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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道)의 씨앗을 잉태하고

narrae 2013. 12. 24. 07:25

4. 도(道)의 씨앗을 잉태하고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응집된다.
처음에 이 비결(秘訣)을 행할 때는 마치 유(有) 가운데 무(無)가 있는
것과 같다. 시간이 지나 공(功)이 무르익게 되면
몸 밖에 또 다른 몸이 있어 마치 무의 가운데 유가 있는 것과 같다.
백일공(百日功)을 마친 후라야 참 빛이 출현하여 그것이 신화가 된다.
백일이 지나면 빛 속에서 자연히 일점(一点)의 양광(陽光)이 출현하여
홀연히 진종자(眞種子)가 생성된다.
이것은 마치 부부의 교합으로 잉태가 되는 것과 같다.
이 때가 되면 고요히 하여 기다려야 한다.

원화(元化 : primal transformation )되는 중에는 양광이 주재한다.
물질 세계에서 그것은 태양이 되지만 인간의 경우 그것은 양 눈에
해당한다. 이 에너지는 바깥으로(아래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러므로 금단(金丹)의 도는 전적으로 역법(逆法)에 기초하고 있다.
빛의 회전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상념을 순화시키면 날아오를 수 있지만 정념(情念)에 집중하면
타락한다.
수행자가 상념은 적고 정념이 많으면 하도(下道)에 빠진다.
반조(反,稈.)와 선정(禪靜)을 통하지 않고는 정각(正覺)을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되돌리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한 유명한 선사(禪師)가 대답했다.
"마음이 곧 부처니라."
몇 년이 지난 후 그 제자가 똑같은 질문을 하자 선사는 대답했다.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느니라."
"그러면 왜 전에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셨습니까?"
"우는 아이 달래느라고 그랬던게야. 아이가 일단 울음을 그치면 나는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다고 말하지."

철학이란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장난감,
그리고 신학도 마찬가지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경험과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사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내면의 과학이다. 다른
어떤 과학 못지 않게 종교도 과학적이다. 종교와 과학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방법론상의 것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것일 뿐이다. 과학은 에너지와
빛이 유동하는 객관세계를 탐구한다. 종교는 빛이 흐르지는 않지만
흐르도록 변형될 수 있는 내면의 주관세계를 탐구한다. 그래서 과학은
종교보다 수월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종교가 과학보다 단순하다고
생각되어 본 적은 없다. 그것은 고등 과학이다. 과학보다 단순해질 수 없다.
그것은 한 차원 높은 과학이다.
먼저 빛이 내면으로 홀러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그대의 존재에 가
닿고, 그대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면 그때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에 그대는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만 존재한다.
그대가 존재하는 곳은 껍데기일 뿐이다. 빛이 바깥으로 흐를 때 그대가 존재한다.
그 껍데기 속에만 그대가 존재한다. 그대의 진정한 자아란
'참'자가 붙은 '참자아'이다. 그것은 현재 그대의 」자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참자아'는 만물의 자아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커다란
탈바꿈이 일어나야 한다. 자연은 그대로 하여금 바깥으로 흐르도록
조장해 왔다. 자연의 기능은 끝났다. 인간에 관한 한 자연은 그 한계에
도달하였다. 
이제 인간이 자연보다 더 나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자연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그대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지점에까지 그대를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인간은 이제 어른이다. 자연은 더 이상 그대를 길러주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자연적인 진화는 끝이 났다.
이것은 사실이다. 과학자들조차도 점점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하고 있다. 수천 년이 흘렀는데도 인간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자연의 활동이 끝나버린 듯 인간은 그대로이다.
이제 인간은 성장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아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호기심에 그쳐서는 안된다.
철학은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종교는 매우 진지하고 확실한 탐구이다.
그것은 하나의 공부이다. 그리고 호기심과 공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호기심은 아직 어리고 그냥 머리 한구석을
긁적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긁고 싶어 긁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철학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죽는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철학 속에는 그대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대는 저만치 떨어져 남는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는 있지만 그것이 생사의 문제는 되지 않는다.
지식을 축적하기만 할 뿐 실천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유명한 유교 학자가 있었다. 그는
팔십에 가까운 노신사였는데 그의 학문과 통찰력에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들려왔다. 그의 학식을 능가하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 노신사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서라도 매듭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 여행을 떠났다. 몇 달간의 힘든 여행 끝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한 뒤 방문한 목적을 알렸다.
새로운 선문(禪文)을 이끌어 가고 있던 선사(禪師)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말했다.
"악행을 피하고 되도록이면 많은 선행을 베푸는 것,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전부이지요"
이것을 듣자 그 늙은 유교학자는 발끈하여 소리쳤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먼 길을 왔소
그런데 세 살 난 어린애도 아는 그 따위 말을 나에게 가르치려 들다니.
누굴 놀리는거요 ? "
그러자 그 선사가 말했다.
"놀리는게 아니요 선생. 한번 생각해 보시오 비록 세 살 난 어린애가
아는 것이라도 팔십이 되기까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 아니오."

