음은 계속된다. 깊은
내면에 사고와 꿈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보지만 보는 것이 아니며
듣지만 듣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깨어있으면서도 의식적이지 않다.
그러나 붓다는 빨리 잠들 때조차도 깨어있다. 그만이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어디로 가는가? 그는 본질, 근원, 원신으로 간다. 그리고 밤을 통하여
순간이나마 원신으로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다시 젊어진다.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없는 사람은 정말 지옥에 있는 것이다. 그는 삶에
지치고 기진맥진해지고 지루해진 채 침대에 들어서 아침에는 보다
더 피곤하고 짜증나고 지쳐서 일어난다. 그의 삶은 지옥이다.
깊은 잠 속에서 그대는 그냥 존재의 근원 속으로 미끄러진다. 근원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잊어 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근원은 모든 이중성 너머에 있다. 그것은 그대가 아는
삶도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양극성을
초월한다. 그것은 하나님이다.

원신과 참된 본성만이 시간과 공간을 극복한다.

그대가 원신 속에 있을 때 그대는 그대의 참 성품 속에 있는 것이다.
개성 속에 있을 때 그대는 가짜다. 그대는 조작되어진 현상일 뿐이다.
주시하라. 그러면 그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조작으로 벌어지는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가슴에는 미소가 없는데도 그대는 웃는다. 그것은 조작이다. 심지어
마음에 없으면서 울고 짜기까지 한다. 그 눈물들은 가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조작인가를 그대로 바라 보아라. 그리고 조작적인 것은 무엇이나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그대를 플라스틱 물건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영생을 주었다. 그러나 그 영생
eternal life )은 그대가 신발을 벗을 때만 발견될 수 있다.
개성을 벗어 버려라. 모든 페르소나와 가면들을 던져 버려라. 마스크들을
없이 하라. 그 가면들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고통스러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 뿐만 아니라 그대는 여러 번 죽어야 할 것이다.
얼굴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죽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보다
신선하고 깊고 활기있는 새로운 삶이 그대 속에서 싹틀 것이다.
모든 얼굴들이 떨어져 나가고 본질만이 남게 되었을 때 그대는 모든
양극성(duality ), 심지어 시간과 공간의 양극성마저 초월한 것이 된다.
그대가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의 근본 존재 속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는 어떠한 시간이나 공간도 없다. '어디'라고 할 만한 것이
사라져 버려 그대는 자신이 어디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장소를
가리킬 수도 없다. 아무곳에도 없다거나 모든 곳에 있다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다른 것은 없다.
몇멸 사람들은 '모든 곳에 있다' 는 표현을 선택하였다.
베단타(Vedanta)는 깊은 명상 속에서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표현을
선택하였다. "아함 브라흐마스미( Ahm Brahmasmi ), 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모든 존재를 투과하는 것을 말한다.
그대는 우주 자체가 된다. 그리고 나는 항상 있고 영원하다. 이것은
그대가 시간을 관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 즉 긍정적인 방법이다.
불교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부정적인 방법, 붓다는 말한다.
"깊은 명상 속에서 그대는 어디에도 없다. "
모든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시간도 없다. 그대는 무심에
머무른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없을 때 어떻게 그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오직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서만 존재한다. 시간의 선과
공간의 선이 만나고 그 교차점에서 에고( ego )가 생겨난다. 이 두 가지를
제거해보라. 그러면 에고의 중심점도 사라진다. 그것은 두 선의 교차점에
불과했다. 그것은 잘못된 관념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말한다.
"아무도 없다. 깊은 명상 속에서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도 사라지고
그대도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단지 무( nothingness ),
( shunya ), 영(zero )만이 있을 뿐이다. "
이것은 똑같은 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대가 긍정적인 표현을 선택한다면 그 자체의 위험과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지만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부정적인
법을 선택하여 아나따( anatta), 무아( no-self ), 무, 열반
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도 자체의 아름다움과 위험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무(無)의 관념이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한다. 그것이 바로
위험이다. 누가 무가 되고 싶겠는가? 脚년의 설법 기간 동안 붓다는
거듭거듭 질문을 받았다.
"사람은 왜 무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죽음, 궁극적인 죽음이텐데요?"
그때 붓다는 말한다.
"맞다. 그것은 궁극적인 죽음이다. 그러나 아름답다. "
그리고 질문자는 다시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데 누구에게 아름답다는 것입니까?"
붓다는 이야기한다.
"아름다움, 미(美)만이 거기에 있다. 그것을 경험하는 자는 없다. "
자연히 사람은 말한다.
"그렇다면 요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 그리고 아름답다고? 그래서 아름답도록 하라고? 그러나 내가
거기에 없는데 그것이 아름답든 말든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를
잃을 필요가 있을까? 그리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내가
남아 있는 이 세상에 있는 편이 낫겠다. "
무의 목표가 사람을 주춤거리게 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수 배웠다. 그것은 중국에서,
그리고 티벳에서 부정적인 언어들을 테어 버렸다. 오리지날 불교인 인도
불교는 완전히 부정적이었다. 붓다의 영향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변화를 입었다. 그러나 붓다같은 사람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죽어 무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붓다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가 되는 것에 어떠한 매혹이나
매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끄는 힘,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무가 되려 하였다.
"붓다의 말이라면 옳다. "
그의 말은 그토록 귀중했으며 그의 눈은 거기에 대한 증인이었다.
"그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우리도 사라져 버리자.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믿을 수 있다. "

