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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회전

narrae 2013. 12. 24. 07:23

  빛의 회전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몸 속에 넋(魄)이 있다. 넋은 음(陰)이며 의식의 체(體)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혼(魂)이 있으니 그 속에서 신(神)이 거주한다.
혼은 양 눈 속에 있다. 그것은 보고 꿈꾼다.
그러나 어둡고 침울한 기분에 빠져 육체의 형상에 매여있는 사람은
누구나 넋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므로 빛의 회전(回光)에 의해 혼이 단련된다.
그리하여 혼은 보양(保養)되고 녈은 제압당한다.
옛 사람들은 세속을 초월하여 순수 본질(純乾)로 돌아가기 위해
조잡한 용재를 완전히 단련하는 방법을 썼다.
이것은 넋을 제거하여 혼을 보양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빛을 회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음(陰)을 제어하고
넋을 지배할 수 있는 탁월한 비결이다.
이 비결대로 수행하면 정수(精水)가 저절로 충실해져 올 것이다.
신화(神火)가 발생하고 의토(意土)도 응축되고 견고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성태(聖胎)를 맺게(結)되는 것이다.

하나를 이루고 있는 참 본성際眞脚이
하늘의 궁전(乾宮)에 떨어지면 혼과 넋으로 나누어진다.
혼은 하늘의 마음(天心)에 존재한다.
그것은 양(陽)이요, 가볍고 맑은 기(氣)이다.
우리는 그것을 태허(太虛)로부터 받으며
모양은 원시(元始)와 같다.
넋은 음(陰)이다.
그것은 유형적(有形的)인 혈육의 마음[凡脚에 매여 있다.
흔은 삶을 좋아하지만 넋은 죽음을 열망한다.
일체의 감각적 욕망(好僖)과 격한 감정들은 녈의 작용이다.
그러나 수련자는 음을 완전히 정제(精製)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그것을 순수한 양諦U脚으로 화하게 해야 한다.

하번은 우(Wu) 황후(皇看)가 우주적인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원리와
하나와 다수, 하나님과 모든 생명체, 그리고 각 생명체들 간의 관계에
대하여 실제적이고도 간단하게 논증을 할 수 있겠느냐고 화짱( Fa
Tsang ) 선사(禪師)에게 물었다.
화짱 선사는 작업에 들어가 궁전의 한 방을 지정하여 여덟 곳에 여덟
개의 큰 거울을 세워 놓게 했다. 그리고 나서는 두 개의 거울을 추가하
여 하나는 천정에 하나는 방바닥에 설치했다. 천정 한가운데로부터는
초 하나가 늘어뜨려져 있었다.

황후가 들어오자 화짱은 초에 불을 붙였다. 황후가 부르짖었다.
"어머나, 정말 아름답군요."
화짱은 열 개의 거울에 반사된 촛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마마, 이것이 바로 하나와 다수, 그리고 하나님과

그 모든

생명체들 간의 관계에 대한 논증입니다. "
황후가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그런데 모든 생명체들과 생명체들간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 "
화짱이 대답했다.
"자세히 보십시요 마마, 각 거울들은 천정 한가운데 있는 불꽃들까지
도 반사하여 그 수가 무한에 이르고 있지 않습니까? 반사된 것들은 전부
서로 동일한 것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서로 바꾸어질 수
있으며 다른 의미에서는 각자가 홀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각 존재의 그
이웃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
화짱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마마,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은 우주의 실상(實
狀)에 대한 수박 겉 할기 식의 개략적이고도 고정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끝이 없고 그 가운데에 있는 모
든 것이 다양한 양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나서 화짱은 반사된 수많은 상들 중의 하나를 가려, 별로
의미없어 보이는 낱개에 대한 간섭이 우리 세계의 전체적인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었다.
게곤( Kegon )은 이러한 관계를 공식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것 속의 하나
하나 속의 모든 것
하나 속의 하나
모든 것 속의 모든 것

그리고 나서 화짱은 그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작은 수정 구술을
들고는 말했다.
"자 보십시오 마마, 큰 거울들과 그 속에 반사되어 있는 수많은 상들이
다 이 작은 수정구 속에 비쳐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 무한한
실체 속에 있는 무한히 작은 것이 무한히 큰 것을 포용하며, 무한히 큰 것이
무한히 작은 것을 포용하는지 보십시요 방해도 없이 말입니다.
시간과 영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아무런 장애도 없이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논증할 수 있다면야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마는 애석하게도
이것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드라마틱한 현상이지요‥‥

