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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늘같이 넓고 바다같이 깊게>>

narrae 2013. 12. 24. 07:27

  <<5 .하늘같이 넓고 바다같이 깊게>>

여조사께서 말씀 하셨다.

눈으로 시작이 된다‥‥‥ 인체의 정화는 위로 흘러 빈 공간 속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이것이 불멸에 이르는 길이요, 세속을 초월하는 방법이다.

빛은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해와
달이 산천대지(山川大地)를 비추나니 그 모든 것이 빛이다.
그러므로 빛은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와 명철, 통찰과 깨달음
그리고 모든 정신 작용은 빛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빛은 몸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광화(光華)는 대천 세계에 충만하다. 일신(一身)의 광화도
역시 하늘을 가득 채우고 땅을 뒤덮는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하면 하늘과
땅과 산과 강 일체도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한다. 인체의 정화를 위로
끌어올려 눈 속에 응축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체의 비밀을 여는
위대한 열쇠이다.
초심자(初心者)들은 주의할지라. 하루라도 명상 수행을 하지 않게 되면
이 빛은 흘러나가 버리나니 누가 그 행방을 알겠는가? 단지 일각의
시간만 명상을 해도 그것으로 만겁천생을 제(制)할 수 있다.
모든 방법들은 고요함으로 끝을 맺는다. 이 놀라운 묘법(妙法)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층으로부터 깊은 층으로,
조잡한 차원으로부터 정묘한 차원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은
중단해 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수련의 시작과 끝은
하나여야 한다. 그 사이에 서늘해지고 따뜻해지는 순간이 있나니, 그것은
설명이 필요없다.
그러나 목표는 모든 방법들이 아주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하늘과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어지는데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목표는
수중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오래된 우화가 하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네 명의 천사가 다가와 물었다고 한다.
첫번째 천사는 어떻게 창조하느냐고 물었다. 두번째 천사는 왜
창조하느냐고 물었다. 세번째 천사는 언제 그 일이 끝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네번째 천사는 뭐 도와 드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첫번째 것은 과학자의 질문이었다. 두번째는 철학자, 세번째는 정치가,
그리고 네번째는 종교가의 질문이었다.
존재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객관적 관찰에 의한 탐구이다. 과학자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객관적이기 위하여 그는 대상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참여하는 순간 그 속에 포함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는 뛰어들 수 없다.
그래서 과학자가 알 수 있는 층은 존재와 생명의 겉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의 핵은 여전히 미지로 남는다. 방법 그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철학자는 사색만 할 뿐 실험해 볼 줄은 모른다. 그는 극한에 이르기까지
ad infinitum )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어떤
대답이 주어지든 간에 다시 '왜 ? '라는 질문이 던져지게 되어 있다.
철학을 통해서는 어떠한 결론도 기대할 수 없다. 철학은 언제까지나 결론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행위이며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정치가는 단순히 세상을 장악하여 소유하고자 한다. 정치가는 폭력적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삶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있다. 그는 권력에 굶주리고 권력에 미쳐 있다.
그는 파괴적이고 광적이다.
그대가 무엇을 소유하는 순간 그것은 죽는다. 소유물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를 소유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나 여자를 소유해 보라. 죽음
밖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을 소유하게 되면 죽음만이 초래될 뿐이다.
죽음만이 무엇의 소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자유이다. 근본적으로 삶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은행에 집어 넣을 수도 없고 그 둘레에 선을 두를 수도 없다.
이것은 내 것이다. " 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경멸적이고 이기적이다. 미친 짓이 되어 버린다.
삶이 오히려 우리를 소유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쑤 있겠는가?
우리는 삶에게 점점 더 소유당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소유하려 들기 보다는 전체에 의해 소유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는 결코 삶의 진실과 조우할 수 없다.
종교가는 참여자다. 그는 삶과 함께 춤을 추며 존재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는 삶을 돕는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존재에 귀의해 있다.
그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지식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존재와 조화를 이루는데 그의 모든 노력을 다하며 그것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 궁극적 경험에 대한 동양의 언어가 사마디
( Samadhi )인 것이다. 그것은 두 단어로부터 왔다. 삼( Sam ), 그것은
'함께'를 의미한다. 똑같은 어근이 영어에도 있다. 동정( Sympathy )이
나 심포니( Sympony )라는 말 속에 있다. 약간 변형되었지만 통합
( Synthesis )이나 동시성( Synchronicity )이라는 말 속에도 있다. 이처럼
삼( Sam )은 '함께'를 의미한다. 아디( Adh, )는 주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어의 종교( religion )라는 말의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거나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성
속에서만 사람은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경험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종교란 하나의 위대한 실험, 진실로 가장 위대한 실험이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과학은 사물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 종교는 주체 그
자체를 실험한다. 모든 관심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내면 깊숙이 무지가 도사리고 있다면 나의 모든 지식은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지 위에 기초를 두고 있고 무지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먼저 나의 내면에서 빛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주위를 비출 수 있다. 그래야 주위의 경계가 생기는 그곳에까지라도
빛이 뻗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먼저 그 빛은 나의 내면에서 반짝여야 한다. 첫번째 불◎는
나의 주체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나의 중심이 빛으로 가득할 때,
그때야 비로소 알려진 모든 것들이 실제로 알려진다. 그대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아는 주체가 거기에 없다면 어떻게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그대 자신이 깊은 어둠 속에 있다면 그대가 바깥에 만든 모든 빛들은
기만과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인 질문이야말로 존재에 있어서의 가장 위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몇 가지 이해할 일이 있다.
종교는 살금살금 걸을 수 없다. 춤을 추든지 아니면 죽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종교는 춤을 추지 않는다.
그래서 죽어 있다. 종교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기어 다니고 있다.
그것들은 날으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 독단은 죽음에 불과하거늘 종교는
독단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하나의 시체이다. 살아 흐르고 날기 위하여
종교는 하나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이론이나 신학이 아닌 하나의
명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 철학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어야 한다. 그리고 완전하게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계속해서 무언가에 대해
알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 무엇에 대하여
아는 것은 그것의 핵심을 꿰뚫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것에 불과하다.
종교는 기어다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종교들은 기어다니고 있다.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그들은 모두 기어다니고 있다.
모두 변명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모두 과학의 발달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과 싸워왔다. 과학의 발달을 막기 위하여 갖은 수를 다
써 보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이제 그들은 과학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하여
나서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부차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과학의 지지하에서만 그들은
존재할 수 있다. 과학적 논쟁이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만 그들은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생이다. 종교는 더 이상 자신의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으로부터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남에게 빌려온
삶, 기생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시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종교가 일단 독단이 되어 버리고 더 이상
체험이기를 거부할 때, 그것은 자동적으로 죽는다. 그리고 죽은 몸은
스스로 설 수 없어 누군가가 거들어 주어야 한다. 모든 교회와 사원들은
거들어지고 있다. 스스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는 스스로 선다. 그리스도, 구세주는 스스로 선다.
종교는 춤은 추고 노래를 부른다. 그때 그것은 살아 있으며, 꽃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하게 된다.
종교를 다시 꽃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다.
어떤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진실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지지를 얻기 위하여 과학에 눈을
돌려야 하겠지만 진실한 종교는 그렇지가 않다. 만약 종교가 춤추고
살아나기 시작한다면 과학은 오히려 종교의 지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과학은 그 지지지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나날이 볼품 없어져가고 있다.
그것은 나날이 반생명적(life-negative )이 되어가고 있다.
나날이 정치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발견한 것이면
무엇이든 간에 정치가들의 손아귀에 들어 간다. 모든 과학적 성과들이
죽음을 획책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과학적 노력의 90%가 전쟁을 위한 것들이다. 과학은 그의 면목을
잃고 있다. 만약 종교가 춤추지 않는다면 과학도 더 이상의 장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과학은 그 지지를 얻기 위하여
종교로부터의 약간의 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종교가 다시
되살아 난다면 과학은 종교의 일부분 내지는 그림자가 될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과학은 정치가들의 미친 짓들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은 점점 지구의 대파멸이라고 하는 종착역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종교적인 힘만이 그것을 막을 수 있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실험들이 매우 미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란 무한하다. 인류의 미래는 이 한 가지에 달려 있다.
종교가 인간을 이끌어야 하고, 인간에게 대하여 주도적인 영향을
행사해야 하며, 인간의 꿈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명심하라. 그것은 아주 어려운, 거의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꿈처럼 여겨지게 마련이다. 인간은 용기를 잃어 버린 지 오래다.
이제 그들의 꿈은 하잘 것 없고 아주 세속적이다. 더 이상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하라. 그대가 만약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대는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초월과 접했을 때만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위대한 전체의 부분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대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대보다 높은 것, 그대보다 큰 것의 부분이 되었을 때
말이다.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려고 할 때 거기에 종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종교의 춤' 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 다른 어떤 동물도 그것을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소수만이 자신을 뛰어 넘어 피안에 다다른다.
그리고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피안으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빌어온 지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나에게 이미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으며 그대에게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대의 내면이 ◎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대의
내면에 어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면 그때 그대는 종교적이 된다.
거의 불가능한 그 꿈이 처음에는 불합리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일지라도 만약 그것이 충분히 강해진다면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언덕 중턱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그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꿈꾸곤 했다.
"어느날엔가 베어져 나는 어린 아이의 요람이 될 거야."
첫번째 나무가 말했다.
"나는 보물과 매우 값진 보석을 나르는 커다란 배가 될 거야."
두번째 나무가 말했다.
"나는 언덕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리켜 주어야지."
세번째 나무가 말했다.
어느날 벌목꾼들이 와서 첫번째 나무를 베며 말했다.
"이것으로 말구유를 만들자."
"나는 말구유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어린애의 요람이 되고 싶단
말예요"
나무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나무로 말구유를 만들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그를 눕힐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속에 그를
눕혔다. 그러자 나무는 말했다.
"이건 정말 내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나은 걸."
벌목꾼들은 두번째 나무에게 말했다.
"이것으로는 고기잡이 배를 만들자."
그러자 나무가 말했다.
"안돼은 나는 고기잡이 배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보물과 귀한
보석을 나르는 커다란 배가 되고 싶단 말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나무로 고기잡이 배를 만들어 호숫가에 놓아 두었다.
그리하여 시몬 베드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 배를 샀고 예수는 그
배에 타고 항해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자 그 나무가 말했다.
"이건 정말 내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이상인걸."
그리고 세번째 나무에 대해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으로는 십자가를 만들자."
그러나 나무가 말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그런 수치스런 십자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언덕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리켜 주고 싶단 말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고 예수는 그 위에서 못박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고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뜻하게 되었다.

