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폴더1

<<7 . 마음으로 듣다>>

narrae 2013. 12. 24. 07:34

<<7 . 마음으로 듣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성과를 구하지 않는 집중된 마음으로 결행(決行)되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성과가 있게 된다. 수행의 초기에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증상이 있다.
그것은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이다. 거기에는 요령이 있는데
그것은 호흡의 포로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흡이란
자신의 마음이다.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호흡인 것이다.
마음이 동(動)하는 순간 기(氣)가 생(生)한다. 기란 원래 변형된 마음의
찰동이다. 우리의 생각은 극히 빨라서 찰라에 빠져드는 망상에도
호흡이 뒤따른다. 내적인 호흡과 외적인 호흡은 마치 목소리와 그
방향처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매일 우리는 수만 번의 호흡을 하고
수만 가지의 망념을 품는다. 그렇게 하여 명석하던 정신은 마치 나무가
말라죽어 재가 되어 버리듯이 쇠하여 간다.
그러면 마음에 아무런 생각도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생각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데 숨을 쉬어서도 안된다는 것인가? 숨을 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데.
병에 대해서는 약을 마련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마음과 호흡은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빛의 회전(回光)과 호흡의 조절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귀의 빛(耳光)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눈의 빛이 있고 귀의 빛(耳光)이 있는 것이다. 눈의 빛은
바깥에 있는 일월의 광(光)이 결합된 것이요, 귀의 빛은 안에 있는
일월의 정(精)이 결합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정(精)이라고 하는 것은
응집된 형태의 빛(光)이다. 근원은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同出
異名]이다. 그러므로 들음(聽)과 봄(明)은 똑같은 영묘(靈妙)한 빛이다.

좌선할 때는 눈꺼풀을 내리고 양 눈을 사용하여 기준을 정한 뒤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마음을 돌려 호흡에
귀 기울인다. 그 호흡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
소리없는 호흡을 듣는 것이다. 호흡에 소리가 있게 되면 호흡은 거칠고
얕아져서 깊게 뚫지를 못한다. 마음은 아주 가볍고 미미해져야 한다.
마음은 놔버려지면 놔버려질수록 미미해지고, 미미해지면 미미해질수록
고요해진다. 극도로 고요해진 마음은 홀연히 멈추게 된다.
그때는 진식(眞息)이 나타나고 마음의 본체가 의식되기에 이른다.
마음이 미세해지면 호흡도 미세해진다. 마음의 조그만 운직임도 기
(氣)◎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호흡이 미세해지면 마음도 미세해진다.
기의 조그만 움직임도 마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기(氣)부터 조절해 나가야 한다. 마음이 직접
조절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조절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응집된 기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이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은
움직임(動)의 본성을 아는가? 움직임은 외적 수단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그것은 지배관계를 일컫는 말일 뿐이다. 단순히 뜅박질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런즉 고요한 집중으로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과 기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았던 대성인(大聖人)들은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보다
쉬운 방법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암탉이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으로 항상 듣고 있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중요한 비결이다. 기(氣)를 따뜻하게 함으로써 암탉은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따뜻한 기는 단지 알껍질만 덥기는데 그친다.
그 내부까지는 침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그 기를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들음(聽)으로써 된다. 그렇게 일심
(-.t·)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음이 들면 기도 들게 되어 온기(暖氣)를
얻은 병아리는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탉은 때로 둥우리를
떠나면서도 항상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를 늦추지 않는다. 그와
같이 정신의 집중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정신의 집중에 끊어짐이 없고
따뜻한 기도 밤낮 단절됨이 없기 때문에 영혼이 소생하게 된다.
영혼이 소생한 것은 먼저 마음작용 (心)이 소멸됐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을 죽일 수 있을때 원신(元神 : primal spirit)이 소생하게 된다.
마음을 죽인다는 것은 그것을 말라 시들어 버리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갈라지지 않고 모여 하나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이야기 하나‥‥‥

옛날 도고(Dogo)라고 하는 선사(禪師)에게 소오신(Soshin)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처음 소오신이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틀림없이 스승께서
마치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듯 그에게 선(禪)을 가르쳐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스승 도고는 그에게 아무런 특별한 것도 말해
주지 않았고, 비범한 어떤 것도 전수해 줄 의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소오신은 선에 대해서 눈꼽만큼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스승에게 투덜댔다. 스승 도고는 대답했다.
"나는 네가 들어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가르침을 주어 왔느니라"
"그래요? 언제 주었는데요?"
소오신이 물었다.
"네가 아침에 차를 가져오면 나는 그것을 마셨고 네가 식사를 준비해 오면
나는 그것을 먹었고 네가 나에게 예(禮)를 취하면 나는 그것을 받았느니라.
그 외에 어떻게 더 선을 배우겠다는 거냐?"

