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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코 끝에 감추어진 비밀>>

narrae 2013. 12. 24. 07:29

<<6 .코 끝에 감추어진 비밀>>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반조(反照)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를 수 없다. 알아차림으로써 목표에
이른다.
반(反)이라는 것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마음으로부터 만물을 형성하는
영적작용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우리는 육척의 믐 안에서 하늘과 땅이 열리기 전부터 존재해 온
형체를 찾는데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겨우 한두 시간 정좌하여
자기 자신만 둘러보고는 그것을 반조라고 부른다면 거기에 무슨
결실이 있겠는가?
자신의 코 끝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코 끝에 생각을 붙잡아 매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코
끝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생각을 양 눈의 사이 중황(中黃)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도도 아니다. 눈이 어디를 향하면 마음도 그곳으로 향한다.
어떻게 그것이 위와 아래로 동시에 향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 그 자체로 혼동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의 참의미는 무엇인가? '코 끝'이라는 말은 아주 오묘하다.
코는 눈에 대해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코를 기준삼지 않으면
눈을 너무 뜬 상태에서 먼 곳을 바라보게 되어 코가 보이지
않게 되거나, 또는 눈을 너무 내리 감아서 역시 코가 보이지 않게
된다.
눈을 너무 크게 뜨면 시선이 바깥으로 쏠려 쉽게 주의가 산만해진다.
너무 내리감으면 안으로 들게 되어 혼미해지기가 쉽다. 반 눈을 뜬
상태에서 코 끝이 보이는 때가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므로 코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꺼풀을 올바르게 내리고 빛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도록 하는 일이다. 애쓰지 말고 그냥 빛이
응집되어 홀러들어 오기만 바라는 것이다.
코 끝을 바라보는 것은 최초 좌선을 시작할 때 시선이 올바른 방향으로
고정되게 하려는데 있으며, 그리하여 길잡이 역할이 끝나면
그대로 방치해두면 된다. 이것은 마치 일꾼들이 다림줄을 세우는 것과 같다.
일단 다림줄이 세워진 다림줄에 따라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양 눈으로 코 끝을 바라보고 편안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 마음을
연중(緣中 ' center In the midst of condition)에 고정시킨다. 그것은
반드시 머리의 중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정확히 양 눈 사이에 있는
지점에 상념(想念)을 집중하는 일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은 극도로 유동적이라서 양 눈의 중간지점에 사념을 집중하면 빛이
저절로 흘러들어온다. 굳이 노력하여 특별히 중궁(中宮)에 주의를 쏟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몇 마디 속에 중요한 요지(要旨)가 들어 있다.
연중(緣中)이란 극히 오묘한 말이다. 중(中)과 혜(慧)를 뜻한다. 상념이
떠올라 오면 완고하게 앉아 있어서만은 안되고 그 상념이 어디에
있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사라지는지를 주시해야 한다. ·더 깊게
추구해봐야 얻는 것은 없다. 상념이 어디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주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그 너머까지 추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마음을 밝혀 낸다는 것(의식으로 의식 너머에까지 이른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쉬게 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바른
관(觀)이요, 그 외의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으로는 어디에도 이를
수 없다.
상념이 끊임없이 흐를 때에는 그것을 멎게 하고는 관(觀)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관한 다음에 다시 멎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빠른 깨달음을 위하여 정(定)과 혜(慧)를 동시에 닦는(定慧雙修) 방법인 것이다.
이것을 회광(回光)이라고 한다. 회는 지요, 광(光)
은 관(觀)이다. 주시, 관(觀)이 없는 멈춤은 빛이 없는 회전
(回)이다. 멈춤이 없는 회전이 없는 빛이다. 이것을 유념하라.

한 장님이 그의 친구들을 방문했다. 그가 돌아올 때는 어두웠기 때문에
친구들이 등불을 주었다.
"고맙네만은 나에겐 필요가 없다네. 밝든 어둡든 나에겐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어쨌든 가지고 가게. 사람들이 부딪치지 않도록 말일세."
길을 나서서 얼마 안가다 그는 다른 사람과 부딪치게 되었다.
"길좀 보고 걸어요"
'내 등불을 보지도 못했소?"
"유감이지만 불이 꺼져 있구려."

명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경전들은 장님의 손에 있는
등불과 같다.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장님은 등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버렸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쓸데없는 짐만 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만약 그 장님이 등불없이 출발했더라면 보다 조심했을 것이다. 손에 든
등불 때문에 그는 마치 자신이 눈이라도 가진 것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성경이나 기타나 코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무한히
아름다운 빛의 등불들이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멀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타는 오천 년이나 되었다. 빛은 오래전에 꺼져 버렸다. 크리슈나의
죽음과 함께 그도 꺼져 버렸다. 성경이나 코란, 그리고 세상의 성스럽다하는
모든 경전들도 마찬가지다. 스승의 죽음과 함께 그 빛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라 해서 경전들을 들고 다니고
믿으며, 그들의 삶이 ◎으로 충만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말씀이라는 것은
단어들에 지나지 알는다. 그것은 불필요한 짐이다. 세상의 모든
경전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사람들은 보다 주의깊어 질 것이다. 보다
깨어나 자신의 ◎의 근원을 찾게 될 것이다. 의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한번은 룽땅(Lurg-tan)이 태산(Te-shan)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계속해서
보다 많은 설명을 요구하며 늦게까지 그러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룽땅이 말했다.
"밤이 깊었다. 이제 돌아가 보아라."
태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나무 발을 제치고 밖으로 나왔다. 밖이 깜깜한 것을
본 그는 다시 들어와 말했다.
"밖이 어둡습니다. "
룽땅은 촛불을 하나 켜서 태산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태산이 그것을
받으려고 할 때 훅 불어서 불을 꺼버렸다. 거기서 태산은 돌연 깨달음을
얻고는 엎드려서 절하였다.
룽땅이 물었다.
"어떤 진리를 보았느냐?"
태산이 대답했다.
"오늘 이후로는 절대로 천하의 모든 옛 스승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날 룽땅은 여러 제자들 앞에 나가 말했다.
"이 가운데에는 송곳니가 칼 나무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입은 피
묻은 접시같고 누가 막대기로 때린다 해도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는 외딴 높은 산꼭대기에다가 나의 도를 세울 것이다."
그때 태산은 그의 경전 주해서를 꺼내 뜰 앞에서 횃불을 치켜들고는
말했다.
"끊임없는 깊은 분석은 허공에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놓는 것과 같다.
세상의 권력이란 한 방울의 물을 거대한 골짜기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그의 주석을 꺼내 태워버렸다.