나무조차도 무언가를 꿈꿀수 있으며 그것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사람임에야 !
인간은 이 지구상의 존재 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만약 무언가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자신을 능가하는 커다란
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세속에 만족해 버렸다. 그대는
위를 기어다니며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대는 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대를 부르는 커다란 저
너머의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대에게 다가오는 커다란 초월의 존재이다.
그리고 초월적인 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름과 형태만 사람일 뿐이지 진정한 사람이 못된다
사람이 되어라. 미지와 초월로부터의 도전을 받아 들여라. 그것이 =
그대의 존재 가운데서 커다란 꿈이 되게 하라. 드러나 보이는 것은 단지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는 땅에 떨어져 죽고 나무가 되어 꽃을 피워올려야 한다.
씨를 쪼개 보아도 거기에 나무는 없다. 그곳이 바로 과학이 모든 ? 것을
놓쳐 버리는 곳이다. 과학은 계속해서 씨앗을 쪼개며 말한다.
"이 씨앗이 훌륭한 꽃을 피울 거라고? 그럼 우리는 씨앗을 쪼개
살펴 볼 것이다. "
그리하여 그들은 씨앗을 자르고 쪼갠다. 그들은 씨앗을 쪼개는 방법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꽃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꽃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신도 영혼도 초월적인 것도 없으며 삶이란
우연에 불과하며 거기에 어떠한 운명 따위도 없다고 말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선사 이큐( Ikyu )의 유명한 말이 있다.
"벚꽃나무를 쪼갠다고 해서 어디에 꽃이 있겠느냐마는 봄이 되면
그들은 피나니. "
봄을 기다리라. 보고자 원한다면 봄을 기다리라. 그러면 그대는 인간이 아닌
붓다를, 사람이 아닌 예수를, 사람이 아닌 크리슈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씨앗이 아닌 꽃을 보게 될 것이다.
씨앗은 사라졌다. 그 의무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한히 가치있는
무언가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청사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다. 토양이 발견되었고 봄이 왔으며 씨앗도
죽음을 무릅쓸 용기를 갖추었다.
인간의 에고(ego )는 씨앗에 불과하다. 그것은 매우 방어적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묻는다. 만약 에고가 그렇게 하나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
왜 첫번째 자리에 그것이 존재하느냐고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장벽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음이 존재하느냐고 그것은 마치
씨앗의 딱딱한 껍질이 알맹이를 보호하듯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알맹이는 매우 부드럽다. 만약 딱딱한 껌질이 둘레에 없다면 그것은
상해버릴 것이다. 딱딱한 껍질은 적이 아니다. 그 껍질은 봄이 오고
토양도 발견되어 씨앗이 죽음을 거부할 때만 적이 될 것이다. 만약 그
껍질이 봄이 와도 계속해서 너를 보호할 것이라든가 토양이 있어도 너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문제는 생긴다. 에고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재도 없다.
어린애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다면 어린애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이 투쟁의 세계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많은 위험들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다.
그는 너무 연약하고 부드러워서 붓다가 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를 에고가 도와 주게 된다. 에고는 일종의 갑옷이다. 마음도 그렇다.
그것이 그를 보호해 주는 것이다.
에고는 적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대가
명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방해가 된다. 그대는 스승을 발견했고
방법을 알았으며 준비 또한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속삭인다.
"아니야. 난 죽을 수 없어, 내가 그대 위에 부어 준 모든 축복들을
생각해 봐. 내가 가져다 준 그 모든 이익들을 생각해 봐. 내가 해 준
모든 것들을 생각해 봐. 그러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를 파괴하려 들지 마."
그때 문제가 생긴다. 그때 보호자는 파괴적이 된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마음과 싸워야 하고 자신의 에고와 싸워야 하며 자신의 갑옷과
싸워야 한다. 갑옷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봄이 왔고 이제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고는 봄이 왔을 때만 문제가 된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문제가 안된다.
도움이 될 뿐이다. 도움은 방해가 될 때가 온다는 사실,
그러므로 때가 오면 그것은 물러가야 하는 것이다.
불가능을 꿈꾸라. 초월을 꿈꾸라. 열반을 꿈꾸고 해탈을 꿈꾸며 천국을
꿈꾸라. 그래야만 그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야만 그 꿈과 함게
그대의 발길에 춤이 어리게 된다.
꿈이 없다면 그대는 우둔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빌빌거리는 이유이다.
어떻게 그들이 춤출 수 있겠는가? 무엇을 위해서?
매일 같이 사무실에 나가서 일하고는 돌아와 아내와 다투고는 아이들의
그 모든 불평들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해가 가고 오지만 춤출거리라곤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이 어떻게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는지, 왜 자살을 하지 않는지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가 바라고 기대할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 하늘에는 별 하나도 없고 칠흑같은 어둠 뿐이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럭저럭 꾸려 나가는지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자살하는 사람이 보다 논리적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비참하고 지긋지긋하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를 보여준다. 딱 한 가지, 그대 내면의 존재는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대가 깨어나 잠재력과 가능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그 꿈이 그대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때는
거기에 의미가 생기기 시작하고 춤이 시작될 것이다. 종교는 예술이라고
월리암 블래이크( William Blake )는 말했다.
"종교는 예술이지 금전이 아니다. "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월리암 블래이크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는 신비주의 시인이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길이다. " 라고 그는 말한다. '무언가를
하는 길', 그림을 그린다거나 시를 쓴다거나 춤을 춘다거나 조각을
즐긴다거나 음악을 한다거나 기와를 굽는다거나 옷감을 짜는 것 등.
"예술이란 무언가를 하는 길이다. "
그는 자신을 창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것은 그림도 아니요 시도 아니며, 조각도
아니요 음악도 아니다. 그러나 똑같은 선 상에 있는 초월적인 그
무엇, 가령 자기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종교도 역시 무언가를 하는 길이다. 살고 사랑하고 보고 존재하는 방법이다.
모든 예술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말한 사람을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창조주를 알고자 원한다면 그대 자신이 어느 면에서 하나의
창조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적절한 종교가 될 수 없지만 올바른
길은 가리켜 준다.
시가 정말 창조적일 때 시인은 무언가 종교적인 것을 깨닫게 된다.
아주 멀리 들리는 음악처럼 어렴풋이 왜냐하면 그가 창조적일 때는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작은 부분이지만 그는
참여한다.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것이다.
한 방울의 신성이 그의 속으로 흘러든다. 그래서 위대한 시인들은 항상 말한다.
"시를 쓸 때 우리가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로잡힌다. 어떤 미지의
에너지가 흘러들어와 우리 속에서 춤추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화가가 그의 그림에 몰두할 때도 그는 완전히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의 에고가 사라져 버린다. 비록 잠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무아(無我)의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에게 참여하면 하나님 또한 그대에게 참여한다. 예술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종교이다. 종교는 의식적인 예술이다. 예술은 꿈 속의
종교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길을 가리켜 주고 있다. 예술가는
종교가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대는
시인이나 화가를 종교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가 단식을 하거나
그의 몸을 학대하거나 그의 존재를 추하게 만들면 그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살적이고 거의 병적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를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신경증 환자들이 영웅( maha%as )이 된다. 그들은 성자들로 추대되고
숭배된다. 그들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다. 소위 성자라고 하는 자들과
살인자들 사이에는 별로 다를 게 없다. 살인자들은 남을 살해하고
소위 성자라고 하는 자들은 자신을 살해한다. 그러나 둘 다 똑같은 일을
자행하고 있다. 둘 다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리고 그대가 파괴적일 때마다
신으로부터는 가장 멀리 떨어진다. 하나님은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윤리학이 아니라 미학을 하나님에 가장 근접해 있는 학문으로
보다. 레닌은 11윤리학은 미래의 미학이 될 것이다. "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미학이 오히려 미래의 윤리학이