종교는 어떤 것을 아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살아가는데 있다. 종교는 삶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종교를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태도를 버리고 실험적이 되어야 한다.
각자각자가 실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학자들의 실험실은
바깥에 존재한다. 종교가는 자신의 존재가 실험실이다. 그의 몸, 그위
영혼, 그의 마음이 바로 실험실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실험하고
있는 사물에 집중해야 한다. 이 작업은 눈을 뜬 상태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종교의 작업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실험자와 피실험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다.
헛갈리고 이상하고 이해가 안가고 앞뒤가 안맞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아는·자와 알려지는 것이 동일하다.
과학의 경우에는 양자가 뚜렷이 구분이 된다. 사물들은 구분이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의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아는 자조차도 삼켜진다. 종교는 아는 자와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지식을 주지 않는다. 아는 주체와 동떨어진 체험을 주지도 않는다.
종교는 바로 아는 자의 본질 그 자체를 준다.
종교적인 사람이 되려면 모든 철학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선험적인
(a priori ) 모든 지식을 버려야 한다. 선험적인 지식들은 어느 것이나
방해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탐구하는데 방해만 된다.
탐구 자체가 그 시초부터 기만되어 버린다. 결론부터 내리고서 어떻게
탐구할 수가 있겠는가.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종교적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힌두교도가 되고나서 종교적이 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대가 힌두교라면 어떻게 종교적일 수가 있겠는가? 힌두교도가 됐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이미 진리가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탐구의 의의가 어디에 있는가? 왜 찾아
나서려고 하는가? 그대가 할 모든 행동들은 이미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한
증거나 논점의 수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그대의 결론이 틀린 것일지. 왜냐하면 그대의 결론은 그대의 것이 아니기 빼문이다.
그것은 사회가 그대에게 물려준 것에 불과하다.
사회는 그대에게 결론을 부여해 주는데 관심이 있지 그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의식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가 깨닫기 전에, 어떤 탐구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회는 그 탐구를 가로막는
온갖 종류의 결론을 부여한다. 탐구자는 사회에 위험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탐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매우 편리하고 고분고분하다.
그는 단순히 명령과 지시를 받고 그것을 따른다. 그는 틀에 박힌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다. 누군가 마음에 믿음을 심어주는 작은 행위도 그를
마취시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의 마약이다. 믿기 시작하면 사람은 계속해서
믿는다. 차츰차츰 그는 그 믿음이 자신의 경험이라고 여기게 된다.
믿음은 일종의 최면이다. 그대는 어린 아이에게 계속해서 암시를 준다.
너는 기독교도다, 너는 기독교도다 라고 그리하여 그를 교회에 데리고 가고
소위 종교 행사니 예배니 하는 것들에 잡아 넣는다. 마침내
그 아이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하나의 틀에 짜맞추어 넣어져 기독교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그르다고 생각한다.
그와 똑같은 일이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마취당한다.
의식은 근원부터 오염당한다. 그리고 그대가 믿기 시작하면
거기에 대한 온갖 종류의 논거와 예증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자의식
( ego )이 개입된다. 이제 그것은 진리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다. 배후에는
너와 나 둘 중에 누가 옳으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게 된다. 어떻게
내가 틀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옳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을 지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끌어모으게 되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매우 복잡해서 온갖 종류의 것이 발견되어질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무엇을 결정하든 상관이 없다. 비관주의자는 삶 속에서
그와 비관주의를 증명하는 온갖 증거들을 찾아낸다. 낙관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삶은 이원적이다. 삶은 역설적이며 복합적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렇게도 많은 철학과 사상과 신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신학은
자신이 내린 결론의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철저하게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
신앙인들이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자각하게 된 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이다.
이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신앙인들까지도
의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도들은 그렇게 득의에
차 있지 못하다.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은 불교도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기독교도들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쥐고 있다고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기독교도 뿐만 아니라 불교도와 이슬람교도와 도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이 시대는 너무나
혼란되어 있는 것을‥‥‥ 일찌기 세상이 이렇게 혼란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혼란은 위대한 축복이다.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일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있어서의 이 혼란은 새로운 여명에의 시초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이슬람교도도 기독교도도 힌두교도도 아닌 그냥 탐구자들이
될 것이다. 믿음과 신앙의 암흑이 사라지고 있다. 미래에는
어느 누구도 믿는 일을 그만 둘 것이다. 시람들은 탐구하고 발견하면서
자기 확신이 설 것이다. 믿음은 빌어온 것이지만 자기 확신은 자신의
경 험 이다.
내가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미래에 출현하게 될 그런 종류의 종교이
다. 나는 현재의 그대들에게 미래를 가져다 주고 있다. 나는 그대들을
순수한 탐구자로 만들고 있다. 아무런 신앙 체계도 없이, 결론도 없이,
실험에 뛰어들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면서도 진리만 받아
들이는 열린 가슴의 소유자들로_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닫힌 자들이다. 그의 문과 창은 닫혀있다.
그는 일종의 감옥 속에서 산다. 그는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가
창문을 열어 젖히면 햇빛과 바람이 들어오고 빗방울이 들어와 그의 신
앙 체계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만약 진리의 바람이 사방으로부터 불어
오면 그는 그의 신앙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진리를 외면해야
한다. 그는 폐쇄된 세계, 창문도 없고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혼란시킬
수 없어 계속해서 그의 신앙을 보호해 나가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개인의 건강
에 대해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사회는 그대가 가지고 놀 장난감들을 계속해서 주어 왔다. 마치 성가
시게 구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장난감을 주듯이. 부모들은 속이 편하
다. 그래야 아버지는 신문을 읽을 수 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을 할
수 있다. 어린애는 장난감에 빠져 있다.
인도의 시골 마을에서는 이것이 풍습처럼 되어 왔다. 들에 일하러
나가는 가난한 부인네들은 애들까지 데리고 나가야 한다. 큰 아이 같으면
혼자 놀 수 있지만 어린 아이는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엄마들의 골칫거리이다.
배가 고프거나 오줌을 싸거나 추우면 그들은 울어댄다. 그러면
엄마가 와서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일손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주인은 허락하려 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어린 아이에게 소량의
아편을 먹이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어 버렸다. 아편을 먹은 아이는
나른한 잠에 라진다. 그가 꿈나라에 있는 동안 엄마는 일에 전념할 수
가 있다. 일을 위해서라면, 엄마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농장 주인을 위
해서라면 이젓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건강에 대해서는 위험하
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믿음을 던져줌으로써 그대로 하여금 실험할 필요도, 탐구할
필요도 없게 만든다. 탐구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어 훌륭한
사무원이나 시민, 경찰관 또는 유능한 수집가가 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맹목적인 믿음을 거부한다면 그대는 탐구하느라 바쁠
것이고 내면적인 것에 점점 더 관심이 많아져 바깥일 따위는 잊어 버릴
것이다.
사회는 그대가 외향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대가 보다 효율적이
고 보다 쓸모있게 되기를 바란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폭탄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더라도 보다 유능하고 쓸모
있어야 한다. 군대에 있더라도 항상 능률적이고 고분고분해야 한다. 그
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가 하는 일이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것은 문제
가 되지 않는다.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따라야 한다. 그
대열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탐구자가 될 때 거기에 위험이 뒤따르게 된다. 그대는
더욱더 내면으로 향할 것이다. 그대의 가치관이 변하고 우선 순위가 뒤
바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따위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야망이나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것이며 재산에 대한 배려도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내면의 부와 내면의 천국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사회에 대해서는 점점 비능률적이 되어간다.
그리고 사회는, 내적인 것을 추구하며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삶이 많을수록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을 허용하려 들지 않는다. 명상하는 삶이 많을수륵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가들은 과거에 저질렀던
것과 같은 실수들을 더 이상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면 전쟁은 저절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러면 누가 싸우기를
원하고 누가 서로 죽이고 살해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런데 폭력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양 채색되고 있다. 국가의 이
름을 빙자한 살해,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를 빙자한 살인 등, 그러나 사
실 살인이란 것은 교회나 기독교나 국가 따위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
은 파괴와 살상과 미친 짓들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를 보면 거의 십 년마다 큰 전쟁이 일어난다. 崙을대로 곪은
인간의 마음이 십 년쯤 되면 터지고야 말기 때문이다. 자신들 속에 너무나
많은 독소들을 축적해서 더 이상 담아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광란이 발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다 더 안으로 향하게 된다면 전쟁도 사라지고 정치도 사
라질 것이다. 사람이 내면으로 향하면 물론 그들은 비능률적이 될거고
또한 능률적이 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
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미친듯이 일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러나 보다 기쁘고 행복하며 보다 축제 분위기일 것이다. 그들은 필요한
것은 충분히 만들어 내지만 불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것이
다.
그러나 우리는 불필요한 것, 쓸데없는 것들에 너무나 많은 관심들을
쏟고 있다. 그것이 없이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뛰어야 한다고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을 발
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그대를 믿음으로 마취시키고 그대의 탐구 정신을 시초부터 파괴한다.
그러나 종교는 그대의 탐구 정신을 되살려 낸다. 종교란 그대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명심하라.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고 매우 진지한 탐구이다. 자
신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자신을 알지 못
한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운명을 읽을 수 있겠는
가? 물론 거기에 소음은 가득하겠지만 음악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머
리 굴리는 일은 많겠지만 축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리저리 오
가고 끊임없이 돌진하겠지만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겠지만 삶의 환희와 존재의 아름다
움은 맛보지 못할 것이다. 앓의 첫걸음이자 그대에게 가장 가까운 그대
존재의 환희와 기쁨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첫 발자국은 자기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
심이 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지만 호기
심은 결코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가려운 곳을 잠간 긁는 것에 지나
지 않는다.