사람은 외딴섬이 아니다. 어떤 것도 그리 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독립(independence)이라는 이
단어야말로 거짓이며, 의존(dependence )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사실을 말하자면 상호 의존(interdependence)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깊게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대가
만약 작은 장미의 꽃과 뿌리와 그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전 우주를 이해한 것이 된다. 전 우주가 작은 장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풀잎에마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화짱 선사는 모든 예증과 설명들은 고정적이지만
존재는 동적인 흐름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강이다. 모든 것은
서로의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시작과 끝을 명확하게 구분지을 만한
선은 없다. 어떠한 경계선도 없다.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구분들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제일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교 연금술의 기초이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도교의 모든 연금술은 이해가 수월해진다.
그리하여 낮은 것은 높은 것으로 변형되어진다. 낮은 것은 이미 그
속에 높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질 금속이 황금으로 변형되어질
수 있다. 아무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질 속에는 이미
황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위에서 그러한 것처럼 아래에서도 그러하며,
아래에서 그러한 것처럼 위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바로 변형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사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어떠한 변형도 불가능하다.
철학자 라이프니츠( LlebnitB )가 말한 것처럼 만약 이 세계가 창문이 없어
서로 접촉이 전혀 불가능한, 완전 고립된 원자적 실체인 모나드
( Monad )와 같은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변형의
여지도 있을 수가 없게 된다.
변형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서로의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단 한순간이라도 분리된 실체로서의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는가? 그대는 분리되어질 수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꽃은 나무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다. 분리되는 순간 그것은 죽는다.
나무는 지구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다. 그 이상도 마찬가지다. 잎을
분리시켜 보라. 그러면 나무가 죽는다.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분리시켜
보라. 그러면 지구도 죽는다.
죽음이란 분리를 의미한다. 생명이란 비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아는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대의 분열된 사고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미 죽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에고와 관련하여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죽음의 유일한 원인이 된다. 그대는 계속해서 죽은 말을
채찍질할 수 있겠지만 그게 길어봐야 얼마이겠는가? 그것은 죽어가고 있다.
아니 그것은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그대 속에 살아있는 것은 죽을 수가 없다. 생명은 영원하다. 그러나
생명은 그대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생명은 전채의 것이다.
생명은 광대하고 무한하다. 죽음은 조그맣고 개체적이다.
생명은 우주적이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그대는 우주의 일부이지만
그대가 죽을 때는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玲
그대가 전체의 부분이라는 것을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그대는 더욱 "
살아나게 될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풍요케 하리라."
풍요한 삶에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에고로서 죽고, 분리된
실체로서 사라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전 우주가 그대의 것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소유하지 말라.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다. 소유하라.
그러면 그대는 조그맣게 한계지어져 곧장 죽어간다. 보다 살아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만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생명의 불꽃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조금만 일어나도‥‥‥ 그대가 만약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대 속에서 생명이 타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두 사람이 일체감을 느낄 때 일어난다. 사랑으로부터 배워라.
두 사람이 하나되었을 때의 그 기쁨과 환희. 생각해보라. 그대가
만약 전체와 사랑에 빠진다면 얼마나 엄청난 환희와 기쁨이 일어나겠는가?
그것이 바로 풍요한 삶이요, 무한한 삶인 것이다.
자신을 분리시킨다면‥‥‥ 세상에는 너무 이기적으로 살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지옥이다. 분리되어 사는 것이 지옥이다.
분리되지 않고 사는 것이 천국이다.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전체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바로 해탈( moksha )이요, 열반
( nirvana )이다. 그것은 궁극의 자유이다.
두번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삶이 양극적(兩極的)이라는 것이다. 그것
또한 도교의 기본적인 접근 방법이다. 그러나 그 양극성은 대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보완해 주고 충족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죽음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죽음은 적이 아니다. 삶이
만약 죽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죽음이 적이 되겠는가?
그것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삶의 토대로 예비하며, 삶을  도우며,
삶을 일깨우며, 삶에 도전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그대의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그대는 전혀
살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을 뒤로 미를 것이다.
"내일이 있는데 오늘 사랑할 게 뭔가? 그리고 내일이 영원한 것이라면
걱정할 게 뭔가? 오늘 춤출 필요가 있을까? 내일 우린 또 볼 것이
아닌가? "
한번 상상해 보라. 만약 그대의 육체적인 삶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그대의 미루기 또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는 미를 수가 없다.
아무도 다음 숨이 들어올지 안들어 올지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멍청한 사람들만이 뒤로 미루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그냥 살아간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만이, 오직 이 순간만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뒤로 미를 여유가 없다. 다음
순간이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미를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보들이나 내일로 미룬다. 현명한 사람은 지금을 살아간다. 현명한
사람은 지금 이외의 어떠한 공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보들은 영원히
미루어졌으면 좋을 성 싶은 일에는 곧장 뛰어든다. 그런 것이라면
즉시 실행한다. 화가 나면 그는 즉시 그것을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잖아." 그는 멍청한 것이라면
죄다 살아가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죄다 미룬다. 현명한 사람도
미루긴 하지만 그가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서만인 것이다.