될  것이다. 아름다움이 미래의 진리가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창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살며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은 도덕적이다. 어떤 노력도 없이 도덕적이다. 그의 도덕성은
수양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도덕적인 것은 그의 미적 감각에
기인한다. 그는 죽이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죽일 수 없다. 그는 속일 수도 없고 부정직할 수도 없다. 그 모든 일이
그를 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 기준은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예술이라는 월리함 블래이크의 말에 동의한다.
모든 예술은 만드는 것이다. 만드는 것은 일종의 신앙이 아닐 수 없다.
없는 것을 보며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며 들을 수 없는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게끔 일한다. 만들어져 나온 것은
그림이나 시나 정원과 같이 감각적으로 분명한 것들이다. 그러나
예술은 만들어져 나온 작품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상기되어야
할 아름다운 구분이다. 그것이 그대로 하여금 종교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해줄 것이다.
예술은 그림이나 조각품이 아니다. 애호가들이 사고 파는 것은 작픔이지
예술 자체는 아니다. 예술 작품은 일종의 재산이다. 바로 예술이
예술품과 같지 않듯이 종교도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물건이나 효과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교리나 교의나 성경이나 코란이나 기타( Gitas)나
교회나 사원이나 성당같은 곳들, 이것들은 작품들일 뿐이다. 그대는
이것들을 종교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종교 그 자체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교회일 뿐이다. 그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부산물이고 찌꺼기일 뿐이다. 모하메드의 가슴에
일어난 무엇,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가 그의 영혼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노래 부르기 시작했고 미친 듯이
포효했다. 그것이 바로 산 속에서 처음으로 신의 현현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가 생각한 바였다. 그는 너무 놀라고 두려운 나머지
자신이 미쳐 버렸거나 아니면 시인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는 열에 들떠 떨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갑자기 열병에라도 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내가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시인이 되어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모른다오 그것에 비하면 나 자신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소
내가 느끼고 있는 이것, 정말이지 나는 내 눈을, 그리고 내 마응을
믿을 수가 없소 무한하게 그토록 아름답고 위대하고 광대해서 그것을
감당할 수조차도 없소 "
그것이 바로 종교였다.
며칠 지나 열이 내려가고 모하메드는 엑스타시와 사마디의 새로운 상태 속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흐름이 시작되었고 코란이 태어났다.
그러나 코란은 부산물일 뿐이다. 기타도 그렇고 법구경
( Dhammapada)도 그렇다. 어떠한 경전도 종교를 담고있지 않으며
담을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모든 경전들은 종교의 부산물이요,
시간의 모랫벌에 남겨진 그림 발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가 해안가를 걷다보면 자연히 발자국이 남게 마련이다. 그 발자국은
붓다의 것이기에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붓다 자신은 아니다.
그것들에게 엎드려 절은 할지라도 그들이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은
잊지말라. 그리고 그대는 발자국의 숭배자가 아닌 하나의 붓다가
되어야 한다.
예술 작품은 재산의 일종이다. 그래서 사고 팔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술을 사고 팔 수는 없다. 피카소가 그의 예술을 팔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환상적인 댓가를 지불한다 해도 그것을 팔 수는 없다.
그것을 팔 방법이 없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보이지 않는다. 단지 현상만이 나타나 보일 뿐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채로 남아있다. 단지 이 세계 속에서만 현현한다.
그대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단지 몸 뿐이다.
블래이크가 종교는 금전이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종교가 재산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종교는 그와 같지 않다.
종교는 사랑과 같다.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고 은행에 저축할
수도 없다.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그대를 소유한다.
예술 작품은 소유할 수 있다. 그것은 재산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대는 코란을 배울 수 있고 기타를 배울 수 있고 성경을 배울 수 있지만
종교를 배울 수는 없다. 그것은 살아져야 한다. 그것을 배울만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대는 하나님에게 소유당해야 하고 하나님이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존재를 열어 젖혀야 한다. 그대 자신은
물러서야 한다. 소유당하는 바로 그 순간 그대는 인간을 초월한다.
그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대는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며 붓다이다.
이 경문들은 그대가 씨앗의 형태로, 그리고 하나의 청사진으로 가지고
다니는 불성이 깨어나게 해 준다. 꽃이 피어 잎과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무가 되게 해 준다.
이제 경문으로 들어가자.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눈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내가 이야기해 온 가능성, 불성, 그리스도 의식, 크리슈나 의식, 혹은
그대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그것은 제3의 눈 속에 있다. 바로
육체의 두 눈 사이에 빈 공간이 있으며 그 빈 공간이야말로 그대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씨앗이다. 그 눈이 작동하지 않는 한 그대의 가능성은
발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눈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해방이란 열반, 해탈, 구원, 그리고 자유를 의미한다. 해방은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제3의 눈이 작동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잠든 체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대의 에너지가 아직 거기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기계처럼 완전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에너지는 아래로만 흘러 성적으로, 탐욕으로
분노로, 그리고 세속적으로만 쓰이고 있다. 아래로 바깥으로 다
흘러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3의 눈을 작동시킬 만한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충분한 에너지가 없는 한 제3의 눈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대는 하나의 에너지 저장고가 되어야 한다. 에너지 저장고가 되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때, 그 수준은 매일같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어느날 그것은 제3의 눈에 도달하고 그것을 자극한다. 그러면 즉시 제3의 눈은
작동되는 것이다. 그때에 가서야 그대는 알게 되며 비로소
보게 된다. 삶의 비젼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제3의 눈을 통해서만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육안을 통해서 그대는 단지 세상만을 알 뿐이다. 그리고 육안은
두 개이기 때문에 세상이 분리되고 이원져이 되는 것이다. 그대의 두 눈이
세상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세상 그 자체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보는 방식은 그것을 나누어 놓는다.
그것은 마치 프리즘을 통과시키는 것과도 같다. 빛은 하나다. 그러나
프리즘을 통과하는 순간 그것은 일곱 색깔이 된다. 나누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지개가 생겨나는 방법이다. 햇빛이 구름 속에
들어있는 물방울들을 통과한다. 그 물방울들이 할나의 프리즘이 된다.
그리하여 햇빛이 구름을 통과하는 순간 일곱 색깔 무지개가 되는 것이다.
그대의 에너지는 육안을 통해서 움직이고 온 세상은 이원적이 된다.
그때는 밤과 낮,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물질과 의식이 대립되어 보인다.
그대의 두 눈이 모든 것을 분리시키며 양극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두 눈 때문에 그대는 존차의 일체성을 볼 수 없다. 두 눈이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보이지 않는 그 전체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책 「태을금화종지』는 말한다. 바깥으로 흐르는 에너지는 이원적이 된다.
그것이 안으로 되돌려질 때, 그것은 다시 하나가 된다. 이원성을
잃고 비이원적이 된다. 양 눈으로부터 에너지가 회수될 때 그것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무지개의 일곱 색깔을 혼합하면 그것은 백색이 된다. 그것은 한 색이다.
그와 똑같은 방법이다. 두 눈을 통해 에너지가 밖으로 나가면 온
세상이 이원적이 된다. 두 눈으로부터 에너지가 회수되어 내면의 한 눈으로
흐르면, 정확히 양 눈 사이에 있는 그 제3의 눈으로 흐르면, 갑자기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사마디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눈으로부터 시작이 된다‥‥‥‥인체의 정화(精華)는 위로 흘러 빈 공간
속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지금 현재는 빈 공간이다. 그러나 일단 에너지가 내면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그것은 ◎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것이 불멸에 이르는 길이요, 세속을 초월하는 방법이다.