옛날에 한 여관지기가 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낙담한 끝에 한
현명한 부인에게 .臺움을 청하게 되었다.
사례금을 받아 넣으면서 그 부인이 말했다.
'◎것은 아주 간단해요 여관 이름을 바꾸면 됩니다. "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그것은 '황금 사자 여관'으로 불러 왔는걸요"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바꾸도록 하세요 간판을 '여덟 종'이라고 바꾸고 일곱 개의
종을 문간에 달아놓도록 하세요"
그가 말했다.
"일곱 개를요? 말도 안되요 그게 무슨 효험이 있겠어요?"
"잠자코 가서 해 보시구려."
그 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와 그녀가 시킨대로 해 보았다. 그러자 매일같
이 길손들이 그 앞을 지나다가 멈추어서서 벨을 세어 보고는 잘못을 지
적해 주기 위해 서둘러 여관으로 들어왔다. 마치 자신들이 유일하게 그
것을 발견한 사람인 양 착각하고 들어와서는 여장들을 풀고 휴식을 취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주인은 큰 돈을 버는 부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여관의 이름은 '여덤 종'인데
표시는 '일곱 개의 종'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어 그들을 사로 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따위 호기심을 가지고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
람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진리에 관해서 묻는다. 그러나 묻는
눈빛을 보면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
듯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격식있는 이야기
는 된다. 그러나 거기에 몰두하여 열정작으로 찾는 사람은 없어 보인
다.
만약 그대의 찾는 행위가 아주 열정적이고 진지하고 몰두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대는 그대 존재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작
업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호기심으로 나선 사람은 그와 같은 많은 작업
을 할 수 없다. 호기심은 그대를 변화시키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다. 그
것은 아주 작고 미약한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 알고자 하는 진정한
열정이 있어야 다가오는 모든 거려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언덕을 올라가는 작업과 같다.
그러므로 『태을금화종지』에 있어서는 우선 이것부터 이해하라. 철학적이
되지도 말고 사회의 꼬임에 넘어가지도 말며, 믿지도 말고 불신하지도
말라는 것.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믿지 말라'는 것은 불신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불신도 일종의 믿음, 즉 부정적인 믿음이다. 내가 말하는
믿지 말라는 것의 의미는 믿음도 불신도 둘 다 버리라는 것이다.
아무 결론도 내리지 말고 그냥 마음을 열어두라. 그대의 무지를 숨기려
들지 말고 그냥 그대의 무지를 깨닫기만 하라. 그대는 순진한 바보가
되어야 하며 '나는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모든 정의(正義)는 '나는 모른다'로 시작된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지식인인 양 행세를 하게 되면 그 믿음이 장애를 만들고 거짓 경험들을
창조해낼 것이다. 그리하여 그 믿음에 중독되게 되면, 그리고 실제로
믿음은 LSD나 마리화나나 히로뽕과 같아서 그 믿음에 중독될 경우
환각의 세계가 펼쳐지면서 상상의 날개는 제 멋대로 날게 된다. 그대는
더 이상 실제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여 하나
의 얼간이로 전락한다.
그것이 '얼간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살면서 자신의
꿈을 구축하여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사람, 그러나 그의 상상
은 너무나 실제적이라서 현실이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LSD
나 마리화나나 다른 종류의 마약을 먹을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런
젓이다. 그대 속에는 작은 환상의 나라가 만들어진다. 매우 휘황찬란하
다. 적어도 그대가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동안은 그렇다. 그리고 중독
되어 있을 때는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실제인 것처럼 여겨진다.
매일같이 이런저런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한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
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약을 통해서 입니다 라고 그대가 알게 된
것은 꿈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마약이 그대의 비판적인 안목을 마비
시켰을 뿐이다. 마약이 이성을 중독시키기만 하면 그 때부터는 꿈의 세
계가 제멋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적인 안목이 결여될 때 이
성의 기능이 상실되고, 상상력이 제 멋대로 작용할 때, 그 때는 마치
궁극적인 진리가 성취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화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중독에서
완전히 깨어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완전히 벗어난 사람, 그만이 진리
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저명한 심리학자였던 월리암 제임스( William
James)가 아산화질소의 흡입으로 소위 그가 말하는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마약 복용자가 없었던 관계로
그는 몇 안되는 경험자들 중의 한 사람이였다.
아산화질소의 효력으로 그는 자신이 궁극적 진리와 조우했다고 생각
했다. 그는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소수의 사람
들이나 하는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즉시 노우트에 메모를 남
겼다. 그는 그의 의식에 정말 무한히 값진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자각
할 정도로 정신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즉시 기록해 두어야만 했다. 누
가 아는가? 혹시 그가 깨어났을 때는 그것을 잊어버릴지도 그래서 그
는 기록을 남긴 후 그가 조우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약
기운이 가실 때를 기다렸다. 그는 자신이 부처나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하나님이나 혹은 우파니샤드의 기록자들과 노자, 짜라투스트라, 또는
모하멧이 보았던 그런 어떤 것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 정신
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노우트를 보고 그는 매우 당황하고 놀라게 되
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여러 부인네랑 얼씨구,
여자는 한 남편네랑 절씨구.