이제 그대에게 눈이 없다면 빛조차도 쓸모가 없다. 그대의 손에 있는
등불이란 완전히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에게 눈이 있다면
불을 꺼버리는 것이 깨달음의 체험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눈인 것이다.
룽땅은 태산의 방문을 받았었다. 룽땅의 스승이었고 태산은 제자였다.
바깥의 어둠을 보고 제자는 스승에게 말했다.
"너무 어둡습니다. "
스승은 촛불을 하나 켜 제자에게 주고는 그가 그것을 받으려고 할때
훅 불어 꺼버렸다. 갑자기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그 어둠은 전보다 더 했다.
이 갑작스런 행동이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잠시 제자는 사념의
막간에 빠졌을 것이다. 잠시동안 생각이 정지하고 명상이 일어난 것이다.
잠시 동안의 완전한 침묵, 그 속에서 그는 핵심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그는 그의 모든 경전들을 태워 버렸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의 경험으로 진리를 안 것이다.
아주 작은 경험이 산더미 같은 지식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 작은
두 눈이 해와 달과 모든 별보다도 가치가 있다. 핵심을 말하자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색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되는 분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찰이다.
이제 경문으로 들어가자.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용어들로 기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이 경문들은 무한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정말 간단하다. 그대가 그것을 복잡하게만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음은 항상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그 점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단순한 것에는 못배기기 때문이다. 일이 단순하다면 마음은
쓸모가 없게 되리라. 그때야 마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일이 복잡할 때만
마음이 필요하다. 그때 그대는 마음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길을 혜쳐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쳐나갈 필요가 없다면 마음은
완전히 무용지물이다. 그대는 그것을 내팽개쳐 버릴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그렇게 복잡한 일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명심하라. 이 경문들은
매우 간단하다. 진리는 항상 간단하고 완전히 단순한 법이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반조가 얼이는 아무것도 이를 수 없다.

반조란 무엇인가? 무념(無念)의 경지이다. 영어 단어는 선정
(dhyana)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전해주지 못한다. 영어에는 선정
(dhyana)을 번역할 만한 단어가 없다.
세 가지 단어가 이용이 가능하기는 하다. 하나는 집중(concentration)
,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다. 집중이란 노력과 긴장과 강요된 상태이지
자연스러운 흐름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dyima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긴장도 없다. 그래서 집중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는 없다. 다른 말은 선정(contemplation)이다. 그러나 영어에서의
선정(禪定)이라는 말은 생각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누군가가 선정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세번째는
명상(meditation)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고의 의미를 갖고
있다. 무엇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 단어들 중에
어느 것도 毖yfma의 의미를 전달해 주지 못한다. dyou란 무념의 상태
를 가리킨다. 어떠한 내용물도 담고 있지 않은 침묵과 ◎아차림(얼차
려)의 상태이다. 거울은 거기에 있지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반사
하고 있지 않다. 마치 거울처럼 의식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얼차려, 그것이 바로 脚yfma
이다.
도교도들은 그것을 번역하는데 선정(contemplation)이라는 말을 썼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에 주의하라.
그것은 사전상의 의미가 아니다. 사전을 찾는다면 그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접하게 될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이 책, 『태을금화
종지」가 거짓 선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거짓 선정이란 무언가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는 '묵상'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하나님이나 어떤 성스러운
또는 초월쩍인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그러나 까짓 것,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든 아니든 차이는 없다. 망상은 망상일 뿐이다.
그대가 섹스를 생각하든 사마디를 생각하든 마찬가지다.
무념의 경지, 그 틈바구니‥‥‥ 그것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지만 그대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한
생각이 오고 그리고 다른 생각이 온다. 그리고 그 양 생각 사이에는 언제나
작은 틈이 있다. 그 틈이 바로 선정으로 향하는 문이요, 선정인 것이다.
그대가 그 틈을 깊게 들여다 보면 그것은 점점 커질 것이다.
마음이란 교통이 혼잡한 도로와 같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 다른 차가
뒤따른다. 그대는 너무 차에 관심이 쏠린 나머지 그 틈바구니를 보지 못한다.
차 사이아는 언제나 틈바구니가 있다. 그게 없다면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을 분리시켜 놓는 무언가가 사이에 있다. 그대의
생각들은 충돌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깔아뭉게거나 부딪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든 겯치지도 않는다. 각각의 생각은 그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구분지어져 있다. 그러나 생각은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신속해서, 참으로 기다리면서 주시하지 않으면 그 틈을 볼 수 없다.
선정에 든다는 것은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사고를
주시하고 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태도를 바꿀 때 그대는 간격을 본다. 이제 그대의 관심은 더 이상 생각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틈바구니에 가 있다.
예를 들어 그대들이 여기에 앉아있을 때 나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대들을
바라볼 수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바라보는 것, 그때 나의 관심은
사람에게 가 있다. 나는 몇 사람이 있는지 세어볼 수도 있다. 혹은
나는 사람은 잊어버리고 그 틈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사람들 사이에
나있는 틈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 볼 수도 있다. 이것이 태도의 전향이다.
만약 그 틈을 세어보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사람의 모습들이
희미해지면서 그들이 똑똑히 보이지 않게 된다. 그대가 틈바구니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세고 있기 때문이다.
날잡아 길가에 앉아 얼마나 많은 틈들이 스쳐가는지 세어보라.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차의 색깔을 볼 수 없고 그 모양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차 안에 있는 운전수나 승객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보는 것은 틈바구니이다. 하나의 틈이 사라지고 또 다른 틈도
사라져 간다. 그대는 계속해서 그 틈들을 세어본다. 그대의 태도가
변한 것이다.
반조(:선정)라고 하는 것은 태도의 전환이다.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다른 생각으로 건너 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틈으로부터 다른 틈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점점 그대는 그 틈바구니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생의 가장 위대한 비밀 중의 하나이다. 그대가 자신의
존재와 조우하는 것은 그 틈바구니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중심에 말이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반조가 없이는 아무 것도 이를 수 없다.
알아차림으로써 목표에 이른다.