그대가 그대 존재의 한 중심점에 도달하게 되면‥‥‥ 예수가 말했듯이
"양 눈이 하나되면 천국에 들어 올 것이다. "가 되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불멸을 안다. 삶과 죽음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새의 양날개와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은 적이 아니라 친구이다. 그것은
단지 생명으로 하여금 그 껍데기를 바꾸도록 도울 뿐이다. 껍데기가
낡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사용되어 이제는 더 이상 쓰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끝장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대가
이사하는 걸 도와줄 뿐이다. 그것은 단지 그대에게 새로운 시작과
신선한 에너지의 사용을 보장해 줄 뿐이다.
어둠과 빛은 둘이 아니다. 서로 대립하던 것이 사라지고 상호 보완적인 것이 된다.
그러면 전존재가 남성적인 에너지와 여성적인 에너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춤이 된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는 춤이다.
둘이 만나 서로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며 하나가 된다. 갈등이 사라진다.
그리고 전존재를 갈등이 없이 바라보게 될 때, 필연코 거기에서 커다란
기쁨이 솟아난다. 거기에 죽음이란 없다.
사람은 죽음을 단지 바깥에서만 본다.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을 보지만
자신이 죽어가는 것은 보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 본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게 되어 있었을 때 그는 매우 들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훌쩍거렸지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울지 마라. 곧 나는 떠날 것이다. 그때에 가서나 실컷 울어라.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엄청난 실험을 지켜 보아라. 나는
내가 실제로 죽을지 아닐지에 대해 매우 흥미가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
둘러 앉아 지켜보라."
스승은 평생을 죽는 순간까지도 가르친다. 스승은 모든 기회를 다 써서
그의 죽음까지도 가르침의 일부가 된다. 그는 매우 화가 나서 외쳤다.
"우는 것 집어치우고 가까이 와라. 이 기회를 잃지 말라."
제자들은 지켜 보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기다려라. 나는 독약을 마셨다. 이제 그대들이 볼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말해 주겠다. 무릎까지 내
다리는 감각을 잃었다. 그러나 나 자신에 관한 한은 예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이다. "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다.
"다리 전체가 죽어 버렸다. 허리 아래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그는 제자들을 시켜 그의 발을 만지고 꼬집게 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전혀 느낄 수가 없구나. 그래, 몸의 절반이 죽어 버렸군.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반 죽어 있거나 반 살아있거나 나의 내면적인
감각에는 변화가 없다. 나는 전처럼 여전히 살아 있다. 몸의 절반이
죽어 버렸지만 나의 존재는 거기에 있다. "
그리고 서서히 양 손의 감각이 없어졌고 그의 심장도 멈추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혀가 굳어져 가고 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비록 내 몸의
90%가 감각을 잃었지만 나는 100% 살아있다. 이것으로 보건대 내 몸이
완전히 죽은 다음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내 몸의 90%가
죽어버린 지금도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머지 10% 마저 죽어도‥‥‥ 그대들은 나의 내부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볼 수 있다. "