그러나 일단 붓다가 사라지고 난 후 불교 승려들은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인도를 완전히 떠나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한수 배웠다. 인도 밖에서 불교도들은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붓다가 부정했던 모든 것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살아 남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불교로 살아 남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베탄타로서, 긍정적인 언어로서 살아 남았다. 그러나 붓다의 위대한 공헌은
그의 부정적인 표현에 있었다.
부정적인 표현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그대의 에고에게 어떤 만족이나
기쁨도 주지 않는 데 있다. 이것이 긍정적인 언어의 위험이다. 그대가
만약 "o'1함 브라흐마스미,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한다면, "아날 확
( Anal hag ),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한다면, 진리는 이차적인 것이 되고
그대가 일차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 진리는 그대의 그림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 라는 말이 강조가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
만약 하나님이 강조된다면, 그리하여 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그림자로
남게 된다면 아주 좋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렵다. 소위 '나'라고 하는 것은
교활하며 에고라는 놈은 요지경이다. 고놈은 기회를 봐서 생각에
편승해 가지고는 '옳다, 나만 하나님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나만 진궈이며 그 외는 모두 거짓이다. '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이 빗나가게 된다.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즉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그대는 "나는 모든 것, 즉 전우주의 전시간이요, 언제 어디애나 존재한다."고
선언해야 하거나 아니면 불교식 표현을 빌어 "나도 없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완전히 침묵하는
무, 잔물결 하나 없는 정적만이 있을 뿐이다. " 라고 해야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두 가지 진술은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 표현은 다르다.
손가락은 다르다. 그러나 똑같은 달을 가리키고 있다. 달은 그대의 본질이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원신과 참된 본성만이 시간과 공간을 극복한 수 있다.
그대가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공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마음과 몸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해 보라.
몸은 공간과 상응하고 마음은 시간과 상응한다. 마음은 하나의 시간적
현상이고 몸은 하나의 공간적 현상이다. 몸은 어느 곳엔가 존재하고
마음은 어느 때엔가 존재한다. 시간이 없이 마음을 생각할 수는 없다.
마음은 과거이거나 현재이거나 미래이거나, 기억이거나 상상이거나
현재의 榮가리다. 마음은 세 가지 시제 속에 존재한다. 그대는 주의깊게,
민감하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마음은 현재에 있다. 그대가 여기서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가령 『성경』에서 무언가 읽었는데 그것이 내
이야기와 분합한다 안한다 등등. 그때는 그대의 상상이나 기억 속으로
간 것이다. 시간이 사라지면 마음을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은 마음과
동의어다.
사람은 소우주요, 소세계다. 바깥에 커다랗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람 속에는 작게 존재한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전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도 그렇듯이 아래서도 그렇다. 인간은 전우주의
원자적 구성 요소이다. 하나의 원자를 이해하면 모든 물질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면, 자신의 신비를 벗길 수 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신비를 벗기게 된다.
두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몸은 공간이고 마음은 시간이라는 것,
명상할 때 그대는 몸으로부터 사라져 그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한지
아름다운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누구인지 모른다. 그냥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를 뿐이다. 명상에 들 때 몸은 버려진다. 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고 자신의 있음조차도 느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대는 더 이상
형상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 무형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마음에도 일어난다. 그대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내면의 모든 소란과 소음들이 점점 멀어져 아예 사라져 버린다.
갑자기 거대한 침묵이 그대 속으로 넘쳐든다. 이러한 무시간
무공간의 상태에서 그대는 자신의 본질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본질을 앎으로써 처음으로 도의 맛을 힐끗 보게 된다.