알아차리는 것, 그냥 알아차리는 것‥‥‥ 인도에서는 그것을 다르샨
(Dushi,n)이라고 부른다. 어디로 가서가 아니라 관(觀)함으로 목표에
이른다. 어디에 갈 필요가 없다. 그냥 보기만 하라. 한번 그 틈바구니와
사이를 보기 시작하면 그대는 자신이 누구라는 걸 알게 되리라.
그리고 그대가 목표이다. 그대는 근원이자 목적지요, 시작이자 끝이다.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바라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대가 열망하던 모든 것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거지가 될 필요가 없다.
그 틈바구니를 선택할 때 그대는 황제가 된다. 계속해서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대는 거지이다.

‥‥‥알아차림으로써 목표에 이른다.
그대 자신을 넘어서 단 한 발자국도 내디뎌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이미
그대의 내면에 자리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기정사실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깊은 그대 내면의 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디 높은 곳,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닝은 그대의 내면, 사념이
얼씬거리지 않는 어느 곳에 있다. 침묵이 넘쳐흐르고 아무것도 반영하지 않는
완전히 비어있는 의식이 현존하는 곳이다.
그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그대 자신의 경험을 갖게 된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풍미로 가득차게 된다. 황금 꽃이 피는 것이다.

반(反)이라는 것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마음으로부터 만물을 형성하는
영적작용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최초의 상태까지 되돌아감을 뜻한다.
생각이란 나타남이다. 무념은 나타나지 않음이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생각들로만 차 있다면 그대는 에고(ego)이상의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에고란 '자기를 의식하는 마음'이다. 그대는 생각의 더미로 남을 뿐이다.
그 생각의 더미가 그대에게 자의식(自意識), 내가 누구라는 의식을 준다.
근대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데카르트(Descartes)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명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은 매우 아름답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름답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다, 생각할 때만
나는 존재한다. 생각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이놈의 '나'라고 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은 사고의 뭉텅이일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가짜 실체오.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횃불을 가지고 돌릴 때 둥그런 원이 생기는 것과 같ek.
원은 거기에 없다. 그러나 횃불이 너무 빨리 돌기 때문에 마치
거기에 원이 존재하는 듯 불로 된 동그라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빨리 움직이는 생각으로 하여 거기에 '나'라고
하는 착각물이 생겨나는 것이다.
조사께서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마음(識神)으로부터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마음(不識神:元神)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씀한다.
사람은 에고(ego)로부터 비에고(egolessness), 자아(自我)로부터 무아
(無我)에 이르러야 한다. 자아는 나타난 부분이다. 무한하고 영원한
영역 말이다. 자아는 그날 태어났다. 그날 태어났다가 그날 스러지는
하루살이와 같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무아, 붓다가 아나따(anatta)
라고 불렀던 그 무아는 결코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 영원의 일부이다.
그것은 영원하다.

우리는 육척(六尺)의 몸 안에서 하늘과 땅이 열리기 전부터 존재해 온
형체를 찾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대는 육척의 몸 안에 여전히 살아 약동하는 근본 원질, 하늘과 땅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해 온 본래 성품을 가지고 있다. 선가(禪家) 에서는
그것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하늘과
땅조차도 태어나기 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 온통 정적만이
감돌 뿐 한 가닥의 소리도 들리기 이전, 아무 형상도 없고 모두가 무형
(無形)이던 때, 모든 것이 종자 속에 있던 매‥‥‥
그 본래의 침묵이 그대에게 있다. 힌두교도들은 그것을 아나하트나드
(anahatnad)라고 부른다. 불교도들은 특이하게 그것을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라고 부른다. 그대의 내면에 그것이 있다. 그것은 그대의 본질이다.
그것을 맛봄으로써 불멸에 이르고 그것을 맛봄으로써 황금의
존재가 된다. 그때 한낱 티끌은 신성(神性)으로 탈바꿈된다.
연금술의 목표는 저질 금속을 황금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겨우 한두 시간 정좌하여 자기 자신만 둘러보고는
그것을 반조라고 부른다면 거기에 무슨 결실이 있겠는가?

명상한답시고 틀어 앉아서 단지 자기 자신의 에고만을 보는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선정이라고 한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생각만
주시할 뿐 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잡다한 일들에 마음이 가 있어서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 보지 못한다.
명상한답시고 앉아 있을 때는 잠시 동안 세상이 잊혀지고 생각들이 보다
뚜렷해져 그들은 생각에 보다 주의하게 된다.
이것이 철학자들의 상태이다.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궁리하며
그렇게 철학한다. 그것은 진정한 선정이 아니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결코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죽음도 넘어설 수 없고 시간도 초월
할 수 없다. 그대의 목표는 그 너머에 있는데 말이다.
다시 반복한다. 명상을 하려거든 자신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단지
눈을 내리 감고 자기 자신만 바라봐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 Davld Hume )은 이렇게 썼다.
"모든 위대한 스승들의 교훈이자 충고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나 또한 명상에 잠겨 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면에서 상념들과 기억들과 상상들과 꿈들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것은 정말 발견하지 못했다. "
명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에게 그것은 당연하다. 그는 철학자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철학자 중의 하나요, 매우 논리적이고 일관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철학자일 뿐 명상가는 아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노력하면서 내면에서 떠돌고 있는 많은 생각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자아( self)같은 건 없다. 침묵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신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모두 쓸데없는 짓이다. "
먼저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그는 빗나가 버렸다.
사념을 바라보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틈바구니를 바라봐야 한다.
틈새를 찾아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틈새로 뛰어
들었다면 그는 상념과 꿈과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모든 것이 멀어져 가며 점점 아주 먼 곳의 소음이 되어버린다. 그러다가
한 순간이 온다‥‥‥ 단순히 사라져 버렸을 뿐인데 그대는 넘어서
있다. 피안(被岸)에 도달한 것이다.

자신의 코 끝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경문 전체의 실질적인 요점,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음이란 것은 단순한 일조차 꼬아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와배기꾼이다.

자신의 코 끝을 웅시해야 하는 것이다.