도라고 하는 것은 서로 나누어 가질 수는 있지만 따로 쪼개질 수는 없다.
도라고 하는 것은 보여질 수는 있지만 말하여질 수는 없다. 스승은
도 가운데 살고 있다. 제자는 그 영혼을 흡입해야 한다. 토는 가르침의
일종이 아닐 뿐 아니라 가르침이 될 수도 없다. 모든 가르침은
피상적일 뿐이다.
도는 가르침보다 심오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에너지 전수여야
하는 것이다. 가슴과 가슴, 영혼과 영흔, 몸과 몸의 울림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일 수 없다. 그리고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발산되고 있는 에너지를 보고, 관찰하고, 주시하고, 느끼고 사랑해야 한다.
단순히 스승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제자는 가르쳐지지도 않은
많은 비밀들을 서서히 배우게 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비밀 중의 하나는 스승 옆에 앉아 있음으로써 제자는 스승과
똑같은 방식으로 호흡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명(共鳴)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명 속에서 둘은 하나가 된다. 그것은 연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가만히 관찰해 보면 그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정말 아무런 조작도 없이
두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호흡하고 있는 것을 발견해내고는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연인이 숨을 내쉴 때는 그대도 내쉬고 연인이 숨을
들이쉴 때는 그대도 들이쉰다. 그리하여 둘은 어느덧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호흡은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어머니와 아이가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런 식이다. 때로는 어머니와 아이가 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아이가 위험에 처해있을 때 어머니는 즉각 그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호홉은 아주 밀착되어 있어서 똑같이 호흡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엄마 뱃속에서 아이는 아홉 달 동안이나
엄마와 같이 호흡하였다. 아기에겐 자신의 호흡이 없었다. 그것은 엄마의
호흡이었고 아기는 순전히 엄마의 숨을 따라 쉬었을 뿐이다. 엄마가 대신
그를 위해서 호흡을 해주었다. 아홉 달 동안이나 그렇게 깊은 공명
속에 산 것이다. 태어난 후에도 그것이 계속된다. 그리고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게 되면 그것은 평생 동안 지속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거기에 대해 과학적인 증명까지도 시도되고 있다. 최근 미국이나
소련, 기타 많은 나라에서 새라든가 짐승들을 이용하여 많은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새끼를 멀리 데리고 가서 죽이고는 과학적인
기구를 동원하여 어미를 관찰한다. 새끼가 죽는 순간, 그 거리가 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어미의 호흡이 즉각 변한다. 바로 그 순간
즉각적으로 어미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어미는 안절부절 못하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보이는 그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실과 같은 그 무엇, 직관적이며 그 어떤 매개물도 필요없 없는
그 무언가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제자는 스승이 무얼 가르쳐 주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스승 도고가 말하고자 했던 바다.
"나는 네가 들어온 그날부터 가르침을 주어왔느니라. 네가 아침에 차를
가져오면 나는 그것을 마셨었는데 내가 어떻게 마시는가를 보지 못했느냐?
네가 식사를 준비해 오면 나는 그것을 먹었고 네가 예를 취하면
나는 그것을 받았느니라. 그 외에 어떤 선을 더 배우겠다는 거냐?"
스승은 말하고 있다. 나의 몸놀림을 보아라. 내가 어떻게 걸으며
어떻게 앉는가를, 내가 어떻게 호흡하며 어떠한 단순함으로 앉아 있는가를,
내가 어떤 방식으로 너를 쳐다보며 어떻게 수천 가지의 방법으로
그때그때 움직이는가를.
원리 원칙 따위를 기대하지 말라. 스승의 존재 자체가 그곳에 있는
유일한 원리요, 원칙이다. 진정한 가르침은 가르침의 일종이 전혀 아니요,
그것은 하나의 전수, 말과 경전을 넘어선 하나의 전수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수는 바로 호흡이 맞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대들에게 가르쳐 줄 어떤 원리나 철학, 종교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가르쳐 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지만 가르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아니 가르칠 것이라곤 단지 무(nothing)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전수해 주고 싶은 그 무(無)를 느끼기 위해서는 나와
리듬을 같이 해야 한다. 하찮은 일들이, 아주 하찮은 일들이 방해를 하는 법이다.
그대는 조금씩 조금씩 그 방해물들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저녁 다르샨때 나는 때때로 몇몇 제자들을 불러 내가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전해주는 것을 돕도록 한다. 어느날 나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당혹스러운 잃이었다. 무슨 일일까? 나를 돕던 제자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나를 고도로 사모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불러 나를 돕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것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나는 주시하면서 그 문제의 전모를 파악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 요점을 알아냈던 것이다. 틀림없이 그녀는 고기나
계란같은 야채가 아닌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그녀의 내면적인 조화가 깨져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와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보조를 맞출 수 없을 때는 훼방만 놓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사모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무의식적이다.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더 깨어난다면 그것을 볼 수 있으리라. 나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대들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나와 함께 있고 싶거든,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거든, 가슴과
가슴끼리 만나고 싶거든, 그대들이 지고 있는 불필요한 짐들을 던져버려야
할 것이다. 굳이 고기류를 먹을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명상하는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다. 불필요한 장애물들만 만들어 낼 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부드러움을 파괴하면서 내면에 잔인한 면을 길러낼 것이다.
그대는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대가
나에게 올 때 나는 하나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프라데빠는 그녀 자신의 존재 속에 커다란 부담을 지어왔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아마 그것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고 그래서 알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거듭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에너지로 우리가 연결될 때 그것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에너지는 그대에게 가고 그대의 에너지는 나에게 온다. 그것은 일방통
행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원이 만들어지면서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프라데빠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대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대들이 보다 깊게 나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일어난 그
도(道)를 함께 나누고 싶거든 그대들은 하는 행동과 먹는 음식과 읽는
서적과 듣는 것과 사귀는 사람들에 대해 보다 주의깊고 세심해져야 한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그만 일이라도 모이면 큰 일을 일으키기 때문에
늘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거나 싸운 다음에 나에게 오면 그대는 자연히
나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교회에 기도하러 갈 때
누구를 다치게 했다든가 모욕했다던가 화를 낸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용서를 구한 다음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다. 먼저 가서 사과하라. 먼저 사태부터 수습하라.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시스틴 성당(Sistine chapel)에서 그림을
그릴 때의 일이었다. 그는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거의 완성이 돼 이제는 마지막 손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지막 손질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의 상은 예수와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부드러움과 여성적인 면과
사랑이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친구와 싸웠던 일이 마음에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러
갈 때, 친구나 형제와 좋지 못한 일이 있었거든 먼저가서 용서부터 구하라는
