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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혼의 새벽을 향하여>>

narrae 2013. 12. 24. 07:36

<<8 .영혼의 새벽을 향하여>>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혼침과 산란의 두 가지 병증은 매일 끊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만일
정좌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산란한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마음의 산란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것을 제거하는
기회가 된다.
알아차리는 혼침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혼침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혼침이 진정한 혼침이다. 알아차리는 혼침은
완전한 혼침이 아니다. 그 속에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명료함이
있기 때문이다. 산란은 정신이 바깥으로 떠돌 때 온다. 혼침보다는
산란을 치유하기가 훨씬 쉽다. 그것은 마치 병에 걸렸을 때와 같다.
통증과 병기(病氣)가 느껴지면 약으로 구제할 수가 있지만 혼침은 마치
알아차리지 못하는 질병과도 같다. 산만(散漫)한 것은 조치가 가능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정리될 수 있지만 혼미(昏迷)하고 침침(沈沈)
한 것은 무겁고도 어둡다. 산만과 혼란은 최소한 그 처소(處所)가 있지만
혼침의 경우는 넋(魄 : anima)만이 활동한다. 산란의 경우는
혼(魂:animus )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혼침의 경우는 완전히 어둠이 지배한다.
명상 중에 졸리게 되는 것은 혼침의 작용이다. 조식(調息)만이
혼침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비록 코를 통한 호흡이 진식(眞
息)은 아니지만 진식의 들고 남도 그것과 결부되어 일어난다.

그러므로 정좌하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마음을 고요히 하고 기를 응집시켜야 한다.
어떻게 마음을 평정시킬 것인가? 호흡으로이다.
마음은 오로지 숨이 들고 나가는 것만 의식해야 한다. 숨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 들리지 않게 되면 가늘어지고 가늘어지면 맑아진다.
거칠어지면 탁해지고 탁해지면 혼침이 생겨나서 졸음이 오게 된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호흡하는 동안 마음을 올바로 쓰는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씀이 없는
씀(不用의 用)이다. 이른바 듣는 일을 아주 가볍게 주시하는 것
雌諦이다.
이 문구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듣는 일을 주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눈빛(限光)의 자연스러운 조사(照射)이다. 눈은
내면만 응시할 뿐 바깥은 바라보지 않는다. 바깥을 보지 않고도 밝게
감지한다는 것은 내면을 응시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실제로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귀의 빛(耳光)을 자연스럽게 듣는 것이다. 귀는
안으로만 들을 뿐 바깥 물건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바깥 물건에 귀기을이지 않고
밝게 감지한다는 것은 안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내부의 어떤 것에 귀기울이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렇게 듣는 것이 소리없는 소리(無聲의 聲)를 듣는 것이요, 이렇게
보는 것이 모습없는 모습(無形의 形)을 보는 것이다. 눈이 바깥을 보지 않고
귀가 외계(外界)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닫혀서 내면으로
침잠해버리는 성질이 있다. 안으로 듣고 귀기울여야만 감관(感
管)이 바깥으로 향하지도 않고 내면으로 침잠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해서
혼침은 제거된다. 그것이 해와 달의 정(RR精)과 빛(日月光)의
교합(交合)이다.
만약 혼침으로 말미암아 졸음이 오면 일어나 걸어다니라. 마음이
맑아지거든 다시 정좌하라. 시간이 지나면 성과가 있어 혼침과 졸음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느 무더운 오후 올빼미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는데 고니 한
마리가 날아와 곁에 앉으면서 말했다.
"어휴, 정말 푹푹 찌는군, 여보게 올빼미. 저놈의 해 때문에 온통
땀에 젖었지 뭔가."
그러자 올빼미가 말했다.
"뭐라구?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해라니? 그리고
푹푹 찌다니? 어둠이 몰려들면 뜨거워지는 법이 아닌가? 자네가 말하는
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쳤나? 아니면 어떻게 됐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겐가? 해 같은 건 없다네. 여태껏 없었어.
뜨거워지는 빛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결코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네 어둠이 몰려들면 뜨거워지는 법이 아닌가. 자네는
지금 나를 놀리는 거지 ? 그러나 나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니야.
모든 경전들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
고니는 이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고니는 어떻게 하면 이 늙은 장님
올빼미에게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보게, 친구. 나는 내 눈으로 볼 수가 있다네. 한낮이 되면 태양이
아주 밝게 빛나면서 뜨거워진다네. 자네는 그것을 어둠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네. 어떻게 하면 자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지 근심이군."
올빼미가 대답했다.
"그러면 함께 가보세. 저기에 가면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많은 올빼미와 위대한 학자들도 있다네. 그들에게 물어볼 수 있을 걸세.
그들은 경전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몇몇은 아주
학식이 풍부하다네. 자 어서 가세."
그들이 날아간 곳에는 많은 장님 올빼미들이 앉아 있었다. 그 올빼미는
이야기했다.
"이 고니가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하지 뭡니까. 한낮이 되면 태양이
내리쬐면서 빛이 사방에 퍼져 뜨거워진다고 말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의 부모와 그 선조와 그 선조의
선조와, 사실은 우리 올빼미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느 누구도
태양같은 것은 본 적이 없어. 그러므로 태양 따위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겠어? 너는 단지 속고 있을 뿐이야. 그에게
귀기울이지 마라. 그는 미쳤거나 아니면 사기를 치고 있는 거야.
그는 우리의 종교를 부패시키려 하고 있어. 우리는 항상 어둠 속에
살아왔고 어둠을 숭배해 왔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기반이야.
그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파괴하고 말거야. 그는 바로 그런 종류의 녀석이야.
만약 원한다면 우리는 다수결로 투표를 해 줄 수도 있어."
한 올빼미가 일어나 외쳤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존재하는 건 어둠입니까? 빛입니까?"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대답했다.
"어둠,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
"그러면 뜨거운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너무 어두워서 그렇다. 어둠의 작용으로 열이 생겨나는 것이다. "
그들은 계속해서 외쳤다.
"그를 여기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는 우리의 종교와 전통과 소중한
우리의 과거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그를 즉각 내쫓아라. 그는
완전히 눈이 멀었거나 아니면 180도 돌아버렸을 것이다. "