이것이 바로 그가 조우했다는 그 '궁극적 진리'였다.
제 정신이 아닐 때는 아무리 우스운 일이라도 절대적으로 보인다. 이
성이 작용하지 않고 비판적인 능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때는 어떠
한 어리석은 일이라도 그렇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어리석지가 않다.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로 보여지는 것이다.
알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는 말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LSD를 복용했을 때, 그는 흔해 빠진 의자가 놓여 있는 평범한 방에
앉아 있었다. 일단 LSD가 작용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왔던 것이다. 그것은 광채가 나고 있었
다. 의자로부터 사방으로 휘황찬란하고 황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의자는 예전의 그 의자였다. 그 모든 게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상상력의 작용일 뿐이다. 그대를 미치게 한 것은 바로 그
LSD이다. 그것이 모든 비판적인 능력들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믿음은 의심의 적이지만 신뢰는 의심의 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뢰는 의심을 통하여 자란다. 믿음은 의심을 억누름으로써 자
란다. 그래서 믿음은 일종의 마약이다. 마약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
이다. 회의하는 능력에 의해 사람은 바보로 전락하지 않고 상상의 희생
물이 되지도 않는데 마약은 바로 그 능력을 억압해 버리는 것이다. 그
리고 수세기 동안 종교가 해온 짓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말
한다.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믿으라. 의심이 생기
면 그것을 억누르라. 집어던지고 나와 덮어놓고 믿으라. 그들은 계속해
서 지껄인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으라. 그러면 보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중독당하지 않은 의식, 열린 의식으로부터 발원한다. 믿는 것도 안믿는
것도 아니며,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고 그냥 자유롭고 한가할 뿐이
다.
의심도 쓸모는 있다.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까지는 도움이 된다.
의심은 신뢰의 친구이다. 의심하는 과정이 있음으로 해서 그대는 상상
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상력은 파괴만을 일삼아 왔
을 것이다.
가령 그대가 힌두교도로 태어나게 된다면 쿤달리니( kundalini )에 대
해서 읽고 듣게 되어 그 모든 경험들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언제라도
그 뱀의 힘은 척추 밑으로부터 풀려나와 웅장한 소리를 발하면서 일곱번재
차크라를 향하여 돌진할 것이다. 그것을 믿어온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경험은 너무나 실제적이라서 의심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러
나 예수는 결코 쿤다리니 현상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모하멧도 거기
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힌두교도로 태어난 붓다조차도‥‥‥ 그
러나 그는 매우 진실한 탐구자로서 모든 종류의 믿음을 던져버렸기 때
문에 쿤달리니 현상과 만날 수 없었다. 마하비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
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짜라투스트라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들이 놓쳐 버렸단 말인가? 그것
은 믿음이:다. 그대가 일곱 개의 차크라가 존재한다고 믿게 되면 그것들
은 그대의 삶에 있어 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대가 무엇을 믿든 그것은
사실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현대엔 쿤달리니 에너지 학설을 제창한 고삐 크리슈나( Gopi knshna
)는 십삼 년 동안이나 좌정하고 앉아 쿤달리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고 한다. 십삼 년은 긴 세월이다. 십삼 년 동안이나 쿤달리니의 존재에
대해서 믿고 척추를 들여다 보면서 기다릴 수 있다면 일어난다 해도 그
것은 기적이 아니다.
어느날 그것이 일어났다. 뱀은 또아리를 풀고 마치 폭포소리와도 같
은 웅장한 소리를 발하면서 돌진하여 뇌를 관통했다. 그 이후로 고삐
크리슈나는 자신이 천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희 쿤달리니가
상승한다면 그대도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천재성
이 과연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그는 몇몇 바보 같은 시, 삼
류에도 끼지 못하는 하찮은 시는 쓴다. 만약 그런 것이 천재라면 사람
들은 쿤달리니를 차라리 아래에 잠재워 놓는 것이 나으리라. 무슨 놈의
천재가 그렇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믿게 되면 그것은 사실로 나타난다. 그래서 위험하다. 믿음으
로 시작하지 말라.
도교의 시각은 이렇다. 탐구하고 실험해보고 그리하여 저절로 결론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제 경문으로 들어가자.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음양의 기가 응집이
된다.

그대의 의식은 바깥으로 흐른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구태여 믿
을 필요조차도 없다. 그대가 사물을 볼 때 그대의 의식은 대상을 향하
여 흐른다.
예를 들어 그대는 지금 나를 보고 있다. 그러면 자신은 잊어 버리고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때 그대의 에너지는 나를 향하여 흐르고 그대
의 귀는 나를 향하여 열리게 된다. 이것은 바깥으로의 유출이다. 그대
가 꽃을 보고 매료되면 꽃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자신은 잊어버리고
꽃의 아름다움만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안다. 매 순간 그것
이 일어나고 있다. 잘 생긴 여자가 지나가면 갑자기 그대의 에너지는
그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빛의 이러한 바깥 유출을 잘 알
고 있다. 이것은 극히 일부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매순간 빛은
바깥으로 새어 나간다. 그대는 자신은 망각해 버린 채 장면만을 의식하
게 된다.
빛은 안으로 회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의식할 수 있도록 그
대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어야 한다 그때 자각
( self-knowledge )이 일어난다. 보통 우리는 반쪽 인생을 살고 있다. 반
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다. 현실이 그렇다. 그리고 빛은 점점 바깥으
로 흘러나가 되돌아 오지 않는다. 그대는 점점 안으로 허해지고 궁핍하
게 된다. 그리하여 블랙홀이 되미 버린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서 커다란 규모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제야
물리학자들은 블랙홀들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도교인들은 훨씬 전에
블랙홀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그들은 우주 공간에 있는 블랙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 내면에 있는 블랙홀에 관심이 있었다. 블랙홀이란
그대의 모든 에너지가 소모되고 고갈되어버려 텅빈, 그 에너지의 근원
을 그대가 다시 충전시킬 수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과학자들은 에
너지가 계속해서 방사만 되고 돌아오는 것은 없기 때문에 태양은 조만
간 블랙홀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무한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수백만 년 동안 태양 에너지로 해서 나무와 꽃과 사람과 짐
승과 새들이 살아왔다. 수백만 년동안 태양은 태양계에 에너지를 공급
해 온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소모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그리하여
어느 날 그것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남아있는 에너지가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다. 갑자기 모든 빛이 사라지고 마지막 빛줄기마저도 자취를 감
추고 말 것이다. 그때 그것은 블랙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로 이런 식의 삶을 산다. 이러한 계속적인 유출 때문에
그들은 블랙홀들이 되어간다. 이것을 보고 저것을 보며, 에너지를 보는
자에게로 회수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상에만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에
너지의 방류이다. 삼십 세가 되면 삶은 거의 끝장이 나 버린다. 이제
그는 하나의 블랙홀이다. 칠십에 이르러서 무덤에 묻히지만 ,사람들은
.삼십 세 안팎에 이미 죽는다. 무덤에 묻히는 것은 별개 문제이고 그들
이 죽는 것은 삼십 안팎이다. 그리고 나는 히피들의 생각에서 한 톨의
진리를 본다. 삼십이 넘어서까지 살아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드
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블랙홀이 되고 소모되고 완전히 고갈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어떻게 그럭저럭 연명은 해 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채로 산다. 마
치 과거의 기세가 그들을 살아있게 해 준 듯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자전거를 탈 때 그대는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
러나 간혹 가다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아까 밟아놓은 페달의 여력으로
해서 자전거는 얼마간 11속 달린다. 내리막길일 경우는 더욱 멀리까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삼십이나 삼십오 세 이후로는 인생은 내리막길이