예수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성당을 박차고 뛰어나가 친구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여러 날 동안 나는 그림을 그려 왔다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을
그대로 떠올릴 수 없지 뭔가. 거기엔 화내시는 기색이 남아 있더군."
그의 내면에 분노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난다거나 거북한 감정이 일 때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대의 손과 그림이 그대를 대변해 줄 것이다.
그대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그대의 반영이다. 미켈란젤로는 용서를
구하고 난 다음 완전히 다른 기분이 되어 돌아 왔다. 그리고는 불과
몇 분만에 그의 그림은 완성되었다. 그것은 예수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몇 번의 붓놀림으로 그림은 살아났고 예수의
얼굴은 드러난 것이다. 그때 미켈란젤로의 마음이 조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는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스승과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갖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많은 일들에 주의를
쏟아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단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복잡하다.
단순한 이유는 그대가 정말 열려 있고 조화 속에 있으면 그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 복잡한 이유는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작은 습관들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모든 삶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대들에게 전해줄 어떤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의 자극제로서 나누어 줄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이나 이론 체계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존재를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대를
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대는 열려 있어야 하고 율동적이어야 하며
그대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작은 일들까지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호흡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그대는 사트상(Satsang) 때의 호흡법,
스승과 함께 있을 때의 호흡법, 사랑에 빠져 있을 때의 호흡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감정에 따라 호흡은 끊임없이 변한다. 화가 났을 때 호흡은 리드미컬
하지 못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성적인 욕망에 빠져 있을 때의 호흡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다. 차분하고 조용하며 마음에 기쁨이 넘칠 때의 호흡은
음악적이다. 그대의 호흡은 거의 노래가 된다. 그대의 존재 속에서
안온함을 느낄 때 모든 욕망들이 사라지고, 만족감에 차 있을 때
그대의 호흡은 거의 정지한다. 두렵거나 놀라는 순간에도 호흡은
일순간 정지한다. 이것들은 인생의 위대한 순간들이다. 호흡이 거의 정지된
그 순간에만 그대는 존재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대
속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호흡을 체험함에 있어 보다 깊고 세밀하게 주시하고 관찰하며
분석적이어야 한다. 감정에 따라 호흡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라.
그리고 역으로 감정이 어떻게 호흡을 바꿔 놓는가를 보라. 가령 두려움이
일어날 때, 호흡의 변화를 보라. 그리고 어느 날에는 두려을 때와 같이
그대의 호흡을 바꿔보라. 그러면 놀라게 될 것이다. 두려워할 때의 호흡으로
숨을 쉬면 즉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와 깊이 사랑에
빠져 있을 때의 호흡도 살펴보라. 연인의 손을 잡고 끌어 안을 때의 호흡을
지켜보라. 그리고 어느 날 그냥 나무 밑에 앉아 그때와 같이 호흡을
해 보라. 똑같은 꼴을 만들어 그 형식 속에 한번 빠져 보라. 연인을
끌어 안고 있을 때와 같은 식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러면 놀라게 될 것이다.
이제는 전 존재가 그대의 연인이 된다. 거기에 위대한 사랑이 솟아난다.
그들은 혜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요가나 탄트라도, 이 세 가지의 인간 의식 확장에 관한 과학적인
체계 속에서 호흡이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호흡을 가지고 노력했던 것이다.
붓다의 모든 명상체계도 어떤 종류의 호흡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호흡을 바꾸지 말고 그냥 그것을 지켜만 보라. 어떠한 방식으로도
바꾸지 말고 그냥 보기만 하라."
그러나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지켜보는 순간 그것이 변하는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말한다.
"호흡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켜만 보라."
그러나 지켜보는 순간 그것은 변한다. 지켜보는 것(:얼차려) 자체에는
그 자신의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것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냥 지켜만 보라."고 말한 것이다. 얼차려(:깨어 주시하는
행위)는 그 자신의 호흡을 동반한다. 그것은 저절로 온다. 그리고 점점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얼차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호흡은 점점
줄어 든다. 호흡이 길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 분에 열여섯 번 하던 호흡이 이제는 여섯 번이나 네
번 혹은 세 번이 되는 것이다. 얼차려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호흡도
점점 깊어지면서 길어진다. 그리하여 호흡하는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그것을 바깥으로부터도 할 수 있다. 천천히 조용하게
그리고 깊고도 느린 숨을 쉬는 것이다. 그러면 갑자기 내면에
얼차려가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모든 감정이 호흡 속에 양 극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감정이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그대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나 친구의 옆에
앉아 있을 때 얼차리는 것이다. 호흡을 주시하라. 호흡의 해묵은
리듬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전존재를 변화시킬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분리된 개체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합리와 허』
를 가장 예리하게 느끼는 곳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분리감과 불합리를 통하여
그대는 다른 식으로는 절대로 표출할 수 없었던 것을 표출할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의식으로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모순이 있다. 둘이면서도 하나임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이면서도 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둘 속의 하나, 그것은
바로 사랑의 모순이다. 그것은 또한 기도와 명상의 모순이다. 궁극적』으로
그대는 존재와 일체감을 느껴야 한다. 마치 그대가 어떤 얻기 힘든
귀한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연인, 친구 또는 어머니나 아이들과
일체감을 느끼듯이 말이다. 바로 그대의 타인에 대한 의식으로 자신의 큰
존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베타(Veda)는 말한다. '타뜨바마시(Tattvamasi), 나는 그것이다
(I am that) '라고 이것은 사랑에 대한 위대한 서술이다. 나는 그것이다.
혹은 그대는 그것이다. 거기에는 뚜렷한 분리감이 있지만 그러나 깊은
일체감도 역시 있다. 파도는 바다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순간들을 더욱더 주시하라. 정신을 바짝 차려라. 호흡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펴보라. 몸이 어떻게 떨리는가를 주시하라. 그냥 그대의
연인을 포옹한 채 실험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어느날에는 끌어안고 서로에게 용해되며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앉아
있어 보라.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가장 황홀한 체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서로 끌어
안은 채 서로의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며 용해되고 녹아질 때, 서서히
호흡은 하나가 될 것이다. 마치 한개의 심장에 두 몸을 가진 사람처럼
호흡하게 될 것이다. 함께 호흡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호흡하게 될 때,
그것이 그대의 어떤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너무너무
사랑한 탓으로 저절로 이런 호흡이 뒤따르게 되었을 때, 그것은 가장
위대하고도 고귀한 순간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저 너머
아득히 먼 세상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 그대는 처음으로 명상의 에너지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순간에늘 문법 따위는 거덜이 나고 언어 따위는 가루가
되고 만다.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순간에 언어는 박살이 나고,
바로 그 부서짐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최소한이나마 가르켜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의 스승과의 관계이어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도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불꽃처럼 옮겨 붙을 수 있다.
그대는 호흡의 예술을 배워야 하리라.