원신(primal spirit )은 상대적 대립驗脚을 초월해 있다.

모든 대극이 사라진다. 남자와 여자, 여름과 겨울, 추위와 더위,
사랑과 증오, 긍정과 부정,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등 모든 대립이 소멸된다.

원신은 상대적 대립을 초월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말라고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대는 어느 한쪽 극이 되도록 가르침을 받아왔다.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들은 세속적이거나 세상의 인연을 끊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나는 세상 가운데 머물되 그 일부가
되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편에 들러붙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대가 수도원에 들어가면 시장거리가 두려워진다. 이것이 무슨
놈의 성취란 말인가? 두려움이 있는 한 아무런 성취도 없다.
나는 히말라야에 살았던 사람들을 안다. 그때 그들은 두려워 했었다.
시장 거리로 나오면 그들이 산에서 경험해 오던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세상에 나오기를 두려워했다. 만약 그것이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이라면
어떠한 성취도 아니다. 아마 히말라야의 정적을 자신의 침묵으로
착각해온 것이리라. 그것은 빌어온 것이었다. 확실히 히말라야는 침묵하고 있으며
그대가 그 침묵 속에서 살면 그것이 점차 그대 속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그 음악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빌어온 것이다. 히말라야를 떠나거라.
그러면 그것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허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투영된 영예를 즐기고 있으며
그것은 그대 자신의 영예가 아니다. 시장 거리에 살면서 그대의
가슴 속에 히말라야를 창조하라. 소음 속에서 침묵하라. 집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산야신이 되어라. 이것이 바로 내가 나의 산야신들이 세상을
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이다. 아무것도 버려서는 안된다.
포기의 길은 도피의 길이며, 포기의 길은 그대를 대극 현상 속에
붙들어 맬 것이다. 그것으로 자유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유는 초월 속에 있으며 초월은 그대가 양극 속에서 동시에 살 때만 온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으라. 그러나 세상이 그대 속에는 있지 않게 하라.
사랑하라. 그러나 그 속에 상실되지는 말라. 서로 어울려라. 그러면서도
홀로, 완전히 혼자가 되어라. 모든 관계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두라. 게임을 하라. 그리고 이왕이면 아름답게
가능한 능수능란하게 해라. 게임은 게임일 뿐이며 아름답게 치러져야 한다.
그리고 게임의 모든 규칙들을 따라라. 게임은 규칙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게임에 불과하다는 것마는
항상 기억하라. 그것에 붙들리지 말라. 그 속에서 심각해 하지 말라.
항상 유머 감각이 그대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라. 진지하게 남아 있되
심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점차 대극들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탈속적인가? 그대는 둘 다이거나 어느 쪽도 아니다.