다. 삼십오 세가 절정이다. 삼십오 세 이후로 그대는 내리막길이다.
그대는 아무 에너지가 없이도 털털거리며 굴러갈 수 있다.
도교인들의 경험은 만약 되돌리는 비법만 터득한다면 유출을 통하여
소모되던 에너지가 점점 응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모든 집중의 과학이다.
다음에 시간을 내서 거을 앞에 서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보라. 그대는
거울을 바라보며 거을 속의 자신의 얼굴과 눈을 응시한다. 이것은 유출
이다. 물론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반사된 그대의 얼굴이지만 그것
도 하나의 대상이다. 이번에는 잠시동안 모든 것을 거꾸로 해 보라. 거
울 속의 영상에 의해 그대가 바라다 보여진다고, 즉 그대가 영상을 바
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을 속의 영상이 그대를 바라다보고 있다고 느껴
보라. 그대는 아주 이상한 공간에 있게 될 것이다. 잠시동안 만이라도
그것을 시도해 보라. 어떤 무한한 에너지가 그대 속으로 흘러 들어와
그대는 아주 생기에 넘치게 될 것이다. 전에는 전혀 이것을 알지 못했
었기 때문에 아마 깜짝 놀라게 되리라. 그대는 에너지의 완전한 원
( circle )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도교 경전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누구나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인 것 같다.
욕실에 들어 가거든 우선 반사된 상을 바라보라. 그대는 바라보는 쪽
이고 반사된 상은 대상이 된다. 이제 상황을 거꾸로 바꾼다. 그러면 보
는 자는 거을 속의 상이요, 그대 자신은 하나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느
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면서 엄청난 에너지
가 그대 속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해 본 적도 없고 안 적도 없기 때문에 처음에 그대는 매우 놀랄 것이
다. 미쳐버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몸이 떨리고 진동이 일어날 것이다.
또는 깡향감각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줄곧 외향적으
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면으로의 회귀는 서서히 터득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은 완전하다. 며칠만 그것을 해보면 하루 종일 얼마나 생기가
넘치는지 놀랄 정도일 것이다. 단지 몇분간만이라도 거을 앞에 서서 원
이 완전해지도록 에너지가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해보라. 원이 완성될
때마다 거기에 위대한 침묵이 있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원은 불안정을
창출한다. 원이 완전해지면 휴식이 창출된다. 그대 속에 중심이 생겨나
는 것이다. 그리고 중심을 갖게 되면 파워가 생기게 되는데 그 파워는
그대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도해 볼 수가 있다.
장미꽃을 바라볼 때 처음 몇분간은 꽃을 응시하라. 그러다가 반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라. 이제 장미꽃이 그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때 그
대는 장미꽃이 얼마나 많은 에넌지를 보내주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마
찬가지로 그것은 나무와 별과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가
장 좋은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다. 그냥 서로의
눈을 바라다 보라. 처음엔 상대편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되돌아 오는 에
너지를 느끼기 시작하라. 돌아오는 선물이 있다. 새로운 에너지가 물붓듯
쏟아져 그대를 가득 채울 것이다. 그대는 생명력이 충일되어 젊음이
넘치게 될 것이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응집된다.

이것은 빛을 원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대의 빛은 반원으로 움직
인다. 나가기만 할 뿐 되돌아 오지는 않는다. 조만간 그대는 블랙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원이 완성이 된다면 그대는 화이트홀이 될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블랙홀 이후로 화이트홀도 발견하게 되었다. 화이트홀은
에너지의 창고로서 블랙홀의 정반대이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천지(天地)란 안과 밖, 위와 아래,
하나님과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알님을 지칭하고 땅은 드러난 세계를 지칭한다.
하나가 된다. 그때 그대는 단순j
아니다. 하늘의
의 존재
가 아니다. 더 이상 일개 인간이
된 것이다.

수 없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을 의미

한다. 하늘은 하나
원이 완성될 때 그들은
히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요소가 그대를 관통한 것이다. 이제

인간( human )이란 말의 어근을 기억하라.

머스( humus )라는 말에서
람은 휴먼( human )라는 말에서
래서 휴먼이라고 불리운다.
그대는 생명의 광휘를 알게 된다.

그것은 에너지가 되돌아와야만 가능하다.

든지 회수될 수 있다. 거기엔 아무런
득하면 된다. 그
푸르른 나무를

f 것처럼, 나무의 모든 물기가
대는 그렇게도 생기가 넘쳐난다.
것이다. 취하는 데에 이제는 더 이상
는 달로 완전히 취해버릴 수가 있다.
그대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되돌려 줄
인도의 고대 경전인 리그 베다에는
있다. 과학자들은 소마가 SD와 같은
은 그것이 기후의 변화
섯종류였을 것이라고도
것에 대해 망각해 버린
느 깊은 계곡에서
위험한 젓이라서

그대는 더 이상 땅
아니다. 그대는 신성한 존재가

그것은 땅을 의미하는 휴
왔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사

왔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
그 먼지가 신성으로 빛을 발할 때 그때

그리고 에너지는 어디서
문제도 없다. 단지 비법만 터

요령만 터득하면 그것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바라보면 마치 나무의 모든 수액이 그대에게 궁르

그대 존재 속에 홉입된 것처럼, 그
달을 바라보아도 그대는 놀라게 될

술이나 마약이 필요없다. 그대
회수하는 요령만 안다면 달은
것 이 다.
소마( soma )에 관한 이야기가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학자들
때문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히말라야의 어떤 버
생각한다. 만약 사라지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
것일 거라고도 생각한다. 그것은 히말라야의 어
번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머쩌면 그것이 너무
고대의 현자들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숨겨버렸는지도