구제프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나는 아홉 살에 불과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침상 곁으로 불러 내 귀에 대고 속삭이셨다. 할아버지는 이 작은 작은
아이를 몹시도 사랑했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놈의 장래를 알아보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소년의 귓가에 대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조그만 충고 외에는 네게 줄게 없구나. 네가 이것을 지금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만 기억은 해둬라. 언젠가는 자라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거야. 그러니 꼭 기억해 둬라. 이것은 아주 작은 충고(
뿐이란다. 나쁜 일이면 刻시간을 뒤로 미루고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
일초라도 미루지 말아라. 화가 나고 성질이 나고 누굴 때려주고 싶다면
24시간 동안 뒤로 미루어 두어라. 사랑하는 일이나 나누어 주는 일이라면
일초도 지체하지 말아라. 바로 즉시 그것을 실행에 옮겨라."
그리고 구제프는 그 간단한 충고가 그의 전 삶을 변화시켰다고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24시간 동안 연기할 수가 있다면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24시간이나 미를 수 있을 정도라면
조용하고 침착하다는 것은 그대가 화를 내지 않을거라는 확실한   미듬이 된다.
그리고 24시간이나 미를 수 있다면 어느 누가 화를 낼 수 있겠는가?
24시간 동안 심사숙고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어리석음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우습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교훈에 의해 구제프는 실제로 탈바꿈되었다. 간혹
아주 간단한 교훈만으로도 그대는 변형되어질 수 있다. 그러키 위해선
그것이 그대의 삶이 되게 해야 한다.
삶은 거기에 죽음이 있기에 존재한다. 죽음은 삶에 밀도를 더해 준다.
죽음은 삶에 도전하여 그대로 하여금 살아가도록 일깨우며 최선을
다해서 최상의 삶을 살도록 한다. 왜냐하면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은 항상 그대를 일깨우며 그대가 전체적으로 살도록
채찍질한다. 그때 죽음은 더 이상 그대의 적이 아니요, 그대의 친구이다.
이것은 모든 대립적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정과 긍정, 사랑과
미움, 아름다움과 추함, 밤과 낮, 여름과 겨울 등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여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여자
또한 남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의
부분들이다. 이 양극들 사이에는 인력( attraction )과 척력( repulsion )이
공존한다. 인력과 척력은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대의 한 부분은
여자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만 다른 부분은 홀로 있고 싶어한다.
그대는 항상 망설이고 있다. 남자나 또는 여자와 함께 있게 되면
그대는 홀로 있고 싶은 자유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대는 혼자
자유롭게 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자유로와지기 원하는 그 욕구가
어디서부터 나오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여자나 남자, 다른 쪽이
그것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대가 다른 쪽을 떠나는 순간 홀로
있고 싶은 욕망과 바램과 열망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가 홀로 있을 때 그대는 그냥 쓸쓸하게 느낄 뿐이다.
그대가 줄곧 생각해 왔던 홀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어떠한 자유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단순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로움만을 볼
뿐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전 존재에는 찬 바람과 추위와 어둠만이 드리우게 된다.
다시 다른 쪽으로 가고 싶은 욕구가 일어난다. 이제 그대는
사랑하고 싶어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문제이다. 그들은 동시에 서로 끌리면서도
반발한다. 그들은 함께 있고 싶어 하면서도 떨어져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있는 것이다.
결혼이란 사랑과 미움의 사건이요, 친화와 반발의 사건이다.
결혼이 지속되는 것은 매일 작은 이혼이 일어남으로써이다. 그래야만 그것이
지속될 수 있다. 만약 남자와 여자가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결정을
보았다면 그것은 지속될 수 있다. 만약 남자와 여자가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결정을 보았다면 그것은 조작된 결혼이다. 그들은 함께 있을 것이다.
함께 살아갈 것이지만 결코 실제로 함께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되는 순간들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런 척할 뿐이다.
그들은 금슬이 좋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진실로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결혼은 일종의 친밀한 불화이다. 그것은 가까운 적대관계요, 우정인
싸움이요, 전쟁이다. 그렇다. 두 전쟁 사이에는 평화 또한 존재한다.
그 평화는 전쟁으로 하여 아름답다.
부부들은 계속하여 싸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사랑의 불꽃을
있게 하는 방식이다. 일단 싸우고 나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 서로로부터 아주 멀어졌을 때 심리학적 원리에 따라 그들은
다른 쪽을 갈구하기 시작하고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다른 쪽을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까이, 아주 가까와진다. 그들은
고독의 맛을 좀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아주 가까와지고자 한다.
단 친밀해지고 나면 그들은 다시 떨어져 나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아라. 그것은 근본적인 현상이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결혼이 아닌 위조 결혼을 하는 것 뿐이다. 서로를 존중해라. 그것은
하나의 계약이다. 나는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도 내가 필요하며
당신이 내 등을 할퀴면 나도 등을 할퀸다는 계약. 그것이 전부이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하며, 당신은 나를 보호해주고
나는 당신을 보호해준다는 것, 그것은 합법적인 계약이지 결혼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그대가 경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번째로 이해해야 할
사항이다.
그리고 세번째, 이것은 가장 중요하다. 이 세번째 사항은 남자는 단순히
남자만이 아니며 여자 또한 단순히 여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도 양쪽이며, 여자도 양쪽이다. 양쪽 다 양쪽이다. 남성은 그 속에
여성을 담고 있고 여성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은 자신 속에 남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외면적인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내면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외면과 내면은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까 "아래에서 그런 것처럼 위에서도 그렇다. "
라고 말한 것처럼 '바깥에서 그런 것과 같이 안에서도 그런 것'이다.
그대의 내면적 실재는 외면적인 실재와 같다. 그들은 서로 일치하고
균형을 이룬다. 모든 남성들이 자신 속에 여성을 가지고 있고 그녀와
관계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이것은 단순히
그대가 사랑하는 외부의 여성을 갖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은 훨씬 덜 복잡해질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할 때 언제나 거기에는 네 사람이 존재한다. 각 침대에
네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 복잡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할 때면 거기에는 언제나 네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그룹 섹스이다. 남자는 그 속에서 여자를 가지고 있고
여자도 그 속에 남자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가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언제나 그러하게 되어 있다.
아버지의 요소가 9"A 그대 속에 있을 것이며, 어머니의 요소가 50%
그대 속에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공헌을 하는
것이다. 그대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대가
육체적으로 남성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심령
깊은 곳에서 그대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요, 둘 다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남성과 여성을 한 단어로 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성( man )이란 말을 사용해 왔다. 이것은 둘 다를
포함하는 의미로 쓰여 왔다. 이것은 단지 과거에 남성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추가 다른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으며
그 편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남성( man )이란 말은 여성
( woman )을 포함하지 않지만 여성이란 말은 남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양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로는 여성이란 말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 he )와 그녀( she )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를 포함하지만
그는 그녀를 포함하지 않는다. 양쪽을 다 가리키는데는 그녀와 여성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을 가리키는데도 '그' 보다는 '그녀'가 나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은
서로를 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성 연애라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바로 이 근본적인 내면의 양극성 때문에, 그대는 외면적으로는 남자이면서
내면적으로는 내면의 여성에 조율될 수 있다. 거기에 아무런 문재도 없다.
그대의 영혼은 자유롭기만 하다. 안에서는 내면의 남성에
동화될 수도 있고 내면의 여성에 동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육체적으로 남성이면서 내면의 여성에게 동화된다면
자연히 동성 연애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일어날 수 있다. 동성 연애는 바로 이 내면의 양극성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과학은 심지어 그대의 육체적인 성조차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그것 또한 가능하다. 도교의 발견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호르몬과 화학 물질을 조금만 바꾸면 남자가
여자가 될 수 있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대가 남자와
여자 둘 다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체적인 차이조차도 이제 윤곽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것이 저절로 일어나기도 한다.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현상이 발견되곤 하는 것이다. 차이는 그리
많지 않아서 아주 적으며 그 결과 51%가 남성이고 49%가 여성이 되었다.