왜인가? 그것이 제3의 눈을 가늠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양
눈이 코 끝에 고정이 될 때는 많은 것들이 일어난다. 기본적으로 제3의
눈은 정확히 코 끝과 일직선 상에 있다. 바로 몇 인치 위에 있지만
똑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제3의 눈과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면 제3의 눈의 끌어당기는 힘, 그 자력이 너무 세서 자신이
거기에 빨려들어 간다. 그대는 그 영안의 끄는 힘과 자력이 작동할 수
있도록 정확한 선을 가늠해야 한다. 일단 그 선상에 놓이게 되면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가 없다. 그대는 돌변해 있는 그대의 태도를 발견할 것이다.
양 눈은 세계와 상념들을 두 개로 갈라놓지만 외 눈은 틈바구니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태도를 바꾸는 간단한 방법이다.

자신의 코 끝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코 끝에 생각을 붙잡아
매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음이 꼬아놓는 것이 그런 식이다. 마음은 이렇게 지껄일 수 있다.
"그래, 이제 코 끝을 바라보자. 코 끝을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자."
코 끝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그대는 핵심을 놓친다. 그대는 비록 코
끝에 가 있더라도 제3의 눈이 작동할 수 있도록 아주 이환된 상태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코 끝에 집중하고 거기에 붙박혀 고정되어 있으면
영안은 그대를 끌어당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의 영안은 아직
한번도 작동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끄는 힘이 약하다.
서서히 그것은 강해진다. 일단 그것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주위를 감싸고 있던
물질들이 사라져 그 활동이 원활해지면, 그대가 비록 코 끝에 고정되어 있더라도
끌어당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대는 아무런 부담이나 스트레스나 긴장도 없이 아주 가벼운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코 끝을 웅시하고 있는 동안에 생각을 양 눈 사이 중황( yellow-
middle )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도도 아니다.

그러므로 코 끝에 집중하지는 말라. 그리고 마음이 부릴 수 있는 두
번째 속임수는‥‥‥ 스승은 단지 그대에게 마음이 부릴 수 있는 온갖
수작들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 뿐이다. 첫째 그것은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옳거니. 스승은 코 끝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스승은 코 끝에 집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응시하라. 가볍게 아무런 힘도 들이지 말고 응시만 하라."
마음은 또 이렇게 꼬일 수도 있다.
"그냥 코 끝을 응시하라는 것은 영안에 집중하라는 것이구나."
마음은 항상 집중을 좋아한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나 학원, 대학에서는 명상이 아닌 집중을 가르친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제조해 내는 공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눈이 어디를 향하면 마음도 그곳으로 향한다. 어떻게 그것이 위와 아래로
동시에 향할 수가 있겠는가?

또 마음은 이렇게 속삭일 수 있다.
"보라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요구는 불합리하다. 어떻게 동시에
양쪽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코 끝과 제3의 눈을 말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고 되어지지도 않는다. 멍청한 짓 하지 말라."
이제 마음이 늘어놓는 세번째 수작은 그것이 불합리하다 하여 비난하는 것이다.
우선은 그것이 엉터리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 다음, 이어서
그것을 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술 때는 가학적( sadistic )이거나
피학적(masochistic )으로 아주 흐뭇해한다. 이렇게 지껄이면서 말이다.
"보라, 이게 바로 그런 의미다. 엉터리 같으니라구. 처음에는 코 끝을
바라보라더니 나중에는 영안이라구? 어떻게 상하를 동시에 보란 말이야?
그것은 불가능하다. "

이것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 그 자체로 흔동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코 끝'이라는 말은 아주 오묘하다. 코는 눈에 대해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하나의 길잡이라는 것. 그대가 영안의 자력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그 에너지 장(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되어질 수 없다. 그대는 그 자력과 에너지의
현장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그대를 맞아줄 것이다. 그대가
들어갈 필요는 없다. 들어가려고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제 격식에 따라 스스로 일어난다.

코를 기준삼지 않으며 눈을 너무 뜬 상태에서 먼 곳을 바라보게 되어
코가 보이지 않게 되거나 또는 눈을 너무 내리감아서 역시 코가 보이지
않게 된다. 눈을 너무 크게 뜨면 시선이 바깥으로 쏠려 쉽게 주의가
산만해진다.

그리고 가볍게 코 끝을 응시하는 것의 또 하나의 기능은 이것이 바로
눈을 크게 뜨지 않게 한다는 것. 눈을 크게 뜨면 세상 것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천 갈래 만 갈래로 주의가 산만해진다. 잘 생긴 여자가 지나가면
마음으로 그녀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싸우고 있을 때
관심은 갖지 않더라도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슨 일일까? "
혹은 누군가가 울고 있을 때 호기심이 발동한다. 수많은 일들이 그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면 그대는 남성적인
에너지, 양(陽)이 되어 버린다. 눈을 완전히 닫아버리면 그대는 일종의
몽상에 빠져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대는 여성적인 에너지, 음(陰)이
되어 버린다. 그 양단을 피하기 위해서 바로 코 끝인 것이다. 간단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거의 기적에 가깥다.
그리고 이것은 도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도 그것을 알고
힌두교에서도 안다.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명상가들은 반 눈을
뜨게 되면 기적과도 같이 양쪽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에
당도하였다. 하나는 바깥세계에 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의 세계에
끌리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과 외면의 경계에 존재하고 있다.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내면과 외면의 경계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 순간에 있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대는 이원성』
시각을 탈피한다. 그대는 내면적인 분열 세계를 초월하였다. 내면적』
분열을 벗어날 때만 그대는 영안의 에너지 장에 떨어지게 된다.

너무 내리감으면 또 안으로 들게 되어 혼미해지기 쉽다. 반눈을 뜬 상태에서
코 끝이 보이는 때가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므로 코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꺼풀을 올바르게 내리고 빛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도록 하는 일이다.