이제 경문으로 들어가자.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성과를 구하지 않는 집중된 마음으로 결행(決
行)되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성과가 있게 된다.

무한히 의미깊은 말이며 핵심적인 문구이다. 집중된 마음으로 결행
되어야 한다는 것‥‥‥
첫째,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무언가를 결행할 때만이다. 사람의 탄생은
결행과 함께이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직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이
그러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남에게 기댄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을 대신해서 결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위자라고 하는 사람 주위에 몰려드는 것이다.
권위가 세상에 계속 남아 있는 까닭은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
그들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지시를 받아야 한다. 일단 지시가 주어지면 그들은 거기에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 상태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해서 자신들의 영혼의
탄생을 가로막는다. 결정은 그대의 존재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정할 수 있는 힘 속에서 통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유념하여 몇 가지를 결행해 보도록 하라. 결행은 그대를 개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군중임을 의미한다.
그대 속에서 많은 목소리들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리로 가야 할지 저리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그만 일조차도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 영화를 보아야 할지
저 영화를 보아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거의 삶의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이것을 =
구입해야 할까? 저것을 구입해야 할까? 물건사러 가는 사람들을 한번
살펴 보라. 그 망설이는 모습들을 지켜 보아라. 그냥 아무 가게에라도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살펴 보라. 그러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매하게 헤매면서 갈팡질팡하게 될 것이다.
결정과 함께 사리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만약 그 결정이 장기적인 안목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확실히 거기에는 하나의
탄생이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이야기한다. "제자의 길로 뛰어들어야 할지
어떨지 결정을 못하겠습니다. "라고. 그들은 내가 뛰어들라고 말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것을 놓치게 된다. 만약 내가 "그래
뛰어들라." 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기회, 결정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게 되고
그렇게 해서는 영혼이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은 심오한 결정이자 무한한
의미가 있는 결정이다. 그대의 모든 생활 양식을 바꿔야 하고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그대는 새로운 길을 걷개
될 것이며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장기적인 결정에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 수 있어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해야 하는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감행할 때 거기에 하나의 탄생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명심할 것은 결정했으면 그것은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려거든 결정을 내리지 말라. 그것은 오히려 결정하지 않느니만 못할.
뿐만 아니라 더 위험하기까지 하다. 결정을 하고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게 되면
그대는 아주 무력해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결정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결정을 하고서도 전혀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점점 그들은 그들의 존재 가운데서 신뢰와 확신을 잃게 된다.
그들은 무엇을 결정하든 간에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분열되고 자신을 기만하게 된다. 심지어 그들은
결정을 하는 순간에조차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의
과거와 과거 경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이란 결정은 모조리
따르지 않는 그들인 것이다.
또한 아주 사소한 결정이라도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 아주 사소한
결정, '내일 부터는 담배를 끊겠다'와 같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결정조차도 말이다. 그대가 담배를 피우든 안피우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20년의 세월 동안에 그대는 폐결핵을 앓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치유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이삼 년 일찍
죽게 될 것이다. 일찍 죽었다고 해서 뭐 문제될게 있는가? 실제로는
죽은거나 다름없던 그대인데 말이다.
요 며칠 전에 카툰(cartoon)만화를 본 적이 있다. 한 남자가 여자에게
묻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삶이 존재한다고 믿어요?"
그 여자는 대답했다.
"이게 바로 그거예요"
그것을 믿을 필요 따위는 없다. 이 생활이 바로 그거니까 말이다.
그대가 거의 죽은 삶을 살고 있는데 죽은 후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똑같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아주 작은 결정,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결정이라도
거기에 따르지 않는 것은 아주 해롭다. 그대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그대는 불신감에 젖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결정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계속해서 담배나 피워라. 만약 결정한다면 그대는 얽매이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는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행할
수 있을 때 그대의 어영부영하던 태도가 사라지고 분명한 태도가 갖추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집중된 마음으로 결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사가 의미하는 바다. 결정을 했거든 거기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라는 것. 뒤돌아 서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라는 것. 그것은
내가 나의 제자들에게도 거듭거듭 말하는 바다. 다리를 끊어 버려라.
되돌아 가지 않을 거라면 다리를 남겨놓을 필요가 있는가? 사다리를
던져 버려라. 보트를 없애 버려라. 옛날의 그 바다로 되돌아 갈 그대가
아니잖는가.그대가 만약 보트를 안전하게 남겨 놓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그대가 방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젠가는 떠나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몇 달 전에 아눕(Anup)이 미국으로 갈 때 나는 그에게 말했었다.
돌아을 때는 다리를 완전히 부숴 버리라고. 그는 "예스, 바그완
(Yes"하면서 갔다. 그가 돌아오자 나는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다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는 반 쪽 마음만 갖고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돌아갈 문을 남겨 놓았고 모든 안전 방비를 해 놓은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만약 그가 완전히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는
성장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악순환은 되풀이 된다. 성장이 없으면
그는 몇 달 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리를 없애 버리지 않길 잘했어. 바그완의 말대로 다리를 없애 버렸다면
입장이 난처해졌을 거야.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말이야.
그곳에 모든 걸 남겨놓길 잘했지. 언제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구멍이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리를 남겨놓고 도망칠 문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그는
이곳에서 미지근하고 어영부영하며 확실하지 못해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흔들려서는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집중된 마음에서 나온 결정을
가졌을 때만 그대는 나와 함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에야 성장이 가능하다. 성장은 그때에 가서나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을 잡아라. 그대가 만약 여기에서 온전히 나와
함께 있다면 성장이 가능할 것이며 돌아갈 필요도, 되돌아갈 다리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여기에 머물지 않을 양이면 다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매우 영악해져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길 잘했지. 봐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나다. 만약 다리를 박살내 버렸다면 어디서 내
운명이 끝장나 버렸겠는가? '
합리적인 마음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것이다.