남성 측으로 약간 기울었을 뿐이다.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에도
일어날 수 있다. 새로운 호르몬, 새로운 음식, 새로운 기후, 새로운
공기, 새로운 감정, 질병, 혹은 어떤 것이라도 균형을 깨뜨려 남자가
여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날 과학은 그것이 아주 간단하게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성을 보다 빈번하게 바꿀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그대가 한 생에 있어 양성을 다 살 수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가 두 개의 세상을 즐길 수 있다면 왜 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보다 많은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남자로
삼십 오년을 살았고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쪽 삶이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다른 쪽에서 보는 것 외에는 다른 쪽 삶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 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수천 명의 사람들을 관찰해 본 결과는 이렇다. 만약 한 사람이
이번 생에서 남자였으면 다음번 삶에서는 여자로 태어난다. 여자였으면
남자로 태어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남자인 것, 또는
여자인 것에 대해 싫증이 나 있다. 그래서 마음 속 깊이 다른 쪽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는 반대편이 되고자 하는 강한 염원
때문에 자연히 다른 성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세 가지 기본적인 사항이다. 첫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둘째, 삶은 양극적이지만 그 양극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 그리고 세째, 각자는 내면적으로 양성이며 어느
누구도 단수가 아니라는 것.
인도에는 아르다나리쉬와르( ardhanarishwar)라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도교의 접근법과 같다. 쉬바( Shiva) 신은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인
모습으로 조각되고 그려졌다. 몸의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이다.
그 신상이 처음으로 발견되었을 때 서양 사람들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불합리하게 보였다.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려고 한 것일까?
이제 그들은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바로 그 쉬바 신처럼 그대는 반반씩이다.
이 경문은 바로 내면의 양극성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내면의 양극성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하나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명상은 내면의 양극성을 초월하는 길이다.
명상은 모든 환상으로부터 그대를 해방 시킨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대는 양극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하루 3
동안 그대는 몇 번이고 한쪽 극에서 다른 쪽 극으로 변한다. 자신을
관찰해 보라. 그대는 남자이겠지만 어떤 때는 아주 여성적이 된다.
여성이면서도 어떤 때는 아주 남성적이 된다. 여자가 남성적일 때
그녀는 매우 공격적이 된다.
어떤 남자보다도 더 공격적이 된다. 그녀의 ◎
성은 마치 쓰이지 않은 토양이 매우 비옥하듯이 아주 참신하고 새롭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약 남자가 부드러워진다면 그는 여성보다도
더 부드러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사용되지 않은 토양이요,
발견되지 않은 그의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선하고 살아 』있다.
그대가 조금만 주의 깊어진다면 이 기묘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사랑스럽다. 남성은 그러지 못하다. 여성은
가끔가다가 싸우게 되지만 싸울 때는 정말 싸운다. 남성은 간혹 가다가
사랑하지만 사랑할 때는 정말로 사랑한다. 그들이 사용되지 않은 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이 사용될 때는 거기에 신선함이 있게 :된다.
이러한 내면의 양극성이 그대를 고뇌와 갈등 속에 빠뜨린다. 그것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됨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보이기 위해서는 하나가 둘이 되어야 한다.
그대가 흑판에 백묵으로 글씨를 써야 그 글씨들이 보이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극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밤에는 보인다. 밤의 어둠이 배경이 되는 것이다.
낮하늘에도 밤하늘 만큼 많은 별들이 존재한다.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디로 사라질 수 없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들은 밤애
오는 것이 아니며 낮에 어디로 숨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제자리에
있다. 그러나 낮에는 대조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남자나 여자가 되길 원한다면
그는 둘이 되어야 할 것이며, 물질과 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육체와 영혼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만이
보인다. 세계는 둘로 구성이 되어 있다. 세계는 양극적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이 이원성을 일원성 속으로 용해시킬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그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그것은 그대가 노자를 볼 수 없다거나
나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대는 이미 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부분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내면의 양극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거기에 더 이상의
대극은 없다. 음양의 대극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무극(無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둘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게임과 놀이가 가능하다.
고대 인도의 경전들은 '그'가 고독함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란 하나님을 말한다. 그는 매우 고독했다. 그는 상대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둘이 되었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되었으며, 암소와 숫소가 되었고,
계속해서 그런 존재가 되었다. 모든 존재는 성적이다. 여기서
성적이라는 것은 양극성을 의미한다. 전 존재가 양극적이다. 조만간
과학자들은 암별과 숫별을 발견해 낼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고대 천문학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거기에 완전히 동의한다. 모든
별이 음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태양이 양으로 표현되고 달이 음으로
표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발견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음과 양으로 되어 있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남자나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이제 그대는
지금까지 쭉 왜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이 성을 초월하는 방법을 가르쳐
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을 초월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대가 성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결코 양극을
초월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의 이원성 속에 남게 될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드러남을 의미하며,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음 속으로 사라지는
세상을 의미한다. 그것 또한 드러남(강림)과 드러나지 않음(승천)으로서의
양극적이다.
기독교 신학은 깊이가 없다. 그것은 아주 피상적이다. 기독교 신학애는
창조의 개념밖에는 없다. 해체는 어떻게 되었는가? 해체가 없이
어떻게 창조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동양 신학에서는 둘이 함께 존재한다.
스루쉬티( srushti )는 창조를 의미하고 프랄라야( pralaya)는 해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나타나는 순간이 있고 사라지는 순간도 있다.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과 같이 모든 것이 사라져 무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연인과 같이 있다가 싫증이 나면 명상을 원하게 되고 히말라야로
가기를 바라게 된다. 하나님도 세상이 싫어진다. 당연히 그렇다.
그때 하나님은 물러나고자 한다. 그리하여 하나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뒤를 이어 해체가 일어난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얼마동안 =
그대가 히말라야의 동굴 속에 머물렀겠는가? 하나님조차도 거기에 싫증을
낸다. 그리하여 다른 쪽을 구하고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각 개인의 영혼에 있어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대는
살다가 싫증이 나면 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대는 육체와 함께
살았고 싫증이 났다. 이제는 육체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세상을
버리지도 말고 거기에 속하지도 말라고 내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이유른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야말로 포기가 일어나는 곳이다.
그것은 한쪽 극이다. 그래서 나는 여자나 남자로부터 도망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도망친다면 거기에 미련과 관심이 남게 될 것이다.
도망치지 말라. 혜치고 나아가라. 세상에의 탐닉, 바로 그것이
세상에 대한 포기를 가져올 것이다. 바로 그 탐닉으로부터 이제는 완전히
홀로 있어야겠다는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싫증이 났을 때
비로소 그대는 그 완전한 홀로 있음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은 나를 잘못 이해하기 마련이다. 인도에서 나는 가장 잘못
이해되어진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내가 사람들에게 탐닉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포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내가
세속적인 산야스( sannyas )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진정한 산야스를 가르치고 있다. 진정한 산야스란
세속적인 경험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산야스는 히말라야의
동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강요되어진 가짜이며, 깊은 내면에
있어서 그대는 세속적에 남아 계속적 세상을 꿈꾸며 허덕일 것이다.
세상 속에 살아라. 그대가 싫증이 나고 지긋지긋해져서 완전히 그만
두게 될 때까지 정말로 살아라. 그리하여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되고 포기가 일어난다.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포기는 시장
거리에서 일어나며 오직 거기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제 경문으로 들어 가자.