원신은 상대적 대립을 초월해 있다. 하늘과 땅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원신을 품는 방법을 깨달으면 음과 양의 대극( polar opposites )을
벗어나서 삼계(三界)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천상 세계, 지상 세계, 그리고 지옥 세계, 이 삼계가 모두 대극을 초월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사라진다.
바로 몇 분 전에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삼계라고 말했다.
과거란 지옥이다.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젓은 유령같다. 유령처럼
그대를 따라다닌다. 현재는
지상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실, 사실성이다. 그리고 미래는 천상이다.
희망과 욕망과 야망과 포부들, 이것들이 삼계이며 그대는
삼계 속에서 끊임없이 떠돌아야 한다. 그대는 왔다갔다 한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뛰어들고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닫는다. 그것이 계속된다.
그리고 현재는 너무 순간적이라서 알아차리지조차도 못한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있으며 양 벽은 광대하다. 그리고 현재는
찰라, 원자적 순간으로서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대가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현재에 머물기 위해서는 -도로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머무는 것이 시간을 초월하는 문이
되는 이유이다. 과거로부터는 불가능하다. 과거는 광대하고
거의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더듬을 수 있지만 그 끝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심리 분석이 도움이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과거로 가면서 과거를 풀어 헤치고 과거를
헤집는다. 그대는 계속할 수 있다. 심리분석은 수년간 계속된다.
그래도 역시 끝이 나지 않는다. 이제 그 심리분석가에게 싫증이 나 다른 분석가를
찾아가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조만간 심리분석가들은 금생(今生)이
과거의 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 그대는
계속해서 거꾸로 올라갈 수  있으며
자노프(janov)가 원초 울음(primal scream )이라고 부른 것에까지 이를 수가 있다.
원초 울음은 심리 분석의 종극이다.
첫 울음과 함께 아기는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것을 통해
아기는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울음,
그러나 일단 그대가 거기에 도달하고 나면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 또한 시작이 아니다. 이제
그대는 자궁 속으로 움직여야 한다. 동양에서는 이런 방법이 이미 시도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먼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라티 프라사
브( prati prasav)라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마하비라( Mahavir )도 그것을 했고
붓다도 그랬다. 그들은 자궁을 넘어섰다. 그러나 또 다시 그대는
죽음도 통과해야 한다. 자궁에 들어 오기 전에 죽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삶이 한층씩 한층씩 벗겨진다. 동양의 윤회 현상을 알게된 것은
깊은 심리분석을 통해서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보지 않았다.
그들은 한 번도 심리분석을 시도해보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그것을 시도해 본 유태인이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도들과 유태인들, 소위 종교인이라고 하던 그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반대하였다. 사실인즉슨 심리분석이 깊어져 조만간
흰두교의 윤회설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대가 계속해서 자신을 파고들어 가면 그대는 층과 층이 겹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끝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인간의 삶을 수천 번이나 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꿰뚫고자
시도도 했다. 그러나 역시 끝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이 삶 이전에는 그대가 사람이 아니었음을, 코끼리나 호랑이나
개였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서는 동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수백만 삶을 통과하면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자신이 풀이나 나무였음을,
그리고 바위였음을 보게 된다.
인도에서는 그대가 수백만의 삶을 통과했다고 말한다. 어디에 도달할 것인가?
과거의 분석으로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그대를
미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아무곳에도 도달하게 하지는 않는다.
미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멈춘단 말인가? 얼마나 가야 충분한 것이 될까?
이제 더 이상 앞을 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동양에서는 그것 역시 시도해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의 개념에 관해
엄청나게 공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 끝이 없다.
기억도 끝이 없고 상상도 끝이 없다. 그 양자의 사이에 매우 얇은,
그리하여 완전히 깨어있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현재라는 순간이 존제한다.
그것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며 획하니 스쳐가 버린다.
그러나 현재를 알아차리게 되었을 경우, 영생의 문이 열린다. 마음이 무심으로
들어가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이다. 개성이 개성을 초월하여
본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이다.
그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잘 안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있었고 다른 사람은
오른쪽에 있었다. 그대는 이 상징이 말하는 무한한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겠지만 예수는 바로 현재 순간을 의미한다. 한 도둑은
과거를 의미하고 다른 도둑은 미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에
근접해 있는, 본질예 가장 가까운 현재 순간을 의미한다. 한 도둑이
예수를 비웃었다. 그렇게 과거는 항상 그대를 비웃는다. 그는 예수를
힐책하였다. 그렇게 과거는 항상 그대를 힐책한다. 다른 도둑은 미래에
관하여 물었다. 죽은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천국에서 당신을
볼 ◎ 수 있을까요? 하나는 과거요, 다른 하나는 미래다. 그리고 예수는
그 두 도둑 사이에 끼어 있다.
그리고 왜 그들을 豊둑이라고 부르는가? 계속해서 그대의 현재를
훔치기 때문에 과거도 도둑이요, 미래도 도둑이다. 놈들은 도둑이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우화이다. 나는 어떤 예수교인 친구가 나에게 동의할지
안할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누가 나에게
찬성하고 안하는 것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다.
예수는 현재 지금 여기, 본성에의 밀착, 죽어 몸과 마음으로부터
사라져 버릴 준비가 되어 있음 따위를 의미한다. 그는 약간 망설였다.
누구나가 망설인다. 그대가 현재와 조우하게 되면 그대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영원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수평적이다. 영원은 누직적이다. 또다시 나에게는
십자가가 이 두선의 교차를 상징한다. 십자가는 두 개의 선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이다. 이것은
시간과 영원의 표시이다. 영원, 지금 여기에 있음, 무, 또는 만유(萬有)와
마주하게 되면 누구나가 망설인다. 그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물방울처럼 그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이다. 바다는 그렇게 광대해서
다시는 그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바다에 떨어지는 이슬 방울조차도
풀잎에서 망설인다.
예수는 망설였다. 망설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의 망설임은
그도 인간이었음을 말해준다. 그의 망설임은 그도 우리의 범주에
속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의 자식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울부짖었다.
"나를 잊어 버리셨습니까? 나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를 버렸나요?
나를 떠난 겁니까? 나는 없어져가고 있는데 당신의 구원의 손길은
안보이니 말입니다. "
이슬 방울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다.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깊은 무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죽게 되면 당신이 거기 기다리고 있다가 껴안아 품에
안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리라고 바라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나를 저버렸습니까? 나를 차버렸나요? 당신을
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
사실 보이는 하나님이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이란
절대 무에 대한 긍정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유태인의 관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마음 속에 혼란과
두려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압바( Abba)라고 부르곤 했다. 그는
아버지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듯이 보였다.
세상은 끝나가고 그 너머란 입을 쩍 벌린 무, 끝없는 심연일 뿐이었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이다. 예수의 생애는 매우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이다.
그의 인간성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요점을
보았다. 그는 영원, 무 속을 깊이 들여다 보았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얼굴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을
가질 수 없다. 이 무가 나를 껴안야 그의 깊은 가슴으로 끌어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본 요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하나님에게 말했다.
"천국에 임하소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대로
당신은 무이십니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무조차도 믿습니다. "