소크라테스는 다른 그리이스의 철학자들과 같이 평범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평범한 철학자에 불과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주장하는 모든 것은
완전히 그의 스승에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비주의자다. 그의 철학은 단지 탐구, 그것도 매우 예리한
탐구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는 심지어 죽음조차도 제껴 두지
않는다. 그의 탐구는 죽음에까지 파고든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탐구적인 방법에 충실하였다.

사람들은 대개 죽음을 바깥에서만 경험한다.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는 달라진다. 그것을 안으로부터
보게 되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고통과 쾌락을 느끼고 사랑하고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창조할 수 있다는 것, 없는 것
도 생각으로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인 사람만이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를 아는 것이다. 창조를 할 때만 에너지가 최상의
지점에 놓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창조할 때, 그대는 신의 일부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것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가
존재하는 모습도 하나의 신비이다.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과의 법칙( The law of causation)이다. 그렇게
우리는 배워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원인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기적 속에 깨어있다. 내 이성은 이를 잘 받들어 모시지만 내 존재의
신비에 관한 한 그것은 하릴없다. 나의 이성 자체는 이 신비에 대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이성으로는 신비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다. 삶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부로부터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느끼는 최상의 방법은
창조적이 되는 것이다. 그때 최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샤람들은
보통 최저로 살아간다. 그들이 하는 일들은 최저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일들이 단지 습관, 몸이 이미 알고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의식의 영역으로부터 신체의 무의식적인
부분이 되어 버렸다.
가령 그대가 운전을 배운다고 해 보자. 처음에 그대는 아주 예민하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대는
조심해야 한다. 많은 것들 핸들, 도로, 변속기, 기아, 가속기, 제동장치에
계속 신경을 써야 하고 교통, 통행인 그리고 지나가는 차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더 이상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어진다. 이제는 옆자리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하고,
담배 피우고, 음악을 들어도 몸은 저절로 움직여진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없다. 사고가 발생하려고 하면
그때만 깨어나게 된다. 위험이 너무 크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 무의식적인
부분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다.
일상적인 삶은 기계적이고 고리타분하다. 그리고 그대는 최저로 살아간다.
그대는 결코 최상을 향하여 타오르지 않는다. 그대가 불타오르는 것은
창조적인 행위 속에서만이다.
창조적이 되어라. 이것이 내가 제자들에게 주는 메시지 중의 하나이다.
창조는 숭배이기 때문이다. 창조하는 것은 기도이며 명상이다.
창조적일 때 신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구태여 까아바( Kaaba)
같은 곳에 갈 필요가 없다. 거기에 신이 있는 만큼 여기에도 있다.
희말라야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신은 모든 곳에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점에 있는 자들, 삶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자들,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자들만이 신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내가 말하는 제자( Sannyasin )의 의미는 구식의 케케묵은 성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은듯이 무감각하게 앉아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춤추고 노래하고 곡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라.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그것을 하라. 행위란 꿈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도록,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큰 기쁨이다. 진정한 축복이다.
오직 그대가 미지의것을 실현했을 때, 만들고 창조하며 꿈을 헌실에
옮겼을 때, 그대가 신을 도왔을 때만 찾아온다. 그대 자신의 방법으」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었을 때, 세상에 기쁨을 더해 주었을 때,
그대는 산야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 내면의 생명을 아는 것이 그대로 하여금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그대가
완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면 내면의 불꽃이 양쪽으로:부터
찰활 타올라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제3의 눈은 오직 극한에서만 작동하기 시작한다. 최고점에서만이다.
질질 끌려다니듯 살지 말라. 삶을 짐이나 채워야만 하는 의무
따위로 생각하지 말라. 삶을 춤이 되게 하고 축제가 되게 하라.