몸 속에 넋(魄 : anima )이 있다. 넋은 음(陰)이며 의식의 체이다.

각각의 존재 속에는 넋이 존재한다. 넋( anima)은 여성 원리, 수동의
원리, 음을 의미하며‥‥‥ 의식의 체(體)라 하였는데, 그것은 의식의
체일 뿐 의식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이 없이 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물질이요 의식이 거하는 집이다. 그것이 없이 의식은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여성‥‥‥ 그러나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여성은 여자가 아니라
여성 원리를 의미한다. 그대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교에서 마치 여자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자에 대해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남자나 여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그들의 몸에 그다지도 애착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그 여성 원리 때문이다. 남성은 그렇게 몸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정말 몸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주위에 여성이 없으면 남성은
더러워지고 펏물이 흐르게 된다. 방이 어지러져도 그는 그것을 의식하지조차도
않는다.
그대가 어떤 방에 들어가게 되면 그대는 거기애
남자만 사는지 아니면 여자도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 사람이 독신인지 아닌지를 그의 방만 봄으로써 알 수가 있다.
책에는 몇 달된 먼지가 쌓였고 몸이나 자신의 육체적인 부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면 틀림없는 독신이다. 그러나 여자는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신경을 쓴다. 그래서 거울 앞에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물라 나스루딘이 파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몇 마리를 잡은 뒤
아내에게 말했다.
"암놈 두 마리와 수놈 두 마리를 잡았어."
아내가 말했다.
"어머나, 어떻게 가려냈어요?"
그가 대답했다.
"두 마리는 거울 위에 있었고 두 마리는 신문 위에 있었거든."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여자는 끝도 없이 그녀의 몸, 그녀의 체,
그녀의 집에 대해 신경을 쓴다. 만약 남자 혼자 남겨진다면 기껏해야
탠트 하나 정도는 들어설지 몰라도 집은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을
창조한 것은 바로 여성이다. 집이 없이는 어떠한 문명도 있을 수 없고,
집이 없으면 거기에 도시가 있을 수 없고 도시 속에서
문명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문명( civilization )이란 단어는 바로 도시 사람을 의미하는
시민( citizen )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여성이
바로 전문명을 창조하였다. 남성들은 방랑자나 떠돌이, 여행자, 사냥꾼
따위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계속해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유랑을 다녔을 것이다. 그대는 그런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거기에 대하여
많은 증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양은 보다 남성 지향적이다. 그래서 그대는 세계를 여행하는 서양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동양인 여행자들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동양은 매우 여성적이다.
여성은 소유물에 끌리게 된다. 집과 자동차와 땅과 장신구와 의복
등. 이것은 내면적인 원리에 기인한다. 그녀는 의식의 체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여성이 없이 영혼은 높게 부상할 수 없다는 것을. 위대한 시가
남성에 의해 지어진다. 그러나 배후 동기는 언제나 여성이다.
그대는 위대한 여자 시인을 만나지 못한다. 나는 여성들이 쓴 시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애를 쓴다. 그러나 이렇다 할만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마두리( Madhuri)는 훌륭한 시를 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여성은 시를 쓸 수 없다. 그녀는 시적인 영감을
불어 넣어줄 수는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어떠한 위대한
시도 배후에 여성이 없이는 쓰여지지 않는다.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여성이다. 그녀의 존재, 그녀의 사랑, 그녀의 관심 같은 것이 그것을
창출시킨다. 그녀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 남성이 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감이요, 동기요, 아주 미묘한 원인이다. 또한 어떤 여성도
위대한 화가이진 못한다. 그녀들이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남자들이 하는 모든 것을 여자들도 하고 있지만·.'
거기 대단한 경쟁이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해오던 모든 것을 그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이 중요시되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
때문이라고 여자들은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그녀들은 언제나 남성들의 모조품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
자신의 혼을 잃고 언제까지나 이차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남성의 세계에서 남자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차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우선하지 못할 것이다.
경쟁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대는 결코 남자와 똑같은 경쟁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 그의 배후에는 남성의 원리가 있는데‥‥‥ 남자와 경쟁하는 한
그대는 추해지고 거칠어질 것이며 그대의 모든 부드러움은
상실할 것이다. 해방 운동이 여성들에게 일어난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상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 전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다. 그러나 남성과 똑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럴 수도 없다. 여성은 자신의 본성을 따라야 하고 자신의 영혼에
귀기울여야 한다. 여성은 다른 길과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다른 기능과
운명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녀가 남자를 따르고 모방한다면 그녀는
상실될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 상실될수록 그녀는 더욱더 존재로부터
뿌리뽑혀질 것이다. 더욱더 위조되고 조작되고 더욱더 비참해질 것이다.
해방 운동을 하는 여성이 매우 화를 잘 내고 계속해서 분노 속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좌절감에서 나온다.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지 않다.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을 배반하는 것이다.

몸 속에 넋이 있다.
넋은 음(여성 원리)이며 의식의 체이다.

'의식의 체( substance of consciousness )'라는 구절에 대해 명상해 보라.
의식의 기반이라는 말, 그것은 의식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의식이
거주하는 집인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혼(魂 : animus )이 있으니
그 속에는 신(神)이 거한다.
혼( animus )은 남성 원리요, 양(陽)이다.
혼은 양 눈 속에 있다. 그것은 보고 꿈꾼다.