이것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빛을 강제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 창문이 열려 있으면 빛은 저절로 들어온다. 문이
열려 있을 때 빛은 밀려들어 온다. 그것을 당길 필요도 없고 밀칠 필요도
없고 끌 필요도 없다. 어떻게 빛을 끌어당길 수 있겠는가? 어떻게
빛을 밀칠 수 있겠는가? 그저 예민하게 열려있는 것이 필요한 전부이다
코 끝을 응시할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
아무런 집중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것, 어떤 긴장이나 무게감도 없이
그냥 응시할 때 돌연 영안의 창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항상 흘러나가기만 하던 빛이 이제는 흘러들어오기 시작하고
순환하는 원이 된다.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원이다. 사람에게 휴식을 주고
이완을 주는 것도 이 원( circle )이다. 이 원이 사람을 전체적이고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분열이 없다.
그렇지 않은 모두에게는 다소간 정신 분열증이 있다. 그리고 정신
분열증을 넘어서 있는 그 빛의 원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건강하고
신경증이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별 차이가 없다. 신경증이다
아니다는 단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환자와
당신과 의사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신경증 환자가 다른 사람의 신경증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가다가 환자보다는 치료하는 쪽이 오히려 더 신경증이
심한 경우도 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더 많이 미치는 것은 정신과 의사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자살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들이다. 왜인가?
어떤 점에서는 그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끊임없이 신경증을 다루고
온갖 미친 병들을 취급하다보면 그들도 완전한 사람이 아닌지라
감염이 되게 되어있다. 그들은 스스로 신경증을 먹어대고 있다.
정신분석 의사가 환자의 그 모든 헛소리와 넋두리를 들을 때, 사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을 자신 속에 축적하고 있다. 환자는 그 모든
넌센스를 의사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긴다. 그는 댓가를 지불하였고 점차
정신분석 의사의 내면에 그 싸구려 신경증이 가득 차서 폭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내가 정신분석 의사의 자격을 결정한다면 빛을 회전시킬 수 있는가
아닌가가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요건이 될 것이다. 자신의 빛을
회전시킬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빛을 회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의 신경증에도 감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듣고 도와주면서도
전혀 거기에 오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빛의 회전이 그를 목욕시키고
깨끗하게 해 줄 것이다. 그는 신성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스승과 정신분석 의사와의 차이점이다. 스승만이 진정한 정신
분석 의사가 될 수 있다. 스승만이 임상 의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전체성에
도달한 사람만이 어둠 속에서 혜매며 넘어지는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있다.
이 책, 『태을금화종지』는 앞으로 정신과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훈련서적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이 책을 최초로
서양의 언어로 번역했던 빌헬름( Wilhelm ) 자신이 바로 유명한 심리학자였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다. 그러고
이 책을 번역한 후 그는 아주 혼란에 빠져 미쳐 버렸다. 그의 모든 ·
리분석 훈련과 이 책의 내용이 그의 내면에서 극도의 모순과 알쏭달송함을
불러 일으켜 그는 더 분열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이 =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정신병이었다. 그의 모든 훈련과 그의 모든 이해력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방향을 상실했던 것이다.
명심하라. 비결은 어렵지 않다. 그게 오히려 문제다. 너무 ?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는 마음이 그것을 잡아 꼬아 어렵고 헷갈리게
만들어 놓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코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꺼풀을 올바르게 내리고 빛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도록
하는 일이다. 애쓰지 말고 그냥 빛이 응집되어 흘러들어 오기만
바라는 것이다.

집중해서 빛을 끌어 당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저절로 들어온다. :
그렇게 저절로 들어을 때 그것은 아름답다. 만약 빛을 끌어오려고 노력하면
실패는 이미 맡마 놓은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실패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애를 쓰면 쓸수록 실패는 더욱더
절실해질 것이다.
그것을 끌어오려고 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올바른 위치에 놓기만 하라.
그러면 된다.
가령 밤하늘에 달이 있다고 하자. 창가에 가서 거기에 서 있으면 그대로
달빛에 흠뻑 젖을 것이다. 다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이미 흐르고
있는 달빛 속에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을 올바른
가치에 놓기만 하면 정말 무한히 가치있는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코 끝을 바라보는 것은 최초 좌선(坐禪)을 시작할 때 시선이 올바른
방향으로 고정되게 하려는데 있으며, 그리하여 길잡이 역할이 끝나면
그대로 방치해 두면 된다. 이것은 마치 일꾼들이 다림줄을 세우는 것과 같다.
일단 다림줄이 세워지면 일꾼들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세워진 다림줄에 따라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양 눈으로 코 끝을 바라본다는 것‥‥‥ 기억하라. 코 끝에서 그대의
양 눈이 이원성( duality)을 상실해 버리도록 두 눈으로 코 끝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코 끝에서 그대의 양 눈을 통하여 흘러나오던
◎줄기가 하나가 된다. 한점에 모아진다. 바로 그 두 눈이 만나는
지점이 창문이 열리는 곳이다. 그러면 만사가 순조롭게 된다. 이제는
모든 걸 그대로 맡겨놔 버리고 그냥 즐기고 기뻐하고 노래하고 춤을 춰라.
아무것도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양 눈으로 코 끝을 바라보고 편안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라.

똑바로 앉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척추가 똑바를 때 성 센터( sex cen-
ter)의 에너지가 제3의 눈에 이용될 수 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거기에는 복잡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마치 코 끝에서 양
눈이 만날 때 계3의 눈이 작동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성
에너지도 제3의 눈에 이용되게 하라. 그 효과는 두 배가 되어 강력해질 것이다.
성 센터에는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척추를 똑바로 세울 때 성 센터도 제3의 눈에 연결된다.
양방으로부터 제3의 눈을 쳐서 뚫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편안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라.

스승은 사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확실하게 똑바로 하라. 그러나
그것이 불편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렇痴 않으면 그 불편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주의가 산만해질 것이다. 요가의 자세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산스크리트어의 아사나란 말은 '편안한 자세'를 의미한다.
편안함이 기본 속성인 것이다. 편안하지 못할 때는 마음이 거기에
쉽쓸릴 것이다. 자세는 편안함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앉는데 익숙해진 동양인처럼 마루바닥에 앉을 수 없거든 차라리 의자에
똑바로 앉는 것이 낫다. 그대는 고대 이집트의 왕이나 여왕의 그림과
동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의자 등받이는 아주 똑바르다.
그들은 그렇게 앉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가의 자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두 가지, 그대의 척추는 똑바로 세워져야 하고 자세는 편안해야
한다는 것. 만약 두 가지가 불가능할 때는‥‥‥ 간혹 가다가 그런
수도 있지만 두 가지가 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만약 척추를 똑바로 ◎
세울 때 불편하고 편안하게 했을 때는 척추가 똑바르지 않거든 편안한 쪽을
택하라. 그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러나 차선은 편안한 자세이다.
그때는 척추와 그것을 똑바로 펴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마음이
흐트러지면 아무것도 안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양쪽이 다 가능하다면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이다.