이것이 불멸에 이르는 길이요, 세속을 초월하는 길이다.

삶의 불꽃으로 제3의 눈이 열리면 그대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더 이상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차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옛날의 산야스( sannyas ), .
소위 그 수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버리는 것으로 가르쳐져 왔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삶의
지를 최상으로 끌어 올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한 번 그대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진실을 발견만 하면 세상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높이 오를 수록 낮은 곳에 있는 것은 하찮게 보인다. 그대는 세상을
버릴 필요가 없다. 이미 떨어져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곳으로 도망갈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살면서 초월하도록 하라. 도망
하는 것과 초월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참 제자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법이다.

빛은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몸 속에서 빛을 보게 되면 그 빛은 몸 속 뿐만 아니라 몸 밖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라. 어둠은 개인적이지만 빛은 우주적이다. 죽음은
개인적이지만 삶은 우주적이다. 비극은 개인적이지만 축복은 우주적이다.
비극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하나의 분리된 실체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복이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그대가 조화 가운데서
전체의 일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빛은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해와 달이 산천대지(山川大地)를 비추나니 그 모든 것이 빛이다.

일단 내부에서 그 빛을 보게 되면 어디서나 그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달이든 해든‥‥‥ 모든 빛은 동일하다. 안과 밖이라고 해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빛은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와 명철, 통찰과 깨달음, 그리고 모든 정신작용은 빛에 불과하다.