여성 원리는 몸 속에 있다. 그것은 매우 물질적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언제나 물질적이다. 그들의 생각은 대단히 실제적이며 매우 실용적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어느 날 자기는 절대로 아내와 다투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정말 어려운 일인데
말이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수년 동안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어요. 첫날밤에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정했죠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있어요 그 원칙이란 것은
작은 일이라면 그녀가 결정을 하고 큰 일은 내가 결정한다는 것이었소."
나는 물었다.
"작은 일은 뭐고 큰 일은 또 무엇이요?
그가 말했다.
"이를테면 어떤 차를 살 것인가,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애들을
어느 학교에다 보내야 될 것인가,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어떤 옷을
사 입을 것인가 등등 이런 것들이 바로 그녀가 결정하는 작은 일들이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당신이 결정하는 일은 무엇이요?"
그가 대답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없는가?
이러한 모든 큰 문제들이 바로 제 몫이죠 그리고 우리의 원칙은
잘 지켜지고 있어요 그녀는 결코 이런 큰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려들지
않아요.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조그만 일에는 간섭하려 들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세계에 대한 주인이고 그녀는 그녀의 세계에 대한
주인일 뿐이죠 우리는 절대로 엇갈리지 않습니다. "

여성 원리는 물질에 뿌리박고 있고 육체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꿈이 있다.
남성은 꿈꾸는 자이다. 남성 원리는 꿈꾸는 원리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달나라에 가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지 이해할만한 여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무엇을 원해서?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무슨 쇼핑이라도 하려는지. 달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가에 가는 편이 나을텐데, 거기서 무엇을 하려는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생명까지 내건단 말인가? 어떤 여자도
남자가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거기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좀 우스워 보인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은
그녀의 마음 속 깊이 모든 남자들이 어린애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놀게 내버려 두자. 가서 그네들의 일을 하게 놔두자."
그들이 어리석은 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안다.
야구 경기나 크리켓( Cricket) 시합 따위의 넌센스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볼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던지면 저쪽에서는 이쪽으로 던지고,
속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여성은 매우 실제적이고 땅에 가깝다. 여자는 현실적이다. 남성 원리는
하늘과 같다. 여성 원리는 땅과 같다. 남자는 꿈을 갖고 계획을
세우며 미지의 것을 바라고 열망한다. 그러나 남성은 모험가라서
그를 사로잡는 꿈이라면 목숨을 내걸고라도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남성은 눈 속에 살고 여성은 귀 속에 산다. 그래서 여자들에게는
그렇게 잡담이 많다. 잡담이 그렇게도 재미있는 것이 된다. 잡담하고 있는
두 여자를 볼라치면 마치 그들은 거기에 도취해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에 중국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거짓말
장이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시합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많은
거짓말들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상은 "나는 공원 벤취에서 반 시간 동안이나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여자를 보았다. "고 말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여자 때문에 타락, 즉 인류 최초의 범죄(犯罪)가 생겨났다. 뱀은 먼저
아담을 유혹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담은 귀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눈의 사람이다. 그는 틀림없이 뱀의 흉계를 눈치채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귀찮게 굴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라. 나에게는 나의 꿈이 있다. "
그러나 뱀은 이브를 넘어뜨렸다. 그는 이브와 잡담을 했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이런 잡담이었으리라.
"무엇하고 있니? 여기 지식의 나무(Ou of knowledge )가 있어.
하나님이 너를 속인 거야. 네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이
아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너는 전지전능하게 되고 영원히 죽지 않게
될거야. "
이와 같은 실질적인 일이라면 여자는 자연히 호기심이 발동한다.
뱀은 그녀를 설득시켰다. 그 뱀이 최초의 세일즈맨이었다. 세일즈맨은
남자에게 가지 않는다. 그들은 남편이 사무실에 가고 없을 때만 문을 두드린다.
여자라야 설득되어질 수 있다. 여자만이 듣는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귀는 그대의 신체 중에서 수동적인 부분이다. 무언가가 귀를 통해서
들어온다. 눈은 공격적인 부분이다. 귀를 가지고는 공격적일 수 없다.
기억하라. 그러나 눈으로는 공격적일 수 있다. 그대는 칼 같은 눈으로
사람을 째려보면서 그러는 눈으로 사람을 화나게 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다.
그대는 사람에게 가 닿을 수도 있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누군가가 빈 눈으로 그대를 쳐다볼 때 그대는 그를 접촉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대를 아주 의미있는 눈으로 쳐다볼 때 그대는
그를 접촉할 수 있다. 또는 누군가가 그대를 삼킬 듯이 아주 정열적으로
요구하듯 어루만지듯 바라보면서 그대를 거의 애무하다시피 한다.
눈은 공격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살아 보낼 수도 있고 가 닿을 수도 있다.
인도에서는 여자를 삼킬 듯이 바라보는 사람을 루츠차(luchcha)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대는 놀랄 것이다. 루츠차라는 말은 눈을 의미하는
로찬(lochan)으로부터 왔다. 그는 눈으로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은 거의 성기가 될 수도 있다. 눈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귀는 매우 순진하다. 그것은 받아들이기만 한다.

혼은 눈 속에 있다. 그것을 보고 꿈꾼다. 그러나 어둡고
침울한 기분에 라져 육체의 형상에 매여있는 사람은 누구나 넋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대가 침울한 기분, 수동적인 기분에 빠져있을 때는 얹제나
육체에 매이게 되고 음(陰)에 매이게 된다. 그것은 그대가 남자이1거나
여자이거나에 상관이 없다. 만약 여성이 그녀의 눈을 사용하여 듣뭅?대신
보려고 한다면 그녀는 양(陽)이 된다. 만약 남자가 들으려고 한다면
그는 음이 된다. 제자는 음이 되고 또 되어야 한다. 제2의,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스승은 전체가 눈이다. 그리고 제자는 전체가 귀이다. 스승은
그대를 보고 그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는 그대 존재의
핵을 례뚱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는 들어야 하고 주의 깊어져야· 한다.
수용적이 되어야 하고 스승이 자신의 깊은 중심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제자는 여성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성이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된다.
남성은 제자가 되기가 약간 어렵다. 비록 제자가 되더라도 마지못해 된다.
그는 저항하고 싸우며, 의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회피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그것도 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의기 소침하여
나동그라진다. 거의 절망적이다. 그러나 여성은 기꺼이 뛰어든다.
가장 훌륭한 제자는 여성이여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섯 명의
제자가 있다면 그중 한 명이 남성이고 나머지 네 명은 여성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마하비라가 그랬고 붓다도 그랬으며 나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항상 그랬던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환상적이고 최면에 걸리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잘
속아 넘어간다고 말한다. 그것은 남자들이 비난하는 말일 뿐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은 최면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쉽게
최면에 걸리는 쪽이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다른 점에서는 틀리다. 만약 여자가 사기꾼을 만나면 그에게 걸려들 것이다.
만약 그녀가 붓다를 만나면 붓다에게 걸려들 것이다. 그렇다.
여자는 속아넘어 가기 쉽다. 모든 것은 그녀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남자가 사기꾼을 만난다면 그는 속아넘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제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붓다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붓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의 회전에 의해 혼이 단련된다. 그리하여 혼은 보양(保養)되고
넋은 제압당한다.