성과를 구하지 않는 집중된 마음으로 결행(決行) 되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성과가 있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성과를 구하면 이미 분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마음이 수행에 들어 있지 않고 결과에 쏠려있는 것이다. 분열되면
그대는 성공할 수 없다. 결실이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여행 그 자체를
마음껏 즐기며 목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분열되지 않는 마음으로라야
성공할 수 있다. 목표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 사람만이 도달한다.
그들의 마음은 전혀 분열되어 있지 않아 여행의 순간순간과 발자국
발자국이 하나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그대로
목표이다. 성공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영적인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성공은 찾아온다.
성공에 마음을 두게 되면 그것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미래의
어떤 곳에 가 있어서 현재의 수행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은
수행이 전적으로 현재 속에서 진행이 될 때만 찾아온다. 지금 이 순간이
다음 순간을 낳을 것이다. 이 순간을 철저히 보낼 수 있다면 다음
순간은 자연히 보다 깊고 보다 고차원적인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 그대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고려해봐야 한다. 이것은 모두다 겪고 있는 문제점들이기 때문이다.
요 며칠 전에 아쇼카(Ashoka)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여기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트야 사이 바바(Sa笭a Sai Baba)의 사진을 그의 방에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문제는 그의 방이다. 그는 누구의 사진도
그의 방에 걸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그는 난처한 상황에 있을 것이다. 나는 말했다.
"사트야 사이 바바에게 가거라. 그리고 거기서는 내 사진을 방에
걸어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도 실패할 것이다. 여기에 있든가
거기에 있든가 하라. 그러나 통일된 마음, 일심(一心)으로 말이다. "
두 마음을 품고 나와 함께 있느니보다는 차라리 사트야 사이 바바에게
가는 편이 낫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문제를 잘 안다. 거기에 가서는
내 사진을 간직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렇게 그는 실패할 운명인 것이다.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결정도 해야 한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양갈래
길이 있고 그대는 선택해야 한다. 모든 길을 동시에 가질 수 없고
모든 길을 한시에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그대가 전적으로 선택한 것이면
무엇이든 옳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가다가 이런 일도 있다.
완전한 귀의(歸依)가 있게 되면 깨닫지 못한 스승 밑에서도
제자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반면에 완전한 스승 밑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문제는 스승이 완전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지 않고 그대가 전체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잘못된 사람 밑에서도 그대는 변형될 수 있다.
그 못난 사람이 그대를 변형시켜서가 아니라 온전한 결정이
있게 되면 그대의 그 온전한 결정이 그대를 바꿔놓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반쪽 마음,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설령 붓다와 함께 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분열, 미래라든가 현재, 목표라든가 과정, 이 길이라든가
저 길, 이 스승이라든가 저 스승, 어떠한 종류의 분열이라도 위험하다.
그대는 에너지만 낭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책임을 다른 사람얘게
전가시키려 들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아쇼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지만, 자연히 그는 자기가 지금
잘못된 곳에 와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는 자기가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잘못된 곳에 와 있다고 생각을 하고는
"이 곳은 나에게 맞지가 않아"라고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간에
그대가 분열되어 있다면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나는 마음의 그 영악한 낌새를 잘 안다. 마음은 이렇게
속삭인다.
"양쪽 다 안될 게 뭐냐. 누가 알아? 양쪽 다 지키면 이쪽이 안될 경우
저쪽이 될지."
그러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대는 링도 먹고 알도 먹기를 원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 법이다.
조사께서는 당부하고 있다. 성과를 구하지 말라고. 그것조차도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떠한 분열도 없이 철저하게 지금 여기에 있을 때,
저절로 성과는 있게 된다. 그리고 저절로 오는 성과는 무한히 아름답다.
그대가 억지로 끌 필요도 없이 그것은 마치 꽃처럼 피어난다.
그대가 강제로 꽃을 피게 할 필요는 없다. 강제로 피게 했다가는 그것을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다. 옳지 못한 짓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계절이
오기도 전에 핀 꽃은 향기도 없을 것이다. 향기를 모으고 향기를 뿌리기
위해서 꽃은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향기가 준비되었을 때
꽃은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기가
준비되었을 때 꽃은 저절로 피어난다. 이제는 다른 존재들과 나누어 가질
무언가가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을 즐겨야 한다. 완전하게 순간 속에 살면서 모든 것을 잊어
버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성공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황금 꽃이 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독자적인 실체로
변모하는 것이다.

수행의 초기에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증상이 있다. 그것은 혼침과 산란이다.

이 두 가지 증상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여성적인 마음의 소산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적인 마음의 소산이다.
여성적인 마음은 흔미와 태만을 유발할 수 있다. 그것은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남성적인 마음은 너무 적극적이라서 산란을 유발할 수 있다.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이것저것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방
팔방 어디든지 가려고 한다. 그러나 여성적인 마음은 소극적이라 일이
일어나도록 기다리려고 한다. 그리하여 무기력 증상이 된다면 그것 또한
위험하다. 여성적인 마음이 태만이라든가 일종의 죽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서는 안된다.
명심하라. 수동성은 긍정적이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이 될 수도 있다.
적극성도 마찬가지다. 적극적인 수동성이란 정신을 바짝차리고 깨어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부정적인 수동성이란 졸며 코를 골면서 그것을
기다림이라고 부르는 경우이다.
연인은 온다. 언제라도 그는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때 그대가 기다리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적극적인 기다림이면 문을 열어 놓고
눈으로 문간을 쳐다보며 귀를 바짝 귀울일 것이다. 발자국 소리나 노크
소리 등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심지어는 바람에 낙엽이 지는 소리에도
그대는 문으로 달려나갈 것이다. 행여나 그가 오나 하고. 행인이 길을
지나가도 그대는 달려나갈 것이다. 이것이 적극적인 기다림이다.
그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그고 불도 꺼버린 채 "그가 와서 문을
두드리면 그때 문을 열지 뭐" 하고 자빠져서 잠이나 콜콜 잔다면,
이것은 부정적인 수동성이요 태만이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좋지만
그대의 수동성은 살아 약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산란이다. 이것은 남성적인 마음의 자질이다. 남성적인 마음은
끊임없이 치달린다. 그래서 여성적인 마음은 한 상대를 원하지만
남성적인 마음은 계속해서 치달리며 여러 상대를 원하는 것이다.
어떤 치마씨라도 지나가기만 하면 거기에 끌리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 버린다. 자신의 여인, 자기의
생명인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고백했던 그 여인을 완전히 망각해 버린다.
나의 기쁨이요, 나의 영원한 사랑이라던 그 여인을 말이다.
순간에 그는 그 모든 넌센스들을 망각해 버린다. 너무도 쉽게 미혹당하고
마는 것이다.
남성적인 마음은 너무 능동적이다. 그 능동성이 적극적일 때는 좋다.
적극적인 능동성이란 집중된 능동성, 한 우물을 계속해서 파대는 그런
흔들리지 않는 능동성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능동성이란 한 때는 여기서 파고
또 한 때는 다른 데서 파며, 온 땅을 혜집고 돌아 다니면서도
결국에는 아무곳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태도를 의미한다. 바로
그런 일들이 남성적인 마음에 일어나고 있다. 이 여자를 사랑하고 저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사랑의 본질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수박 겉만 할다가 끝난다. 결코 깊이도 없고 친밀함도 없다. 서로의
존재 속에서의 실제적인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접촉, 기껏해야 몸과 몸
사이의 성적인 접촉에 불과할 뿐이다. 결코 가슴에는 이르지 못하며 결단코
영혼에는 도달할 수 없다. 가슴에 이르고 영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다리면서 깊게 파야 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의 병이다. 주의하라. 너무 능동적이
되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나태에 빠지지도 말아라. 중간에 머물러라.
수동적인 능동, 능동적인 수동, 바로 이것이다. 그대의 행동 속에는
기다림이 깃들어 있어야 하고 그대의 기다림 속에는 행위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 그때 성공은 확실한 것이 된다. 그것에 대해 근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성공은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상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요령이 있는데 그것은 호흡의 포로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사께서는 아주 중요한 비결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호흡의 포로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호흡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거기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멀리
떨어져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용히 숨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대의
호흡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대는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그대는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닐 것이다.
그대는 초월하여 양쪽인 동시에 그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증상들도 사라질 것이다.
호흡이란 자신의 마음이다. 마음으로 부터 생기는 호흡인 것이다.
마음이 동(動)하는 순간 기(氣)가 생(生)한다. 기(breath)란
원래 변형된 마음의 활동이다.