 

* SCAN0010.PCX *

모른다.
알더스 헉슬리는 소마가 궁극적인 마약이었으며 장차 우리가 궁극적인
마약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소마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에서 소마가 달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래서 힌디어( Hindi )로는 월요일이 소
와르( somwar )이다. 달의 요일인 소와르, 소마는 달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버섯의 이름도, LSD, 마약의 일종도 아니다. 그것은
달과 하나가 되는 비밀스런 과학이다. 그리고 바다가 달의 영향을 받듯이
만약 달로부터 에너지를 거두어 들일 수 있다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엄청난 기운과 위대한 감로가 그대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도 그대는 흠뻑 취할 수가 있다.
달은 그대 존재의 중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그대를 차갑고
평온하게 만들 것이다. 달은 여성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을 포옹할 때 갑자기 커다란 침묵과 고요가 가슴속에서
일어나듯, 달로부터 에너지가 회수될 때는 똑같은 일이 아주 큰
규모로 일어나는 것이다.
달은 여성 원리이다. 반면에 태양은 남성 원리이다. 달은 음이요,
해는 양이다. 달은 그대에게 젖을 줄 수 있다. 어떤 버섯을 찾아 히말라야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 버섯은 언제나 하늘에 있다. 달이 바로 그
버섯이다. 그대는 에너지를 회수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달 뿐만 아니라 태양으로부터도 에너지를 얻어내는 비밀스런 방법들이
있어 왔다. 태양숭배는 어떤 기법으로부터 왔다. 많은 태양 신전들이
세워졌다. 코나라크( Konar泳 )의 태양 신전은 태양에 대한 찬양의
표시이다. 그것은 단순한 숭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양의 에너지를 얻어내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것은 특히 여성에게 좋다.
잠재적인 여성원리가 활성화되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태양 숭배자가 되는 것이 좋고, 남성은 달 숭배자가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숭배는 단순한 의식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응집된다.

빛과 어둠은 남성과 여성, 가벼움과 무거움, 은혜와 중력, 생명과
사망, 동과 정을 상징한다. 이 모든 것들이 빛과 어둠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빛이 원으로 움직이게 되면 그대는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모르게 된다. 외향성은 양의 원리요, 내향성은
음의 원리이다. 여성은 자연적으로 내향적이고 남성은 외향적이다.
심지어 사랑행위를 하는 동안에도 남성은 눈을 뜨고 한다. 그는 엿보고
싶어하는 눈도둑이다. 여기서 포르노 사진이 가능하게 된다.
여성은 아무도 포르노 사진에 관심이 없다. 그 속에서 아무런 요점도 발견하지
못한다.
애인과 사랑행위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눈을 감는다.
여성은 내향적이며 그녀의 에너지는 안으로 흐른다.
그러나 에너지는 원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성은 남성으로
남게 되고 여성은 여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둘 다 반쪽들, 똑같은
하나의 반쪽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매력이라는 것이 있게 되고 서로를
요구하게 된다. 그대가 에너지를 원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이성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 속의 남성과 여성이 만나 서로의
속으로 용해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제 전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전체가 되는 것은 신성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요,
탄트라이다. 전체가 된다는 것은 신성해진다는 것이다.

빛이 회전하게 되면 천지 음양의 기가 응집된다.

칼 구스타프 응( Carl Gustav Jung )은 이러한 결정화(結定化)를 가리켜
개성화( individualization )라고 불렀다.
대개 그대는 단지 분열된 외가리들이거나 아니면 군중들로 존재한다.
그대는 많은 자기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나' 작은 '나', 그리고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온갖 투쟁과
경쟁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그가 바로 여럿으로 나누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여럿인데 어떻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한쪽이 '이것을
해:라고 하면 다른 쪽은 '안돼:라고 하고 또 세번째 부분은 '다른 것을
하자:라고 하는데 말이다.
어느 쪽을 따르든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반대하던 다른 부분이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못됐다. 다른 쪽이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우겨댈 것이다.
"만약 나를 따라왔더라면 지금쯤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보아라.
나를 따르지 않은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따랐더라도 다른 목소리들이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럿으로 분열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하나가 된다면 만족감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여럿일 때
불만족은 당연하다. 여럿일 때 그대는 끊임없는 갈등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일 때 갈등은 사라지고 근원으로 되돌아 간다. '
이것이 바로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결정화(=응집)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은 빛을 회전시켜 그대 속의 음과 양이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빛은 바로 그대가 숨을 쉬는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그대는 들이마시고 내쉰다. 단지 내쉬기만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는 살 수 없다. 그의 육체는 죽을 것이다. 또는 들이마쉬기만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 역시 살아남지 못할 젓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대의 영혼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대의 영혼은 죽어버렸다.
그대는 단지 빛을 내뿜거나 아니면 들여마시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슁과 들이슁이 하나의 른, 일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깊게 내쉬어라. 그리고 깊게 들이마셔라.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호흡이 필요하듯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다. 그대의 의식이 반쪽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원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남성 역시 여성이 되는 떱을 알아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정도에
이르렀을 때, 남성과 여성이 완전히 균형을 이루었을 때 그 상태가 바로
결정화요, 개성화다. 거기에서 영혼이 탄생하는 것이다.


처음에 이 비결(秘訣)을 행할 때는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비결(mnic)이다. 그 효과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처음에 이 비결을 행할 때는 마치 유(有)의 가운데 무(無)가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블랙홀'이다.

처음에 이 비결을 행할 때는 마치 유의 가운데 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대는 마치 유( being)에 둘러싸여 있는 무(non being )의 섬, 즉
블랙홀과 같다. 나무와 별과 새와 대지와 모든 것이 살아있지만 그대만은
죽음의 블랙홀이다. 이 거대한 유와 바다에서 그대는 무와 같다.
이것이 이 비결을 행할 때 일어나는 상황이다.

시간이 지나 공(功)이 무르익게 되면 몸 밖에 또 다른 몸이 있어 마치
무(?刻의 가운데 유(有)가 있는 것과 같다.

그때 모든 것이 변한다. 그대는 유가 되고 화이트홀(white hole )이 된다.
그대는 극도로 융합되고 결정화 된다. 거기에 비하면 태양과 달과
나무와 새, 그리고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붓다를 보라.
그의 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를 무색하게 한다. 그는 삶, 그것도 영원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존재한다. 모든 존재는 빈약하건만 그는 풍요롭다.
그가 황제라면 그외 모든 것들은 다 거지다.