달 속에 빛이나 제3의 눈 속에 있는 빛이나 같은 빛이다. 일단 그
빛이 같은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안의 세계와 바깥 세계의 구분이
사라진다. 안 세계가 바깥 세계요, 바깥 세상이 안 세상이다. 그래서
선사(禪師)들은 삼사라( Samsara )가 니르바나( Ulwina ), 즉 이 세상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 몸이 바로 부처요, 이 땅이
그대로 낙원이다. 그래서 부처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모든 존재가 나와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다. "
수세기 동안 불교도들은 이것에 대해 명상해 왔다.
"무슨 뜻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모든 존재도 깨달음을 얻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천지인데 말이다. "
수행자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어떻게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얻었을까? "
그러나 부처에게 그것은 계시되었다. 그는 안과 밖을 구분짓는 것이
단지 자아(ego), 쬐그맣고 얇은 커튼과도 같은 자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일단 그 커튼이 떨어져 나가면 더 이상 안도 없고
바깥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내가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말할 수 없다. 대신
그는 말한다.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모든 나무와 모든 강과
모든 산과 모든 사람들, 그리고 온갖 동물과 식물이 전체 깨달음을 얻었다.
그에게는 이제 어떤 분리된 자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들이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가 깨달았노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굴레 속에 있었다.
나는 무지와 불행 속에 있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나' 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존재는 축복에 젖어있다. 존재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안과 밖의 ◎
것은 같은 것이다. 사실 안도 없고 바깥도 없다. 모든 구분은 빛이 제3의
눈으로 흘러들어갈 때 사라진다. 한 개의 눈, 그 외눈으로 흘러들어갈 때
말이다. 모든 차별은 사라진다. 무지개가 한 줄기의 하얀 빛이 된다.
며칠 전 이런 질문이 있었다.
"바그완( Bhiwn ), 당신은 하얀 옷을 입으면서 왜 우리들에겐 오렌지색
옷을 입으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단지 상징이다. 그대들이 모든 색깔이 사라져 한 줄기 흰 빛
만이 존재하는 상황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해와 명철, 통찰과 깨달음, 그리고 모든 정신작용은 빛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몸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그것은 풀밭과 꽃잎 위에서 넘실거리고
연꽃 위에서 춤을 추는 그 빛과 똑같은 빛이다. 그 똑같은 빛이 내부에서는
명철과 깨달음, 통찰과 이해가 되는 것이다.
명심하라. 스승이 말하는 것은 이해이지 지식이 아니다. 스승이 말하는 것은
명료함이지 대답이 아니다. 그대는 너무나 명료해져서 질문들은
자취를 감춘다. 어떤 해답을 찾아서가 아니라 그대가 너무나 명료해져서
더 이상 혼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그것 뿐, 질문이
사라져 버린 것이지 해답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라고
한 것이지 지식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불과 며칠 전, 아니루다( Aniruddh )도 물었다.
"우리의 지식과 스승님의 지식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저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
차이점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나는 그대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명료할 뿐이다. 그것은 명철과 이해력 때문이지
지식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문제이다. 그들은 그 지식
나부랑이를 내팽개쳐버려야 하리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명철만이 있을 뿐이다. 질문이 들어 오면
나는 거기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명철함으로
조명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그리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반응으로 그대에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요, 통찰력인 것이다.
지식이 사람들을 눈멀게 한다. 그들의 눈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것을 볼 수 없다. 질문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대답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그대의 질문이나 그대의 존재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대답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황급히 대답을 하고 나서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논증과 기록들을
들먹인다. 모든 지지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이해력, 보는 힘, 즉 통찰력 밖에는 없다. 그래서 스승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해와 명철, 통찰과 깨달음‥‥‥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구름 한점 없는 내면의 하늘일 뿐이다.

하늘과 땅의 광화(光華)는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충만하다. 일신(一身)의
광화도 역시 하늘을 가득 채우고 땅을 뒤덮는다.

그것은 하나의 빛의 꽃( light-flower )이요, 이 모든 존재 자체이다.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하는 것이 이것이다. 삼라만상이 빛 이외의 것으로는
되어있지 않다는 것. 온통 빛 뿐이라는 것. 그 빛은 바로 존재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자들도 거기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전기라고
부른다. '빛'이란 단어는 너무 시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땅의 언어로
끌어 내려야 했다. 그래서 대신 '전기'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 matter )은 사라졌다. 물질의 깊은 중심에는
전기와 전자들, 그리고 춤추는 전기 입자와 에너지 입자밖에는 없다.
거기에는 물질도 없고 질량도 없다. 이것은 수세기에 거쳐 신비주의자들이
체험해 왔던 바다. 그들이 태어난 곳이 인도이건 티벳이건 차이가
나지 않는다. 존재가 그 어느 것도 아닌 빛만으로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은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기본적인 경험이 되어 왔다.
『태을금화종지』는 말한다.
"이 빛, 이 빛의 꽃, 이 빛의 이파리들이 바깥 뿐만 아니라 내부의
구석구석까지 가득 비춘다. "

그러므로 빛이 회전하면 하늘과 땅과 산과 강 일체도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한다.

똑같은 것을 부처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면에서 빛이 순환하는 것을
본 순간 그대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빛이 동트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단지 빛의 흐름, 거대한 빛 에너지의 출렁거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체의 정화(精華)를 위로 끌어올려 눈 속에 응축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체의 비밀을 여는 위대한 열쇠이다.
초심자들은 주의할지라. 하루라도 명상수행을 하지 않게 되면
이 빛은 흘러 나가 버리나니 누가 그 행방을 알겠는가?
단지 일각(一刻)의 시간만 명상을 해도 그것으로 만겁천생을
제(制)할 수 있다. 모든 방법들은 고요함으로 끝을 맺는다.
이 놀라운 묘법(妙法)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조사(祖師)는 하루 15분이면 된다고 말한다. 제3의 눈에 응집된 채
15분 동안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대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 버리기에 충분하다. 그대는 육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다시 세상으로 내던져질 필요가 없다. 그대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육체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살 만한 가치가 주어졌다.
그대의 영혼은 아무런 구속도 없이 자유롭고 분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도 태어남도 끝이 날 것이다. 그대는 이 무한한 존재의
세계에서 영원히 빛으로 꽃필 것이다.
단지 15분이면 된단 말인가? 그렇다. 15분만으로도 기적을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침묵과 고요를 위하여 15분 조차도 할애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그나티우스 로을라( Ignatius Loyola)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만약 교황이 로을라가
일생을 바쳐 일했던 예수회( The society of jesus )를 해체하라고 명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로을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15분 동안 기도하고 나면 모든게 괜찮아질 것이오"
매우 의미심장한 대답이다. 비우호적인 교황이 권좌에 올랐으니 로을라의
모든 업적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로을라는 작은 신비
주의 단체를 결성했었다. 그곳에서는 비의(秘錢)에 의해 일이 행해졌으며
그것이야말로 기독교가 항상 반대해 오던 것이었다. 기독교는 신비
주의자들을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항상 두려워해 왔다. 신비주의자들은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었으며 일단 그들이 진리를 세상에 내놓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의식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누가
교회 따위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래서 기독교는 변함없이 모든 신비주의 단체들을 파괴해 왔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이르는 다른 문을 갖지 못하도록, 모두 다 성직자에게만 와야 하도록
획책해 왔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욕구가 생길 때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어서는 안되었다. 이런 바보같은 생각 때문에 기독교는
이 세상의 종교라 할 만한 것은 송두리째 파멸시켰다. 사람들은 각각
다르고 또 각각 다른 성격의 단체를 원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다른
종류의 기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은 신비
주의 단체를 찾아가야 한다. 그들은 형식적인 종교의 일부가 될 수 없다.
형식적인 종교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것은 미온적이고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교회의 압력 때문에 참종교가 지하로 숨어야 했다. 뒤에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는 많은 위장수법을 써야 하는 법이다. 연금술이
바로 그러한 위장수법의 하나다. 진짜 내막은 다른 것이었다. 연금술사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하는 일이 저질 금속을 귀금속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믿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허용이 되었다. 교회는 매우
흐뭇해 했다. 저질 금속을 귀금속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았다.
성공하면 교회에 더 많은 금덩어리가 생기지 않는가. 그러나
거기에 대해 염려할 것은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단지 위장수법에 불과했다.
그것은 진정한 연금술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내막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저차원의 존재를 고차원의
존재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태을금화종지』였다. 보통 금
속에 해당하는 그대의 성 에너지를 황금에 해당하는 영성(靈性)으로
탈바꿈시키는 비의(秘饍)였던 것이다.
성가신 일이긴 했지만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이 금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심어 주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은 황금에
관심이 있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교회 또한 하나님 보다는 황금에
더 관심이 있게 마련이다.
로을라는 위대한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예수회를 세웠다. 그런데 아주
적대적인 교황이 권좌에 을랐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작정이신가요? 이제 어떻게 될까요? 교황의 말 한마디면
예수회는 사라질텐데요"
로을라는 대답했다.
"15분 동안 기도하고 나면 모든게 괜찮아질 것이오 깊이 명상에 빠지는데
15분 걸리니 그것이면 족하오. 내가 거기에 이르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오_"
조사는 이야기 한다. 단지 15분이면‥‥‥