편안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 마음을 연중( center in 沆e midst of con-
dition )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말라. 세상, 그 인연 속에서 살아라.
자동차의 소음이 거기에 있고 비행기가 지나가며 열차가 덜거덕거린다.
온갖 것들이 거기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세상이다. 그러나 조용하게
세상의 한가운데 앉아라. 히말라야 동굴로의 도피는 항상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히말라야의 침묵은 전염적인 것이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침묵으로 착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기도 시원해서 그대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인 양 여기게 된다. 그것은
빌어온 것이다. 그대가 시장에 돌아오면 그것은 언제든지
사라져 버린다.
그때 그대는 깨닫게 되리라. 히말라야에서의 그 모든 세월들이
물거품이요, 도로아미타불이었다는 사실을. 그대는 스스로 바보 멍청이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세속에 머물면서 중심을 잡는 것이 낫다. 히말라야에서의
거짓 침묵같은 빼앗길 상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그
인연의 속에서 그대는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머리의 중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중심을 잡는다고 해서 머리 한가운데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젓은 정확히 양 눈 사이에 있는 지점에 상념을 집중하는 일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집중이 아니라 깨어있다는 것, 얼차리라는 것.
코 끝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제3의 눈에 저절로 얼차려라. 사실 그대가 코
끝을 바라보는 순간 제3의 눈에 저절로 헐차려가 일어난다. 그것이 코의
다른 쪽 끝이기 때문이다. 코의 바깥 쪽 끝은 밖에 나와 있지만 다른 쪽
끝은 제3의 눈에 가 닿아있다. 그래서 한쪽 끝에 얼차리게 되면
다른 쪽 끝에서도 얼차려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깨어만 있어라.
아무런 힘도 들이지 말고 얼만 차려라.

그것은 정확히 양 눈 사이에 있는 지점에 상념을 집중하는 일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엄청난 문구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것. 그대는 집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그대는 이제 혁명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빛은 극도로 유동적이라서‥‥‥

빛은 항상 유동적이며 움직인다. 그리고 빛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움직임이다. 빛은 똑딱하는 일 초에 십괄만 육천 마일을 날아간다.
빛은 순수한 속력이다. 그것은 속력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빛보다
빠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빛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항상 동적이다.
항상 움직이고 항상 흐른다.

빛은 극도로 유동적이라서 양 눈의 중간 지점에 사념을 집중하면
저절로 흘러들어온다.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창문만 열어놓고 기다려라. 빛은 극히
유동적인 현상이라서 창문만 열려 있으면 저절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사실 빛은 수많은 삶 동안 그 창문을 두드려 왔다. 그러나 창문이 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강제로 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해뜨는 아침에 잠이나 쿨쿨 자대는 것과 같다. 햇빛이
창가에 와 문을 두드리지만, 그러나 그 두드림은 침묵의 소리요,
그리하여 그렇게 창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창문을 여는 순간 빛은 밀려들어 온다. 그리고 빛과 더불어 생명이 들어오고
생명과 더불어 환희가 들어온다.

양 눈의 중간지점에 사념을 집중하면 빛이 저절로 흘러들어 온다.

'저절로'란 말을 기억하라.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다. 그대는 모든 걸
맡겨 놔버리고 빛에 귀의(歸依)해 왔다.
굳이 노력하여 특별히 중궁( central castle )에 주의를 쏟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몇 마디 속에 중요한 요지(要旨)가 들어 있다.

그대의 전존재를 송두리째 탈바꿈시키는 비밀, 천국의 열쇠, 열반의
비결‥‥‥

'연중(緣中)'이란 극히 오묘한 말이다. 중(中)은 아니 있는 곳이 없어서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 있으며, 창조와 변화의 모든 전개과정에
닿아있다.

그리고 그대가 제3의 눈이 있는 지점에 이르러 중심이 잡히고 빛이
몰아칠 때, 그대는 모든 창조가 일어난 그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형상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 곳에 도달한 것이다. 원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러라.
모든 것이 그 지점, 그 공간에서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의 씨앗이다. 그것이 전지전능이요, 영원이다.
이제 그대에겐 죽음이란 게 없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젊다든가,
늙다든가,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하는 육체에 매어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대는 질병이란 것을 모른다. 질병이 몸에 생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대가 더 이상 동화(同化)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일어나지 않아서이다.
라만 마하리쉬(Rmn Manharshi)는 암으로 죽었다. 그의 몸은 극도의
고통 속에 있었지만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사들은 어리둥절해 졌다.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은 지독한 고통 속에 있는데
그는 지극한 환히 속에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은 거듭거듭 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는 그때마다 대답했다.
"이상해 할 건 없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마치 그대들이 나의 몸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나의 몸을 그렇게 바라볼 뿐이다. 그대들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듯이
나 또한 그렇다. 그대들은 지켜 볼 뿐이고 나 또한 지켜보는 것 뿐이다.
육체는 하나의 대상, 우리들 사이에 놓여있는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은 바깥으로부터 이 몸이 고통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안으로부터 본다. 보는 것이 그대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데 나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겠느냐?"
사실 의사들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매우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슬펐다. 그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으리라. 땅 위를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의 하나인 그를 말이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마하리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밖으로 연결되어 드러난 모든 것과의 연결이 갑작스레 끊어져 그대
내면의 드러나지 않은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자유로의 길이다. 모든
불행과 한계와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지와 관(觀)은 원래 나눌 수 없으며‥‥‥

그리고 이것은 그대가 반드시 거쳐가야만 할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대가 그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하고 싶으면 이 지( fixating )와 관
(contemplation )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定)과 혜(慧.)를 뜻한다. 상념이 떠올라 오면‥‥‥

이제 스승이 주는 두번째의 아주 중요한 충고가 여기에 있다.