빛은 눈에서 회전해야 한다. 눈은 그대의 가장 밝은 부분이다. 도교에서는
눈을 태양에 비유한다. 눈이 없다면 그대는 빛을 볼 수 없다.
유사한 것만이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눈은 바로 응축된 빛이다.
그래서 눈을 통해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귀는 응축된 소리이다.
그래서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넋은 통제되어야 한다. 왜인가? 그것은
형상이요, 몸이요, 물질이기 때문이다. 신(神)이 주인이 되어야 하고 뽐 위에
서야 한다. 신이 몸을 지배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자인가 여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면의 넋이 혼에 길들여져야 한다는 데 있다. 혼만이
찾고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이 뒤에 있게 되면 혼은 완벽하게 본질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
여성이 뒤에서 그를 후원해 주고 있다는걸 시인이 알게 되면 그의 시는
아주 높이 솟아오를 수 있다. 여성이 항상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남성이
알게 되면 그는 커다란 힘을 갖게 된다. .그는 어떠한 모험이라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떠나버린 걸 알게 되는 순간 그는 힘이
쭉 빠져 버린다. 이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꿈 뿐이다. 그러나 그 꿈들은
무력하다. 거기에는 에너지도 없고 자각도 없다. 자각의 요인은
여성이지만 꿈꾸는 요인은 남성인 것이다.
하나님을 찾거나'진리를 구할 때는 남성이 앞장서고 여성은 뒤를 따라야 한다.
그대의 내면에서 혼이 스승이 되어야 하고 넋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명심하라. 이것은 그대가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옛 사람들은 세속을 초월하여 순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조잡한
용대를?완전히 단련하는 방법을 썼다.

여성은 정적이고 남성은 동적이다. 그래서 여성은 그렇게 편안해 보이고
남성은 안절부절해 보인다. 심지어 그대가 어렸을 때, 아주 작은
꼬마였을 때부터 그렇게 차이가 났었다. 남자 아이는 덤벙대며 이것을
쥐려고 하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가고 싶어한다. 그는 골치덩어리다.
그러나 여자 아이는 골치를 썩히지 않는다. 인형을 가지고 얌전하게 논다.
마치 하나의 인형과 같다. 정말 편안한 모습이다. 휴식이 여성의 원리라면
분주한 것은 남성의 원리이다. 그래서 여성은 원만하고 아름다우나
남성은 쉴새없이 들떠있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는 원리가 필요하다. 성장은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대개 관습적이지만 남성은 관습적이 아니다.
여성은 항상 현 상태를 지지하지만 남성은 무모한 개혁이라도
강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변화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한다.
변화가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그것은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다.
변한다는 점에서 무조건 좋을 뿐이다. 여성은 항상 옛 것,
기성의 것을 지지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옛날에 그러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 그녀들의 생각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대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녹아야 한다. 그대
속의 여성은 하나의 얼음과도 같다. 그대가 강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녹아야 한다. 그러나 강물 또한 강둑을 필요로 한다. 강둑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둑이 없으면 강물은 결코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강물이 얼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물은 녹아
물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고정되어 있는 강둑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완전한 인간은 그의 동적인 특성을 강물로 사용하고 그의 정적인
특성을 둑으로 사용한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균형이다. 그때 그대의
혼은 성장하는데 쓰이고 그대의 넋은 그 성장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확고부동한 하나의 사실이 되게 하는데 쓰인 것이다.

이것은 넋을 제거하여 혼을 보양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대개 보면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고정적이 되어
버렸다. 남자들조차도 너무나 관례적이다. 기독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자이나교도 등 모두가 다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넋의 희생물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혼은 억눌림당해 버렸다. 그것은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여기서의 나의 모든 노력이다. 그대의 혼을 넋의 손아귀에서
구출해내는 것. 일단 혼이 해방되기만 하면 그때는 넋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혼이 해방을 얻기 전까지는 안된닦. 그래서 나는 동적인
명상법들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파사나( Vipassana ) 명상법을 추천해 준다. 그들의 혼이 흐르는 것을 본
다음에라야 추천해주는 것이다. 그때는 그들이 자신들의 넋을 이용할 수 있는
단계인 것이다.
비파사나나 차센( Zazen )은 정적인 방법이요, 여성적인 방법이다.
수피 춤( Supi dancing )이나 혼돈 명상( Dynamic Meditation ), 나타라쥬
( Nataraj ) 등은 동적인 방법들이다. 우선 그대는 강물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강둑들도 그대를 도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빛을 회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음을 제어하고 넋을 지배할 수 있는
탁월한 비결이다. 이 비결대로 수행하면 정수(精水)가 저절로 충실해져
올 것이다. 신화(神火)가 발생하고 의토(意土)도 응축되고 견고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성태(聖胎)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태( holy fruit)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성태는 그대가 전체적일 때만 자란다.
그대의 음과 양이 마치 새의 양날개처럼 서로 협력할 때,
바로 그때 에로스( eros )와 로고스( logos )와 직관( Intyihon )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발은 여전히 땅에 둔 채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해서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드리워야 할
필요가 있다. 땅은 음이요, 하늘은 양이다. 그리고 나무는 하늘로 솟으면
솟는 만큼 땅으로 뿌리를 뻗어야 한다.
하나를 이루고 있는 참 본성이 하늘의 궁전( house of the creative )에
떨어지면 혼과 넋이 분열된다.