이 조그만 우화는 진리의 일면에 대하여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첫째, 진리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전달해 줄 방도가 없다. 나의
진리는 나의 것일 뿐이다. 그것에 대하여 그대에게 말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말해 주는 것이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니다. 듣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눈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스승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설법이 아니라
그대가 눈을 뜰 수 있도록, 그대가 영혼의 창을 열고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내 눈이 그대를 대신해서 보아 줄 수는 없으며
내 발이 그대를 대신해서 걸어 줄 수도 없고, 내 날개로 그대를
대신해서 날아 줄 수도 없다. 그대는 그대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다
그대의 죽음을 맞아야 한다.
이것이 기억해두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일들 중의 하나다. 그렇지
않으면 참 지식이 아닌 위조에 불과한 빌어온 지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식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대는 속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빌어온 지식으로 저주 아래 떨어져 살아간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마치 앵무새처럼 성경이나 코란이나 기타(Gita)를 암송해 덴다.
그것은 장님 올빼미들이 코란이나 기타나 성경 따위를 암송해 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경험이 아니다. 그들의 경험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들의 경험은 오히려 기타나 성경이나 베다나 법구경
(Dhammapada)이 말하는 진리를 부정하고 있다. 그들의 경험으로 보면
붓다는 미친 놈이요 예수는 사기꾼이며, 소크라테스는 영리하기裝
하지만 그 역시 그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들기 때문에 귀기울일 놈은
못된다.
인간은 눈이 멀어서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종교를 말이다. 눈이 먼 자들은 하나를 볼 수 없고 다수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종교, 이 조그만
지구상에 무려 300개가 넘는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이야기한다. 우리의 진리만이 참 진리이며, 우리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요 그외는 다 가짜이며, 다른 진리들은 조식에
불과하고 다른 모든 길들은 황무지에서 끝나지만, 우리의 길만은
낙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이다.
이 300개가 넘는 종교들은 계속해서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보지 못하며, 아무도 실제와
얼굴을 마주 대하지 못한다. 그들은 믿어왔다. 이것들은 종교가 아니라
전통들이다. 그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들으면서 믿어왔다.
믿는 것은 편하지만 발견을 위하여 모험을 감행하자면 목숨이 달려있게 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탐험은 위험하지만 믿는 일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간편하다. 그대는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에게 주어져있다. 그러나 그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비참하다.
직접적인 하나님만이 하나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진정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경험도 진정한 삶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붓다는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도가 된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확실히 아니었다.
예수도 보고 만나 깨달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기독교도가 되는 것은
정말 바보 멍청이 짓이다. 그대가 그리스도(:구세주)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참 종교인은 전통에서 벗어나며,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간접적인
신이나 믿음들을 여의고, 진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젖히고
수용적이 된다. 그는 확실히 실행하는 자이며 실제로 해 본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몸소 해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믿는 자들은 해
볼 필요가 없다. 진리를 묻고 찾고 캐내려는 자들은 몸소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거기에 제거되어야 할 많은 일들과, 떨어버려야 할
많은 불순한 것과, 극복되어져야 할 많은 장애와 방해들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눈은 뜨여져야 하고 귀는 마개가 뽑혀져야 하며 가슴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존재와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완전히 존재 속에 어우러질 때 그대의 눈은 열리고 그때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변형이며, 그대를 송두리채 바꿔놓는
것이다. 보는 것, 그것은 새로운 안목이요, 새로운 삶이며 새로운 모습이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육체나 마음, 기타 어떤 것에도 구속당하지
않게 된다. 그대는 한정됨이 없이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대 속에
흐르고 있는 영원에 대한 자각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
끝없는 과거와 끝없는 미래로 펼쳐지는 이 무한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 있는 신성(神性!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간접적이 될 수 없다.
홀로 탐구해야 하며 찾는 것은 진정 개인적이어야 한다. 진리는
다수결 투표로 결정될 수 없다. 진리는 완전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대들은 나의 몸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객관적인 현상이다. 이 몸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판가름이 난다. 그러나 내가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가 없다.
하물며 다수결 투표 따위로 결정될 수 있겠는가? 붓다가 붓다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다수결로 결정을 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순수한 선언에 의해서이다. 자신 외에 증인이라곤 없다. 그것은 완전히
사적인 일이며 어느 누구도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진리란 다수결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그래서 종교들은 신도들을 모으는데 그토록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신도수가 많아지면 진리가 더 불어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들의 많은 신도수로 해서 자이나교보보다
더 많은 진리를 지껄여댈 수 있다. 만약 투표라도 있게 되면
기독교는 승리하고 자이나교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투표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천 마리나 되는 올빼미들이 어둠만이 있을 뿐
태양은 없고 빛은 존재해 본 적도 없었노라고 결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거짓으로 남는다. 환한 낮이란 걸 선언하는데는 고니
한 마리면 족한 것이다.
진리는 민주적인.합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카톨릭에서는 산아제한에 반대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어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란 것은 산아제한이 허용되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것 때문이다.
인구야말로 그들의 유일한 힘이다. 그들은 인구를 계속 증가시켜
어느 날에 가서는 세상에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보라, 우리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쪽 진리가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
나는 그대들에게 조오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유명한 말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가 누군가와 다투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말했다.
'◎러나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믿고 있소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틀릴 수 있단 말이요?"
버나드 쇼는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소.
내 이야기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옳을 수 있냐는 거요."
핵심을 잡아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옳을 수 있겠는가?
군중들은 장님이며 깨닫지도 못했다. 진리는 항상 소수와 함께 하여 왔다.
붓다가 출현했을 때도 그는 혼자였으며, 예수가 예루살렘을
거닐 때도 그는 혼자였다. 소크라테스 또한 그랬다. 물론 몇몇 찾는 이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학파가 형성되긴 했지만 그 학파 역시
소수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배짱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누구를 위로해주려고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의 모든 위안들을 걷어내 버리고는 그대의
모든 환상들을 산산조각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대가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강제로라도 그대의 눈을 열게 할 것이다.
그대가 잠자도록 자장가 같은 것은 불러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붕 꼭대기에서 "이놈 ! 어서 깨어나라."하고 외칠 것이다.
그대에게 충격을 주면서 두들겨 패기까지 할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 프라데빠(Pradeepa)가 나를 보러 왔다. 물론 질질
짜면서. 그런 그녀를 나는 무지막지하게 나무래주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머리를 그렇게 망치로 두들겨 패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나를 의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해서
나에게 성가시게 굴어왔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착잡해져 있었다.
그래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 특히 그녀에게 말해야겠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심하게 꾸짖기 때문에, 내가 그대들을 거칠게 대할 때마다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정말로 성장하려고 할 때, 그때만
채찍을 드는 것이다. 그대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런 일은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채소가 아닌 음식은 먹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라데빠에겐 그걸 먹지 말라고 아주 심하게 말했다.
그녀의 의식은 성장하고 있다. 이제 채소가 아닌 음식은 방해가 되기에 이르렀다.
높이 날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짐을 져도 된다.
그러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한 사람들은 모든 불필요한 짐들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대의 에너지가 순화되면 순화될수록 그대는
거기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귀중한 에너지는 잃기는 쉽지만
얻기는 매우 어렵다. 잃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온갖 바보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상관이 없다. 그들의
전존재가 바보짓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모두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대들이 성장하면 할수록 더 많온
것들을 내가 요구하게 되리라는 것.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인도에는 가장 뛰어난 천재적인 위대한 화가 한 사람이 있었다. 난
다랄 보제(Nandalal Bose), 그는 또 다른 천재적인 스승 아바닌드라
나쓰 타고르(Avanindrana燃 Tagore)의 제자로 있었다. 아바닌드라나
쓰 타고르는 라빈드라나쓰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삼촌이었다.
어느 이른 아침,아바닌드라나쓰와 라빈드라나쓰는 함께 차를 들면서
한가롭게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잇었다. 그때 난다랄이 크리슈나의
그림을 한 장 그려가지고 들어왔다. 라빈드라나쓰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여태껏 그렇게 아름다운 크리슈나의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크리슈나의 상은 언제라도 그림에서 뛰쳐나을 것만 같았다.
그의 피리에서는 언제라도 아름다운 가락이 흘러나을 것만 같았다.
정말 멋진 그림이었다. "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그 그림을 지켜보더니 그것을 집 밖으로
집어던져 버리고는 난다랄에게 말했다.
"크리슈나의 그림을 그렸다는 게 겨우 이 따위냐? 벵갈에 있는 삼류
화가라도 이 보다는 잘 그릴 것이야."
라빈드라나쓰는 어리둥절해졌다. 라빈드라나쓰는 삼촌의 그림솜씨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삼촌도 평생 동안 크리슈나의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촌이 그린 어떤 그림도 난다랄의 그림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난다랄의 그림이 훨씬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난다랄은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의
발을 만져 예를 취하고는 그 후로 삼 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라빈드라나쓰는 삼촌에게 물었다.
"그 불쌍한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셨읍니까? 그의 그림은 최고였는데요."
그러면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맞다. 그의 그림은 최고다. 나라도 결코 그렇게까지는 그릴
수 없을 것이다. "

그리고 난다랄이 떠난 후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그의 그림을 항상
그의 방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라빈드라나쓰는 물었다.
"그러면 왜 그에게 심하게 하셨나요?"
아바닌드라나쓰는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 이상의 기대를 걸고 있다. 이것은 그가
훌륭한 그림을 그렸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그는 그 이상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
그리고 삼 년 동안을 난다랄은 벵갈의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 다녔다.
그의 스승이 벵갈에 있는 삼류 화가라도 그 보다는 잘 그릴
것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삼 년 동안 벵갈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삼류화가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다시 스승 앞에 나타나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스승님이 옳았습니다.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그림을 던져버리기를 잘 하셨습니다. "
아바닌드라나쓰 타고르는 그런 그를 껴안고 말했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늙었고 네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가슴을 조여야 했었다. 돌아와 주어 다행이다. 너의 그림은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았던 게야."

그대들 속에 있는 보다 큰 가능성을 볼 적마다 나는 그대들을 심하게
다룰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대들과 내게 여기에 함께 머물고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잠재적인 모든 것들이 드러나 높여
비상할 수 있도록 나는 그대들의 심연까지 일깨워야 한다. 아직 그대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모른다. 나는 알고 있지만‥‥‥ 그러므로 내가
어떤 요구를 할 때마다 고맙게 여겨라.
그대는 선(Zen)수도원에서 스승이 그의 지팡이로 제자를 때릴 때마다
맞은 제자는 일곱 번이나 절한 후 스승 앞에 엎드려 감사한다는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언제 맞게 될까, 스승이
역정을 내며 지팡이로 머리를 때리는 그 축복의 순간이 언제 올까
하고 기다린다. 그들은 꿈꾸고 기도하면서 그 축복의 순간이 올 날을
희망하는 것이다.
명심하라. 이곳은 하나의 연금술 학원이다. 그대들은 여기에 들어
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기 위해서 있다. 그리고 변화에는
고통이 따른다. 왜냐하면 많은 옛것들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끄 옛 잡것들은 그대가 쉽게 벗어 버릴 수 있는 옷과는 다르다.
그것은 피부나 마찬가지다. 피부가 벗겨지면 상처가 난다. 그러나
그것만이 그대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길이요, 충격을 회피하는
마음을 부숴버리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대를 부자유하게 하고 있는
기운을 깨뜨려 버리는 유일한 수단이다.
서서히 그대 자신의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면 그대의 눈은 열리고
귀는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직접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항상 이것을 염두에 두어라.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만이
진리라는 것, 그것은 다수에 위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전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의해서만 결정될 뿐이다.
올빼미들에게는 고니가 완전히 미쳐 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식이다. 석가도 미쳤고 모하메드도 미쳤으며 짜라투스트라도 미쳤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올빼미들이 고니를 내쫓고 추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만약 그 고니가 나무에 함께 살게 된다면 그는
그들의 전통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 살면서 어둠을 믿어왔다. 어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었고
모든 의식들은 어둠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들의 성직자들은 어둠을 찬양하였고
그들의 학자, 현인들은 어둠에 관해서 위대한 저서들을 남겼다.
그들의 모든 철학은 어둠이라고 하는 기본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철학 속에는 태양이라든가, 빛이라든가, 낮이라고 하는
주제가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 미친 고니가 나타나서는
그들의 세계에 어떤 낯선 사상을 침투시키고 오염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조직이 붕괴될 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밖힌 것은 그 때문이며 사람들이 그토록 나를
반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새로운 형식, 새로운
꼴, 새로운 삶의 방식, 그리고 진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주려는 것이다.
나는 존재에 이르는 새로운 문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생활방식에 많은 것을 투자했던 사람들은 자연히 나에게
화를 내게 되어 있다. 그것도 거의 미칠 정도로 말이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세계로부터 없애버리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이다.
그것은 아주 당연하고도 단순한 일이다. 그대가 그것을
이해한다면 폭소가 터질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왜? 그리고 어떻게 영혼의 존재를
믿으며 왜 믿는가? 이유는 똑같다.
"우리의 조상 대대로, 그리고 사실은 우리 사회의 어느 누구도
태양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태양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속지말라. 그는 사기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종교를 타락시킬 것이다.
그대는 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도만의 하나님이다. "
라든가 또는
"하나님은 힌두교도만의 하나님이다. "
이런 소리는 조상 대대로 들어왔다. 온갖 소문과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사실 그대의 부모도 모르고 그대도 알지 못한다.
이제 용기를 가지고 그대 자신의 지식이 아닌 모든 것들을 털어버려라.
이것이 산야신이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다. 이것이 진리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다. 모든 선입관을 떨쳐버리고
모든 선험적(a priori) 관념들을 던져버려라. 기초부터 시작하라.
마치 아담과 이브라도 된 것처럼, 그래서 어떠한 전통이나 경전도 없는
것처럼 ABC 부터 출발하라.
로렌스(D.H. Lawrence)가 언젠가 했던 말. 나는 거기에 있는 말에 동의한다.
"세상의 모든 경전들이 없어지고 나면 그때에야 사람들은 종교적이
될 것이다. "
모든 전통들이 간단히 제거될 때, 그때에야 약간의 희망이 있게 될
것이다. 전통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누가 애써 탐구하겠는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전통이 모든 것을 제공해 주는데 무엇 때문에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실제를
알게 되고 그대는 단순히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정반대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다는 것은
바뀌고, 탈바꿈되고, 빛나고 영원한 다른 차원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문들은 믿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실험되어져야 한다.
이 경문들은 그대의 존재를 가지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간단한
실마리들이다. 그대가 공부해 보지 않으면 그대는 계속해서 요점을
놓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몸을 위대한 실험실로 보고, 그대의 삶을
실제에 이르는 위대한 모험으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매우 주의깊고 예민해져야 한다.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 경문들이 열쇠가 된다. 그대가 실제로 자신에게 실험을 해 보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존재 속에 위대한 보물과
바닥나지 않는 보화를 가진 황제이다. 그러면서도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혼침과 산란의 두 가지 병증은 매일 끊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성공이란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면 그것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다.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라.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면 그대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수행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 그대의
마음은 미래에 가있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한 나이
모습은 어떤 것일까? 붓다가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아름다움과 축복과
환희가 함께 될까? 이런 꿈들을 이미 꾸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탐욕과 야망과 사욕의 게임에 놀아나고 있다. 결코 성공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라. 성공이란 자연적인 부산물이다.
그대가 진실로 수행에 임한다면 성공은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그대를 따를 것이다. 성공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조사깨서는
성공이나 실패 따위에 연연해하지 말고 고요히 수행에 임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심하라. 그대가 지나치게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면 그만큼
실패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것이다. 그들은 한패가 되어 나란히 있게
될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서로 나누어질 수가 없다. 성공에 대해 마음을 쓰면
어느 한구석에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누가 아는가? 혹시
그대가 실수하게 될지.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공은 그대를 미레로
데려가고 탐욕과 사욕과 야망의 게임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두려움
또한 그대를 떨게 하고 흔들리게 한다. 그대는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대를 방황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황과
탐욕과 야망으로 그대의 공부는 고요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대의 공부는
혼란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그대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눈은 다른데 먼 곳에 가있을 것이다.