시간이 지나 공이 무르익게 되면 몸 밖에 또 다른 몸이 있어,

그대 속에서 이 빛의 회전이 정착되고 결정화되었을 때, 그대는 몸
안에 있는 또 다른 몸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흙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신으로, 신성(神性)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형태가 없으며
둔감하지도 않고 예민하다. 그것은 죽지 않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일부이다. 빛을 내쉬고 들이쉬는 방법을 알아야만 이 두번째 몸은 태어난다.
호흡을 하며 어떻게 빛을 들이쉬고 내쉬는가를 알았을 때, 또 하나의
몸, 빛으로 가득찬 그 몸은 태어나는 것이다. 또 다른 몸은 어둠에서
깨어나 밝음이 되고, 흙과 중력의 일부가 아닌 신의 은총이 된다.
그것은 무거워 가라앉지 않고 가벼워 날아오른다. 그것은 무게가 없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그대는 날아오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말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는 것이다. 그때 날아오른 온 하늘
과 무한은 그대의 것이다.

마치 무의 가운데 유가 있는 것과 같다. 백일공을 마친 후라야
참 빛이 출현하여‥‥‥

처음에는 그 빛이 거의 상상으로 보일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오직 백 일 동안의 수행을 마친 후라야 참 빛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얼마나 공을 들이느냐에 달려있다. 꼭 백 일이라는 말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겉으로만 공을 들이다면 그것이 백 일이 될지 아니면 백 년이
걸릴지, 또는 백 번의 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의 전존재가
그 빛에 몰입하고 헌신하고 무릎꿇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용의가
있다면 백 일 후에 참 빛이 출현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상상처럼 보일 것이다. 상상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을 때만 그릇된 것이다. 상상이
진실과 손을 잡았을 때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 된다. 처음에 그대는
그 빛을 거울 속의 허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마음이 그것을 투영시키고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처음에는 상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곧 그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대는 막 진실이라고 하는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 돌린
것 뿐인데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는 반응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무를 사랑으로 쓰다듬었을 때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반응을 느꼈을 때, 그대는 그것이 자신의
착각 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무는 반응했는데 그대가
진실을 깨닫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뿐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대할 때,
나무도 사랑으로 응답한다. 사랑에 대한 응답은 항상 사랑이다. 만약
사랑이 사랑으로 응답받지 못한다면 그 사랑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
다른 것이 가면을 쓰고 사랑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친 후라야 그것은 신화(神火)가 된다.

백 일 동안 집중해서 노력을 해야 그것은 영혼의 불(神火 : spirit
fire )이 된다.

백 일이 지나면 빛 속에서 자연히 일점의 양광이 출현하여‥‥‥

 

* SCAN0013.PCX *

처음에는 그 빛을 포착하기가 어렵다. 단지 희미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간혹 출현했다가 때로는 자취를 감춘다. 그 빛은 아주
희미해서 사라지기 쉽다. 그러나 서서히 그 빛은 모아진다. 그것이
양광(:광극 : light-pole)이 되는 것이다.

흘연히 진종자(眞種子)가 생성된다.

그때 바로 양광의 중심에 진종자( Seed-pearl )가 있다.
그것은 마치 부부의 교합(交合)으로 잉태가 되는 것과 같다.
바로 그것이다. 그대 내면의 남성과 여성이 교합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내적 성교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탄트라( Tantra )다. 내면의 남성과
여성이 서로 사랑하여 서로에게 용해되어 간다. 이제는 더 이상
따로 떨어져 존재할 이유가 없다.
어떤 여자와 사랑을 한다면 그대는 이내 분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하게 될 것이다. 바깥 여자와의 관계라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반발하게 될 것이다. 바깥 남자와의 관계도 헤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잠간 하나된 상태를
맛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면적인 합일 (合一)이라면 분리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붓다는 끊임없는 오르가즘 상태에 산다. 내면의 남성과 여성이 계속해서
사랑을 한다. 힌두교 사원에 있는 쉬바링가( Shiva-linga)를 보라.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링가( Linga)의 바로 밑에는 여성의 부위를
상징하는 요니( Yoni )가 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내적인 만남을
상징한다. 프로이트 학파가 주장하듯 단순히 남근 숭배사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이다. 내면의 양극성(兩極性)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 만남이 일어나면 그대는 새롭게 태어난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니고데모( Nicodemus )에게 말한 "그대가 거듭나지 않고는
·.·" 의 의미이다. 기독교도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개의치 말라.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그대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예수는
탄생을 이야기한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드위자( Dwija:twice-
born )라고 한다. 그대는 다시 태어났다. 외부의 여성과 사랑할 때는
자식이 태어나지만 내면의 남성과 여성이 사랑할 때는 그대 자신이
어린 아이가 된다. 그대는 부모인 동시에 어린아이가 된다. 새로운 삶,
붓다의 삶, 영원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고요히 하여 기다려야 한다‥‥‥

잉태가 되었다면, 즉 그대 내면의 남성이 내면의 여성을 꿰뚫음을 느꼈다면
이제는 기다리는 일밖에 남은 일이 없다. 마치 산모가 커다란
환희와 기도와 희망을 가지고 아홉 달을 기다리듯 그대는 기다려야 한다.
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 필요도 없다. 행위는 끝났다.
남성은 활동을 상징한다. 빛을 회전시키기 위해서는 남성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잉태가 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활동할 필요가 없다.
휴식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명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오직 기도만이 남게 된다.
명상이 없이는 기도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기도는 명상의 정점이다.
명상이 꽃이라면 기도는 그 향기다. 그대는 먼저 명상을 끝마쳐야 한다.
사람들은 묻곤 한다. 기도가 길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명상들이 아쉬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기도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가 맞을 준비가 된 다음이다. 그대는 온갖 종류의 명상을 거쳐가야 한다.
이것들은 맑게 씻어내는 과정들이다. 이것이 바로 충족되어져야
할 그대의 남성적인 부분이며, 그때 여성적인 부분도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즉 잉태가 되는 것이다.
잉태가 된다는 것은 기도로 가득찬다는 것이다. 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력은 끝이 났고 이제 그대는 유윤자적하다. 이것이 바로
도인들이 말하는 '행위를 통한 무위( inaction through action )'이다.
그대는 빛을 회전시키기 위해서 갖은 시도를 해왔다. 그런 집요한
노력 끝에 성공을 하였고 그대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결정화되었다.
내면의 남성과 여성이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가 된 것이다.
태아는 거기에 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 밖에 할 것이 없다.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기다려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이다.

원화( primal transformation )되는 중에는 양광)이 주재한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그대가 잉태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그대는
내면의 광휘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둠이 아닌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 뿐만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도
그대 주위의 오라를 보게 될 것이다.