완고하게 앉아 있어서만은 안되고 그 상념이 어디에 있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사라지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이것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코 끝을 응시하고
입노라면 상념이 들어을 것이다. 그것들은 수많은 삶 동안 들어온 것으로서
그렇게 쉽사리 그대만 홀로 남겨놓고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상념은
그대의 일부가 되어있고 거의 그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대는 거의
각본이 짜여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대가 계속해서 하고 있는 행위들을 주시해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내일 아침에는 한번 해 보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대가 무엇을
하는가 지켜보라. 어떻게 침대에서 일어나며 어떻게 움직이며 무슨 생각이
머리에 떠도는지 지켜보라.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침마다 똑같은 일, 똑같은 몸짓, 똑같은 표정, 똑같은 생각들을 해댄다.
그대는 하나의 짜여진 각본이 되어있다. 그리고 그대는 평생 그런
짓만 한다. 또 누가 아는가? 앞으로도 수많은 삶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지.
화가 나거든 주시해 보라. 항상 똑같은 과정이다. 그대는 동일한 공간을 통하여
움직인다. 행복할 때도 주시해 보라. 사랑에 빠졌을 때도
주시해 보라. 그리고 사랑이 떠나버렸을 때도 주시해 보라. 그것은 거의
동일한 과정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똑같은 바보짓을 되풀이 해댄다.
똑같은 넋두리들을 계속해서 지껄여댄다.
그대는 깨어 살지 못하고 있다. 그대의 99%가 다른 사람이나 사회나
혹은 그대 자신에 의해서 각본이 짜여져 있다. 그러므로 앉아서 코 끝을
응시하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가 않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이제 우린 이 사람에게 가지말자. 이 가없은 친구를 보게나. 얼마나
깊이 명상에 빠져 있는지. 게다가 그는 코 끝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 지금은 그에게 다가갈 시간이 아니야."
그들은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대가 코 끝을 응시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대가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 강하게 달려들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난다. 사람들이 앉아 명상을 할 때면 일상적인 일을
할 때보다도 더 많은 상념들이 의외로 많이 폭발한다. 수백만 가지』
생각이 돌진해 온다. 그대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념들을 그대가
제거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에게 괴로운 시간을 안겨」 줄 것이다.
그래서 생각들은 들어오게 되어있다. 그 상념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뭔가 손을
해야 한다. 싸우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싸우기 시작하면 코 끝을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제3의 눈에 대한 얼차려, 빛의
도전을 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념의
티끌 속에 갇혀버릴 것이다. 사념을 쫓기 시작하면 그대는 갇혀버린다.
그들을 따라가도 갇혀버리고 그들과 싸워도 갇혀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비결이다. 붓다도 똑같은 비결을 사용하였다. 사실 비결들은
거의 같다. 인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자물쇠가 같을 때는 열쇠도
같아야 하는 것이다. 비결은 이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삼마사티
라고 불렀다. 올바른 기억(正念), 그냥 기억만 하라. 생각이
다가온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라.
오고 머물고 가는 것을 주시하라. 아무런 거부감이나 판단이나 비난 같은 것을
하지 말고 마치 과학자들이 사물을 들여다 보듯 객관적이 되어라.
상념들은 매우 유동적이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상념이 일어나는 것과 얼정거리는 것과 꺼져버리는 것을 주시만 하면 된다.
싸우려고 하지도 말고 쫓아가지도 말고 그냥 고요한 관찰자가 되어라.
그러면 놀라게 되리니 지켜보는 행위가 정착되면 될수록 상념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 지켜보는 것이 완전해지면 사념들은 사라져 버린다.
거기에는 공간만이, 틈바구니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요점을 기억하라. 마음은 속임수를 쓸 수도 있다는 것.

더 깊게 추구해봐야 얻는 것은 없다.
깊게까지 심사숙고 하려고는 하지 말라. 그것이 프로이트식 정신분석가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연상( free association ), 생각이 하나 들어온다.
그대는 다른 생각이 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린다. 그렇게 해서
연쇄적으로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정신분석가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과거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생각은 다른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무한히( ad infinitum ). 거기에 끝이라곤 없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한 여행을 끝도 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것이다.

더 깊게 추구해 봐야 얻는 것은 없다. 상념이 어디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주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그 너머까지 추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마음을 밝혀 낸다는 것, 의식으로 의식 너머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식으로 의식 너머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헛수고는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이것에 끌리고 저것에 끌려
그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 버릴 것이다. 코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제3의 눈도 잊혀지고 빛의 회전도 아득한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 생각에 그치는 정도여야 한다. 꼬리를 물어서는 안된다.
하나의 생각이 일어난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어디에 있는가를
어디로 가는가를 지켜볼 때 그 생각은 사라져 버린다. 명심하라.
불교도들은 하나의 생각이 일어날 때 이렇게 외친다.
"사념이다. 사념이다. "
깨어있기 위해서 말이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모두가 깨어나도록
도둑이야, 도둑이야."하고 외치듯이 그냥 "사념이다. 사념이다. "하고 외침
으로써 그대는 깨어나 얼차리게 될 것이다. 도둑이 들어오거든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라.
그대가 얼차리는 순간 사념은 정지할 것이다. 녀석은 약간 움찔하여서
놀라 그대를 쳐다볼 것이다. 전에는 그대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약간 불편해질 것이다.
"이 사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는 그렇게 고분고분하더니
이제는 도둑이야, 도둑이야, 사념이다, 사념이다 라고 외치고
있잖아. 이거 어떻게 된거 아냐?"
사념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녀석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이 사람 돌아버렸군. 코 끝을 바라보면서 사념이다, 사념이다 하고
외쳐대고 있으니 말이야."
얼차려는 사념을 잠시동안 정지시킬 것이다. 녀석들을 꽁꽁 묶어
응시할  것이다. 계속해서 지켜보라.
비난하지 말라. 내던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비난이나 판단이 그대로 하여금 그 생각에 들러붙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냥 거기에 머물면서 생각들을 바라보며 얼차리라. 그러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왔던 것과 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상상으로부터 와서
상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것이 일단 사라지면 그대는
다시 선정(禪定)으로 되돌아온다. 그 근원에까지 쫓아갈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그대는 존재의 근원에까지
가야 하리라.
정신분석에는 끝이 없다. 그것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 완전히
심리가 분석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분석될 수가
없다.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해서 무려 칠 년간이나 정신
분석가를 찾아 다닌 사람을 그대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신분석이 완결되어 그 짓을 그만둘 것 같은가? 아니다.
그들은 정신분석가들에게 지치고 정신분석가들도 그들에게 지쳤다.
그러나 어떤 정신분석가도 완전한 적이 없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은 끝이 없는
양파이다. 껍질을 계속해서 벗기고 또 벗겨도 끝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움은 된다. 그대로 하여금 보다 시히와 그대 자신에게 잘
적응하게 해 준다. 그것은 그대를 변형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대를
정상적인 바보로 만들어 줄 뿐이다. 그게 전부이다. 그것은 그대가
소속되어있는 병든 사회에 그대를 잘 적응하게 해 줄 뿐이다. 그대를
탈바꿈된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것에
좋든 나쁘든 순응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질질 끌려다니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뿐이다. 삶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수용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수용에는
언제나 환희가 따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야기했다.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고 기껏해야
편안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다 편안한 삶이 가능하다. 그게 전부이다.
그러나 행복은 불가능하다.
사실 그것은 정신분석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행복한 사람들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보아 왔다.
붓다, 노자, 크리슈나, 이런 춤추는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프로이트는 행복하지 않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정신분석을 집어
던져 버리고 명상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그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명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몇 번의 삶이 더 필요할 것이다.
사실 그는 명상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같은 사람도 두려워했다. 융은 이
책 『태을금화종지』에 대한 논평을 썼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일 뿐
실제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 그 자신이 명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실제적인 일을 알겠는가? 게다가 그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은 명상의 문턱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기심을
던져버려야 하기 때문에 명상을 하기 쉽지 않다.
라만 마하리쉬가 살아있는 동안 융은 인도에 왔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권했었다.
"당신은 삶의 내적인 신비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인도에 왔는데 왜
라만에게 가보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태을금화종지』에 대한 논평을 썼고
여기에는 황금 꽃이 활짝 핀 사람이 있습니다. 라만에게 한 번
들러 보시지요 ? "
그러나 그는 결코 가지 않았다. 그는 인도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라만에게만은 가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두려워서였을까?
이 사람, 이 거울과 마주 대한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융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융은 사진에서조차 그의 에고가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융만큼은 이기적이어 보이지 않는다. 융의 이기적인
성격때문에 아마 그는 그의 스승 프로이트를 배신하고 떠나 버렸을 것이다.
그의 사진을 한 번 봐라. 그의 교활하고 타산적인 눈하며‥‥‥
마치 누구에게라도 달려들듯이 극도로 이기적이다. 하지만 아주 영리하고
지적이고 능수능란해 보인다.
기억하라.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 기타 그 부류들은 그대를 행복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뜨뜻미지근하게 적웅해나가는 삶
만을 일러 줄 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환희의 불꽃으로 타오르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힘을 넘어서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계속해서 상념들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분석은 필요가 없다.
그래서 비결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쉬게 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바른 관(觀)이요,