천문(天文)을 공부하던 그리스의 한 점성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별이 초롱초롱한 어느 날 밤 그는 우물에 빠졌다. 별을 쳐다보면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별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정작 우물 곁으로 다가가더니 기어이
퐁당하고 만 것이다. 그 때 근처에서 살던 어떤 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왓다. 그녀는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는 밧줄을 갖다 그 유명한
점성가를 꺼내 주었다. 점성가는 아주 감사해 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모를 터이지만 나는 특별히 국왕께서 임명한 왕실 점성가라고
나는 보수가 아주 많고 갑부들만이 내게 와서 점을 칠 수 있소.
그러나 내 목숨을 구해준 그대인고로 내일 오면 내가 점을 봐 주겠소.
별자리와 손금과 사주팔자를 보면 그대의 미래가 훤할 것이오"
그러자 그 부인은 웃기 시작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잊어 줘요 바로 한 발자국 앞에 우물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거예요? 개똥 같으니라구."

너무 앞만 내다보지 말라. 그러면 지금 디뎌야 할 발걸음을 놓치게 된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듯이 성공은 저절로 온다. 맡겨 놔버려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무위로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인도의 카르마(Karma) 철학의 전체이다. 응답받지 못하거나
처벌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잘못을 저지르면 벌은
그림자처럼 따른다. 선한 일을 하면 거기에 대한 보응이 뒤따른다.
거기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생각할 필요도 전혀 없고, 티끌만큼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은 자동적이다.
길을 걸을 때 그대는 그림자를 계속해서 바라보는가? 그것이 따라오는가
그렇지 않은가 해서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림자를 바라보며
걷는다면 그대는 그를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림자는 따라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그와 같이 그대의 공부가 올바르면
그 올바른 노력과 그대의 존재 전체로 인하여 보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공부인가? 첫째,

혼침과 산란의 두 가지 병증은 매일 끊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혼침이란 게으름과 타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 내면의 여성적인 면에
기인한다. 여성적인 면은 그 수동성으로 인하여 게으르다.
다른 하나는 산란이다. 그것은 남성적인 면에 기인한다. 남성적인
마음은 쉴새없이 움직이려고 한다. 그것은 한꺼번에 수천 가지의
일을 하려고 한다.
까위의 작품에 나오는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명, 몇 명 혹은 여러 명에도 만족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다. "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남성의 마음이다. 여자는 한 명의 남자로涉 .
하지만 남자는 여러 명이 되어도 만족하지 못한다. 여자의 만족과 남자의
불만족은 당연한 일이다.
양쪽 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만약 여자가
자신의 수동성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무기력한 상태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자들의 창조물이
많지 않고 또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대는 위대한 여자 화가나
시인, 또는 과학자들을 발견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것은 남자들이
가로막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자유가 주어지.
여성들이 해방되어진다 하더라도 무기력은 이미 여성 존재의 일부이다.
여자는 행위보다는 존재하는 모습에 더 관심을 쏟는다. 이러한 관심은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하기 나름이다. 이 안정:
상태가 명상적인 것이 될 때, 그리하여 존재에 대한 조화와 만족을
늘낄  때, 그것은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열이면 열, 백이면 셋이
무기력으로 떨어지고 만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어떻게 누려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 축복이 가혹한 저주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남성적인 마음은 휴식을 모른다. 그것은 매우 창조적이어서 거기에
축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창조적이
되기 보다는 파괴적이 되어온 것이다. 축복이 저주로 변했다. 남성의
쉴 줄 모르는 마음은 그를 매우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하며 긴장하게
만들어 왔다. 마음은 끊임없이 들끓고 거의 미칠 지경에 처해 있어 왔다.
어떻게 해서 자신을 계속 억제하고는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그래서 조그만 구실만 있어도 그것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휴식을 모르는 마음으로 인하여 남자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잃어버렸다. 여자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여자를 지켜보라.
그걷고 앉는 모습을 지켜보라. 거기에는 우아함이 있다. 그녀의 존재 가운데는
미묘한 침묵과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그녀의 파장에서 그것이
느껴진다. 여자가 없는 집안은 혼란스럽다. 홀아비가 혼자 살고 있는 집에
들어서면 금방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요,
제자리에 놓여 있는 물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한 모습이
드러난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로
그 집에 여자가 사는지 안사는지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여자가
사는 집에는 어떤 우아하고 정교한 멋과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문학적인 색깔과 음악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남자 혼자
살고 있는 집에는 신경질적인 기운이 집을 감싸고 있다.
올바로 쓰여지기만 한다면 이 두 가지는 매우 아름답다. 여성적인 면은
우아함을 주고 남성적인 면은 창조적인 태도를 줄 것이다. 그 우아함과
창조성이 녹아 없어지는 곳에 그대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붓다, 미라(Meera), 테레사(Teresa), 예수, 그리고 막달라
(Magdalence)의 경우처럼 그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보통은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난다. 두 개의 부정적인 면, 즉 남성의 쉴 줄 모르는
신경증과 여성의 무기력증, 이렇게 둘이 만나 가장 추악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말을 염두에 두어라. 내가 남자와 여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그것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각의 남자는
내면에 남성만큼이나 여성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모든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단순히 남자만이 아니며 여자도 단순히 여자만은
아닌 것이다. 거기서 한쪽 면이 더 우세한 것 뿐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남성적인 면이 두드러질 때, 혼(animus)이 』
식이 되고 넋(anima)이 무의식에 머물때, 그대는 남성이다. 그대가
여자라면 그것은 넋이 의식이 되어 여성적인 면이 두드러지고 남성적인
부분, 즉 혼은 무의식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면은 항상 같이 존재한다. 전기가 양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 모든 존재도 양극을 필요로 한다. 남자와 여자, 음과 양, 양극3
음극, 쉬바와 사크티 등 그대는 거기에 대한 이름들을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병증은 극복되어져야 한다. 매일 끊이지 않는 정진6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요한
진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정좌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산란한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대는 경험했을 것이다. 내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그들은 호소해 온다.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은 명상을 할 때 오히려
마음이 더 불안정해지는 이상한 현상을 체험한다. 명상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겪는다. 그래서 당황하게 된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바라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더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일상적인 삶에서 보다 더 많은 사념들이 떠오른다. 가게에서나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할 때 사념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절이나 사원 또는 교회당에서 명상을 하기 위해 몇 분 동안 앉아
있노라면 갑자기 사념의 먹구름이 와 하고 몰려와 가엾은 그대를 온통
휘저어 놓는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잠잠하고 고요해지기를
바라며 하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미칠 지경이 된다. 실제로 기대했던 것과느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이렇다.
그대는 항상 이러한 사념들 속에서 살아왔다. 가게나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할 때도 사념들은 거기에 있어왔다. 거기에 너무 깊이 빠져서
그대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새로운 것은 사념의 구름이 아니다.
사념들은 그대가 교회나 사원이나 수도원등 어디에 앉아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제 명상을 하면서 앉아 있노라면 마음이 어떤 것에도 사로
잡히지 않게 되어 그대의 전 마음이 내부에서 들끓고 있던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명상으로 인해 더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못보던 것들을
보게 되는 것 뿐이다. 그들은 항상 그것에 있어 왔다. 이제 그들을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 것 뿐이다.

만일 정좌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산란한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마음의 산란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것을 제거하는 기회가 된다.

그대는 적어도 하루 한두 시간씩 정좌하고 앉아 마음이 외부의 일들에
사로 잡히지 않도록, 완전히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대의
모든 관심이 내면세계에 쏟아지도록 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대가 판도라의 상자
(Pandora's Box)를 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정신병원에
들어간 것같이 생각되어 그것에서 뛰쳐나와 다시 세상일에 얽매이기를
원할 것이다.
그 유혹들을 뿌리쳐야 한다.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면 그대는 절대業
명상을 할 수 없다. 그러한 내면의 헌란들을 회피하기 위해 많은 속임수들이
고안되어 왔다.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은 명상의
테크닉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하나의 주문(mantra)이 그대에게 주어지고 그대는 그것을 되풀이해서
암송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명상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속박하는 것 뿐이다. 그대는 무언가를 외쳐댄다.
람(Ram), 람, 람, 람‥‥‥ 또는 코카콜라(Coca-Cola), 코카콜라,
코카콜라‥‥‥ 그것이 어떤 말이든, 그대의 이름이든, 전혀 엉뚱한 소리이든
상관이 없다. 그것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반복함으로써 그대는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잠시동안 내면의 혼營을
잊는 것 뿐이다.