모든 기독교도와 모든 이슬람교도와 모든 힌두교도와 모든 유대교도와
하나님의 성격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이것을 직면해야 할 것이며, 이 근심의 시기와 고뇌를 겪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무(無)나 거기에 상응하는 다른 말로 부르는 불교와
도교의 아름다움이다. 무라는 개념으로 살아온 사람은 그 시작부터가
망설임이 없다. 그는 그냥 그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원신은 상대적 대립을 초월해 있다. 하늘과 땅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원신을 품는 방법을 깨달으면 음과 양의 대극을 벗어나서 삼계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본래 면목( original face )
을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의 무를 보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명상을 하면서 그대의 내면의 무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나면
그대는 존재 그 자체의 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태(胎)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되면 원신은 방촌(方寸) 속에 거한다.

이것은 도교의 도해이다. 혼동하지 말라. 인간 의식에 대한 도해
( map )은 많다. 다른 도해들은 다른 상징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도가
( Taoist )들의 도해이다.
도가들은 어린애가 자궁으로부터 태어나면 원신은 제3의 눈속에 거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제3의 눈은 양 눈 사이, 정확히 둘 사이, 정 중앙에
위치한다. 요가의 도해에 의하면 그곳은 아즈나 차크라( Ajna
Chakra), 즉 영안(靈眼)의 자리이다. 그곳이 바로 도가들이 원신이 거한다고
말하는 곳이다.

원신은 방촌 속에 거한다. 그러나 식신(識神)은 아래 심장 속에 거한다.
심장은 외계( outside world )에 의존한다. 사람이 하루만 쉬어도 그것은
극도로 불편해 한다. 어떤 소리를 들어 놀라게 되면 심장은 두근거린다.
격노하게 되면 그것은 박동을 멈춘다. 주검을 보면 슬퍼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에 홀려 버린다.
그러나 하늘의 심장은 머리 속에 있다. 언제 그것은 움직인 적이라도
있었을까? 하늘의 심장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방촌 속에 있는 진의(眞意)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겠느냐라고.>
육체의 심장은 끊임없이 외계에 의존한다. 그것은 외계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대 내면에 있는 외계의 일부이다. 이것은 진정한 심장이 아니다.
도가들은 참 심장이 제3의 눈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변함없다. 육체의 심장은
언제나 혼란 속에·있다. 그러나 제3의 눈에 있는 영적인 심장은 언제나
질서 속에 있다. 그것은 질서 그 자체이다.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아즈나 차크라, 즉 질서와 훈계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약 그것이 제3의 눈으로부터 오는 것이면 그것은 즉시 받아들여진다.
온 몸이 그것을 따르고 전존재가 그것을 따른다. 그곳은 명령이 발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잠이 든다. 그대는 육체적 심장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대는 아직 영적인 심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마음( lower heart )은 강한 힘을 지닌 폭군과도 같은 행동으로
천상의 지배자를 약한 것으로 보고 멸시하며·