그것으로 만겁천생을 제(制)할 수 있다. 모든 방법은 고요함으로 끝을
맺는다.

명심하라. 방법이 어떻든간에 목표는 동일하다. 고요함, 내면의 완전한
침묵, 사념이 사라진 상태, 만족감조차도 수반하지 않는 순수의식,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 놀라운 묘법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정말 헤아릴 수조차 없다. 사념들이 사라지고 그대가 온전히
침묵할 때, 그 침묵은 하나의 끝없는 심연과 같다.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는 것이다. 태평양은 측량이 가능하다. 그 깊이는 5마일이다. 그러나
내면의 태평양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무한하다. 계속해서 파내려가고
깊이 잠수를 해가도 바닥에 닿지 못한다. 절대로 닿을 수 없다.
오직 사념들만이 측정이 가능하다. 무념(無念)의 경지는 측정될 수 없다.
그래서 무념은 신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사념이 없는 경지가 일종의 잠자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아주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일같이 일어난다. 깊은 잠
속에서 꿈들마저 사라질 때, 그대는 심연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깊은
잠을 자고나면 몸이 풀리고 원기가 회복이 된다. 아침에 그대는 생기를
느끼고 다시 태어난 듯 새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이다.
파탄잘리는 한 가지만 차이가 날 뿐 깊은 잠과 사마디는
아주 비슷하다고 말했다. 잠은 무의식이지만 사마디는 의식이라는 것.
그러나 그대는 똑같은 곳, 측량할 수 없고 신비한 똑같은 내면의 공간을
다녀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욕망도 없고 마음의 움직임도
없어 모든 것이 고요하다. 모든 방법들이 도달하는 곳은 거기이다.
요가, 탄트라, 따오( Tao ), 하씨디즘(鷺assidism ), 수피즘(Sufism)
등은 다른 길로 거기에 이르는 방법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각양의
사람들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층으로부터 깊은 층으로,
조잡한 차원으로부터 정묘한 차원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에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대는 표면적인 층으로부터 깊은
층으로 해나가야 한다. 무엇이 표면적인가? 표면적이란 사념의 끊임없는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깊은 층이란 무엇인가? 무념의 상태를 이름이다.
조잡한 차원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모든 내용물들을 이름이다.
그러면 정묘한 차원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비워진 상태를 이름이다.
수행자는 계속해서 밀고 나가야 한다. 처음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명상이 별로 힘들지 않게 되면서 축복된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층으로부터 깊은 층으로, 조잡한
차원으로부터 정묘한 차원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은
중단해 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을 규칙적인 일과로 삼아라.

수련의 시작과 끝은 하나여야 한다. 그 사이에 서늘해지고 따뜻해지는
순간이 있나니 그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목표는 모든 방법들이
아주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하늘과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어지는데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목표는 수중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통달은 어떠한 노력도 필요없게 되었을 때, 모든 노력들을
떨어버릴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어떠한 방법도 필요가 없고 모든 방법들을
떨어버릴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명상은 더
이상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대 자체가 명상이 되어 버렸을 때 진정한
통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명상 속에 살고 명상 속에 걸으며
명상 속에 앉는다. 행주좌와(行住坐臥)가 그대로 선(禪)이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먹고 자는 그대는 이제 그것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온다. 그러나 처음에는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억하라.
물은 정확히 온도, 99도도 아닌 99도 9분도 아닌 100도에서만

수증기가 된다. 그와 같이 그대가 온 힘을 기울여 100도 그 절정에 달했을 때는
언제나 그 즉시 보통 금속이 귀금속으로 변한다. 즉시 성적인
에너지가 영적인 세계를 관통하게 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하던 에너지가
즉시 180도 회전을 하여 양 눈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바깥의
모든 것과 안의 모든 것이 깨달음을 얻는다.
예수는 말했다.
"나무를 쪼개어 보라, 그러면 나를 발견할 것이다. 돌을 깨뜨려 보라,
거기에 내가 있을 것이다. "
이것이 궁극의 경지이다. 나무를 쪼갤 때 하나님을 발견하고 돌을
깨뜨릴 때도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때 그대는 하나님 위에, 하나님 안에,
하나님으로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하나님을 호흡하며 하나님을
먹고 마신다. 만물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조사가 말한 궁극의 경험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3의 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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