우리는 전존재를 완전한 휴식의 상태에 가져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분석은 완전한 휴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흔돈만 불러 일으키고 쉬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외의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분석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으로는 어디에도 이를 수 없다. 상념이 끊임없이 흐를 때는 그것을
멎게 하고 관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두 날개이다. 첫째, 틈
만이 존재하고 사념이 오지 않을 때는 선정에 들라. 그리고 사념이 들어 오거든
이 세 가지를 살펴보라. 사념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잠시 동안 틈바구니를 보는 것을 멈추고 그
사념들을 지켜보고 나서 작별을 고해라. 녀석들이 사라지거든 다시
돌아와 선정에 들어라.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대가 지나가고 있는 차 사이의 공간을
지켜보고 있을 때 차가 다가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차를 바라
보겠지만 관심 따위는 갖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만들었으며, 제작년도가
언제며, 색깔이 무엇이며, 운전수와 승객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분석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차가 지나가는 것만 주목할 것이다. 다가온 차는 그대 앞을 지나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다시 그대는 공간에 관심을 갖는다. 그대의 모든 관심은
공간에 가 있다. 그러나 차가 와서 잠시 그대는 거기에 신경을
쓰는 것 뿐이다. 그리하여 차가 사라지면 그대는 다시 휴식과 선정의
공간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상념이 끊임없이 흐를 때는 그것을 멎게 하고는 관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관한 다음에 다시 멎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멎게 하라. 생각이 사라지거든 다시
선정에 들어라.
이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을 위하여 정(定)과 혜(慧)를 동시에 닦는
방법(定壽.雙修)인 것이다. 이것을 회광이라고 한다.

선정에 들 때는 언제나 빛이 몰려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고정됨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원이 만들어질 펏이다. 빛의 회전이 있을 때마다
이들은 모두 필요하다.

이것을 회광이라고 한다. 회는 지요, 광은 관(觀洲)다.
주시罐譏가 없는 멈춤은 빛이 없는 회전』回1이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 비극이 하타 요가( Hatha Yoga )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고정시키고 집중하지만 빛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들은
손님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집단장을
할 뿐이어서, 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왜 집을 단장하는지 그렇臺
누구를 위해서 하는지는 망각해 버렸다. 하타 요가의 수행자는 끊임없이
자기 몸을 예비하고 정화하며 요가 아산나를 취하고 호흡수련을 하는 등
극성맞을 정도이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하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빛은 바로 곁에 있는데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빛은
완전히 자신을 놔버린 상태에서만 들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시가 없는 멈춤은 빛이 없는 회전이다.

이것이 소위 요가 수행자라고 하는 삶들에게 일어나는 비극이다.
다른 종류의 비극은 정신분석가나 철학자들에게 일어난다.

멈춤이 없는 주시는 회전이 없는 빛이다.

그들은 빛에 대해서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흘러들어 오도록 예비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빛에 대해 생각만 할 뿐이다. 그들은 손님에 대해
생각을 하며 수천 가지의 상상을 해댄다. 그러나 그들의 집이 준비되지  않았다.
양자를 다 놓쳐버린 것이다. 스승은 당부하고 있다.

이것을 유념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놓쳐 버릴 수도 있다. 예비하고 기다려라. 준비하라.
코 끝을 응시하면서 제3의 눈에 얼차리고 척추를 똑바로 세운 체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라. 그것이 해야할 전부이다. 더 이상의 것은
필요가 없다. 수년 동안 요가 자세를 수련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요가 행자들은 그렇게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다. 지성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몸은 강건해서 오래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빛이 없는 삶이란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허우적
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오래 살든 단명하든 아무런 차이도
나지 않는다. 핵심은 단 한 순간이라도 ◎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한 순간이 영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세상에는 빛에 대해서 계속 머리를 굴려대는 철학자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정의가
가장 최선의 것일까? 그들은 계속해서 이론과 도그마와 사상의 체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자신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빛은 바로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을 유념하라.

이러한 두 가지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 그대가 만약 깨어 있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똑바로 알아듣는 사람은
단 한 순간에 다른 종류의 실존 속으로 뛰어든다. 하나님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그대 자신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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