그러나 육체의 심장은 영적인 심장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대는 단지 움직이는 사물들만 알 뿐이다. 만약 어떤 것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게 되면 그대는 그것을 잊어 버리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아래 심장은 하늘의 심장, 영적인 심장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약한것, 거의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아주
강한 것으로 생각한다.

·국정의 주도권을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아래 심장이 그대의 주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원래의 왕궁이( primal castle ) 강성해져 방호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강하고 지혜로운 왕이 왕위( throne )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더욱 의식적이 될 때 그대는 제3의 눈이 있는
영역이 강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깨어 있게 될 때마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는 제3의 눈으로부터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금만 깨어나도 그대는 제3의 눈 부위가 약간 조여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마다 그 조이는 느낌은 더해간다.
제3의 눈에는 무언가가 팔딱거리고 무언가가 고동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각성으로 일단 제3의 눈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일단 제3의 눈에
각성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작용하기 시작하고 살아나기 시작한다‥‥‥
힌두교도들이 그것을 차크라라고'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차크라( Chakra)란 바퀴를 의미한다. 바퀴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일단
에너지가 들어오면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임은 곧 작동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대의 존재에는 커다란 혁명이 일어난다. 즉시 아래
심장이 윗심장에게 복종을 한다. 윗것이 오면 아랫것은 굴복을 한다.
그것은 윗것이 없을 때만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참 종교와 사이비 종교의 차이이다. 사이비 종교는 말한다.
노력해서 자신을 컨트롤하라.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
그대의 감각을 통제하라. 그대의 몸을 길들여라. 그러나 참종교는 말한다.
그냥 제3의 눈 속으로 들어가 영적인 심장이 작동하게 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컨트롤될 것이고 모든 것이 길들여질 것이다. 주인이
당도하게 하라. 그러면 모든 것들이 즉시 정리가 될 것이다.

양 눈은 마치 좌와 우에서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지배자를 보좌하는
신하와도 같이 빛0脚을 순환시키기 시작한다. 안에서의 다스림이
이와 같이 질서를 이룰 때 반역적이던 모든 간웅(奸雄)들이 그들의
무기를 고쳐잡고 명령을 받기 위해 부복할 것이다.

그냥 주인만 등장하게 하라. 거기에는 질서를 만들기 위한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가 없다. 성질을 길들일 필요도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성질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냥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보다 의식적이 되는데 쏟아 넣기만 하라. 그림자가 그대를 따르듯
성질이 의식을 따른다. 만약 성질을 길들이려고 하면 그 성질은 가짜와
허위가 될 것이고 그대는 위선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 아니다.

불사의 선약( elixir of life )을 얻는 길[對渤은 정수(精水)와 신화(神
火)와 의토(意土)로 되어 있는 위 없는 마술( supreme magic )임을 알라.

이것이 지고의 마술이다. 왜 그것을 마술이라고 부르는가? 일단
윗 심장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마치 마술이 일어난 것과도 같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감각들은 결코 질서를 이루지 못했었다. 마음은 항상
혼란되어 있었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살까 죽을까, 그대는 언제나
망설였었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선택할까, 항상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치 누가 요술을 부리기라도 한 듯 모든 혼란이
사라지고 맑아지고 삶이 투명해진다. 그대는 단순히 해야 할 일들을
할 뿐이다. 사실 일단 하늘의 심장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대가 하는 것은
무엇이나 옳다. 그대는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사의 선약을 얻는 길은‥‥‥ 위없는 마술임을 알라.