예전에 그대는 사무실에서 일에 몰두하거나 영화, 라디오, 신문같은 것에
빠졌었다. 이제 그대는 이 만트라에 라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대상이 달라진 것 뿐이다. 이것은 초월은 커녕 명상도 아니다.
내면의 정신병동을 회피하지 말라.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만나고 직시하라. 지켜보라. 극복하는 길은 지켜보는데 있다.
이것들이 점점 커져온 것은 그대가 회피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만姜
따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단지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멸상이다.
선(禪)은 명상의 정수이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단지 고요히 앉아
있는 것,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단지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십시요 어떤 만트라라도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아니 미칠 지경입니다. "
수많은 일들이 그대에게 일어난다. 몸이 근질근질해지는가 하면 머리는
쑤시기 시작한다. 갑자기 개미들이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물론
진짜 개미가 기어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느낄 뿐이다. 몸이 갖은
수를 써 그대의 마음을 흐트러 놓으려 하는 것이다. 다리가 저려 와서
자세를 고치고 싶어지는 등, 몸은 그야말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대를 사념의 포로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라. 몇 분 동안만이라도 아무런 얽매임이 없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라. 그러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봄이 오고 들풀은 저절로 푸르도다‥‥

이것이 명상의 가장 순수 형태이다. 이것이 진정한 초월명상이다.
그러나 마하리쉬 마혜쉬 요기(Maharishi mahesh Yogi)가 그것을 상표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누구도 초월명상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w은 이제 등록 상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명상을 W이라고 부른다면 법정에 설 수도 있다. 특허권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어리석음을 보라. 명상이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처럼 되어버리다니.
이런 일이 되풀이해서 일어나고 있다. 소위 인도의 구루(Gur)라는
작자들이 미국에 간다. 그들은 결코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미국은
그들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들은 모두 사업가가 되어 미국식으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변화를 줄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그들이 만약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옮겨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아 나서게
되어있다. 샘이 목마른 사람을 위해 옮겨다녀야 하는가? 목마른 사람이
샘으로 가지 않는가? 샘은 결코 옮겨다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옮겨
다니는 샘물이 있거든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음의 산란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것을 제거하는 기회가 된다.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구이다. 마음의 산란을 제거하는 유일한 길은
마음의 끝없는 산란을 지켜보는 것이다. 단지 지켜보기만 하라. 자꾸
그대는 망각해 버릴 것이다. 마음은 교활하고 영리하며 아주 간계가
들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외교적 술책들을 알고 있다. 마음은
기본적으로 정치가와 같다. 그것은 그대를 미혹시키기 위해 갖은 계교를
다 부릴 것이다.
그대가 억압해 온 것은 무엇이든 간에 분출되고야 만다. 만약 성을
억압해 왔다면, 명상을 시작하자마자 즉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환상을
볼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이봐, 시간을 낭비하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야? 인드라◎
신께서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내주고 있는데 말이야. 무엇을 하고 있:냔 말이야?"
그대가 억압해 온 것이 성이라면 마음은 그것을 미끼로 사용할 것이다.
야망을 억눌러 왔다면 마음은 자신이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하면서 함정에 빠질 것이다. 음식을 멀리한 채 단식을 혜
왔다면 마음은 그대 앞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맛 좋은 음식들을
권할 것이다. 마음은 그렇게 해서 산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다. 억압하지 말라.
억압으로는 결코 명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명상 속에서 그대는 그대가
억압해 온 것과 반드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억눌림을 당해온 것은 아주
강해져서 엄청나게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옛날 인도의 세라스(seers)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봤는가? 그들은
늙은이들이었다. 숲 속에서 음식을 끊고 살았기 때문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해골 같은 아주 告고 거의 죽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인드라 신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우르바시
(Urvasi)가 그들 주위에서 춤추는 걸 본다. 우르바시가 이런 해골 같은
늙은이들에게서 무엇을 원하겠는가? 무슨 흥미를 느끼겠는가? 무엇
때문에 ? 이야기인즉 인드라 신이 그들을 유혹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는 하지만
모두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하다. 인드라 신도 유혹하는
우르바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악마도 사탄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악마는 그대의 억압된 마음 뿐이다. 성욕을 억제해 온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도 억눌러 왔기 때문에 명상 속에서 긴장이 풀리면 그 모든 것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억압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대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3일
동안 단식을 해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단지 3일만 단식을 해도 그대의 생각은 온통 음식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잠결에 일어나 몽유병자처럼 냉장고를 향해 걸어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마음 속에는 온통 음식 생각 뿐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억압하지 말라고 한다. 이 아쉬람(Ashram)에서 행해지는
모든 요법들은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모든 억압들을 제거하려는
것일 뿐이다. 일단 억압이 제거되고 쌓여 있던 독소들이 몸 밖으로
배출되어 버리면 명상은 마치 깃털이 천천히 땅에 떨어지듯 혹은 낙엽이
천천히 나무에서 떨어지듯 아주 쉽고도 가벼운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명상은 아주 단순한 현상이다. 그것은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 본성에 그대가 다가가는 것이다. 본성에 가까이 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오히려 어렵다. 명상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과 그대의 존재 사이에는 그대를 산란시키는
무수한 억압들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조사께서 하고 있는 말은 진실이다. 단지 그러한 산란한 상태를
얼차리고 지켜보라. 마음이 산란해질 때면 그대는 명상에 대해서는 잊어 .버린다.
그러나 염려할 건 없다. 그 산란을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 돌아가라.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조용히 진정시키고 호흡을 조절하라. 마음이
산란해졌다고 해서 어떤 죄의식을 느끼지 말라. 그것이 또 다른 산란함을
유발시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교활하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예
그것은 그대를 산란시키고 이제는 후회하고‥‥‥ 그대는 명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해장국 집에 가서 무언◎
먹는 것을 떠을리고 그리고‥‥‥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나 자신을
이기지도 못하다니‥‥‥ 이제 그대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빛나가 버리는 것이다.
죄책감 또한 또 다른 산란의 하나이다. 이제는 죄책감으로 인해
그대는 비참한 생각에 젖게 된다. 하나의 산란이 또 다른 산란을 부르는 것이다.
죄책감을 버려라. 자신에 대해 분노하지도 말라. 자신의 잘못을
그 자리에서 목격했을지라도 아무런 불만없이 되돌아가라. 그것은 자연
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수많은 생을 거치면서 그대는 억압해 왔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돌아가라. 그대의 중심으로 다시, 또 다시, 그리고 다시 '
돌아가라. 그러면 점점 더 중심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다.
그러고 산란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일어난다,
그대는 중심에 있으며 어떤 산란도 없다.
성과란 이런 것이다. 왜 그것을 성과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바로
이것에서 그대 자신이 신이라는 걸, 지금까지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는 걸,
단지 깊은 잠에 곯아 떨어져 거지가 되었다고 착각했을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알아차리는 혼침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혼침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혼침이 진정한 혼침이다. 알아차리는 혼침은
완전한 혼침이 아니다. 그 속에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명료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게으르다면 그것을 의식하면서 게으르라. 게으르다는 걸
알아차리라. 그대의 게으름을 지켜보라. 산란을 지켜보듯이 게으름도
지켜보라. 적어도 지켜볼 때는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 지켜보는 행위는
게으름이 될 수 없다. 게으르지 않은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 그대의
태만에 대해 지켜볼 때 내면에서 한 가지는 깨어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완전히 태만한 것이 아니다. 모든 희망이 바로 그 작은 한 가닥, 게으르지 않고
산란하지 않은 그 한 점에 달려있다. 그것은 씨앗과 같다.
그것은 비록 작게 보이지만 시간과 인내가 주어지면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 황금 꽃이 피는 것이다.

산란은 정신이 바깥으로 떠돌 때 온다.
혼침은 정신이 아직 맑아지지 않아서 온다.
혼침보다는 산란을 치유하기가 훨씬 쉽다.
그것은 마치 병에 걸렸을 때와 같다.
통증과 병기가 느껴지면 약으로 구제할 수가 있지만
혼침은 마치 알아차리지 못하는 질병과 같다.

산란은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다루기가 더 쉽다. 그러나 혼침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어렵다. 산란은 남성적이고 혼침은 여성적이다.
산란은 그 자체의 활동으로 견딜 수 없는 긴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쉽사리 포착이 된다. 그러나 혼침은 매우 조용하며 어둡다. 그것은
어떤 잡음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단순히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다. 우선 그대는 산란들을 인식해야 한다.
모든 산란이 사라질 때, 그때 비로소 그대는 혼침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내면을 들여다 보는데 사용될 때, 그대는 마치 바위처럼
굳어져 꼼짝달싹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말고 지켜보라.
그리고 명심하라.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얼차려가 명상이다. 명상은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알아차리는 것을 일컫는 말일 뿐이다. 그대가 무언가를 알아차릴 때,
그것을 완전히 알아차리게 될 때 그것은 사라진다. 마치 마술과도 같다.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것은 남아 있다. 그 알아차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산란과 혼침이 유지된다. 그대가 알아차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만간에 그것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산만한 것은 조치가 가능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정리될 수가 있지만,
혼미하고 침침한 것은 무겁고도 어둡다.
산만과 혼란은 최소한 그 처소가 있지만
혼침의 경우는 넋만이 활동한다. 산란의 경우는 혼이 여전히 존재 하지만
혼침의 경우는 완전히 어둠이 지배한다.
명상 중에 졸리게 되는 것은 혼침의 작용이다. 조식만이 혼침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비록 코를 통한 호흡이 진식은 아니지만
진식의 들고 남도 그것과 결부되어 일어난다.

명상 중에 졸음이 오거든 그대의 호흡을 주시하라. 그러면 졸음이
달아날 것이다. 그것 때문에 많은 불교의 스님들이 불면증으로 고생을 한다.
자신이 무엇을 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비파사나(Vipassana)를
하기 때문에 불면증으로 시달려야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호흡을
주시하면 졸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두세 시간 이상은
비파사나를 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도 해가 떠있는 동안에 해야지
해가 진 다음에는 하지 말라고 한다. 만약 밤에 비파사나를 했다면
잠을 못자게 될 것이고, 잠을 못자게 되면 몸이 상하게 될 것이다.
실론(Ceylon)섬으로부터 한 승려가 왔었다. 그는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잠을 잘 수 없었다. 진정한 승려였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그는
비파사나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밤낮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어 졸리지 않을 때에도 그것을 행하고 있었다.
만약 그대가 침대에 누워 비파사나를 행한다면 잠자기는 틀린 것이다.
민감해진 사람이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만약 잠자기 싫거든
한번 시도해 보라. 효과가 있을 것이다. 호흡을 주시하는 것이 졸음을
쫓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왜냐하면 호흡은 생명이고 잠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어린 아이는 숨을 슁으로써 생명을 시작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하는 것이 호흡이며 세상을 하직할 때 마지막으로 하는 것도 바로
숨을 내쉬고 영영 들이쉬지 않는 것이다. 처음 태어나서 하는 것이
들숨이고 가장 나중에 하는 것이 날숨이다. 그 호흡이 멈추면 사람은 죽는 것이다.
잠은 그대가 숨쉬는 것에 대해 완전히 망각해 버렸을 때 찾아온다.
잠은 하나의 작은, 그러나 아름다운 죽음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휴식과
평안을 주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그대는 더욱 신선하고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죽음의 방을 나서게 될 것이다.
명상 중에 졸음이 오거든 그대의 호흡을 주시하라. 그러나 밤에는 그런
명상을 하지 말라.