마음이 산란해질 때면 살펴보라. 호흡도 마찬가지로 산란해져
있을 것이다. 산란하지 않을 때, 이것저것에 끌리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을 때는
호흡도 마찬가지로 차분하고 조용하며 일정할 것이다. 호흡이
악성을 띠게 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정확히 중간에 있는 때이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잠에 빠져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능동적이지도 않고 수동적이지도 않으며 균형이
잡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균형의 순간에 그대는 실재, 하나님 또는 천翁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극히 빨라서 찰라에 빠져드는 망상에도 호흡이 뒤따른다.
내적인 호흡과 외적인 호흡은 마치 목소리와 그 반향처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매일 우리는 수만 번의 호흡을 하고 수만 가지의 망념을 품는다.
그렇게 하여 명석하던 정신은 마치 나무가 말라 죽어 재가
되어 버리듯 쇠하여 간다.

기억하라. 그대의 호흡 하나하나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하나의 생각이요, 하나하나의 감정이며 하나하나의 환상이다. 그러
이것은 며칠 동안 호흡을 지켜본 다음에라야 이해가 갈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있을 때 호흡을 지켜보라. 놀랍게도 그 호홉은 무질서하다.
성적인 에너지는 아주 거칠고 다듬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적인 환상들은 거칠고 다듬어져 있지 않으며 야수적이다. 성욕에 뭐
특별한 거라곤 전혀 없다. 어떤 짐승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 성적인 흥분에
휩싸여 있을 때 그대는 꼭 짐승처럼 행동한다. 그렇다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사실을
사실로써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적인 관계를 가질 때는
언제나 호흡을 지켜보라. 거기에 균형이란 없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사랑하는 법과 호흡을 차분하고 일정하게 유지하는 법을
배웠을 때만 성관계가 허용된다. 그러면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 있게 된다. 기도가 충만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은 성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바깥에서 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점도 없어 보일 것이다.
남녀가 사랑하는 모습은 바깥에서 보면 다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모든 비법들을 개발해 냈던
고대 탄트라 학파가 실험하고 관찰한 바에 의한 그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만약 성행위를 하는 동안 그의 호흡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성한 행위라는 것, 그때 그대는 그대 존재의 깊은 차원에 도달할 것이다.
생명의 신비한 문들이 열릴 것이다.
그대의 호흡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다. 호흡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에 아무런 생각도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생각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데.
숨을 쉬어서도 안된다는 것인가? 숨을 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데.
병에 대해서는 약을 마련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이것이 탄트라의 접근 방식이며 또한 도교의 접근 방식이다. 병에
약을 쓴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탄트라와 도교에 있어 아주 특별한이다.
요가에서는 이야기한다. 성(sex)을 회피하라. 그것을 비켜가라.
성은 위험하다. 그러나 도교와 탄트라에서는 이야기한다. 피하지 말라.
그 에너지를 변형시켜라. 그러면 병 그 자체가 약이 될 수도 있느니라.
그대는 과학자들에게 물어 볼 수도 있다. 그들은 특히 역증요법에 있어
그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병 그 자체로부터
약물을 환자에게 주사하면 그것이 약이 되는 것이다. 최근 대증요법에서
발견된 이 방법은 이미 오랜 옛날에 탄트라와 도교에서
발견된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것은 무엇이나 그 배후에 어떤 커다란 목적이 있다.
그것을 피하지 말라. 피하면 그대는 빈약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덮어두지 말라. 그러면 그대의 내면에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은체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요가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이다. 그는 편히 잠을 잘 수 없다.
불가능하다. 낮에 그가 거부했던 것은 무엇이나 밤에 보복으로
오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억눌러 두었던 것은 무엇이나 잠이
억압이 없게 되면 표면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꿈이다.
요기(Yogi)들, 소위 그 요가 행자라는 존재들은 끊임없이 두려워 한다.
그들은 여자 보는 것을 두려워하며 만지는 것은 아예 덜덜덜  떤다.
그렇게 두려워 하면서 무슨 놈의 자유란 말인가. 그 두려움은 결코
자유를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도교와 탄트라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말한다. 하늘이
준 것은 무엇이든 간에 변형시키라고 조잡한 물질이라도 그 속에는
거대한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에 틀림없다.
그대가 만약 호흡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성적인 에너지는
변형될 수 있다.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분노도 변형된다. 분노가 솟구칠 때
호흡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펴보라. 그리고 다음번에 화가 나거든
그대가 화가 났을 때 숨쉬던 방식으로는 호흡하지 말라.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물론 그대는 화를 낼 수 없다. 그런 식으로 호흡을 하면
분노가 지탱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분노 대신에 연민이 생긴다.
그와 같이 성욕도 사라진다. 성욕 대신에 사랑이 솟아난다. 사랑은 정말
인간적이다. 그러나 성욕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이다.
그리고 어떠한 동물도 사랑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성은 동물적이고 사랑은 인간적이며 기도는 신적(神的)이다. 성은
사랑으로 변형되어야 하며 사랑은 기도로 변형되어야 한다.
성행위 가운데 호흡은 무질서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목적을
갖고 혼돈 명상(chaotic meditation)을 선정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정화(catharsis)이다. 혼돈 명상의 무질서한 호흡은 그대에게 억압
되었던 모든 분노와 성과 탐욕과 질투와 증오들을 뒤흔들어 표면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의 크게 씻어 내는 과정이다.
성 속에서 호흡은 무질서하다. 사랑 속에서 호흡은 음악적이다. 기도
가운데서는 호흡이 거의 정지한다.