그리고 이 지고의 마술은 세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수(精水 : seed-water), 신화(神火 : spirit-fire ), 그리고
의토(意土 : 脚ought-earth ), 이것들은 도교의 상징들이다. 이 세 가지,
정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하나의 에너지, 즉 에로스(eros )이다.
신화는 ◎, 즉 로고스( logos )이며 의토는 직관( intuition )이다.

그대는 이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수(精水 : seed-water)는
정(精 : eros )으로서 그대가 성에너지( sexual energy ), 즉 열정의
에너지로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에 있어서 그것은 문제거리만을
만들 뿐이다. 성에너지는 그대의 친구인 것처럼 가장을 하지만 알고 보면
적일 뿐이다. 그것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대는 더 큰 불행에 빠진다.
사랑에 눈이 먼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라 나스루딘( Mulla Nasrudin )이 나에게 말했다.
"사랑은 장님이_51 결혼은 개안(開眼)입니다. "
아직 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사랑은 장님이며, 커다란
축복이 될 수도 있는 에너지가 그대에게는 커다란 비극이 되고 있다.
정(eros )은 그대의 에너지다. 프로이트가 모든 것을 그대의 정, 즉
성에너지 속에서 구하고 찾은 것은 옳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에너지의
일상적인 상태가 자연스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틀렸다.
그것은 전도(顚倒)된 상태이다. 자연스런 상태에서 성에너지는 점점
위로 상승하며 그대를 밑으로 끌어내리지 않고 위로 이끌어 준다.
이러한 자연스런 상태에서 성에너지는 그대 속의 황금꽃이 된다.
그러나 소위 전도된 상태에서 그것은 그대를 새로운 감옥으로 이끌어갈 뿐이다.
밖으로, 아래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고갈시키며
점점 죽음 가까이로 몰고갈 뿐이다. 그 똑같은 에너지가 만약 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새롭고 풍요한 삶을 창출한다. 그것은
불사약이 된다.
진흙이 연꽃의 씨앗을 품고 있어 진흙이 연꽃이 될 수 있듯이, 그대의
성에너지도 황금꽃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위로
상승해야지 그대가 그것을 상승시킬 수는 없다. 그것을 억지로 상승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 도착자들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할 수가 있다.
일단 그대의 제3의 눈, 그대의 영적 심장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에너지는 스스로의 조화로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대는 제3의 눈을
창조했고 에너지는 마치 자석으로 향하듯 그것에 붙게 된 것이다.
' 안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자석을 바깥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대의 에너지가 밖으로 움직인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게 되면
에너지가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여자가 자석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제3의 눈이 작동하게 되면 그대는 강력한 자석을 갖게 되어
아무도 그대를 밖으로 끌어낼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밖에
존재하는 것 보다도 더 큰 자석을 내부에 소유하는 것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에너지는 위로 그리고 안으로 움직인다.

그대가 밖으로 움직인다면 그대는 양극성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만약 안으로 움직인다면 비양극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대는 무극
( non-polar)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메타심리학(metapsychology ), 또는 붓다의 심리학
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반이다. 이것은 순수 종교, 예식의 종교가 아닌
순수 종교이다. 기독교나 힌두교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단지
그대의 에너지의 근원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신화(神火 : spirit-fire )이다. 그것은 빛이요, 로고스다.
그것은 의식적인 마음이다. 상승하는 정( eros )은 의식과 무의식의 마음
너머로 그대를 이끌어 준다. 로고스는 의식적인 마음이다. 그것은 심리학이오,
과학이다.
의토(意土.thought-earth )는 어둠이요, 무의식이요, 직관이다. 그것은
초심리학(parapsychology)이요, 예술이다. 의토는 직관이요, 어둠이다.
여성들은 의토 속에서, 직관적인 시각 속에서 산다. 여성들은 무의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은 신화 속에서, 논리적이고
의식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 예술가는 여성이요, 과학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정(精)은 하나의 에너지로서 비양극적이다. 그것은 그대를 예술과
과학의 너머에까지 데려다 준다. 그대를 의식과 무의식의 너머에까지
데려다 준다. 그대를 남성과 여성의 너머에까지 데려다 준다. 그대를
비양극성, 초월에까지 이르게 해 준다.
그러나 마술의 비밀은 그대의 하늘의 심장이 작동되게 하는데 있다.
그것은 그대의 양눈 사이에 있다. 나중에 계속해서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법, 그 방법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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