경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에 대단히 중요한 두번째의 것은 다음이다.
우리가 들이쉬고 내쉬는 이 호흡은 참 호흡(眞息)이 아니라
단지 그 매개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면 무엇이 진식인가? 인도어로는 그것을 프라나(Pranna)라고
부른다. 그대가 내쉬고 있는 숨은 단지 말(horse)에 불과하다. 맡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호흡은 단지 프라나, 생명의 원천, 또는 핸Pl
베르그송(Henn Bergson)이 생명력(elan vital)이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말에 불과하다. 그 탄 자는 보이지 않는다.
숨을 들이쉴 때 그대는 단지 공기만을 들이쉬는 것이 아니다. 』

생명까지 들이마시는 것이다. 공기가 없다면 생명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은 공기를 통해 존재한다. 그것은 눈에 안보이는 공기의
역이다. 호흡이 꽃이라면 생명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향기와 같다.
그대가 숨을 쉴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 것이다.
그러므로 요가에서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매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라나야마는 호흡의 확장을 의미한다. 숨을 더 깊게 쉴수록
그대는 더욱 깊게 살아있게 된다. 호흡을 조절하면 그대는 더욱 오래
살 수 있다. 요가는 이 비밀에 매우 관심을 쏟게 되었다. 불사약은 바로
호흡 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매우 오래 살 수 있다. 그래서 요가 %
수련자들이 최장수 기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더러 오래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 살면서도
멍청한 생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깊이와 넓이에 있는 것이지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요점을 파악하라. 만약 우둔하다면 일찍 죽는 편이 낫다.
징키스 칸( Genghis Khan )이 어떤 위대한 성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보았다.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래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겁니까? 삶은 축복인가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그 성자가 대답하길,
"그건 腑?사람에게 달렸지요 예를 들어 당신이 오래 산다면 그것은 아주
나쁜 일이 될 것이요, 일찍 죽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루 시간을 잠만 잔다면 그야말로 커다란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이 훨씬 조용해질 테니까요."
그것은 형편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요가에서는 오래 사는 것이 아주
큰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마치 그것이 목표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요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가는 점점 더 육체적이 되어 버렸다.
그 관심이 중요하지도 않은 어떤 것에로 온통 쏠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비밀은 바로 호흡에 감추어져 있다. 호흡은 두 가지 에너지의
매개물이다. 하나는 감지할 수 있는 공기, 산소를 포함하는 유형의 공기이고
다른 하나는 산소 주위의 어딘가에 퍼져 있으면서 그대를 더욱
깊게 살아있게 하고 생명력을 불타오르게 하는 엘랑 비탈, 또는 프라나이다.
그러므로 졸음이 오거든 단지 호흡을 주시하라. 그러면 졸음이 가실 것이다.
그 호흡으로 인해 그대는 더욱 더 생동감을 갖게 될 것이다.
혼침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정좌하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마음을 고요히 하고 기를 응집
시켜야 한다. 어떻게 마음을 평정시킬 것인가? 호흡으로이다.

호흡이 바로 열쇠이다. 호홉은 가장 위대한 기술들 중의 하나로서 활동해 왔다.

마음은 오로지 숨이 들고 나가는 것만 의식해야 한다. 숨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

단지 숨이 들고 나는 것만 의식하라. 바로 그 주시 속에서 그대의 잠과
혼침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중심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호흡을 지켜볼 수 있는 곳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공기가 그대의 몸을
최초로 스쳐가는 코 끝이다. 다른 하나는 하복부로서 숨이 들고
날 때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부분이다. 이 두 곳이 그대가 호흡을
지켜볼 수 있는 곳이다.                               
일전에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바그완, 코 끝을 지켜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유태인의
코를 가진 삶은 어떡합니까?"
사실은 유태인들만이 코를 가지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그대가 유태인의 코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공기가 들어오는 코 끝을 응시할 수 있다. 유태 코를
가진 사람은 명상에 있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유태 코를 갖게 된 것을 늘
행운으로 여겨라.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의 절반이 유태 코를 가지고 있다.
50%가 유태인이니까 말이다.
이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매우 놀랐다. 이 비법들은 전해준 조상
중국인들이 매우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혀 코가 없었다.
그들은 코 끝을 바라본다는 것이 매우 힘이 들었으리라. 코 끝이 어디에
있을까 ?

마음은 오로지 숨이 들고 나가는 것만 의식해야 한다. 숨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 들리지 않게 되면 가늘어지고 가늘어지면 맑아진다.
만약 들리게 되면 기가 거칠어진다. 거칠어지면 탁해지고 탁해지면
혼침이 생겨나서 졸음이 오게 된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호흡하는 동안 마음을 올바로 쓰는 법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씀이
없는 씀(不用의 用)익다.

노력 없는 노력, 행함 없는 행함, 길 없는 길, 문 없는 문, 이것이
도교나 선문(禪文)에서 쓰는 표현들이다. 그대는 무언가를 할 때 강요
하지 않고 노력없이 해야 한다. 그래서 조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씀이 없는 씀이다. 이른바 듣는 일을 가볍게 주시하는 것이다.

완전히 맡겨 버리고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라.
이것이 바로 요가와 도의 차이점이다. 요가는 의지를 통해 가고 도는
맡김을 통해 간다. 요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호흡하라. 이만큼 들이마시고 얼마동안 가두어 두었다가
깊게 내쉰 후 또 얼마동안 정지하라."
의지를 통해 어떤 일정한 모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도에서는
그냥 그것이 일어나는대로 맡겨 놔버리라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듣는 일을 아주 가볍게 주시하는 것이다.

마치 내 말에 귀를 기울이듯 하면 된다. 나의 말이 그대들 위로 내려
앉는다. 그대들이 내 말을 향해 뛰어오르거나 끌어당길 필요가 없다.
단지 주의 깊고 고요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 마음으로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이 문구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듣는 일을 주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눈 빛의 자연스러운 조사(照射이다. 눈은 내면만
응시할 뿐 바깥은 바라보지 않는다. 바깥을 보지 않고도 밝게 감지한다는 것은
내면을 응시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런 의지없이 몸을 자연스럽게 내맡길 때면 그대는 언제나 내면에서
커다란 빛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그런 상태에서 저절로 일어난다.
존재에 몸을 내맡기면 내면이 아주 밝게 느껴진다. 내면에서는 커다란
빛이, 외면에서는 커다란 기쁨이 감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리고 내면에서는 광채를 느꼈을 때 그대는 진실로 내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깥을 보지 않고도 밝게 감지한다는 것은 내면을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실제로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귀의 빛을 자연스럽게 듣는 것이다.
귀는 안으로만 들을 뿐 바깥 물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바깥 물건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밝게 감지한다는 것은 안으로 듣는 것이다.

그대가 양 눈 뒤에 있는, 그리고 양 귀 안에 있는 한 빛을 느끼기
시작할 때, 내면 깊숙이 존재의 근원에 있는 빛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대는 중심에 이르러 안정되고 평온해진다. 그때 그대는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초월해 있다. 이것이 진정한 초월이다.

그것은 실제로 내부의 어떤 것에 귀 기울이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렇게 듣는 것이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요, 이렇게 보는 것이
모습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대는 어떤 모습도 볼 수 없을 것이요, 내면의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볼 수 있는 거라곤 고요한 빛 뿐이다. 소리 없는
소리, 형상 없는 빛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리나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눈이 바깥을 보지 않고 귀가 외계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닫혀서
내면으로 침잠해 버리는 성질이 있다. 안으로 듣고 귀 기울여야만
감관(感管)이 바깥으로 향하지도 않고 내면으로 침잠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해서 혼침은 제거된다. 그것이 해와 달의 정과 ◎
빛의 교합이다.

그대의 귀 기울임이 안으로 향하고 그대의 봄이 안으로 향할 때,
다시 말해서 그대가 형상 없는 빛과 소리 없는 소리,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그 고요한 음악을 느낄 때, 그대 내면의 남성과 여성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비한 합일이요, 완전한 오르가즘인 것이다.

만약 혼침으로 말미암아 졸음이 오면 일어나 걸어다니라. 마음이 맑아지거든
다시 정좌하라. 시간이 지나면 성과가 있어 혼침과 졸음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경전에 쓰여있는 말들은 실천했을 때에만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
행함이 없이 이 경전이 지니고 있는 비밀 속으로 들어가라. 억지로 하지 않고
맡기는 법과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라.


        <<부록1.>>
      선가의 비전
   혜명경

역자서문

혜 명 경 

『혜명경』은 서기 1794년(淸乾隆 59)에 류화양 선사께서
남기신 것으로 선가(禪家)의 비전에 속하며 오랫동안 스승과 제자의
맥을 통하여서만 비밀리에 전하여 오던 것이다.
이번에 역자가 라즈니쉬 화상(和尙)의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
강의를 번역하면서 뭔가 부족함을 느껴 부록으로 이 혜명경을 싣게 되었다.
라즈니쉬 화상께서 강의는 하지 않으셨지만 원래 이 혜명경 자체가
『태을금화종지』와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혜명경을 쓴 류화양 선사는 중국의 강서성(江西城) 태생으로 쌍련사
(雙蓮寺)의 스님으로 있으면서 백방으로 참다운 법을 찾아 나서던 중,
전진교(全眞敎) 용문파(龍門派)의 충허선사(沖虛禪師)와 이어 호운노사를 만나
크나큰 비결을 전수받게 되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류선사께서 직접 쓰신 서문과 그의 제자 묘오(妙梧)이 서문에 나타나
있으므로 실어 놓았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 책이 처음 인쇄된 것은 청나라 권륜황제 시대였다. 그 후 1920년
북경에서 약 1천부가 인쇄되어 인연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보급이
되었다가, 다시 1929년 재차 출판이 되면서 한국에도 몇 권 유입되게 되어
이를 통하여 제3국으로도 흘러 나가게 되었다.
이 책, 혜명경은 수행자가 완전한 도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성품(性
品)뿐만 아니라 혜명까지도 함께 닦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참선이나 子두선 등의 정신 수양에만 치우치지 말고 육체의
생명력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성명쌍수(性命雙修),
이사겸전(理事兼全)또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하는데 모두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 심신병진을 가리킨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실제로 하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꼭 밝히고 싶다. 바로 이 점이 역자가 「혜명경」을 소개하기 주저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청으로 소개하는 바, 본인의 경험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우선 『혜명경』의 실수(實修)에는 이 내용에 정통한 스승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자가 이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니나 이 수련에
정통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요즘의 시대에 있어서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역자의 구도심(求道心)은 스승의 필요성을 넘어서 급기야는
역자 스스로 닦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뜻대로 잘 되는 듯했다. 1년, 2년 지나면서 몸 속에서 유통
(流通)되는 기(氣)의 서클( circle )을 느낄 수 있었고, 두정부(頭頂部)
부위가 뚫린듯 기(氣)가 쏟아져 들어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수행의 결과 기가 상승하여 도무지 내려갈 줄 몰랐다. 그 화기(火
氣)로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하였고 이마의 허물이 벗겨지기 시작했으며,
빠져나가지 못한 화기가 잇몸으로 모여 상악골(上顎骨) 부분으로
터져나와 결국은 치아를 몇 대나 갈아야 하는 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미 손상받은 뇌의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심하였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안양(安養)에서 많은 구도자들을 제접하고 계신 모 큰
스님을 뵙게 되었고 비로소 나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일체를 놓음'
으로써 기(氣)가 저절로 돌며, 소위 말하는 임독맥과 소주천(小
周天), 대주천(大周天)의 뚫림도 역시 그렇게 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자는 인위적으로, 억지로 그것을
감행하였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역자는 뒤늦게나마 '놓는 공부'를 알게 되었고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 도반
으로부터 참장법이라는 방법을 소개받고 마침내 기도 내릴 수 있었다.
간략하나마 본인의 작은 경험을, 그러나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소개하는 바, '나'를 놓을지언정 '나'를 쌓는 우가 독자 제위들께는
없기를 바란다.
무룻 자신의 무명(無明)을 깨고 대도(大道)의 광명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모든 문제와 원인을 바깥 탓으로만 돌리는 속인들의 눈에는 극히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벽장을 치면 대들보가 울리듯이
일신(-身)의 광명이 천지를 밝힌다는 것쯤 모르는 구도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에 국내에서도 대도를 이룬 아름다운 임들이 많이 나와
밝고도 큰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덕을 온누리에 펴 도덕기강과 윤리질서
가 스스로 바른 그런 멋진 세상을 창조해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92년 정월
無寸