마음과 호흡은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빛의 회전과 호흡의 조절이
일치되어야 한다.

숨을 내쉴 때는 양 눈에서 빛이 흘러 나오게 하라. 숨을 들이쉴 때는
그 빛을 도로 흡수하라. 호흡 작용과 빛의 회전 사이에 고리를 만들어라.
이 방법이 그대로 하여금 호흡에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상이다. 그대는 무언가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조사께서는 인간은 생각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상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단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숨을 내쉴 때는 빛이 나가고 있다고 상상하라. 들이쉴 땐 빛이 들어
온다고 상상하라.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대의 상상은 곧 호흡과
연결되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제는 호흡이
보다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도록 하라. 요가의 호흡조절(pranayama)과
같은 특별한 호흡법을 연마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호흡의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호흡도
또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대는 천천히 자신의 것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유념하라. 호흡은 고요하고 평온하며 음악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를 위해서는 귀의 빛(light of 脚e ear)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이제 조사께서는 또 다른 것을 소개하고 있다. 양 눈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나가듯이 양 귀를 통해서도 빛이 들어오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빛이 귀를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는 소리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자들에게 물어 보면 소리라는 것은 전기의 작용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소리는 하나의 전기이다.
조사께서는 그것을 옛날 언어로 빛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소리는
귀를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 눈이 신체의 남성적인 부분이라면 귀는 여성적인
부분이다.
눈이 밖으로 향한다면 귀는 안으로 향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명상법이 존재하고 있다. 눈에 관한 것과 귀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귀의 에너지(earenergy)에 관한 명상법들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다.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할 필요가 없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 또는 음악이라든가 차량들의
시끄러운 소음 등 그저 듣기만 할 뿐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 거대한 침묵이 찾아들고 엄청난 평화가 그대 위에 쏟아진다. 귀를
통해 가는 것이 눈을 통해 가는 것 보다 쉽다. 귀는 수동적이고 공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쉬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으면서 단지 그것이 일어나게만 해 준다. 귀는 받아들이는
문인 것이다.

눈의 빛 (light of the eye)이 있고 귀의 빛 (light of the ear)이 있는 것이다.
눈의 빛은 바깥에 있는 일월(日月)의 광(光)이 결합된 것이요,
귀의 빛은 안에 있는 일월의 정(精)이 결합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정
(seed)이라고 하는 것은 응집의 형태의 빛이다. 근원은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다.

빛과 소리는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인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만간에 과학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선율이 연주되면 불이 켜진다는 것이다. 연주자가 초를
앞엑 놓고 어떤 곡(rage)을 연주하면 초에 불이 켜지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질 것이다. 단지 하나의 전설이나 비유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도 하나의 전기인 이상 일정한 형태의
진동음은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머지 않아 그것을 과학적으로 해내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군인들이 다리 위를 행군해 갈 때 규칙적으로 걷던 발걸음을 맞추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고 한다. 보통 그들은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걷는다.
왼 발 오른 발, 왼 발 오른 발, 그런데 부대가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다리 위를 걸어 갈 때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부대가 다리 위를 이동할 때는 발걸음을 맞추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 것이다.
어떤 일정한 진동이 다리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는 식물과 음악과의 관계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작은
실험이었지만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은 같은 종류의 꽃나무를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름을 주어 각각 두 곳에 심고는 같은 정원사로 하여금
가꾸게 했다. 모든 조건이 두 개의 화분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한 화분에는 라비상카라(Ravi Shankar)의 영창
(sitar)이, 그리고 다른 화분에는 팝 음악이 줄곧 연주되게끔 장치를 " 했다.
그러자 매우 놀랄 만한 현상이 일어났다. 줄곧 팝 음악만 듣고 자란
꽃나무들은 마치 도망치고 싶은 듯이, 그것에 식상해서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기계 장치의 반대편으로 뻗어 나갔다. 게다가 그들은
피는데도 시간이 더 걸렸을 뿐만 아니라 꽃들도 작고 볼품이 없었다.
다른 화분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한편 라비싱
라의 시타 음악을 듣고 자란 꽃나무들은 기계 장치 쪽으로 뻗어가기
시작 했다. 그들은 마침내는 기계 장치를 둘러싸고 포옹하더니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그들의 성장은 다른 것의 두 배나 되었고 꽃들도 훨씬 컷으며
생각보다 일찍 피었다.
식물조차도 소리와 파장의 차이를 느긴다. 오늘날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소음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다. 그 소음들이 너무
급격히 불어나고 있어서 인간이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의 기적이 될 것이다.

근원은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다.

사실 삼라만상은 똑같다. 빛, 불, 전기 등 그대가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그들은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른 것은 오직 겉모습
뿐이다.

그러므로 들음匿諦과 봄(明)은 똑같은 영묘(靈妙)한 빛이다.

이해(understanding)는 귀를 통해, 명료함(clarity)은 눈을 통해 얻어진다.
명료함은 남성적이며 이해는 여성적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여성이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복종할 줄 알고 더 이해할 줄 안다. 남성은 논리적인 명료함, 합1
확증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성은 무언가 다른 것, 즉 분위기 있는 것을
요구한다. 여성은 직관적으로 들으며 말하는 사람의 진동을 느낀다.
무슨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떻게 말하는가, 어디로부터 그것이
발원되는가에 가 있다. 남성은 문자에 몰두한 채 남아 있다.
모든 사람◎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자 형태의 인쇄물과 경전들로 인하여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모든 가르침은 스승의 입을 통해서만
전수되었다. 그것은 말로 전달이 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중심은
귀였다. 이제 책들이 보급되었다. 이전에는 크리슈나(krishna)가 말을 하면
아르쥬나(Arjuna)가 그것을 들었다. 귀로 전달이 되고 커다란 이해가
생겨났다. 변화가 일어났다. 아르쥬나는 여성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오늘날 그대는 기타를 읽는다. 읽는 것은 눈을 통해 일어나지만 그
눈은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눈은 논리적인 명료함을 원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수세기에 걸쳐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자기들의
경전이 문자로 쓰여져서는 안된다고 고집을 하였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그것이 문자로 정착이 되면 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귀는 밀려나게 된다.
나의 말을 듣는 것과 나의 강의를 읽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읽을 때 그대의 마음은 남성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귀로 들을 때는 여성적이
되는 것이다.