하나님은 일원성의 존재이다. 그러나 창조가 이루어질 때는 둘로 나누어진다.
음과 양이 그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어떠한 작업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것이 없다면 어떠한 변증법적 전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정과 반(反)으로 나눈다. 그래야만 거기에
도전과 대립과 투쟁이 생겨나고 그 투쟁과 마찰을 통해서만 에너지가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돌맹이를 맞부딪쳐 불을 얻어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양손바닥이 맞부딪칠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선사(禪師)들은 묻는다.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가 무엇이냐?"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대극을 초월하여 '하나'를 발견하라는 소리이다.
그 '하나'란 바로 궁극의 존재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 '하나'가
바로 우리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 고향은 우리가 양극성을 초월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그 양극성은 통합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모든 예술이요,
내가 바로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산야신들은
남성과 여성의 통합이어야 하고, 밤과 낮, 속세와 탈속, 정신과 물질,
그리고 하늘과 땅의 통합이어야 한다.

혼은 하늘의 마음(heavenly heart :제3의 눈)에 존재한다. 그것은 양
(陽)이요, 가볍고 맑은 기(氣)이다. 우리는 그것을 태허로부터
받으며, 모양은 원시(元始)와 같다. 넋은 음(陰)이다.

여기에 여성의 신비가 있다. 어떤 남성도 그 신비를 풀 수는 없었다.
양쪽을 초월해야, 붓다가 되어야만 남성과 여성 양쪽의 신비를 다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남성도 여성의 심연으로 들어갈 수 없다.
여성은 어둠에 가려진 채 밤의 신비로 남아있다. 그대는 환히 볼 수 없다.
더듬거리는게 고작이다. 그대는 논리적으로는 결코 여성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여성은 절대로 논리를 쫓지 않는다. 그녀는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마치 계단을 밟는 것과 같다.
직관적이라는 점에서 여성은 하나의 시인이다. 시를 짓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성은 전혀 시를 쓰지 않으면서도 시인이다. 그녀의 삶은
시집이다. 그녀의 삶은 시처럼 신비하고 애매하며 불분명하다. 여성의 신비는
벗겨지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물음표로 남는다.
그러나 남성은 등불처럼 분명하다. 그래서 남성은 깊이가 없어 보이고
여성은 깊이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남성은 완전히 표면에 머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를 알게 되면
그의 미래를 예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여성은 예견할 수 없다.
그녀에 대해서는 예상이란게 불가능하다. 그녀는 어둠에 가려져 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그것은 무겁고 탁한 기(氣)이다·

그리고 여성, 즉 여성 원리는 그대를 땅에 묶어 놓는다. 그것은 중력이다.

·.그것은 유형적인 혈육의 마음에 매여있다. 혼은 삶을 좋아하지만
넋은 죽음을 열망한다.

여성은 훨씬 더 죽음에 가깝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
이것은 하나의 설명일 뿐이다. 만약 '혼'이나 '넋' 또는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단어가 문제가 된다면 대신 'x'와 'Y'라는 문자를 써도
상관없다. 그러나 『태을금화종지』는 고유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의 체계이다. 인간적인 비유를 쓸 때 훨씬 이해하기가 쉬워지느 것이다.
남성은 삶에 관심이 있고 여성은 안정에 관심있다. 남성은 사랑에
관심이 있지만 여성은 안정에 관심을 둔다. 남성은 모험에 관심이 있지만
여성은 안락과 편리에 관심이 있다. 여성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말에
어떤 비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안전을 의미할 뿐이다.
죽은 자에게만 안전은 찾아온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그리하여 그대에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때만 그대는 안전하다.
그러나 남성은 모험을 찾아나서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남자는 계속해서
다른 여자를 찾아나서고 여자는 그러한 남편의 뒤를 밟는다. 여자들은
남편들이 왜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러나 남성 원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다. 쇼킹하고 스릴
넘치는 것이면 무엇이나 좋다. 어떤 때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 부인이
아주 예쁠 때 남편이 못생긴 여자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아무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네에겐 그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그대는 남성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 원리는 근본적으로 일부
다처제 주의이다. 반면에 여성원리는 일부일처제 주의이다. 여성은
머물기를 원한다. 여성은 사랑보다는 결혼에 더 관심이 있다. 그녀가
사랑에 관심을 갖는 것은 결혼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남성은
사랑 때문에 결혼을 한다.
이런 말도 있다. 남자들이 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고 여자들은 모두
결혼한다면 이 세상은 그대로 천국이 될 거라고.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혼은 삶을 좋아하지만 넋은 죽음을 열망한다. 일체의 감각적 욕망
백(色)과 격한 감정들은 넋의 작용이다. 그러나 수련자는 음을 완전히 정제
(精製)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그것을 순수한 양으로 화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연금술은 남자와 여자 각자 속에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원리르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즉 그대 속의 음에 해당하는 넋을 양으로
변형시키는 것. 그리하여 그 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여
양을 돕도록 하는 것이다.
음이 양을 도울 수 있을 때 진정한 결혼이 일어난다. 그것은 내면적인 결혼이다.
그러면 그대는 통합되어지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의 빛은
깊이를 더하게 된다. 어둠의 깊이까지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때 혼과
넋은 하나가 된다. 혼과 넋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면 그때는 세상도 사라진다.
그대는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둘로 남아있는 것은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그 신비는, 그 실험은 그대의 내면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바깥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내면에서 이 두 원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어둠과 빛, 남성과 여성, X와 Y등 어떻게 불러도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원리는 분명히 그대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끊임없이
싸우면서.
거기서 온갖 고뇌와 비애와 지옥같은 삶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들을
친구로 삼아라. 그대의 에너지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속으로
흘러들어 하나가 되게 하라. 내면의 남성과 여성이 교합하여
오르가즘이 생기게 하라. 탄트라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유가나다
( yugana-ddha)라고 한다. 그것은 내면의 남성과 여성의 교합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탄트라다. 남자와 여자의 외적인 만남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숟다(sudha)가 탄트라 그룹을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탄트라는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 그녀는
단지 그대를 준비시키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대의 남성과 여성이 서로
하나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진정한 탄트라 그룹이 시작될 것이다. 그대의 관심이 더 이상 바깥으로
치닫지 않고, 더 이상 그대를 구속하지 않을 때, 그때에 가서야 진정한
탄트라 그룹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모임이 형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탄트라 그룹은 완전히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체험이다. 그리고
이 실험은 우주적 환희와 전체적인 오르가즘을 그대 속에 불러 일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