     혜 명 경 (


제자 묘오 서문

부처님의 참된 도는 끊어진지가 오래다. 세존께서 가르침을 펴시되
마음과 몸을 아울러 닦아 마음이 열리면 점차 몸까지 완전하게 만들어
지기에 신령스러운 비밀을 부쳐 불과(佛果)를 증득하게 하였으니, 서역
(西域)으로는 28대 조사님들과 중국으로는 6대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지혜의 등불을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았는데 이는 모두가
다 성품과 혜명을 함께 닦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조(六祖) 이후로는
성품닦는 법만 전하고 혜명닦는 법은 감춰서, 마음을 깨달은 자가 있으면
그때서야 사사로이 비밀스럽게 도를 전수해서 홀로 닦게 한 후 조사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래서 대중적인 가르침 외에 달리 또 도를
전해 온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혜명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마음 닦는 것만을
억지로 강조하나, 실은 마음씨 자체가 참되지 못해서 번뇌가
깃든 식성(識性)의 장애를 받는지라 잘못 가르치고 또 잘못 받아들여서
어떤 이는 신령스럽게 깨치기만 하면 참 성품을 본 것으로 알며,
어떤 이는 단지 올바른 생각만을 참된 성품으로 인식해서 진실을 외면하고
망녕됨을 따르며, 잘못 알고 그룻되게 歌으니 여래처럼 몸과 마음이
원만한 금강 같은 체(體)를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윤회에 허덕이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화양선사(華陽禪師)라는 분이 있어 소식을 밝게 통하시어
조사의 전하시는 바 참된 뜻을 이어 받고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일치되는지라,
혜명의 대도(大道)를 들추어 내시고 여래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친 참된 성품을 그대로 설하여 미혹되고 망령된 중생을 구하고자
지혜의 문을 열어 놓았으니 보는 자로 하여금 금생(今生)에 바로 부처가
되어 다음 생에 다시 닦는 수고를 면하게 하셨다.
어떤 것이 도를 동시에 닦는데 요긴하고 어떤 것이 간단하고 쉬운지
어리석은 사람은 그 이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 실로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
지혜가 열려 몸과 마음의 근본을 깨닫고 보면 너와 내가 없는 것이다.
불도에 인연이 깊어 승려가 되어 참된 도사를 만나 도를 통하고 나면
도사라고 하는 바로 그 분이 부처님이며, 도교에 인연이 있어
도인의 신분으로 승려를 만나 대도를 이루고 보면 그 승려가 바로 신선인 것이다.
불교와 도교는 원래 근본이 하나로써 넓게 보면 똑같고 좁게 보면
전혀 다른지라 선교(仙敎)의 책에 청정자연각왕여래보살(淸淨自然
覺王如來菩薩)은 곧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자칭이요, 대선(大仙), 칠선
(七仙), 여래선(如來仙), 금선(金仙)이 다 부처님을 가리킨 바라 한가닥
넓은 길이 탁 트여 있는데 이 길 저 길을 따로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내 일찌기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산천을 헤매며 총림(叢林)의 선지식
(善知識)을 찾아 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그 하는 공부들을 보면
하나 같이 공안(公案)을 들고 참구하거나 타칠, 또는 참선
등이 고작이었다. 수십 년간 공연히 허송 세월을 보낸 결과가 되었지만
실제로 불도의 진수를 통한 스승이 없어 음식을 끊고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몹시 안타까와했었다.
그러던 중 신해년에 다행히도 득도하신 화양선사를 만났으나 선사께서
나의 구도심이 간절함을 아시고 그 비밀한 것을 열어 보이려고 하시다가
끝내 감추어 버리시니, 내 얼핏 생각에 이 도의 존귀함은 모든
부처님이 드러내기를 꺼리시는 바요, 스승님의 몰인정한 탓은 아니라고 여겨
성심으로 향을 피우고 선사께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한 마음으로 간절히
구하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한 마디를 던지시니 그 말 뜻에 문득 전체의
뜻을 깨달았다. 알고보면 원래 부처나 조사가 되는 길은 가까운
동정(動靜)의 순역(順逆)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어렵다고 하겠는가?
화양선사께서 30여년간 구도할 때의 자신의 고생한 과거를 생각해서
자비를 베풀어 이 책을 지으신 바, 옛 부처님이 드러내지 않았던 바를
모두 드러냈으며 역대 조사들이 감춘 것을 모두 밝혀 내어 바르게 도통하는 법을
조금도 숨김없이 알기 쉽게 누설하신 것이다. 원컨대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바르게 깨쳐서 모두 부처가 되어 두 번 다시 고통스러운
윤회에 휘말리지 않도록 바른 길을 환히 일러 주셨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 하리오_

권륜 신해년 중양월 영대암 승려 묘오 서

혜명경 서문

혜 명 경

화양은 본래 시골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불교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도다.
한때 절에 들어간 인연으로 다소 깨달은 바가 있어 평소 세속을
초월하여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 승려에게
귀뜸해 듣기를 오조대사(五祖大師)께서 육조에게 삼경에
도를 비밀리에 전했다 하니 이 말을 듣고는 꿈에서 깨어난 듯 흐뭇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수도하는 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른 스승을 만나기 위해 방랑의 길에 올랐다.
당시 중국의 넓은 땅을 다 헤매었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뒤에 쌍련
사(雙蓮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더욱 열심히 스승될 분을
찾아 보았다.
유(儒), 불(佛), 선(仙), 삼교(三敎)의 높은 스승들을 만나보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샅샅이 찾아 헤매었으나 결국 제대로 도를 깨달은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며, 사람이 몸 받기가 어려운데
허망하게 세월만 보낼 수는 없다고 느껴 마침내 결심을 하고 날마다
예불을 드리며 종을 치는 시간에는 온 몸을 조아리고 땅에 엎드려 맹세하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힘써 구하면 반드시 얻는지라 반 년 가까이 되어 다행히 충허(沖虛)
라고 하는 득도자를 만났다. 이 분께서 내게 직접 비밀한 뜻을 전해 주시매
그 뜻이 틀림없이 환하게 통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 알고 보니
혜명의 도는 자기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영겁의 신비롭고 영롱한 물건이었다.
충허선사의 도를 이어 받고 광로(匡盧)에서 또 다시 득도한 호
운노사(壺雲老師)를 만나 몇 마디 안들어 대도에 완연히 통한 분임을
알았다.
내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지극한 마음으로 애원을 하였더니 호운
스승께서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 비밀을 열어 대도의 깊고 낮은 곳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시며 조금도 숨김이 없이 일러주셨다. 내 그곳을 떠날 때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교의 쌍수(雙修)는 이미 끊어지고 말았으니
네가 끊어진 법맥을 이어서 인연있는 자를 건져주도록 하라."
하시니, 내가 방법대로 양자강 편으로 서너 명의 도반을 데리고 가서
부지런히 닦고 간절히 궁구하였다. 그때의 도반 이름은 벽섬(碧贍), 요
연(了然), 경옥(瓊玉)이었다.
참으로 고생을 하여 수련을 한 끝에 모두가 사리를 이루고 보니 스승께서
전하심이 조금도 틀림이 없는지라, 이에 책을 지어 그 이름을
혜명경(慧命經)이라 하고 그림을 그려넣어 해설을 가하였으니, 옛 부처의
비밀을 열어 보이고 조사의 으뜸가는 기밀을 누설하여 뒤에 배우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다리와 뗏목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내가 보니 요즈음 수행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어록을 숭상하나 어록
중에는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들이 있어 공부가 얕은 사람들은 혜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몇 마디 그릇된 말에 빠져 결국 구두선에 휘말려
끝내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나니 어록을 돌려가며 전해 받은 해독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제 모든 경들을 두루 열람해 보건대 도통한 스승들의 가르침에 견주어 봐도
『능엄경이나 「화염경 『육조단경(六祖壇經)」
같은 것은 조금도 거짓됨이 없는 진실한 말씀들이다. 그러나 선사어록
(禪師語錄)이니 화상어록(和尙語錄)이니 하는 것들은 실로 망녕된 소리가 많다.
무룻 수련하는 길에 있어서 누구나 참된 말이 아니면 도를 증
득할 수 없으며 진실한 말이 아니면 허망됨을 물리칠 수 없다.
허망한 것이 진실한 것을 이기게 되면 자연히 수도에 마장이
따르게 마련이고, 비록 머리가 영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거 천수백
년 동안 오직 한 가닥 깊숙하게 감추어져 내려온 혜명의 도에는 아득하여
구경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내 이제 알기 쉬운 말로써 부처님의
보배를 가져다 숨김없이 드러내어 세간의 수도자들을 도우려 함에, 이
혜명경을 보고 친히 서로 입으로 전한 것처럼 하되 반드시 뜻을 엄격하게
세워서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이 부처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바로 증명하리니, 이는 내가
자신을 괴롭혀 가면서 스승을 찾아 도를 깨칠 때의 본래 품었던 간절한
소원이었도다.