좌선(sitting down)할 때는 눈꺼풀을 내리고 양 눈을 사용하여 기준을
정한 뒤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마음을 돌려
호홉에 귀 기울인다. 그 호흡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
소리없는 호흡을 듣는 것이다. 호흡에 소리가 있게 되면 호흡은
거칠고 얕아져서 깊게 뚫지를 못한다. 마음은 아주 가볍고 미미해져야 한다.
마음은 놔버려지면 놔버려질수록 미세해지고 미세해지면 미세해질수록
고요해진다.

호흡에 귀 기울여 보라. 만약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거칠다는 의미이다.
호흡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릴 때 그것은 거친 것이다. 단지
느낄 수만 있을 뿐 들리지는 않을 때, 그것은 잠잠하고 고요한 것이다.
그것이 그대 자신과 존재와 실재가 조화 속에 머무는 올바른 길이다.
호흡이 깊어질수록 그대 자신도 깊어진다. 그리고 때때로 멈출 때‥‥‥
그렇다. 그것은 정말 멈춘다. 그것은 여기 있는 제자들에게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이 내게 와서 묻는다. 호흡이 멈추면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해서 말이다.

극도로 고요해진 마음은 홀연히 멈추게 된다. 그때는 진식이 나타나고
마음의 본체가 의식 되기에 이른다.

그대가 받아 들이기만 하면‥‥‥ 그래서 나는 사구나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멍청이 같은 사구나여, 그대는 놓쳐 버렸다. 다음에 그것이 일어날 때는
놓치지 말아라."
호흡이 멈출 때 참 호흡(true breathing)이 나타난다. 호흡에 의존하지 않고
영원하며, 육체에 구속되지 않고 이 몸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더라도
부서지지 않을 영원한 삶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
찬란한 의식이 빛을 발한다. 그것이 불사(不死)요, 불멸이요, 영
생(永生)이요, 무량수(無量壽)다. 그대는 붓다가 된다. 완전히 얼차린
존재, 완전히 깨어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붓다의 의미이다.

마음이 미세해지면 호흡도 미세해진다. 마음의 조그만 움직임도 기(氣)
에 영향을 주기 태문이다. 호흡이 미세해지면 마음도 미세해진다.
기의 조그만 움직임도 마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기부터 조절해 나가야 한다. 마음을 직접 조절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조절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응집된
기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이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은 움직임의 본성(The nature of movement)을 아는가?
움직임응?외적 수단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그것은 지배
관계를 일컫는 말일 뿐이다. 단순히 뜀박질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런즉 고요한 집중으로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과 기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았던 대성인
(大聖人)들은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보다 쉬운 방법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그대는 알고 있다. ◎박질을 할 때면 호흡이 매우 거칠어지고 점점
빨라진다. 따라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마치 석고상처럼 완전한 침묵
속에 앉아 있는 연화좌(lotus posture)와 같은 요가 자세는 뜅박질의 반대이다.
그것은 단지 그대의 호흡이 고요해지도록 돕는 보조적 수단이다.
뜀박질만으로 빨라지는 호흡이라면 반대로 돌부처처럼 앉아 있을 때는
고요해질 것이다. 아무런 몸의 움직임도 없이 바늘 끝만큼이라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으면 분명히 호흡은 아주 느려지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예 멈출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몇 초밖에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심장마비나 또는 어떤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두려워 하지 말라. 그것은 심장의 발작(heart-attack)이 아니라
신의 발작(god-attack)이다.

"암탉이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으로 항상 듣고 있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중요한 비결이다. 기(氣)를 따뜻하게 함으로써 암탉은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따뜻한 기는 단지 알껍질만 덥히는데 그친다.
그 내부에까지는 침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그
기를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들음으로써 된다. 그렇게 일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음이 들면 기도 들게 되어 온기曠鐵를 얻은
병아리는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탉은 둥우리를 떠나면서도
항상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를 늦추지 않는다. 그와 같이 정신의
집중이 꾼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암탉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암컷, 모든 여성, 모든
어머니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는 뇌성
벽력이 쳐도 들리지 않지만 아이가 울거나 뒤척거리면 마치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즉시 일어난다. 기차가 지나가고 비행기가 씽씽대도
깨어나지 않던 그녀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만 뒤척거려도 그녀는 즉시
깨어나는 것이다. 엄마의 모든 청각은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다.
엄마는 귀를 통하여 아이와 마음이 통해 있다. 엄마는 마치 아이의 고동
소리를 듣는 것처럼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 집중이 깊어지면 자신의 호흡과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수행자들이 귀와 연결되고자 하는
이유이다. 처음에는 호흡이 거칠기 때문에 그것이 귀에 들릴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듣고 있노라면 그 노력 자체가 고요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하여 듣는 것이 깊어지고 무르익어, 이제는 어떻게 깨어
주시하는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모든 소리는 사라질 것이다. 바로 호흡이
멎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환희와 통찰, 견성(見性)과
삼매의 위대한 순간이다.

정신의 집중에 끊어짐이 없고 따뜻한 기도 밤낮 단절됩이 없기 때문에
영혼이 소생하게 된다. 영혼이 소생한 것은 먼저 마음 작용(心)이
소멸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명상 속에서는 갑자기 심장이 죽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을 심장 발작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호흡이
멎어갈 때 그대는 마음도 죽어나감을 느낄 것이다. 사실 그것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마음이 생겨나려는 징조인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죽일 수 있을때 원신(元神)이 소생하게 된다. 마음을
죽인다는 것은 그것을 말라 시들어 버리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갈라지지 않고 모여 하나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만약 마음이 죽어진다면 꽃은 피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을금화
종지』의 비밀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가루도 존재도 없이 사라지듯
죽어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 "고 한 말의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