원화(元始返本)되는 중에는 양광이 주재한다.

여인이 잉태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잉태한 여인을 감싸고 있는
어떤 오라( aura)를 본 적은 없는가? 그 여인의 눈과 얼굴,
그리고 존재에서 흘러 나오는 빛을 본 적이 없는가? 바로 그와 똑같지만
그대가 신을 잉태했을 때는 그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의 일인 것이다.
그대는 광휘가 보일 것이다. 눈을 감을 때면 그대 내부는 온통 빛,
근원도 없고 어디서 흘러 나오는지도 모르는, 아주 차거운 달빛과도 같은
그러나 무한히 매혹적이고도 마력이 있는 그런 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그 빛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자들을 그릴 때 오라도 그려 넣는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예수를 만났다 해도
그의 오라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볼 수 있었다.
분명히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은 그 오라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있었고 감겨져 있었다. 붓다 주위에
있던 제자들은 스승의 둘레에 감도는 오라를 볼 수 있었다.
이 비밀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드러난다. 그것은 너무나 은밀하여
아무에게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무관한 사람에게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친밀하고, 더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들, 그리고 열려 있고
섬세한 사람들에게나 드러나는 것이다.

원화되는 중에는 양광이 주재한다. 물질세계에서 그것은 태양이 되지만
인간의 경우 그것은 양 눈에 해당한다.

내면에서 빛이 자라기 시작할 때, 그대의 눈은 불타오르고 취한듯이 보인다.
눈 속에 춤이 있다. 미묘한 빛이, 완전히 다른 질의 것이 눈
속에 들어온다. 이제 눈은 사물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기도 한다.
도( Tao )는 型갤 수는 없지만 함께 나눌 수는 있다. 그러한 공유(共
有)는 바로 눈을 통해서 일어난다.
내가 그대들을 입문시키고자 할 때는 나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대들의 눈을 보고자 해서이다. 나의 눈이 그대들의 눈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대들의 양 눈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제3의 눈에 가 닿고자
해서이다. 제3의 눈을 만나면 그리고 그대가 열려 있다면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데, 그 눈을 만나면 나는 제자가 출현했음을 알아 차린다.
만약 만나지지 않으면 나는 그냥 언젠가는 그대가 제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바램일 뿐이다. 그렇게 바라면서 산야스( Sannyas )를 주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는 수천 가지의 일에
달려 있다. 내가 제자를 바라볼 때 그의 제3의 눈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올 곳에 온 것이다. 이제 다른 곳에는 갈 필요가 없다.
이제는 어떠한 스승도,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가 없다. 그대는 집에
이른 것이다.
이 에너지는 바깥으로(아래로) 흘러나가 버린다.

눈 속에서 흘러 나오는 에너지는 보통 밖으로 흘러나가 버린다.
밖으로· 와 1아래로' 는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금단(金丹)의 도는 전적으로
역법( backward-flowing method )에 기초하고 있다.

보통 에너지는 밖으로, 즉 아래로 흐른다. 그대는 그것을 안으로,
주위로 돌려야 한다. 에너지(氣)가 일단 그대에게로 향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에너지의 동그라미가 된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새로운 차원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대는 위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대의 삶은 더 이상
수평적이지 않다. 이제는 새로운 길, 수직의 길을 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수직의 길에 있다. 이 세상에서 그를 볼 수는 없다. 그를
만날 수 없는 것은 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수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먼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듯이 수평의 차원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내게 와서 이야기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보여 준다면 우린 믿겠소"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눈
뜨는 치료조차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는 눈먼 사람에게 빛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수평적인 삶에서 수직적인 삶으로 옮겨 가야 한다. 수직으로 향하는
삶, 그것은 바로 산야스가 의미하는 모든 것이다. 일단 빛이 위로 향하기
시작하면 황금 꽃( Golden flower)은 피어 오른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대 내부에 꽃 같은 건 없다. 꽃( flower)은
단지 피어남을, 황금빛( Golden )은
그것이 빛으로 충만함을 나타낸다.

빛의 회전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명심하라. 빛의 회전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면 그것은 진실이 된다. 사실 처음부터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것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이
환상처럼 보였던 것 뿐이다.

상념( 撫ough% )을 순화시키면
날아오를 수 있지만 정념(desires )에
집중하면 타락한다.

도교에서는 아래로 향하는 에너지를 정념(情念:精)이라고 한다.
위로'와 '상념(想念:神)은 안으로 향하는 에너지를 가리키는 도교의 상징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여기서의 상념이란 그대들이 말하는 소위 사념
(思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상념은 욕망이 정화된 상태의 순수한
사고의 에너지(thought-energy, 神)를 의미한다. 그것은 욕망이 정화되어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이제 그대는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 무엇을
구하고자 할 때에만 에너지는 밖으로 흐른다. 집과 돈, 권력, 여자와
남자, 이것과 저것을 구할 때 그대는 밖을 향해 흐른다. 더 이상 욕망이
일어 나지 않게 되면 상념만이 남게되어 그것은 안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러도 절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욕망이 사라져 버린 상념은 안으로 향하며 욕망에 가득 찬 정념은 밖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욕망을 사라지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상념은 적고 정념이 많으면 하도(下道)에 빠진다.

배우는 이가 상념은 적고 정념이 너무 많으면 그는 세상으로 전락한다.

반조(反塡)와 선정(譯定)을 통하지 않고는 정각(正覺)을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되돌리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욕망이 제거된 생각(潛念)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니며,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더 이상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파탄잘리가 말한 사마디
( Samadhi ), 선가에서 말하는 사토리( Saton ), 도교에서 말하는
도태(道諦 . Crystallization ), 바로 그것이다. 밖으로 향함과 안으로
향함이 균형을 이룬 상태인 것이다. 이제 에너지는 소실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으로 흘러 나갔다가는 되돌아 온다. 마치 새가 아침에는 하늘로
날아 올랐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등지로 되돌아 오듯이.
그대의 에너지가 다시 등지로 되돌아 오게 하라. 되돌아오지 않고 계속
밖으로만 흘러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에너지가 가득 고여
내부에서 무한한 힘이 용솟음쳐 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 힘을 통해서만
직관( intuition )이 일어난다. 그 힘 속에서 영혼의 불꽃(神과
힘이 생겨나며 그 힘 속에서 일점의 광극(陽光)이 태어난다. 그 힘 속에서
홀연히 참된 씨앗(眞種子)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부부의 교합으로 잉태가 되는 것과 같다. 이 때가 되면
고요히 하여 기다려야 한다.

명상이 끝나는 곳에 기도의 시작이 있다. 명상하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도(道) 공부의 전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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