권륜 갑인년 여름 유화양은 완성 귀결암에서 서문을 쓰노라.

 -에너지의 유출이 그침 -

혜 명 경

누진금강의 몸을
이루고자 하거든
혜 (慧)와 명(命)의 근훤을
덥 히는데 힝쓰라.
정(定)한 곳을 비추고
환희의 땅을 떠나지 아니하면,
거기에 바로 진정한 자아(自我)가
감추어져 있으리라.

만약 그대가 쓸데없이 기(%)를 유출시키지 않는 금강과 같은 몸을
완성하고자 한다면 의식과 생명의 근원을 덥히는데 힐써야 한다.
항상 가까이 있는 넘치는 즐거움으로 대지(大地)를 비추라
]. 거기에 그대의 진정한 자아가 숨어 있을 것이다.

도의 정교하고 미묘함에 있어서는 성품(性品)과 혜명(慧命) 이
으로 야릇한 것이 없으며, 성품(性)과 혜명(命)을 닦는 방법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없다. 옛 성인과 현인들은 성품과 혜명-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을 교묘하게 만물에 비유하여, 밝게 드러내거나
곧게 말씀하시기를 꺼려하였다. 그래서 세상에는 양자(兩者)를
동시에 닦는 자(雙修者)가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그림을 그려
이 비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망령되이 함부로 누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능엄경에 있는 누진통(漏盡通)에 대한 가르침과 화엄경의 깊은 뜻 밑
기타 모든 경전에 흩어져 있는 가르침을 한데 묶어서 바르게
표시하려는 것 뿐이다.
이 그림을 보면 혜명이 규(단전)를 떠나지 못함을 알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같은 뜻을 가진 수행자들에게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 비밀스런 천기를 밝혀 외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참된 여래의 종지⊂眞種子]도 단전에서 나오는 것이며, 누진통도
단전으로 말미암아 이루는 것이요, 사리도 단전으로 연마되는 것이요,
대도(大道)라 할지라도 이곳 단전을 통해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전이라는 구멍은 보이지 않는 굴(洞穴) 같으며 형체나
그림자조차도 없다. 호흡에 의해 기운이 일어나면 구멍을 이루고
기운이 꺼지면 아득해져 표시도 없다. 참된 나를 감추고 있는 곳이요,
영원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으로 바다 밑 용궁(海漑龍宮)이라고도 하고
눈 쌓인 산(雪山界地)이라고도 하며, 서쪽(西方)이라
고도 하고, 으뜸가는 관문(元關)이라고도 하며, 극락세계라고도 하고,
다함이 없는 고을(無極之鄕]이라고도 하니, 이름은 비록 많으나
모두 단전 구멍 하나를 가리킨 말이다. 수행자가 만약 이 규(竅)를
모른다면 수없는 윤회를 되풀이해도 혜명을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규로다. 부모가 이 몸을 낳기 전 수태할 때에 이 규부터
생(生)하나니, 성품과 혜명이 이곳에 붙는 것이다. 이곳에 붙은 성품과
혜명은 서로 융합하여 하나가 되고 그 틈이 없이 밝은 모양은
화로 속의 불씨와 같다. 이 한 덩어리가 온갖 자연의 이치를 다
구비하고 있어 선천(先天)의 다함이 없는 소식을[無窮之消,刻 지니고
있다 하며, 부모가 나를 낳기 이전의 소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운이 족하고 태(陪)가 원만해진 즉 움직이게 되어, 배포가
찢어지면서 고산정상(高山頂上)에서 발을 헛디뎌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지듯 몸과 마음의 근본자리인 성품과 혜명이 둘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성품은 혜명을 볼 수 없게 되고 혜명은
성품을 볼 수 없게 되어 서서히 성장하게 되고 장성하자마자
늙어가게 되나니 슬플건, 내가 가진 본래의 대도(大道)는 전혀 구경도
못하고 마는도다.
이에 여래께서 큰 자비를 베푸사 비밀한 법을 누설하여 중생들을
가르치니, 내가 태어난 포태로 돌아가 생명을 다시 만들라[再入胞胎
重我之性命)고 하신 것이다. 방법인즉 나의 정신과 숨기운(>神氣)을
이규에 넣어 하나로 뭉쳐 부처의 참된 씨앗을 만드는 것이니 부모가
자식을 잉태시킬 때의 원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무룻 규에는 세 가지 불기운이 있나니 안에는 가장 더뚠 불기운
(君火)이 있고 입구에는 그보다 약한불기운 (相火)이 있으며 온몸에는
가장 약한 불기운(民火)이 있는 것이다. 규 속에서 임금의 불
(君火)이 일어나면 거기에 신하의 불(相火)이 따르고, 신하의 불엔
백성의 불(民火)이 따른다. 세 가지의 불(三火)이 이러한순서로 나타나면
사람이 되는 것이요, 거꾸로 되돌려지면 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고로 누진통을 얻는 이 규로부터 범부나 성인이 모두 태어나는 것이요,
그 작용이 꺼지면 범부도 성인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깊은 원리를 모르고 엉뚱한 방법으로 도를 닦는다고 하니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쳔만 가지의 수도법이라 할지라도
단전 속에 혜명과 불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밖으로만 찾아 헤매면
큰 도도 성취하지 못하면서 세월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2. 법륜육후도

- 법(法)과 조화하는 회전의 6기(期) -

부처나 조사가 된 근원 자리를
나누어 살펴보면
서방(西方)에 극락성(極樂城)이
출현하리.
법륜(法輪)에 들이쉬어
돌아 하늘에 이르고賻牙叢駕],
내쉬어 땅에 돌아가 왕래하니
소식이 다하도다.
일각의 시간鈴諦努으로
육후(六候)를 이루니
대도(大道)가 중심으로
쫓아 나오도다.
숨 두번[二1譏에
모니(牟尼)를 캐어 올리니
현묘한 기틀雌希脚을
밖에서 구하지 말라.

만약 사람이 부처나 조사의 도를 목숨을 걸고 구한다면 서방에 불
국토가 나타날 것이다. 숨을 들이슁에 있어 바르게 회전된 후에는
천상에 조회하게 된다. 숨을내쉴 때는 힘이 대지로 향한다.
일회(一國:의 주행(周行)은 육후(六候)로 되고 이후(二濫) 째에
사람은 불조(佛祖)를 만난다. 위대한 도는 중심에서 출현하니 근원의
종자를 절대 밖에서 구해서는 안된다.

도를 묘하게 사용하는 것은 진종(眞種)을 법에 따라 돌리는 것 이
상이 없고, 돌릴 때에 빗나가지 않는 길은 임독(任督) 양맥
이상 가는 것이 없으며, 굴릴 때에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규칙 이상
가는 것이 없다. 또한 한정된 수에 착오없기로는 호흡법 이상의 것
이 없으니 이 그림이야말로 대도를 완전하게 감춘 것이요, 달마대사가
서역에서 전하고자 가지고 온 법도 그 바탕이 모두 이 그림을
넘지 못한다.
그 가운데 으뜸가는 공부로 호흡법 이상 중대한 것이 없으니, 진
종을 을리고 내리는 데는 숨을 들이쉬고내쉬는 것 이상의 것이 없
다. 임독맥의 길에서 이탈되지 않는데는 잡념없는 평온한 마음 이상
가는 것이 없다. 또한시작과 끝을 확실히 하는데는 경계지역(界
地)이상 가는 것이 없으니 이를 무시하고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그림을 그려 넣어 천기를 모두 누설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일반 세속 사람이라 할지라도 알게 되면 통하지 못할 사람이 없으나
참으로 마음에 덕이 없으면 길을 알지라도 하늘이 돕지
않는다는 것이 정해진 이치이다. 덕(德)과 대도의 비밀은 마치
새의 양쪽 날개와 같아서 한쪽 날개를 끊으면 날 수 없는 것처럼
소용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충(忠)?虛?孝)와 인과 의(義)를
생명처럼 알고 5계(五戒 :不殺生, 不盜, 不淫, 不妄語, 不陰酒)를 잘 지키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대도를 넘겨다 볼 수 있으리라.
이제 정묘하고 비밀스런 모든 가르침은 뒷장에 있으니 그림과
내용을 같이 비유해 보면 그 참된 뜻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호흡과 함께 행하는 기(氣)의 순환을 나타낸 것이다.
보통 사람의 호흡은 들이쉴 때는 아랫배에 잠기고 내쉴 때는 거기서
나오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반대로 호흡을 한다. 우선 숨을
들이쉴 때는 하복부를 내밀고 기를 모아 등 뒤의 독맥(督脈)을 통해
기를 상승 시킨다. 그림에는 기를 상승시킬 때의 간격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썬고(沐) 감음(浴)이라고 하는
중간의 멈춤이 이 행로의 정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목(沐)은 중앙에서 약간 높은 곳에 있으며 욕(浴)의 지점은 중앙보다
약간 낮은 곳에 있다.
이러한 호흡법을 불교에서는 전법륜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소주천(小周天)이라 한다. 목욕(沐浴)이란 들숨과 날숨의 중간에
잠시 호흡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구조소주천 구결
소주천 행법에 대한 구장춘의 구전 -

고요(靜)가 극에 달하면 움직임(動)이 일고 일양(-陽)이 일어난다.
약이 생성되면』 藥産1 신령스런 앓(神知)이 있고 묘각(妙覺)은
영묘한 일의 자루』를 쥐게 된다.
양이 조금 동(動)하기 시작했을 때
그 싹을 취해서는 안된다. 신령한 약이 견실하게 되면 십
오광(十五光)이 가득하게 된다. 그때가 바로 급히 선약(仙藥)을
완성할때이다. 허나 너무 무리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길게 수련 하여도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완전한 선약을 얻을 수 없다. 기(氣)는
외부로 새어 나가려고 하지만 신(神)은 내면의 근원자리로 돌아가려고 한다.
반조(反照)에 의해 신을 뿌리로 돌리면(歸根) 기도 뿌리로
돌아간다. 기를 회전시키면서 그 녹(祿)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를 알 필요가 있다.
자시(子時 : 밤12시. 여기서는 척추 하부를 상징)에 아랫배에 불
(火)을 일으키는데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그 불은 어떻게
일으키는가? 후두부(後頭部)로 호흡하듯 하는 것이다. 그불은
어떻게 운용하는가? 숨을 들이쉴 때 올리고 내쉴 때 내리며, 뱃속의
불기운으로 기를 상승시키고 하강시킬 때 그 모양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불로 솥(鼎 ' 全身)을 순환시키고
호흡은 진인(眞人)의 법에 따르라.
불을 운용함에는 그 시기(火候)의 구분이 있다. 호흡의 들고 남에
맞추어 수를 세어 그것으로 시간을 잰다. 자시(子時 :밤12시경, 미
저 골 부위 )로 부터 사시 (已時 : 낮 10시 경, 후두부 부위 )까지를 여 섯
단계 洙陽 : 독맥 6단채로 나누되, 양수(陽數)의 9의 수를 사용하므로
도합 36번의 흡(吸)으로 양화(陽火)의 상승은 끝난다. 오시(午時
' 정오 12시경, 두정 부위)로부터 해시(亥時 : 밤 10시경, 하복부 부
위 )까지도 여섯 단계 (~壽)로 나누고 음(陰)의 수인 6수를 사용하여
도합PAk번의 호(呼)로 음화(陰火)의 하강이 끝난다. 대주천(大周天)
에 비하여 이것을 소주천(小周天)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번 주행하면
5'0도가되나 나머지 5合의 차이는 목욕(沐浴)하기 위하여 멈추는
묘시새벽 6시경)와 유시(酉時 '오후 6시경)에 배분이 된다.
한번의 주천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고요한 자리로 되돌아온다.
기(氣)를 목욕시키면 신!神)이 단전에 결집된다. 계속해서 정진해
나가면 결집된 에너지가 뭉쳐 마치 바람이 감아올라가듯 척추의 독
맥을 器고 곧바로 치솟아 올라 간다. 백일 동안 공을 들이면 신령하고
미묘하게 되어 육근(六根)이 진동한다. 7일간 구전으로 가르친
비결과 대주천의 운행이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이다.


3. 임독이맥도
- 임맥(任脈)과 독맥(督脈) -

으뜸가는 관문(元關)의 길을
드러낼진대
항상 불雌]로 장생굴(長生窟)
기르는 걸 가르친다.
혈맥 속으로 법 바퀴(白脈法輪)
운행함을 잊지 .말고,
밝은 구슬脚狂脚이
관문에서 사라지지 않게 점검하라.

위 그림은 원래 앞에 있는 그림과 한 가지인데 굳이 떼어 놓은 것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자기 몸 어느 곳에 법륜이 있는지를 모를까봐
다시 알기 쉽게 그려 놓은 것이다. 사람이 이 두 개의 맥만 통해 버리면
몸 속의 온갖 맥이 다 통해 버리는 것이다.
사슴이 잠을 잘 때 코를 항문에 넣고자는 것은 독맥이 통해 있기
때문이며, 거북이나 학 같은 동물도 임맥이 통해 있기 때문에 천년
수를 누리는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그들만
못하랴.
도를 닦는 사람들이 임독 양맥을 열어 진기를 몸 속으로 회전시킨다면
어찌 수명을 늘리지 못하고 대도를 이루지 못하랴.

 도태도(道胎圖)
-도(道)의 수태(受胎)


열달(十』 )이면 도태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1년 목욕(沐浴)이면 온화하게 된다.
법은 있되 공은 없이 하여 (有法無功)
부지런히 비추기를脚勳
투철히 하라.
육신은 잊은 채 내면을 돌이켜 보아
참된 영 雌讀讓을 발육 시켜라.

법에 따르되 무리한 노력은 하지 말고 부지런히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라.
형태를 잊고 내면을 들여다 보아 진정한 정신을 길러라.
열 달이면 도태의 불이 일고, 1년이면 썬고 끼얹는 일이 따뜻하게
될 것이다.

이 도태란 그림은 능엄경 원본에 실려 있었으나 속된 승려들이 도
태의 묘한 뜻을 모르는 것은 이 그림을 도중에 삭제해 버려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수도자들에게 여래의 진실한 도태공부(道胎工夫)가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사실 도태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형태나 모습이 있는
별개의 물체가 아닌 즉 실제로 歌아서 도태를 이뤄보면 자기의
정신과 원기 』神氣]를 일컫는 말이다.
먼저 정신(神)을 원기(氣) 속에 집중하면, 원기는 저절로 정신을
감싸듯 받아 들여 정신과 원기가 서로 뭉쳐져서 생각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를 가리켜 도태라고 하는 것이다. 또
기운을 양성하여 기른다』親奉覺應二氣培養)고 한 것이다.
그런고로 날마다 기운과 정신을 가다듬고 다듬어서 기운이 확 차면
도태가 원만히 성숙해져 두정(頭頂)을 誘고 나가는 경지 가 오는 바,
형체로 나툰 육신을 벗어나서 친히 부처의 아들(佛子)이 되는
것이다.
시(詩)에 가로되,

영태(靈胎)를 양육하는데는
따뜻하게 함을 요한다 하니,
묘유(卯酉)치 달은 덕(德)의 문(門)이 된다.      
만약 불을 더하여 손상(損傷)을 방지 한다면
이 이치가 모든 달자(達者)의 말에 통하리라.

신성한 태아를 기를 때에는 이것을 따뜻하게 할 필요가 있다. 목
욕할 때는 가르침을 받은대로 하면 된다. 다시 노력하여 태아를 덥혀서
그것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여 가면 경험있는 선현(先賢)들의
가르침과 같은 이치임을 알 것이다.

5. 출태도(出胎圖)
- 과실(果實)의 탄생 -

몸 밖에 몸이 있어
불상(佛櫂)이라 하며
생각이 신령하고 잡념이 없는지라
보리라 하네.
일천 잎의 연꽃이
기(氣)에 의하여 화(化)하고
백광(白光)이 밝게 빛나는 것은,
신(神)이 웅결(凝潔)함으로러라.

몸 밖에 또 몸이 있어 이른바 부처의 상이요, 신령한 마음으로 가득하여
사념이 없는 것은 부처의 지혜이다. 천 개의 잎을 가진 연꽃이
호흡의 힘에 의하여 피어나고, 정신의 응집으로 하여 백 겹으로
싸인 섬광이 빛을 발한다.

능엄경의 능엄주(樗嚴呪)에 말하기를 "그 때에 세존께서 살상투
(肉雲) 가운데로 백 가지 아름다운 광채를 쏟아내고 그 광채 속에서
천 개나 되는 연꽃잎을 나타내시니, 화신불(化身佛 :부처님이 조화로
나투신 부처님의 분신)이 연꽃잎 위에 앉아 열 갈래나 되는 백 가지
아름다운 보배 빛을 놓으시니 도처에 걸림이 없어 두루 비추어
보이는지라, 그 때에 모여 있던 대중들이 모두 여래를 우러러 보았다고
한 것이다.
능엄경에 나타나 있는 신주(神呪)를 말씀한 화신불은 곧 양신(陽
神)인지라, 이것을 가리켜 불자(佛子)라고 한 것이다. 진실로 혜명
(慧命)의 도를 얻지 못하고 마른 나무와 같이 침묵이나 지키고 앉아
구두선이나 떠벌린다면, 어찌 화신한 여래가 보배꽃 위에 앉아 빛을
발하는 법신(法身)의 출현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혹 양신은 대도가 아니라고 비꼬아 말한다면 어찌 세존께서
대도를 등지고 소도(小道)를 성취하셨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능엄의 비밀한뜻을 누설하여 후학을 깨우치고자 하니 이 도를
얻게 되면 바로 성인의 경지에 뛰어 올라 범부와'티끌의 세계에 다시
떨어지지 않으리라.
시에 가로되

구년무위(九年無爲)로 산중에 거하더니
드디어 하루 아침(一朝)에
정문(頂門)을 파(破)하도다.
천문(天門)에 도약하여
얼마간 신(神)에 통(通)하다 돌아와
천선(天仙)을 만나니 모두 기뻐하도다.

9년간 무위로 산중에서 명상에 잠겨있다 어느날 아침 흘연히 두
정의 문이 열렸다. 하늘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본즉 상상을 초월한
신비의 세계였도다. 나 자신으로 돌아와 선인(仙人)들을 만나니 모두가
기뻐하는구나.

6. 화신도(化身圖)
- 분신체(分點脚의 유지 -


분념(分念)은 형체를 이루어 색상(色相)을 살피고,
공령(共靈)은 자취를 쫓아 허무(虛無)로 화하니,
유(有)에서 나와 무(無)로 들어가 묘한 도를 이룸이여.
나누어진 형체들은 몸을 드러 내어 참된 근원嬅諦霜을 같이 하도다.

나누어진 하나하나의 생각들이 형태를 취하여 색과 형이 보이게 된다.
그 모두를 하나로 하는 혼(魂)의 힘이 그 자취를 전개하여 허공중에
변화한다. 유로부터 출발하여 무로 들어가 사람은 놀라운
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梁개어 나툰 많은 형체들은 여러 신체로 나타나지만
하나의 근본 원천에 결합되어 있다.

7. 면벽도(面壁圖)
- 벽을 향해 앉다 -

마음의 불(神火)로 형체를 만들지만
근본은 비어 있는 색상(色相)이요,
마음의 도장을
허공에 걸어두니
달 그림자만 깨끗하도다編點耉.
성품의 ◎ 辭奎)湖을
돌이켜 비추어 8適導3
본래의 참됨 阮鐵을 회복하고,
뗏목배 는 피안에 도달하니
햇빛이 온누리에 찾아든다.

정신의 불에 의해 이루어진 형체는 본래 공(空)한 것이요, 마음의
각인(刻印)은 허공에 떠 달빛은 흐림이 없이 깨끗하다. 본성의 빛을
비추어 본래의 진실을 회복하니 생명의 배는 피안에 이르러 햇빛이
환하게 빛난다.

8. 허공 분쇄도
- 허공의 무한성(無限性) -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
한 조각 밝은 빛은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양변을 잊으니
가장 신령하고 맑고도 밝아
천심(天心)만이 홀로 빛나고,
강물은 티없이 맑기만 하여
달빛이 비추어 뚜렷하기만 하다.
구름 걷힌 하늘에 산천은 청명하고
지혜는 선정으로 돌아가니
달바퀴[撚脚만 홀로 떠 있도다.

나고 죽음이 없는 경지가 가고 옴도 없는 바라. 한 조각 밝은◎이
정신 세계를 두루 비춘다. 두 갈래의 생각을 잊을 때 가장 밝고도
영롱하여 허공은 천상의 마음의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수면은
잔잔하여 달이 빛나고 구름이 흩어지니 산천은 밝게 빛난다.
의식은 관조(觀照)중에 홀연히 녹아 없어지고 월륜만이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